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화 (1/177)

#1.

죽었더니 인생작 속 최애의 전 부인에게 빙의했다.

완전 개꿀이라고 생각하던 것도 잠시, 나는 전 부인이 요절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필 빙의한 시점도 결혼한 지 막 1년이 지나 부부 사이가 냉랭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포기는 금물!

이건 신이 주신 기회이리라.

‘오, 아무렴 어때. 이왕 덤으로 사는 거 죽기 전까지 최애 얼굴이나 실컷 구경할래.’

성공한 덕후의 삶이 어디 쉽게 이루어지겠나.

애초에 삶에 미련이 없어서인지 죽었다는 게 겁나기보다는 오히려 보너스 삶을 얻은 기분이었다.

어차피 덕질할 거 행복한 덕후가 되자.

그것이 내 이번 삶의 목표였다.

* * *

아키드의 공부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미리 복사해 둔 마스터키를 꽂아 문을 열고는 수업 현장에 난입했다.

그리고 보게 된 속상한 장면.

“부인.”

아키드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꾹 누르고 있었다. 언뜻 보니 손수건이 붉게 물든 것 같았다.

그리고 바닥에 나뒹굴어 있는 깃펜과 잉크 병.

나는 그것만으로도 방금의 요란한 소리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감히 내 아키드의 얼굴에 손을 대? 이거 책으로 본 것보다 더 막돼먹은 놈이었잖아?’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잠재우며 뒷짐 지고 서 있는 로르크 남작을 노려보았다.

그는 불쑥 등장한 나로 인해 다소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표정을 능숙하게 감추었다.

“대공자비님,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한눈에도 수업에 난입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키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왔어.”

‘흉터 생기면 안 되는데……. 국보급 얼굴인데.’

얼른 저 흰 얼굴에 소독약을 바르고 연고를 발라 주고 싶었다.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별일 아니니 돌아가시죠.”

로르크 남작이 여유롭게 웃으며 나를 다독였다. 하지만 그의 말이 나를 더욱 화나게 했다.

‘작은 사고라고?’

나는 내 남자의 찢긴 이마를 안쓰럽게 보던 것도 잊고 로르크 남작을 노려보았다.

“감히 대공자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놓은 주제에 그걸 작은 사고라고 하는 건가?”

“이런, 오해를 하셨군요. 저건 체벌 중에 벌어진 단순한 사고였습니다.”

“체벌 중 벌어진 단순한 사고?”

“예. 대공자님께서 체통 없이 체벌을 거부하다 홀로 넘어지신 바람에 애꿎은 깃펜에 얼굴이 베인 것이지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로르크 남작?”

“제가 거짓말을 한다 생각하시군요. 자, 대공자님께서 말씀해 보시죠. 제 말이 틀립니까?”

로르크 남작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아키드를 쳐다보았다.

아키드가 대답하지 않고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동안 남작에게 온갖 폭언과 폭행을 겪었던 아키드에게 있어 그는 무서운 존재였다. 분명 지금껏 그래 왔듯이 감추려 할 터.

‘그렇겐 안 되지. 내가 또 이 꼴 보며 살 줄 알고?’

나는 냉큼 선수 치듯 소리쳤다.

“이건 체벌이 아니라 학대네!”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로르크 남작이 안경을 추키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신성한 수업 현장에, 그것도 아녀자인 내가 난입한 것도 모자라 자신에게 언성까지 높이니 화가 치미는 모양이다.

“지금 그 말씀,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남작은 지팡이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마치 심판자인 양 위세를 부렸다.

한눈에도 어린 나를 겁주려는 모습이었다.

그가 나와 아키드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건 그의 여동생이 아키드의 부친인 하델루스 대공의 애인이라 가능했다.

대공은 애인에게 무척이나 관대했고, 그녀의 오라비인 남작에게도 후한 대우를 하고 있었다.

그게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질 일인 줄도 모르고.

‘흥, 어차피 시아버지 아랫도리는 자유분방해서 네놈은 한 달 뒤엔 팽당한다고.’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원작을 상기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조소했다.

당연히 남작이 보았고,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마 대놓고 무시한다 여겼을 터.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남작에게 하나도 주눅 들지 않은 채 고개를 뻣뻣이 들었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열두 살짜리 여자애가 고압적으로 굴자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방에나 칩거하던 뒷방 대공자비가 돌연 제 수업에 간섭하는 것도 모자라 무시하려 드니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협박이 아니라 충언입니다.”

남작이 이를 짓씹으며 으르렁거리듯 대답했다. 대공을 등에 입어 기고만장한 행태가 몹시 아니꼬웠다.

원래 호랑이 등에 탄 여우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겁을 먹는다고 생각하며 으스댄다.

동시에 멍청하게도 자신이 호랑이보다 대단한 존재라 착각하곤 한다.

언제든지 호랑이가 마음만 먹으면 발톱으로 여우의 목덜미를 내리칠 수도 있다는 걸 간과하면서.

그런데 이를 어쩌나.

하델루스 대공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인간인데.

지금이야 로르크 영애를 귀애하여 간도, 쓸개도 다 내줄 것처럼 한다지만 어차피 흥미를 잃으면 끝이다.

남작은 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하델루스 대공은 제 권위를 무시하는 것들에는 가차 없었다.

설령 아끼던 애인이라도 목을 벨 수 있는 게 바로 하델루스 대공이었다.

그리고 아키드는 대공가의 유일무이한 후계자이다.

비록 사생아라는 치욕스러운 꼬리표가 있으나, 어찌 됐든 대공의 뒤를 이을 사람임은 분명했다.

대공과 대공비가 아키드를 무시한다고 해서 그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었는데, 그는 참 어리석었다.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근데 감히 내 아키드의 얼굴에 흠집을 내?’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로르크 남작은 실수한 거다.

나는 미래의 일까지 알고 있는 아주 똑똑하고 악랄한 악당이자 아키드빠니까!

감히 악녀의 최애를 건드리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응?

나는 울분을 삼킨 채 아키드의 이마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느 가정교사가 체벌을 빌미로 대공자의 머리를 깨뜨리지?”

내 호통에 아키드의 두 눈에 혼란이 가득했다.

하긴 평소 자신을 혐오하던 부인이 돌연 두둔하고 나서니 놀랄 만도 했다.

‘걱정 마, 아키드. 내가 지켜 줄게.’

나는 아키드에게만 보이게 슬쩍 윙크했고, 그 모습에 아키드는 움찔, 몸을 떨었다.

“머리를 깨뜨리다니요. 언사가 매우 거치시군요, 대공자비님.”

남작은 내가 흥분했다 여겼는지 피식 웃었다.

나 같은 건 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듯한 자신감이었다. 남작이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오늘의 제 체벌이 다소 거친 것은 인정하나 이건 다 대공자님께서 예습을 해 오지 않…….”

이번에는 예습을 핑계 댈 모양이었다.

“예습? 설마 이걸 말하는 건가.”

나는 남작의 말허리를 뚝 끊으며 시녀인 한나에게 턱짓했다.

어차피 날 대공자비 대우도 해 주지 않는 가정교사의 말 따위는 끝까지 들을 필요가 없었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고운 법.

이는 반대로 말하면 오는 말이 험악하면 가는 말도 덩달아 험악해지는 게 세상 이치란 거다.

한나는 내 신호와 함께 이동식 책장을 밀어 남작의 앞에 대령했다.

한눈에도 하루 만에 예습하기엔 벅찬 양. 그나마 아키드가 머리가 좋아 이것을 다 훑을 수 있던 것이다.

문제는 남작은 이걸 모두 토시 하나 안 빠뜨리고 외우라고 했다는 것. 나는 짝다리를 짚은 채 물었다.

“남작은 이것이 하루에 독파 가능한 양이라고 생각하나?”

“원래 대부분의 귀족 영식들은 이 정도 양을 공부합니다. 대공자비님께선 영애라 모르시나 본데…….”

“내가 왜 모르지? 내게도 오라버니가 있는데.”

내가 또다시 말을 잘라먹자 남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제 말을 중도에 막는 것을 몹시 불쾌해한다는 걸. 알고서 일부러 자극하는 거였다. 그가 화가 나 실수하도록.

“아, 그렇지요. 에이프릴 소후작이 있으니 잘 아시겠군요.”

남작은 꿈틀거리는 눈썹을 꾹 누르며 이죽거렸다. 아직까진 견딜 만한 모양이었다.

뭐, 그래 봤자 나의 지옥의 주둥아리를 끝까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는 악랄하게 히죽, 웃었다. 이런 걸 보면 원작 속 악녀도 나쁘지 않았다. 말을 막 해도 쟤는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그래.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자꾸 못 알아들어서 남작에게 보청기를 사 줘야 하나 고민했는데.”

“보, 보청…….”

“내 오라버니의 수업은 시집오기 전에 자주 봤었어. 분명 이것의 반의반의 반도 안 되는 양으로도 벅차했지.”

“안타깝군요. 이 정도는 대부분 다 하는데…….”

남작은 고집을 꺾기 싫은지 억지를 부렸다.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한 반응이었다. 나는 과장된 몸짓으로 입을 가리며 외쳤다.

“헐! 지금 우리 오라버니가 똥멍청이라고 욕한 거야?”

“예? 아니, 제가 언제…….”

“지금 그랬잖아. 대부분 이 정도는 다 하는데 에이프릴 소후작은 그것도 벅차하니 똥멍청이가 분명하다고!”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아, 소후작은 아직 어리시지 않습니까! 충분히…….”

“그치. 우리 오라버니는 이제 열다섯 살이라 어리다면 어리지. 그런데 로르크 남작, 그건 내 남편에게도 해당되는 거 아니야?”

“예?”

“몰라서 멍청한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로 멍청한 거야?”

“무, 무슨……!”

“몰라서 멍청했나 보네. 그럼 친절하게 알려 줄게. 내 남편 나이가 올해 몇이지?”

“그야 열네…… 아.”

로르크 남작은 그제야 아키드의 나이를 떠올리곤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보청기니, 똥멍청이니 같은 말을 쏟아 내니 순간 허점을 보인 것이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 승리를 확신하면서.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남작이 말한 똥멍청이 내 오라버니는 올해 열다섯 살이야.”

“…….”

“남작의 말대로라면 아직 어린 대공자님께서 이 많은 책을 모두 읽고 왔다는 것에 칭찬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대공자님은 장차 대공이 되실 분. 13년 동안의 학습 공백을 메우려면 하루가 부족…….”

“헐! 지금 내 남편 사생아라 머리에 든 거 없다고 욕하는 거야?”

“대공자비님! 제가 언제 그런!”

남작이 펄쩍 뛰며 해명하려 했으나 나는 냉큼 말을 이었다.

“실망이네, 로르크 남작. 난 그대가 꽤나 명석한 줄 알았는데…….”

그러곤 그를 위아래로 훑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제 보니 스스로의 부족함은 모르고 학생 탓만 할 줄 아는 똥멍청이 교사였구나.”

그렇게 일갈을 날린 나는 과장된 몸짓으로 혀를 끌끌 차며 마무리했다.

그러자 남작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지금 말 다 하셨습니까?!”

당장에라도 들고 있던 지팡이로 날 내리칠 기세였다.

‘어라,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려 하잖아?’

나는 그가 내 어깨를 붙들기만을 기다리며 눈을 빛냈다.

어디 손끝 하나라도 건드려 봐라. 그야말로 패악이 뭔지 제대로 보여 주리라.

그때였다. 내내 넋 나간 얼굴을 하던 아키드가 나를 두둔하고 나섰다.

“제 아내에게서 물러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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