#7.
“좀 떨어지죠?”
엘레나가 손으로 데미안의 어깨를 꾹, 누르며 거리를 벌렸다. 데미안이 쉽사리 뒤로 물러나며 피식피식 웃었다.
“로르크 영애와 대공자 부부를 부른 일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엘레나는 차가운 웃음을 머금었다.
“듣자 하니 대공자비가 대공자의 수업에 난입했다던데.”
로에나를 보낸 뒤에 그녀의 시녀에게서 슬쩍 언질을 받은 터라 확실한 내용이었다.
로에나가 제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대공이 입막음을 한 게 분명했다.
‘어린애인 줄로만 알았더니 제법 되바라졌어.’
로에나의 시녀이니 분명 로에나가 시켰을 일.
엘레나는 그녀가 교묘하게 대공과의 약속을 지키면서도 제게 단서를 제공한 상황이 몹시 유쾌했다.
그저 성격 고약한 며느리라고 생각했던 지난날을 다시 생각해 볼 정도로.
데미안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런. 그것까지 알고 있었습니까?”
“모른 척하시긴. 제게 숨기려던 사람이 그리 대놓고 서재로 부르셨어요?”
“저야 뭐, 대공비께서 내게 무관심하다 여겼으니 말입니다.”
“흐응.”
엘레나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흘렸다.
그때 문득 아까 제 볼에 발칙하게 뽀뽀하던 로에나가 떠올랐다. 뽀뽀하는 척하며 아주 요망한 조언을 했었다.
‘저 말고 아버님께 직접 물어보시는 게 어떨까요? 아버님은 관심 종자라 어머님이 안 주던 관심을 주면 술술 불걸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우리 아버님은 관심 종자예요’라니.
관심종자란 단어가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그리 좋은 단어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엘레나의 무거운 발걸음을 대공의 침실로 옮기기엔 충분한 흥밋거리였다.
대공의 반응이 꽤 궁금해졌으니까.
‘쯧, 요즘 애들은 자기 맘대로 단어를 만들어 대지. 어른들이 못 알아듣는 걸 은근히 즐기는 것 같다니까?’
엘레나는 그것을 단순히 젊은것들의 은어 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나 얼굴에는 언짢은 기색보다는 즐거움이 완연했다.
확실히 로에나의 말대로 대공에게 관심을 주자 슬슬 입질이 오고 있었다.
좀만 구슬리면 와르르 쏟아 낼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잠시 후, 엘레나는 다시 데미안을 추궁할 생각으로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왜 그렇게 쳐다봐요?”
엘레나는 데미안의 표정을 보곤 얼굴을 와락 구겼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가 싶더니 그녀의 말에 얼굴을 찡그렸다. 이윽고 데미안이 딱딱하게 말했다.
“방금 왜 웃었습니까?”
“이젠 웃는 것도 뭐라 하는 건가요? 나 참.”
엘레나가 웃음을 거두며 냉랭하게 반응했다.
그러자 데미안이 다시 거리를 좁히더니 한쪽 팔을 벽에 기댔다.
“왜 웃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부인.”
“어울리지 않게 부인이란 말은 거두시죠.”
엘레나가 다소 앙칼지게 답하며 다시 그의 어깨를 뒤로 밀었으나 이번엔 밀리지 않았다.
‘애같이 굴기는.’
데미안이 움직일 생각을 않자 엘레나가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거의 입을 맞추기 직전까지 다가가자 데미안이 파드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이, 이게 대체……!”
“아니, 난 또 자꾸 바짝바짝 다가오길래 키스라도 하고 싶은가 했죠.”
“나는 그런 게 아니라……!”
데미안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엘레나는 그가 그러든가 말든가 다시 거리를 벌린 채 짝다리를 짚었다.
어차피 여러 여자 만나는 자가 키스 하나로 파드득 떠는 꼴이 우스웠다. 엘레나가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알아요. 당신이 나랑 닿는 걸 나 못지않게 굉장히 싫어한다는 거.”
“…….”
“제국 어디에서도 모를 거예요. 우리가 실은 초야조차 치르지 않은 완전한 남남이란 걸 말이죠.”
엘레나가 비아냥거리며 데미안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데미안은 변명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엘레나가 그의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손을 올린 채 물었다.
“입맞춤당하기 싫으면 어서 말해 봐요. 서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러곤 톡, 하고 장난스럽게 데미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 * *
“다녀왔어?”
나는 슬그머니 복귀한 한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네, 작은 마님.”
“어머님 반응은 어때?”
“언짢아 보이시진 않았어요. 근데 도통 속을 알 수 없어서. 제대로 알아들으신 걸까요?”
“글쎄…….”
내가 말꼬리를 늘이는 찰나 방에 시녀 비비안이 들어왔다.
“아가씨! 방금 대공비 전하께서 대공 전하의 침실에 들어가셨어요!”
“쉿! 비비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소란이니? 게다가 아가씨라니. 작은 마님이 된 지가 언젠데.”
곁에 있던 슈리가 비비안을 나무라자 비비안이 입을 샐쭉였다. 나는 비비안에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정말로 들어갔어? 응?”
“그렇다니까요? 도통 서로의 침실엔 드나드는 법이 없던 분들이 별일이네요.”
비비안의 목소리가 아까보단 줄어들었다.
“혹시 합방이라도 했다가 괜히 아이라도 생기면…….”
한나가 염려스럽게 말하자 나는 단호하게 도리질했다.
“합방 아니야. 분명 다시 나올 거야.”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한나와 비비안, 슈리가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긴. 직접 책으로 봤지. 그 두 사람, 철저한 비즈니스 커플이라고.’
나는 이 말을 굳이 하지 않고 배시시 웃기만 했다.
어차피 대공비를 대공의 침실로 들어가도록 유인한 건 나였다.
아키드는 내가 대공비에게 뽀뽀한 것만 알았지 그녀에게 귓속말까지 흘린 줄은 몰랐다.
대공비도 뒤이은 뽀뽀에 당황해 얼굴을 붉혔지만 아마 내 귓속말을 곱씹으며 생각이 많아졌을 테지.
‘그러고 보면 시부모님 관계가 몹시 신기하단 말이지.’
원작에서도 두 사람은 사이가 계속 나빴다.
서로 말도 잘 안 걸고 마주치면 으르렁거리기 바쁘다고 할까.
그런데 또 합심할 때는 어찌나 마음이 잘 맞는지.
‘뭐, 그래서 비즈니스 커플로 그 오랜 세월 유지한 거겠지만.’
나는 시부모에 대한 생각을 지워 버렸다.
미리 한나를 시켜 대공비에게 단서를 슬쩍 흘렸으니 뒷일은 알아서 흘러가리라.
애초에 나는 대공과 대공비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둘 다 얻을 생각이지.’
대공과 대공비 마음에 모두 들려면 어느 한쪽 편을 드는 모양새를 취하면 안 되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말하지 않고 대공비가 대공에게서 듣도록 만든 것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해. 뒷일은 두 분이 알아서 하라지.’
나는 묵은 일을 끝낸 사람처럼 악랄하게 웃었다. 그러자 비비안이 말했다.
“어머, 작은 마님 또 이상하게 웃으셔.”
“내 웃음이 뭐 어때서?”
“저번부터 자꾸 입을 이렇게 꿈틀거리며 웃으셔서 그렇죠.”
“그, 그럴 수도 있지.”
나는 비비안이 흉내 낸 얼굴을 보고 기겁하며 물러났다. 그러자 비비안이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아가씨가 웃음이 많아져서 보기 좋아요.”
“맞아요. 저는 작은 마님 웃는 모습이 제일 좋더라.”
이에 한나가 실실 웃으며 맞받아쳤고.
“우리 작은 마님 미소는 돈 주고도 못 사지요, 암요.”
슈리가 너스레를 떨었다.
“다들 왜 이래, 새삼스럽게.”
나는 내게 쏠린 관심이 무척 낯뜨거워져 괜스레 새침하게 반응했다.
한나와 비비안, 슈리는 모두 에이프릴 성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시녀들이었다.
물론 내가 그녀들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로에나에게 가장 믿을 만한 심복임은 변함없었다.
성격 더러운 로에나의 비위를 맞출 정도로 노련한 시녀들이었다.
처음에는 혹여라도 내가 로에나가 아닌 것을 눈치챌까 봐 걱정했는데, 지나친 기우였다.
그녀들은 오히려 내가 예전 같은 모습을 되찾은 것 같다며 기뻐했다.
그동안은 사춘기가 일찍 온 것처럼 이상했다나.
물론 그녀들 기준이겠지만, 어쩌면 로에나도 본래부터 막돼먹은 게 아닐지도 몰랐다.
새롭게 변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더욱 날카로워졌던 거라면 아예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래도 로에나가 아키드를 괴롭힌 건 용서 못 하지만.
나는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 입을 열었다.
“정 궁금하면 대공 부부 침실을 염탐하고 오든가. 난 어머님이 다시 자기 침실로 돌아간다에 한 표.”
갑작스러운 내기 제안에 세 사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잠시 후, 한나가 물었다.
“작은 마님, 이젠 저희 주머니까지 털어 가려고 그러세요?”
“누가 돈내기하재? 꿀밤 내기해.”
“에이, 어떻게 저희가 작은 마님의 이마를 때리겠어요.”
슈리가 파드득 떨며 만류했다. 나는 예의 그 악랄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자극했다.
“겁나는구나?”
“어쩜……!”
비비안이 승부욕이 발동해 드릉드릉했다. 슈리가 풉,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작은 마님이 원하시니 할 수밖에요. 나중에 아프다고 우시면 안 돼요?”
“슈리야말로 내 매운 꿀밤에 별 보러 갈지도 몰라.”
“와아, 무서워라.”
슈리는 하나도 겁나지 않는다는 얼굴로 키득거렸다.
내기가 성사되고 난 후. 대공 부부의 침실을 조용히 염탐하고 돌아온 한나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대공비께서 자기 침실로 돌아가셨다네요.”
“예쓰!”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폴짝폴짝 뛰었다. 그러곤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딱밤 놓을 준비를 했다.
“딱 대.”
“작은 마니임…….”
슈리가 앓는 소리를 하자.
“에이, 마님 손이 매워 봤자 얼마나 매우려고?”
비비안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고.
“저부터 맞을까요?”
한나는 겁도 없이 먼저 나섰다.
“후후후.”
자고로 내기에서 봐주기란 없었다. 나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별 보러 가자, 얘들아.”
다음 날. 한나, 비비안, 슈리의 이마에는 붉은 밤톨 자국이 선연했다.
다른 사용인들이 의아해하며 물어봐도 그저 ‘별을 봤어……’ 하는 해괴한 소리만 할 뿐이었다.
그랬다.
어린 주인에겐 자비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