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 힘숨찐물은 힘을 들킬 때가 제일 재미있는 법 (26/33)

26. 힘숨찐물은 힘을 들킬 때가 제일 재미있는 법

- 일본의 공식 1호 귀환자인 사와다 류가 저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가 사망 전 남긴 유서에는 ‘이곳에 나로 인해 게이트 사태가 일어날 걸 인지하고도 돌아왔다. 죄책감에 숨을 쉴 수가 없다.’라고 적혀 있어 일각에서는 이 유서가 귀환자들이 게이트 사태의 원인임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라 보고…….

- 일주일간 총 여섯 명의 귀환자가 레벨레이션의 습격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레벨레이션의 이러한 행보를 도 넘은 행위라 비판하는 의견과 귀환자들을 향한 단죄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

- DMO 사무국장이자 최초 귀환자인 사무엘 르웬이 ‘귀환자들에게 가해지는 테러를 멈춰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레벨레이션을 종교 집단이 아닌 테러 집단으로 명명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 밝혀…….

“망했네.”

뉴스를 돌려도 돌려도 나오는 귀환자 이슈에 허탈하게 실소하며 중얼거렸다.

귀환자들이 게이트 사태의 원인이라는 건 이제 기정사실화였고, 던전 브레이크의 원인이라는 소문 역시 공공연히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사실이기에 할 말이 없었다. 던브 사태를 벌인 진세빈이 귀환자였으니까.

레벨레이션은 이제 거리낄 것 없이 이 땅에서 귀환자를 추방해야 한다고 날뛰었다. 그 광기로 진세빈이나 죽이지, 쯧쯧.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원망하고 짓밟고 미움을 쏟아 낼 대상을 찾는다. 이번에는 그 타깃이 귀환자였을 뿐이다.

지금은 귀환자들이 온전한 피해자의 위치였기에 동정 여론이라도 나오는 거지, 한국에서 일어났던 레벨레이션 참사처럼 귀환자들이 반격하는 순간 그나마 있던 동정 여론마저 싹 사라질 것이다.

아무튼 이제 우리는 필사적으로 우리가 귀환자임을 숨겨야 했다.

〉Local Channel-ROK

〉귀환자 단체 채팅방

〉〉공지 사항: 이름은 차원 이동한 곳에서의 직업, 혹은 세계관으로 부탁드립니다

무림맹주: 하… 돌아가고 싶다

무림맹주: 안녕히 계십시오, 여러분

무림맹주: 저는 이 세상의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지고

천마: 죽으려고요?

천마: 기왕 죽을 거 깔끔하게 생사결 한판?

무림맹주: 아무도 저를 모르는 섬이나 시골로

무림맹주: 내가 죽기 전에 네놈은 꼭 죽이고 가겠다 빌어먹을 천마 놈아

무림맹주 윤선아 씨는 신상이 털렸다. 레벨레이션에 몸담은 관리국 요원 하나가 그의 신상을 인터넷에 올렸기 때문이다. 이래서 무식한 놈이 신념을 가지면 위험하다니까.

드래곤슬레이어: 수능 볼 때 던전 브레이크 터지면 어케요?

드래곤슬레이어: 그리고 수능 전날 몬스터 웨이브 터지면 수능 미뤄져여?

꽃집주인: 게이트 사태 터지기 전에 수능 봐서 모르겠네요

성녀: 나 현역 때 수능 전날에 지진 나서 일주일 미뤄짐

성녀: 몬웨도 어떻게 보면 자연재해니까 미뤄질 듯

수능이 3주일이 남은 시기에 한반도에 S급 게이트가 세 개가 생긴 바람에 헌터계는 비상이었다. 그중 하나가 강남 8학군 고등학교 근처에 생겨서 더더욱.

어떻게든 게이트를 닫으라는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아우성과 민원에 협회든, 관리국이든 거의 업무 마비 수준이라고 했다.

‘S급 게이트라면…….’

마계 게이트거나, 아니면 마계에 준하는 수준의 차원 게이트거나.

내일 시험 끝나니까 새벽에 슬쩍 가서 닫고 오면 되겠지. 속 편하게 생각하며 내일 시험 볼 과목 서적을 펼쳤다.

다음 날 무슨 난리가 생길지 모른 채로.

* * *

“수능까지 3주일 남았다. 다들 정신 차리고 똑바로 공부해라. 게이트가 터져도, 던전 브레이크가 터져도 대학은 가야지.”

자습 시간, 담임의 당부를 들으며 드래곤슬레이어 이시우는 손에 들린 샤프를 빙그르르 돌렸다.

고1 때 떨어졌다가 돌아왔으니 벌써 그 세계에 다녀온 지 2년이나 지난 셈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던 지식들은 낯선 세계에서는 모두 쓸모없었다. 그것이 모범생이었던 그가 공부에 회의적이 된 이유였다.

담임이 나가자마자 옆 분단에서 쑥덕거림이 들려왔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양아치 놈들이었다.

“한국대는 맨날 게이트 열리고 박살 나니까 안 갈란다.”

“니 성적으로 한국대 못 가잖아. 왜 안 가는 척이야, 새꺄. 야, 뭘 쪼개?”

저를 향한 윽박에 이시우는 다시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귀환자 여론만 좋았어도 저런 놈들은 제 앞에서 꼼짝 못 했을 텐데.

귀환자라고 밝힐 일이 요원해진 이상 최대의 사이다는 저놈들보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밖에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국어 비문학 지문을 읽어 내리던 이시우의 귀에 시끌벅적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들린 건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던 듯 하나둘 투덜거림을 내뱉었다.

“아이씨, 옆 반 새끼들 왜 저렇게 시끄럽냐?”

“뭐라는 거지? 운동장 쪽 창문 보라는데?”

“야, 저거 뭐야? 뭔데?”

순식간에 교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이시우 역시 샤프를 내려놓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운동장 한복판에 생긴 시커먼 게이트. 그리고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 웨이브다!”

옆에 붙어 있는 여고 학생들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대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쨍그랑―!

유리창이 박살 나며 와이번 한 마리가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쏟아지는 유리 조각에 맞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피해! 빨리 교실 문 열어!”

파충류 특유의 좁은 동공이 가늘어지며 누군가를 찾는 듯 머리를 두리번거렸다. 그 틈을 타 열린 교실 문으로 3반 학생들이 우르르 나갔다. 이시우 역시 그 틈에 끼어 대피했다.

와이번이 복도까지 나오지 못하게 앞문과 뒷문을 쾅, 닫고 급하게 두 문을 걸어 잠근 후, 반장이 물었다.

“휴대폰 안 낸 사람?”

“아, X발. 가방 안에 있는데.”

“교무실 가서 휴대폰 받아 오자. 쌤들이 신고했겠지?”

다른 반 학생들 역시 공격해 오는 와이번을 피해 복도로 대피해 있었다. 콰앙! 묵직한 충돌에 문이 굉음과 함께 미친 듯이 진동했다.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문에서 후다닥 떨어졌다. 몇몇 학생들은 복도에 굴러다니던 대걸레라도 무기로 쥐고 있었다.

휴대폰 가방을 받으러 친구 두어 명과 교무실로 갔었던 반장이 선생들과 함께 돌아왔다. 와이번들이 교실 문 너머에서 끊임없이 부딪쳐 대는 동안 담임들은 인원을 확인하고 줄을 세웠다.

학년 부장이 대표로 학생들을 향해 지시했다.

“곧 헌터들 도착한다니까 일단 동요하지 말고 침착하게 계단 내려가서 후문으로 대피하자.”

그때, 중앙 계단으로 올라온 한 무리의 학생들이 복도를 가로질러 뛰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3학년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던 복도가 더욱 혼잡해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지금 밑층부터 몬스터들이 헤집고 다니고 있어요!”

새하얗게 질린 2학년 학생이 외쳤다.

몬스터들이 있으면 계단을 내려가는 건 불가능. 게다가 교실 문은 점점 덜컹거리는 강도가 커지고 있었다.

곧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3반의 교실 문이 그대로 넘어졌다. 어느새 수가 늘어난 와이번이 떨어진 교실 문을 통해 쏟아졌다.

“으아아악!”

“살려 주세요!”

비명과 외침이 복도에 울렸다. 담임들이 급하게 뒤쪽 계단으로 학생들을 대피시켰다. 이시우는 검을 소환할까 말까, 수십 번을 고민했지만 아직 사상자가 없었기에 선생님들의 지시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후문 쪽에도 몬스터가 드글거리는 건 마찬가지. 심지어 이곳은 뻥 뚫린 바깥이었기에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한결 자유로웠다.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지만…….

“미친, 문 잠겼어!”

“열어 줘! 열라고!”

몬스터가 더 들어오지 못하도록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상태. 설상가상으로 한 무리의 와이번이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시우는 결국 제 검을 손에 쥐었다. 그는 문 앞에 서 있는 학생들에게로 선두로 날아드는 와이번을 향해 검을 힘껏 휘둘렀다.

동강 난 와이번의 몸뚱이가 투두둑 땅에 떨어졌다. 나머지 와이번이 주춤했다. 검에 묻은 피를 털자 그의 뒤에 있던 학생들이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너 각성자였어?”

“야, 진작 말하지.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시비를 걸던 양아치 놈들이 친한 척 달라붙어 왔다. 역전된 상황에 절로 우쭐해졌다.

“헌터들은 언제 오지?”

“곧 오겠지.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

“야아, 우리 학교는 수능 시험장으로 못 쓰겠네.”

이시우가 남은 와이번을 처리하는 동안 압도적 강자를 앞에 둔 이들은 안도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가 뚝 끊긴 대화에 이시우는 의문을 가지며 뒤를 돌아보았다. 경악 어린 얼굴로 손가락질을 해 대는 이들에,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린 이시우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형체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는 제게로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드래곤이다.

제가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죽였던 에이션트급 블랙 드래곤.

신의 권위에 도전하다가 신에게 의뢰받은 한낱 인간의 손에 의해 추락한 그 드래곤이 좀비가 되어 그의 세계에, 이시우의 앞에 나타났다.

묵직한 몸뚱이가 허공에서 땅으로 내려앉자 일대의 땅이 잘게 진동했다.

- 찾…았다…….

침을 뚝뚝 흘리며 좀비 드래곤이 사념을 퍼트렸다. 그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선명히 들려왔다.

“몬스터가 말을 해……!”

좋아, 침착하자. 놈은 분명 제 손에 드래곤 하트가 박살 났다. 지금 놈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오직 사념과 원념, 그리고 드래곤 하트 조각으로 이뤄 낸 주술.

일격에 남은 드래곤 하트를 산산조각 내 놈을 소멸시켜야 한다. 검 자루를 고쳐 쥔 이시우의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탁한 눈으로 뚫어져라 이시우를 노려보던 좀비 드래곤이 다시 사념을 퍼트렸다.

- 내가 말했지… 않느냐, 이시우……. 네가 비록 네 세계…로 돌아가더라도 네놈을 찾아내어 갈기갈기 찢을… 거라고.

“이시우? 저 새끼 이름 아니냐?”

“쟤 귀환자야?”

“와, 지금 저 새끼 때문에 학교에 몬스터 웨이브 터진 거야?”

그를 향한 적대적인 시선이 이시우의 등에 꽂혀 왔다.

그 시선과 속삭임에 숨이 막혔다.

* * *

한선고등학교 귀환자 avi.

[핫이슈 클립] 이고깽을 이루고 돌아온 K-귀환자?!

수능 3주 남았는데 귀환자인 거 들킨 고3ㅋㅋ

[특종tv!] 귀환자가 게이트 사태의 원인이라는 증거(고3 귀환자)

“이게 무슨 난리야?”

시험 시간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켠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수북하게 쌓인 채팅방 알림은 둘째 치고, 인터넷에 미친 듯이 올라오는 영상에는 드래곤슬레이어의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페리가 게이트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와 별다를 바 없는 반응에 기분이 팍 나빠졌다. 제에발 초상권 침해 좀 하지 말라고.

- 쟤 귀환자야?

- 그런 듯? 방금 저 몬스터가 네 세계로 돌아가더라도 어쩌고 그러지 않았나?

선명한 음성이 영상을 타고 흘러나왔다. 영상 속 드래곤슬레이어는 불쌍할 정도로 손을 떨고 있었다.

타이밍 한번 더럽게 안 좋네. 하필 귀환자를 둘러싼 부정적인 시선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이런 일이…….

사이버 렉카 너튜버들은 한 건 문 것마냥 앞다투어 뇌피셜 영상들을 올려 댔고, 사람들은 또 거기에 선동되어 드래곤슬레이어와 귀환자들을 물어뜯었다.

[윤따] • 10시간 전

넌 양심 있으면 수능 보지 마라ㅋㅋ 수능장에서 시험 도중에 또 이런 일 생기면 책임질 거?

좋아요 5.5천 답글 2개

[killerK] • 7시간 전

살인자 새끼야 양심 있으면 사망자들 위로금 내주고 자퇴해라

좋아요 3천 답글 16개

[김현수] • 5시간 전

떨어졌던 세계로 다시 돌아가라고 추방시키자

[5885] • 5시간 전

내가 봤을 때 이 새끼처럼 입 싹 씻고 아닌 척하는 귀환자들 100% 더 있다

그 새끼들도 빨리 털어야 함

좋아요 2.2천 답글 7개

‘이거 수습 가능하긴 한가……?’

하필 던전 브레이크가 터진 곳이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고3까지 있는 고등학교에 사망자까지 발생한 터라 여론은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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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 단체 채팅방

〉〉공지 사항: 이름은 차원 이동한 곳에서의 직업, 혹은 세계관으로 부탁드립니다

드래곤슬레이어: 죄송합니다

드래곤슬레이어: 다 제 탓이에요

암살길드 수장: 왜님탓임

암살길드 수장: 다X같은좀비드래곤때문이지

꽃집주인: 며칠간 인터넷 보지 말고 학교도 가능하면 가지 마요

성녀: 수능 볼 수는 있나……? 수능장에서 날계란 맞는 거 아니야??

이단심문관: 고3 건드리는 건 선 넘었지

혁명군 수장: 부모님 반응은 어때요? 괜찮아요?

드래곤슬레이어: 네,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무림맹주: 웬만하면 밖에 나가지 마세요

무림맹주: 습격하는 미친놈들 많습니다

마탑주: 진짜 차원 넘어서 복수하려고 찾아오는 놈들이 있다니 개무섭네 ㄷㄷ

스팀펑크: 찾아오면 X되는데;; 착하게 살 걸 쩝;;

천마: 차원 통로 진작 닫아서 다행이네ㅋㅋㅋㅋㅋㅋ

백마왕: 지금 이 채팅방 유출되면 다 같이 X되는 거 아시죠? 다들 진짜 유출하지 맙시다

채팅방에서는 모두 강제로 신상이 까발려진 드래곤슬레이어를 위로하거나 각자의 과거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이미 7마계 놈들이 지구로 건너왔다는 걸 확인한 나로서는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시험 시간은 한 시간 후였고 일단 시험은 봐야 했기에 애써 관심을 끄며 필기 노트를 펼쳤다.

“아, 진짜 필기 내용 더럽게 눈에 안 들어오네.”

자꾸만 휴대폰으로 향하는 시선을 노트로 되돌리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어서 시험이 끝나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고 지시에 따라 답안지 사진을 e-class에 업로드한 후 다시 휴대폰을 켠 나는 쏟아지는 귀환자 오픈 채팅방 알림에 후회했다.

휴대폰 조금만 더 늦게 놓을걸. 그럼 이 개판을 어느 정도 중재했을 텐데.

소드마스터: 제가 귀환자라고 밝히려 합니다

소드마스터: 그러면 드래곤슬레이어 님에게 향하는 비난이 조금이나마 제게 분산되겠죠

스팀펑크: 님 미치심?

스팀펑크: 우리 다 마녀사냥으로 뒈지게 하려고 작정하셨음?

소드마스터: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애 저격해서 사형 청원까지 올라왔는데 어른 된 입장으로서 어떻게 보고만 있습니까?

드래곤 친구: 소드마스터 님 혹시 연예인이세요? 자의식 과잉인지 아님 ㄹㅇ 유명인이라서 시선 돌리기 ㅆㄱㄴ인 건지

용병왕: 저번에 보니까 네임드 랭커이시더군요

무림맹주: 가족 없으세요? 가족 있으면 가족분들까지 좀 힘들어지실 텐데

소드마스터: 없습니다 지인도 거의 없어서 제가 차원 이동당했던 기간 동안 실종 신고도 안 들어갔고요

농노1: 그러다가 여기 채팅방 존재까지 드러나면 어떡합니까?

소드마스터: 지금 여기 존재 드러나는 게 중요하냐고요

소드마스터: 당장 제일 어린 드래곤슬레이어 님 혼자 귀환자를 향한 증오를 감당해 내고 있는데 어른들이 입 다물고 애 방패막이로 쓰는 게 도리입니까?

스팀펑크: 도리고 나발이고 당장 내가 욕 처먹게 생겼는데 뭔 상관인데ㅋㅋ

천마: 혼자라뇨 같이 욕먹고 있는 무림맹주는 왜 빼시죠?

무림맹주: 끼어들지 마라 의와 협도 모르는 망할 천마 놈아

혁명군 수장: 아니 도리 운운하시기 전에 현실을 돌아보자 이 말이죠

백마왕: 맞아요 소드마스터 님은 가족 없으셔서 상관없으시겠지만 전 가족들도 있다고요

혁명군 수장: 백마왕 님, 패드립은 자제 좀,,,

제가 귀환자임을 밝히겠다는 소드마스터(특: 러스터 길드 소속 A급 네임드 하이 랭커)와 귀환자들의 정체가 점점 드러나며 유출될 오픈 채팅방 속 정보를 걱정하는 다른 귀환자들로 갈등이 생겨 있었다.

그리고 그 말다툼은 드래곤슬레이어의 등장으로 멈췄다.

드래곤슬레이어: 싸우지 마세요 그냥 제가 감당할게요

드래곤슬레이어: 다들 아시잖아요 여기 나이로나 미성년자지 그 세계에서 구른 세월까지 치면 저 성인이에요

드래곤슬레이어: 저 정말 괜찮아요

평소처럼 가벼운 말투로 던지던 채팅이 아닌 덤덤한 문장.

드래곤슬레이어의 그 한마디가 묵직하게 내려앉아 목이 콱 멘 건 나뿐만이 아니니라.

그걸 증명하듯 40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드래곤슬레이어의 채팅 이후로 올라오는 채팅은 없었다.

성인이 낯선 세계로 떨어진 것과 미성년자가 부모의 보호도 없고 제게 친절하지도 않은 낯선 세계로 뚝 떨어진 건 무게가 달랐다.

그렇게 이르게 보호가 거둬진 세계에서 구르며 다시 제 나이에 맞는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세계로 돌아왔음에도 이 세계는, 그리고 같은 경험을 했던 어른들은 그를 외면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있는데도 저는 괜찮다며 오히려 이기적인 어른들을 달래는 드래곤슬레이어의 모습에 잠시 ‘와, 채팅방 유출돼서 털리면 어쩌지?’라는 고민을 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무어라 답해 줘야 할까 고심하며 문장을 고르던 중 다시 채팅방이 리젠되었다. 링크 하나를 시작으로 채팅들이 빠르게 올라왔다.

마탑주: 아니 ㅅㅂ 이거 뭐야

마탑주: https://www.yxxtube.com/watch?v=adlfkjk

백마왕: 마탄의저격수 님??? 지금 뭐 하신???

성녀: 와씨 진짜 노빠꾸

혁명군 수장: 소드마스터 님 선수 뺏기셨네요ㅋㅋㅋ

용병왕: 와 진짜 존경합니다

스팀펑크: 다들 돌았나 ㅅㅂ 이 채팅방 괜히 들어왔네

링크로 들어가니 헌터 레이드 영상만 전문적으로 올리는 너튜버의 이름이 보였다.

[New 귀환자 등장★]

10분 전에 올라왔음에도 미친 조회수와 댓글을 기록하는 영상을 곧바로 재생했다.

헌터들이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에 힘겹게 맞서는 도중 갑자기 끼어들어 소환한 라이플로 몬스터를 원 샷, 원 킬 하는 한 여성.

모자이크되어 있었지만 익숙함이 블러 처리를 뚫고 느껴졌다.

- 저, 저기, 누구세요? 혹시 거너 맞으세요? 이런 전투력이 거너에서 나올 리가 없는데? 총 무슨 아이템인지라도 말씀 좀……!

- 타 차원 무기입니다. 제가 귀환자라서요.

영상은 라이플을 흔들며 대답하고는 뒤돌아 갈 길 가는 마탄의저격수의 등을 클로즈업하며 끝났다.

마탄의저격수: 마침 근처에 던전 브레이크 터진 곳이 있었고

마탄의저격수: 너튜버들이 방송하는 것도 보이고 해서 그냥 밝혔습니다

마탄의저격수: 너무 마음고생하지 말고 수능 잘 봐요 드래곤슬레이어 님

채팅방의 그 누구도 마탄의저격수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행동으로 보여 준 용기와 연대에 감탄할 뿐.

드래곤슬레이어: 감사합니다

담담한 감사 인사를 끝으로 채팅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새로운 귀환자의 등장으로 시끌벅적해진 세상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대단하네, 나는 절대 못 밝히겠는데.”

휴대폰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편히 기대며 중얼거렸다. 지방에 있는 부모님을 생각한다면 차마 밝힐 수 없었다. 내가 이 모든 사태의 진짜 원인이기에 더더욱.

아마 천우현 역시 여동생 때문에라도 쉽게 나서지 못할 것이다. 그는 랭킹 1위로 이름과 얼굴이 너무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우리를 박해한다고 해서 무작정 세상 사람들을 욕하면서 다 부수어 버린다고 설칠 수도 없었다.

만약 내가 귀환자도, 헌터도 아닌 그냥 일반인이었다면 나 또한 귀환자들을 향해 너희 때문에 죽을 맛이라고 욕을 쏟아 냈을 거란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니까.

평범했던 시절, 세계가 평화롭게 돌아가던 시절의 나 역시도 오직 인터넷과 소문만으로 남을 판단했던 적이 있었기에.

비극은 그저 누구 한쪽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다.

“졸업 때까지만이라도 무사히 지나갔으면 하는데…….”

중간고사는 끝났지만 기말고사와 졸업논문은 남아 있었다.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던 졸업논문 파일을 열어 작성해 나가다가 손을 멈칫했다.

『직감이 발동됩니다.』

“…웃기지 마.”

내 직감은 이 졸업논문을 완성해 봤자 쓸모가 없을 거라 말하고 있었다. 그에 반발하듯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려 분량을 빠르게 채워 갔다.

나는 반드시 다시 돌아온 이 세상에 끝까지 남아 있을 거다. 그토록 내가 돌아오길 원했던 이 세상에.

* * *

다음 날, 또다시 귀환자의 이야기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엥? 에엥? 이게 무슨 일인데?”

인터넷에 마구 올라오는 동영상을 보고 당황하여 혼잣말 같은 물음을 던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한국에 정체가 공개된 단체 채팅방 출신 네 번째 귀환자는 소드마스터 님이 아니라 매우 의외의 인물이었다.

또 이슈로 떠오른 동영상은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인 무리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단단한 거인 무리들의 목은 덩치에 비해 가늘었기에 헌터들은 연신 거인의 목을 노렸지만 거인은 목이 잘려도 다시 새로운 머리를 생성하며 헌터들을 짓밟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목은 약점에서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페이크.

헌터들이 점점 밀리고 거인들이 모여 보호받고 있던 일반인에게까지 손을 뻗으려 하던 그때.

- 저거 호문쿨루스라고! 저거 목 따도 다시 재생되니까 가슴 정중앙 동력장치 노리라고!

- 그걸 그쪽이 어떻게 알아요? 입으로만 떠들어 대는 그쪽 뭘 믿고―

- 내가 저거 만들었다, X발! 됐냐?

일반인 무리에서 중년 여성을 부축하고 있던 한 남자가 소리쳤다.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를 만들었다는 말의 뜻이 무엇이겠는가. 거인은 그 사람의 말대로 가슴 정중앙이 뚫리자마자 모래로 변하여 흘러내렸다.

- 씨, 씨X! 여기가 어디라고 와, 개X끼야!

영상은 호문쿨루스의 약점을 말해 준 사람이 게이트 밖으로 나온, 개조된 기계 인간을 보며 발악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비추고는 끝났다.

이쯤 되면 예상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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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펑크: 하 ㅅㅂ… 그렇게 됐음

스팀펑크: 하필 어머니랑 같이 있어서 끼어들 수밖에 없었음

스팀펑크: 병원에서 울 엄마 한 번만 더 쓰러져도 위험하다고 했단 말임

드래곤 친구: 와 효자시네 의외다

소드마스터: 아무도 스팀펑크 님 탓 안 합니다

스팀펑크: 아니 그냥 다들 미안하다고요

스팀펑크: 내가 어제 너무 예민했음

스팀펑크: 그래서 소드마스터 님은 언제 밝히실 예정?

소드마스터: 인수인계해야 해서 며칠 걸릴 것 같은데요

한국 네 번째 귀환자는 바로 스팀펑크였다.

제일 예민하고 띠껍게 굴며 단체 채팅방을 갑분싸로 만들었던 스팀펑크는 막상 제 일이 되니 순순히 사과했다.

자기 발등에 불똥 떨어져서 굽히는 것 같긴 하지만, 뭐… 이 일로 다른 반대파 귀환자들도 이게 남의 일이 아니라 언제든지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걸 깨달았을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담합을 해야지. 싸우는 게 아니라. 이게 심해지면 ‘귀환자 vs 나머지’의 대결 구도로 갈 수 있는 게 문제지만.

스팀펑크: 그런데 내가 귀환했던 게이트 빨리 닫아야겠는데,,

스팀펑크: 저쪽에서 계속 내가 만든 호문쿨루스 보낼 확률이 99%라;;

스팀펑크가 잠수 타지 않고 용기 내어 사과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게이트와의 연결은 나밖에 끊을 수 없었고 나를 비롯한 단체 채팅방의 귀환자들과 틀어지면 자기만 손해니까.

마왕: 깽판 치고 귀환해서 불안하신 분들 말씀해 주세요

마왕: 그쪽부터 우선으로 닫겠습니다

백마왕: 괜히 모였다가 의심받으면 어떡함요?

마왕: 모이는 건 수상해 보이니까 저+당사자 이렇게 두 명이서 닫을 예정입니다

당분간 바빠지겠지만 이 사태의 (반쯤)원인으로서 할 도리는 해야겠지? 나는 정체를 밝힐 생각이 없었으니 게이트 연결을 끊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속죄의 전부였다.

“7마계 놈들만 내 앞에 안 나타나면 말이지…….”

겉옷을 걸치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러면 꼭 앞에 나타나던데.

스팀펑크가 돌아온 게이트를 닫으러 갈 시간이었다. 물론 얼굴 팔린 스팀펑크와 함께가 아니라 나 혼자.

수고비는 스팀펑크에게 돈으로 받아야지.

* * *

오늘도 또 귀환자가 등장했다. 벌써 한국에서의 일곱 번째 귀환자였다.

TV에서는 한창 국내 2대 대형 길드인 러스터 소속 네임드 하이 랭커가 귀환자라고 밝히고 등급 재측정을 하자 S급이 나왔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Best] 귀환자가 까이는 걸 못 참고 귀밍아웃한 귀환자 jpg.

20XX-11-07 13:08 조회:1,745,648

작성자: 생각좀하고말해

* * *

[잡담] 카페 갔는데 카페 직원이 지가 귀환자래ㅋㅋㅋ

익명 조회 973 20XX-11-05 13:31

아 진짜 개어이없어ㅋㅋㅋ

카페에서 테이크아웃 커피 기다리면서 친구들이랑 대화하다가 수능 이야기가 나왔거든?

우리 동생 이번에 수능 본단 말이야 그래서 고3 귀환자 걔랑 같은 수능장 걸리면 다른 수험생들에게 민폐니까 걔 그냥 수능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그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카페 직원이 우리를 개꼬나보는 거야ㅋ

음료 나왔다는 안내 말투 개띠껍고 빨대 주라니까 빨대도 X나 던지는? 수준으로 주고ㅋㅋ

기분 팍 상해서 혹시 귀환자시냐고 귀환자 아니시면 이런 거에 맘 상할 이유 없지 않냐고 쏘아붙였거든? 그러니까 그 직원이ㅋㅋㅋ

“저도 귀환자라서 듣기 꼬와서 그런 거 맞는데요? 님들이 뭔데 애 인생 망치려 해요?”

이러고 급발진함ㅋㅋㅋㅋ 아 그러면 혹시 님 얼굴이랑 카페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도 되냐고 물으니까 고소당하고 싶으면 그러라고 ㅇㅈㄹㅋㅋㅋ

거기 베리와플 맛있어서 자주 갔는데 그 직원 그만두기 전까지 안 가려고ㅋㅋ

댓글(88)

- 개에반데 카페 어디임?

└서울 ㅇㅎ동 르X카페 직원이 자기가 귀환자랍니다^^ 카페 가실 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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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와 ㅅㅂ 카페 직원 그 사람 ㄹㅇ 귀환자 맞나 봐;;;

익명 조회 1142 20XX-11-05 13:40

우리 나가려는 순간 몬스터가 카페 출입문 쪽으로 막 달려오는 거임 그런데 직원이 “헐, 이러면 수리비 장난 아닐 텐데?” 이러고 손가락 튕김

컨셉충 새끼 컨셉 제대로 잡았다고 비웃고 있었는데 갑자기 몬스터 찢기더니 그림자에서 송곳니 튀어나와서 몬스터 씹어 삼킴…….

우리 ㄹㅇ 귀환자에게 깝친 거였음…….

댓글(197)

- ㅇㅎ동 르X카페? 남알바? 여알바?

└남자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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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831)

메탄몽: 능지 ㅅㅂㅋㅋㅋ

└알레스카상어: 세계 망친 놈들 수준 알 만하죠?

sdalfkj: 그냥 우주에 던져 놓으면 안 됨? 알아서 차원 찾아가라고

└vk668: 우주까지 보내는 비용이 아까우니까 걍 게이트 안에 던져ㅋㅋ

└빅팀: 222 걍 게이트에 던져야 함ㅋ

루니즈: 레벨레이션은 사이비가 아니라 선구자였다

└odjds: ㄹㅇㅋㅋ

엘페이르: 그래도 사형 청원은 너무 나간 거 아니냐;; 그 사람들도 낯선 곳 떨어져서 얼마나 집에 돌아오고 싶었겠어

└9977: 잡았다 귀환자

└크리스토프 깜짝놀란: 사형 청원 10만 넘었쥬? 여론은 님 의견이랑 완전 다르쥬?

…….

또 다른 새로운 귀환자의 등장을 담은 인터넷 게시글을 읽던 천세연이 가만히 귀환자 단체 채팅방만 보고 있던 천우현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 귀환자들 완전 짠 것처럼 줄줄이 나오지 않아? 회귀 전에는 잘 못 느꼈는데 지금 다시 보니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드러나는 타이밍이 좀 수상하긴 하다.”

“그러네.”

키득거리며 말하는 동생을 보던 천우현이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휴대폰을 쥔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요즘 동생이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리는 건 알고 있었다. 눈가에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과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는 몸을 보면서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제발 앞서 나서지만 말아 달라는 동생의 애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곧 그날’이라는 잠꼬대에 회귀의 원인이 된 날이 곧 다가오는구나,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그런 동생에게 제가 귀환자라는 짐까지 지워 주는 게 맞는 걸까?

천우현은 제 이름과 얼굴이 어느 정도 팔린 상태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공격받는 게 저뿐만 아닌 동생까지라는 것 역시 예상하기도 했고.

협회장에게 부탁한다면 천세연은 협회의 보호하에 안전해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예 밝히지 않았을 때보다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분명 자신들이 돌아옴으로써 세계는 침략 루트를 밟았다고 했지. 그동안 저가 쌓아 온 카르마는 세계를 짓눌러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는 것에 한몫했고.

이 모든 일의 원인이나 다름없는 자신이 가족을 핑계로 모른 척 숨어 있는 게 옳을까.

하지만 지금 단체 채팅방의 귀환자들처럼 정체를 밝혀서 세연이가 저 때문에 위험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그는 결코 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세연이 너는 귀환자를 어떻게 생각해?”

“원망스럽고 증오스러워.”

천우현은 그의 물음에 해묵은 감정이 가득 담긴 대답을 뱉는 천세연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귀환자 때문에, 그 사람이 귀환자라 오빠가…….”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리던 천세연은 입술을 꾹 깨물어 말을 멈추더니 다시 고개를 들고 입꼬리만 애써 끌어당겨 웃으며 말을 슬쩍 돌렸다.

“회귀 전에 귀환자에게 들었거든. 자기들 때문에 세계가 이렇게 됐다고. 오빠가 생각해도 귀환자들 너무 이기적이지 않아? 세계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그 세계에 남아 있어야 했던 거 아니야?”

천우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저 부모님에 이어 나까지 잃고 홀로 남을 너를 위해 악착같이 돌아온 게 정말 이기적인 선택이었을까.’

귀환자를 증오하는 동생이 하나뿐인 오빠가 귀환자임을 밝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두려워 그는 차마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천세연이 유일한 가족인 천우현이 귀환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걸 보니 회귀 전의 그는 끝까지 동생에게 제가 귀환자라는 사실을 숨긴 모양이었다.

그래, 천우현은 언제나 겁쟁이였다. 한 번도 맞서 볼 생각을 하지 않고 피하기만 급급했던 지독한 회피형 인간.

“그냥 이거 하나만 기억해요. 당신보다 내 원죄가 더 크다는 것.”

죄책감에 앓고 있던 제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던 손길과 함께 나직하게 속삭여지던 목소리를 그는 기억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듣고도 망설임 없이 죄의 무게를 떠넘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천우현은 선택해야 했다.

용기 내어 귀환자임을 밝힌 앞선 사람들처럼 맞서든지, 외면하고 도망치든지.

‘차라리 지킬 게 없었더라면 고민 역시 없었을 텐데.’

제게 유일하게 남은 ‘지킬 것’인 동생을 바라보며 천우현은 쓰게 웃었다.

* * *

[단독] 레벨레이션 한국 지부 신도들 하이 랭커 A씨 살인미수로 집단 고소… A씨 정당방위라고 반박

바로 몇 시간 전에 뜬 뜨끈한 뉴스를 읽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소드마스터의 집 앞에 잠복하여 집단 폭행을 하려고 하다가 역으로 당하니 고소한다고 난리 치는 저 찌질함에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댓글은 역시나 귀환자 욕으로 가득했다. 자기 집 앞에서 습격당한 귀환자의 편을 들어주는 댓글은 가물에 콩 나듯 하나씩 있었다.

“운 없어서 다른 세계 뚝 떨어졌다가 돌아온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거 사람들 참 너무하네.”

한숨을 내쉬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요즘 들어 자주 우울해지고 울컥했다.

강의실 옆자리나 앞, 뒷자리에서도, 친구들과의 단체 채팅에서도, 뉴스나 커뮤니티에서도… 사방에서 귀환자를 주제 삼아 떠들고 있으니 어쩌면 내 증상은 당연한 거일 수도.

물론 그들이 나누는 대화와 올라오는 글은 귀환자를 향한 욕이 대부분이었다.

주희 선배가 꽉 쥔 채로 부들부들 떨리는 내 주먹 위에 손을 얹고 다독이지 않았더라면 난 강의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너희들이 뭘 알기에 떠드냐고 악다구니라도 질렀으리라.

지금까지 정체를 밝힌 단체 채팅방 소속 귀환자는 총 열한 명. 스물아홉 명 중 열한 명이면 과반수까진 아니어도 꽤 많은 수였다.

다들 정체를 밝히는 이유와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헬스 너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용병왕은 너튜브에 직접 영상을 올려 시원하게 제 정체를 깠고, 추기경은 음침한 모습에 걸맞게 헌티드에 글을 올려 남이 제 신상을 까게 만들었다. 그리고 고소해서 돈 벌었다나 뭐라나.

[류사현 - 아니 계속 C급이라고 무시하니까] 오후 1:30

[류사현 - 어쩌다 보니 천마삼검 초식 선보이고 있더라고요 하하] 오후 1:31

류사현이야 이렇게 될 줄 알았고, 뭐. 귀환자 채팅방 만들어지기 전에도 자기가 귀환자이자 천마인 걸 자랑스럽게 밝히며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지 않았던가.

혁명군 수장은 논문 심사 떨어지고 제정신 아닌 상태에서 술 마시다가 친구들에게 질렀다고 들었다. 그걸 술집 옆 테이블 사람들이 들어서 문제였지.

시선이 많이 분산된 덕분에 드래곤슬레이어는 수능은 칠 수 있을 것 같다며 채팅방에 한마디 남겼다.

그래 봤자 수능 날이 되면 또 그걸로 떠들썩해질 게 뻔했다. 수능 바로 전날, 그러니까 사흘 후에 그걸 묻을 만큼 아주 큰 이슈가 터지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 말을 증명하듯 벌써 ‘잊지 말자’라면서 드래곤슬레이어의 동영상이 끌올 되고 있지 않은가.

“여보세요.”

- 헌터 협회장 김도빈입니다. 혹시 시간 가능하십니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귀환자인 사실을 알고 있는 협회장에게서 온 전화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요.”

- 윤성여자고등학교 앞에 생긴 S급 게이트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아무래도 이채현 씨가 들으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S급 게이트. 그 단어에 등골이 섬칫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초조함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 지금까지 총 네 팀의 공략대가 그 안에서 전멸했습니다. 며칠 전 보낸 다섯 번째 공략대에 겨우 생존자가 한 명 나왔는데 그 생존자가 하는 말이 인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눈이 붉은 인간이요. 그리고…….

긴장감 조성이라도 하듯 잠시 말을 멈춘 김도빈이 한숨을 내쉬고는 느릿하게 전화한 용건이나 다름없는 말을 내뱉었다.

- 검은 머리 검은 눈의 마왕을 불러오라 전하라고 했다더군요.

숨이 턱 막혔다. 내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도빈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 S급 게이트를 열 수준인 세계에서 돌아온 마왕은 이채현 씨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다음 레이드는 언제인데요?”

- 내일입니다.

망할 인간 같으니. 부탁도 아니고 통보였군. 김도빈의 대답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러니까 지금 협회장님의 말은 게이트 안에 있는 놈들이 나를 불렀으니까 놈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줘야겠으니 레이드에 참가하라는 뜻이죠? 그리고 자칫하면 나를 그놈들에게 제물로 던져 줘서 게이트를 닫으려는 속셈도 있을 테고.”

- 전자는 맞지만 후자는, 흐음. 이채현 씨가 저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군요.

“흑막 협회잖아요.”

- 이채현 씨는 귀환자이기 이전에 자유권의 보호 아래에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이채현 씨가 원치 않으면 저희 측에서도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무덤덤한 말에 잠시간 울컥했다. 그래, 나는 마왕이기 이전에 민증 나온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이라고.

- 레이드 시기를 당장 내일로 잡은 이유는 이채현 씨도 아시다시피 나흘 후가 수능이지 않습니까. 윤성여고는 게이트 때문에 수능 시험장에서 제외되었다고는 하지만 윤성여고 근처 1km 내외에 수능 시험장이 두 곳이나 있어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불안감이 커서 말입니다.

“오케이, 오케이. 알겠어요. 수능 중요하죠.”

비행기도 안 띄우는 K-수능 날에 S급 게이트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도록 둘 리가 없지. 납득하고 설렁설렁 대꾸하자 김도빈 역시 한결 안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 이번 레이드는 마지막이니만큼 최정예 인력으로 구성할 예정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정예 인력이면 뻔했다. 분명 S급 헌터 총동원에 2대 길드인 러스터 길드와 적벽 길드 끌고 오겠지.

뚝 끊긴 전화에 귀에 끼고 있던 무선 이어폰을 툭 두드려 다시 마음을 안정시키는 클래식 10선 음악을 재생시키고는 마계 책을 펼쳐 크라토스라는 단어를 찾았다.

이 빌어먹을 크라토스를 하루빨리 넘기고 마계와의 인연을 끊기 위해. 그렇게 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내 마음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 * *

다음 날, S급 게이트가 열린 윤성여고 앞으로 가니 왜인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졌다. 뭔가 했더니 전에 우리 동네에 생겼던 S급 게이트 때와 비슷한 광경이었다.

도착한 헌터들을 쭉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아는 얼굴들이구먼.

카메라에 대고 신나게 무어라 떠들어 대는 BJ 민, 교문에 바리케이드 치는 걸 지휘하는 이재의, 차에서 내려 곧바로 이재의에게 다가가는 주태윤, 나란히 서서 맞담배를 피우고 있는 민서 언니와 서해량.

그리고 뒷짐 지고 가만히 게이트를 바라보는 협회장 김도빈과 그 옆의…….

“야, 이채! 너 왜 여기 있어?”

망할, 총동원되는 S급 헌터에 백아현도 끼어 있다는 것을 깜빡했다.

“왜, 나는 오면 안 돼?”

태평하게 물으니 한걸음에 달려온 백아현이 버럭 소리 질렀다.

“당연하지! 각성한 지 1년도 안 된 초짜 헌터가 어떻게 S급 게이트에 들어간다고 그래?”

백야, 남들이 들으면 네가 나 무시하는 줄 알겠다. 볼을 긁적이며 어깨를 으쓱하자 당장 돌아가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얘 좀 말려 보라고 김도빈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청했지만, 그는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저를 부르는 소리에 휙 몸을 돌려 가 버렸다.

나를 백아현의 무지막지한 등 떠밈에서 구해 준 이는 의외의 지원군이었다. 푹, 누군가의 가슴에 이마가 부딪혔다.

“처음 사자대면했을 때도 느낀 거지만 너무 과보호 아닙니까? 이제 민간인도 아니고 전투계 A급 헌터인 동갑내기 친구에게 하기엔 너무 과한 걱정 같군요.”

부드러운 손길로 내 등을 떠미는 손을 치워 준 주태윤이 아현이에게 뼈가 담긴 말을 건넸다. 미간을 팍 구긴 아현이가 쏘아붙였다.

“허, 지금 말 다 했어요? 다른 곳도 아니고 S급 게이트예요. 그런 곳에 헌터로 각성한 지 1년도 안 된 친구가 들어간다는 데 걱정 안 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 그쪽은 친구가 없어서 모르시나?”

주태윤이 친구가 거의 없긴 하지. 다 진세빈에게 뺏겨서…….

의도치 않게 아픈 곳을 찌른 아현이의 말에 주태윤이 눈가를 꿈틀하며 대꾸했다.

“연인 사이도 이렇게 구속은 안 합니다, 백야 헌터.”

“채현이 S급 게이트로 끌고 간 그쪽에게 들을 말은 없어요. 그때 얼마나 놀랐는데!”

“원래는 B급… 하, 아닙니다. 제 잘못이죠.”

그래, 다 알겠으니까 나 빼고 대화하면 안 될까. 문장 그대로 가운데에 끼어서 이게 뭔 고생이지.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사이 슬그머니 빠져나와 익숙한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우현 씨!”

“역시 채현 씨도 오실 줄 알았습니다.”

나처럼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지 더욱 턱선이 날카로워진 그의 얼굴에는 처연미가 더해져 있었다.

“괜찮아요?”

“역시 밝히지는 못하겠더군요. 세연이가 생각보다 더 싫어하는 바람에.”

설마 걔, 자기 오빠가 귀환자인 걸 모르나? 어쩌면 천세연이 알고 있는 과거의 정보가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럼 답은 과거를 읽어 내서 내 기억처럼 변환하는 메모리테이크밖에 없는데.

아주 잠깐 동안의 기억이 아닌 거의 1년 치의 기억을 소화하려면 천세연의 협력이 필요했다. 하는 꼴을 봐서는 협력은 요원할 것 같지만.

주위를 둘러보다가 천우현과 마찬가지로 살이 쭉 빠진 소드마스터를 발견했다. 그는 길드원들과 떨어진 곳에 홀로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가볍게 묵례를 건네자 쓰게 웃은 소드마스터가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큰 전력이 될 S급을 이렇게 티 나게 배척한다고?’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느껴졌다. 귀환자를 향한 적대감이 생각보다 더욱 심각한 모양이다.

이쯤 되니 내가 귀환자임을 알고 있는 주태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대하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레이드 시간이라 공지한 2시 정각이 되자 알람이 울렸다. 헌터 수십 명의 목숨을 잡아먹은 게이트 앞에 선 이들의 얼굴에는 불안과 결의가 공존했다.

이번에는 BJ 민마저 휴대폰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진지한 얼굴로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들어가죠. 다들 무사히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도빈의 진지한 목소리가 운동장을 울렸다. 그리고 그때처럼 김도빈을 선두로 헌터들이 게이트 안으로 입장했다.

『S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컥컥거리는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하지만 조금 더 습기로 끈적이는 공기를 들이마셨다.

김도빈의 추측이 맞았다. 이곳은 7마계 마족 놈들이 연 게이트였다.

이곳이 7마계 놈들이 친 함정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즉시 페리의 소환을 해제했다.

나와 함께 전장을 휩쓸고 다녔던 페리를 향한 타 마계 마족 놈들의 증오는 나에게 향하는 것 못지않았고, 손발이 거의 묶인 상태나 다름없는 나는 페리를 제대로 보호해 줄 자신이 없었기에.

페리가 죽거나 다치게 두느니 차라리 권능을 남발하는 편이 나았다.

7마계는 내가 정복한 일곱 마계 중 가장 지긋지긋하고 증오스러웠던 마계였다.

100년 동안 이어졌던 전쟁에서 죽은 내 부하들의 수가 몇이었고, 내 수를 읽고 역공해 오는 7마계 마왕 놈 때문에 내가 죽을 뻔했던 적이 몇 번이었던가.

두두두―

발광 아티팩트를 켜자마자 땅이 진동했다.

“온다.”

김도빈의 나직한 말에 주먹을 꽉 쥐었다. 이윽고 마수 무리가 쏟아지듯 던전 입구 쪽으로 밀려 나왔다.

마기로 터트리기에는 보는 눈도 많고 마기를 느낀 7마계 마족 놈들이 무지성으로 달려올 수 있으므로 최대한 원거리 스킬만을 사용하여 마수를 때려잡았다.

항상 데리고 다니는 페리도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내게 따가운 눈길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으나 물밀 듯이 몰려오는 마수에 의해 내게 강제로 신경을 껐다.

콰앙―!

연속으로 쏟아진 불덩이가 마수들에게 꽂히자 그것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마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에 있을 7마계 마족 놈들이 문제였지.

놈들은 강했다. 1급 몬스터 측정을 받은 마수들을 겨우 잡고 있는 이곳의 헌터들이 상대할 만한 레벨이 아니었다.

내가 굳이 공략대를 물리지 말라고 한 이유는 단 하나, 마수들의 정리를 위해서였다.

아무리 나라도 마수 떼와 마족 놈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귀찮거든.

그래도 최정예는 최정예인 듯 헌터들의 깔끔한 손속 아래 마수들의 수는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1마계 마수들과 마족들만 잡았을 천우현 역시 그래도 같은 마수라고 꽤 거침없는 손속으로 마수들을 베어 나갔다.

다시 쏟아져 나올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대충 정리는 되어 가는군.

김도빈의 뒤를 노리는 마수의 멱을 스킬로 간단히 따고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주변에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다행히 주변 소음이 심했기에 내 말이 퍼져 나갈 염려는 없었다.

“내가 신호하면 후퇴 명령 내려요.”

“혼자 남으시려고 그러십니까?”

“알잖아요. 사람들 없는 편이 내게는 더 편한 거.”

내가 씩 웃자 김도빈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더니 옆의 빈틈을 노리고 덮쳐 오는 마수를 향해 곧바로 벼락을 날렸다.

“무사하셔야 합니다. 이채현 씨가 잘못된다면 제가 백 이사를 볼 면목이 없으니까요.”

“별걱정을.”

한 번 패배한 놈들에게 다시 패배를 선사해 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어느새 제법 길어 눈가를 살짝 가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마기를 확 풀었다. 바닥과 던전 벽을 뒤덮은 가시덩굴 같은 마기가 마수에게로 뻗어져 그것들을 갈기갈기 찢었다.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들던 마수들이 멈칫했다.

우욱!

최대한 헌터들 쪽으로 마기가 가는 걸 자제했음에도 몇몇 헌터들은 마기를 이겨 내지 못한 듯 여기저기서 헛구역질하거나 몸을 수그리고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던전 깊숙한 저 안쪽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마왕, 마왕이 왔다!”

오직 나와 천우현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살기와 희열 어린 감정을 담고 던전에 울려 퍼졌다.

낯선 언어로 외치는 문장에 오싹함을 느낀 이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 마왕만 남으면 네놈들은 살려서 내보내 주지.

전음이 이곳의 모두에게 울렸다.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이 짠 듯이 동시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왕을 찾는 듯한 사람들을 보며 신경질적으로 짧은 한숨을 내뱉은 김도빈이 큰 소리로 외쳤다.

“후퇴합시다!”

“쫓아오면 어떡합니까? 그냥 안전하게 귀환자 넘겨주고 가죠!”

이미 몇몇은 게이트를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귀환자를 넘기고 안전하게 목숨을 보장받아 나가자고 고집부리는 이도 존재했다.

그러면서 소드마스터를 힐끔거리는 꼴이 딱 여차하면 소드마스터를 제물로 밀어 넣고 도망갈 각이 보였다.

그리고 저 먼 던전 안쪽에서 시커먼 어둠을 뚫고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와, 쟤들이 안 죽었다고?’

망할 부하 놈들아, 이제까지 대체 뭐 한 거냐?

저 두 놈은 7마계 마왕의 측근들이었다. 내 손에 죽은 최측근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살아 있으면 신경 쓰이고 귀찮은 존재들.

그리고 놈들의 뒤에서 명령만을 기다리며 눈을 빛내고 있는 놈들은, 이제까지 나온 마수들은 어린애 장난으로 느껴질 만큼 거대하고 위압적이었다

익숙함에 천천히 뜯어보니 전쟁에서도 1마계 군단의 발목을 잡았던 그 마수들이 분명했다. 분명 멸종시키라 했던 것 같은데 알이나 새끼를 빼돌리기라도 했나.

- 마왕을 넘겨.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오늘 전멸이다.

그 말에 대립하는 것처럼 마족들의 앞에 서 있던 헌터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니까 후퇴하라 했을 때 진작 후퇴했어야지.

김도빈 역시 골치 아픈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드를 눌러쓴 내 뒤로 슬그머니 다가온 주태윤이 내 팔을 탁 잡았다.

그러고 보니 주태윤은 빌어먹을 진세빈의 언급으로 내가 마왕이란 걸 알고 있었지. 방음 스킬이 나와 주태윤의 주변을 휘감았다.

“굳이 채현 씨가 희생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지 마세요.”

애써 담담한 척하는 목소리였지만 끝이 떨리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팔을 잡은 손을 무신경한 손길로 툭툭 털어 내며 대꾸했다.

“저놈들이 넘어온 건 내 책임이라서요.”

“그렇지만 다른 세계로 떨어진 건 채현 씨의 책임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 주태윤의 입에서 나왔다.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렇죠……. 그건 제 책임이 아니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끝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홀랑 이 세계로 넘어온 내 책임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이것만은 내 손으로 책임져야 했다.

마력을 살짝 움직여 주태윤의 방음 스킬을 깨뜨리고는 내 옆으로 다가온 천우현을 포함하여 다시 방음 스킬을 쳤다. 다른 사람들 역시 한창 수군거리고 있었기에 대화를 나누기는 지금이 적기였다.

마수의 피로 범벅이 된 성검을 단단히 쥔 천우현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원하신다면 엄호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귀환자 여론이 어떤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말리지는 못할망정 지금―”

인상을 구긴 주태윤이 나직하게 으르렁거리자 그의 말을 자른 천우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엔 제 책임도 있으니까요.”

“당신도 귀환자입니까?”

눈치 빠른 주태윤은 그 대답에서 천우현의 정체를 읽어 낸 모양이었다.

천우현과 주태윤의 시선이 맞붙었다. 나를 사이에 두고 눈빛으로 신경전을 벌이는 두 남자를 얼떨떨한 눈으로 번갈아 보았다.

아니, 내가 로판을 원하긴 했는데 갑자기요……? 지금 로판 모먼트가 나오기에는 너무 상황이 시리어스하고 험악하지 않니?

“됐어요. 안 들키고 해결하려고 온 건데 우현 씨까지 합세하면 너무 눈에 띄잖아요.”

깔끔하게 대답하고는 더 이상 두 사람이 말다툼을 벌이지 못하도록 방음 스킬을 거뒀다. 주변 헌터들은 여전히 소드마스터를 넘기네, 마네 하며 다투고 있었다.

7마계 마족 놈들의 얼굴에서 점점 인내심이 사라지는 순간, 누군가가 버럭 소리쳤다.

“아, X발! 그냥 넘겨! 넘기면 될 거 아니야!”

그러고는 등을 힘껏 떠밀었다.

내가 아닌 소드마스터의 등을.

“미쳤어요? 마왕 넘기라 했지 아무나 넘기라는 말은 안 했잖아요!”

“저게 어떻게 아무나야? 어차피 저 인간도 귀환자잖아!”

소드마스터가 밀리지 않고 버티자 따가운 눈초리들이 한순간에 소드마스터에게 향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번에는 훨씬 많은 손이 소드마스터의 등을 떠밀었다. 헌터들이 서 있는 곳에서도 앞쪽으로 밀려 나온 소드마스터를 향해 두 7마계 마족 놈들이 천천히 걸어왔다.

저놈들은 소드마스터가 자신들이 찾던 마왕이 아니란 걸 확인하면 이곳의 모든 이들을 죽일 것이 분명했다.

당장 앞일 생각도 안 하는 멍청한 놈들 같으니라고. 소드마스터를 떠밀고 안도한 얼굴로 슬금슬금 뒷걸음질하는 헌터들을 노려보았다.

죄책감이 서린 얼굴로 서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딱 그뿐.

고개를 푹 숙이고 손마디가 새하얘질 정도로 검 자루를 쥐고 있는 소드마스터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7마계 마족 놈들을 향해 마기를 훅 풀었다.

놈들의 얼굴에 희열이 걸렸다. 마족들은 마왕임을 확신한 듯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고 소드마스터가 물러서지 못하게 던전 벽을 무너뜨렸다.

“다들 나가십시오! 후퇴입니다!”

김도빈의 외침에 헌터들이 게이트를 향해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때를 틈타 그림자를 타고 무너진 벽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뭐야, 마왕이 아니잖아?”

“분명 마기가 느껴졌는데……. 이 인간은 미끼였군. 그럼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긴. 죽이고 찾으러 가야지. 분명 1마계 마왕의 마기는 맞았잖아?”

툭툭, 발로 가볍게 바닥을 두드려서 소드마스터를 앞에 두고 태연하게 죽이니 마니 하며 대화하는 두 마족 놈들의 시선을 끌었다.

“오랜만이지?”

느긋하게 웃자 눈이 커진 놈들이 곧장 내게 달려들었다. 급하게 소드마스터를 뒤로 물리고는 먼저 달려드는 놈의 목을 마기로 휘감아 벽에 내던졌다.

“죽여 버리겠다아아!”

벽에 금이 가며 피를 토하는 제 동료를 본 나머지 한 놈이 분노하며 소리 질렀다. 놈의 몸이 꿈틀거리더니 점점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폴리모프의 해제였다.

‘젠장, 드래곤이었나.’

놈이 변신을 끝내기 전에 마기를 운용해 죽이려고 했지만 몸을 추스른 그놈의 동료가 나를 공격하는 것이 한발 빨랐다.

검기를 담은 소드마스터의 검이 마족을 향해 날아들었다. 망할, 방해라고 대놓고 말할 수도 없고. 검기가 길게 던전 벽을 긁었다.

던전을 꽉 메울 정도의 덩치로 변한 마족 놈이 쩍, 입을 열었다. 여기서 브레스를 뿜으면 피할 공간이 없었다.

『관리자 권한으로 영역을 확장합니다.』

상태창이 깜빡이더니 체결되었다는 문장 대신 다른 문장을 띄웠다.

『동급의 간섭으로 인해 권한 행사가 불가능합니다.』

뭐라고……?

당황할 새도 없이 강력한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겨우 실드를 펼쳐 브레스를 막았지만 실드를 계속 유지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벽 뚫어요!”

내 외침에 소드마스터가 곧바로 우리 등 뒤의, 무너진 던전 벽과 천장이 만든 드높은 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검기에 의해 쌓여 있던 돌이 날아가며 통로를 뚫었다. 동시에 마기가 드래곤의 옆에서 우리를 공격하려 하던 마족의 목을 틀어쥐어 비틀었다.

“끄윽, 꺽……!”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몸을 뒤틀던 마족은 내 손짓에 따라 그대로 주욱 끌려왔다. 마기가 던전을 뒤덮으며 드래곤과 격리된 공간을 만들었다. 그래 봤자 임시방편이었지만.

“말해. 무슨 수작을 부렸기에 내 권한을 상쇄시킨 건지.”

“폐하의, 끄윽, 심장. 신의 힘을, 담았던, 커헉, 심장…….”

그 말에 마신 아이루스의 심장 조각을 심장에 박고 있었던 7마계 마왕을 떠올렸다. 그 정도면 크라토스와 거의 동급이겠지.

시체가 사라졌다고 해서 주군의 장례라도 치르고자 7마계 잔당들이 빼돌린 줄 알았더니 심장을 빼기 위해서였다니.

‘너나 나나 부하 농사 참 잘 지었다.’

7마계에 이어 심장까지 뜯긴 7마계 마왕을 향해 혀를 차 주며 마기를 더욱 강하게 조였다.

“심장 어디 있어?”

“던전, 던전 안쪽 보스룸에… 컥!”

완전히 목뼈가 뒤틀린 마족은 시체가 되어 툭 바닥에 떨어졌다. 앞에서 사람의 형상을 한 존재가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소드마스터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상태로는 제대로 된 공격이 먹히기 힘듭니다. 넓은 곳으로 빠져나가야 이쪽에 유리합니다.”

“저도 그 의견에는 동감이네요.”

던전 안쪽의 보스룸까지 가는 길목은 저 망할 드래곤 놈이 거대한 몸뚱이로 막고 있었다.

그걸 뚫고 보스룸까지 가 심장을 손에 넣고 던전의 크기를 키워 드래곤과 맞서느니, 차라리 놈을 던전 바깥으로 유인하여 그곳에서 광역 공격을 펼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바깥에서 제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드래곤을 상대할 테니 마왕 님은 몰래 빠져나가세요.”

점점 흔들리는 마기 방어벽에 단단히 각오한 얼굴을 한 소드마스터가 게이트를 향해 달리며 권유했다.

“어차피 저는 귀환자라고 밝혔으니 상관없지만 마왕 님은 아니잖아요.”

“글쎄요, 힘들 텐데…….”

“원래 세계에서도 드래곤 많이 잡아 봤습니다. 대공 칭호도 광룡을 잡은 공으로 받은 겁니다.”

검을 고쳐 쥐며 소드마스터가 씩 웃었다. 대답 없이 볼만 긁적였다. 힘들 거라니까.

점점 게이트와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곧바로 마기를 거두자 드래곤이 우리를 발견하고 그 거대한 몸뚱이를 이끌며 달려왔다.

게이트를 통해 빠져나오자 아현이가 곧장 내게로 달려들었다.

“야, 이채! 너 왜 안 나오고 계속 게이트 안에 있었던 건데?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미안, 백야.”

멋쩍게 웃으며 사과했다. 미리 말 못 해 줘서 미안해. 그래도 너무 화내지는 마.

『스킬 ‘타인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1인』

아현이를 바리케이드로 막힌 교문 너머로 보내자마자 드래곤이 게이트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마침내 온전히 운동장으로 나온 드래곤이 날개를 쫙 펼치며 비행을 시도했다.

“권외 등급입니다!”

“분명 던전 브레이크 경고 없었잖아!”

“막아! 비행만은 무조건 막아야 해!”

패닉에 빠진 헌터들이 우왕좌왕하며 드래곤을 향해 몰려드는 동안 한발 먼저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소드마스터가 드래곤의 한쪽 날개를 향해 검을 크게 내리그었다.

검기가 길게 궤적을 그리고 드래곤의 한쪽 날개가 너덜너덜하게 찢겨 나갔다. 비행을 하지 못하게 된 드래곤이 분노하며 꼬리를 휘둘렀다.

동시에 거센 화염이 땅으로 막 내려앉은 소드마스터의 발치에서 확 피어올랐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소드마스터가 눈을 질끈 감은 순간.

“거봐요. 힘들다고 했잖아요.”

타인 순간 이동으로 소드마스터를 내 옆으로 이동시키고는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게요. 제가 상대한 놈들과 차원이 다르군요. 이런 놈들을 상대하고 돌아오셨다니, 참 존경스러워지네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슬그머니 눈을 뜨고는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쓱 닦은 소드마스터가 픽 웃으며 대꾸했다. 주어는 없었지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아듣기는 어렵지 않았다.

가라앉은 눈으로 7마계 잔당 놈인 드래곤을 한 번, 그리고 헌터들을 한 번 돌아보았다.

지금 댁들이 건드리는 귀환자가 얼마나 위험인물인지 똑똑히 새겨 주면 적어도 오늘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공포만큼 효과적인 건 없다. 그게 내가 마계에서 살아온 방식이었다.

충동적인 선택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선 게이트가 닫히지 않고 내가 크라토스를 지닌 상태로 이 세계에 있는 한 계속해서 내 적들은 이곳으로 넘어올 거고, 그때마다 나는 남들을 방패 삼아 숨는 것밖에 하지 못하겠지.

내가 계속 힘을, 정체를 숨기고 있는 한은.

마계는 내 세계가 아니었기에 이기적으로 굴 수 있었지만 차마 내 세계에게는 그러지 못하겠다.

“다들 드래곤 보이시죠? 이거 못 막으면 아마 수능 미뤄질 각. 날개 하나 찢기긴 했는데 어떻게 잡을지 몰라서 지금 다들 못 다가가는 중임다.”

그리고 고3 하나 수능 보게 만들려고 기꺼이 제 정체를 까며 안정적인 삶을 포기한 멍청이들을 보다 보니 나 역시 전염된 게 분명했다.

“생방송이냐?”

내 뜬금없는 물음에 내 옆에서 휴대폰 화면에 대고 떠들어 대며 드래곤의 꼬리를 피하던 BJ 민이 나를 휙 돌아보더니 휴대폰 화면을 보고 다시 나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네? 네. 생방송이요.”

“그래, 잘됐네. 잘 찍어. 조회수 대박 칠 테니까.”

나와 BJ 민이 있는 쪽을 향해 휘둘러지는 꼬리를 태평하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죽기 일보 직전인데 뭘 찍어요! 악, X발! 실드! 실더 어디 갔어!”

퍽!

BJ 민이 다급하게 외치자마자 거대한 꼬리가 내가 불러낸 실드에 가로막혔다. 동시에 쩌억, 드래곤이 얼음 결정 안에 갇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드래곤과 태연한 나를 번갈아 보던 BJ 민은 곧 주변에 있던 헌터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드래곤을 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내게 물었다.

“누님 능력이에요? 누님 테이머 아니었어요……?”

“딱 보면 몰라? 테이머 아니잖아.”

비죽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드래곤을 가둔 얼음 기둥에서 화려한 얼음 결정 잔가지가 펼쳐져 나왔다.

관종의 직감으로 이걸 찍으면 대박 치리란 걸 느꼈는지 후다닥 뒤로 물러난 BJ 민이 휴대폰 카메라에 나랑 드래곤의 모습을 담았다.

- 9999 님, 슈퍼채팅 30만 원 감사합니다. 테이머가 테이머 아니면 대체 뭐냐?

- 디베인 님, 슈퍼채팅 10만 원 감사합니다. 걍 메이지인데 관심받고 싶어서 테이머라고 가상의 직업 만들어서 구라 친 거 아님?

꿈틀거리며 저를 가둔 얼음 결정을 박살 내기 위해 드래곤이 몸을 뒤틀자 쩌저적, 얼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얼음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물로 흠뻑 젖은 드래곤의 몸뚱이를 땅을 타고 스르륵 올라온 마기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휘감았다.

아무도 차마 이 솔로 레이드에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민서 언니도, 서해량도, 김도빈도, 백아현도, 주태윤도, 천우현도, 아무도.

『스킬 ‘낙뢰(SSS)’를 실행합니다.』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들며 빛이 번뜩였다.

- 빌어먹을 1마계 마왕 놈!

씹어뱉듯이 으르렁거린 7마계 마족 드래곤의 말을 끝으로 거대한 낙뢰가 놈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과 땅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새카맣게 탄 드래곤이 서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쿠웅!

지진 난 것처럼 땅이 울렸다. 첨예한 마기가 그대로 드래곤하트를 뚫었다.

“…누, 누님, 귀환자였어요?”

여전히 휴대폰 카메라를 든 채로 멍하니 드래곤의 사체와 그 앞에 서 있는 나를 찍고 있는 BJ 민을, 아니 정확히는 카메라를 향해 삐뚜름하게 웃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어, 나 귀환자야.”

경악 어린 시선들을 뒤로한 채 다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보스룸까지 쭉쭉 들어가자 보스룸 앞에서 그곳을 지키듯 서 있는 마수들이 보였다. 이제까지 힘을 숨겨 온 답답함을 분출이라도 하듯 마음껏 마기를 풀며 스킬을 쏟아 냈다.

언제 따라온 건지 소드마스터가 옆에서 마수들을 베어 내며 씩 웃었다.

“이제까지 밝혔던 귀환자들 중에서 제일 화려하게 밝히셨네요.”

“그래요? 그나마 위안이 되네.”

위로하듯 건네는 말에 키득거리며 쓰러진 7마계 마수들을 짓밟고는 보스룸으로 들어갔다. 청회색으로 빛나는 핵 옆에 말라비틀어진 심장이 놓여 있었다.

그 심장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손가락으로 살포시 감쌌다. 7마계 마왕이 마지막으로 내게 뱉었던 저주 같은 그 예언이 떠올랐다.

이 세계로 돌아와서 한시도 잊은 적이 없던 그 예언이.

‘네 예언이 진짜 맞았네.’

내가 원하는 평화로운 삶은커녕 소용돌이의 중심에 떠밀렸고, 내가 쌓은 카르마는 세계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에 일조했다. 내가 사랑하는 세계는 나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아니, 회귀자의 말에 따르면 이미 한 번 파멸했지. 바로 내 손에 의해서.

힘을 주어 쥐자 심장은 가루가 되어 바스러져 흩날렸다. 마기에 감긴 핵에 금이 쩌적 가더니 산산조각 나며 무너져 내렸다.

정말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저 헌터들 틈에 섞여 몰래 7마계 잔당들만 쓱싹하고 모른 척 나오는 게 목표였는데 내가 마족을 과소평가한 건지 헌터들을 과대평가한 건지, 마족들하곤 상대도 안 됐을뿐더러 내 앞에서 이루어지는 귀환자를 향한 박해와 배척 때문에 눈이 돌아가서 충동적으로 귀밍아웃까지.

“앞으로 피곤해지겠구먼.”

아니, 아까 한 말 취소. 앞으로가 아니라 벌써 피곤해진다. 게이트 밖으로 나오자마자 미친 듯이 울려 대는 휴대폰을 꽉 쥐고 한숨을 내뱉었다.

집에 가면 일단 인별부터 비공개로 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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