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선택의 무게 (29/33)
  • 29. 선택의 무게

    “…타 차원들의 침공까지 한 달 남았다고요.”

    헌터 협회의 협회장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나와 천세연을 보며 우리가 한 말을 뇌까린 김도빈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봐도 처음 듣는 것 같은 모습에 눈을 깜빡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관리자가 말 안 해 줬어요?”

    이런 중요한 것도 미리 안 말해 주면 관리자1은 정말 하는 일이 뭐임?

    『저는 세계에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못하는 게 규칙이에요. ( ´△`)』

    『피할 수 없는, 예정된 미래를 알려 주는 순간 전 징계라고요. ◟(`ﮧ´ ◟)』

    날먹으로 오해받은 것이 어지간히 억울했던 듯 관리자1이 툭 튀어나왔다. 그런 징계를 감수하면서까지 인류를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겠단 각오로 말해 주는 게 이 차원 초월자의 의무 아니냐?

    『그러면 님은 다시 돌아가서 님 차원 기강 잡는 게 그 차원 초월자의 의무 아닌가요, 마왕 놈아? (ꐦ°꒫°)』

    에휴, 말을 말자. 절대 내가 말싸움에서 밀릴 것 같아서 물러나는 건 아니다.

    날카로운 눈으로 나와 천세연을 천천히 뜯어보던 김도빈이 천세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천세연 씨, 지난번에는 분명 이채현 씨가 세계를 멸망시켰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움찔하며 시선을 피하는 천세연을 대신해서 심드렁하게 김도빈의 말을 받아쳤다.

    “시간을 거슬러 왔으면 기억이 오락가락할 수도 있지, 왜 추궁하고 그래요?”

    “세계의 명운이 달린 일이니 신중하고 확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채현 씨가 원흉이라면 이채현 씨 하나만 막으면 되지만…….”

    잠시 말을 멈춤으로써 긴장을 극대화시킨 김도빈이 서늘하게 웃으며 말을 끝맺었다.

    “타 차원의 침공이라면 전 세계적으로 전쟁 준비를 해야 해서 말입니다.”

    “나를 막으신다고? 무슨 수로?”

    어깨를 으쓱하며 부러 얄밉게 말하자 올라가 있던 김도빈의 입꼬리가 꿈틀했다.

    “방법이야 많죠.”

    “그래요, 그 방법 정말 안 궁금하니까 고이 묻어 두시고 손이나 내밀어 봐요.”

    경계하면서도 순순히 손을 내미는 김도빈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내민 손을 꽉 맞잡았다.

    『스킬 ‘메모리테이크(L)’를 실행합니다.』

    메모리테이크는 타인의 기억을 내 기억처럼 가져오는 것도 가능하지만, 반대로 내 기억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 역시 가능했다.

    내가 보았던 천세연의 조작되지 않은 멀쩡한 과거 기억이 김도빈에게로 흘러갔다.

    1초 즈음 되는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기억을 모조리 읽은 김도빈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한 달 남았고, 다른 침공은 더 빠를 거예요.”

    내 말에 김도빈이 나를 바라보았다.

    “막을 방도는 없습니까?”

    “…없어요.”

    한 템포 늦은 내 대답에 김도빈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나를 응시했지만 나는 그에게 확답도, 애매모호한 대답도 줄 생각이 없었다.

    아직 나조차도 확실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에.

    “전 세계적으로 인구수가 밀집된 수도 쪽에 게이트가 많이 열린 거로 기억해요. 그래서 최전선도 정선 게이트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거의 서울 쪽에 구축되어 있었고요.”

    “그러면 그때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 쪽 피해는 어땠습니까? 가장 피해가 적었던 지역이 어디입니까?”

    “전남 쪽이랑 경남 쪽이 피해가 그나마 적었던 거로 기억해요. 그래서 그쪽까지 피난을 많이 갔죠. 제주도는 해상에 게이트가 터져서 제주도로 대피하던 배가 전복되었던 거로…….”

    천세연이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며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과 적었던 지역을 짚고 김도빈이 그것을 경청하는 모습을 보다가 눈을 꾹 감았다.

    내가 이때까지 생각해 왔던 방법은 크라토스를 넘기고 내가 건너온 차원과의 연결을 끊는 것이었다.

    하지만 메모리테이크로 보았던 삶의 마지막 순간 알게 된 진실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귀농한 33대 마왕의 일기에서도 엿볼 수 있었던 사실. 내가 필사적으로 외면했던 진실.

    전대 마왕이 후계자에게 크라토스르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크라토스가 차기 마왕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선택 기준은 오직 하나. 7대 마왕이 제 심장까지 바쳐 가며 바랐던 1마계의 부흥.

    퍼즐 조각이 온전히 맞춰졌다.

    전대 마왕 이포스가 자신은 내게 크라토스를 넘긴 적이 없다고 했던 이유. 내 마음대로 넘길 수도 없고, 넘긴다 한들 곧바로 죽는다고 했던 이유.

    그리고 크라토스가 역대 마왕의 능력과 지식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이유.

    크라토스는 소유자의 능력과 지식, 생존력을 먹어 치우고 크라토스 스스로가 선택한 다음 마왕에게로 넘어간다.

    그러므로 크라토스가 차기 마왕에게 넘어가면 그 전 소유자는 반드시 죽는다.

    우습게도 크라토스가 차기 마왕을 선택하기 전까지는 스스로 죽을 수도 없었다. 그것은 제2의 심장 역할을 했으니.

    이포스 역시 내가 그 차원에, 그의 눈앞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날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소리였다.

    그래, 내가 너무 순수하고 겁 많던 차원 이동 뉴비의 시점에서 봐서 그랬지, 솔직히 지금 생각해 보면 전대 마왕이 입은 부상이 죽을 정도의 치명상은 아니긴 했어.

    그러면 내가 크라토스를 내가 선택한 마족에게 넘기지 못한다는 이 부분에서 또 문제가 생긴다.

    내가 생각해 놓았던 후보인 세이블이야 온전히 내 편이었기에 크라토스를 넘겨받으면 차원 연결을 끊고 침략을 그만둘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다른 지랄 같은 마족 놈, 예를 들면 기르카스 같은 놈이 그걸 넘겨받으면…….

    ‘이 세계는 개판이 되겠지.’

    분명 이 차원까지 정복해서 마계의 영토를 늘리자고 1마계 마족들까지 동원해서 적극적으로 이곳을 공격해 댈 것이다.

    크라토스를 넘긴 나는 그것의 양분이자 구성 성분이 되어서 기껏해야 후대 놈의 꿈에 등장해 악몽으로 놈을 괴롭히는 것밖에 못 할 거고.

    이런 젠장, 답이 없잖아.

    저주가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도록 끊임없이 방해할 거라는 7마계 마왕 놈의 예언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데, 어디 용한 무당 찾아가서 저주를 푸는 굿판이라도 벌여야 하나.

    그런데 타 차원 마족이 한 저주도 우리나라 무당이 풀 수 있나? 아니면 가톨릭 구마 사제라도 찾아가야 하나?

    “이채현 씨.”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어느새 굿판까지 뻗어 가던 생각을 멈추고 김도빈을 바라보았다.

    “만약 이채현 씨가 돌아온 차원과 지구의 헌터들이 맞부딪혔을 때 이채현 씨는 어느 편에 서실 겁니까?”

    그 질문에 절로 피식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연한 질문을 하시네. 물론…….

    “우리 편에 서야죠.”

    망설임 없이 나온 내 대답에 김도빈이 우리 편이라는 말의 의의를 해석하려는 듯 눈살을 지그시 찌푸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내 대답이 그렇게 복잡하고 꼬였나? 뜯어보면 엄청 간단한데 말이야.

    마계에 떨어졌을 때부터 돌아온 지금까지 난 한 번도 내가 이 세계의 편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처럼 귀환자로서 이런 적대를 받을지라도.

    * * *

    김도빈과의 면담이 끝나고 약간 지친 채로 협회장 사무실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로비로 나오니 사람들의 눈길이 따갑게 꽂혀 왔다.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누구는 던전 브레이크 언제 터질지 몰라서 외출도 잘 못 하는데.”

    “자기는 위험하지 않다, 이거지.”

    “진짜 좀 눈에 안 보였으면 좋겠다. 자기가 세계 이 지경 만들어 놓고 무슨 양심으로 꼿꼿하게 고개 들고 돌아다녀?”

    그 말을 들으며 더욱 꼿꼿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럼 댁들이 다른 세계로 뚝 떨어져 보시든가. 막상 닥치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질질 짤 놈들이 말이 많아.

    “내가 너튜브에서 봤는데 일부러 던전 브레이크 터트렸대. 자기는 개고생하고 돌아왔는데 여기는 너무 편하게 사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들었다, 이거지.”

    좋아, 여기서 대규모 게이트 침략까지 터지면 이제 흑화한 마왕의 지구 정복설까지 퍼지게 생겼군. 제발 게이트 터지면서 인터넷까지 터지기를 바라자.

    출입문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고 너튜브에서 본 이상한 썰을 사실처럼 푸는 사람 앞으로 곧장 다가갔다.

    “혹시 님도 ‘우리는 너튜브만 믿어! 너튜브가 진실이야!’ 파예요?”

    “네, 네……? 갑자기 그건 왜……?”

    나와 마주하자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려 시동을 거는 이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가며 삐딱하게 웃었다.

    “저랑 말 한 번 안 섞은 너튜버 말을 제가 한 말처럼 퍼트리고 다니시는 게 좀 웃겨서요. 제가 일부러 던전 브레이크 터트린 거 절대 아니니까 제가 정정한 버전으로 많이많이 퍼트려 주세요.”

    상대의 어깨를 탁탁, 두어 번 두드려 주고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리자 뒤에서 내 정신상태를 의심하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내가 이래서 힘숨찐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고. 이런 과도하고 부정적인 관심은 딱 질색이란 말이야.

    “언니, 괜찮아요?”

    예전보다 훨씬 나를 대하는 게 유해지고 편해진 듯한 천세연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으응, 그냥 병아리가 지렁이 싫으니까 다른 밥 달라면서 짹짹댄다고 생각하면 참을 만해.”

    물론 병아리는 귀엽고 저 인간들은 전혀 귀엽지 않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바퀴벌레나 꼽등이로 상상하면 너무 징그러워서 척살하고 싶어질 것 같단 말이지.

    “꽤나 구체적이네요.”

    떨떠름하게 답하는 천세연을 보며 지나가듯 물음을 던졌다.

    “그나저나 넌 어쩔 셈이야? 이전처럼 안전지대 대피소에 있을 거야?”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가 뜬 천세연은 택시를 부르는 건지 휴대폰 화면을 연신 터치하며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단단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오빠 따라 최전선으로 갈 거예요. 이번에는 꼭 오빠가 죽게 두지 않으려고요.”

    “아서라. 너희 오빠보다 네가 먼저 죽는다.”

    내 시큰둥한 대꾸에 천세연이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긴 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그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분명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니까 만약 제가 먼저 죽으면 이번에는 언니가 저희 오빠 좀 살려 주세요.”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도착한 택시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떠났다.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보다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네가 말 안 해도 그러려고 했어, 인마.”

    그러니까 데드 플래그 좀 꼽지 마라.

    * * *

    전쟁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음에도 세계는 지나치게 평화로웠고, 또 조용했다.

    “왜 갑자기 대피소 구축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주말에까지 일 시키네, X발. 관리국이 워라벨 최악으로는 톱 찍을 듯.”

    물론 겉보기로는 말이다. 수면 아래에서는 착실히 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눈 밑이 시커메진 윤세인이 욕을 내뱉었지만 초과 근무의 원인 비스무리한 내가 건넬 수 있는 위로는 딱히 없었다.

    “우와, 파이팅. 대피소 컵라면은 꼭 너X리로 부탁해.”

    “나 같은 말단 직원에게 컵라면 종류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줄 아냐?”

    윤세인이 집어 던진 베개를 염력으로 그의 얼굴에 되돌려 주고는 다시 꽃꺾마 스크롤을 내렸다.

    황태자랑 대공 목숨이 좀 간당간당한데… 내가 아무리 마탑주파라지만 남주 후보 둘이 죽어 버리는 건 좀…….

    “지금 우리 셋 다 나란히 전쟁 끌려가게 생겼는데 너네는 지금 장난을 치고 싶어?”

    “전쟁? 뭔 전쟁? 북한에서 핵 쏜대? 우리나라 북한이랑 결국 전쟁 나는 거야? 아니면 세계 3차 대전?”

    내 자취방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쉰 백아현이 타박하자 윤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발총처럼 질문했다.

    협회와 관리국 간부 정도만 알음알음 아는 전쟁 소식이었다. 그러니 거의 말단이나 다름없는 윤세인이 알 리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은 백아현이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윤세인의 머릿속에는 전쟁이라는 단어가 콱 박힌 후였다.

    “게이트 한꺼번에 X나게 열린대.”

    내 깔끔한 설명에 아현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것만큼 정확한 설명이 어디 있어?

    “아아, 그래서 우리 각성자 관리국 요원들을 굴리는 거구나.”

    윤세인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는 침략자들을 향한 분노가 선명했다.

    다들 끝까지 무사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보았던 기억 속 윤세인은 나와 함께 있었지만 백아현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회귀 전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는 것만 알았지 회복했는지조차 몰랐다.

    “다들 몸 사려. 절대 최전방은 가지 말고.”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겠어?”

    내 말에 쓰게 웃은 백아현이 중얼거렸다.

    그저 애쉬가 최대한 잔당들을 마계에 잔류시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우리 셋이 얼굴을 볼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일주일 후, 서서히 세계 곳곳에 이전보다도 빠른 속도로 게이트가 오픈되기 시작했다. 열리는 속도가 닫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만큼 빠르게.

    - 곧 대규모 차원 침략이 일어날 예정입니다. 침략자들로부터 지구를 지켜 내기 위해서는 전 세계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세계 최초의 귀환자, 사무엘 르웬이 공식 발표했다. 저기도 나처럼 타 차원과의 커넥트가 있는 건지, 아니면 우리나라에서 전해 들은 건지.

    아무튼 반응을 보니 왜 공식 발표를 늦췄는지 알 것 같긴 했다.

    지금 이렇게 게이트가 우후죽순 열리고 있는데도 헌터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일부러 거짓 소문을 퍼트린다는 등의 온갖 음모론이 판치고 있는데, 만약 며칠 전의 평화로웠던 시기에 차원 전쟁이 난다고 발표했으면 반응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귀환자들은 어쨌거나 말로 처맞았겠지.

    〉Local Channel-ROK

    〉귀환자 단체 채팅방

    〉〉공지 사항: 이름은 차원 이동한 곳에서의 직업, 혹은 세계관으로 부탁드립니다

    드래곤슬레이어: 어차피 전쟁 날 건데 수능 괜히 봤네여ㅠ

    드래곤슬레이어: 지금 수시 면접 날짜도 계속 미뤄지는 중

    스팀펑크: 드래곤슬레이어 님이 그렇게 말하시면 님 수능 보라고 귀밍아웃한 사람들은 뭐가 됨요?

    드래곤슬레이어: 죄송합니다…….

    마탄의저격수: 딱히 상관없는데요

    백마왕: 맞아요 스팀펑크 님은 자발적으로 정체 까신 것도 아니면서,,,

    이단심문관: 이번 달 토익 시험도 뒤로 미뤄졌던데 진짜 전쟁 일어나나 보네요

    암살길드 수장: 오예 세상 망해라

    전국 대학 수시 면접과 국가시험들은 줄줄이 뒤로 미뤄졌고 전국 초, 중, 고등학교에서는 수업 대신 대피 훈련과 안전교육을 실시했다.

    TV에서도 전국 대피소의 위치와 재난 상황 당시 지켜야 할 행동 수칙을 끊임없이 떠들어 댔다.

    그리고, 누구누구 씨의 폭탄선언 덕분에 나를 향하던 비난과 공격은 확 줄었다.

    - 저 역시 타 차원에서 지구로 돌아온 귀환자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지금 퍼지고 있는 ‘귀환자들이 던전 브레이크를 주도했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며, 저희 역시 곧 있을 차원적 침략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터이니 부디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귀밍아웃을 기자회견 열어서 하는 인간이 어디 있어. 자기가 사무엘 르웬이야, 뭐야.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천우현을 화면 너머로 지켜보며 볼을 긁적였다.

    온전히 내 책임만이 아니라고 했을 때, 같이 책임진다고 했을 때 말렸어야 했을까. 나는 좀 온건한 공개 방식을 생각했지 저렇게 9시 뉴스 기자회견은 상상도 못 했다고.

    랭킹 1위가 귀환자라고 밝혀지자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까지는 좀 오버고. 차원 침략 이슈에 좀 묻힌 감이 있었다.

    민폐 끼치는 귀환녀, 지 생각만 하는 이기적인 X이라고 욕만 먹던 나 때와 달리 천우현은 동정 여론도 꽤 있더라.

    가족이라곤 여동생 하나 있던데 그 여동생 생각해서라도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겠냐, 돌아와서도 숨지 않고 열심히 게이트 닫고 다니지 않았냐, 그래도 천우현 정도 강자가 있어서 한숨 놓이지 않냐, 지금까지 입 꾹 다물고 숨어 있는 귀환자들보다는 훨씬 양심적이다, 기타 등등.

    하여간 사연 있는 잘생긴 남자한테는 더럽게 유해.

    나는 우리 부모님 생각 안 했겠냐? 나는 X발, 비자발적으로 내가 귀환자라고 밝혔냐고. 그리고 열심히 게이트 차원 연결 끊고 다닌 사람이 누군데. 더럽게 억울하네.

    아무튼 억울한 건 억울한 거고, 덕분에 나한테 오던 공격은 반토막 났기에 나는 꽤 만족했다. 천우현이 욕 100 대신 욕 60, 동정 40 정도를 먹었기에 더더욱.

    D-14.

    [Web발신] 각성자 관리국

    12월 4일 14:30

    등록번호 356178-013745 이채 헌터(Rank A)

    소집 장소 확인 후 본인 근처 소집 장소로 긴급히 소집 요망

    소집 위치 확인하기: http://location.kr/XUN1

    비상소집령 문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울렸다. 그제는 몬스터 웨이브, 어제는 던전 브레이크, 오늘은 몬스터 웨이브였다.

    차라리 몬스터 웨이브보다는 던전 브레이크가 훨씬 나았다. 일단 게이트 안에 들어가서 던전 핵을 박살 내던지, 내가 연결을 끊던지 하면 그나마 빨리 끝났기 때문이다.

    몬스터 웨이브는 다 쏟아져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몬스터를 잡아야 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예전(예전이라 해 봤자 불과 몇 달 전이지만)처럼 한 지역에 하나씩의 도리 있는 배치가 아니라 한 상공에 세 개씩 게이트가 열리는 무개념 몬스터 웨이브라는 거였다.

    소집 장소는 자취방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기에 대충 과잠을 걸치고는 슬리퍼를 끌며 문을 열었다.

    이제는 의미 없는 힘숨찐을 집어 던진 민서 언니도 타이밍 좋게 문을 열고 나왔다. 내 어깨에 팔을 턱 얹은 민서 언니가 능글거리며 나를 불렀다.

    “여어, 마왕님.”

    “기왕이면 폐하라 불러 주세요. 저는 그쪽이 더 익숙한지라.”

    “염병, 자유민주주의 평등 국가에서 뭔 놈의 폐하여. 여기가 왕정이냐?”

    “아, 그러면 마왕님이라고 부르지를 말든지.”

    투닥거리며 빌라 건물을 벗어나자 마찬가지로 슬리퍼 바람으로 건물 앞에 나와 몬스터 웨이브가 터진 쪽을 구경하고 있던 집주인 아주머니가 소집 장소로 향하는 우리 둘을 보며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201호 학생이랑 202호 처자 둘 다 다치지 말고 잘 다녀와.”

    집주인 아주머니께 음료수 세트를 사다 바치며 내가 쳐 놓은 배리어 때문에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라 은근슬쩍 흘린 보람이 있었다.

    어차피 곧 안전지대 대피소로 향하면 이 건물은 박살 나겠지만.

    “귀찮아 죽겠네.”

    이건 또 어느 집 차원 몬스터야? 가고일을 닮아 있는 몬스터가 떼거리로 몰려나오는 꼴을 보며 물고 있던 막대사탕의 막대를 잘근잘근 씹었다.

    민서 언니는 이미 우루루 지상으로 몰려 내려오는 몬스터들에게 달려들어 시원시원하게 그것들을 베어 나가고 있었다.

    거참, 성격 급하긴. 기다리라는 말도 안 듣고 가냐.

    귀찮아 죽겠다는 내 투덜거림을 용케 들은 검사 하나가 이쪽으로 날아드는 몬스터를 베어 내고는 휙 고개를 돌렸다.

    나를 노려보는 눈초리가 퍽 날카로웠다.

    “저기요, 지금 귀찮다는 소리가 나와요? 지금 그쪽 때문에 이 개고생하는 거 안 보여요?”

    “왜 저 때문이에요? 유감이지만 얘는 우리 집 몬스터가 아닌데요.”

    쏘아붙이는 말에 심드렁하니 대꾸하며 오케스트라 지휘하듯 손을 휘저었다.

    『스킬 ‘수르트의 화염(L)’을 실행합니다.』

    건물과 사람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모든 걸 태우기 전까지 결코 꺼지지 않는 불을 허공에 불러일으켰다. 거대한 화염이 상공의 몬스터에서 몬스터에게로 옮겨붙는다.

    떨어지는 불꽃은 바닥에 닿기 전에 내 손짓에 의해 소멸했다. 세밀한 컨트롤을 계속해서 유지하다 보니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앞으로 이 방법은 쓰지 말아야겠군. 컨트롤하기도 힘들뿐더러 마력을 쓸데없이 너무 많이 낭비한다. 그리고,

    “키에엑!”

    후방도 경계하기 힘들고. 검사 같은 근거리 딜러들이 수르트의 화염에 말려든 몬스터를 공격하기 힘들다는 단점도 있다.

    “검 휘두르지 말고 원거리 딜러가 잡게 내버려 둬요!”

    화염으로 덮인 채로 내 뒤를 덮치려던 몬스터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이를 잡아끌며 몸을 피했다. 검에 불이 붙었으면 이 사람도 한 줌 재가 됐겠지.

    낮은 비행을 하던 그 몬스터는 궁수의 화살에 맞아 바닥으로 추락했다. 마기가 채 꺼지지 않은 불씨를 감싸 화염이 땅으로 퍼지지 않도록 막았다.

    강력한 화염을 이기지 못한 몬스터들이 한 줌 재로 사그라들며 검은 눈 같은 재가 휘날렸다.

    “5분 컷? 껌이네.”

    이 정도 수준이면 할 만한데? 싹 정리된 상공을 보며 흥얼거리듯 말하자마자 다시 시커멓게 입을 벌린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

    방금 상대했던 놈들의 두 배 크기인 몬스터들을 질린 눈으로 보며 생각을 정정했다.

    껌이라는 말은 취소.

    * * *

    젠장, 빨리 끝내고 들어가서 낮잠이나 자려고 일부러 마력 과소비했던 건데.

    2차 몬스터 웨이브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확실히 평화로운 세상을 살다 보니까 많이 유해지긴 했구나. 이 정도 몬스터를 보고 좀 힘들겠다는 약한 소리나 하고.

    이번에는 또 어떤 방법으로 몬스터를 조져 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 이채, 바쁘냐?

    윤세인의 목소리에는 가쁜 호흡이 섞여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배경음처럼 흐릿하게 넘어왔다. 아무래도 그쪽도 몬스터 웨이브이든, 던전 브레이크이든 하나가 터진 모양이었다.

    “조금?”

    용감하게도 내게 달려드는 몬스터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잡아 땅에 내리꽂으며 대답했다.

    콰앙―!

    굉음과 함께 땅에 박힌 몬스터가 추욱 늘어졌다.

    - 거기도 몬스터 웨이브 터졌어?

    “엉, 덕분에 낮잠 자다가 불려 나왔잖아.”

    다른 몬스터에게 벼락을 날리며 심드렁하니 대꾸하자 다시 질문이 들려왔다.

    - 혹시 그쪽 상황, 네가 빠지면 힘든 상황이야?

    “너 어디야.”

    곧바로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몬스터와의 전투 중 누가 친구 안부 물으려고 전화를 하겠나. 굳이 윤세인이 내게 전투 중 전화한 이유는 그쪽이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라는 소리지.

    - 지금 여기가…….

    콰과강!

    소음에 묻혀 흐릿하게 들려오는 위치에 곧바로 전화를 끊고 후방으로 물러나 지도 앱에 좌표를 찍었다. 손이 덜덜 떨려 와 몇 번이고 키보드를 치는 손가락이 삐끗하며 미끄러졌다.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페리, 여기서 저 몬스터들 잡고 있어.”

    좌표가 나오자마자 페리를 소환한 후 명령을 내리고는 망설임 없이 순간 이동을 실시했다.

    이곳에는 S급인 민서 언니가 있으니 내가 빠진다 한들 큰 피해는 없을 거다. 어차피 1차 몬스터 웨이브 때는 내 1인극 활약으로 다들 거의 손 놓고 있었잖아.

    심지어 페리도 두고 갔으니 전력은 이 정도로 충분하겠지.

    어차피 내가 본 미래에서 윤세인은 살아 있으니 너무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그런데 왜…….

    “윤세인!”

    피투성이가 된 채로 겨우 땅에 박힌 검에 기대어 몸을 지탱하고 있는 친구에게로 황급히 달려갔다.

    거대한 충형류 몬스터가 톱처럼 날카로운 이빨로 윤세인의 머리를 막 물어뜯으려 하던 순간이었다.

    콰앙!

    거대한 낙뢰가 창처럼 그 몬스터의 몸을 관통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몬스터들의 사체가 발에 턱턱 밟혔다.

    키에엑!

    징그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내게 달려들던 거대한 지네 몬스터는 몸통 결대로 토막 나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조심스럽게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미약하게나마 아직 호흡은 하고 있었다.

    “힐러는? 힐러 어디 있어?”

    다급한 내 물음에 윤세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죽었거나 원래 없다는 뜻인 것 같았다.

    급한 대로 치유 스킬을 거니 윤세인의 호흡이 한결 돌아왔다. 그래 봤자 내 치유 스킬은 겨우 숨만 붙여 놓는 수준이었다. 지금 당장 힐러를 찾거나 병원을 가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 했다.

    일단 병원에 가자. 응급실에 가서 응급처치라도 받고 백아현을 부르는 거야. 팔을 내 어깨에 감아 부축하자 윤세인이 힘없이 턱짓했다.

    “일단… 저것들부터…….”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와 사방을 기어 다니거나 날아다니는 충형류 몬스터들. 역시 벌레 떼답게 물량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현재 윤세인의 상태는 가슴에서 배 쪽까지 길게 찢긴 상황. 특히 배 쪽 상처는 위험할 정도로 벌어져 있었고 갈비뼈에도 금이 갔는지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아마 원인은 윤세인의 앞에 널브러진 사마귀 형체의 몬스터로 추정.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상처 부위를 내 손바닥으로 꽉 압박하며 으름장 놓았다.

    “너 지금 병원 안 가면 위험해!”

    “나 혼자 살 수, 는 없잖아.”

    “지금 X발, 네가 죽게 생겼는데 다른 사람이 뭔 상관인데!”

    버럭 소리 지르자 윤세인이 힘없이 픽 웃으며 협박을 중얼거렸다.

    “이채, 이대로 나 병원 데려가면… 나 너, 평생 안, 본다.”

    “X발, 보지 마. 차라리 살아서 평생 보지 말라고.”

    “넌, 친구 마지막… 부탁도 못 들어주냐.”

    “제발 개소리 좀 하지 마.”

    한탄 같은 애원을 내뱉으며 최대한 윤세인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마기를 풀었다. 땅을 빠르게 잠식한 시커먼 기운이 충형류 몬스터만 골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핏줄처럼 파고든 마기에 충형류 몬스터들은 몸이 터져 죽었다.

    마기에 잠식된 땅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구역질하며 픽픽 쓰러졌지만 내게 부축받고 있는 윤세인이 토한 검은 피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바로 저 근처에 보이는 대학병원 앞으로 순간 이동하여 응급진료 센터를 향해 뛰어갔다.

    “아아악! 아파! 살려 주세요!”

    “저희 애, 저희 애가 몬스터에 물렸는데……!”

    “의사! 의사 왜 안 와!”

    이미 응급실은 환자들로 만원이었다. 소란스러움을 넘어 혼란스러운 응급실의 상황에 지금이라도 다른 병원을 찾아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주르륵 내 어깨에 올려진 팔이 흘러내리더니 윤세인이 쓰러졌다.

    “윤세인!”

    내 비명에 한순간 시선이 몰렸다. 피로 범벅이 된 윤세인의 옷과 옷이 찢긴 터라 훤히 드러난 상처.

    급히 의사들이 달려와 스트레처카에 세인이를 눕혔다. 하지만 지금은 응급 소생실도, 처치실도, 중환자실도 다 찬 상태라 당장 응급 수술은 불가능했다.

    “위중한 환자 먼저 치료하는 게 원칙 아니에요?”

    덜덜 떨면서 묻자 지금 그 우선순위에 따르고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것보다 더 심각한 부상이면 대체 어느 정도인데.

    정신없는 와중에도 안내에 따라 접수를 위해 진료 신청서를 작성했다. 주소야 몇 번 윤세인 자취방에 찾아간 적이 있었기에 알았지만 친구 주민등록번호를 알 리가.

    피로 범벅된 윤세인의 외투 안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찾아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민증을 꺼내 주민등록번호를 한 자 한 자 적어 나갔다.

    접수와 보호자 등록까지 마치자마자 백아현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백야, 지금 당장 신촌 세X란스병원으로 올 수 있어?”

    - 뭐야, 너 다쳤어?

    “아니, 내가 아니라 윤세인. 지금 응급실에 자리도 없어서 당장 수술도 못 들어간대.”

    우당탕탕!

    의자 넘어지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그리고 5분도 채 되지 않아 백아현이 응급실로 뛰어 들어왔다. 순간 이동 스킬 보유자 하나 잡아서 온 모양이었다.

    지혈만 된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던 윤세인의 상처가 스르륵 아물더니 혈색이 점차 돌아왔다. 호흡 역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게 바로 S급 힐러의 위력이었다.

    의사의 부탁을 받은 백아현은 한숨을 쉬며 응급 소생실로 향했다. 지금 상황은 딱 봐도 의료 인력만으론 부족해 보이긴 했다. 이제 병원에도 힐러가 주둔해야 하게 생겼네.

    응급 침대 옆에 서 있다가 뒤늦게 피범벅이 된 내 옷과 손을 발견하고 마른세수하며 중얼거렸다.

    “…환멸 나.”

    손을 꿈틀거리다가 슬그머니 눈을 뜬 윤세인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뭐긴 뭐겠어. 이런 상황을 겪고도 아직도 결정을 못 내린 나 자신이지.

    부러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윤세인에게는 피식 웃어 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고개를 저었다.

    살았으니까 됐잖아. 그러니 굳이 내가 포기할 필요가 없잖아.

    마음속에서 내 심연이 끊임없이 속살거렸다.

    * * *

    D-5.

    종이에 연필로 마구 구멍이라도 뚫은 듯이 상공에 수많은 게이트가 열렸다. 지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언제 오픈되어 몬스터가 쏟아질지 모르는 게이트를 가까이에 둔 사람들의 불안은 점점 커져 갔다.

    예언된 대규모 침략을 5일 앞둔 시점에서 국가가 할 수 있는 건 시민들을 안전지대 대피소로 피난시키는 것과 가짜 뉴스가 퍼져 나가지 않도록 언론을 통제하는 것.

    계속해서 본가로 내려오라는 부모님의 꾸준한 연락에도 나는 절대로 서울로 올라오지 말라는 강경한 대답만 돌려주며 버티고 있었다.

    부모님이 계신 쪽은 천세연이 짚었던, 회귀 전에 가장 피해가 적었던 지역이었으므로 그나마 한숨 놓을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나는 알아서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설마 나 데리러 온다고 올라오지는 않겠지.

    〉Local Channel-ROK

    〉귀환자 단체 채팅방

    〉〉공지 사항: 이름은 차원 이동한 곳에서의 직업, 혹은 세계관으로 부탁드립니다

    농노1: 다들 대피하셨습니까?

    마탄의저격수: 저는 지금 서울이요

    소드마스터: 저도 수도권에 남아 있으려고 합니다

    천마: 오랜만에 몸이나 풀죠

    스팀펑크: 전 어머니 모시고 전남으로 내려옴

    추기경: 충북은 피해 클까요? 굳이 타 지역까지 대피 가기는 싫은데

    진리를깨달은연금술사: 일단 인구수 대비라 게이트가 수도권에 몰릴 거라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다른 지역은 모르겠네요

    무림맹주: 저도 남을 예정입니다 어차피 얼굴 팔려서 대피소 가 봤자 떠밀려 나올 것 같네요

    드래곤 친구: 우릴 그렇게 박대하는데 뭐 하러 남아서 도와줌? 이해 안 되네

    성녀: 저는 지금 고민이에요

    성녀: 힐러 수가 부족하다 하니까 지금이라도 서울 올라갈지 아니면 부산에 남을지

    성녀: 지금 부산도 게이트 좀 열리긴 했거든요

    귀환자들은 반반이었다. 수도권에 남아서 자신들이 돌아온 이 세계를 지켜 내려고 하는 이들과, 귀환자라면 아묻따 박대하는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는 외면하고 대피하는 이들.

    어느 쪽이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서로의 선택을 향한 비웃음이나 비난은 없었다.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생겼다. 바로 연수원 19기 룸메이트 모임이었다.

    [진솔 - 다들 대피했어?]

    [진솔 - 나는 경남 쪽으로 내려왔는데] 오후 2:33

    [진솔 - 혹시 창원 성산구 쪽 대피소로 오는 사람은 연락해] 오후 2:34

    [김나연 - 저는 부모님만 대피소 보내고 서울 남으려고요! 저도 전투 참가할 거예요] 오후 2:35

    [진솔 - 나연아 미쳤니?] 오후 2:35

    [김나연 - 왜용 기왕 B급으로 재각성했는데 제 몫 해야죠]

    [김나연 - 시스템도 이러라고 절 재각성시키지 않았을까요?] 오후 2:38

    [천세연 - 그냥 부모님 따라서 대피해 나연아] 오후 2:39

    서울에 남겠다고 고집부리는 김나연의 채팅을 보며 지끈거리는 미간을 문질렀다.

    돌겠네, 진짜.

    얘를 B급으로 각성시키는 게 아니었어. 한 C급 정도로 각성시킬걸. 아니, 그런데 세계가 이렇게 될 줄 내가 알았나.

    이상한 사명감에 사로잡힌 김나연에게 그냥 내가 너 재각성시킨 것이라 털어놓을까, 잠깐 고민했다가 만약 이 사실이 퍼지면 S급으로 재각성시켜 달라고 찾아올 놈들이 한 바가지일 걸 알기에 그냥 쉬쉬하기로 했다.

    [그러기에는 요즘 S급 재각성이 많아졌지 않니?] 오후 2:40

    [시스템이 너에게 사명을 주려고 했으면 지금 재각성하는 사람들처럼 S급으로 재각성시켜 주지 않았을까?] 오후 2:41

    김도빈과의 상의 끝에 나는 하루에 한 명씩, 김도빈과 머리를 맞대어 선별한 헌터들을 S급으로 재각성시키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인구수가 적어 S급이 몇 없는 한국의 전력을 올려야 했다.

    디데이까지 겨우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몇 명 더 재각성시켜 봤자 효과가 있을진 모르겠다마는.

    [김나연 - 그런가??]

    [김나연 - 그래도 남을래요ㅎㅎ] 오후 2:46

    결국 나는 김나연의 고집을 꺾는 걸 포기했다.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

    한숨을 쉬고 짐 가방을 챙겨 자취방에서 나왔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은 상공을 뒤덮은 게이트로 인해 어두침침한 잿빛이었다.

    영화나 애니, 소설에서나 보던 아포칼립스의 풍경이었다. 사람으로 북적거리던 도시는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세상은 분명 던전 브레이크도 안 터지는 순한 맛 헌터물이었는데, 며칠 만에 이렇게 된 꼴이 참.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진세빈 이 쓰레기 새끼를 다시 복원시켜서 데려와야 한다.

    그 미친놈 하나 때문에 전 세계가 이게 뭔 꼴이야?

    아직 인터넷은 끊기지 않았지만 대규모 몬스터 웨이브가 터진다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나는 지도에서 가까운 대피소 찾기를 선택하는 대신 협회 건물 좌표를 찍었다.

    사령본부가 된 협회 건물이 내가 전쟁 기간 지낼 곳이었다.

    순간 이동을 써서 곧바로 협회로 가는 대신 천천히 걸으며 비어 버린 도시를 둘러보았다.

    각 동에 하나씩 있는 지하 대피소 앞에는 각성자 비상소집령으로 동원된 헌터들과 무장한 군인들이 주둔해 있었다.

    물론 황폐해진 도시 지상에는 이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종말의 날이 도래했다! 아마겟돈이다!”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내리는 시련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게 우리의 숙명이요…….”

    666 푯말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길거리를 방황하는 사람들.

    “귀환자들을 제물로 바쳐 이 사태를 끝내야 합니다, 여러분! 귀환자들을 게이트 안으로 집어넣어야지 이 모든 상황이 끝납니다!”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격전의 날이 닷새 앞으로 훌쩍 다가왔음에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귀환자 혐오를 조장하는 레벨레이션 신도들.

    딱히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날마다 쏟아지는 인터넷 국제 뉴스에서는 시위와 테러 소식만이 연신 전해지고 있었다.

    정말 누가 알았겠어. 전 세계 예언가들이 반드시 일어난다고 염불 외우던 세계 3차 대전을 타 차원의 존재들과 치르게 될지.

    “귀환자들에게 이 비극의 대가를 치르게―”

    나를 발견한 레벨레이션 신도가 목소리 높여 외치던 말을 뚝 멈추고 나를 손가락질했다.

    “저기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극악무도한 귀환자가 있다!”

    “헛소리 그만 지껄이고 대피소에나 들어가쇼. 그러고 다니다가 던브 터지면 몬스터에게 잡아먹히기 딱 좋겠네.”

    심드렁한 어조로 맞받아치자 레벨레이션 신도는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펄쩍펄쩍 뛰어 댔다. 그래 봤자 이상한 사람 되는 건 그쪽이지. 내가 아니라.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겠다 싶어 순간 이동을 전개해 순식간에 협회 건물 앞으로 도착했다. 밀고 당기면 열리던 출입문이 바뀌어 있었다.

    헌터 라이선스를 찍으니 문이 스르륵 열렸다. 사람 하나 없이 스산한 로비를 지나 비상계단으로 내려갔다.

    “이채, 왔어?”

    지하 1층의 비상계단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현이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꽤 넓은 지하 1층에는 군복을 입은 이들과 정장을 차려입은 이들이 쉼 없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우와, 투스타다. 방금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이의 군모에 별 두 개가 박혀 있었다.

    지하 1층은 총사령관실. 2층은 군 간부 및 관계자들의 거주지, 지하 3층부터 4층까지는 헌터들의 거주지.

    협회에 모인 헌터들은 대부분 관리국, 협회의 간부진이거나 A급 이상의 전투계 헌터들이었다. 언뜻 네임드 제조계 헌터들도 보였다.

    주전력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간 자칫하면 전멸이니 중대형 길드들은 모두 본사 건물이 있는 곳에 주둔하며 버티고 있을 거라고 들었다.

    “우리 방은 지하 3층 A301호실이고 아마 안에 세인이 있을 거야. 짐 풀고 1층으로 올라―”

    웨에에엥―!

    아현이의 말을 끊으며 사이렌이 시끄럽게 울렸다.

    “강남구에 대규모 몬스터 웨이브 및 던전 브레이크 발생! 러스터 길드 측에서 지원 요청 들어왔습니다! 주전력들이 부상으로 인한 전투 불능 상태라 현재 위급 상황이랍니다!”

    그 외침에 정장을 입은 관리국 요원 한 명이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갔다. 아무래도 헌터들을 소집하려는 모양이지.

    러스터 길드면 주태윤 길드잖아. 거기서 주전력이 주태윤 아니면 누가 있어, 빌어먹을. 백아현은 이미 나를 두고 다른 곳으로 뛰어간 지 오래였다.

    이를 악물며 러스터 길드 본사의 위치를 지도 앱에 찍어 좌표를 도출해 냈다.

    『스킬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1인』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허공과 지상에 시커멓게 열린 거대한 게이트에서는 끊임없이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맞서는 헌터들은 딱 봐도 수가 얼마 없었다. 몬스터보다는 적지만 그래도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수의 시신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 정도 게이트에 국내 2대 길드 중 하나인 러스터 길드가 쉽게 뚫리다니. 아무리 계산해 봐도 인류의 패배라는 결말밖에 안 보였다.

    “지원은 언제 오는 겁니까!”

    “곧 온단다! 조금만 더 버텨!”

    절망 어린 절규와 그런 헌터들을 지탱하는 목소리. 하지만 그 격려는 다시 게이트에서 쏟아지는 몬스터에 묻혀 사라졌다.

    쩌적, 헌터들에게로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얼음 동상이 되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콰지직!

    얼음 동상째로 박살 나 부서지는 몬스터와 동시에 너무 많은 힘을 한 번에 사용한 대가로 피가 울컥 역류했다.

    “퉤!”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입 안에 가득 머금은 피를 뱉고는 곧바로 마력을 넓게 펼쳤다.

    『스킬 ‘탐색(AA)’을 발동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꼬인 속에 다시 마력을 전개하니 속이 꼬이다 못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고통을 무시하며 곧바로 주태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가는 길에 널브러진 익숙한 얼굴의 시체에 입술을 꾹 깨물며 차마 감지 못한 눈을 감겨 주었다. 그러게 대피하라니까. 겨우 살려 놨더니 여기서 죽으면 어떡해, 나연아.

    “그러게 내가 데드 플래그 적당히 꽂으라고 했잖아요.”

    치유를 걸며 한숨을 내쉬었다. 딱 봐도 치명상을 입은 주태윤은 왼쪽 쇄골을 철근에 관통당한 채 심각할 정도로 찢어진 옆구리를 붙잡고 숨을 헐떡이며 누워 있었다. 찢어진 건 옆구리뿐만이 아니었다.

    전대 마왕이 입었던 부상보다 더 위중했다. 이건 S급 포션을 마셔도, S급 힐러가 와도 못 살린다.

    내가 거는 치유는 그나마 유언이나 남기고 갈 수 있는 시간 벌어 주는 용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를 올려다보며 평소처럼 능글맞은 눈웃음을 지어 보이는 주태윤이지만 그 웃음에는 힘이 없었다.

    “…진세빈이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제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있으면 한다고요.”

    그래서 한때 그 자식이 제게 고백한 줄 알고 경멸 어린 눈초리를 보내곤 했다고 말하며 주태윤이 피식 웃었다.

    “저를 죽이고 싶다는, 자기 눈앞에서 제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며 비웃고 싶다는 이야기, 란 걸 알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죠.”

    “마지막까지 진세빈 이야기예요? 그 자식한테서 좀 벗어나 보지?”

    “채현 씨는 아마 모를걸요. 제 마지막이 진세빈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제게 무슨 의미인지.”

    숨을 가쁘게 헐떡이면서도 주태윤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평생 그 자식한테 휘둘리는 삶을, 살았는데, 마지막에 진세빈이 아닌, 당신이 있는 게 얼마나…….”

    쿨럭! 주태윤은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하고 핏덩이가 섞인 기침을 내뱉었다.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쓱 훔치고는 다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전에 그랬었죠. 나중에 제 무덤에 꽃 한 송이 놓아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그랬죠.”

    바람이 헌터들을 한곳으로 밀어 넣고 땅이 쩌저적, 갈라지며 그 위의 몬스터들을 삼켰다. 뒤늦게 지원 인력이 도착했는지 소란스러운 소리가 뒤쪽에서 울렸다.

    주태윤의 숨소리 역시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생명이 점점 꺼져 가고 있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채현 씨에게 부담이 될까 봐 그냥 다른 말로 대체하겠습니다.”

    창백한 얼굴로 손을 뻗은 주태윤은 피투성이인 제 손을 자각했는지 내 볼 앞에서 손을 움찔거리며 멈췄다. 쓰게 웃은 주태윤이 속삭였다.

    “꽃 한 송이조차도 바라지 않을 테니 그냥… 잊지 말아 줄래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주태윤의 손이 툭 떨어졌다.

    자는 듯 눈을 감은 얼굴은 이 빌어먹을 전장과 어울리지 않게 평화로워 보였다.

    “나 참,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해 놓고 잊지 말아 달라니.”

    헛웃음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이 마지막 작별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 하여간 마지막까지 끈질기고 빌어먹을 인간 같으니라고.

    * * *

    대한민국의 전력이 되는 여섯 길드 중 강남구의 러스터 길드와 여의도의 레브 길드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본격적인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전력이 상실된 터라 사령본부의 분위기는 꽤나 날이 서 있었다.

    빠진 전력을 고려하여 다시 전선에 인력을 배치하고 작전을 짤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여유 시간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웨에에에엥!

    이제는 익숙해진 사이렌 소리가 아침부터 지하층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동요 없이 할 일을 하는 헌터들의 귀에 다급한 외침이 꽂혀 왔다.

    “수도권 전체 게이트 오픈되었습니다! 대침공입니다!”

    뭐라고? 그 말에 칫솔질을 멈추고 숙소에 달려 들어가 날짜를 확인했다.

    오늘은 분명 D-2.

    분명 대침공까지 이틀이나 남은 시점이었다.

    “모조리 1급 몬스터랍니다! 게이트 레벨 최소 A급, 최대 S급 예측하고 있습니다!”

    “노원구 방어선 무너졌답니다! 한울 길드에서 지원 요청 들어왔습니다!”

    “목동 대피소에 몬스터 침입!”

    수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몇백 년간 전쟁을 겪었던 나였지만 그건 사령관 입장에서였지 지금처럼 졸의 입장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약간 낯설었다.

    “채현 언니!”

    이동하는 수많은 인파를 뚫고 내게 달려온 천세연이 다급히 물었다.

    “분명 디데이는 이틀 후 아니었어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가정은 두 가지다. 애쉬가 나를 배신했거나, 애쉬가 실패했거나.

    둘 다 신빙성 있는 가설이라 하나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일단 애쉬를 소환하려면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쪽으로 가야 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정보를 경청하며 적당한 소환 타이밍을 노렸다. 숙소를 빠져나가는 인파에서 언뜻 소드마스터와 마탄의저격수를 본 것 같기도 했다.

    같은 숙소를 쓰는 세인이와 아현이가 방을 비우자마자 숙소 문을 닫고 곧바로 애쉬를 불러냈다.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모습에 심장이 덜컥했다. 아무리 봐도 수면이 아니라 혼수상태였다.

    애쉬의 심장은 아주 느릿하게 뛰고 있었다. 급히 소환을 해제하고 세이블을 소환했다.

    “어떻게 된 거야? 애쉬가 왜……!”

    내 외침에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문지른 세이블이 답했다.

    “왜긴 왜겠습니까, 폐하. 자기가 저지른 짓을 수습하다가 대가를 치른 거죠. 뒤에서 타 마계의 잔당들과 우리 1마계의 반란 분자들을 긁어모아 이곳으로 보낼 계획을 세울 줄이야.”

    명령을 내리면서도 끌어모은 잔당들을 다 막으리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 자신과 나를 동시에 위험에 빠뜨리면 어쩌자는 건데.

    내 착잡한 표정에 세이블이 간언했다.

    “애쉬가 저지른 일은 폐하의 안위를 위험에 빠뜨린 명백한 반란 행위입니다. 반역자에게 자비를 가지지 마시길.”

    “됐고, 잔당 놈들은 얼마나 막았지?”

    “일단 폐하께 가장 많은 원한을 지닌 7마계 잔당들은 애쉬의 선에서 모두 정리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전달받은 나머지 반군 놈들이 거사를 앞당긴 모양입니다.”

    그래도 애쉬는 제 몫을 했다. ‘내게’ 제일 위험한 놈들은 막았지만 다른 반군 마족 놈들은 인류에게 위험했다. 그리고 다른 놈들이라 한들 내게 악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전쟁에 마계의 전력을 동원하기에는 1마계의 전력을 이곳으로 돌리자마자 얼마나 남아 있을 줄 모르는 반군 놈들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크기에 기각.

    어쨌거나 내가 크라토스를 가진 한 나와 1마계의 운명은 함께였다.

    “세이블, 너는 마계로 가서 반군들이 더는 이 차원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라.”

    명령을 내리고는 다시 세이블을 역소환했다. 그리고 곧바로 지상으로 나갔다.

    하늘을 조각내듯 열려 있는 게이트. 지상에서 입을 벌린 게이트. 수많은 게이트가 이 세계의 끝을 알리듯 몬스터들을 쏟아 내고 있었다.

    고층 건물이 힘없이 무너진다. 도로가 박살 나고 도로변에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던 자동차는 몬스터에 의해 형편없이 짜부라졌다. 휴대폰을 켜 보니 인터넷은 간당간당하게 연결을 이어 가고 통화 신호는 흐릿하다.

    이 모든 풍경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끝나긴 할까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앞만 보고 묻자 내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선 천우현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끝나겠죠. 어느 쪽이 되었든.”

    나는 아직도 천우현에게 그 고백의 답을 해 주지 않았다. 천우현의 섬세한 옆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번에도 당신이 죽으면 나는 많이 슬퍼할까? 내 목숨까지 바쳐 시간을 돌릴 만큼?

    글쎄, 그게 어느 쪽이든 평생 알고 싶지 않은 답이었다.

    그러면 질문을 바꾸어서, 내가 죽으면 당신은 많이 슬퍼할까? 이 답은 좀 알고 싶네.

    * * *

    대침공 6일 차.

    회귀 전과 같이 러시아는 핵으로 자멸했고 몬스터들에게 완전히 짓밟힌 나라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북한도 그중 하나였다.

    대한민국은 아직 힘겹게 버티는 중이었다. 전 협회 건물이었던 사령본부에 주둔한 전력은 3분의 2로 줄었고 여섯 길드는 겨우 두 길드만이 남아 근거지를 버리고 사령본부에 합류했다.

    몬스터에 의해 전멸한 군부대와 대피소 역시 수가 꽤 됐다.

    『뭐, 이야기가 달라져도 결말이 바뀌지는 않네요.』

    『이대로 가다간 멸망일 터인데.』

    『오랜만에 참으로 긴 휴식을 취하게 생겼네요. 끝이 없는 휴식을.』

    “그 끝이 없는 휴식 취하기 싫으면 좀 돕지?”

    『지금 이것도 최대한 막고 막아서 이 정도인 거예요.』

    『배리어가 완전히 박살 난 상태에서 이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저는 지금 제힘의 90%를 쓰고 있다니까요?』

    이모티콘도 없이 쏘아붙이는 관리자1의 말에서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같은 초월자로서 힘의 한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관리자1은 힘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김도빈과의 계약마저도 끊은 상태였다.

    던전 브레이크를 터트려 몬스터를 끊임없이 쏟아 내는 게이트를 닫기 위해 헌터들은 맨몸으로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나 역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 섰다. 그 전장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많았다. 대부분 귀환자였다.

    “용병왕 님이 안 보이네요?”

    “어제 몬스터에게 급소를 물려서 그만…….”

    소드마스터가 침울한 얼굴로 부고를 전했다. 아, 그랬구나. 심드렁하게 생각하다가 아무렇지 않아 하는 내 모습에 실소했다.

    전쟁은 타인의 죽음에 무감각해지게 만든다.

    그래, 아무리 타인의 죽음에 무감각해지게 만든다 한들…….

    “백야! 백아현!”

    소중한 사람의 죽음에까지 무감각해질 수는 없더라.

    애타게 이름을 부르며 마지막 인사도 못 한 채 싸늘한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친구를 마구 흔들었다. 그렇게 하면 백아현이 일어나기라도 하는 듯이.

    오늘만 같이 갈걸. 이 빌어먹을 곳이 회귀 전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최전선이었단 걸 조금만 더 빨리 눈치챌걸.

    급히 달려온 윤세인이 백아현의 시체 앞에서 무너졌다.

    살렸으니, 회귀 전의 운명을 뒤틀었으니 별일 없을 줄 알았다. 내 주변 사람만은 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내 오만임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멍청하게도, 전쟁을 직접 겪었음에도…….

    가만히 눈을 감은 백아현의 팔을 필사적으로 붙들며 생각했다. 7마계 마왕의 예언대로,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나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

    그래서 깨달았다. 아, 내 사랑은 독이구나. 내가 없어져야지만 이 모든 비극이 끝나겠구나.

    * * *

    “왜 따라왔어요?”

    “혼자 두기 불안해서요.”

    내 옆에 나란히 선 이를 힐긋 보며 묻자 다정한 미소를 지은 천우현이 대답했다.

    마지막 가는 길에 마음껏 날뛰며 화풀이라도 하고 가려고 했더니. 이러면 불가능하잖아.

    헛웃음을 내뱉자 천우현이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잡힌 손은 따뜻했다.

    “채현 씨가 그랬잖아요. 어느 지옥이든 함께 떨어지면 외롭지는 않겠다고. 같이 떨어지죠.”

    “그쪽 여동생은 어쩌고요?”

    “협회장님께 잘 지켜 달라 부탁하고 왔으니 괜찮겠죠.”

    김도빈은 확실히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고 가끔 허를 찌르긴 하지만,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천우현 역시 소중한 제 동생을 믿고 맡겼겠지.

    최전선에 선 나는 소중한 친구를 잃은 곳의 풍경을 응시하며 새하얀 입김을 내뱉었다. 완연한 겨울이었다.

    세계의 종말에 걸맞은 계절이다.

    나는 세계를 사랑하나?

    내 자조 어린 물음에 주희 선배가 제가 있던 차원의 황제에게 했던 말이 흐릿하게 귀에 맴돌았다.

    “그건 사랑이 아니야. 이기심이자 집착이지.”

    그래, 상대를 망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게 어떻게 사랑이야. 이거 하나를 인정하기까지에 너무 많은 시간과 희생이 필요했다.

    차갑고 건조한 겨울바람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살짝 고개를 돌려 천우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같이 지옥에 떨어지자고 했지.

    지옥에 다시 떨어지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하다.

    마침내 결정한 나는 마치 파도처럼 시커멓게 몰려오는 몬스터 떼를 말없이 보다가 시간을 멈췄다.

    『스킬 ‘타임스톱(L)’을 실행합니다.』

    가만히 몬스터 떼를 바라보고 있던 천우현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부러 경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모든 것을 건 도박을 한번 해 보려고요.”

    천우현을 마주 보며 웃었다. 그 언젠가의 여름날, 바닷가에서 지었던 그 미소 그대로.

    “그러니 나 기억해 줄 수 있어요?”

    내 장난스러운 물음에 내가 할 짓을 직감하기라도 한 듯 천우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살다 살다 내가 진세빈을 이해할 날이 올 줄이야.

    천우현이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마요, 채현 씨. 무슨 방법을 생각하고 있든, 제발…….”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 이 정도 욕심쯤은 괜찮지 않을까? 무너지는 도시와 몬스터 떼를 배경으로, 천우현을 끌어당겼다.

    서로의 호흡이 닿는 거리에서 빤히 서로의 눈만 바라보다가 곧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천우현의 볼을 손으로 감싸자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세계의 끝에서 하는 키스라, 꽤 낭만 있네.

    속눈썹을 나른하게 내리깐 천우현의 얼굴을 구경하다가 눈을 스르륵 감았다. 계속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약해질까 봐.

    짧은 키스 후 입술이 떨어지고, 나는 환하게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요.”

    안녕, 우현 씨.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야. 또 내 사랑이 당신마저 파멸로 끌어들이는 꼴은 볼 수 없으니까.

    『저주 ‘수면(A)’을 실행합니다. 설정 시간: 30분』

    수면 저주에 걸린 천우현이 스르륵 내 품으로 쓰러졌다. 타인 순간 이동으로 천우현을 사령본부로 보내고는 나 역시 순간 이동을 발동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입을 벌리고 있는 거대한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점, 정선 S급 게이트였다.

    * * *

    『S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게이트 안에 발을 디디자마자 익숙한 상태창이 나를 반겼다. 라이트 스킬로 환하게 앞길을 밝히고는 망설임 없이 보스룸으로 향했다.

    보스룸 가장 안쪽, 푸르게 빛나는 핵 앞에 섰다.

    『차원 #SF105-2의 근거지입니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차원 #SF105-2와의 연결을 영구히 끊으시겠습니까?』

    살며시 손바닥을 대고 허가하니 처음 연결을 끊으려 시도했을 때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똑같은 문장이 스르륵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현 차원은 관리자의 권한 밖입니다.』

    『상위 존재의 허가가 없어 연결을 끊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끊을 수 있을 거라 기대도 안 했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건 겨우 이곳의 연결만을 끊는 것이 아니었다.

    손을 거두고는 아끼고 아껴 두고 있던 마지막 기회를 꺼내 들었다.

    『칭호 ‘아이루스의 대리자’의 권한을 발동합니다.』

    『마신을 소환합니다. (3/3)』

    폭발하듯 내뿜어진 검붉은 빛이 이지러지더니 엄청난 위압감과 함께 서서히 형체를 갖추어 갔다. 긴 백금발을 쓸어 올린 마신이 오만한 적안으로 나를 응시했다.

    “오랜만이군, 마계의 대군주. 결정을 내린 모양이지?”

    “일단 혹시 몰라서 말해 놓는 건데 천계와의 전쟁은 못 합니다. 마계 우르르 망하는 꼴 보고 싶으시다면 제게 시키시고, 그게 아니라면 제 후대에게 시키쇼.”

    이제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하다고.

    그리고 원래 정복왕은 2대로 내려오는 거 몰라? 고구려도 광개토대왕 바로 다음 대 왕이 장수왕이었잖아. 내가 마계 통일을 이뤘으니 내 후대가 알아서 천계 정복하겠지.

    “초월자라면 무릇 이 정도의 강단은 있어야지. 그래,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말해 보련?”

    내 당당한 보이콧에 마신이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나긋하게 물었다.

    “마계로 갈 테니 이 세계가 떠맡은 제 카르마 좀 지워 주시죠.”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아나?”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제 기록이 이 세계에서 지워지고 시간이 게이트 사태가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간다는 소리죠.”

    모든 소원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이 세계를 살리기 위해 내가 내놓은 대가는 이 세계에서의 내 존재였다.

    나는 그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세계는 멀쩡하고 평화로웠던 시절로 돌아갈 것이다.

    부모님을 보지 않고 온 게 다행이었다. 만약 곧 나를 잊게 될 엄마, 아빠를 보고 왔으면 절대 나는 이 선택을 하지 못했을 테니.

    내 대답에 나를 내려다보며 요요히 미소 짓던 마신이 내 말을 정정했다.

    “아니, 정확히는 게이트가 막 터지는 시점으로 돌아가는 거지. 천신의 사도가 넘어온 일마저 없던 일이 될 수는 없으니 이 차원이 침략을 받는 일까지 사라지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그 정도면 괜찮았다. 진세빈은 존재가 소멸하였으니 시간이 돌려진다 한들 있을 리 없을 테고, 미친놈이 없는 세계에서 이 대침공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일이 되겠지.

    순한 맛 이지 모드 현대 판타지 세계도 나름 나쁘지 않았잖아?

    진세빈은 모든 곳에서 기록이 지워졌는데 나는 겨우 이 세계에서만 기록이 지워지는 걸 위안으로 여겨야 하나?

    “마계가 이 차원에 가장 큰 위협이었던 건 아시죠?”

    “그러니 내가 마계에 남으라고 충고했지 않았나. 고향을 아끼는 것 같아 기껏 충고해 주니까, 쯧.”

    마신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아니, 그러면 연결이 끊기지 않고 망할 마족 놈들이 여기로 넘어올 거라고 예고를 해 줬어야지.

    그냥 대뜸 ‘마음에 드는데 여기 남아서 천계 정복해라.’ 하면, 세상 어느 누가 ‘넵! 남을게요!’ 이러냐고.

    내 띠꺼운 시선을 눈치챈 마신이 불경하다며 한마디 했다. 저벅, 가벼운 발걸음으로 핵 앞에 선 마신이 핵을 쓰다듬으며 내게 물었다.

    “7마계의 통일이라는 미친 짓을 저질러서까지 돌아온 차원인데, 미련은 없나?”

    “어떻게 미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 미련보다 후회가 더 컸을 뿐이죠.”

    푸르게 빛나는 핵을 빤히 바라보며 대꾸했다.

    무엇이 웃음 포인트를 건든 건지 한참을 웃어 재낀 마신이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통보했다.

    “내가 들어주는 네 소원은 이게 마지막이다, 마계의 대군주.”

    “지금까지 이곳으로 보내 주는 거 말고 뭔 소원을 들어주셨다고…….”

    “감히 이 몸을 타 차원을 위해 외신이랑 싸우게 한 건 기억이 안 나나 보지?”

    빡친 얼굴로 웃은 마신이 내 정수리를 꾸욱 눌렀다. 왜 이래, 싸움 좋아하면서.

    “앞으로는 마계의 내 신전에서 보겠군. 형편없는 곳에 소환되는 일은 이제 없겠구나.”

    뒤끝 있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자토스의 신전은 그렇다 쳐도 내 자취방이 뭐가 어때서.

    마신의 눈짓에 조심스럽게 핵에 손을 댔다. 아까와 같은 차원 연결을 영구히 끊겠냐는 질문이 뜨고,

    『상위 존재가 차원의 연결을 끊는 것을 허가했습니다.』

    마침내 연결이 완전히 끊겼다. 내 존재가 지워지며 세계가 짊어진 내 카르마 역시 흐트러졌다. 세계는 더는 내 카르마를 부담하지 않아도 되었다.

    째깍, 세계의 시간이 평화로웠던 때로 다시 돌아간다. 오직 나만을 두고.

    『차원의 연결을 끊어 냈습니다.』

    『게이트가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 - 00:05:00』

    게이트가 일렁이며 세계와 나의 존재를 단절시켰다. 줄어드는 카운트다운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다시 마계로 넘어갈 시간이었다.

    『나름 해피엔딩이네요.』

    『잘 가요, 마왕님. ( ⁍᷄⌢̻⁍᷅ )』

    관리자1의 인사에 경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맨날 마왕 놈이라고 하더니만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마왕님이라고 제대로 불러 주네.

    천천히 닫히는 게이트에 마지막으로 게이트 입구 쪽을 바라보며 인사했다.

    잘 있어. 보고 싶을 거야.

    * * *

    곧바로 게이트 밖으로 성큼 걸어 나왔다. 내가 나왔음에도 게이트는 소멸하지 않고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결이 끊기지 않은 걸 보니 내 차원의 시간이 다시 돌아갔구나. 다시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과 동시에 영영 단절되지 않았다는 것에 미약한 안도감을 느꼈다.

    우중충한 하늘과 묵직한 공기.

    다시 돌아온 마계를 둘러보다가 내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검은 성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까악―까악―!

    까마귀들이 시끄럽게 울며 마왕의 귀환을 알렸다.

    마왕성 앞, 울창한 숲을 보며 쓰게 웃었다. 이제는 영영 저 안에서 내 유일한 이해자를 만날 수 없겠지.

    홀로 지옥에 빠지는 게 내 선택이었으니 그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벌써부터 오로지 혼자라는 그 사실에 아주 조금 외로울 뿐.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다급함마저 느껴지는 발소리에 피식 웃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드디어 귀환하셨습니까, 폐하?”

    세이블과 안드라스, 아스타로드, 그리고 기타 등등. 중앙 마족들이 모두 성에서 우르르 몰려나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자리를 되찾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내가 내팽개친 뒷정리를 뒤늦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주 많이 귀찮을 뿐.

    그때, 다시 게이트가 요동쳤다.

    엉망이 된 체이스터가 후다닥 게이트 안에서 달려 나오다가 우뚝 서 있는 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중앙 마족들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무릎 꿇을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서서 나를 보고 있던 체이스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엥, 폐하? 왜 여기 계세요? 휴양 끝나셨어요?”

    “너는 왜 거기서 나오냐?”

    “폐하, 저 폐하의 명을 수행하고 있던 도중 갑자기 튕겨졌어요! 절대 명을 무시하고 중간에 돌아온 게 아니고여!”

    허겁지겁 변명하듯 다급하고 간절한 외침을 내뱉은 체이스터는 무언가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다시 눈을 크게 뜨고는 게이트를 향해 삿대질했다.

    “맞다, 그런데 저기 안에 반군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고? 잘됐네.”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끌어올리며 무릎 꿇은 내 부하들을 향해 손짓했다.

    “돌아온 김에 대청소나 하자.”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이제는 질리도록 볼 마계의 하늘을 힐긋 한 번 올려다보았다.

    거참, 화풀이하기 딱 좋은 날씨구먼.

    * * *

    “너희들은 이거 하나 못 해서 내가 자리 비울 동안 이렇게 마계를 개판으로 만들어 놨냐?”

    잔당들을 정리하고 다시 분열 직전인 마계를 바로 세우는 데에 50년은 무슨, 30년도 채 안 걸렸다.

    내 삐딱한 물음에 안드라스가 이마에 핏대까지 세우며 반박했다.

    “자칫하다가 폐하의 권한을 건드리면 황권 도전이 되는데 저희가 뭘, 어찌합니까?”

    “이게 마왕에게 눈을 모로 뜨고 덤비네? 벌이 모자랐던 모양이다?”

    옥좌에 기대듯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안드라스를 내려다보자 깨갱한 그가 꼬리를 내렸다.

    나를 마계로 다시 데려오려고 애쉬에게 붙었던 건 경을 칠 일이긴 하지만 안드라스는 죽이기에는 퍽 아까운 인재였으므로 잘 굴려서 쓰고 있었다.

    “폐하, 애쉬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세이블이 전한 소식에 거의 옥좌에 누워 있다시피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바로 애쉬의 저택으로 순간 이동했다. 나를 발견한 하수인들이 급히 몸을 숙였다.

    마계로 다시 돌아온 이래로 이리 직접 방문하는 건 처음이었다.

    저택 가장 안쪽의 침실로 들어가 침대의 휘장을 걷자 눈꺼풀을 굳게 닫고 있던 애쉬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러고는 해사한 웃음으로 나를 반겼다.

    “보고 싶었어요, 폐하.”

    “30년 만에 일어났으면서 깨어나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거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흐트러진 은발을 쓸어 넘겨 주었다. 내 손을 잡은 애쉬가 제 볼에 내 손을 가져다 댔다.

    “그냥, 폐하가 돌아오신 게 좋아서요.”

    부드러운 볼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네가 했던 반역 행위는 못 넘어가는 거 알지?”

    “어떤 벌이든 각오하고 있습니다.”

    제 볼에 있던 손을 내려 정중하게 손등에 입 맞춘 애쉬가 대답했다. 손을 빼고 냉정한 목소리로 형벌을 내렸다.

    “50년간 연금(軟禁)형에 처한다. 범위는 네 영지 정도면 충분하겠지.”

    한마디로 50년 동안 마왕성에 올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애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번씩 오실 거죠?”

    “안 찾아올 거다. 그게 내가 네게 내리는 벌이야.”

    “그래도 50년이면 버틸 만하네요. 평생 폐하를 보지 못하는 것보다는…….”

    확 100년으로 늘릴 걸 그랬나. 싱긋 웃는 애쉬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 * *

    그리고 시간은 계속해서 지났다.

    가끔 마계 경계의 숲의 햇빛이 비치는 자리에 앉아 과거를 추억하며 버티는 수많은 날이.

    모든 뒷마무리가 완벽하게 마무리된 날, 나는 마신 아이루스의 신전에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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