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6)화 (6/177)
  • #6.

    내 유쾌한 대답에 대공비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아내 역할이라고? 네가 말이니?”

    딱 봐도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긴 시집온 이래로 사고를 치면 쳤지 아키드를 챙긴 적이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오히려 가만히 있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뭐, 진짜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보시면 알게 될 텐데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어머님.”

    “……그래서 무얼 하려고? 아내 역할이란 게 무엇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니?”

    “그건…….”

    내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허락 없이 누군가 들어왔다.

    아키드였다. 나는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

    아키드는 나를 한 번 힐끔 보고는 엘레나에게 정중히 말했다.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들어오라 허락한 적 없는데.”

    대공비가 언짢은 기색을 폴폴 풍겼다. 아키드는 대공의 미니미라고 할 정도로 외모를 빼닮았다.

    대공과 달리 순정남이었으나 풍기는 이미지 자체는 무척 비슷했다.

    대공비는 그런 아키드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아키드는 내 앞을 슬쩍 가로막으며 말했다.

    “아내가 불려 갔다고 전해 들어서요.”

    “내가 며느리도 마음대로 부르지 못하니?”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그가 내 손을 꼭 붙들어 뒤로 물렸다. 마치 나를 지켜 주려는 것처럼.

    대공비는 마주 잡은 우리의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 역시 아키드가 나를 구해 주러 온 상황에 얼떨떨했다.

    ‘안 그래도 되는데…….’

    나는 그가 와 준 상황에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려 했다.

    보호받는 기분, 최고다!

    대공비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언짢은 심기를 드러냈다.

    “누가 들으면 내가 새아가를 잡아먹는 줄 알겠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래. 어차피 물어볼 건 다 물어봤으니 그만 물러가렴.”

    대공비가 손을 휘휘 저었다. 어차피 얻을 건 다 얻었다는 몸짓이었다.

    “가요.”

    아키드가 나를 끌었다. 나는 멀뚱히 서 있다가 퍼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잠깐만요.”

    “……?”

    나는 아키드를 뒤로한 채 대공비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대공비가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가래도?”

    “어머님, 잠시 귀 좀…….”

    내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자 그녀가 움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곤소곤 귓속말을 했다. 최대한 아이처럼 사랑스러운 말투로.

    “어머님, 좋은 꿈 꾸세요. 로에나 꿈꾸면 더 좋고요.”

    “…….”

    대공비가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보았다. 대뜸 친한 척하니 어이가 없는 듯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볼 뽀뽀를 쪽, 하며 무어라 더 속닥거리고 해맑게 인사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님!”

    “너, 너 이게 대체…….”

    기습 뽀뽀에 대공비가 얼굴을 화르륵 붉힌 채 상체를 뒤로 물렸다.

    뒤에 있는 아키드 역시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나는 그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헤실헤실 웃었다.

    대공비는 사실 아이를 좋아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자식을 낳고 싶어 했으나 사실 그녀의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

    아이를 낳으면 본인이 죽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하여 대공비는 그걸 숨기고 대공과 선을 그으며 살아온 것이었다.

    대공의 바람기를 눈감아 주고 사생아인 아키드를 받아들인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원작 속 로에나가 좀 더 살가운 성격이었다면 대공비의 예쁨을 받았을지도.’

    안타깝게도 아키드는 열세 살에 대공령에 끌려온 뒤로 아이답지 않게 늘 의기소침한 채로 살았다. 죽은 듯이 살았다는 쪽에 가까웠다.

    대공이 사고 쳐서 데려온 자식인 만큼 대공비의 미움을 받을까, 지레 겁먹고 숨죽여 지낸 것이다.

    하필 며느리인 로에나까지 성깔이 고약하니 대공비는 대공자 부부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게 달라질 거야.’

    나는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미 이전 삶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 양부모에게서 독립한 뒤론 줄곧 홀로서기였다.

    ‘눈칫밥 먹고 자란 짬은 어디 안 가지.’

    아키드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알랑방귀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이젠 진짜 가겠습니다, 어머님.”

    나는 고사리 같은 손을 모아 깍듯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곤 쪼르르 아키드에게 다가가 손을 덥석 잡았다. 뒤에서 대공비가 헛웃음 내뱉었으나 의식하지 않았다.

    “가요, 아키드 님.”

    “…….”

    아키드는 멍한 얼굴로 대공비에게 꾸벅 묵례하곤 방을 나섰다. 혼이 쏙 빠진 모습이었다.

    이후 침실 앞 로비에 다다랐다. 아키드와 오래 있고 싶어 일부러 천천히 걸었지만 아쉽게도 거리가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갈 차례.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고개를 꾸벅 숙여 작별을 고하고 내 방으로 가려 했다. 그때였다.

    “부인.”

    아키드가 들어가려는 나를 불렀다. 뒤를 도니 그의 표정이 사뭇 굳어 있었다.

    “왜요?”

    “그…… 아까 별일 없었습니까?”

    아키드가 입술을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일이라뇨?”

    “어머니께 불려 가면 늘 화가 잔뜩 나지 않았습니까.”

    “아.”

    나는 아키드의 말에 소설 속 장면이 떠올라 얕은 탄성을 내뱉었다.

    로에나가 대공비에게 크게 깨지고 돌아온 날이었다.

    {“부인, 괜찮습니까?”

    “내가 괜찮아 보여요?”

    “…….”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당신을 만나고 내 인생이 엉망이 되었다고.”

    “어머니께 많이 혼났습니까. 제가 대신…….”

    쨍그랑―!

    “내 몸에 손대지 마, 이 쓰레기야!”

    “부인…….”

    “부인이라고도 하지 말라고! 당신 같은 사생아랑 결혼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니까.”}

    아키드가 위로 차 말을 건네자 로에나는 불같이 화냈었다.

    비수 같은 말을 잔뜩 내뱉고 나서야 돌아서던 그녀였다.

    아마도 그랬던 내가 오늘따라 조용하니 의아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용기 내 준 거구나. 나를 두둔해 주려고.’

    대공비를 특히 어려워하는 그로서는 그 자리에 간 것 자체가 엄청난 용기를 낸 것이었다.

    나는 그의 배려가 좋아서 배시시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입니까?”

    “그럼요. 무슨 일이 있었다면 어머님께 굿나잇 뽀뽀는 안 해 드렸을 거예요.”

    “아…….”

    아키드는 굿나잇 뽀뽀라는 말에 움찔했다. 뒤늦게 아까 그 상황을 떠올린 듯했다.

    방금까지 그 일로 넋이 나가 있었으면서. 그가 뒷머리를 여러 차례 매만지며 우물쭈물했다.

    나는 아키드가 무어라 끝맺을지 몰라 머뭇거리는가 싶어 먼저 작별 인사했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제 생각해 주신 거죠?”

    “…….”

    “시간이 늦었어요. 좋은 꿈 꾸세요, 아키드 님.”

    “아.”

    내가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가 얕은 탄성을 내뱉었다. 꼭 할 말이 더 남은 사람처럼.

    “왜요?”

    그게 의아해 고개를 갸웃하니 그가 빠르게 얼버무렸다.

    “아닙니다. 아무 일 없었다면 됐습니다. 그럼.”

    아키드는 까닥 고개를 끄덕이곤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어쩐지 싱거운 반응인지라 홀로 남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 * *

    늦은 시간. 대공비가 대공의 개인 침실을 찾아왔다.

    “대공비께서 여긴 어쩐 일이신지?”

    데미안이 비뚜름한 미소를 지은 채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먼저 그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온 탓이었다.

    데미안과 엘레나의 침실 사이엔 두 개의 문이 존재했다.

    두 문의 다른 점은 한쪽은 늘 잠겨 있다는 것.

    물론 잠긴 문은 엘레나 쪽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문을 열고 그의 침실에 올 적은 무척이나 드물었다.

    대개는 싸움을 걸기 위한 방문이었다. 하여 데미안은 그녀가 웃는 낯으로 직접 문을 열고 행차한 상황이 몹시 흥미로웠다.

    이번엔 무슨 일로 제 속을 박박 긁으려 하나, 사뭇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제가 못 올 곳에라도 왔다는 뜻인가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엘레나의 뾰족한 반응에 데미안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부정했다.

    엘레나는 그런 그의 느물느물한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쯧, 찼다. 그러곤 문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용건을 꺼냈다.

    “손님방을 정리했다 들었어요. 이젠 로르크 영애에게 질린 모양이죠?”

    비아냥대는 말투에 데미안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그녀가 찾아왔을 때부터 로르크 영애에 관해 이야기할 줄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로르크 영애가 자주 머물던 처소를 정리하라 시킨 게 오늘 아침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침실까지 찾아올 정도로 그녀의 기분을 언짢게 할 만한 일이었던가.

    ‘내 연애사엔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데미안은 엘레나의 얼굴빛을 유심히 관찰했다. 평소보다 조금 붉은 볼이 유독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것이 딱히 그의 애첩이 쫓겨난 것에 대한 기쁜 기색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것보다는 좀 더 유쾌한 쪽에 속한 것 같았으니까.

    ‘하면? 무엇 때문에 저리 볼이 붉은 거지?’

    데미안은 자꾸만 볼을 매만지는 엘레나를 가느스름한 눈으로 쳐다보며 답했다.

    “예. 이젠 베스티아가 하델루스 성에 올 일은 없을 겁니다.”

    “어째서요?”

    “……언제부터 제 정사에 관심이 많으셨는지요?”

    “오해하고 계시네요. 전 대공의 일거수일투족에 무척이나 관심이 많답니다.”

    물론 당신의 불행한 일에 한해서요.

    엘레나는 뒷말을 꼭 숨긴 채 방긋 웃었다. 데미안은 그녀의 유쾌한 얼굴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셨군요. 저는 대공비께서 제 일에 그리 관심이 많으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만.”

    “이제라도 알든가요.”

    엘레나가 껄렁하게 대답하며 새침하게 웃음을 흘렸다.

    데미안이 한동안 그 얼굴을 보다 느릿하게 대꾸했다.

    “그냥…… 질렸습니다.”

    “하면 왜 대공자 부부 앞에서 그녀를 잘라 내셨을까.”

    슬슬 꼬여 내듯 질문하자 데미안이 피식 웃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엘레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엘레나는 피할 생각이 없는지 당돌하게 눈을 맞춘 채 ‘어서 변명해 보시지?’ 하는 기색을 띠었다.

    어느새 사람 한 명이 가로막을 만한 거리만큼 둘 사이가 가까워졌다.

    데미안이 턱을 들어 저를 주시하는 엘레나에게 툭 내뱉었다.

    “알고 싶습니까? 내가 왜 그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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