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그 꽃의 꽃말 (32/33)
  • 외전 2. 그 꽃의 꽃말

    환생 트럭 피하다가 차원 이동 싱크홀에 걸려들어 마계라는 지랄맞은 세계로 뚝 떨어진 지 어느새 20년.

    “X이발, 죽겠네, 죽겠어.”

    여느 날과 같은 고된 훈련이 끝나자마자 나는 흙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원래 세계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었겠지만 잠도 흙바닥에서 쭈그려 자는 판국에 휴식지를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침대에서 잠다운 잠을 자기 위해서는 마왕성 앞을 떡하니 차지한 반역자 기르카스 놈을 해치워야 했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지고 5년 차 때까지만 해도 별 유감 없었던 기르카스 놈은 20년 만에 내 마음속에서 능지처참해 효수된 목을 성문 앞에 걸어 놓아야 할 빌어 처먹을 역적 새끼로 변해 있었다.

    쪼르르 다가온 애쉬가 미동도 없이 엎드려 있는 나를 쿡쿡, 찔렀다.

    이제 청소년 정도로 큰 애쉬는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지식을 전수받는 드래곤이었기에 나같이 개고생하면서 구르며 훈련받지 않아도 됐다. 부러워 죽겠네.

    “폐하, 죽으셨어요?”

    “애쉬, ‘죽으셨어요’가 뭐냐. ‘승하하셨어요?’라고 해야지.”

    내 생사를 묻는 애쉬를 향해 세이블이 심드렁하게 한 소리 했다. 이런 쌍으로 불경한 드래곤 놈들 같으니라고.

    누가 대모랑 대자 아니랄까 봐.

    “나 안 죽었다. 그리고 그게 포인트가 아니지 않냐, 세이블?”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대꾸하자 세이블이 코웃음 쳤다.

    “겨우 그 정도 훈련으로 죽겠다고 앓는 소리를 내는 꼴을 보니 승하할 날이 머지않아 보이는군.”

    할 말이 없어져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봐도 나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아직 크라토스의 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해, 폭주 위기만 몇 번을 겪어, 인간이라고 무시당해. 이게 만약 웹소였으면 고구마라고 독자들 다 하차했을걸?

    성장물도 적당히 성장하는 모습 보여 주고 바로 먼치킨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이렇게 20년을 팔굽혀펴기랑 크라토스 힘 갈무리만 하는 게 아니라!

    수련하는 장면 안 나오면 날로 먹는다고 고인물 독자들 항의 들어오는 무협도 이 정도는 아니야!

    “여윽시 소설과 현실은 다르구나…….”

    몸을 겨우 뒤집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모험물만 봐도 잘생긴 남캐랑 모험하고 훈련하면서 썸을 타던데. 다정 성직자 남캐랑 까칠 츤데레 검사 남캐는 공식 아니었나.

    예쁜 엘프 언니와 귀여운 여동생계 도적이랑은 돈독한 우정을 다지고, 두 미남들과는 썸을 타고. 가끔 유희 나온 드래곤이 일행에 끼어서 주인공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런데 왜 여기는 성격 괴팍한 에이션트 드래곤과 청소년 드래곤 조합이냐고. 아아악! 열받아!

    썸이 차단된 환경에서 마왕을 잡기 위한 여정도 아닌 반역자를 잡아 죽이기 위한 여정에는 동료 간의 의리고 우정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외워. 믿음보다 의심이 더 안전하다. 네 부모도, 네 자식도 믿지 말라.”

    “와, 무슨 사탄교 10계명 같네. 참, 여기 마계였지. 이해된다. 그러면 너도 의심하면 되냐?”

    “배움이 빠르군.”

    의심과 불신만이 존재할 뿐.

    진담인지, 빈정거림인지 모를 말을 들으면서도 몇 번이고 입 안에서 그 문장들을 굴렸던 걸 기억한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큰대자로 누운 내 눈에 우중충한 마계의 하늘이 가득 들어왔다. 나는 저 하늘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싫었다. 내 세계의 푸른 하늘이 그리웠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쉬어라. 너무 멀리 나가진 말고.”

    “오, 걱정해 주는 거?”

    “그러다가 네놈이 죽으면 이쪽이 곤란해지니 말이다.”

    “저 불경한 도마뱀 새끼… 마왕성만 되찾으면 보자…….”

    휙 떠나 버리는 세이블을 노려보며 꿍얼거렸다. 이 셋으로는 기르카스와 맞서기 턱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인재를 끌어오지?

    나를 배신하지 않고 쓸 만한 충성심 강한 인재는 마계에서 그저 유니콘이었다. 가챠 게임으로 친다면 SSR 카드.

    “폐하, 제가 아까 돌아다니면서 엄청 예쁜 꽃을 봤어요.”

    “응, 그래. 다시 보러 가.”

    난 힘들어서 손 하나 까딱 못 하겠다.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몸을 모로 누이니 애쉬가 내 몸을 흔들었다.

    “같이 보러 가요.”

    칭얼거리는 애쉬에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가 꽃구경할 때가 아니라니까?

    그리고 애쉬의 손에 이끌려 온 곳에 활짝 핀 꽃을 보며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나무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하얗고 분홍빛 꽃들.

    햇빛도 잘 들지 않는 공간에서 용케 꽃을 피운 나무를 경외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삶이 팍팍해져서 꽃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을 줄만 알았더니, 막상 활짝 피어 있는 꽃을 보니까… 꽤 괜찮았다.

    꽃잎이 살랑살랑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낙화였다.

    나무에 핀 꽃은 벚꽃을 퍽 닮아 있었다. 매년 친구들과 가던 벚꽃 구경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걸 시작으로 평화롭고 행복했던 시절이 줄줄이 따라 나왔다.

    ‘…집에 가고 싶다.’

    그날 술 마시지 말고 일찍 들어갈걸.

    무의식적으로 펼친 손바닥에 낙하한 꽃이 툭 떨어졌다. 차마 쥐지도 못한 채 손만 펼치고 있자 내 옆으로 다가온 애쉬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모든 꽃에는 그 꽃이 담고 있는 의미가 있다고 하셨어요.”

    여기에도 꽃말이 있구나. 배신과 쌈박질만 하는 마족 놈들이 낭만을 알다니, X나 의외다. 꽃말도 배신, 살육,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이런 거 아니야?

    “저 꽃의 의미는 뭘까요?”

    애쉬의 물음에 상념에서 벗어나 머리를 쥐어 짜냈다. 잠깐, 벚꽃의 꽃말이 뭐였더라…….

    “중간고사……?”

    아니, 이건 드립이고. 그런데 진짜 차라리 공부해서 중간고사 치고 싶다. 낯선 차원에서 목숨 위협받으면서 구를래, 공부할래? 물으면 당연히 후자지.

    침울해진 내 기색을 눈치챈 건지 애쉬가 꽃가지를 꺾어 내게 내밀었다.

    “꽃의 의미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저 보기에만 예쁘면 됐지.”

    활짝 웃는 애쉬를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꽃가지를 받아 들었다.

    이 꽃은 벚꽃이 아니다. 그러니 꽃말 역시 벚꽃의 꽃말이 아닐 것이다. 향기로운 꽃향기는 유독 추억을 떠오르게 만들기에 이제 이곳의 꽃마저도 싫어질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숨쉬기 힘들게 만드는 공기, 그다음으로는 우중충한 하늘, 다음은 독기를 머금고 있는 물과 과일.

    마계에서 지낼수록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은 좋아지긴커녕 하나하나가 끔찍이도 싫어지고 있었다.

    부스럭,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경계를 세우며 천천히 물러나자 온갖 생김새의 마족 놈들이 풀숲 뒤에서 스르륵 나타났다.

    “저기 크라토스를 가진 인간이 있다! 생포해!”

    “그냥 마왕이라고 해라, 새끼들아. 굳이굳이 아홉 글자로 늘리네.”

    서둘러 애쉬를 둘러업고 나를 향해 덮쳐 오는 검은 그물을 가볍게 피하며 투덜거렸다. 오, 찢어 죽일 기르카스 놈이 이제는 죽이기보다는 생포하는 거로 노선을 틀었나 본데?

    물론 생포당한다 한들 멀쩡히 살아남을 리가. 크라토스 내가 누군가에게 넘기기 전에 빼내려고 그러는 거 다 보인다.

    날카로운 바람이 습격자들을 덮쳤다. 죽이려고 공격하는 것과 생포하려고 공격하는 것, 둘 중 무엇이 더 간단하냐고 묻는다면 물론 전자였다.

    방금까지 공간을 가득 메우던 꽃향기 대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꽃잎으로 뒤덮였던 바닥은 피와 시체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직 죽지 않은 놈들은 나와 대치하듯 서 있었다. 내 공격에 살이 찢긴 듯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옆구리를 손으로 꾹 누르며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놈이 분위기 잡으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군. 그냥 죽이고 심장을 빼, 컥!”

    “멀리 나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세이블의 손에 머리가 사라진 채로 털썩 쓰러지는 시체를 질린 눈으로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저 경지까지 도달하려면 대체 얼마나 더 굴러야 할까. 지금 수준으로는 겨우 마족 다섯 동시에 상대하면서 죽이는 게 전부인데.

    그때,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놈들 중 하나의 손에서 반짝 빛나는 은빛을 발견했다. 채 막을 새도 없이 달려든 습격자가 무방비로 서 있는 애쉬를 향해 암기를 치켜들었다.

    푹!

    날카로운 암기가 내 살을 파고들었다. 등에 깊숙이 꽂힌 암기에 숨이 턱 막혔다. 애쉬를 끌어안은 손이 덜덜 떨렸다.

    설마 이 정도 찔린 거 가지고 죽지는 않겠지? 여기 맹독이 발려 있으면 어떡하지? 와씨, 살려 주세요. 난 세이블이 어떻게든 나를 살려 낼 거라고 믿어.

    등 뒤에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동시에 숨이 끊어진 듯 거친 호흡 소리가 뚝 끊겼다.

    “엄살 부리지 말고 정신 차려.”

    내 등 뒤의 냉기만큼이나 차가운 세이블의 말에 애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조심스럽게 암기가 박힌 등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멈칫하고 머쓱하게 웃으며 세이블을 돌아보았다.

    “손이 안 닿는데 좀 뽑아 주라.”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 세이블이 성큼 다가와 내 등에 박힌 암기를 배려 없이 팍 뽑아냈다. 울컥,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등 뒤를 보니 습격자는 날카로운 얼음 결정에 심장이 뚫린 채로 매달려 있었다. 잡아당기는 힘에 다시 고개를 돌리니 애쉬가 굳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다음부터는 절 보호하지 마세요. 전 폐하께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에요.”

    “저 뒤의 얼음 결정, 네가 한 거야?”

    내 물음에 애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한참 밑이었던 눈높이는 어느새 비슷해져 있었다.

    내 한 몸 지키기도 힘든 세상에서 너를 보호하는 걸 포기하면 한결 편해지기야 하겠지. 하지만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너 아직 성년 되려면 50년은 더 남았잖아.”

    미성년자는 보호해야 하는 게 내 세계에서는 상식이다. 세이블은 자기 대자를 거들떠도 안 보는데 나라도 챙겨야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애쉬가 나를 갑작스레 끌어안았다. 손바닥이 꾸욱 상처 부위를 눌러 지혈했다.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요, 절대.”

    애쉬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내게 애정을 주는 이 해츨링을 외면할 수 없었다.

    * * *

    “와, X됐다. 세이블, 살려 줘.”

    전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내뱉었지만 상황은 내 목소리와 달리 X나게 심각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의 뒤쪽은 낭떠러지. 그리고 내 앞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놈들은 기르카스의 수하들과 그놈들이 부리는 거대한 마수들.

    가장 앞에서 비열하게 웃고 있는 저놈은 기르카스 놈의 왼팔이었다.

    잠시 일행이랑 떨어진 틈에 비겁하게 기습하다니. 하긴, 저놈들은 언제나 그랬지.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드디어 네놈을 잡아 기르카스 님 앞에 대령할 수 있겠군. 반항한다면 죽여도 된다고 허가하셨다, 인간. 그러니 선택해라. 순순히 잡히든지, 아니면 이곳에서 죽든지.”

    그놈의 인간, 인간. 말끝마다 인간 안 붙이면 입에 가시가 돋냐?

    “응, 네가 온 덕분에 나 안 죽을 듯. 내가 지금까지 소설 몇 개를 섭렵했는데 오른팔도 아닌 왼팔에게 치명상 입는 일은 없더라고.”

    “…뭐?”

    “꼬우면 기르카스 오른팔 돼서 다시 오든가, 3인자 왼팔 놈아.”

    이죽거리자 왼팔 놈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죽여!”

    날카로운 외침에 나를 둘러싸고 있던 놈들이 한꺼번에 내게 달려들었다.

    쯧쯧, 이래서 3인자 놈은 안 돼요. 반항하면 죽이라고 조건부가 붙은 걸 보아하니 웬만하면 살려서 데려오라 명령을 내린 것 같던데, 기분 따라 지 X대로 명령을 해석하잖아.

    내가 기르카스였으면 너 죽였어. 명령 불복종으로.

    지금 내게 달려드는 습격자는 대략 서른 명 남짓. 게다가 저 마수들까지 합하면 50은 되려나? 여기서 내가 살아남는다면 50 대 1의 전설을 탄생시키겠군.

    살아남지 못할 확률이 더 낮아서 문제지만! 이를 갈며 내 옆구리를 노리고 벼락처럼 덮쳐드는 늑대형 마수의 주둥이를 마기로 콱 꿰뚫었다.

    쩍 벌어진 입에 창 같은 마기가 박히며 마수가 고통스러운 울음과 함께 뒹굴었다.

    마기를 다루는 건 한결 자연스러워졌지만 마법과 동시에 다루는 건 아직까지 약간 버벅거리는 상태. 내 빈틈을 발견한 습격자 중 한 놈이 놓치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놈의 능력이 산성인지, 독인지 모르겠지만 능력에 닿은 피부가 화끈거리며 타들어 갔다. 고통에 잠식될 틈도 없이 다른 놈이 내 뒤에서 나를 덮쳐 왔다.

    “버러지 같은 인간이 발악하는 꼴이 참 볼만하구나!”

    싸움에 휘말리지 않을 뒤쪽에서 내 꼴을 보고 있던 기르카스의 왼팔 놈이 비웃음을 내뱉었다.

    점차 내 숨이 거칠어지며 이마에 흘러내리는 피 때문인지, 지나친 피로 때문인지 시야가 흐릿해졌다.

    달려드는 놈들을 죽이고 또 죽이며, 피를 온몸에 묻히며 냉정한 계산 판단을 끝났다. 이대로 가면 죽는 건 나다. 놈들이 나를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일단 몸을 피해야 했다.

    거대한 덩치의 딱 봐도 푹신해 보이는 마수를 보는 내 눈이 순간 빛났다. 그래, 저거다.

    내게 돌진하는 마수의 숨통을 즉시 끊고 그대로 절벽 아래로 밀었다. 어느새 나는 발을 살짝 헛디디기만 해도 곧바로 떨어질 절벽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기르카스의 왼팔 놈은 비열한 웃음을 띠고 나를 바라보며 손을 까딱거렸다.

    “네 발로 순순히 온다면 죽이지 않고 기르카스 님께 데려가 주지.”

    그래, 산 채로 데려가서 크라토스를 꺼내 죽이겠지. 내가 그것도 모를 멍청이로 보이냐?

    “X 까.”

    씩 웃으며 시원하게 중지를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나 역시 절벽을 향해 몸을 던졌다.

    “빌어먹을, 저거 잡아!”

    “하지만 저기는……!”

    저기는 뭐? 말해, 인마. 사람을 열받게 만드는 법 첫 번째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

    엄청난 속도로 추락한 덕분에 나는 그 뒷말을 들을 수 없었다.

    ‘느리게 추락하는 마법이 뭐였지?’

    겨우 크라토스의 지식을 뒤져 감속 마법을 걸었지만,

    ‘하하, X됐네.’

    마법이 안 먹혔다. 놈이 말하다 만 뒷말이 이제야 예상이 갔다. 허탈하게 웃으며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칫하여 추락 위치가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영영 보지 못할 하늘이었다.

    그나마 쿠션을 깔아 놓았다는 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물론 까딱하면 머리 깨져서 죽게 생겼지만.

    점점 땅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힐끗 고개를 돌려 밑을 보니 현재의 내 위치는 약간 삶과 죽음 사이 애매한 위치에 걸쳐 있었다.

    온 힘을 다해 팔을 휘저어 마수의 사체 위로 떨어지도록 위치를 옮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털썩!’

    나는 무사히 마수 사체 위에 떨어졌다.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이 뒤늦게 몰아치듯 느껴졌다.

    휴, 진짜로 죽을 뻔했네. 여전히 빠른 속도의 심장박동에 가슴께를 꾹 누르며 사후경직이 막 시작된 마수에게서 몸을 일으켰다.

    설마 여기까지 쫓아서 내려오진 않겠지. 일단 위치 파악부터 하기 위해 재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내가 있는 곳은 햇빛 한 점 비치지 않는 어두운 협곡이었다. 협곡은 사방이 막혀 있었다. 자세히 탐색해 봐야 알겠지만 현재로서 유일한 탈출 루트는 저 절벽 위로 다시 날아가는 것.

    무심결에 위를 올려다본 나는 점점 빠른 속도로 추락하는 은빛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아니, 추락이 아닌 비행이었다.

    거대한 실버 드래곤이 가파른 협곡 아래로 날아 내려오다가 저를 올려다보는 나를 발견했는지 그 자리에서 인간형으로 폴리모프했다.

    그러니까…….

    “야, 너 미쳤어? 당장 폴리모프 풀어어억!”

    추락하던 상태에서 말이다.

    추락하던 때의 나와 마찬가지로 감속 마법을 시도했는지 허둥지둥하는 꼴이 고스란히 보였다.

    하지만 폴리모프를 풀기에는 한발 늦었다. 여기서 저 녀석이 다시 본체로 돌아가면 나는 그 본체에 깔려 죽게 생겼다.

    이대로 떨어지면 마수 시체 위는커녕 저 돌바닥에 떨어지게 생겼고 말이다.

    한숨을 내쉬며 마기를 풀었다. 다행히도 마력은 막혔지만 마기는 운용 가능했다. 빠른 속도로 추락하던 애쉬의 몸을 마기가 휘감았다. 낙하 속도가 한층 감속되었다.

    동시에 팔을 뻗어 추락하는 애쉬를 받아 냈다. 마기가 잡아 주어서 그런지 한결 느릿한 속도로 추락한 애쉬는 무사히 내 품에 안겼다.

    이름하여 공주님 안기 자세였다. 이렇게 안기는 게 내 로망이었는데 왜 내가 남을 안고 있는 건지.

    깜빡, 노을색 적안을 감았다가 뜬 애쉬가 상황 파악을 마쳤는지 눈 색만큼이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폐, 폐하……?”

    성년이 되어 나보다 머리 두어 개는 더 커진 애쉬는 내가 들고 있기에는 무거웠기에 그대로 손을 놨다.

    그대로 바닥에 철퍽 엎어진 애쉬가 허리를 문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너무해요! 전 폐하 찾으러 기꺼이 몸까지 던졌는데!”

    “무거운데 어쩌겠냐. 그러게 누가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래?”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니 애쉬가 입을 비죽거렸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

    “위쪽 상황은?”

    “폐하가 많이 죽여 놓으셔서 제가 할 일은 별로 없었죠. 아쉽게 두어 명 정도를 놓치긴 했지만 그들이 굳이 이 협곡까지 내려오진 않을 것 같고요.”

    그렇다면 이곳을 탐색할 여유는 충분히 있다는 소리군.

    천천히 떨어진 협곡을 살펴보았다. 흐음, 분명 빠져나갈 길이 있을 텐데.

    정 없으면 애쉬 본체 타고 날아가지, 뭐. 내가 바로 드래곤 마스터다.

    협곡을 이리저리 살피던 내 눈에 작은 푸른색 꽃이 가득 피어 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 꽃은 꼭 물망초를 닮아 있었다.

    햇빛도 안 비추는데 꽃이 피네. 신기함에 빤히 꽃 무더기를 바라보자 내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애쉬가 꽃을 발견하고 물었다.

    “꺾어 올까요?”

    “내버려 둬. 꽃은 피어 있을 때가 제일 아름다운 법 아니겠어?”

    느긋하게 꽃을 감상하다가 꽃과 관련된 또 하나의 과거가 떠올라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전에 내게 꽃의 의미를 물어봤었지.”

    벚꽃을 닮은 그 꽃의 의미를 묻는 네게 나는 중간고사라는 참으로 허접한 답변을 돌려주었고. 그렇지만 꽃말을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난 아네모네나 색깔별 장미 같은 유명한 꽃말밖에 모른다고.

    그래도 이건 안다. 그 꽃이 벚꽃이듯 저 꽃이 만약 물망초라면.

    “꽃말이 ‘나를 잊지 말아요.’였던가……. 내가 꺾지 말라고 안 했었니, 애쉬?”

    어느새 꽃을 한 아름 따서 껴안고 있는 애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잔뜩 따 댔는지 그는 거의 파묻히다시피 꽃을 끌어안고 있었다. 은빛과 푸른빛은 퍽 잘 어울렸다.

    애쉬가 배시시 웃으며 내게 제가 딴 꽃의 반절을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폐하.”

    내가 내 세계에서도 못 받아 봤던 꽃 선물을 마계에서 다 받아 보네. 얼떨결에 꽃 무더기를 안아 드니 환하게 미소 지은 애쉬가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제가 먼저 죽더라도 폐하가 저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 줄 거죠?”

    죽음을 입에 담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절대 너 죽게 안 둘 테니까.”

    나 때문에 이런 도망자 삶을 사는 녀석이었다. 내가 그 레어에서 손을 내밀고 데리고 옴으로써 전란의 한가운데에 휘말린 아이였다.

    그런 녀석이 나 때문에 내 앞에서 죽는 꼴은 절대 못 본다.

    내 말에 가만히 웃은 애쉬가 속삭였다.

    “역시 전 폐하가 좋아요.”

    “그래, 고맙다. 그런데 길 찾기 귀찮으니까 너 좀 타자. 얼른 폴리모프 풀어.”

    현실 역키잡 플래그는 딱 질색이거든요. 꽂히기 전에 파.괴.한.다.

    * * *

    “잊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보관 마법으로 인해 여전히 싱싱한 작고 푸른 꽃을 만지작거리며 애쉬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50년간 연금을 명 받았지만 들려오는 소식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듣기로는 마왕성의 옥좌가 비워졌다고 했던가.

    또 그 세계로 넘어가셨구나. 애쉬는 쓰게 웃었다. 완전히 붙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만의 오만이었던 모양이다.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그가 할 수 있는 건 얌전히 기다리는 게 전부.

    마신께 부탁해 이 꽃이라도 넘기고 올까. 부디 잊지 말아 달라고.

    이번에는 또 어떤 주제로 내기를 걸어야 할지, 고민하며 애쉬는 부드럽게 푸른색 꽃잎에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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