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후일담 (31/33)
  • 목차

    외전 1. 후일담

    외전 2. 그 꽃의 꽃말

    외전 3. 그 마왕과 용사의 상관관계

    외전 1. 후일담

    마신과의 내기에서 이긴 나는 다시 이 세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삭제된 데이터 기록을 복구하는 개념인 터라 세계는 내가 지워지기 전의 세계와 교묘하게 겹쳐졌다.

    “201호 학생! 월세 내는 날 안 잊었지?”

    “당연하죠. 제가 언제 월세 밀린 적 있어요?”

    동네 아주머니들과 수다를 떨고 있던 집주인 아주머니가 짐을 바리바리 챙겨 카페로 향하는 나를 불렀다. 가볍게 대답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전에는 저 월세 내는 날 소리가 그렇게 귀찮고, 내가 월세 떼먹을 사람으로 보이나 싶어 마음 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뭐, 나를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매우 감사하지.

    본가의 내 방도, 자취방도 다시 주인을 되찾았고 가족과 친구, 지인들은 나를 잊은 적이 없다는 듯 행동했다.

    지워진 2회 차와 3회 차의 내가 잊혔던 세계를 기억하는 건 오직 천우현뿐이었다.

    카페로 가는 길목의 담벼락에 열심히 전단지를 붙이는 남자와 시퍼렇고 X같은 보노보노 전단지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분명 기억 속에 있던 장면이었다.

    내가 저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고개를 휙 돌린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나한테 말을 걸었다.

    “저희 길드에 관심 있으시구나! 저희―”

    “네네, 보노보노 길드요.”

    남자의 말을 끊고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그가 울컥하며 내 말을 정정했다.

    “보노보노가 아니라 레게노거든요!”

    보노보노나 레게노나 거기서 거기지. 가던 길을 마저 가는 내 옆으로 급하게 따라붙으며 남자가 물었다.

    “혹시 길드 들어오실 생각 없으세요? 저희 길드장님은 무려 법사계 B급―”

    “죄송, 저 일반인임.”

    이번에는 기필코 힘숨찐 일코 라이프를 살아가리라.

    내 단호한 말에 남자는 축 처진 어깨로 다시 전단지를 담벼락에 붙이러 터덜터덜 걸어갔다.

    앞에 보이는 개인 카페를 향해 걸어가다가 멈칫했다. 전단지남이 있는 쪽을 한 번 돌아보고 다시 카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카페 아니었나……?’

    게이트가 터져 내가 주태윤의 스토킹에 며칠간 시달리게 했던 원인을 제공한 그 카페. 그때는 나를 찾으러 온 마계 게이트였지만 이제는 마계에서 넘어올 일 없으니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안전제일이지.”

    그냥 다른 카페 가야겠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

    그대로 몸을 돌려 그 카페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의 프랜차이즈로 들어갔다. 아메리카노 한 잔 시키고 한창 노트북을 두드려 리포트 과제를 작성하고 있는데 갑자기 카페가 시끌시끌해졌다.

    “옆 카페에서 게이트 터졌대요!”

    와씨, 소름. 발 빠르게 소식을 접한 한 손님의 외침을 듣고 팔을 문질렀다. 어쨌거나 게이트 터질 곳이었네.

    이렇게 예정된 사고를 피하다니, 회귀물 주인공들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카페에 노트북을 놓고 구경하러 몰려든 사람들 틈에 슬쩍 껴 기웃거렸다. 아직 이재의는 도착하지 않았고 게이트 앞에는…….

    ‘윽, 눈 마주쳤어.’

    놀란 중년 여성을 다독이며 진정시키고 있던 주태윤이 있었다. 찰나 동안 시선이 마주한 주태윤이 눈을 휘어 웃었다.

    이전이었다면 혹시 나를 기억하고 있는 거 아닌가, 의심했겠지만 저게 습관성 팬서비스 눈웃음이란 걸 알게 된 뒤로는 의심을 집어치웠다.

    주태윤에게 향했던 시선을 게이트로 미끄러뜨렸다. 이날 열렸던 게이트에서 몬스터 대가리가 밖으로 나왔던 것까진 기억하는데.

    이번에는 우리 애들 아니니까 안 나오겠지.

    “비키세요! 지나가겠습니다!”

    “위험하니까 뒤로 물러나세요!”

    신고를 받고 도착한 관리국 긴급 대응 팀이 사람들을 뒤로 물렸다. 게이트에 휘말린 사람이 없어서인지 태도에서는 여유가 묻어 나왔다.

    우르르 게이트 안으로 진입하는 관리국 요원들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다시 카페로 돌아가려다가 게이트 레이드에 참가할 생각이 없는지 훌쩍 순간 이동으로 인파를 벗어나 누군가와 통화하려는 듯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대는 주태윤을 발견했다.

    충동적으로 뒤쪽으로 성큼 다가가 그의 옷 끝을 잡아당겼다.

    “저기요.”

    주태윤이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제 극성팬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부드럽게 웃어 보이는 주태윤을 향해 제일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혹시 사촌 동생 있어요? 그러니까… 어머니 쪽 사촌 동생이요.”

    내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간 표정이 흐트러진 주태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관상이 딱 이종사촌에게 당하고 살 상이라 혹시나 해서요. 대답 감사요.”

    나를 도믿맨 보듯 보는 주태윤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한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음, 확실히 진세빈은 이 세상에 없구나. 내 카르마도 없고, 진세빈도 없고. 이제 세계의 하드 모드화는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주태윤이 진세빈을 완전히 잊은 건 좀 의외지만. 뭐, 잊으면 주태윤에게도 좋은 거 아니겠어?

    아무튼 던전 브레이크 안녕! 몬스터 웨이브도 안녕!

    걱정거리를 완전히 덜어 낸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과제와 밀린 싸강이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향했다.

    얼음이 다 녹아 밍밍해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휙휙 휘저으며 알림이 수북이 쌓인 채팅방을 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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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환자 단체 채팅방

    〉〉공지 사항: 이름은 차원 이동한 곳에서의 직업, 혹은 세계관으로 부탁드립니다

    드래곤슬레이어: 저희 이번 주는 레이드 없어요????

    혁명군 수장: 드슬 님 고3이라면서요 공부하세요

    드래곤슬레이어: 저는 차원 이동했던 세계에서 넓은 세상을 보고 겪으면서 성적과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느꼈어여

    혁명군 수장: 일단 한국에서는 전부니까 공부하세요

    이단심문관: 혁명군 수장 님 넘 매정해ㅠ

    천마: 저 어쩌다 보니 능력 쓰는 거 들켜서 등록해야 할 거 같은데

    천마: 혹시 등급 측정할 때 원래보다 낮게 뜨게 하는 법 아시는 분?

    소드마스터: 마나 틀어막으시면 됩니다

    천마: 내공=마나인가? 세계관이 다르니까 복잡하구먼;;;

    용사: 아, 등급 낮게 받는 방법도 있는가 보네요

    조금 일찍 만들어진 채팅방은 회귀 전처럼 언제나 북적였다. 물론 이번에도 이들을 모은 사람은 나였다.

    만든 시기가 좀 일러서 그런지 아직 들어오지 못한 귀환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한 번 더 코드 뿌릴 예정이었다.

    마왕: 이번 주는 제가 바빠서 쉬어 갑니다

    내게 주어진 관리자 권한은 그대로였고 나는 그 권한으로 매주 한 번씩 게이트를 닫고 있었다.

    관리자1은 정성스러운 작별 인사까지 하면서 보내 줬는데 또 왔냐며 거의 거품을 물 기세더라.

    거, 초월자 참 각박하긴. 어차피 50년 후에는 다시 넘어가야 하는데 좀 있으면 어때서.

    * * *

    “와, 안 터졌다.”

    중간고사 하루 전날, 매일같이 갔던 학교 도서관의 쓰레기통에 테이크아웃 컵을 던져 넣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 이번에도 대규모 게이트가 터질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도서관은 멀쩡했다. 날짜를 기억 못 해서 매일 방문한 덕분에 시험공부는 아주 잘됐다.

    물론 회귀 전과 같은 수많은 사건, 사고가 없는 것도 한몫했다. 마신이 확실하게 차원의 통로를 틀어쥐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서관 게이트가 터지지 않았다는 건 곧 D급 헌터였던 유선한이 활약할 일도 없었다는 듯.

    ‘굳이 등급 올려 줄 필요는 없겠지.’

    내 앞자리에서 열심히 시험 문제를 풀고 있는 유선한의 등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선한의 A급은 그렇게 하늘 위로 날아갔다.

    일선 시험이 끝나고 학교를 나오던 도중, 업데이트된 『그 꽃을 꺾지 마세요』의 편수를 보다가 힐긋 24시간 카페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포커스도 이쯤 만났었지. 이번에는 완결 볼 수 있나? 황태자가 의식을 잃고 북부 대공이 죽은 곳에서 강제 연중된 소설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일단 내가 못 봤던 새 편수 나올 때까지 킵해 놔야지.

    그동안 다른 소설이나 보자. 오, 『만년 콩 라인의 세계 구원 공략서』? 이거 재미있겠네.

    버스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새로운 소설을 펼친 나는 3화 만에 조용히 뒤로 가기를 눌렀다. 주인공이 힘숨찐을 증오 수준으로 싫어하는 터라 읽으면서 좀 찔린 탓이었다.

    다른 소설을 탐색하는 동안 버스는 내가 내려야 하는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우현 씨!”

    원룸 빌라 앞에 서 있는 이를 향해 한걸음에 달려가 폭 안겼다. 천우현 역시 활짝 웃으며 나를 마주 끌어안았다.

    “시험은 잘 봤어요?”

    “음, 그럭저럭?”

    큼, 큼. 우리 뒤에 있던 이재의가 헛기침을 하며 빠른 걸음으로 원룸 빌라 현관으로 들어갔다. 이웃한테 왠지 못 볼꼴을 보여준 것 같아 머쓱해졌다.

    자취방에 들어가자마자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잠옷을 쓰윽 방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옷 개고 나가는 걸 깜빡했네.

    천우현을 내 침대에 앉히고 나는 책상에 앉아 착물화학 전공책을 펼쳤다.

    계속 뒤로 향하는 시선을 꾹 억눌렀다. 심심할 텐데, 그러게 내일 시험 끝나고 만나자니까. 보고 싶다는 말에 홀랑 넘어간 내가 멍청이지.

    잠깐 휴식 시간을 취할 겸 풀썩 천우현의 옆에 걸터앉자 곧바로 휴대폰을 거두고 흐트러진 내 옆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넘겨 주며 그가 물었다.

    “내일 시험 끝난다고 했죠?”

    “네, 왜요?”

    “세연이가 각성해서 내일 같이 관리국에 등급 측정 검사 맡으러 가려고 하는데 끝나고 셋이 식사라도 할까 해서요.”

    잠시 고민하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속 1회 차의 천세연과는 딱히 나쁜 사이도 아니었고 이제는 내가 연수원 입소해서 엮일 일도 없으니 이렇게라도 안면을 트는 게 좋겠지.

    “등급은 이전처럼 S급 받게요?”

    “그냥 적당히 A급 정도로 받죠. 바빠지면 채현 씨 만날 시간도 부족할 테고…….”

    풀썩,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우현은 떠미는 힘에 밀려 내 침대에 누워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채현 씨, 공부는…….”

    “내일 시험 치기 전에 하죠, 뭐. 어차피 한 번 봤던 시험인데.”

    빨갛게 달아오른 천우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고개 숙여 말캉한 입술을 살짝 깨물며 생각했다.

    음, 역시 돌아오길 잘했어.

    * * *

    “이번 과제는 조별 과제입니다.”

    교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에 눈을 빛냈다. 드디어 피의 복수의 시간이 다가왔군.

    교수님이 조별 과제 팀원 확인하라고 띄운 PPT의 익숙한 이름들에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모인 익숙한 면상들에 내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 조별 과제 개노답 3형제들아. 한 줄로 설명할 수 없는 총체적 노답인 놈, PPT로 벽돌 만드는 놈, 발표 대본 하나 작성 안 해 오는 놈.

    너희들의 노답 짓거리를 막기 위해 미래에서 돌아왔다. 이번에는 기필코 너희들의 트롤 짓을 막아 주마.

    “그럼 저희 발표 주제는 마석이 미래의 대체에너지가 될 수 있는―”

    다시 듣는 개소리에 활짝 웃으며 말을 잘랐다.

    “기각. 무조건 수소 아니면 바이오매스, 둘 중 하나 선택하세요.”

    “네? 왜요?”

    “왜긴 뭐가 왜요예요. 최신 연구 주제라 관련 논문이 거의 없을뿐더러 실험도 어려우니까 그렇죠.”

    내 삐딱한 말에 새내기 특유의 해맑은 웃음을 지은 빌런 1이 대꾸했다.

    “에이, 논문 찾아보면 나오겠죠. 다른 교수님께서 요즘 뜨는 연구 주제라고 하셨는데.”

    “자, 논문 사이트 한번 켜 볼래요?”

    내 부드러운 제안에 빌런 1이 눈을 굴리며 논문 사이트에 접속했다.

    “마석 논문 찾아봐요. 논문 몇 개 나와요?”

    “…….”

    침묵한 빌런 1은 다른 사이트도 열심히 찾아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거봐, 지금도 해외 논문은 찾아볼 생각을 안 하잖아.

    이제 포기하나 싶었는데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다시 고개를 번쩍 든 빌런 1이 말했다.

    “마석 하나 주워 와서 저희가 실험해 보면 되지 않을까요? 아는 선배가 그러는데 예약하면 학교 실험실 빌릴 수 있대요!”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아는 헌터 있어요?”

    “아니요?”

    “그럼 지금 저희 중에 헌터도 없는데 누가 게이트 들어가요? 일반인이 게이트 들어가면 과태료 300만 원인 거 아시죠? 그리고 우리가 혹여 들어간다 한들 미선점 게이트 알아요? 게이트 앞에 스피드 게이트 다 쳐져 있는데 어떻게 들어가게?”

    “그럼… 마석을 구매하면…….”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걸 자각했는지 점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빌런 1을 향해 쐐기 박듯이 물었다.

    “마석 하나에 30만 원인데 조별 과제 하나 하려고 30만 원 투자하시게요?”

    유선한과 나머지 두 빌런의 눈도 30만 원이라는 액수를 듣자 차게 식었다. 빌런 1이 패배를 인정하고 순순히 물러났다.

    그는 회의 내내 의기소침해 있었지만 막 입학한 새내기를 KO시킨 것에 죄책감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내가 회귀 전에 이 망할 조별 과제 때문에 너무 개고생했거든.

    대충 주제가 정해지자 빌런 2가 손을 들었다.

    “PPT는 제가 할게요. 저 예쁜 템플릿 많아요.”

    “PPT 한 장에 세 줄 이상 안 들어가게, 요점만 딱 정리해서 할 수 있어요?”

    “세 줄이요?”

    내 물음에 빌런 2가 눈을 깜빡였다.

    “그럼 제가 PPT 맡겠습니다.”

    한숨을 쉰 유선한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못하는 빌런 2 대신 나섰다. 그래, 1학년의 그 가독성 엉망인 PPT보단 복학생의 PPT가 훨씬 낫겠지.

    “그럼 제가 발표 맡아도 될까요?”

    “발표자가 발표문 써야 하는 건 아시죠? PPT 그대로 따라 읽으시면 안 돼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PPT를 줄줄 읽으며 꿀 빨려고 했던 빌런 3의 안면 근육이 움찔거렸다.

    “자, 그럼 대충 주제랑 역할은 정해졌으니까 자세한 건 채팅방에서 이야기하죠.”

    그 말을 끝으로 회의가 성공적으로 파했다. 강의실 바깥으로 나가며 미리 자판기에서 뽑아 온 사이다 캔을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 역시 사이다가 짱이야. 이 맛에 회귀물 보지.

    * * *

    주태윤과 이재의는 친구 사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 정도로 공개적인 우정을 과시하는 절친.

    그 말인즉슨, 주태윤이 이재의의 집이기도 한 내 자취방 빌라 앞에서 자주 보이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때 내가 자기를 붙잡은 이래로 내가 제 팬이라고 착각하기라도 했는지 내가 보일 때마다 주태윤은 능청스럽게 웃어 보이곤 했다.

    오늘도 주태윤은 이재의를 기다리는 건지 빌라 앞에 서 있었다.

    자연스럽게 지나치는 내 앞에 언제 순간 이동했는지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방금까지 내게 열혈 팬서비스 눈웃음을 보여 주던 그 남자였다.

    “안녕, 채현 씨.”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재회의 인사말을 속삭이는 남자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억하네요?”

    “어떻게 잊겠어요. 진세빈이든, 당신이든.”

    뭘, 잊었으면서.

    내가 마신이랑 내기한 날에 이랬으면 감동받아서 조금이나마 흔들려 줬을 텐데 말이지. 역시 인생은 타이밍인 듯.

    언제 온 건지 한걸음에 내 옆으로 달려온 백아현이 주태윤을 향해 파리 쫓듯 휘휘 손을 저었다.

    “제 친구에게 그만 집적거리고 꺼지시죠? 얘 남친 있거든요?”

    세계의 시간이 되감겼어도 백아현은 여전히 주태윤을 싫어했다.

    아현이의 입에서 나온 말에 잠시간 쓴웃음을 지은 주태윤은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냈다.

    “애인이 서운하게 한다든가 헤어졌다든가 하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채현 씨. 술 한 잔 정도는 기꺼이 같이해 줄게요.”

    명함을 건네며 주태윤이 눈을 찡긋했다.

    음, 아무리 봐도 로판 능글 서브남 재질이란 말이지. 남주 후보들을 연애, 결혼, 바람용으로 나눌 때 무조건 바람용에 들어가는.

    그렇다고 내가 주태윤이랑 바람피운다는 말은 아니고.

    “뭐야, 이채? 너 주태윤이랑 아는 사이야?”

    점점 멀어지는 등을 보고 있다가 백아현의 물음에 고개를 까딱였다. 이제 주태윤이 나를 기억했으니 따지자면 아는 사이긴 하지.

    “웬만하면 엮이지 마. 저 인간, 엄청 끈질기니까.”

    인상을 찌푸린 아현이가 슬쩍 충고했다. 내게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던 울 아현이 충고는 한번 고려해 봐야지.

    나도 몰랐는데 난 은근 뒤끝 있는 사람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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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마: 와 연수원에서 용사님이랑 엄청 닮은 여자 봤는데

    천마: 용사님 혹시 여동생 있어요?

    용사: 성이 천이라면 제 동생 맞습니다

    용사: 죄송한데 제 동생에게 말 걸지 마시고요

    천마: 어이없네요;; 님 여동생 내 취향 아니니까 걱정 X

    백마왕: 연수원 생활 할 만해요? 급식 개쓰레기라던데ㅋㅋㅋ

    천마: 뭘 먹어도 벽곡단보단 낫죠

    벌써 연수원 19기가 열렸다니. 그러면 이제 곧이겠군. 류사현이 보내온 채팅을 보며 플래너의 [사건, 사고 막기 4. 귀환자]에 찍 줄을 그었다.

    분명 8월 초에 귀환자 등장 예고 글이 떴었지. 그러니 8월 초 동안 꾸준히 류사현과 윤선아가 돌아온 그 게이트에 숨어들기로 했다.

    “그런데 왜 저는 데려온 거죠.”

    “쉿.”

    벌써 일주일째 투명화로 보스룸까지 몰래 숨어들어 언제 건너올지 모르는 윤선아를 기다리던 나는 류사현의 투덜거림에 묻혀 흐릿하게 들려오는 발소리에 곧바로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웠다.

    “아, 교대 시간 언제 오냐?”

    “5분 남았습니다.”

    적벽 길드원들의 대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보스룸 입구까지 와서 고개를 쭉 빼고 공간을 한 번 둘러본 적벽 길드원들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다시 밖으로 향했다.

    “혼란스러운 귀환자에게 설명해 줄 사람은 있어야죠.”

    이내 발소리가 멀어지자 투명화를 다시 풀고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였다.

    “아니, 그러면 그 귀환자가 나오면 나를 부르든가. 왜 사람 앞에 두고 둘이 이 지랄 같은 게이트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냐고요. 사이좋게 무림 크리처 잡는 게 요즘 신개념 데이트야 뭐야?”

    “목소리가 너무 크네요, 천마 님.”

    나를 끌어안고 있던 천우현이 한마디 했다. 류사현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그러던 그때, 핵이 마구 요동치더니 사람 하나를 뱉어 냈다. 익숙한 얼굴, 무림맹주 윤선아였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듯 멍하니 서 있는 윤선아를 지나쳐 곧바로 핵에 손을 올렸다.

    『차원 #SF3156-1의 근거지입니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차원 #SF3156-1과의 연결을 영구히 끊으시겠습니까?』

    “허가.”

    『차원의 연결을 끊어 냈습니다.』

    『게이트가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 - 00:05:00』

    “네놈들은 뭐지? 혈교 소속인…….”

    입을 열던 윤선아는 류사현을 발견하고 곧바로 검을 빼 들었다.

    “마교였군. 저 빌어먹을 천마 놈의 면상이 보이는 걸 보아하니.”

    “아니요, 한국인데요.”

    류사현이 윤선아의 착각을 정정했다.

    우리 둘의 꽁냥거림에 소외되어 있어서 그런지 같은 세계관에서 건너온 윤선아를 보는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물론 윤선아는 그 모습을 세상 못 볼꼴을 보는 눈으로 보았지만.

    “한국이요? 다시 돌아갈 방법은 없습니까?”

    “아쉽지만, 네. 그 방법은 없어요.”

    그쪽 세계에 신이 있지 않는 이상은 말이지. 나는 윤선아의 사연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스킬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4인』

    게이트가 닫힐 시간이 거의 다 되었기에 나는 셋을 데리고 게이트 밖으로 나왔다. 설명은 바깥에서도 충분했다.

    “드디어 교대구먼. 수고해라.”

    “넵! 헉, 잠깐! 게, 게이트가……!”

    “어……? 게이트 왜 저래?”

    소멸하는 게이트를 보며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적벽 길드원들을 약간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며 한숨 돌렸다. 딱 교대할 때 사라지다니, 타이밍이 좋았네. 들어가는 걸 막으려고 했는데 말이지.

    힘없이 쭈그려 앉아 사형과 사제들을 중얼거리는 윤선아의 옆에서 류사현은 빈정거림을 내뱉고 있었다.

    “나 참, 개고생 하나 안 하고 내가 뚫어 놓은 길로 편하게 돌아왔으면서 배부른 투정 하시긴.”

    “닥쳐라, 천마 놈아! 네놈이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느냐?”

    “문명 세계로 돌아왔으면 문명인처럼 좀 삽시다, 맹주? 여기는 검이 곧 대화가 되는 세계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천마라고 부르지 마시죠?”

    “네놈이나 맹주라고 부르지 말든지!”

    이로써 대한민국의 공식 귀환자를 없앤 나는 싸우는 류사현과 윤선아를 내버려 두고는 후련하게 웃으며 천우현과 함께 뒤돌았다.

    숙제 하나 더 끝!

    * * *

    “수능 보기 싫어요. 학원도 가기 싫고.”

    드래곤슬레이어가 미스릴 검을 땅에 콱콱 꽂으며 입을 댓 발 내밀었다. 아이고, 배부른 투정 한다. 저 녀석 하나 수능 보게 한다고 다 같이 무슨 난리를 쳤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나와 같이 2회 차의 기억을 가진 천우현 역시 그때가 떠오른 듯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광룡을 한 번 더 잡는 게 낫겠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해야 한다니, 이게 무슨 비효율적인 짓이야? 온종일 검 휘두르면 몸이라도 건강해지지.”

    드래곤슬레이어의 투덜거림에 던전의 돌바닥에 앉아 있던 혁명군 수장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지도교수님 밑에서 책이랑 다른 논문 뒤져 가며 석사 논문 쓰느니 혁명 한 번 더 하는 게, 헙!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뒤늦게 자각하고 입을 틀어막은 혁명군 수장을 보며 픽 웃었다.

    한 번씩 그럴 때가 있을 거다.

    돌아온 세상은 생각만큼 우리를 반기지 않고 마냥 평화롭고 행복하지만은 않아서 문득 두고 온 세상이, 그곳에서 이룬 성취가 생각날 때가.

    그럴 때는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그 세계에는 인터넷이 안 터진다는 것만.

    다 필요 없고 인터넷 터지는 세상이 짱임.

    “하얀아, 그런데 이 봉인 던전, 원래 공략이 엄청 까다로웠던 편 아니었나?”

    “그러게? 역시 능력치 문제인가?”

    회귀 전 당시, 예상보다 늘어졌던 성녀&이단심문관 레이드는 공략법을 외우고 있던 나로 인해 한결 수월해졌다.

    그때 천우현이 메디코 델라 페스페에게 잡혀 부상을 입었던 게 나름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드래곤슬레이어가 학원 시간에 맞춰 서울까지 KTX 타고 갈 시간은 턱없이 모자랐기에 전처럼 순간 이동으로 보내긴 해야 했다.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하품하자 부상자들에게 힐을 걸어 주던 성녀가 나를 돌아봤다.

    “밤새셨어요?”

    “어제 해운대에서 너무 신나게 놀다 보니…….”

    지난번 여름 휴가철임에도 바다에 발만 담그고 갔던 게 한이 되었기에 이번에는 아예 짐을 바리바리 챙겨 레이드 이틀 전부터 내려와 부산 해운대에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 파라솔이랑 튜브까지 대여해서 그때의 한을 마음껏 풀었다.

    “아, 부산에 숙소 잡으셨어요? 친구랑요?”

    “아니요, 이쪽이랑.”

    슬그머니 천우현의 팔에 팔짱을 끼니 옆에 있던 백마왕이 꿍얼거렸다.

    “쳇, 나도 같차원에 용사나 하나 보내 주지. 누구는 같은 마왕인데도 차원 이동한 세계에서 애인 만들어 왔는데, 누구는 여태껏 솔로라니…….”

    “님은 사귀기는커녕 그 용사 손에 죽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저렇게 되거나.”

    내가 가리키는 곳 끝에는 서로를 향해 눈을 희번덕이며 검을 휘두르고 있는 류사현과 윤선아가 있었다.

    저러다가 이어지는 경우도 소설에서 종종 보긴 했는데 역시 소설은 소설이었다. 현실에서는 이어지기는커녕 서로를 죽이지만 않으면 다행일 수준.

    진세빈이 없어 레벨레이션 한국 지부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기에 레벨레이션은 건재했지만, 윤선아는 공식 귀환자가 아니었기에 레벨레이션의 공격을 받지 않아 지난번보다 한결 운신이 자유로워졌다.

    대신 대부분의 레이드에 참가하며 류사현과의 사이는 보다시피 더 안 좋아졌다.

    “아악, 나도 여친 사귀고 싶다악!”

    “솔로로 사는 게 마음 편합니다.”

    발광하는 백마왕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농노1이 충고했다. 저를 놀린다고 생각한 건지 눈을 모로 치켜뜨며 백마왕이 따지듯 물었다.

    “왜요?”

    “백마왕 님도 이별을 잘 견딜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 보여서요.”

    “아닌데요? 저 완전 이별에 덤덤한데요? 100년 동안 나름 정들었던 지옥도 뒤도 안 돌아보고 벗어났는데요?”

    백마왕이 이를 악물고 반박했다. 끝내주는 사랑을 하고 돌아오신 농노1 님에게 반박?

    농노1이 지하철 게이트에서 불렀던 자넷과의 러브스토리가 내심 궁금했지만 아무래도 그때 보인 반응으로 봐서는 자넷이 죽은 것 같았기에 차마 묻지는 못했다.

    흠……. 메모리테이크로 한번 털어 봐?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백마왕이 농노1을 향해 빈정거렸다.

    “하, 농노1 님도 이별하고 못 버텼어요? 왜 겪어 본 사람처럼 말해요?”

    “예. 거기서 결혼했는데 부인이 전염병에 걸려서…….”

    “…아, 그, 그러셨구나.”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나온 비극적인 사연에 기어이 농노1이 그 말을 뱉게 만든 백마왕을 향해 따가운 눈길이 쏟아졌다.

    더듬거리며 고개를 끄덕인 백마왕이 제 입을 때리며 농노1을 향해 연신 사죄했다.

    농노1 님, 유부남에 사별남이었구나. 미련 없이 세계 버리고 올 만했네.

    * * *

    이제 내가 작성한 사건, 사고 리스트는 지하철 참사와 네크로맨서 연쇄살인만이 남았다.

    지하철 참사는 참사가 일어난 그날, 2호선 지하철에 타서 게이트 바로 앞에서 지하철을 마기로 멈춰 세웠다.

    “으아악! 왜 이래?”

    “어어? 뭐야? 지하철 고장이야?”

    - 승객 여러분, 현재 선로에 게이트가 발생하여 운영이 불가하오니 승객 여러분들의 올바른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안내 방송 드립니다. 현재 선로에 게이트가 발생…….

    게이트 바로 앞에서 멈춘 덕분에 게이트를 발견한 기관사는 곧바로 신고를 넣고 2호선을 즉시 폐쇄했다.

    지하철은 게이트 안에 휘말리지 않았고 승객들은 급정차에 넘어져 경상을 입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사했다.

    그렇게 신도림-대림역의 사이에 터진 게이트는 희생자 하나 없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네크로맨서 연쇄살인은 지하철 참사처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놈이 게이트 스틸 파티에 참가해 희생자를 노리는 걸 알고 있었기에 게이트 스틸팟만 몇 개를 참가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하루에 열리는 게이트 스틸팟이 한두 개여야지.

    그래서 이미 피해자가 한 서넛 정도 발생한 시점이었다.

    “제 여자 친구가 던전 한번 구경해 보고 싶어 해서요. 한 번만 어떻게 안 될까요?”

    이번 게이트 스틸팟에서도 나는 철없이 헌터 남친 따라온 일반인 여자 친구 흉내를 내며 천우현 옆에 꼭 붙어 있었다.

    물론 내 연기력은 눈물 날 정도로 형편없었기에 연기 담당은 천우현이었다. 나는 옆에서 고개 끄덕이는 배역.

    높아 봤자 C급이 최대인 스틸팟 파티원들은 최고 전력이 될 A급 검사인 천우현의 부탁을 쉬이 거절하지 못했다.

    모두 마스크와 모자를 푹 눌러써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방금 전부터 따갑게 꽂히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정보 털이용 스카우터 역시 익숙한 이름과 직업군을 띄웠다.

    “우현 씨, 찾았어요. 저놈이에요.”

    귀에 대고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이자 천우현이 즉시 팔을 뻗어 나를 감싸고는 놈에게서 몸을 돌렸다.

    품에 안긴 채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천우현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하는 거야?

    『관리자 권한을 사용합니다.』

    『각성자 ‘김민수’의 능력에 개입합니다.』

    『수정 기능을 사용합니다.』

    『등급 변경: S → F』

    『승인이 완료되었습니다.』

    “아아아악! 왜 이래! 안 돼! F급이라니! 내가, F―”

    “시끄러워, 새꺄. 안 죽인 것만도 감사한 줄 알아. 경찰서까지는 데려가 줄 테니까 자수 꼭 하고.”

    그리고 눈물겨운 잠복 수사 끝, 드디어 네크로맨서를 붙잡아 등급을 F급으로 변경했다. 자수하라는 언령에 네크로맨서가 몸을 움찔거렸다.

    경찰서 앞에 놈을 던져 놓고 가볍게 기지개를 켜 뻐근한 몸을 풀었다.

    이제 사건, 사고 리스트에는 모두 줄이 그어졌다. 지랄 같은 1회 차를 보완한 2회 차보다 훨씬 나아진 3회 차 세계를 돌아보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오, 이래서 경력자를 우대하는구나.

    * * *

    뒤로 돌려진 만큼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벌써 우리는 세상의 끝이었던 그날을 한 달 남겨 놓고 있었다.

    물론 그때와 달리 던전 브레이크와 몬스터 웨이브가 터지는 일도, 대침공이 예견되는 일도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순한 맛 헌터물 현대 판타지로 굴러가고 있었다.

    쌀쌀한 바닷바람이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파도가 철썩, 바위 위로 올라왔다. 저 멀리에 용두암이 작게 보였다.

    2회 차 때 천우현에게 고백받았던 바로 그곳이었다.

    “여기는 두 번째 와도 나오고 들어가기 한번 힘드네.”

    투덜거리며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서히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사실 이건 꿈이 아닐까. 눈 뜨면 다 무너져 멸망한 이 세계거나, 아니면 마계 마왕성의 내 침실이…….

    “채현 씨.”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상념을 끊었다. 굳은살이 박인 따듯한 손이 차게 언 내 손을 잡아 왔다.

    “지금까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죠?”

    조심스러운 물음에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간의 침묵 후 살며시 덧붙였다.

    “어차피 돌아가는 건 50년 후라 괜찮아요. 인간 평균 수명 채우고 돌아가는 거잖아요.”

    크라토스를 지닌 이상 나는 늙지 않을 텐데 늙는 모습이라도 덧씌워야 하나. 바다를 멍하니 보며 고민했다.

    점점 노을이 짙게 내려앉는 하늘과 노을이 비쳐 붉게 물드는 황혼 녘의 바다를 말없이 바라보던 천우현이 입을 열었다.

    “다시 마계로 돌아가면 채현 씨가 저를 잊었으면 좋겠습니다.”

    “왜요? 잊고 다른 남자 만나라고?”

    농담 반, 분노와 이죽거림 반이 섞인 물음에 천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잊고 남은 삶을 행복하게 보내십시오.”

    그 대답에 자각했다.

    천신의 가호가 거둬진 천우현은 인간의 평균 수명을 살다 죽을 것이다. 내게 유예된 50년 안이든, 그 뒤든.

    아마 나는 당신 옆에 있지 못했던 시간의 몇 배를 당신 옆에 있고, 그 몇십 배의 시간을 당신이 없는 채로 살아가겠지.

    그리고 난 그 추억을 놓지 못하고 끌어안은 채로 서서히 말라 죽어 가겠지.

    당신은 내 생의 찰나를 스쳐 가겠지만 내 삶의 영원을 차지하겠구나.

    멱살을 잡고 거칠게 끌어당겨 그대로 입을 맞췄다. 노을빛이 드리운 바다를 배경으로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나는 직감했다.

    오늘의 기억으로 나는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 삭막한 세계에서 나를 덮쳐 올 고독을 버텨 낼 수 있음을.

    어느 세계든 노을이 지는 한, 당신을 잊을 수 없음을.

    입술을 떼고 내리깐 눈을 마주한 채로 속삭였다.

    “그러면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 내 옆에 있어요. 어디 가지 말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있겠습니다.”

    이번에는 천우현 쪽에서 먼저 입술을 맞대 왔다. 멱살을 쥔 손을 풀고 목을 끌어안은 채로 생각했다.

    Happily ever after를 맞이한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항상 이곳에서 끝난다. 고백을 받고 서로의 마음을, 사랑을 확인한 가장 행복한 시점에서.

    그러니 이 이야기 역시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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