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 그 마왕과 용사의 상관관계 (33/33)
  • 외전 3. 그 마왕과 용사의 상관관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불공평하단 말이지…….”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햇빛이 부드럽게 내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았다.

    이곳은 마계 경계의 숲에서 유일하게 햇빛이 드는 장소였다.

    “뭐가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부스럭, 무성한 수풀을 헤치며 등에 대검을 멘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이곳에서 만난 유일한 동향 사람이자 마왕을 죽이라는 임무를 천신에게 부여받은 용사님이기도 했다.

    우연히 이 숲의 이 장소에서 마주한 이래로 우리는 항상 같은 시간에 이곳으로 나와 서로와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 시간은 과로에 시달리는 내 온전한 휴식 시간이자 유일한 낙이었다.

    “나는 지금 개인정보 탈탈 털렸는데 천우현 씨는 여동생 개인정보만 털고 자기 이야기는 거의 안 하잖아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천우현을 바라보니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저 얼굴이 아이돌 연습생이 아니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연예계에 손해인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자기 이야기 말해 달라니까요. 나는 지금 내가 무슨 아이돌을 몇 년 동안 덕질했는지, 내가 지금까지 웹소 몇 권을 읽었는지까지 털렸는데 왜 나는 그쪽이 아니라 댁 동생이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를 알고 있냐고요.”

    하도 여동생 이야기만 해 대서 나는 얼굴도 모르는 천세연 씨에게 왜인지 모를 친근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만나면 반가워하면서 인사할 듯. 아마 대화까지 문제없이 통할 듯.

    미간을 문지르며 나는 친절하게 대화의 물꼬를 터 줬다.

    “우현 씨는 어쩌다가 떨어졌어요?”

    이미 나는 새벽에 술 먹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 덮쳐 오는 트럭을 피하다가 싱크홀에 빠져 이곳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한 다섯 번은 했다.

    물론 그 트럭이 환생 트럭인 것 같다는 소리는 뺐지만. 대화 상대가 아무리 봐도 웹소설 안 읽는 갓반인 머글 같았거든. 환생 트럭 밈을 못 알아들을 확률이 90%였다.

    하지만 천우현은 우리의 만남이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자신의 과거를 순순히 털어놓지 않았다.

    내가 저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여동생이 하나 있다는 것, 등에 멘 저 검이 성검이라는 것, 내가 전쟁 자금 털어 댔던 사가시우스 제국의 천신의 신전 호수에 떨어졌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아니, 그러고 보니까 저거 완전 차원 이동 클리셰 아니야? 갑작스럽게 신전 호수에서 나타난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신비한 타 차원 인간.

    그리고 이제 성녀로 추대받고 황태자가 집착하고 성기사랑 썸 타고, 마물 토벌에 힐러로 참가했다가 소드마스터 북부 대공이랑 사랑에 빠지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그 신전으로 떨어졌어야 했어, 젠장.

    미친 듯이 구른 나의 판무 세계관과 달리 상상만 해도 행복한 로판 세계관을 떠올리며 이를 갈자 한숨을 쉰 천우현이 느릿하게 답했다.

    “야간 알바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땅이 푹 꺼지더군요. 그리고 눈 떠 보니 웬 호수 안이었고요.”

    햇빛이 비치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천우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새벽 2시까지 아르바이트라니, 열심히 살았구나. 부모님이 돈 지원을 안 해 주시나?

    그러고 보니 천우현은 이상할 정도로 부모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가끔 부모님 걱정을 하는 것과 꽤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언제나 내가 부모님 걱정을 하면 천우현은 여동생 걱정을 하곤 했다.

    사이가 나쁜 건지, 아니면…….

    역시 직설적으로 묻는 건 좀 그렇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내심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럼 혹시 호수에서 나오고 성녀… 아니지, 남자니까. 성자? 성인?으로 떠받들어졌어요?”

    “아니요. 성자까진 아니고 예언의 용사로 떠받들어졌긴 했죠.”

    으음, 내가 떨어졌어도 성녀 대우는 못 받았겠구나. 똑같이 마왕 잡으라고 했을 듯. 하지만 잘생긴 동료 남정네들과 썸 정도는 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우현 씨는 동료 없어요?”

    “네, 저 혼자입니다.”

    마왕 때려잡을 때는 제국에서 모아 주는 용사 파티가 공식 아니었어? 왜 압도적으로 강한 것도 아니면서 솔로 플레이를 하고 있어?

    하지만 그 대답을 하며 미소 짓는 천우현의 표정이 너무 아련했기에 뭔가 있구나, 라는 걸 직감했다.

    “뭔 놈의 신이랑 제국이 마왕 때려잡으라고 하면서 동료도 안 모아 주고 성검 딸랑 하나 던져 줘? 이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불공정 계약인데?”

    내 투덜거림에 천우현이 고개를 저었다.

    “성검과 함께 축복을 내려 주긴 했습니다.”

    “음, 마신보단 낫네요.”

    재빠르게 태세 전환을 시도했다. 봉인되어 있어서 아무런 도움도 안 준 마신보단 축복이라도 내려 준 천신이 낫지.

    그러자 천우현이 쓰게 웃었다.

    “글쎄요, 이게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저도 모르겠군요. 당신을 죽이기 전까지 저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

    “시간이 처음으로 돌아가니까요.”

    그 말에 입을 틀어막았다. 나를 죽이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다고? 세상에, 저런 잔인한 저주를……! 평생 루프하라는 거야, 뭐야?

    천우현이 회귀를 한 1,800번은 넘게 하면 내게 치명상 정도는 입힐 수 있지 않을까? 한 2천 번 정도 회귀하면 나를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할 수는 있을 듯?

    그런데 사람이 2천 번을 회귀하면 당연히 미치지. 지금도 살짝 지친 기색이 보이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얼마나 회귀했을까? 50번? 60번? 설마 100번?

    “그럼 지금까지 몇 번을 회귀한 거예요?”

    “서른 번이 넘어가면서는 굳이 세지 않아 모르겠네요. 그래도 아마 마흔 번까지는 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솔로 플레이로 오는 것에 성공했구나. 서른 번이면 대충 경계의 숲 루트는 익히고 있을 테니까.

    그래도 예상보다는 적게 회귀했네. 여기까지 오는 데에 50번을 넘기지 않은 걸 보아하니 기본 실력과 재능은 있는 모양이다.

    “가장 많이 갔던 게 마왕성의 성문 앞이었죠.”

    천우현의 말에 눈을 찡그렸다. 용사가 마왕성 성문까지 도달했다면 내게 보고가 들어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회귀 전 이야기인가?

    내 추측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마왕이 없다는 말에 자결했지만요. 출전했다고 들었습니다.”

    대답 대신 볼을 긁적였다. 시기를 계산해 보면 내가 7마계 전쟁을 마무리하러 직접 간 상황 같은데, 이거 내가 사과해야 해?

    아니, 그런데 저를 죽이러 왔는데 제가 자리에 없어서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하는 것도 좀 웃기지 않나?

    내가 혼란에 빠져 있을 동안 천우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고 울부짖는 그의 앞에서 천신은 마왕을 죽이고 돌아오면 돌려보내 준다고 조건을 걸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천우현이 무한 회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나를 죽여야 한다는 소리지.

    천신 진짜 개쓰레기네? 내가 자기한테 뭘 했다고 계속 나를 죽이래?

    내가 천우현이랑 동향 사람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하마터면 2천 번 회귀해서 미치고 흑화한 용사 상대할 뻔했잖아.

    내가 씩씩거리든 말든 천우현은 또 여동생을 떠올리고 있었다.

    “우리 세연이…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남매 사이가 좋았나 봐요? 제 친구는 맨날 자기 오빠랑 싸웠는데, 신기하다.”

    우리 셋 중 유일하게 오빠가 있는 윤세인은 항상 자기 오빠를 엄마 아들, 또는 호메로 칭했다. 하긴, 윤세인 오빠는 윤세인을 돼지로 칭하더라.

    둘이 대화할 때는 오로지 집에 둘만 남은 상황에서 저녁 메뉴 고를 때고.

    그런 남매만 봐 왔던 터라 이런 절절한 남매 사이는 참 신기했다. 윤세인 쪽이 현실 남매고 이런 남매 사이는 로판 육아물에만 나오는 거 아니었어?

    “그럴 수밖에요. 제가 스무 살 때 부모님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터라 여동생이랑 저, 둘만 남았거든요.”

    이 남자, 계속 훅 들어오네. 무한 회귀 축복에, 나를 죽이라는 임무에, 부모님 죽음까지. 나는 천천히 거리를 좁히는 걸 원했지 이런 급전개를 원한 게 아니었는데.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우울한 안색을 한 천우현의 등을 토닥이며 지금이라도 ‘함께’라는 단어를 붙일까, 고민했다. 혹시 나를 죽이고 홀로 돌아가라는 말로 오해할까 봐.

    에이, 설마. 아니겠지. 물론 순순히 죽어 줄 생각도 없지만.

    * * *

    마왕성의 집무실로 돌아와 털썩 의자에 앉자 서류 무더기를 들고 온 안드라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은근 불경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폐하, 요즘 들어 외출이 잦으십니다?”

    “내가 7마계 통일도 이뤘는데 잠깐 마실 나가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 하냐?”

    “그럴 리가요.”

    우두둑 손을 꺾으니 안드라스가 금세 꼬리를 내렸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서류 더미를 털썩 올려놨다.

    “젠장, 전쟁도 끝났는데 뭔 놈의 일은 끝이 없어!”

    서류를 던지며 짜증을 내자 안드라스가 익숙하게 서류를 주섬주섬 주워 다시 내 책상에 올려놓으며 대꾸했다.

    “원래 전쟁은 정복보다 사후 처리가 더 귀찮은 법이죠. 정복하기만 하고 내버려 두는 건 망국의 지름길입니다.”

    그래, 다 좋다. 사후 처리고 뭐고 다 좋단 말이다. 그런데 경계의 숲에 루미나레 서식지가 생긴 것까지 내게 굳이 보고를 해야겠냐고.

    루미나레는 반딧불이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페어리였다. 아마 4마계에서 서식하던 놈들이었는데 전쟁 중에 1마계로 몇 마리 데려왔다나 뭐라나.

    데려온 놈들이 서식지까지 생성할 정도로 잘 자란 게 뭘, 어쨌다는……. 잠깐, 그러면 지금 이 서식지, 반딧불이 숲처럼 되어 있는 거 아니야?

    “우울한 사람에게 예쁜 걸 보여 주면 기분이 나아지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

    내 물음에 안드라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아마 그렇겠죠?”

    그래, 이거다! 완벽한 계획을 세우며 눈을 빛내자 안드라스가 슬쩍 말을 꺼냈다.

    “폐하, 저도 요새 마왕성에만 거의 갇히다시피 머물러 있어 우울한데 예쁜 걸 보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예쁜 거 뭐?”

    “예를 들면 휴가서라든가…….”

    “예쁜 마왕성 로비 풍경 보면서 힐링해라. 세련되어서 감탄이 나올 정도라며.”

    내가 너 숙직실에서 엎드려 자고 있으면 곤룡포 대신 내 로브 정도는 덮어 줄게.

    * * *

    다음 날, 루미나레 서식지에 친히 걸음 한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정도면 괜찮네. 매일 우중충하고 험악하고 미감 최악인 마계에 적응한 나머지 감성이 메마르다 못해 죽어 버린 내 눈에도 퍽 아름다워 보이는 풍경이었다.

    이제 천우현에게 이 풍경을 보여 주면 활짝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으려나? 미남의 웃는 얼굴은 특급 포상이었다.

    물론 내 앞에서 천우현이 웃지 않았다는 건 아니었다. 미소가 죄다 아련하고 씁쓸해서 문제였지.

    오늘 데려올까? 아니면 오늘 예고를 던져서 기대감을 한껏 높여 놓고 내일 데려와?

    곰곰이 고민하며 마왕성으로 돌아가자 애쉬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선 물어 왔다.

    “폐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선물을 주려면 서프라이즈로 갑자기 주는 게 감동일까, 아니면 미리 예고하고 주는 게 더 감동일까?”

    “저는 기대감이 생기니 후자가 더 좋을 것 같아요. 무엇을 주려 하는 것일까, 상상하는 것도 즐겁잖아요.”

    생긋 웃으며 대답하는 애쉬의 말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말 되는데?

    좋아, 그러면 오늘 예고하고 내일 천우현을 데리고 루미나레 서식지로 가야겠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무실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리자 초롱초롱한 애쉬의 눈빛이 보였다.

    눈빛에서 묻어 나오는 왜인지 모를 기대감에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얘는 왜 이래?

    그리고 2시 50분이 되자마자 나는 집무실 문을 박차고 경계의 숲 만남의 장소로 향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은 오후 3시였고 그 후로도 우리는 이 시간에 만남을 가졌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천우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꼭 내가 동화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가 된 기분이었다.

    오후 3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2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라고.

    잠깐, 이게 바로 길들여지는 건가?

    “채현 씨.”

    뒤에서 들려오는 환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오늘도 해사하게 웃으며 나를 반기는 천우현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만 더 환하게 웃으면 예쁠 것 같은데…….

    멍하니 생각하다가 나를 부르는 천우현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 있어요?”

    “아뇨, 일은 무슨. 아, 우현 씨. 혹시 예쁜 풍경 좋아해요?”

    내 물음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천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죠. 혹시 채현 씨도 좋아하나요? 경계의 숲 너머 제국에 아름다운 명소들이 많더라고요.”

    할 수만 있다면 꼭 나에게 그 풍경들을 보여 주고 싶다며 그가 웃었다. 그 말에 내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맞아, 천우현은 마계에서 지낸 게 아니라 제국에서 지냈었지.

    루미나레의 서식지 풍경이 천우현에게는 별것 아닌 풍경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데려갔다가 괜히 실망만 시키면 어떡하지? 내 기색이 침울해지자 천우현이 허둥지둥하며 나를 달랬다.

    “자랑으로 느껴졌다면 죄송합니다. 절대 그 뜻이 아니고 정말 채현 씨랑 그 풍경을 보고 싶다는 소리…….”

    정말 당황하면 아무 소리나 하는구나. 무슨 풍경 보여 주겠다는 소리를 데이트 신청하는 것처럼 하냐.

    천우현 역시 제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알아차렸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숲의 공간을 채웠다.

    “아니에요. 그냥 마계가 X같다는 걸 다시 자각했을 뿐이라서요.”

    내 감성을 메마르게 한 마계를 저주한다. 하긴, 마왕성 보고 세련됐다고 하는 놈들 사이에서 몇백 년을 살았는데 내 감성이 제대로 유지되겠어?

    여느 때와 같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졌다. 노을이 지는 붉은 하늘은 우리가 작별할 시간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야기할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현 씨.”

    내 부름에 천우현이 눈을 깜빡였다. 나랑 비슷하게 눈꼬리가 올라간 눈은 신기하게도 사납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누구는 한평생 인상 사납다는 말만 듣고 살았는데 말이야.

    궁금증과 기대가 담긴 눈을 마주하고 고개를 저었다. 역시 저 눈이 실망으로 물드는 건 보고 싶지 않다.

    “아니에요.”

    그래,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데려가는 게 낫겠지. 괜히 예고했다가 실망만 더 커지면 어떡해.

    우리는 항상 헤어질 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건 우리 둘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그렇게 짧은 휴식을 취하고 다시 마왕성으로 돌아온 나를 반긴 건,

    “뭐? 5마계에서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반란 소식이었다.

    몇만 년 동안 나뉘어 있던 마계를 통합한 터라 반발은 내 생각보다 훨씬 심했다. 큰 대의 따위는 없이 오직 심장 조각을 모으기 위해 마계 땅을 정복했던 나는 이 모든 게 귀찮을 뿐이었다.

    며칠 전 3마계에서도 반란이 일어났기에 이미 그쪽에 군사 세력을 보낸 상황. 보고받은 규모는 꽤 컸기에 아무래도 직접 가는 것밖에는 답이 안 보였다.

    규모를 보아서는 진압하는 데에 며칠 걸릴 것 같았다.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헤집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다릴 텐데…….’

    그렇다고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5마계로 안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천우현은 솔플하는 용사라지만 이쪽은 나라가 내 손에 걸린 왕이라고요.

    마족 한 놈 잡아서 천우현에게 말을 전하라고 할 수도 없고, 편지를 두고 오자니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서 이 만남이 내 약점이 될까 봐 찝찝하고.

    “일단 5마계로 가지. 전력은 다 모였나?”

    “예, 곧바로 출정하시면 됩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와야지, 뭐. 나는 이거 못 막으면 목이 따이는 데 어쩔 수 있나.

    * * *

    “얘들아, 나 좀 집에 가게 해 주라. 나 떠나고 다시 일곱 개의 마계로 갈라지든지 해, 제에발.”

    화풀이하듯 잔당들을 밟으며 한탄을 늘어놓았다. 물론 꿈틀거리다가 축 늘어지는 반란 분자들은 내 말을 듣지 못했다.

    옆에서 안드라스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폐하께서 승하하셔도 이 통일 마계가 유지되도록 만드실 마음가짐을 가지셔야지, 폐하께서 없으면 바로 흩어지는 통일 마계가 무슨 소용입니까?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1마계의 세력이 약해질 거란 걸 고려하지는 않으시는 겁니까?”

    “우와, 숨은 쉬고 말해요?”

    체이스터가 옆에서 깝죽거리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안드라스에게 내뱉다가 뒤통수를 후드려 맞는 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술 회의하는 곳에 난입해서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아스타로드의 손에 달랑달랑 들려 나간 꼬맹이가 벌써 전투에 참전할 정도로 크다니. 세월 참 빠르다.

    저놈은 전술 지도 위에 꽂는 것이 장기 말에서 깃발로 바뀐 이유가 자기라는 걸 알려나 몰라.

    안드라스를 좀 말려 달라는 듯 애절하게 (전)보호자인 나를 돌아보는 체이스터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성년 됐으니까 자기 일은 알아서 하자꾸나, 꼬맹아.

    “빌어먹을 1마계 마왕! 네놈을 저주한, 컥!”

    피를 토하는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5마계 마족은 심장을 꿰뚫려 목숨을 잃었다. 또 저주 하나 더 적립됐겠네.

    처음 봤을 때의 비옥한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전쟁의 폐해로 황폐화한 5마계의 땅을 보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따지고 보자면 오직 내 소원 하나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의 분노는 정당했다.

    하지만 그들의 분노가 정당하다 하더라도 순순히 그들의 손에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으니.

    그리고 당장 집이 아니더라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이 1마계 경계의 숲에 있으니.

    “…보고 싶다.”

    내 아련한 중얼거림에 체이스터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마왕성이랑 페리 보고 싶어여, 폐하. 그런데 저 진짜 다시 북부로 돌아가야 해여? 방금 안드라스 님이 그랬는데 이제 제가 성년이 되어서 폐하 보호가 끝났으니 저 마왕성에서 쫓겨날 거래요. 진짜예여?”

    “압존법 어디에다가 팔아먹었냐? 안드라스가 내 위냐?”

    체이스터의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한 소리 했다. 사람이 감성에 빠질 시간은 좀 주는 게 어떠니, 망할 (전)피보호자 꼬맹아.

    * * *

    그렇게 5마계 반란 진압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1마계로 돌아온 내가 제일 먼저 뛰듯이 향한 곳은 마계 경계의 숲, 만남의 장소였다.

    시간은 이미 3시가 훌쩍 넘어 있다 못해 해가 완전히 저문 상태였기에 딱히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텅 비어 있는 장소를 발견하자 나도 모르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있을 리가 없지.”

    침울하게 중얼거리며 그루터기에 털썩 걸터앉았다.

    내가 이제 이곳으로 안 오는 줄 알고 걸음을 끊으면 어떡하지? 혹시 오지 않는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마왕성까지 왔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한 건 아니겠지?

    온갖 끔찍한 상상들이 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렇게 나는 해가 다시 뜰 때까지 그루터기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새벽 공기를 맞으며 다시 마왕성으로 돌아온 나는 옥좌에 늘어지듯 기대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내일도 없으면 어떡하지?’

    그러면 친히 경계의 숲을 건너 제국까지 가 제국을 쥐 잡듯이 뒤져 천우현을 잡아 오든지, 아니면 와이번 좀 제국에 다시 풀어서 수배령을 내리든지 해야지.

    내 눈빛이 점점 음험해지다가 내가 방금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각하고는 흠칫했다.

    집착 감금물을 극혐하던 내가 이런 집착 광공 같은 생각을 하다니. 역시 마계 공기가 안 좋긴 한가 보다. 내가 집착 광인이 되어 가는 걸 보니까.

    훌쩍 뛰어 내 무릎에 누운 페리가 골골거리며 쓰다듬어 달라는 듯 머리를 마구 들이밀었다. 페리의 귀 뒤를 긁어 주며 중얼거렸다.

    “웃기지, 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내 인생에는 그 사람이 없었는데.”

    고작 며칠 못 봤다고 이렇게 허전할 수가.

    왜 3대 연줄 중에 지연이 들어가는지 알 것 같다. 타지에서 만난 동향 사람이라는 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으니 말이다.

    “내일은 꼭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제국에 또 와이번 풀기 전에 말이야. 황녀도 바친 놈들이 용사라고 안 바치겠어?

    * * *

    “폐하, 혹시 창밖에 뭐가 있습니까?”

    “아니? 왜?”

    “폐하께서 1분에 한 번씩 창밖을 돌아보시니까요.”

    안드라스의 뼈 있는 말에 방금까지 창밖을 보고 있던 시선을 쓱 거뒀다. 오늘따라 시간이 유독 안 가는 것 같았다. 걱정으로 밤을 새운 탓에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미치겠네, 아직도 1시야?”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고 싶어 움찔거리는 몸을 꾹 억누르고 서류에 서명을 이어 나갔다.

    “안드라스, 지금 병력으로 숲 너머 제국이랑 전쟁하는 거 가능하냐?”

    “전쟁 말입니까? 그걸 전쟁이라고 칭하는 것 자체가 마계의 수치죠.”

    얼굴에 비웃음을 건 안드라스는 제국을 깎아내리는 것에 서슴없었다. 야, 제국 애들 울겠다. 살살 패, 살살.

    예전에 공물로 왔던 황녀가 황제 자리에 즉위하고 나서 제국은 자발적으로 꾸준히 마계에 공물을 바쳐 왔지만, 마계 대전이 끝나고 여섯 마계에서 긁어 온 재물이 쌓인 터라 이제 더는 공물이 필요 없었다.

    재정이 풍족해지니 뒤늦게 양심이라는 게 생기기도 했고. 나는 대체 몇 대에 걸쳐서 삥을 뜯은 거지.

    “더는 조공 안 받으시겠다더니, 생각이 바뀌셨습니까? 저야 찬성입니다. 재물은 많이 쌓아 놓으면 좋죠.”

    탐욕스러운 마족다운 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안드라스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됐어. 그런 거 아니니까 삥 그만 뜯자.”

    거기도 오죽했으면 마왕 죽이라고 용사 보냈겠어. 이러다가 용사 양산 아카데미 세워지는 거 아니냐고. 1년에 한 명씩 줄줄이 보내게 생겼다니까?

    펜을 책상에 탁 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이 도저히 손에 안 잡혔다. 아무래도 지금 만남의 장소로 가서 죽치고 있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폐하, 일하다 말고 어디 가십니까!”

    “내가 왕인데 내 마음대로 휴가도 못 내냐!”

    안드라스에게 윽박 한 번 질러 주고는 집무실 문을 박차고 나와 마계 경계의 숲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장면은 내가 항상 앉아 있던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울적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천우현의 모습이었다.

    다행이다. 제국 짓밟고 강제로 안 끌고 와도 돼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천우현이 급히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발견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채현 씨!”

    오랜만에 듣는 내 이름이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 몇백 년 만에 처음 내 이름을 불러 준 것도 이 사람이었지.

    항상 나를 부르는 호칭은 인간, 마왕, 아니면 폐하였으니까.

    그 부름에 머쓱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무어라 설명할지 고민하며 볼을 긁적이고 있는데 갑자기 천우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 어어……? 울어? 당황하며 허둥지둥하자 눈물을 손등으로 쓱 훔친 천우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해성사하듯 중얼거렸다.

    “저는 채현 씨가 제가 질려서 만남을 그만둔 줄 알고……. 저희 마지막 만남 때 채현 씨가 저를 부르고 고개를 저었던 게 계속 생각나서…….”

    “아니, 몇백 년 얼굴 본 마족 놈들도 아니고 같은 고향 사람인 우현 씨가 왜 질려요! 반란! 반란 제압하고 왔으니까 그런 오해는 제에발 하지 마요!”

    다급하게 해명했는데도 천우현의 눈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뚝뚝 떨어졌다. 마음고생이 꽤나 심했던 모양이다.

    그래, 며칠간 잠수 탄 내가 죄인이다. 등을 다독여 진정시켜 주다가 눈물이 겨우 그칠 때가 되어서야 나는 천우현에게 해명할 수 있었다.

    “제가 사실 우현 씨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풍경이 있었거든요. 마지막 만남 때는 그 장소에 데려간다고 예고할까 고민하다가 못 말한 거예요.”

    이렇게 구구절절 말할 계획이 아니었는데! 딱 멋있는 풍경 있다! 말하고 그다음 날 짠! 하고 데려가는 게 내 계획이었는데!

    이걸 5마계 잔당 놈들이 다 망쳤어……! 서러움에 나까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계획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나는 천우현을 이끌고 터덜터덜 루미나레의 서식지에 도착했다.

    “여기예요.”

    무성하게 늘어진 덩굴을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전에 보고 감탄했던 풍경이 다시 내 눈앞에 펼쳐졌다.

    햇빛이 비치지 않아 어두컴컴한 숲속에서 반짝거리는 작은 빛 덩어리들이 허공을 자유롭게 유영했다.

    반딧불이보다 환한 빛을 내는 루미나레는 날개를 퍼덕이며 제가 가는 길마다 빛 가루를 흩뿌렸다. 흔적이 별 무리처럼 짙게 남았다가 사르르 흩어졌다.

    가만히 내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다가 힐끗 천우현을 돌아보았다. 감흥 없는 표정이면 좀 마상일 것 같은데. 물론 어느 정도 각오했긴 했지만.

    그는 멍하니 빛이 반짝이며 유유히 비행하는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보였던 반응이랑 똑같았다.

    그제야 나 역시 한결 편안하게 웃으며 툭, 천우현을 쳤다.

    “어때요?”

    “제가 이제까지 본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워요.”

    환하게 미소 지은 천우현이 나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 미소를 마주하자 하고 싶었던 말이 머릿속에서 싹 지워졌다.

    “그러게요, 참 예쁘네요…….”

    그쪽 미소가. 그냥 입에서 되는대로 나오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뒤늦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끝말은 안 해서 다행이다.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유왕이 왜 웃지 않는 포사 앞에서 그렇게 비단을 찢었는지 알 것 같다. 처음 그 고사를 봤을 때는 별 머저리가 다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 취소다.

    좋아, 저 미소를 다시 한번 보기 위해서 마계를 다 뒤져서라도 여기 못지않은 명소를 찾아내야겠어.

    최소한의 인력으로 부하들을 굴릴 계획을 짜고 있던 내 귀에 나직한 천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국으로 돌아가도 이 풍경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군요.”

    그러네, 마계 관광할 때가 아니었구나. 빨리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지. 내가 저 미소에 홀려서 정신 줄을 놓고 있었군.

    “한국으로 돌아가면, 귀환해서 혹시 우리가 한국에서 만난다면… 같이 반딧불이 숲 구경하러 갈까요?”

    내 물음에 천우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긴 하네. 연락처도 모르고, 사는 곳도 지역만 대충 아는 우리가 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만약 우연히 마주한다면 그것 역시 운명이겠지.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반짝이는 숲의 풍경을 아주 오랫동안 눈에 담고 있었다. 절대 잊지 않으려는 듯이.

    * * *

    “그때 기억나? 루미나레의 서식지?”

    천우현의 등 위에 모로 엎드려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던 이채현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내일 게이트 레이드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한 천우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루미나레?”

    처음 들어 보는 몬스터 이름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뒹굴 굴러 아예 드러누운 채현이 키득거리며 다시 질문했다.

    “마계에서 봤던 반딧불이 숲이라고 하면 기억하려나?”

    “그건 물론 기억하지. 내 마왕님이 나를 버리고 간 줄 알고 마음 졸였던 그 나흘을 어떻게 잊겠어.”

    “내가 당신을 버리고 어딜 간다고 그래? 경계의 숲이 마왕성 바로 앞인데. 그리고 나도 당신이 더는 안 올까 봐 나름 마음고생했거든?”

    채현의 툴툴거림에 천우현은 픽 웃었다.

    첫 만남 전부터 지독하게 엮인 운명이었다. 죽어야 하는 마왕과 그 마왕을 죽여야 하는 용사.

    그리고 만났을 때는 마왕과 용사가 아닌 유일한 동향 사람이었지. 차원 이동한 세계에서 겪은 일로 많이 지쳐 있던 서로를 위로하고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유일.

    운명이 장난질을 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얄궂은 인연이었다.

    한때는 귀환을 포기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무방비 상태로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는 이를 천우현은 도저히 죽일 수가 없었다.

    물론 채현이 순순히 죽어 주지는 않았겠지만. 아마 덤볐다면 죽는 게 천우현 그 자신이 되었으리라, 지금의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랑에 빠진 건 언제였더라.

    가랑비에 옷 젖듯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스며든 사랑은 꼭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깨닫게 되더라.

    “내가 말했던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자마자 당신이 마법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고.”

    어느새 제 등에서 내려와 슬쩍 제 옆에 드러누운 채현을 끌어안자 그가 피식거렸다.

    “옷에 프라푸치노 묻히고?”

    “덕분에 세탁비 핑계로 당신에게 연락처 건네줄 수 있었지.”

    “그래, 세연이에게 실수해 줘서 고맙다고 전해 줘.”

    회귀 전에는 어색하기 그지없던 천세연과 이채현의 사이는 꽤 좋아졌다. 천세연의 경계가 아예 사라진 것이 둘 사이 완화의 99%를 차지했다.

    세연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독립해서 프리 헌터로 잘살고 있었다. 힐러는 부르는 게 값이니 일거리 떨어질 걱정은 평생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그때 한국에서 만나면 같이 반딧불이 숲 보러 가자고 했잖아.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2회 차 때는 못 갔지만.”

    채현의 말에 천우현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세계는 총 두 번을 돌아갔다고 했다.

    첫 번째는 제 죽음이 촉발제가 되어서.

    두 번째는 멸망으로 치달아 가는 세계를 다시 그나마 평화로웠던 때로 돌리기 위해 채현이 제 존재 기록을 내놓아서.

    그는 아직도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굳이 알려고 하지 말라는 제 연인의 말에 충실히 따를 뿐.

    “검색해 봤는데 지금은 반딧불이 활동 기간이 아니래.”

    “그럼 그 기간에 보러 가면 되지. 우리한테 시간은 아직 많잖아.”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아직 40년 넘게 남았다. 애틋함에 손을 깍지 껴 잡자 채현은 매정하게도 손을 털어 내고 너튜브에 반딧불이 숲을 검색해 열심히 내리더니 동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생각보다 덜 예쁜데……? 봐봐, 우리가 봤던 것보다 훨씬 빈약해. 곤충과 마수의 차이점이 크구나.”

    동영상을 끈 그가 선언했다.

    “굳이 시간, 노력 들여서 갈 필요는 없어 보이네.”

    “당신 생각이 그렇다면……. 아쉽네, 한 번쯤은 다시 보고 싶었는데.”

    천우현의 중얼거림에 씩 웃은 이채현이 손가락을 튕겼다.

    “생각해 보니까 지금 당장 이곳에서도 볼 수 있더라고.”

    리와인드로 재생한 환상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우현의 방 대신 마계 경계의 숲속, 루미나레의 서식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억 속에 짙게 남아 있던 그 아름다운 풍경 그대로.

    사방에서 반짝거리는 찬란한 빛무리를 눈으로 좇던 천우현이 환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예쁘네. 그때처럼.”

    “응, 예쁘다.”

    우현의 볼을 엄지로 쓸며 채현이 대꾸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략된 주어는 똑같았다. 추억을 떠올리며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마왕과 용사는 오늘도 다시 돌아온 세계에서 평화로운 하루를 맞이했다.

    『던전 브레이크의 원인이 되어 버렸다』 외전 완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