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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도박의 결과는? (30/33)
  • Epilogue. 도박의 결과는?

    입 밖으로 꺼내면 또 마신이 불경하다고 잔소리할까 봐 굳이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순백의 대리석으로 만든 기도실은 마신을 모시는 곳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천신의 기도실에 더 가까워 보였다.

    “마계로 돌아왔으면 가장 먼저 내 신전을 찾는 것이 마왕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제단에 걸터앉은 마신은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며 나를 타박했다. 품에 안긴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제가 좀 바빴거든요.”

    “바빠도 도리는 해야지.”

    못마땅하다는 듯 연신 혀를 차는 마신에게서 명절날 오지 않았다고 잔소리하는 친척 어르신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전에는 천우현이랑 이곳까지 같이 왔었는데.

    추억에 더 젖어 들기 전에 인사고 예의고 다 집어치우고 이곳까지 걸음 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저랑 내기 하나 하시죠.”

    마신이 소원을 들어주는 건 마지막이라 제 입으로 내뱉은 이상 더는 대가 없이 내 소원을 들어줄 리 없었다.

    그러니 내가 꺼낼 수 있는 패는 이것뿐이었다.

    “일단 들어나 보지.”

    관심 두지 않는 척하면서도 흥미를 숨기지 못하는 눈길이 나를 향했다.

    이것 하나만을 믿고 다시 마계로 돌아왔다. 지금 내가 마신에게 제안할 내기는 내 전부를 건 도박이었다.

    “제 카르마를 마신께서 잠시 맡은 상태로 저를 다시 제가 처음에 돌아갔던 시간대의 제 차원으로 보내 주세요.”

    흥미가 금세 식어 버린 눈으로 나를 바라본 마신이 별로 끌리지 않는다는 듯 비음을 냈다. 내기 내용이나 듣고 그런 눈을 하시지?

    “그곳에서 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면 제 승리, 아무도 저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마신님의 승리입니다.”

    본격적인 내기 내용을 꺼내 들자 다시 마신의 적안에 흥미가 비쳤다.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인 마신이 턱을 쓸며 느긋하게 물었다.

    “네가 지면 무엇을 내놓을 테냐?”

    “까짓것, 천계 정복해 드리죠. 하지만 마신께서 패하신다면 제 기록을 되살려 주시고 제가 그 세계에 있을 50년간 마족 놈들 못 넘어오게 막으면서 제 카르마를 부담해 주시면 됩니다.”

    신은 타 존재의 카르마를 떠맡을 수 있다. 그게 내가 이 내기를 고안한 이유였다.

    물론 내가 승리하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그 세계에서 내 존재는 완전히 지워졌기에.

    주태윤이 진세빈을 기억해 내긴 했지만 그건 두 사람이 지독한 악연으로 칭칭 엮여 진세빈을 지운 주태윤의 삶이란 있을 수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례로 주태윤은 마지막 순간까지 진세빈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지 않는가. 자기 딴에는 벗어났다고 하고 싶었던 것 같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전혀.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누군가랑 애증으로 찐하게 엮이는 거였는데.

    아쉬움에 혀를 차자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던 마신이 승낙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재미있겠군.”

    “참, 이 녀석 밥 안 굶는지도 좀 봐 주시고요. 삼시 세끼 꼭 주고 우울증 안 걸리게 하루에 한 시간씩은 꼭 놀아 주세요.”

    페리를 마신의 품에 턱 안겨 주며 신신당부했다. 얼결에 페리를 받아 든 마신이 몹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자기 피조물 좀 잠시 임보해 달라는데, 뭐 잘못됐어?

    “조건을 하나 더 걸지.”

    제 무릎에 앉은 페리를 쓰다듬던 마신이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해가 지기 전까지 너를 기억해 내고 네 이름을 불러야지 네 승리다.”

    “와, 너무 깐깐한 거 아니에요?”

    “어차피 승리할 거라 생각하지 않고 가는 거 아니냐. 마지막 인사나 할 겸. 그리고 네 카르마를 부담하는 게 쉬운 일인지 아나?”

    마신의 말대로 내가 승리할 확률은 1%도 채 되지 않았다. 기적을 바라기에는 턱없이 적은 확률.

    그래서 도박이라는 거지.

    그 1%의 기적을 위해 세이블에게 50년간 마계를 맡기고 왔다. 뭐, 실패하면 다시 내가 실권 잡으면 되고.

    대답 없이 삐딱하게 미소 짓자 킬킬 웃은 마신이 손을 내저었다.

    “네 고양이는 네가 돌아올 때까지 자알 돌봐 주마.”

    페리가 잘 다녀오라는 듯 냐앍, 울었다. 처음 귀환할 때와 똑같은 환한 빛이 기도실 안을 번쩍 메웠다.

    * * *

    “물러나세요! 여기 진입 금지입니다!”

    “지원 부탁드립니다! 한국대 자연과학대학 건물입니다!”

    분명 기억 속에 있던 풍경에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옷은 어느새 내가 자주 즐겨 입던 과잠 차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긴급재난문자

    [서울특별시청] 03월 28일 09:46

    한국대학교 자연과학대학 건물에 게이트 발생. 일반인 진입 금지 요망.

    가까운 대피소 찾기: http://safezone.kr/XSO7

    재난 문자를 보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기억났다. 맞다, 대학 건물에 게이트가 터졌었지. 덕분에 잠시 휴강이었고.

    멍하니 게이트를 보던 같은 과 친구가 나를 돌아보더니 주저하며 물었다.

    “저기, 혹시 자연대생이세요?”

    나름 각오했지만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과 친구의 모습에 입 안이 썼다.

    “아니요. 그런데 아마 휴강일 거예요.”

    애써 웃으며 대답해 주고는 곧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순간 이동(S) - 저장된 좌표』

    - 자취방

    - 본가

    - 자연대 건물…….

    저장된 순간 이동 좌표는 그대로였다. 떨리는 손을 들어 본가를 터치했다. 어차피 이 시간에는 부모님이 집에 계시지 않을 걸 알면서도.

    『스킬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1인』

    역시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부모님의 퇴근 시간까지 기다리면 해가 져 내기 시간이 끝나기에 부모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내 얼굴이 사라진 가족사진을 보며 무거운 실소를 내뱉었다.

    내 방문을 열어 보았지만 방은 잡동사니를 넣어 놓는 방으로 변해 있었다.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하나를 앨범에서 꺼내 인벤토리에 소중하게 넣었다.

    마지막으로 집을 한 번 둘러보고는 미련 없이 문을 열고 나왔다. 집 근처를 잠시 걷다가 다음 장소로 향했다.

    집 다음으로 내가 향한 곳은 헌터 협회였다.

    “제가 꼭 백야 헌터를 만나야 한다니까요? 꼭이요!”

    내 억지에 로비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당황하며 선약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그쪽에서 안 된다고 하면 이쪽에서 쳐들어가면 되지. 백아현 사무실이 몇 층이었지?

    발을 동동 구르다가 무심코 출입문을 본 내 얼굴이 멍하니 변했다.

    내 기억 속 마지막 모습처럼 싸늘히 식은 채 눈을 감은 백아현이 아닌, 멀쩡히 살아서 웃고 있는 백아현이 앞에 있었다.

    “…백야.”

    나도 모르게 입에 붙어 익숙한 애칭을 부르자 김도빈 및 다른 협회 간부들과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아현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싶은 찰나에 한쪽 눈을 찌푸린 아현이가 고개를 휙 돌렸다.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요? 처음 보는 사람인데.”

    선명히 들려오는 대화에 허탈하게 웃었다.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욱신거렸다.

    야, 우리가 몇 년 지기인데. 좀 기억해 주지. 나 돌아가기까지 일곱 시간도 안 남았는데.

    관리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윤세인은 전혀 나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

    “나 몰라? 나 기억 못 해, 진짜?”

    “어……. 초등학교 동창?”

    어깨까지 잡고 흔들어 봤지만 오히려 기억을 못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 오는 윤세인에 맥이 탁 풀려 중얼거렸다.

    “됐어, 네 잘못 아니니까.”

    다 내 업보고, 내 선택이지.

    관리국 다음으로 간 자취방 빌라의 201호는 비어 있었다.

    자기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우두커니 201호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집 보러 왔냐고 물은 민서 언니가 집주인 아주머니께 당장 전화를 걸려는 것을 겨우 막았다.

    “언니, 저 기억 못 해요? 전 언니가 윰서인 것도 아는데.”

    “뭐야, 어떻게 알아? 그쪽, 나랑 레이드 뛴 적 있어?”

    “몇 번 있죠. 잘 지내요, 언니.”

    눈이 휘둥그레진 민서 언니의 물음을 뒤로하고 후련하게 작별 인사를 뱉으며 뒤돌았다. 빌라를 나오니 익숙한 두 남자가 보였다.

    “여기로 이사 올 거라고? 집치고는 너무 작지 않나?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같이 사는 것도 언제나 환영이라니까?”

    “내가 미쳤다고 너랑 같이 살겠냐.”

    주태윤과 이재의였다. 시시껄렁한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은 사석이라 그런지 확실히 친해 보였다.

    주태윤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주태윤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설마 하는 순간…….

    “저분이 먼저 집 보러 오신 거 아니야? 이재의 너, 선수 뺏기게 생겼는데?”

    “어, 아니야. 빈집 두 채 있다고 했어.”

    그냥 팬서비스였구나. 하여간 망할 인간 같으니.

    멀어지는 두 남자에게도 심심한 작별의 말을 마음속으로 건네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골목길에서 멈춰 서 아직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민했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내 담당 교수님이라도 만나 볼까? 엉망인 논문 초고를 들이밀면 학사의 논문 수준을 보고 충격에 휩싸여 교수님의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무정하게 계속 흘러갔다.

    내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은 천우현의 집 앞이었다.

    띵동―

    초인종을 눌렀지만 응답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추적 스킬이나 달아 놓을걸. 허탈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미련 버려야지, 이제.”

    위를 올려다본 채로 긴 내리막길을 내려가며 중얼거리다가 누군가와 퍽, 부딪혔다. 균형을 잃고 휘청이는 나를 단단한 손이 턱 붙잡았다.

    “죄송…….”

    “괜찮으세요?”

    참으로 익숙한, 다정하게 내게 물어 오는 목소리에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걱정이 담긴 눈과 마주했다.

    “괜찮, 괜찮아요.”

    나를 낯선 사람 보듯 바라보는 눈동자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급히 뛰듯이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기대가 크면 실망 역시 크다는 걸 알기에 희망을 버리려고 노력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점점 노을이 가시고 어둠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내기의 결과를 직감하고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작별 인사는 끝마쳤으니 이제 그만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필사적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잊지 말라고, 했잖아요.”

    얼마나 뛰어온 건지 숨을 헐떡이면서도 나를 놓지 않은 천우현이 내 어깨에 이마를 댔다. 그가 애원하듯 중얼거렸다.

    “…가지 마요, 채현 씨.”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 노을은 아직 완전히 지지 않았다.

    저 차원 너머에서 한순간에 뒤집힌 내기의 승패 결과를 보고 있을 마신의 헛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내기의 결과에 따라 지워졌던 세계의 기록이 되살아났다. 다시 이 세계의 일원이 된 나를 반기듯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나와 천우현을 감쌌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몸을 돌려 천우현을 마주 끌어안으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안녕, 우현 씨.”

    그리고 안녕, 내 세계. 비록 내 시간에서는 찰나겠지만 다시 한번 잘 부탁해.

    『던전 브레이크의 원인이 되어 버렸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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