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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5)화 (5/177)
  • #5.

    침실 안에는 우아하게 앉아 있는 아리따운 여인이 있었다.

    금발에 붉은 눈. 황족 특유의 백금발이 영롱한 색을 발했다.

    붉디붉은 눈동자는 마주치면 쨍, 하고 몸이 굳어 버릴 듯이 예리했다.

    그녀의 위용에 살짝 겁이 나려 했으나 위축되지 않고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부르셨어요, 어머님?”

    “별일이구나. 네가 내게 어머님이라고 하고. 평소엔 대공비 전하라 하며 선을 긋지 않았었니?”

    아, 그랬어요? 몰랐는데.

    진작 말씀하시지.

    나는 당황해 눈을 도르르 굴렸다. 그러고 보니 대공이 ‘아버님’ 소리를 듣고 유난히 눈을 크게 뜬 것 같기도 했다.

    그냥 내가 갑자기 평소랑 다르게 행동해서 왜 저러나, 하고 쳐다보는 줄 알았는데, 호칭 때문이었나.

    아직 로에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탐색이 덜 끝난 상황이었다.

    그나마 아키드는 개인 침실이 연결된 공간에서 제법 마주쳤지만 대공 부부는 아니었다.

    정기적으로 식사를 함께한다고는 들었는데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호칭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흐음. 하지만 이미 아버님, 어머님이라 말해 버렸는데 번복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어차피 아키드를 이 집의 사랑받는 아들로 만들려면 며느리인 내 역할이 중요했다.

    나까지 아키드처럼 대공 부부를 내외하면 진전이 없을 터.

    ‘원래 얼굴에 철판 깔고 행동하면 상대가 아무 말 못 한댔어.’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냥 이제부터라도 친해져 볼까 해서요, 어머님.”

    “친해지다니? 난 너랑 친하게 지낼 생각이 없는데.”

    대공비가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웃는 얼굴로 맞대응하니 할 말이 없었다.

    ‘나보다 더 심한 철면피가 있었네.’

    나는 매정한 대공비의 태도에 어색해하면서도 웃음은 거두지 않았다.

    “그래서 용건이…….”

    “여전히 성격이 급하구나. 이리 와 앉아 얘기하지.”

    대공비가 제 앞의 의자를 눈짓했다. 취침 전에 마시면 좋을 캐모마일차가 마련되어 있었다.

    나름대로 잠자리를 배려한 듯했다. 쭈뼛쭈뼛 앞에 앉으니 시녀가 차를 따랐다.

    이미 욕조에 몸을 푹 담갔던 뒤라 한껏 노곤한 상태였다. 해서 의지와 상관없이 졸음이 몰려왔다.

    하품이 나오려 해 꾹꾹 참는데 대공비가 입을 열었다.

    “어제 대공의 서재에 불려 갔다지. 무슨 일 있었니?”

    “그냥, 별일 없이 잘 지내냐고 부르셨어요.”

    “그래? 듣기론 그날 서재에서 로르크 영애가 울며 끌려 나갔다던데…….”

    “하암. 네.”

    “……졸리니?”

    대공비가 날카롭게 묻자 나는 얼른 도리질했다.

    “아녀.”

    “졸린 것 같은데. 발음이 어눌하구나.”

    “네…… 실은 졸려요.”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크게 하품을 했다. 아무래도 열두 살의 몸인지라 쉽게 피로해졌다.

    이를 본 대공비가 쯧, 혀를 차며 얼른 말을 이었다. 곧 죽어도 그냥 가서 자란 소리는 안 한다.

    “그날 서재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나는 양 볼을 세게 짝! 때려 정신을 차린 뒤 대답했다.

    “아뇨. 없었어요.”

    그것에 대공비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졸린 걸 어떻게 해.

    사실 대공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란 것에는 대공비도 포함이었다.

    대공과 대공비 사이는 무척 안 좋아서, 같은 침실임에도 방을 나누어 사용했다.

    물론 나와 아키드도 마찬가지였다. 침실 문을 열면 로비가 등장하고 또 다른 문이 두 개 나온다.

    오른쪽이 내방이고, 왼쪽이 아키드의 방이었다. 그 사이에 로비를 나가는 문이 하나 있는 구조였다.

    대대로 정략혼을 하던 곳인지라 성 구조 자체가 비즈니스 부부에게 어울리도록 설계되었다고나 할까. 물론 나한테는 무척 걸리적거리는 구조지만.

    ‘잠에서 막 깬 아키드 얼굴 한 번만 보게 해 주세요.’

    대공비는 내가 시치미를 떼자 집요한 시선을 보냈다.

    아직 서재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 서재 안에는 대공의 사람만 있었다. 안쪽의 대화를 바깥의 사람이 듣지 못했을 터.

    ‘알고 부른 게 아니라 날 떠보려고 불렀구나. 아직 정확한 내막까지는 모르는 게 분명해.’

    아마 아키드보다 내가 더 입이 가벼우니 날 부른 듯했다.

    평소 로에나는 살살 꼬드기면 술술 부는 깃털 같은 주둥이를 가졌었으니까.

    특히 아키드와 관련된 것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그의 흠 잡기를 좋아해서 그랬다. 역시나 대공비가 살살 달래듯 물었다.

    “하면 로르크 영애는 왜 울며 갔을까?”

    “글쎄요…….”

    내가 눈을 도르르 굴리며 말꼬리를 늘이자 대공비가 재촉했다.

    “뭐든 괜찮단다.”

    글쎄 말할 수 있는 게 딱히 없단 말이죠.

    나는 눈을 도르르 굴리며 그녀의 애간장을 녹였다. 잠시 후, 말할 수 있는 것이 떠올라 대답했다.

    “아! 대공께서 로르크 영애에게 더는 찾아오지 말라 엄포를 놓으셨어요. 그래서 울며 갔나 보네요.”

    대공이 말하지 말라던 건 학대와 관련된 일이었다.

    로르크 영애가 대공에게 차였다는 건 말하지 말란 적이 없었다.

    엘레나는 놀라 두 눈을 깜빡였다. 로르크 영애는 대공이 꽤 오랫동안 아끼던 애첩이었다.

    이렇게 단칼에 내쳐질 만한 여인은 아니기에 제법 놀란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그들의 뒤를 캐도록 단서를 준 셈이었다.

    대공이 차인 게 아니라 찬 거라고.

    “흐음, 그러고 보니 오늘은 로르크 영애가 오지 않았구나.”

    “자존심이 상해서 오지 않는 게 아닐까요? 보통 싸우면 아버님이 찾아가곤 했으니까요.”

    그랬다. 우리 시아버님께선 아랫도리가 자유분방한 만큼 마음까지 태평양처럼 넓어서 아끼는 정부에겐 살살 녹으셨다.

    심지어 옛 애인이 울며 찾아와도 일단 달래고 나서 돌려보내는 게 대공이었다.

    그걸 빌미로 질척거리는 여인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네가 보기엔 대공이 어떻게 할 것 같더냐.”

    “으음.”

    “대공이 진심인 것 같니?”

    대공비가 또다시 떠보듯 질문을 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래 봤자 3일 후엔 다시 지지고 볶을 것이라 예상하는 듯했다.

    “로르크 영애는 미련이 남아 보였어요. 어쩌면 곧 찾아올지도 몰라요.”

    “그렇겠지. 특별한 사유 없이 이별을 통보받았으니 그 성격에 가만히 있을까.”

    엘레나가 조소하며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나는 순진무구하게 말했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공께서 로르크 영애를 다시 찾는 일은 없을 거예요.”

    “어떻게 확신하니?”

    “아버님 눈이 이렇게 쪽 찢어졌었거든요.”

    내가 양손으로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사나운 표정을 짓자 엘레나가 풋, 웃었다.

    “대공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사실인걸요.”

    “흐음.”

    엘레나의 기분이 아까보다 좋아 보였다.

    눈엣가시였던 로르크 영애가 내쳐졌다니 기쁜 걸까? 휴, 하고 안심하려는 찰나.

    “한데 아키드는 어디 아프니?”

    “네?”

    “대공이 직후에 의원을 보냈다던데. 시녀의 말로는 아키드의 방으로 갔다고.”

    “그건…….”

    아무래도 대공이 아키드의 상처를 확인하려 의원을 들인 모양이었다.

    분명 온몸에 있는 멍을 보고 기함했겠지. 그간 로르크 남작이 건드린 건 이마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경과를 지켜보지 않고 다음 날인 오늘 바로 로르크 남작을 자른 것을 보면 대공이 분노한 게 확실했다.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 걸까?’

    나는 대공비를 힐끔 쳐다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아키드가 로르크 남작에게 학대당하고 있던 걸 모르는 듯했다.

    알았다면 내게 질문하는 게 아니라 곧장 대공에게 갔을 테니까.

    그동안은 남작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체벌을 가한 터라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몰랐다.

    각방이래도 한 침실 구역 안에 있는 원작의 로에나조차 아키드가 학대당하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이마가 찢어진 건 남작의 실수였다. 만약 내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아키드는 앞머리를 내려 숨겼을 테고, 아무도 모르게 지나갔을 것이다.

    그 이후엔 로르크 남작이 과감해져 결국 대공비에게 꼬리를 잡혔을 거고.

    하지만 원래부터 아키드에게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대공비가 그의 앞머리 변화까지 파악하진 못했을 터.

    ‘아직 모르는 거야. 아키드가 학대당하고 있던 것도, 대공이 로르크 남작 남매를 내친 진짜 이유도.’

    “왜 말이 없니?”

    대공비는 내가 대답하지 않자 서늘하게 쳐다보았다.

    원래 로에나였다면 술술 말해도 이상할 게 없는데 내가 입을 꾹 다문 탓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눈치 없이 말하면 대공의 미움을 살지도 모른다.

    위험 부담을 안고 정보를 알려 줄 정도로 나와 대공비의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한참 생각에 잠긴 나는 천진하게 눈을 깜박이며 대꾸했다.

    “그야, 아키드 님 방에 제가 있었으니까요.”

    “응?”

    “의원은 절 찾아온 거예요. 물에 빠진 후유증은 없나 살피려고요.”

    당당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자 그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너희 부부는 결혼 이후 한 번도 합방한 적 없지 않니?”

    “그렇긴 하죠.”

    근데 그건 어머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대공비와 대공은 결혼식 이후 딱 한 번의 초야만 치르고 각방을 쓴 채 내외하고 있으니까.

    나는 그녀가 무어라 역공하기 전에 얼른 선수 쳤다.

    “사실 물에 빠진 뒤로 아키드 님이 좀 달라 보였어요.”

    “…….”

    “아키드 님이 절 무척이나 걱정했다고도 들었거든요. 절 구한 것도 아키드 님이었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니?”

    엘레나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내가 무슨 꿍꿍이인가 알고 싶은 듯이.

    나는 그런 그녀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아내 역할에 충실하려고요!”

    최애의 아내 역할, 놓치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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