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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5NN살도 GOLD쪽 같은 내 새끼 신청되나요? (28/33)
  • 28. 5NN살도 GOLD쪽 같은 내 새끼 신청되나요?

    “언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시간을 돌린다니요?”

    “말 그대로야. 세상의 시간을 뒤로 감아서 이 일을 없던 일로 만드는 거지.”

    내 옆에 있던 애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마계로 돌아오는 게 싫어요? 폐하의 목숨마저도 내버릴 만큼?”

    크라토스는 신급에 가까운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세계의 시간을 돌리기에는 힘이 살짝 모자랐다. 그러므로 세계의 시간을 돌리려면 크라토스에 초월자의 목숨이 더해져야 했다.

    그래, 천세연의 회귀를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너무 많은 것들이 스러졌는데 내가 어떻게 이것들을 모두 외면하고 마계로 가겠어.”

    서로를 완벽하게 만드는 사랑이 존재하면, 서로를 망치는 사랑도 반드시 존재한다.

    나와 애쉬가 그랬고, 나와 내 세계가 그랬다. 우리는 기어코 서로를 놓지 못해 서로를 망쳤다.

    ‘아, 세계는 나를 놓지 못한 적이 없던가?’

    내가 일방적으로 붙들고 있었던 것뿐이었지. 우스워서 자조하자 마계어로 진행된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천세연이 눈물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가 기억 가지고 회귀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아요? 언니가 저보다 훨씬 강하잖아요.”

    “난 안 돼. 기억의 전승자는 살아 있어야 함이 세계의 규칙이니까. 내가 무조건 죽어야지 시간이 돌아가거든.”

    “왜 그렇게까지 해요? 오빠도 그렇고, 언니도 그렇고 다들 너무 극단적이잖아!”

    “책임져야지.”

    내 말에 천세연이 애써 치솟는 울음을 참는 얼굴로 힘없이 웃었다.

    “…오빠랑 똑같은 말을 하네요.”

    그 말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건 왜일까. 피식 웃으며 천세연이 휘말리지 않도록 그를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보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과거로 보내는 게 우현 씨가 부탁한 대로 세연이가 안전하게 살 방법이니까, 이해해 줄 거죠?

    점점 싸늘하게 굳어 가는 천우현의 시체를 꼭 안으며 속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폐하께서 원하는 결말은 나지 않게 만들 거예요, 기필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쉬가 중얼거렸다. 처연한 모습과 달리 뱉는 말은 독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네가 저지른 짓으로도 충분히 내가 원하는 결말은 안 났어. 그러니까 만족해야지, 애쉬. 네가 바라던 대로 됐잖아?”

    “아니요, 제가 바라는 건 폐하께서 지금 살아서 마계로 돌아가는 것, 그게 전부예요. 이런 빌어먹을 엔딩이 아니라!”

    “이게 어디서 마왕 앞에서 함부로 목소리를 높여?”

    어차피 마지막이니 화를 내는 대신 부러 장난스럽게 타박하며 손을 휘저어 애쉬 역시 저 멀리로 보냈다.

    애쉬가 내 옆에 계속 있으면 내가 죽지 못하도록, 시간을 되돌리지 못하도록 방해할 게 분명했기에.

    그리고 크라토스가 있는 쪽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제 최후를 예상한 듯 크라토스가 발악하듯이 세차게 뛰었다. 크라토스와 맞닿은 심장이 지나친 박동에 터질 것만 같았다.

    『크라토스의 힘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시간을 돌릴 기회는 오직 한 번. 그러니 다음 회차가 정말 마지막이다.

    다음에도 크라토스의 힘을 끌어 세상의 시간을 돌리면 크라토스와 함께 그걸 담고 있는 그릇인 내 존재 자체가 무너져 소멸한다.

    내가 허가를 내리자마자 시간의 톱니바퀴가 뚝 멈추더니 서서히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크라토스의 힘과 내 수명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천우현의 시체를 안고 있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마지막 순간, 크라토스의 비밀이 내 머리를 스쳤다.

    * * *

    번쩍!

    거대한 흰빛이 공간을 메웠다. 숨이 막힐 정도로 엄청나고 위압적인 힘이 흰빛이 터진 곳을 중심으로 폭발하듯 발산되었다.

    점점 되감기는 시간 속, 천세연은 제 어깨를 잡은 은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노을을 닮은 남자의 적안이 스산하게 빛났다.

    그 눈에 한가득 담긴 증오는 천세연뿐 아니라 그와 닮은 다른 이까지 향해 있었다.

    ‘저 남자, 채현 언니를 좋아하는구나.’

    비참함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에 천세연은 직감했다. 어깨를 붙든 손의 악력에 천세연의 얼굴이 찡그려지자 그제야 기분이 좀 풀린 듯 피식 웃은 남자가 사념으로 말을 전달해 왔다.

    -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비틀리는 것이 바로 미래지. 그러니 모든 게 네가 원하던 대로만 될 수는 없을 거야.

    예언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에 천세연은 날카롭게 남자를 쏘아보았다.

    갑자기 뇌를 마구 주무르는 느낌에 이마를 부여잡은 천세연이 비틀거리며 신음하자 그의 어깨를 쥔 손을 놓은 남자는 주저앉은 그를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 증오해. 증오하고 원망하면서 방해하면 돼. 네 오빠는 저 사람이 죽인 거야. 알겠어?

    기억이, 이채현과의 마지막 대화가 흐릿해졌다. 그가 제 오빠를 껴안으며 내뱉었던 후회가 지워졌다.

    오직 제 잘못이라 덤덤하게 말하는 기억만을 제외하고 그 이후의 모든 기억이 어지럽게 뒤섞여 검은 혼돈으로 변해 갔다.

    남자의 헛소리와 다름없는 마지막 말만이 그의 머릿속에 짙게 남았다. 오빠를 죽인 건 채현 언니가 아니… 오빠를 죽인 건…….

    “당신,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되감기던 시간의 톱니바퀴가 시작점을 정하여 뚝 멈췄다.

    째깍, 째깍.

    시곗바늘 소리와 함께 세계의 시간이 휙휙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힘없이 누워 거꾸로 재생 버튼을 누른 듯 돌아가는 세계를 보던 천세연은 머리가 아파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세연아, 일어나야지.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자고 있으면 어떡해.”

    부드럽게 그를 흔드는 손길과 익숙한 목소리에 천세연은 눈을 떴다. 딱딱하고 차디찬 땅바닥이 아닌 푹신한 매트리스의 감촉이 등에 느껴졌다.

    그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싸늘한 시체로 누워 있던 오빠가 아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오빠가 눈앞에 있었다.

    “오빠……!”

    “악몽이라도 꿨어?”

    펑펑 울며 그를 와락 끌어안자 당황하던 천우현은 천세연의 등을 토닥였다.

    겨우 진정하고 눈물을 멈추자마자 천우현의 품에서 벗어난 천세연은 휴대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20XX년 3월 28일.

    천세연은 오빠가 죽고 세상이 멸망하기 9개월 전으로 회귀했다.

    * * *

    『스킬 ‘메모리테이크(L)’가 종료되었습니다.』

    메모리테이크로 인해 삭제되고 조작되었던 기억을 되찾은 천세연은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아무래도 회귀 후 나한테 띠껍게 굴고 막말한 흑역사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나를 힐긋 보는 눈에 담긴 죄책감과 반가움에 고개를 저었다.

    회귀 전에 우리가 아무리 친근한 사이였어도 지금 와서 친한 척은 사절이란다. 혼자만의 좋았던 기억으로 고이 간직하고 있으렴.

    그래도 지금까지는 1회 차보다 훨씬 나아졌네.

    천 남매는 꼴통 적벽 길드가 아닌 협회 지원을 받는 프리 헌터로 잘 활동하고 있었으며, 아현이도 무사하고, 김나연도 죽지 않고 B급으로 재각성했고, 천우현은 내 살인을 덮어쓰고 살인자로 욕을 들어 먹지 않았다.

    그리고 천세연은 자신의 오빠가 귀환자인 걸 알게 되었고 말이다.

    소설 회귀물에서도 1회 차가 피폐물인 건 국룰이었는데 현실에서까지 적용될 필요가 있나? 하긴, 세상이 행복하고 여유롭게 잘 굴러갔으면 시간을 왜 돌렸겠어.

    기억을 되찾은 천세연이 우는 중이라면 가장 큰 두 개의 진실을 알아 버린 나는 치밀어 오르는 헛구역질에 입을 틀어막는 중이었다.

    그만큼 진실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언니, 이번에는 결말이 달라질 수 있죠……? 세상이 멸망하지 않을 방도가 있는 거 맞죠?”

    겨우 진정된 손에 입을 틀어막은 손을 떼어 지끈거리는 미간을 문지르자 천세연이 울먹이며 물어 왔다.

    “있기야 있지.”

    한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그 방도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두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그런 유토피아적인 방법이 아니라서 문제지.

    한결 환해진 표정으로 미소 짓던 천세연이 짧은 비명과 함께 이마를 짚더니 고개를 숙였다.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메모리테이크의 후유증이었다.

    “일단 너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거 같으니까 집에 가서 좀 쉬어.”

    생각보다 더 부드러운 어조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천세연의 기억이 나를 오해할 수밖에 없도록 엉망으로 헤집어진 건 애쉬의 수작이지 천세연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원인이긴 하지. 애쉬가 굳이 천세연의 기억을 건든 건 나 때문이니까. 이야, 내가 원인인 일이 많기도 하다.

    이 정도면 진정한 의미로의 흑막 아닌가.

    진세빈은 중간 보스였고 내가 최종 보스였던 거지.

    『스킬 ‘타인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1인』

    전에 한 번 방문했던 천우현의 집 좌표로 천세연을 보내고 다시 고요하고 적적해진 자취방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는 이곳에 있는 게 당연해질 정도로 익숙해져 버렸던 녀석의 얼굴을 떠올렸다.

    애교 섞인 얼굴로 무해하게 웃으며, 서러운 얼굴로 뚝뚝 눈물을 떨구며, 억울하다는 듯 결백을 주장하며 뒤에서 나를 나락으로 끌고 들어가기 위한 수작을 부린 녀석의 얼굴을.

    우리가 진작 진솔한 대화를 나눴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아니면 내가 그때 네 어머니의 레어에서 너한테 손을 내밀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러면 나는 내 세계에서 내가 그토록 바라던 평화로운 삶을 살며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었을까?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익숙한 은발이 내 앞에 나타났다.

    “다신 안 볼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이렇게 저를 불러내셨다는 건 폐하께서 제 수작을 알아차렸다는 뜻이겠죠?”

    붉게 달아오른 눈가가 퍽 애처로웠지만 이번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말없이 입을 다물고 내려다보기만 하자 애쉬가 웃었다.

    독이 있는 꽃처럼 날카로운 웃음이었다. 나를 상처 입히려 작정한 듯한 비수를 품은 물음이 쏟아졌다.

    “무얼 듣고 싶으세요? 제가 폐하를 다시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지? 아니면 마신과의 내기에서 제 무엇을 걸었는지?”

    “잘 아네. 차례로 이야기해 봐. 이번에는 숨기는 거 없이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할 거야, 애쉬.”

    천천히 허리를 굽혀 애쉬의 적안과 눈을 마주했다.

    “내가 더는 너를 믿지 못하고 메모리테이크 스킬을 쓰기 전에. 네 거짓은 이제 충분히 들었으니 말이야.”

    내 발치에 무릎을 꿇은 애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도 이미 눈치채고 계셨잖아요. 타 마계 잔당들을 끌어모은 게 저라는 걸. 그래서 제게 그렇게 캐물으시고 저를 보기 싫다고 내치신 거잖아요. 아닌가요?”

    “네가 끌어모은 잔당 규모는?”

    “제법 되죠. 폐하께서 정복한 땅을 방치하고 이곳으로 훌쩍 넘어오신 덕분에.”

    애쉬의 입꼬리가 슬쩍 당겨졌다.

    “적어도 이 세계의 절반을 엉망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하답니다.”

    빌어먹을, 괜히 귀환을 서둘렀다. 어차피 마신에게 시간 조절해 달라고 부탁할 거였으니 제대로 마무리하고 돌아올걸.

    아니, 그런데 누가 차원 연결이 계속 유지될 줄 알았겠냐. 귀환하면 그 세계는 그저 좋은 기억으로만 묻어 놓고 다시 현생 사는 게 클리셰 아니었냐고.

    내 일대기를 소설이라고 써서 올리면 악플 쫘르륵 달릴 듯. 이게 뭔 개막장이냐면서.

    “지금까지 잔당들이 지구로 얼마나 넘어왔지?”

    “일단 7마계 잔당들은 절반 정도 넘어왔죠. 얼마 전 폐하께서 손수 죽이셨던 놈들이 우두머리랍니다. 나머지 놈들은 디데이만을 기다리고 있고요.”

    디데이면 천세연의 기억에서 보았던 그 대규모 게이트 오픈인가.

    다른 차원의 몬스터들도 보인 것으로 봐선 그 디데이에 넘어온 것들은 마계만이 아닌 모양이다.

    만약 애쉬의 계획대로 디데이에 마계 잔당 놈들이 몰려온다면 정말로 그날은 지구 멸망의 날이 될 수도 있었다.

    마계 놈들만이라도 기필코 막아야 한다. 나머지는 전 세계 헌터들이 알아서 막아 주겠지. 그건 내 책임 아님.

    “이 사실을 알고 있는 1마계 중앙 마족은 얼마나 있지?”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애쉬가 눈을 곱게 휘어 웃으며 봄바람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이블과 체이스터를 제외한 모든 마족이요.”

    나를 상처 입히고 난도질하려 작정한 모습으로 그렇게.

    상처 입히려 마음먹었으면 계속 독한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지, 내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헛웃음을 내뱉자마자 애쉬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그런 표정 짓지 않으셔도 돼요. 그들이 원하는 건 폐하의 자리가 아니라 그저 폐하께서 하루빨리 마계로 돌아오셔서 혼란스러운 마계를 안정시키는 거니까요.”

    “X발, 망할 새끼들이 짜고 내 뒤통수를 후린 건데 그거나 그거나. 너희들이 무슨 생각이었건 내 뒤통수 친 건 변함없지.”

    젠장, 이제는 크라토스를 넘기지도 못하고. 선택지가 이중택일이잖아.

    짜증스러운 손길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자 느긋하게 몸을 일으킨 애쉬가 길어지는 이야기에 지쳐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내게로 성큼 다가왔다.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밀어 침대에 눕힌 애쉬가 팔을 짚어 아슬아슬한 거리를 남겨 두고 상체를 지탱했다.

    자세 한번 불경하구나. 속으로 혀를 차고 있자 애쉬가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마신은 소원을,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요, 폐하.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었던 건 심장을 모아 자신을 봉인에서 풀어 준 이들을 향한 관용이었고…….”

    내 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댄 애쉬가 속삭였다.

    “정말로 원하는 게 있다면 마신과 내기를 해야 하죠.”

    말캉한 입술의 감촉이 내 귓불을 스쳤다. 파리 쫓듯 손을 내젓자 다시 내 위에서 얼굴을 마주한 애쉬가 예쁘게 눈을 휘어 웃었다.

    “…우리?”

    애쉬의 말의 한 부분을 나직하게 뇌까렸다.

    “연결을 끊지 말라 마신에게 소원을 빌었던 게 너였구나.”

    “폐하의 옆에서 그리 열심히 마계 정복을 보조했는데 제게도 그 정도 소원쯤은 빌 권리가 있잖아요?”

    그래, 다 내 잘못이다. 내가 X발, 마계의 여포가 되어서 일당백으로 홀로 전장을 쓸고 다녔어야 했는데.

    “마신이 내건 내기 조건은 폐하의 귀환이에요. 폐하가 돌아오시면 제 승리, 이곳에 남기를 택하신다면 제 패배.”

    “너는 뭘 걸었는데.”

    그게 바로 원하던 질문이었는 듯 애쉬의 웃음이 한결 더 환해졌다.

    “저는 제 존재를 걸었답니다. 제가 지면 제 존재는 사라지겠죠. 뭐, 미련은 없어요. 폐하께서 제가 없는 세계에 남아 행복한 모습을 마계에서 끊임없이 상상하느니 차라리 소멸하는 게 낫죠.”

    “…미친 새끼.”

    경멸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존재를 걸어?

    이거 완전 진세빈 순한 맛 아니야.

    내 욕설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 지은 애쉬가 내 볼을 엄지손가락으로 슬슬 쓸어내렸다.

    “폐하께서 전대 마왕이 원망스러우면서도 고맙다고 하셨죠. 저도 전대 마왕이 고마우면서도 원망스러워요.”

    내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점차 끈적해졌다. 탁, 내치니 내 손목을 잡고 들어 올린 애쉬가 내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입술이 닿아 오는 감촉은 뜨거웠다.

    “크라토스를 넘겨주어 폐하께서 경계의 숲에서 죽지 않고 저를 만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건 고맙지만, 그 크라토스 때문에 제가 폐하를 가두어 두고 저만 볼 수 있게 만들 수가 없잖아요.”

    “악, X발!”

    반사적으로 욕을 내뱉으며 애쉬를 걷어찼다. 집착 감금 개극혐. 소설에서도 집착까지는 아슬아슬한 마지노선이었지만 감금하는 순간 그 소설은 영원히 내게 아웃이었다.

    아니, 사람의 기본권인 자유를 제한하는 상태에서 사랑이 가능해? 스톡홀름증후군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거 아니고?

    내 질색에 애쉬가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으나 마음의 타격은 내가 더 크게 받았다. 내가 약했으면 나도 주희 선배 꼴 났겠네.

    “내가 너보다 약해도 그런 짓은 하면 안 되는 거거든? 내가 너, 그렇게 키웠냐?”

    “폐하가 인간인 걸 깜빡했네요.”

    피식 웃은 애쉬가 걷어차인 부분을 문지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족들에게 순수한 사랑이 어디 있어요.”

    “순수한 사랑을 못 할 거 같으면 내게 사랑한다고 하지 마. 현실 집착은 딱 질색이니까.”

    내 단호한 말에 애쉬가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이럴 거면 그냥 그 레어에 두고 가지 그랬어요. 끝까지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손 내밀지 말고.”

    또 그 레퍼토리냐. 질린다, 질려. 심드렁한 얼굴로 애쉬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무표정으로 나를 마주하는 애쉬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툭, 툭.

    눈물방울이 내 얼굴에 떨어졌다.

    “그냥 처음부터 버릴 것이지……. 내가 폐하가 없어도 버틸 수 있을 때 버리지 그랬어요.”

    눈동자 속 노을이 일렁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만 뚝뚝 떨구며, 그렇게.

    원망과 미련, 애증, 온갖 부정적인 감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과 섞이지 않고 짙게 남아 있는, 가장 무거운 감정이 그 한마디에 선명하게 묻어 나왔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함께하는 미래는 어떤 모양이든 행복할 수 없었다. 내가 불행해지든 네가 불행해지든, 둘 중 하나겠지.

    결국 무너져 내린 애쉬가 내 팔을 단단히 붙들고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질문했다. 결코 놓지 않겠다는 듯 매달리는 손길은 애절하기까지 했다.

    “아직도 이 세계가 사랑스러워요? 이제는 평화롭지도 않은, 폐하를 원망하고 외면하는 이 세계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난 이 세계를 사랑한 게 아니야. 이 세계의 내 것들, 그리고 잔잔한 일상 속의 평화를 사랑했지.”

    내가 정말로 이 세계를, 지구를 사랑했으면 열심히 환경단체에 후원하고 환경운동 하면서 살았겠지. 이재의에게 대충 한 분리수거로 고나리 먹는 삶을 안 살고.

    “그저 그 평화를 내가 망쳐 놓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못 놓는 거야.”

    손을 뻗어 애쉬의 뺨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이 눈물로 축축해졌다.

    “일단 잔당들은 거둘 수 있는 놈들만이라도 거둬. 어차피 네가 그놈들 모두를 통제할 거라곤 생각 안 하니까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돌아오시게요?”

    “글쎄…….”

    애매모호한 대답을 듣자 시커멓게 죽어 있던 노을빛 눈에 빛이 되살아났다. 차라리 진짜 내 자리를 노리고 뒤통수를 친 나쁜 놈이 되지 그랬어. 정이라도 떼게.

    “디데이가 정확히 언제야?”

    “키스해 주시면 알려 드릴게요.”

    “까불지.”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리며 시선을 마주했다. 언제나 맹목적으로 나를 보던 적안은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이 자식, 진심이구나.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마. 착각하지도 말고. 나는 너 안 사랑하니까.”

    “글쎄요, 폐하께서도 저를 사랑하시긴 하잖아요. 그러니 제가 이렇게 선을 넘었어도 저를 죽이지 않으시죠.”

    “그래, 정정하지. 네 사랑과 내 사랑은 결이 다르다고.”

    뺨을 감싼 손을 뒷목으로 스르륵 넘겨 그대로 끌어당겼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뚫어질 듯 응시하는 적안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꾹 감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애쉬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릿함에 반사적으로 입술을 열자 호흡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내 뺨을 부여잡은 애쉬가 고개를 기울이자 입술이 더욱 깊숙이 맞물렸다.

    한참 후, 입술이 떨어지고 숨을 몰아쉬자 다정한 손길로 내 입가를 훔친 애쉬가 내가 원하는 대답을 뱉었다.

    “디데이 날짜는 한 달 후 오늘이에요.”

    생각보다 더 시간이 부족했다. 상체를 일으켜 지끈거리는 미간을 문지르자 부드러운 손길이 내 손을 치우고 이마에 닿았다. 보통 인간보다 체온이 낮은 손은 서늘했다.

    “폐하가 마계에 돌아오신다 한들 저는 추방이겠죠. 제 저택에 연금이거나.”

    눈을 접어 곱게 웃은 애쉬가 뜬금없이 던진 말에 어깨만 으쓱였다. 잘 아네. 그걸 잘 알면서도 이런 짓을 저질렀단 말이지?

    그 반응에 긴 속눈썹을 내리깐 애쉬가 처연하게 미소지었다.

    “아직은 모르겠네요. 같은 하늘 아래 있는 폐하를 보지 못하는 편이 더 괴로울지, 아니면 폐하가 영영 저를 잊는 게 더 괴로울지.”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이런 짓거리를 저질렀으면서도 옆에 계속 두어 달라고?”

    비소하자 내 손을 가볍게 잡고 들어 올린 애쉬가 정중하게 내 손등에 입 맞췄다.

    “폐하께서 무슨 선택을 하시든 달게 받아들이겠으니 부디 후회 없는 결정을 내리시길.”

    지금 나를 어느 쪽을 선택하든 X되는 딜레마에 빠뜨려 놓고 후회 없는 결정을 내리라는 소리가 나오니?

    다른 차원 하나 털어서 크라토스의 힘 말고 어떻게든 시간을 되돌릴 또 다른 방법을 찾아와서 세계 시간을 다시 한번 더 돌리는 게 제일 후회 없겠다, 인마.

    * * *

    애쉬는 그 말을 끝으로 제가 벌여 놓은 일의 뒷수습을 위해 다시 마계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마법진에 빛이 들어왔다.

    아린 입술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키스로 협박질한 건 애쉬인데 뭔가 내가 더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키가 허리춤에 겨우 닿았을 때부터 보아 왔던 애랑 키스라니.

    역키잡……. 분명 소설로 볼 때는 취향이었는데. 어릴 적부터 보아 왔던 아이라고 껄끄러워하는 여주한테 ‘아, 어리고 탱탱한 게 좋지! 뭘 고민해!’라고 외쳤던 기억이 아주 새록새록 한데.

    막상 내 일로 닥치니 소설 속 여주들의 심란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멍하니 침대에 대자로 널브러져 있다가 바로 옆에서 울리는 휴대폰 진동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여보세요.”

    - …채현 씨.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운 직후의 목소리였다. 시계를 보니 얼추 시간은 천세연과 천우현이 충분한 대화를 나누고도 남았을 시간.

    “혹시 울었어요?”

    - 설마요.

    힘없는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혹시 천세연이랑 잘 안 풀렸나? 그럴 리가 없는데.

    무슨 일로 전화했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천우현이 선수 쳐 용건을 꺼냈다.

    - 오늘 저녁에 게이트 닫으러 가신다고 했던 게 기억 나서요. 괜찮으면 같이 갈래요?

    오, 잘됐네. 마침 오늘 함께 게이트를 닫기로 했던 대공가 가정교사가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전해 와서 홀로 게이트를 닫아야 했는데.

    물론 돌아가신 증조할머니를 두 번 돌아가시게 만드는 불꽃불효 변명은 조별 과제 잠수 단골 멘트이기 때문에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장례식장에서 셀카 찍어서 보내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대체 그 세계에서 가정교사 하면서 뭘 가르친 거냐. 증조할머니 팔아서 조별 과제 째는 법? 님이 가르친 애들 인성은 안녕하냐?

    “저야 좋죠. 그러고 보니 단둘이 게이트 공략하는 건 처음이네요.”

    - 단둘이요?

    “같이 공략해야 하는 분이 잠수를 타신 터라.”

    - 아…….

    내 태연한 말에 천우현이 잠시 침묵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 제가 채현 씨 집 앞으로 가면 되죠?

    “네네, 올 때 날계란이랑 렉카충들 조심하시고요.”

    그나마 실드로 건물이 더러워지지 않아서인지 아직까지는 집주인 아주머니에게서 방을 빼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 20분쯤 기다렸을까,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모자와 마스크를 푹 눌러쓰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망할 사이버 렉카 너튜버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어어, 테이머 나왔다! 잠깐 인터뷰 가능하세요?”

    “솔직히 컨셉질이죠? 귀환자라는 증거가 뭐예요?”

    “혹시 차원 이동한 세계 썰 푸실 생각 있는지? 방송 출연 10분에 300 드릴게요.”

    익숙하게 몸으로 대충 밀치고 천우현이 있는 쪽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포기를 모르고 끈질기게 쫓아오는 렉카 놈들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곱게 올려 주고는 곧바로 천우현을 잡고 미리 외워 놨던 좌표로의 순간 이동을 실행했다.

    귀환자인 걸 밝히니 이거 하나는 좋았다.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스킬을 쓸 수 있다는 것.

    공간이 전환되고 차가운 겨울의 바닷바람이 우리를 반겼다. 코끝에 짠내가 스쳤다. 바위 위로 철썩 올라온 바닷물이 신발 밑창을 적시고 다시 쓸려 갔다.

    “참……. 스펙터클하게 돌아오셨네.”

    제주도라니. 다 같이 게이트 공략하러 왔으면 내가 단체 순간 이동으로 귀환자들 인솔할 뻔했네.

    가까이 보이는 용두암에 혀를 차다가 좌표 계산에 조금만 오차가 있었어도 바다 위로 순간 이동할 뻔했다는 사실에 혀를 씹었다.

    게이트는 바다와 바위의 사이, 그러니까 정말 발을 삐끗하여 미끄러져 바다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 아니라면 절대 발견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관광객들이 많이 걸음 하지 않는 곳이라는 게 이 게이트 위치의 유일한 장점이었달까.

    왜 대공가 가정교사가 증조할머니까지 팔아 가며 안 오려 했는지 이해가 됐다. 솔직히 이렇게 들어가기 힘든 위치에 있는 게이트는 처음이었다.

    순간 이동으로 오지 않았으면 이곳까지 오는 것도 꽤나 고난이었으리라. 대공가 가정교사는 여기를 어떻게 벗어나서 집까지 간 거지?

    “조심해요.”

    발을 헛디뎌 미끄러질 뻔한 천우현을 다급히 붙잡자 그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조심스럽게 바위 끝으로 가 폴짝 게이트 안으로 뛰어내렸다.

    『B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게이트가 B급이라 나 혼자만 보내려 한 거 봐준다. A급이면 어림없었어.

    이번 게이트는 정말 별거 없었다. 정체 모를 검은색 덩어리들이 꾸물거리며 돌아다니는 것 빼고는 말이다. 그리고 그 검은색 덩어리들이 독을 내뿜는다는 것도 제외한다면.

    하지만 마수의 맹독도 정화하는 천우현의 성검은 이 정도의 독에는 끄떡하지 않았다.

    보스룸에 있는 조금 더 큰 검은색 덩어리를 빠르게 해치우고 핵에 손바닥을 대자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눈감고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 외울 수 있는 문장이 나타났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차원 #SF30-17과의 연결을 영구히 끊으시겠습니까?』

    “허가.”

    『차원의 연결을 끊어 냈습니다.』

    『게이트가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 - 00:05:00』

    게이트를 나와 바위에 발을 디디자 해가 천천히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푸른 하늘이 점차 붉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바위에 털썩 걸터앉자 천우현 역시 슬그머니 내 옆에 앉았다. 여름 휴가철의 북적거렸던 해운대가 생각났다.

    “동생이랑은 이야기 잘 했어요?”

    “제가 귀환자란 걸 세연이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먼저 말해 주니까 속은 좀 편하더군요.”

    후련하다는 듯 웃은 천우현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채현 씨는 괜찮나요? 아까 그 너튜버들 무리 대하시는 걸 보니 그런 일이 한두 번 있던 게 아닌 것 같은데. 건물에 쳐진 실드도 그렇고.”

    “어느 정도 각오했거든요. 어차피 그 사람들이 제게 해 끼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너무 대중이나 언론의 관심이 채현 씨에게만 집중된 것 같아서…….”

    “제가 제일 유명했잖아요. 랭킹 1위인 우현 씨가 귀환자라고 밝히면 좀 분산되겠네.”

    장난식으로 말하며 키득거리자 천우현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사람 하나 없는 공간에서 단둘이 앉아 있자 마계에서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돌아오기만 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누가 전 국민에게 조리돌림당할 거라고 예상했겠어?

    노을이 하늘을 완전히 물들였다.

    유일하게 햇빛이 비치는 숲속 공간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임을 알려 주던 노을. 언제나 천우현과 함께 보아 왔던 그 하늘의 색깔.

    돌아온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시간 중, 노을이 지면 당신이 생각나던 건 어찌 보면 불가항력이었으리라.

    잔잔한 파도 소리,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 노을빛에 반짝거리는 바다.

    그 세계에서 내가 보고 싶었던 바다의 풍경이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으, 추워. 대충 걸치고 나온 과잠 소매를 문지르고 있자 겉옷을 벗은 천우현이 내 어깨에 제 겉옷을 걸쳐 주었다.

    “날씨도 추운데 왜 이렇게 춥게 입고 나왔어요.”

    “이렇게 바다 구경하는 건 예정에 없었죠.”

    추워도 볼 가치는 충분히 있는 풍경이지만.

    바람이 내 옆머리를 가볍게 휘날리며 지나갔다. 계속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시야를 가려 신경질적으로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우현 씨, 그거 알아요? 지금 저희가 이렇게 평화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한 달밖에 안 남았어요.”

    “그게 무슨……?”

    “제가 귀환하려고 정복했던 마계 잔당들이 저 하나 때문에 이 세계를 망치겠다고 모였다네요.”

    속을 곪게 만든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은 척 꺼냈다. 당황한 천우현의 표정을 보며 쓰게 웃었다.

    “한 달 후엔 저희가 건너왔던 마계뿐 아니라 다른 차원의 게이트 역시 대규모로 열릴 거예요.”

    그리고 또 과거의 1회 차처럼 흘러간다면 당신은 최전선에서 죽음을 맞이하겠지. 더는 시간을 돌릴 수 없는 나는 또다시 당신의 시체를 끌어안으며 후회하고 절망하겠지.

    “확실합니까?”

    “아주 확실하죠. 차원 침범을 계획한 놈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제 눈으로 직접 과거 일을 보기도 했고.”

    다시 바다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그러다가 세운 무릎에 고개를 묻고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번 일은 제가 감당해야겠죠. 명백히 내 실수니까.”

    “우리, 같은 차원에서 돌아온 거 아니었나요?”

    아이씨, 목 뻐근해. 자세를 다시 바르게 고쳐 앉고 천우현의 물음에 부러 돌아보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큰 손바닥이 내 손등을 다정한 손길로 덮었다.

    “그러니 채현 씨 혼자만 책임질 필요는 없어요.”

    적어도 당신은 돌아온답시고 분열된 일곱 마계를 정복하는 미친 짓은 안 했잖아.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바람에 헝클어진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날씨 좋고, 풍경 좋고, 파도 소리와 주변 소음 딱 고즈넉하니 좋고. 고백받기 딱 좋은 풍경이다. 완전 드라마나 소설 속 고백 타이밍 아니야?

    “좋아해요, 채현 씨.”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훅 들어오는 고백 멘트에 옆머리를 넘기던 손가락이 삐끗했다.

    이거 우연인가? 독심술 스킬이라도 있나? 아니면 천우현도 내심 고백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천세연의 기억으로 엿보았던 회귀 전 1회 차에서 천세연의 적극 공세로 나와 천우현이 연인이 되었던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 회차에서는 천세연의 적극적인 방해로 딱히 엮일 일이 없었는데.

    물론 소소하게 엮이며 그린 라이트라 착각했던 수많은 순간이 존재했지만.

    내가 멍하니 옆을 돌아보자 싱긋 웃은 천우현이 내 옆머리를 마저 귀 뒤로 넘겨 주며 덧붙였다.

    “한 번은 말하고 싶었어요.”

    언제부터? 대체 왜?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혀끝에 맴도는 말을 삼키고 한마디만 꺼냈다.

    “지금 당장 대답 안 해도 되죠?”

    천우현이 말없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노을 밑 얼굴은 노을 때문인지, 홍조인지 모르게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노을이 완전히 질 때까지 모르는 척 서로의 손을 포개고는 해 질 무렵의 바다를 한참 감상했다.

    불어오는 바람은 무척이나 추웠지만 손등에 닿아 오는 손바닥의 체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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