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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3)화 (3/177)

#3.

베스티아는 제 오라비가 궁지에 몰리는 듯하자 눈물을 뚝뚝 떨구며 가녀린 체했다.

그녀의 고운 금발이 어깨 아래로 사르륵 흘러내렸다.

“흐윽! 그만하세요.”

“베스티아, 울지 말거라.”

대공이 달래니 그녀가 말을 이었다.

“대공 전하, 제 오라비는 누구보다 수업에 열의가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래, 남작의 성정은 내가 잘 알지.”

“맞아요. 아마 오해가 있었을 거예요. 대공자비님께선 뒤늦게 들어와 상황을 모르고 결과만 보고 탓한 거겠죠.”

“오해라…….”

“오라버니 말로는 대공자님께서 예습을 잘 해 오지 않는 데다 거짓말을 일삼았다 했어요. 체벌을 거부해 난처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

“아마 간단한 체벌을 할 생각이었겠죠. 다들 그러잖아요?”

대공은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것이 제 말에 동의하는 거라 여겼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알아서 무덤을 파 주시네.’

나는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로르크 영애의 말은 가정교사가 학생을 때리는 게 당연하다는 건가요?”

“필요하다면요. 어릴 때 저도 마담에게 자주 매질을 당했지만 그걸 학대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답니다. 그건 사랑의 매였으니까요!”

로르크 영애가 연극 속 주인공처럼 극적인 목소리를 토하며 대공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제 경험담까지 겸하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애석하게도 그게 더욱 대공을 자극하는 줄은 모르나 보다.

‘응. 잘 가요, 대공의 스쳐 지나가던 애인1 양.’

나는 가볍게 애도를 표했다. 잠시 후, 대공이 슬며시 그녀를 떼어 놓았다.

“대공 전하?”

베스티아가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대공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탓이었다.

“오늘은 이만 가거라. 피곤하구나.”

대공이 축객령을 내리자 베스티아가 눈만 끔벅였다.

아직 나를 혼내는 모습을 보지도 않았는데 돌아가라고 하니 어이가 없는 듯했다.

“잠시만요, 대공 전하. 저 이대로 가나요? 정말로?”

평소였다면 로르크 영애가 아양을 떨면 기꺼워했겠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하델루스 대공이 냉정하게 일축했다.

“가 보래도.”

“싫어요! 분명 대공자비님을 혼내 주신다고 약속했잖아요!”

베스티아가 고개를 도리질하며 떼를 쓰자 대공의 눈빛이 달라졌다.

“로르크 영애,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며 거부했었지?”

“그, 그건…….”

달라진 분위기에 베스티아가 움찔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내가 아무래도 영애를 너무 좋게 본 모양이군.”

“네?”

“앞으로 내 성에 드나들지 않았으면 좋겠군. 올 적마다 기거하던 방도 치우겠다.”

“그, 그런!”

베스티아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파드득, 떨었다.

대공이 고개를 까닥이자 근처에 대기하던 시종이 그녀에게 정중히 말했다.

“가시지요, 로르크 영애.”

“성에 드나들지 말라뇨? 그게 무슨 뜻인가요, 대공님?!”

무슨 뜻이긴, 이제 너랑 재미 그만 보겠다는 뜻이지.

나는 불난 집 구경하듯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끌어내.”

“예. 대공 전하.”

어영부영하던 시종들이 냉큼 대답하곤 로르크 영애를 끌어냈다.

“대공! 대공께서 어찌 제게 이러실 수 있어요!”

베스티아가 눈물로 호소했으나 대공은 듣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베스티아가 시종에게 끌려 나가는 모습을 유유히 지켜보았다.

베스티아는 방금 아주 큰 실수를 했다.

하긴 제 얼굴을 꾸밀 줄만 알았지, 대공이 무엇을 하며 돌아다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을 때부터 그녀는 위태로운 검날 위에 선 셈이었다.

최근 대공은 아동학대와 체벌 금지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한창 심사 중인 때에 아들의 체벌 현장을 목격하고도, 그 대상이 애인의 오라비라는 명목으로 묵인해 줄 순 없으리라.

아마도 이 일이 새어 나갈 것을 두려워해 로르크 남작 남매의 입을 막고, 치워 버리려 할 터.

연애는 연애고, 일은 일이었다. 아무리 아랫도리 자유분방한 대공이라 해도 제 일에 방해가 되는 애인은 필요 없었다.

게다가 근래에 로르크 영애의 징징거림이 도를 넘어 성가셔한 것도 한몫했다.

슬슬 질리던 차에 알아서 찰 구석을 마련해 준 격이었다.

‘휘우, 이걸로 똥차 남매 하나는 해결이요.’

원작에선 대공비가 아키드의 학대 사실을 알고 대공을 협박해 광산을 얻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연한 계기로 대공이 먼저 알게 된 상황.

원래는 대공비가 대공을 엿 먹이기 위해 비축해 둔 일이었지만 무슨 상관이랴. 당장 내 남편이 매 맞고 있는데 막아야지.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숨긴 채 속으로 키득거렸다.

그 모습을 아키드가 이상하게 쳐다보았으나 시침을 떼었다. 그때 대공이 나를 불렀다.

“새아가.”

“네. 아버님.”

“이번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입도 벙긋하지 않을게요.”

내가 영특하게 대꾸하자 대공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둘 다 이만 가 봐라.”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아키드가 정중히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아버님! 좋은 밤 되세요!”

내 명랑한 인사에 대공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갑자기 쟤가 왜 저렇게 친근하게 구나, 싶은 듯했다.

이대로 굿나잇 뽀뽀라도 했다간 기겁할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아키드의 손을 덥석 붙들며 발랄하게 외쳤다.

“가요, 여보!”

그러자 이번에는 아키드가 붙잡힌 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대공 또한 내 행동에 무척 놀란 듯했다.

‘아, 맞다. 우리 금실 나쁜 부부 콘셉트였지.’

로르크 남매를 처리해 기쁜 나머지 생각 없이 살갑게 굴어 버렸다.

게다가 여보라니.

로에나는 아키드를 그리 부른 적이 없었다.

‘너무 속에서 나오는 대로 말해 버렸네.’

이미 그를 만나기 전부터 여보, 당신, 내 거 하던 버릇이 통 고쳐지질 않았다.

이제 와서 잡은 손을 도로 빼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 하여 그냥 철 가면을 쓴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나는 손을 빼기는커녕 바르게 고쳐 잡았다.

그러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으니 대공이 말했다.

“둘이 언제부터…….”

“네?”

“아니다. 부부니 당연하지. 그만 나가 봐라.”

대공은 손을 건성으로 휘휘 내저었다. 나는 다시 한번 묵례하곤 아키드와 함께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 내내 아키드는 조용했다. 그리고 침실에 도착했을 때.

“대체 무슨 생각인 겁니까?”

아키드가 굳은 얼굴로 내게 따져 물었다.

“무슨 생각이라뇨? 제가 남편을 지키는 것도 문제가 되나요?”

“그런 뜻이 아니라…….”

아키드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갑자기 그를 보호하려 드는 게 무척 이해가 안 되는 얼굴이었다.

하긴, 나도 이런 식으로 휘뚜루마뚜루 캐릭터 붕괴를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천천히 다가가려 했는데 남작 놈이 열받게 한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잠시 후, 아키드가 침착하게 물었다.

“일부러 그랬습니까?”

“무얼요?”

“로르크 영애를 자극한 일이요.”

아키드는 말 돌리지 말라는 듯이 요점을 찍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시치미를 떼었다.

“자극이라뇨? 저는 그냥 평상시처럼 군 건데요?”

원래 로에나는 평소에도 이 정도 패악은 심심하면 부리곤 했잖아?

새삼스럽게 왜 그러냐는 듯이 대꾸하자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 눈에 선했다.

나는 이런 작은 배려에도 상대의 의중을 의심하는 그가 조금 안타까웠다.

“그것보다 다친 곳은 괜찮아요? 다행히 내 말대로 치료는 한 것 같은데.”

그의 이마에 손을 뻗으려 하자 그가 내 손을 가볍게 잡아 저지했다.

“괜찮습니다.”

“괜찮은지, 아닌지는 제가 보고 판단할게요.”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부인께선 저를 싫어하지 않았습니까.”

검은 머리칼 사이로 아키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얕게 흔들렸다.

잡은 손길은 무척 조심스러워서 조금만 움직여도 떨어질 듯했다.

말투는 쌀쌀맞아도 누구보다 부인을 생각하는 그였다.

원치 않는 정략혼으로 어린 나이에 시집오게 된 것에 부채감을 갖고 있었으니까.

로에나 하델루스는 그런 그의 약한 마음을 알아채 마음대로 활보하며 그를 괴롭게 했었다.

‘나였다면 그의 마음을 잘 알아주었을 텐데…….’

결혼 후 1년 내내 패악을 부린 게 있으니 싫어한 적 없다 부정하는 건 오히려 의심을 부추기는 일이었다. 하여 곧장 인정했다.

“맞아요. 저는 아키드 님을 싫어……했어요.”

싫다는 말에 표정이 굳어지는 그를 보니 마음이 아파 뒷말을 대강 얼버무렸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냉큼 해명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이건 믿어 줬으면 좋겠어요.”

“……제가 싫어 물에 빠져 죽으려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남편이 사생아라서, 곁에 있고 싶지 않아서 말이죠.”

아키드는 스스로 입에 담기도 힘든 말을 꾸역꾸역 내뱉었다.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게 무척 힘겨워 보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로에나 하델루스는 원래대로라면 그를 무척 혐오했다. 그가 사생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리고 그녀가 물에 빠진 그날, 내가 로에나가 되었다. 내가 빙의했다 한들 이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랬었죠.”

“부인이 물에 빠진 것을 봤을 때 제 기분이 어땠을 거라 생각합니까?”

아키드는 내 여상한 반응에 화가 나는지 주먹을 꼭 쥔 채 말을 이었다.

“부인이 저를 싫어해도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스스로 죽으려 하다니요. 대체 저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 생각인 겁니까.”

아키드는 그때가 생생한지 고개를 쳐들어 손으로 눈을 가려 숨을 골랐다.

“잠시만요, 아키드 님…….”

나는 아키드가 눈에 띄게 흥분한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다소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손을 뻗었으나 그가 몸을 뒤로 물렸다. 아키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처럼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마십시오.”

그는 그 말과 함께 개인 침실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도로 나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소원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받으십시오. 부인께서 바라셨던 것이니.”

“이건…….”

“이혼 서류입니다. 원하시는 위자료는 얼마든지…….”

“그건 안 돼요.”

나는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혼 서류를 북북 찢어 버렸다.

혹시라도 재활용할까 봐 잘게 잘게 자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흰 종이가 눈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아키드는 그런 내 행동을 보곤 두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당황해 아무 말도 못 하는 아키드를 향해 선언했다.

“이혼은 절대 안 돼요. 이혼하기 싫어요.”

내 머릿속에서 비상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낙장불입, 반품 불가, 이혼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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