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회귀물 1회 차가 피폐물인 건 국룰
지이잉―
계속해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진동을 아예 껐지만 알림은 숫자를 더해 갔다.
hansung23 귀환자 OUT
ga_0.0_e 너 진짜 뻔뻔하다ㅋㅋ
king_an 채혀나 테이머라고 구라 치고 관심받으니까 좋아써?
adsf785 얘 학창 시절부터 좀 나대는 감 있었음ㅋ
yun_x.x 민폐 그만 끼치고 너네 세계로 돌아가
ojeehyun @yun_x.x 너네 세계 ㅇㅈㄹ 채현이가 외계인이냐? 귀환자 뜻 몰라?
yun_x.x @ojeehyun 시녀질 그만~ 이 지경까지 얘 실드 치고 싶어 지현아?
ojeehyun @yun_x.x 채현이 테이머라고 떴을 때는 아주 영혼까지 팔아서 발가락 빨더니 이제 와서 발 빼는 꼴 봐라ㅋ 양심 있냐?ㅋㅋ
게이트를 닫은 뒤로 하도 바빠 미처 닫지 못했던 인별의 최신 게시글에는 이미 나를 욕하는 댓글들이 한가득이었다.
집에 와서 비공개로 전환하기 전에 최신 게시글에 다다닥 달린 댓글들을 읽으며 피식거렸다.
마계의 무시무시한 패드립과 저주에 단련된 터라 딱히 충격받지는 않았다는 게 함정. 오우, 나 장수하겠네.
그런데 얘들, 내가 테이머라고 뜨자마자 인별에서 나 태그하면서 친한 척 비비던 애들 아니었나? 아이디가 참으로 익숙하구나.
댓글과 연락 온 알림 수를 캡처해서 귀환자 단체 채팅방에 보내니 곧바로 반응이 쫙쫙 올라왔다.
〉Local Channel-ROK
〉귀환자 단체 채팅방
〉〉공지 사항: 이름은 차원 이동한 곳에서의 직업, 혹은 세계관으로 부탁드립니다
스팀펑크: 와 댓글에 부모 욕이 없어!
백마왕: 오백마왕 님 지인들 다들 쫄았나 봐욬ㅋㅋ 문자랑 채팅도 얼마 안 왔네ㅋㅋ
마탑주: 강약약강 쩐다ㅋ 댓글 순한 거 보소
용병왕: 선 넘는 댓글은 고소하시면 됩니다 혹시 변호사 필요하시면 다들 말씀하세요
혁명군 수장: 그래도 실드 쳐 주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상생활 영위하세요
혁명군 수장: 예를 들면 교수님이라든가 교수님이라든가 교수님이라든가…….
드래곤슬레이어: 교수님이 왜 실드 쳐 줘여???
혁명군 수장: 네가 귀환자든 뭐든 상관없으니까 논문이나 쓰라네요
드래곤슬레이어: 지금 학교 단체 채팅방도 마왕 님 이야기만 해여ㅋㅋ
드래곤슬레이어: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보고 수능장 나오지 말라고 조리돌림하고 있었는데ㅋㅋㅋ
침울해 있던 드래곤슬레이어는 다시 예전의 활발한 모습을 되찾았다. 수능 이틀 남은 애가 채팅방에서 이러고 있는 걸 보니 가슴이 답답-해지긴 하지만.
확실히 그 쇼를 한 게 효과가 있긴 하구나.
최초 직업군으로 이슈를 탔던 테이머가 사실 테이머가 아닌 귀환자로 밝혀지자 드래곤슬레이어의 케이스 못지않게 나라가 뒤집혔다.
내일 드래곤슬레이어가 수능 본다는 사실은 쏙 들어갈 정도로. 드래곤슬레이어가 수능 마치고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이 화력이 유지되었으면 했다.
어차피 우리나라는 냄비의 민족이니 금방 꺼지겠지, 뭐.
테이머라고 이슈 타던 것도 금방 가라앉고 헌터들 사이에서나 알음알음 1티어 논쟁으로 끌올 된 것처럼.
문제는 따로 있었다.
✆엄마
아까부터 계속 화면에 뜨는 이름은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긴장되게 만들었다.
이건 직접 얼굴 보고 말하는 게 낫겠지. 혹여 모를 위험 상황에서 부모님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하기도 하고.
『순간 이동(S) - 저장된 좌표』
- 자취방
- 본가
- 자연대 건물…….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저장된 좌표를 열어 본가를 선택했다.
“얘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 세상에, 채현아!”
거실에서 초조한 얼굴로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엄마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불쑥 나타난 나를 발견한 엄마는 의문조차 가지지 않고 곧바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고생했어, 고생했어, 우리 딸……. 낯선 곳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어깨에 이마를 댄 엄마를 보자 내가 어느새 엄마의 키를 훌쩍 뛰어넘었음이 확 와닿았다. 심지어 엄마의 나이마저도.
부모보다 나이 많은 딸. 이게 가능하구나. 어색한 손길로 엄마를 마주 안자 엄마가 흐느꼈다.
“돌아와서 다행이다. 사람들 말 신경 쓰지 마라. 엄마는 네가 돌아와서 얼마나 고마운 줄 몰라…….”
울컥,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돌아오길 잘했다, 정말로.
꼭 나를 잃어버렸다 다시 찾기라도 한 것처럼 내 얼굴을 정신없이 쓰다듬으며 엄마가 물었다.
“그런데 언제 떨어졌대? 실종된 기간도 없었는데… 서울에 있을 때 그런 거야?”
“그때 있잖아, 재작년 여름에 나 새벽 4시까지 술 마시고 안 들어왔었던 때.”
엄마의 얼굴에 죄책감이 더해졌다. 카드 뺏어서 자르고 외출 금지 명령을 내린 기억이 새록새록 하니 되살아나나 보다.
그때 당시에는 엄마가 진상을 알면 후회할 거라며 입을 비죽거리긴 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후회하길 바란 건 아닌데.
막 바깥에서 집으로 들어온 아빠 역시 한걸음에 달려와 나와 엄마를 끌어안았다. 이게 무슨 이산가족 상봉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다시 다른 차원인가 세계인가로 안 돌아가도 되는 거지?”
아빠의 물음에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그건 나도 확답을 못 하겠어, 아빠.
내가 대답하지 않자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는 부모님을 향해 씩 웃어 주고 본가의 내 방으로 들어왔다.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방문을 꼭 닫고 방음 스킬을 꼼꼼히 친 후 세이블을 소환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세이블의 충신(이라 쓰고 막말이라 읽는다) 퍼레이드 이후 나와 세이블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아직 어색한 상태였다.
마왕성 입성 전에는 세이블에게 막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가.
“지금 방 밖에 있는 두 사람에게 마족 좀 가드로 붙여. 최대한 믿을 만한 놈으로. 보호 대상 눈에도 안 띄게 하고. 내 부모님이니까 특히 주의해서 보호해.”
“폐하께서 마음 놓고 양친의 보호를 맡길 수 있는 마족이라면 저나 체이스터 정도가 전부이지 않습니까.”
“그러긴 하지.”
세이블은 마계를 비운 내 대리 역할을 하느라 바쁘고 체이스터는 덜렁거려서 영 못 미더운데.
하지만 괜히 다른 놈에게 맡겼다가 놈이 내 통수를 친다고 우리 부모님을 해치기라도 한다면 나는 아마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체이스터 붙여 놔. 그래도 명색이 마족이니 인간 광신도 상대쯤은 문제없겠지.”
우리 부모님을 건드리면 나는 전 세계 귀환자들을 다 끌어들여서 레벨레이션과 전쟁마저도 불사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한 세이블을 마계로 역소환하고 다시 방문을 열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는 부모님의 앞에 섰다.
“나 괜찮으니까 두 분 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광신도들이 귀환자 가족까지 위협한다고 하니까 외출할 때 꼭 조심하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엄마, 아빠 딸이라고 절대 말하지 말고.”
“괜찮아, 우리 딸. 엄마는 우리 딸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
그런데 문제는 엄마 딸이 저번 회차에서 세계를 멸망시켰다는데, 세계를 멸망시키는 딸도 자랑스러워해 줄 거지……?
다시 엄마와 아빠를 한 번씩 껴안고는 서울의 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쭉 돌아봤지만 누가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페리에게 보초 서라고 하면 아무도 침입 안 할 듯? 좋은 생각이라고 자화자찬하며 페리를 막 소환하려는 순간.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설마 집주인 아주머니가 방 빼라고 통보하러 왔나……? 이래서 사람은 자기 명의의 집이 있어야 하나 봐.
“누구세요?”
- 네 앞집.
잔뜩 긴장하며 묻자 익숙한 목소리가 짤막한 대답을 내뱉었다. 곧바로 문을 열자 민서 언니가 특유의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자취방에 들어오자마자 털썩 바닥에 앉은 민서 언니가 내가 건네는 오렌지주스 잔을 건네받으며 물었다.
“너 진짜 테이머 아니야?”
“그냥 애초에 테이머라는 직업군이 없어요. 제 반려 마수로 몬스터 길들이는 척만 하고 있었던 거지. 귀환자라고 까발려지는 것보단 테이머로 오해받는 게 나았죠.”
내 대답에 민서 언니가 혀를 차며 말했다.
“너도 참 대단하다. 어제 보니까 능력으로는 포커스랑 천우현도 제치고 원톱이던데, 그동안 몸 근질근질해서 어떻게 참았냐?”
“실용 스킬이야 남들에게 안 들키게 짬짬이 썼죠. 그런데 혹시 집주인 아주머니가 방 빼라고 하진 않겠죠?”
“내가 집주인이 아니라 확답은 못 주겠다. 광신도 놈들이 건물에 날계란 던지거나 사이버 렉카충들 와서 앞에서 떠들고 있으면 나 같아도 방 빼라 할 것 같긴 한데…….”
민서 언니가 꺼낸 예시들이 정말 실제로 일어날 확률이 아주 높은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공포였다.
레벨레이션 놈이 던진, 창문 바깥쪽에 범벅이 된 날계란을 힘겹게 닦는 내 모습과 학교로 가는 나한테 따라붙으며 내게 질문을 쏟아붓는 사이버 렉카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치밀어 올랐다.
집주인 아주머니랑 입주민들 양해 구해서 페리를 건물 보초로 세워 놓을까……? 그러면 웬만한 놈들은 다 500m 앞에도 못 오고 도망갈 것 같은데.
“언니는 아무렇지 않아요?”
“뭐가?”
“내가 귀환자인 거요.”
내 물음에 어깨를 으쓱한 민서 언니가 대꾸했다.
“내가 귀환자가 게이트 사태에 이어서 던전 브레이크 원인이라는 개소리 유언비어 믿고 너를 껄끄러워해야 해?”
…유감이지만 그건 개소리 유언비어가 아니고 팩트인데요.
모르는 척 동조하는 것처럼 하하, 웃자 그러니까 기죽지 말라면서 내 머리를 가볍게 헝클인 민서 언니가 물었다.
“가족들이랑 친구들 반응은 괜찮고?”
“가족들은 잘 돌아왔다고,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하시는데, 친구들은…….”
가장 친하다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 두 친구의 상반된 반응을 떠올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윤세인에게는 왜 지금까지 숨겼냐는 타박과 많이 힘들었겠다는 위로의 장문 문자가 왔지만,
-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내 통화마저도 거부하는 백아현에게서는 단 한 통의 연락도 오지 않았다.
* * *
“아니, 그래서 왜 백아현은 연락도 씹는 건데.”
“내가 봤을 때 백야는 그냥 너한테 삐친 거야.”
한탄 어린 중얼거림에 내 침대에 드러누워 있던 윤세인이 한마디 했다. 침대에 기대어 있던 등을 떼고 몸을 돌려 윤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 내가 너희한테 연락 두절되었던 두 시간 동안 다른 차원에 500년간 있다가 돌아왔다고 하면, 너희가 믿었겠어? 진지하게 상담 권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물론 네가 귀환자 정체가 드러나기 전에 차원 이동했다가 돌아왔다고 했다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겠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빙글 몸을 돌려 모로 누워 나와 눈을 마주한 세인이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귀환자 정체가 수면 위로 나오고 나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이제 ‘아, 얘가 우리를 못 믿었구나.’ 싶었고.”
“그런데 왜 너는 안 삐쳤어? 설마…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고, 내 존재가 너한테 그닥 크지 않았던 거야?”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베개가 곧장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가볍게 베개를 잡아채고 다시 침대 위로 휙 던지자 세인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 같아도 너희들에게 차원 이동당했다가 귀환했다고 말 안 하고 있었을 것 같거든. 일종의 역지사지를 해 봤달까.”
삐비빅!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하는 호출기를 익숙하게 베개로 덮고 이불까지 야무지게 덮어 호출기 소리를 최소한으로 죽인 윤세인이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 유리 멘탈 백아현 씨는 그걸 못 받아들인 거지. 게다가 너 그날 귀환자인 거 밝히기 직전에도 안 알려 줬다며.”
“그런데 너, 안 가 봐도 되냐……?”
“괜찮아. 과장님에게 너 팔면 돼.”
저런 뻔뻔한 공무원 같으니라고. 고개를 젖혀 뒤통수를 침대에 기대며 한탄하듯 말했다.
“야, 나 그런데 백야에게 차원 이동한 거 말했어. 아는 사람 이야기라고 돌려서. 걔가 소설 이야기하는 거로 받아들여서 문제였지.”
“그 말 백아현에게는 하지 마라. 더 빡칠 듯. 분명 진지하게 말 안 하고 장난식으로 했겠지.”
“아닌데, 진지했는데.”
내 말에 손을 뻗어 내 정수리를 쿡쿡 찌른 윤세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내 자취방에 백아현 불러서 자리 마련해 줄 테니까 둘이 풀어.”
그게 지금 백아현과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사건의 경위였다.
나름 아현이를 마주 볼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는데 성격 급한 우리의 윤세인 씨는 자리 마련해 준다고 말한 지 30분 만에 나랑 백아현을 자신의 자취방에 처넣었다.
그러고선 자기는 내일 순찰 돌아야 하는 수능장에 한 번 다녀와야 한다고 휙 나가 버렸다. 둘이 풀라는 말이 정말 단둘이서 대화해서 풀라는 소리였냐.
지옥의 침묵이 윤세인 없는 윤세인의 자취방에 내려앉았다.
“그래서 왜 화가 나신 건지 이유라도 한번 들어봅시다, 백아현 씨?”
“몰라서 물어?”
부러 능글맞게 말을 먼저 꺼내자 날카로운 쏘아붙임이 돌아왔다. 곧바로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혹여 그 게이트 안에 갇혔을까 봐 너를 애타게 찾아다니면서 걱정하던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었어. 어차피 다칠 일도 없는 널 게이트 안으로 못 들어가게 막고, 왜 왔냐고 타박했던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고.”
할 말이 없어져 말없이 볼만 긁고 있자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아현이가 꽉 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그전에도 숨기지 말라고 몇 번을 떠봤는데. 밝히기 전에 말이라도 해 줄 수 있었잖아. 순간 이동으로 나 대피시키기 전에 내가 귀환자라고 짧게라도 말할 기회가 있었잖아.”
“…미안.”
이 분위기에서 반박하면 역적이 될 걸 알기에 일단 사과는 하겠지만 그 긴박한 상황에서 너를 대피시키면서 뜬금없이 내가 귀환자라고 밝히는 것도 좀 웃기지 않니.
내 사과에 아현이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내가 제일 화가 났던 건, 주태윤도 아는 걸 내가 몰랐다는 거야.”
이게 본론이었구먼.
“주태윤이 내가 귀환자인 걸 알고 있다고 너한테 말했어?”
주태윤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네. 혀를 끌끌 차자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은 아현이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데 네가 귀환자인 거 밝혔을 때 유일하게 안 놀라길래. 이채, 나보다 주태윤이 더 믿음직스러웠어?”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대충 할 말이 정리되고 나자 차근차근하게 설명했다.
“주태윤이야 나를 껄끄러워하거나 귀환자를 싫어하면 주태윤 자체를 안 보면 그만인데 너는 아니잖아. 네게 말하는 게 더 고민되고 조심스러운 것이 당연하지.”
아현이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야, 그리고 내가 전에 아는 사람 이야기라면서 차원 이동한 거 슬쩍 말했잖아. 아는 사람 이야기는 곧 내 이야기, 이거 공식 아니냐고.”
“너 같으면 바로 연상되겠냐? 너도 내가 못 알아챌 거 알고 물어본 거잖아!”
결국 바락, 소리를 지른 백아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윤세인 자취방에서 처음 얼굴 마주한 좀 전보다는 훨씬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쓱 닦으며 안도했다.
‘다행이다. 기분 풀렸네.’
이로써 큰 산 하나 넘었다. 그러면 다음 산을 넘어야 할 시간이군. 이걸로 인간관계가 또 걸러지겠지.
‘ㅇㅇ 꼬우면 손절~’ 문장을 복붙 하여 내 걱정 하나 없이 이채현 귀환자설 진실 여부만을 묻는 문자가 수북이 쌓인 채팅방에 일일이 보냈다.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온 아현이가 내 휴대폰 화면을 슬쩍 훔쳐보더니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답장이 너무 싸가지 없는 거 아니야, 이채?”
“응, 네가 계속 내 전화 무시했으면 너도 오늘 중에 받았을 문장이었어.”
* * *
내가 귀환자인 게 세상에 시원하게 까발려졌어도 나는 출석 점수를 위해 학교에 나와야 했다.
팔을 콕콕 찌르는 주희 선배의 손길에 슬쩍 옆을 돌아보니 뒤쪽에서 보이지 않게 밑으로 한껏 내린 선배의 휴대폰 화면에 드래곤슬레이어가 아침에 보낸, 수능장에서 찍은 셀카가 띄워져 있었다.
다행히 수능을 치르러 무사히 들어간 모양이었다. 설마 면접에서 귀환자라고 불합격시키지는 않겠지.
역시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전국 규모 시험답게 전국의 각 수능 시험장에는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 및 몬스터 웨이브를 대비하여 헌터들이 순찰직으로 파견되었다.
원래대로라면 나도 수능 시험장 앞에 서 있어야 할 테지만 귀환자라서 그런지 순찰 인원에서 제외되었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귀환자 혐오와 차별을 멈춰 주세요.
그때, 강의실 내 자리 뒤쪽에서 저격 대상이 너무나도 명확한 속닥거림이 들려왔다.
“와, 진짜 쪽팔리겠다. 테이머 아닌 거 다 드러났잖아.”
“내 친구의 친구가 헌터 연수원 19기생이라고 했는데 희귀 능력이라고 능력 훈련도 안 받았대.”
헌터 연수원 19기는 유명해졌다. 나와 류사현, 두 명의 귀환자를 배출한 기수로 말이다.
[귀환자 친목 네트워크가 있다는 증거(Feat. 19기 연수생 인터뷰)]
몇몇 19기 동기들은 이런 사이버 렉카충들의 너튜브에 출연하여 ‘그 둘의 사이가 유난히 친근해 보이긴 했어요. 훈련 시간에 장난도 쳤고요.’라고 떠들기도 했다.
류사현이 나와 페리에게 보낸 일방적 시비나 다름없는 그 검격이 댁들 눈에는 친한 사람들끼리 투닥거리는 장난으로 보였구나.
그래도 19기 룸메이트들은 다행히도 나를 피하거나 껄끄러워하지 않았다.
[김나연 - 채현 언니, 힘내요!] 오후 3:48
[김나연 - 언니가 귀환자여도 전 언니 편이에요!] 오후 3:49
[김나연 - 솔직히 테이머보다 마왕이 더 멋져요☺☺]
[진솔 - 그러면 등급 재측정해야 해?]
[진솔 - 귀찮겠다…….] 오후 5:00
언제나 내게 까칠한 딱 한 명만은 제외하고 말이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내 뒷말을 듣다 보니까 억울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내 입으로 내가 테이머라고 한 건 오직 서열1위포커스에게 공갈쳤을 때밖에 없었다. 테이머 실검 올리면서 나를 테이머로 기정사실화한 건 대중과 언론이다. 내가 아니라!
그리고 내가 능력 훈련 안 받겠다고 요청한 게 아니라 그쪽에서 먼저 나를 가르칠 만한 조교가 없다고 자율 훈련 제안했거든?
살짝 고개를 돌려 뒤에서 쑥덕거리던 이들을 올려다보았다.
“저기요, 죄송한데 다 들리거든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앞에서 하세요. 잘못된 정보는 제가 정정해 드릴 테니까.”
내 느긋한 말에 떠들어 대던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평소처럼 내 옆자리에 앉은 ‘아직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귀환자’ 주희 선배가 그냥 무시하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령술을 쓰지 못하는 선배의 현 상황으로서는 계속해서 귀환자임을 숨기는 게 최선이긴 하지.
저 평화로운 삶, 부럽다. 게다가 선배가 건너온 차원은 진작 닫혀서 그쪽에서 찾아올 일도 없었다.
각오는 했다만 테이머라고 소문났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삶은 피곤해졌다.
전 세계 최초 직업군으로서 부러움과 경외가 섞인 그때의 감정과 달리 귀환자인 내게 지금 와닿는 감정은 증오와 껄끄러움이 대부분이어서겠지.
교수님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오시자 내게 따끔하게 꽂혀 오던 시선의 절반 정도는 거두어졌다.
휴대폰을 뒤집어 놓으려 손을 뻗은 그 타이밍에 채팅이 도착했다.
[천세연 - 언니 이거 하나만 대답해 줘요] 오전 10:32
[천세연 - 우리 오빠 어디에서 처음 만났어요?] 오전 10:33
갑자기? 생뚱맞은 질문에 당황도 잠시,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우현이라면 무어라 대답했을까, 예측하며 답장을 보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 마계 경계의 숲이니까…….
[숲] 오전 10:35
[천세연 - 오빠는 바다에 친구들이랑 여행 갔다가 만났다는데]
[천세연 - 왜 두 사람 말이 안 맞아요?] 오전 10:37
어떡하죠, 우현 씨. 아무래도 망한 것 같은데.
무어라 답장을 보내 얼버무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내게 천세연은 기어이 핵폭탄을 떨궜다.
[천세연 - 언니랑 우리 오빠, 같은 차원 떨어졌던 거 맞죠?] 오전 10:38
좋아, 당황하지 말고 일단 침착하게 천우현에게 댁 동생이 사실을 알아 버렸다는 문자를…….
[천세연 - 오빠에겐 제가 알았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천세연 - 그리고 저랑 한 번만 만나 주세요] 오전 10:40
[천세연 - 언니 저번에 기억 읽는 거 가능하다고 했잖아요 그 기억 혹시 원본 읽는 것도 가능해요?] 오전 10:42
[천세연 - 아무래도 제 기억이 이상한 것 같아요] 오전 10:43
마지막 문자에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지하철 게이트에서 만난 악마, 퍼존의 말에 따르면 회귀자는 분명 홀로 돌아가기 전 시간의 기억을 가진 자라고 했다.
그런데 그 기억이 이상하면 뭘, 어쩌자는 거야?
그리고 애초에 메모리테이크를 조작된 기억에 써 본 적이 별로 없어서 조작된 기억의 원본을 읽는 것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는데.
메모리테이크는 상대의 기억을 상대의 시점으로 체험하는 스킬이었다.
간단히 설명하면, 내가 천세연에게 메모리테이크 스킬을 쓰면 나는 제삼자의 시점이 아닌 천세연의 시점에서 천세연의 과거를 보는 거다.
마계에서 메모리테이크를 몇 번째 마계였나, 아무튼 그쪽 마계 마왕에게 썼었지. 아이루스의 심장 조각 위치를 죽어도 말 안 하길래 정보 빼려고.
내게 심장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숨긴 장소의 기억을 스스로 삭제했지만 메모리테이크가 삭제된 기억까지 복구할 수 있다는 걸 몰랐다는 게 놈의 패착이었다.
물론 나도 몰랐다. 그래서 삭제 복구는 얼결에 알아낸 메모리테이크 기능이었다. 그런데 이제 조작 복구까지 되느냐가 문제지.
그래도 일단 확인해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순순히 협조하겠다는데 이쪽에서는 땡큐지. 대체 회귀 전에 내가 어쨌길래 세계 멸망을 시켰는지나 한번 보자.
[그래, 일단 만나자]
[참고로 나 4시 이후에나 시간 난다] 오전 10:45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놨다. 아까부터 교수님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게 아무래도 착각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의 시간에 교수님이 보는 앞에서 계속 휴대폰을 만질 만큼 내 얼굴 철판은 그렇게 두껍지 않았다.
에휴, 이래서 유명인은 피곤하다니까.
* * *
[이채현 언니 - 참고로 나 4시 이후에나 시간 난다] 오전 10:45
이채현한테서 도착한 긍정의 답에 천세연은 물어뜯고 있던 엄지를 스르륵 내렸다. 뒤늦게 욱신거림이 엄지 끝을 덮쳐 왔다.
‘오빠가 물어뜯지 말라고 했는데.’
엉망이 된 엄지손톱을 내려다보며 천세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기억이 이상하다는 걸 알게 된 계기는 우습게도 오빠가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비밀을 알게 되면서였다.
귀환자를 주제로 대화를 나눈 그날 이후, 묘하게 저를 피하는 오빠의 모습에 천세연은 의문을 느꼈다.
제일 먼저 천세연이 세웠던 가설은 이거였다.
‘채현 언니가 귀환자라서 그런가?’
하지만 그때의 시점은 아직 이채현이 귀환자라고 밝히기 전이었다. 즉, 천우현이 이채현이 귀환자라는 사실을 알려면 이채현이 직접 말해 주는 것밖에 길이 없었다.
하지만 과연 사귀지도 않는, 아직은 호감만 주고받는 남자에게 자기가 귀환자라는, 일상을 뒤흔들 수 있을 만한 사실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이채현은 몰라도 천세연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 하나뿐인 가족에게도 털어놓기 힘들 것 같은데 썸남에게 귀환자라고 털어놓는 것은 그의 상식선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이는 여행지에서 잠깐 만났다고 하기에는 뭐랄까… 너무 친밀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 온 사람들처럼 말이다.
회귀 전에는 제가 적극적으로 두 사람의 사이를 밀어줘서 두 사람이 그렇게 가까워진 줄 알았는데, 제가 일부러 어깃장 놓고 훼방 놓은 이번 회차에서도 이채현과 천우현의 사이는 똑같았다.
천세연조차도 끼어들 수 없는 둘 사이의 유대감. 그 유대감을 형성한 건 무엇이었을까.
천세연은 1회 차를 회상했다.
그때도 천우현은 귀환자 이슈를 보던 그에게 그렇게 물었고 천세연은 ‘카더라라서 완전히 믿을 수는 없겠는데, 만약 진짜 귀환자들 때문에 이렇게 된 거면 그 사람들이 책임져야지.’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천우현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닥쳐온, 세계의 종말이나 다름없는 몬스터 웨이브를 막는다며 한국에 열린 게이트의 최전방으로 향했다.
“책임져야지.”
왜 오빠가 가느냐고 울며 발악하던 천세연의 머리를 쓰다듬은 천우현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그때는 랭킹 1위로서의 책임을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빠도 귀환자라면……?’
그 책임이 제가 말했던 귀환자로서의 책임을 뜻하는 거였다면?
그러면 의문점들이 모두 풀렸다.
이채현과 천우현의 유대감도, 던전 브레이크 직후 앓아눕고 자살 시도까지 했던 오빠의 모습도, 귀환자를 증오한다고 한 이후 저를 피하는 것도.
그리고 결론적으로 두 사람이 같은 차원에서 돌아왔다고 확신하게 된 건,
“오빠, 채현 언니랑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했잖아. 어디에서 만났어?”
“몇 년 전에 오빠 친구들이랑 바닷가 다녀왔었잖아, 거기서 만났어.”
[이채현 언니 - 숲] 오전 10:35
어긋난 답변 덕분이었다. 애틋한 천우현의 눈빛과 묘하게 다정한 이채현의 태도는 그저 같은 귀환자라는 접점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러면 왜 채현 언니는 오빠를 죽인 거지?’
마지막 기억은 마구 뭉친 실타래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당시는 아포칼립스나 다름없는 세계였으니.
전 세계에 빽빽하게 열린 상공 게이트들과 일반 게이트. 날이면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
세계는 금세 혼란에 빠졌다. 멸망의 전초전이었다.
민간인들은 안전지대로 대피하고 헌터와 군인들은 끊임없이 몰려나오는 몬스터를 상대했다.
몇몇 귀환자들이 활약했지만 그들은 쏟아지는 비난에 곧 인류에게서 등을 돌렸고, 가장 강력한 전력이 빠진 전장은 점점 인간들의 패배 쪽으로 기울어졌다.
러시아가 상공 게이트 내로 핵을 쏘아 보냈다가 영토에 떨어진 핵으로 인해 초토화되고, 미국이 핵 발사를 검토 중이라는 뉴스를 들으며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다.
그리고 가장 큰 게이트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다. 인간형 몬스터들과 거대한 몬스터들은 헌터들을 학살했다.
그 전장으로 향하겠다는 천우현과 이채현은 싸웠고, 천우현은, 제 오빠는 기어이 그 살육의 장으로 향했다.
뒤늦게 전장으로 달려간 곳에서 발견한 건 이채현의 발치에서 죽어 있는 천우현의 시체였고,
“그래, 내가 이 모든 일의 원인이자 원흉이야.”
이채현의 뒤로 그를 향해 무릎을 꿇고 복종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학살자 몬스터들. 검은 칠이라도 된 듯 기억나지 않는 표정.
그리고 부러 휘저어 불순물로 흐려진 흙탕물처럼 흐릿한 기억. 누군가가 마구 뭉개고 일부러 흩트린 것처럼…….
“증오해. 증오하고 원망하면서 방해하면 돼. 네 오빠는 저 사람이 죽인 거야. 알겠어?”
목소리? 사념?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더는 파고들지 말라는 듯 그의 머리를 마구 헤집어 댔다.
바로 그때, 천세연은 제 기억에 이상이 있음을 깨달았다.
하필이면 세계의 멸망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시기에.
* * *
“그렇게 된 거예요. 오빠는 제가 아직 알아챈 줄 몰라요.”
긴 이야기를 끝낸 천세연은 목을 축이고는 탁자에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내 무릎에 앉은 페리가 침입자를 경계하며 하악질을 했다.
그럼에도 페리를 반가워하는 천세연의 표정을 보아하니 회귀 전 둘의 사이는 썩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카페에서 이야기 나누기에는 이 몸이 안 좋은 쪽으로 너무 유명인이 되어 버린 터라 어쩔 수 없이 나는 천세연을 내 자취방으로 초대했다.
얘네 집에서 천우현이 이제껏 숨기고 있던 가장 큰 비밀을 주제로 대화하고 있는데 갑자기 천우현 들어오면 뻘쭘하잖아.
퍽!
갑자기 바깥에서 울리는 둔탁한 소리에 몸을 움찔하는 천세연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냥 밖에서 날계란 던지는 소리니까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창문은 실드로 보호받고 있어서 계란 던져 봤자 실드에만 묻는 데 왜 저럴까. 게다가 실드 거두면 계란 묻은 흔적도 지워지는데.
요새 AI 때문에 계란 값도 비싸던데 차암 정성이다.
“계란을… 던져요?”
“그래서 요즘 집주인 눈치 보여 죽겠어.”
내 투덜거림에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던 천세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왜 그래?”
“사람들 참 못됐다, 싶어서요.”
“너희 오빠가 귀환자가 아니었으면 너도 저기에 동조했겠지.”
심드렁한 내 말에 천세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내 앞의 빈 머그잔에 오렌지주스를 다시 따르며 충고했다.
“네가 네 오빠한테 귀환자인 거 알았다고 먼저 말해. 안 그러면 내가 봤을 때 너희 오빠 평생 너한테 말 안 하고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살 테니까.”
“알아요……. 그러다가 죄책감에 못 이겨서 책임지겠다며 또 홀로 최전선으로 향하겠죠.”
천세연이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잠깐, 그런데 최전선에서 죽은 게 아니라 내가 천우현을 죽였다고 했잖아? 최전선에서 의견 차이로 인한 갈등이라도 있었나? 묘하게 어긋나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아무래도 기억을 직접 읽어 봐야지 명확히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네.
한쪽 손을 내밀자 주저하던 천세연이 내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맞닿은 손을 꽉 잡고 천세연 쪽으로 마력을 흘려보냈다.
『스킬 ‘메모리테이크(L)’를 실행합니다.』
시야가 어두컴컴해지더니 뚝뚝 끊긴 천세연의 기억이 필름처럼 내 눈앞에 촤르륵 펼쳐졌다. 1년도 채 되지 않는 2회 차의 짧은 기억을 휙휙 넘기자 곧 1회 차의 기억이 나왔다.
계속해서 뒤로 되감다가 내 얼굴을 발견하고 뒤로 넘기던 기억을 멈췄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부터 천천히 과거로 넘겼다.
그리고 마침내 찾던 장면을 찾았다. 카페 앞에서 음료를 내 옷에 엎지른 천세연의 모습이 필름에 박제되어 있었다.
2회 차 때와 똑같은, 나와 천세연의 첫 만남이었다.
그 기억을 시작점으로 메모리테이크를 재생했다.
곧 천세연의 1회 차 기억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 * *
퍽!
천세연은 바닥에 주저앉아 저와 부딪힌 이를 반사적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여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닿는 차가움과 축축함에 천세연은 퍼득 정신을 차렸다.
여자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제 손에 들려 있는 프라푸치노의 휘핑크림과 음료로 범벅된 후드티가 눈에 들어왔다.
“헉, 죄송합니다! 어떡해……. 제가 세탁비 꼭 물어 드릴 테니까 계좌번호 주시겠어요? 진짜 죄송해요…….”
벌떡 일어나 연신 고개를 숙이며 천세연은 몇 번이고 사과를 건넸다.
들고 있던 프라푸치노까지 내던지고 혹여 물티슈나 휴지라도 있나 싶어 주머니와 가방을 황급히 뒤적거리자 여자가 프라푸치노 컵을 주워 건네며 말했다.
“괜찮아요, 뛰다가 부딪힐 수도 있죠. 그쪽은 세게 넘어지던데 괜찮아요? 세탁비는 안 받을 테니 얼른 가 봐요. 택시 놓치겠다.”
그러고는 여자는 정말로 세탁비를 받지 않고 쿨하게 친구들과 떠났다.
“진짜 세탁비 안 받게? 티슈로 안 닦일 거 같은데.”
“이채, 왜 이렇게 관대해졌어? 해탈했냐?”
“그냥 아는 사람이랑 좀 닮아서. 그리고 딱 봐도 어려 보이는데 세탁비 뜯어야겠냐?”
멀어지며 친구들과의 대화 소리가 점차 흐릿해졌다. 여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 계산을 마치고 카페에서 나온 천우현이 성큼 걸어오며 물었다.
“세연아, 택시 잡는다더니 여기서 뭐 해?”
반 정도가 사라지고 흙먼지가 달라붙은, 누가 봐도 땅바닥에 구른 꼴의 프라푸치노 테이크아웃 컵을 발견한 천우현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넘어졌어?”
“아니, 부딪혔어. 그런데 나랑 부딪힌 사람이 세탁비 괜찮다고 해 줬어.”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한 천세연은 제 오빠를 잡아끌었다. 천우현이 앞을 잘 보고 다니라는 애정 섞인 타박을 하며 주머니에서 물티슈를 꺼내 건넸다.
나도 꼭 아까 그 언니처럼 그런 멋진 사람이 되어야지. 천세연은 프라푸치노로 끈적해진 손을 닦으며 다짐했다. 가슴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 * *
“어?”
적벽 길드에서 받은 계약금으로 이사한 신축 아파트의 소파에 누워서 습관처럼 휴대폰으로 이슈를 보던 천세연은 익숙한 얼굴에 탄성을 내뱉었다.
세계 최초 직업군이라는 유일무이한 테이머로 각성한 사람.
“오빠, 오빠아! 이분이야! 나 전에 카페 앞에서 음료 옷에 엎었는데 세탁비 안 받은 사람!”
천우현에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 주자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천세연은 그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는 사람 닮았나 보지.
“이분은 연수 7월에 신청할까, 8월에 신청할까? 난 7월 신청했는데 기왕이면 같은 기수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두근거림을 안고 입소한 연수원에 그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 룸메이트!
이채현, 스물세 살. 한국대생. A급 테이머.
단편적인 자기소개를 들으며 천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빙 돌아 제 차례가 오자 천세연은 담담하게 자기소개했다.
“천세연입니다. 나이는 스물한 살, 등급은 B급, 직업은 치유계 프리스트입니다.”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세는 시늉을 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 이채현이 그를 바라보았다. 눈에 담긴 반가운 감정에 천세연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언니, 혹시 저 기억해요?”
“당연하지. 음……. 프라푸치노!”
음료를 엎은 게 좋은 만남은 아니었는데도 한 번 마주했던 사람이라고 반겨 주는 게 감동이었다.
룸메이트라는 특성상 천세연은 이채현과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동갑인 김나연과는 거의 학창 시절 절친급으로 친해졌고 가장 연장자인 진솔은 동생들을 잘 챙기는 부류였다.
‘좋은 사람들이랑 룸메이트 걸려서 다행이다.’
천세연은 안도하며 제 오빠에게 룸메이트들(특히 이채현)의 칭찬이 꾹꾹 눌러 담긴 문자를 보냈다.
연수원 생활은 할 만했다. 매점 문이 닫히기 전까지.
이채현이 캐리어에 바리바리 가져온 컵라면과 컵밥을 나눠 먹으며 버텼지만 그것도 곧 떨어졌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연수원의 그 끔찍한 급식을 먹어야 했다.
“영양실조 걸릴 것 같아.”
김나연이 울상을 지으며 푸석한 밥을 젓가락으로 푹푹 쑤셨다. 그 말에 진솔과 이채현은 대꾸할 힘도 없다는 듯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오빠한테 컵라면이랑 컵밥 좀 사 오라고 할까요? 연수원 기록이 누락됐다고 뻥 치라고 하고…….”
“헐, 너희 오빠도 헌터야? 성씨 똑같은데 혹시 오빠분이 랭킹 1위 천우현은 아니지?”
“천우현 맞아.”
묘하게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목소리에 묻어 나왔는지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이채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언니, 남친 있어요? 없으면 저희 오빠 소개해 드릴까요? 제가 친오빠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저희 오빠 되게 괜찮은 사람이거든요.”
“그럼 고맙지.”
키득거리며 대꾸하는 이채현의 모습에 천세연은 기꺼이 오빠를 팔기로 마음먹었다. 왠지 이 언니라면 믿고 오빠를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 - 지금 로비로 나왔어] 오후 4:30
그래서 먹을 것을 사다 달라는 핑계로 오빠를 연수원까지 불러냈다.
“오빠, 여기는 내가 자주 말했던 채현 언니! 그리고 언니, 여기는 우리 오빠예요. 천우현.”
잘됐으면 좋겠다. 서로를 마주 보며 어색하게 서 있는 둘만 남겨 두고 천세연은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에 돌아갔다.
* * *
“저기요, 조교님. 큰일 났어요.”
치킨을 시켜 먹기 위한 연수생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불러낸, 이름하여 반반무마니 모임. 그곳에서 한 몸 희생해 어그로를 맡은 이채현의 연기 실력은…….
“제가 몬스터를 불러냈다가 놓쳤는데…….”
‘음, 언니는 연기를 못 하는구나.’
가히 처참했다.
“진짜입니까? 그런 것치고는 너무 침착한 것 같은데.”
“CCTV 확인해 보시면 알겠죠. 제가 원래 좀 침착해서.”
“장난 안 먹히니 나가십시오.”
“아, 진짜라니까요! 몬스터에게 몇 명 잡아 먹혀야 믿을 거냐고!”
그렇게 처참한 연기 실력 때문에 들킬 위기를 겨우 넘겼지만,
“기숙사 불시 점검입니다! 치킨 냄새 뭡니까? 저기 담요 들춰 보세요.”
뒤처리를 완벽하게 못 해서 들켰다. 그래도 일단은 치킨을 먹고 들켰으니 덜 억울하긴 했다.
그리고 치킨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뒤, 현장 실습에 들어갔다.
처음으로 들어가는 E급 게이트.
E급 게이트는 안전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응원 메시지를 보내오는 오빠와 옆에서 어깨를 토닥여 주는 이채현 덕분에 긴장이 풀린 천세연을 반긴 건 조교의 탈주, 그리고 어느 쪽이 보스룸으로 향하는지 모를 두 개의 게이트였다.
선택해서 들어간 게이트는 보스룸이 아닌 B급 던전으로 향하는 게이트라는 게 그들에게 닥친 비극이었다.
헌터 라이선스도 아직 나오지 않은 초짜 헌터들이 B급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달려드는 페어리를 정신없이 처치하고 있던 천세연의 눈에 팔짱 끼고 가만히 서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이채현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뒤를 노리고 날아드는 무시무시한 페어리도.
“언니!”
비명처럼 외치자마자 허공을 찢고 나온 검은 기운이 페어리의 목을 감아 비틀었다. 속이 메슥거리고 헛구역질이 절로 나오더니 공포감이 머리를 지배했다.
저를 돌아보는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왜인지 모를 두려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픽, 픽, 진솔과 김나연이 쓰러졌다.
그 공포의 근원이 가까이 다가옴에도 천세연은 꼼짝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기만 했다.
“잠시 자고 있어. 눈 뜨면 이곳은 기억 못 할 거야.”
천세연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린 이채현이 속삭였다.
그리고 눈을 뜨자,
“와, 보스룸! 그래도 저희, 조교 없이 무사히 여기까지 왔네요.”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로 룸메이트들과 함께 보스룸 앞에 서 있었다.
* * *
연수를 끝마치고 본격적인 헌터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적벽 길드에서 갑질당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해야겠지.
“니가 랭킹 1위이기 전에 여기서 넌 신입이야, 새끼야. 처신 똑바로 해라. 지켜본다.”
적벽 길드는 친목질과 위계질서가 심했고 그들은 새로 굴러온 돌인 천우현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아마 그들의 자리와 파벌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겠지.
적벽 길드 헌터 놈들은 끊임없이 그들 남매를 괴롭혔다.
게이트 순찰을 일부러 야간 시간대만 잡아 맡기는 건 물론이요, B급 게이트 공략을 달랑 인원 다섯만 딸려 주질 않나, 던전 하나 채굴을 다른 인원 없이 오직 천우현에게만 시키질 않나.
오빠가 검사니까 적벽 길드에 들어가자고 한 과거의 제 뺨을 후려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던 중, 바깥에서 오랜만에 만난 19기 룸메들은 변한 게 없었기에 그의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였다.
“적벽 길드 괜히 들어갔어요. 계약 기간 동안은 꼼짝없이 묶여 있어야 하는데 2년 동안 어떻게 그런 끔찍한 길드에서 버티라는 건지.”
“내가 그 길드 얼마나 꼴통인지 전에 듣긴 했는데 하필 너희 남매가 계약 완료하고 들어서…….”
적벽 길드 뒷담과 서로의 근황을 늘어놓으며 그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런 건 절대 말 안 해 주는 천우현 대신 이채현을 슬쩍 떠보니 서로 꾸준히 연락하고 지낸다는 사실을 털 수 있었다.
‘둘 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소리네? 그러면 내가 또 사랑의 큐피드가 되어 줘야지!’
둘이 더욱 가까워지게 할 100가지 방법을 떠올리며 천세연은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다.
그리고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편히 쉬고 있던 천세연의 귀에 들려온 건 익숙한 역 이름과 그곳에서 터진 게이트 소식이었다.
- 오늘 오후 5시 20분경, 서울 신도림역을 지나 대림역으로 가던 열차가 철로에 터진 게이트에 휩쓸렸습니다.
‘채현 언니 2호선 타고 가지 않았나? 분명 대림역에서 환승해야 한다고 했는데.’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것까지 보고 택시를 잡아탔던 터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 열차에 탄 탑승객 1,520명 중 사망자는 214명, 부상자는 총 497명으로 역대 게이트 중 최다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현장에 있던 헌터는 총 29명으로 그중 일곱 명이 게이트 안에서 사망하고 열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기자의 말을 들으며 황급히 문자를 보냈지만 사람 속도 모르고 답장은 뒤늦게 도착했다.
[언니, 괜찮아요?] 오후 9:21
[채현 언니 - 응? 뭐가?] 오후 10:57
[지하철역에 게이트 터졌잖아요 다친 데는 없죠?] 오후 10:58
[채현 언니 - 아 게이트 터졌어? 내가 운 좋게 안 휘말린 모양이네] 오후 11:00
오빠에게 택시 탔으니 치킨 시켜 놓으라고 보냈던 문자의 시간을 확인했다. 분명 같이 헤어졌으니 이채현이 지하철을 탔다면 반드시 휘말렸을 시간이었다.
‘집까지 어떻게 간 거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 * *
천세연은 자신의 새언니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마음에 드는 언니를 굳이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지하철 놓쳤나 보지.’
그래서 그냥 적절한 핑계로 스스로의 의심을 짓눌렀다.
‘그런데 지하철 놓쳤으면 연착되었을 텐데 게이트 터진 걸 모를 리가 있나?’
자꾸만 불쑥불쑥 치솟는 의문점을 꾹꾹 밀어 넣으며 천세연은 천우현과 이채현을 붙여 놓기 위해 자주 만남의 장을 가졌다.
그의 뜻대로 천우현과 이채현은 점점 가까워졌고 누가 봐도 썸 타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적벽 길드의 괴롭힘 때문에 힘들어하던 천우현은 이전보다 자주 편안한 미소를 지었고 적벽 길드의 갑질 역시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언제나 행복과 불행은 짝을 지어 찾아오고는 했다.
- 오늘 오전 5시 30분, 서울 노원구의 C급 게이트에서 헌터 아홉 명이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최초 발견자인 김모 씨의 말에 따르면…….
김나연이 죽었다.
그리고 이채현의 친구가 네크로맨서의 습격으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졌다.
“나 때문이야. 내가 그때 죽이지 않고 보내 줘서… 그때 죽여 버렸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내가 왜 그랬지……?”
이채현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 상태로도 눈이 벌게진 채로 그 범죄자 네크로맨서를 찾기 위해 온 서울을 뒤지고 다녔다.
그는 자신을 미끼로 쓰는 것에도 거리낌 없었다. 가끔 옆에서 지켜보는 천세연조차 오싹함을 느낄 정도로.
그리고 천우현이 범죄를 저지르고 다녔던 그 네크로맨서를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정당방위로 풀려났지만 그를 향한 눈초리는 따가웠다.
천우현은 사람들이 뒤에서 살인자라고 쑥덕이는 걸 담담히 감내했다.
적벽 길드가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해 온 것도 이쯤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협회장이 손을 내밀었다.
“개인적으로 천우현 헌터가 탐나기도 했고, 무시 못 할 분이 부탁을 하셨거든요.”
왜 평판도 엉망이고 적벽 길드에서 내쳐진 지금 우리를 스카우트했냐는 천세연의 경계 어린 질문에 언제나 의뭉스럽게 웃는 협회장이 한 대답이었다.
협회에 넣어 달라고 부탁한 그 ‘무시 못 할 분’이 누구인지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다.
* * *
“오빠! 제발 병원 가자, 응?”
천세연의 웬만한 부탁은 거의 들어주던 천우현은 처음으로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그게 천우현의 목숨이 달린 부탁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40도 가까이 치달은 열에 실신하여 구급차로 이송되는 천우현의 옆에서 오빠의 뜨거운 손을 꽉 잡으며 천세연은 흐느꼈다.
다행히 열은 금방 내렸다.
하지만 퇴원하고 일주일 후, 천우현은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다시 병원에 실려 갔다. 누가 봐도 자살 시도였다.
“채현 언니, 오빠 좀, 우리 오빠 좀 말려 줘요…….”
“그래, 걱정하지 말고 세연이 너도 좀 쉬어. 얼굴이 말이 아니네.”
막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친구의 병문안을 온 이채현은 천세연의 통곡에 한숨을 쉬며 그를 다독이고는 천우현의 병실로 향했다.
병실 안에 둘만을 남기고 천세연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대로 병원 벽에 스르륵 기대어 쭈그려 앉았다. 지독한 무력감이 그를 덮쳐 왔다.
다시 병실 문이 열린 후, 천우현은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대신 천우현의 고민이 그대로 옮겨 가기라도 한 듯이 이채현이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가 싶었더니 이번에는 귀환자 이슈가 터졌다.
처음에는 고3 귀환자였다. 고등학교에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는데 그 학교 학생인 귀환자를 찾기 위해 몬스터가 넘어왔다는 소문이 퍼져 그 고3 학생은 전 국민적으로 욕을 얻어먹었다.
그걸 시작으로 귀환자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와, 귀환자 제법 많네. 혹시 내 주변에도 있는 거 아니야?”라고 하자마자,
- 어, 나 귀환자야.
이채현이 관종 너튜버 헌터로 유명한 BJ 민의 생방송에서 시원하게 자신의 정체를 공개했다.
천세연은 귀환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지닌 사람이었기에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언니가 귀환자인 걸 밝히자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세연이 너는 귀환자를 어떻게 생각해?”
“으음, 만약 진짜 그 사람들 때문에 게이트 사태 터지고 던브 터진 거면 좀 싫을 거 같은데. 다들 다시 그 차원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채현 언니 빼고.”
그래도 하루아침에 사람이 미워질 수는 없던 터라.
그 대답에 천우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천세연은 이채현 때문에 그런 거겠거니, 하며 넘겼다.
아니, 연이어 터지는 문제들에 오빠의 그 표정의 의미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는 게 정확하겠지.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고 몬스터 웨이브가 터진다는 뜻은 타 차원으로부터 지구를 향한 침략이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구를 노리는 모든 차원이 한꺼번에 지구를 공격한다면?
그러한 전문가들의 염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수많은 게이트가 생겼다. 상공에, 바다에, 육지에.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는 언제라도 침략자들을 쏟아 낼 준비를 끝마치고 있었다.
그렇게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자마자 세상은 혼돈에 빠지고 원망의 화살은 모두 귀환자들을 향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몬스터 웨이브가 터졌다. 지금까지의 던전 브레이크와 몬스터 웨이브는 어린애 소꿉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어마 무시한 규모였다.
육해상공은 몬스터로 황폐화되었고 민간인들은 안전지대에서 숨죽이고 살아야 했으며 군인과 헌터들은 모두 몬스터와의 전쟁에 동원되었다.
귀환자들은 자발적으로, 혹은 반강제로 떠밀려 최전선에 섰다.
‘내일 채현 언니도 최전선으로 간다고 했지.’
강제인지 자발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채현 언니는 강하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천세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미쳤어요, 천우현 씨?”
‘설마, 둘이 싸우나?’
안전지대의 얇은 문 너머로 들려오는 이채현의 큰 소리에 천세연은 귀를 기울였다.
“네크로맨서 살인 사건도 나 대신 뒤집어썼으면서 이제 최전선까지 나 대신 간다고요?”
“제가 왜 이러는지 채현 씨도 알지 않습니까.”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오빠가 아니라 채현 언니가 죽인 거였어? 그런데 오빠가 뒤집어쓴 거고?”
들어 버린 진실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이채현이 원망스러웠다.
우리 오빠가, 내가 그 일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우리를 위로할 수가 있어?
이채현을 원망 섞인 눈초리로 노려본 천세연은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뒤에서 천우현이 제 이름을 부르며 쫓아왔지만 손을 뿌리치고는 계속 걸었다.
“오빠랑 마지막 인사도 안 할 거야?”
“마지막 인사라고 하지 마! 왜 오빠가 최전선으로 가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발악하듯 소리 지르자 천우현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책임져야지.”
“책임져? 뭘 책임져? 채현 언니 잘못을 왜 오빠가 책임지는데!”
“그게 아니야. 오로지 내 잘못이야, 세연아. 채현 씨가 보호해 줄 거니까 말 잘 듣고, 알았지?”
그게 기억 속 살아 있는 천우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혹여 모를 불안감에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천우현의 방으로 향한 천세연은 이부자리가 정갈하게 정돈된 텅 빈 방과 마주했다.
공황에 빠진 천세연은 이채현의 방으로도 가 보았지만 그 방에서 마주한 이채현의 친구는 그가 새벽에 사라졌다는 말만 전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빠른 속도로 최전선에 도착한 천세연의 눈에 비친 풍경은,
“이게, 이게 무슨……?”
자는 듯 눈을 감고 있는 천우현과 그 발치에 선 이채현이었다.
가까이 다가가기조차 힘들 정도로 마기는 짙게 퍼져 공기를 새카맣게 물들였고, 이채현의 뒤에 있는 몬스터들은 복종하듯 납작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게이트에서 나오던 몬스터들이 주춤거리며 다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 짓이에요?”
“그래, 내가 이 모든 일의 원인이자 원흉이야.”
자조하며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이채현이 대답했다. 힘없이 주저앉은 그는 싸늘하게 식은 천우현의 시체를 끌어안았다.
“너무 늦게 왔어……. 내가 5분만, 5분만 일찍 왔어도…….”
그 한탄 섞인 중얼거림에 천세연은 이채현이 천우현을 죽인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세계는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구나, 내가 있는 한은.”
허탈하게 웃으며 읊조린 이채현이 천세연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 그러니 이걸 꼭 기억해.
* * *
그 언령이 전달되자마자 갑자기 세상이 뒤집히더니 시점이 전환되었다. 바로 이채현, 그러니까 나의 시점으로.
메모리테이크를 예상하고 천세연의 기억 속에 1회 차의 내 기억을 숨겨 놓은 것이다.
대체 그 정신없는 순간에도 어디까지 생각해 놓은 건지. 인셉션 쩌네. 1회 차의 나 자신에게 감탄했다.
* * *
내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지옥도를 무심한 눈으로 둘러보다가 눈을 감았다.
피로 젖어 본래의 색깔조차 찾아볼 수 없는 땅, 낙뢰가 번뜩이는 어두운 하늘, 박살 난 건물들의 잔해,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괴수와 사람들의 시체.
그래, 이곳은 살아 있는 지옥이었다.
감히 이곳으로 넘어온 부하 놈들과 마수들이 내 눈치를 보며 바싹 엎드렸다.
하지만 그래 봤자 다른 차원의 것들은 여전히 활개 치며 지상을 돌아다녔고 마계의 잔당들은 나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으리라.
내 품 안에 안겨 있는 천우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온기 하나 없이 싸늘히 식은 몸은 미동조차 없었다.
나를 두고서는 먼저 떠나 버린 천우현이 원망스러웠고, 죽음의 원인이 나라는 사실이 끔찍하기 그지없었으며, 더 이상 이 사람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미친 듯이 비참했다.
“그러게 가지 말라니까…….”
허탈한 웃음이 폐허에 울려 퍼졌다. 한참을 이어지던 웃음의 끝은 흐느낌으로 변했다. 눈물이 흘러내려 내가 끌어안고 있는 이의 얼굴에 툭툭 떨어졌다.
다음 생이 있다면 절대 나랑 엮이지 마. 그냥 동생이랑 행복하게 살아, 꼭. 내 마지막 소원이야. 하염없이 차게 식은 볼을 쓰다듬으며 결코 닿을 일이 없는 말을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는 숙였던 허리를 곧게 세웠다.
다시 천세연과 눈을 마주했다.
“나는 세상의 시간을 돌릴 거야. 세연이 네가 1회 차 기억의 전승자가 되어 줘. 너라면 충분히 이 비극을 막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