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4)화 (4/177)
  • #4.

    “…….”

    아키드는 내 격한 행동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토록 원하던 걸 주었는데 반응이 영 사나워서였다.

    나는 가까스로 흥분을 진정하며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제가 아키드 님을 여러 번 곤란하게 한 점 인정해요. 하지만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걸 제가 어떻게 믿습니까.”

    아키드가 아랫입술을 짓씹은 채 물었다. 마음속 저변에서부터 나를 믿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매일 이혼해 달라며 시위를 벌이셨잖습니까.”

    “그, 그건.”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버릴 정도로 제가 싫다는데, 놓아주어야죠.”

    아키드가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이대론 안 되겠어.’

    나는 끝없이 구덩이를 파는 아키드에 이마를 쓸며 침음했다.

    아무래도 로에나가 죽으려 한 게 큰 충격이었던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실은 그날, 죽으려던 게 아니었어요. 발을 헛디딘 것뿐이라고요.”

    “하지만 하녀가 분명…….”

    “한나가 잘못 본 거예요. 그 애는 원래 뭐든 크게 반응하죠. 저도 가끔 깜짝깜짝 놀라요.”

    “…….”

    “제가 아키드 님을 싫어한 건 맞지만 제 인생까지 싫어한 건 아니었어요. 죽고 싶던 적은 없다고요.”

    “…….”

    “저 그날 정말 무서웠어요……. 죽을까 봐.”

    내가 처연하게 눈썹을 내리깔자 아키드가 입술을 달싹였다.

    뜻밖의 진실을 접하자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날 아키드 님이 절 구해 주지 않았다면 저는 그대로 죽었겠죠. 그러고 보니 인사를 못 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키드 님.”

    꾸벅 허리까지 숙여 예를 보이자 아키드가 움찔했다. 그가 얼른 나를 일으키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부인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아뇨. 당연하지 않아요. 모든 사람이 그렇게 발 빠르게 행동하진 못해요. 망설이게 되는 깊이에다가 무척 추운 날이었잖아요.”

    내가 눈을 맞춰 배시시 웃으니 아키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가 물었다.

    “……설마 그 일로 마음을 돌리신 겁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느 정도는요.”

    이 정도 대답이 지금은 적절했다. 갑자기 당신이 좋아졌다느니 같은 발언은 오히려 아키드의 경계심만 높일 테니까.

    낯 가리는 고양이에겐 차근차근 다가가는 게 중요하다. 그러다 옆자리를 내어 주면 게임 끝이고. 흐흐흐.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손을 꼭 붙들며 말했다.

    “그러니 이혼하자는 말은 거두어 주세요.”

    “……후회하실 겁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예요!

    “그런 기회 필요 없어요. 저는 아키드 님이 이혼해 달라고 노래 불러도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내가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그렇게 호로록 까먹을 줄 알고?

    최애의 부인으로 빙의하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

    저 망할 서류 다시 가져오기만 해 봐라!

    내 단호한 말에 아키드는 나를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았다. 갑자기 변한 내 태도가 어지간히 의아한 모양이다.

    잠시 후.

    “……알겠습니다.”

    아키드는 내 손을 내치지 않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일단 믿어 주려는 것 같았다.

    “정말요?”

    “예. 그러니 이 손 좀…….”

    “와아!”

    나는 막 손을 거두려는 그를 더욱 붙잡고는 기분이 좋아 붕붕 흔들었다.

    하마터면 이 집에서 쫓겨나는 건가 싶어 철렁했던 차라 더욱 기뻤다.

    어차피 죽을 날 받아 뒀는데 아키드 얼굴 한 번 더 보고 죽고 싶다고. 내가 자꾸만 손을 흔들자 아키드가 입을 열었다.

    “대체…….”

    “네?”

    “아닙니다.”

    아키드는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방실방실 웃었다. 어쨌든 큰 고비는 넘긴 듯하다.

    * * *

    내가 로에나 하델루스에게 빙의한 건 하필 로에나가 시집온 지 막 1년이 지난 무렵이었다.

    그것도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패악을 떨다 한겨울의 호수에 풍덩 빠졌다지.

    이곳 델루스는 하델루스 대공령으로 제국 북부에 위치했다. 대체로 날씨가 서늘하며 한겨울에는 몹시 추웠다.

    그러니 한겨울의 호수에 빠진다는 건 ‘나 죽을 거야!’ 하는 것과 같았다.

    다행인 것은 하델루스 성안에 있는 인공호수라 깊지 않았다는 것.

    한나의 비명에 달려온 아키드가 나를 구했다고 들었다. 평소 자신을 업신여기던 부인인데도 그는 무조건적으로 부인을 지켰다.

    ‘아마도 로에나를 가족이라 여겨서겠지.’

    아키드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책임감이 높아 못돼먹은 부인이래도 존중하려 애썼다. 어쨌든 그녀도 그의 가족이자 아내였으니까.

    ‘어쩌면 그때 진짜 로에나는 죽었을지도 모르겠네.’

    한나는 내가 꼬박 한 달 동안 누워 사경을 헤맸다고 했다. 그리고 숨이 멎어 통곡하던 때에 내가 돌연 깨어났다고.

    ‘이상해, 로에나는 지금 죽을 여자가 아니었는데…….’

    내가 읽은 《나를 품어 주세요》 속에서 로에나는 훗날 전염병에 걸려 죽어야 했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니란 말이지.

    ‘아니면 내가 사고를 당하면서 영혼이라도 바뀐 걸까?’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로에나는 패악을 일상처럼 부렸었다.

    호수에 빠진 것도 아키드를 괴롭히기 위함이었겠지. 하필 그때 우연히 나와 사고 시기가 겹쳐 이렇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이미 빙의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니 그런 일도 가능하겠지.’

    아키드는 로에나가 무모한 짓을 벌일 때마다 괴로워했다. 자신이 부족해 부인이 자꾸만 엇나간다 여겼으니까.

    그리고 로에나는 그의 아픔을 즐겼었다. 그를 무척이나 혐오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후작가의 막내딸로서 안하무인으로 길러진 여인이었다. 하여 사생아라는 이유만으로 아키드를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뭐, 어쨌든. 이젠 내가 로에나니까.”

    나는 욕조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장미 꽃잎이 은은한 향을 내뿜으며 욕실 안에 그윽하게 퍼졌다.

    사실 내가 로에나 하델루스에게 빙의한 것을 알았을 때 무척 기뻤다. 《나를 품어 주세요》는 내 인생작이었고, 아키드는 최애였으니까.

    나는 전생에 입양아였다. 양부모님은 좋은 분이셨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양부모님에게 친딸이 생겼을 때, 나는 더 이상 그들의 가족이 아니었다.

    그저 밥 식구였지.

    그래서였을까. 열세 살에 핏줄을 인정받아 하델루스가에 입적하게 된 사생아 아키드의 삶이 내 심금을 울렸었다.

    생부와 계모 사이에서 끊임없이 생존을 위협받고, 주변을 경계하며 살아야 했던 게 나의 삶과 비슷했으니까.

    ‘어쩌면 신이 나보고 아키드를 도우라고 시간을 주신 걸지도 몰라.’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죽었어야 할 몸이었다. 그런 나를 몇 년 더 살게 한 데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 판단했다.

    로에나는 앞으로 7년 뒤 죽는다. 7년이면 아키드가 대공령에서 자리 잡도록 도울 시간은 충분했다.

    원작 속 로에나처럼 패악을 떨지도 않고, 오히려 아키드가 부모님께 인정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내조하리라.

    딱히 삶에 미련은 없다. 지난 삶에서 원 없이 고생하다 죽었으니 이번 생은 주님이 주신 보너스라 생각하면 그만.

    ‘어차피 덕질할 거 행복한 덕후가 되는 삶도 나쁘지 않잖아?’

    문제는 아키드와 시부모님이 나를 몹시 못마땅해한다는 건데…….

    “흐음, 누구부터 꼬셔야 하나.”

    남편은 책임감만 강해서 뭐든 혼자 떠안으려는 미련 곰탱이요.

    시아버지는 아랫도리 자유분방하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왕자병 말기 환자인 성격 파탄자1이요.

    시어머니는 왕년에 ‘하인트의 미친개’라 불리던 무시무시한 성격 파탄자2라네.

    ‘자, 누가 더 공략하기 쉬울까나.’

    어느 것 하나 쉬운 상대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욕조에서 나와 머리를 말리던 때였다.

    시녀장 아리아 백작 부인이 찾아와 말했다.

    “작은 마님, 마님께서 찾으십니다.”

    와우, 성격 파탄자2가 나를 왜?

    * * *

    나는 머리를 적당히 말린 후, 잠옷 차림으로 엘레나 하델루스의 침실로 향했다.

    그녀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고 하니 의아했다.

    내내 조용하기에 그냥 지나갈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평소에 아키드는 물론 나에게도 관심 하나 없던 시어머니인지라 다소 걱정스러웠다.

    ‘혹시 로르크 영애를 물 먹인 일로 부른 걸까? 내가 일을 망쳤다고 생각해서?’

    원작에서 엘레나는 바람피우는 남편을 무조건적으로 용인하는 부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걸 이용해 대공을 엿 먹이거나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쪽이었지.

    아마 엘레나도 대공이 아동학대와 체벌 금지 법안을 제출해 심사 중이란 걸 알고 있을 터.

    원작에선 법안이 체결된 뒤에 엘레나가 로르크 남작의 학대 증거를 제시해 대공을 압박했었다. 대가로 대공령의 광산 하나를 받았었고.

    그게 나중에 노다지 땅이 돼서 엘레나는 큰 이득을 보았었다. 광산에 정령의 가호가 나타났으니까.

    정령의 가호를 받는 땅은 비옥한 땅이 된다.

    이 세계는 그런 초자연적인 힘이 지배하는 곳.

    정령의 가호를 받은 후 광산의 마석이 평소 양의 다섯 배가 넘게 채굴되어 엘레나는 사재를 두둑이 챙겼었다.

    엘레나의 침실 앞에 당도하자 아리아 백작 부인이 내가 왔음을 알렸다.

    “마님, 작은 마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해.”

    대공비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