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개와 늑대의 시간 (25/33)
  • 25. 개와 늑대의 시간

    직접 넘어온 건지, 아니면 1마계 쪽에 있는 던전을 건드려 이쪽으로 마수만 보낸 건지.

    당장 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았기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주태윤의 옆에서 7마계의 마수들을 향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왜 굳이 주태윤의 옆이었냐면 주태윤은 내가 힘을 숨긴 읍읍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왕이란 건 그걸 밝힌 진세빈의 존재가 지워져서 기억하려나 모르겠지만.

    그리고 주태윤 옆에서 스킬 쓰면 다들 주태윤이 스킬 쓴 거라 착각할 거 아니야.

    “와, 주태윤 원래 저렇게 강했냐? 원 샷, 원 킬인데?”

    “저거 더블 캐스팅 아니야?”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난 뻔뻔하게 얼굴에 철판을 깔았지만 주태윤은 아닌 듯했다.

    “채현 씨……? 제 실력이 누구 덕분에 과대평가되어 가는 것 같은데요……?”

    “버프 받았다고 쳐요.”

    “나중에 제 원래 능력으로 돌아오면 그때 제 옆에 있던 마왕님께서 의심받으시지 않겠나요?”

    주태윤이 내 귀에 장난스럽게 속삭인 말에 눈썹을 치켰다. 어라, 기억하네? 나중에 진짜 진세빈도 기억하는 거 아님?

    내가 테이머 위장 안 하고 내 스킬을 쓰고 있음에도 꾸역꾸역 게이트 안에서 나오는 1급 몬스터 무리에 헌터 쪽이 밀리고 있었다.

    물론 내가 들킬까 봐 스킬을 찔끔찔끔 쓰고 있긴 하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인력 부족 탓이었다.

    내가 하도 1급 몬스터를 3분 컷 해 대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애초에 1급 몬스터는 A급 다섯 명 정도는 있어야지 한 마리 겨우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몬스터였다.

    그게 늪지대의 7마계산 마수라면 더더욱.

    던브 진압이 끝나야지 내가 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마음은 급했지만 생존형 힘숨찐은 옆에서 스킬 보태기+권능 쓰면서 몸 조지기 빼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미 몬스터에게 당해 쓰러진 사람도 여럿이었다. 사람은 계속 수가 줄고 있는데 게이트 안에서 나오는 마수들은 끝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전멸이었다.

    아현이가 뒤에서 대규모 힐과 버프를 적절히 넣고 정화 스킬로 마수들에게 지속적인 타격을 입히긴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체력 역시 떨어지는지 슬쩍 옆으로 가 보니 숨을 헐떡이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냥 능력 한 번 시원하게 쓰고 기억을 지우자 결심하는 순간, 꼬리가 긴 빛무리가 화살처럼 마수들에게로 날아갔다. 그대로 마수들에게 꽂힌 빛은 펑! 거대한 폭발음을 내며 폭발했다.

    “망할, 산 넘어 산이네. 몬스터 웨이브 겨우 진압했더니 S급 게이트 던전 브레이크야?”

    기계음이 들어간 음성변조 목소리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오, 콩커스다.”

    쾅―!

    바위가 콩커스라고 외친 놈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마수의 위에 떨어졌다. 아무리 봐도 메테오 하위 호환 스킬이었다.

    “다들 잘 막고 계시네요.”

    그 뒤를 이어 협회장 김도빈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불쑥 나타났다. 옆에는 천우현도 함께였다. 이 게이트가 뭐라고 하이 랭커들이 우르르 몰렸는지.

    “적벽 길드는요?”

    “그쪽은 윰서 헌터랑 몬스터 웨이브 진압되지 않은 곳 마무리 중이랍니다.”

    아현이와 김도빈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천우현은 게이트 앞을 쭉 둘러보았다. 쓰러져 있는 헌터들을 보는 천우현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한 그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쪽으로 오려 하다가 시선이 집중될 걸 염려한 내가 오지 말라고 손짓하자 가볍게 눈인사만을 보냈다.

    “이 던전 브레이크를 끝내려면 저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게 불가능에 가까우니…….”

    던전 브레이크를 끝내는 방법은 오로지 게이트 클리어뿐. 하지만 저 게이트는 2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닫히지 않은 극악 난이도의 게이트이자 나조차도 연결을 끊는 데에 실패한 게이트였다.

    『뭐 해요, 마왕 놈아. 네 세계니까 네 권한을 사용해야죠. ԅ(‾ ‾ԅ)』

    “저기 내가 연결 끊으려고 들어가 봤는데 내 권한 없다는데?”

    혹여라도 누가 엿들을까 목소리를 한껏 낮춘 속삭임에 관리자1이 한심하다는 티가 팍팍 묻어 나오는 답변을 띄웠다.

    『연결 끊는 건 안 되겠죠. 닫는 것도 안 되고. (๑ᵕ⌓ᵕ̤)』

    “그래, 그러니까 내 권한은 못―”

    『그런데 입구 틀어막는 건 돼요. 그쪽은 저 게이트의 2순위 책임자라 제약을 걸 수가 있다니까요? (ノ・o・)ノ』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다다닥 띄우는 글자에 벙쪘다. 아니, 그러면 진작 말해 줬어야지.

    어떻게 제약을 거는지도 겸사겸사 알려 주고.

    『상태창 띄워서 설정에서 책임자 권한 - 게이트 관리 들어가요.』

    게이트 관리에 들어가자 #SF105-2 게이트 위치가 쫙 떴다. S급은 이거 하나였고 A급이 한 대여섯 개쯤 있었다.

    『#SF105-2 있죠. 거기에 일방적 배리어 제약 있을 거거든요. 外는 밖에서 안으로 진입하는 거 막는 거고, 內는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거 막는 거예요.』

    그러면 內 제약을 걸어야겠네.

    『‘게이트 일방적 배리어(內)’ 제약을 거시겠습니까? yes/no』

    망설임 없이 yes를 택하자 게이트에서 몰려나오던 마수들이 뚝 끊겼다. 밖으로 나온 마수들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건지, 아니면 명령을 들은 건지 다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저거 들어가게 하면 안 돼! 실더들, 게이트 앞쪽 막아!”

    실드로 게이트가 막히자 허둥지둥하던 마수들은 다시 헌터들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제 드디어 던전 브레이크가 끝났다는 희망이 생기고 S급이 두 명이나 더 투입되어 전력이 높아진 헌터들은 죽을힘을 다해 마수와 맞섰다.

    저게… 원래 저렇게 힘겹게 잡히는 마수들이었던가……. 분명히 마계 대전 때는 떼거리로 몰려와서 우리 체력 빼기용으로 발목 잡는 귀찮은 것들이었는데. 왜 여기에서는 최고 전력이 되고 있는 건데.

    김도빈, 주태윤, 서열1위포커스 등의 S급들의 활약도 활약이었지만 무기가 마수와 마족 잡는 데에 최적화된 성검이라서 그런지 천우현의 활약이 단연 눈에 돋보였다. 거의 원 샷, 원 킬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한 마리가 천우현의 성검에 베여 쓰러지고, 정선 S급 게이트는 평소와 같은 고요를 되찾았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자 쨍한 햇빛이 내 눈을 공격했다. 어두웠던 새벽하늘은 어디로 가고 맑은 아침 하늘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유난히 길었던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왔다. 세상에, 밤새워서 몬스터를 잡았다니. 꼬박 하루 가까이 몬스터 잡으러 뺑이 돌았다니. 다시 몬스터 웨이브가 터지면 또 이 짓을 해야 하다니.

    이건 미친 짓이다. 하루빨리 크라토스를 토스해야 한다. 일단 저기에 들어가서 진상부터 파악하고.

    “이채, 괜찮아?”

    멍하니 게이트를 보고 있다가 툭, 내 등을 찌르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현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무어라 말리기도 전에 힐이 몸을 감쌌다.

    “체력도 바닥이면서 힐을 왜 해.”

    볼을 긁적이며 타박하자 마석이 주렁주렁 달린 스태프가 내 머리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그럼 너는 여기가 어디라고 와.”

    “저기요, 저 이제 일반인이 아니라 A급이거든요? 남들이 들으면 과보호한다고 욕해.”

    투덜거리며 볼을 긁적이고 있으니 천우현이 성큼 걸어왔다.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 옆에 있는 아현이를 뒤늦게 발견한 그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쓰게 웃었다.

    “나중에 연락할게요, 채현 씨.”

    그리고 그가 몸을 돌리기도 전에 주태윤이 내게로 다가왔다. 잠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나를 사이에 둔 두 남자의 눈에서 불꽃이 튀…길 리는 없고 둘은 담백하게 인사를 나누고는 시선을 거뒀다. 그래, 나한테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천우현은 몰라도 주태윤 연애 플래그는 내 손으로 확실하게 뽑았다. 과거 이야기 안 들었잖아. 원래 아픈 과거 이야기랑 복잡한 가족사 들으면 엮이는 거 국룰이라고.

    백아현이 저를 노려보는 눈길을 애써 피한 채 주태윤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집 앞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아현이랑 같이 가려고요.”

    “나 순간 이동으로 협회 갈 거야. 그냥 주태윤이랑 가.”

    아현이가 손을 내저었다. 그때, 뒤에서 주태윤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일 보고 오세요.”

    안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대화 좀 하게. 내 말에 금방 오겠다고 샐쭉 눈을 휘어 웃은 주태윤이 몸을 돌렸다.

    “둘 다 절대 안 돼.”

    주태윤의 뒤통수를 뚫을 듯이 노려보던 아현이가 입을 열었다.

    “둘? 뭔 소리야?”

    “주태윤은 뭐, 말 안 해도 알 거고, 저기 랭킹 1위는 본인은 모르겠는데 여동생이 문제야. 사귀기만 해도 시누이 짓 제대로일걸?”

    “아현이는 우리 엄마예요? 그리고 김칫국 더 들이마시게 하지 말아 줄래?”

    난 이미 충분히 마셨단다. 쟤들은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플러팅이 몸에 밴 거 같다고. 마음 있으면 고백 진작 갈기고도 남았다니까?

    볼일을 마친 주태윤이 다시 내게로 걸어왔다. 동반 순간 이동은 상대와 접촉하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꾸준히 손을 내미는 이유를 모르겠다.

    에휴, 한번 잡아 주자. 손을 탁 올리니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당황한 기색으로 눈을 깜빡인 주태윤은 금세 평소의 능글맞음을 되찾고선 순간 이동을 실행했다.

    어느새 내 자취방이 있는 빌라 앞이었다. 현재 시각이 오전 8시니 집 떠난 지 거의 22시간 만에 돌아왔구나.

    수리하고 있는 옆 건물과 다르게 멀쩡한 빌라를 감동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주태윤이 불쑥 말을 꺼냈다.

    “제게 동복동생인지 사촌 동생인지가 있다고 하셨죠.”

    이번에 당황한 건 나였다.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고개를 끄덕일 생각조차 못 하고 주태윤을 올려다보자 그가 나지막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이름이 진세빈이고.”

    다른 사람들이 다 잊어도 형만은 나를 잊지 말라고 그렇게 저주하더니. 진세빈의 필사적인 마지막 속삭임을 떠올리고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설마, 기억해 내는 거 아니야?

    내가 여기서 취할 수 있는 행동 리스트를 뽑아 보자.

    1. 그쪽이 잘못 들은 것 같다고 우긴다

    2. 진세빈? 그게 누구죠?

    3. 기억 삭제

    4. 알긴 아는데 가르쳐 주긴 싫다 시전

    5. 그쪽이 기억해 내야 한다고 신비주의 조성

    역시 제일 무난한 건 5번인가. 목소리에 아련함 한 스푼을 담아 입을 열었다.

    “제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없어요. 주태윤 씨가 스스로 기억해 내지 않는 이상은.”

    어차피 기억 못 할걸. 세계에서 존재 기록 자체가 지워졌는데 어떻게 기억해. 만약 진짜 기억하면 찐사랑이지.

    내 대답에 주태윤은 복잡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기억이… 자꾸 낯선 기억이 보입니다. 분명 제게 사촌은 아버지 쪽 사촌들뿐인데…….”

    응, 굳이 나한테 말 안 해도 돼. 그냥 상담을 받아 보는 걸 추천 드림. 피곤함에 하품하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은 주태윤이 말했다.

    “제가 피곤하신 분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네요.”

    “그냥 기억하려 하지 마요. 좋을 거 없으니까.”

    충동적으로 뱉은 내 말에 주태윤이 멈칫했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금방이라도 나를 잡고 싶다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그는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작별 인사했다. 이런 점은 마음에 든다니까.

    자취방 문을 여니 텅 빈 실내가 나를 반겼다. 반듯하게 개켜져 있는 옷과 정돈된 책상은 누군가의 손길이 지나간 흔적을 여실히 남겼다.

    그제야 뒤늦게 애쉬가 어제 아침에 찾아왔던 일이 기억났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걸까.

    부를까 하다가 내 눈으로 진상을 확인한 후 부르기로 결심했다. 애쉬를 통해서만 정보를 얻는 건 위험했다.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마계가 아닌 이곳에 있는 이상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협회 헌터들이 혹여 던전 브레이크를 조사한다고 정선 S급 게이트 안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으니 제일 안전한 시간대인 새벽에 들어가 보기로 하고 옷가지를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하루를 꼬박 씻지도 못하고 굴렀으니까 일단 좀 씻자.

    * * *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새벽 2시. 진상 확인하러 갈 시간이었다.

    대충 입고 있던 잠옷 대용의 편한 옷 위에 과잠만 걸치고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채로 게이트 안으로 순간 이동했다.

    『S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라이트 스킬에 어두웠던 공간이 확 밝아졌다. 덤벼드는 7마계 마수들을 마기와 스킬로 휙휙 찢으며 안쪽으로 걸어가니 보스룸이 나왔다.

    보스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내 발치로 데구르르 굴러온 물체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알?”

    하나가 아니었다. 개구리 알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크기는 비교도 못 하게 더 큰 마수의 알들이 보스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탄의저격수가 돌아온 던전 보스룸의 알보다 더 많았다.

    알 하나가 투두둑, 터지며 새끼 마수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 새끼 마수는 나를 보자마자 덜 여문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들었다.

    순식간에 찢긴 새끼 마수의 잔해를 짓밟고 보스룸 중앙까지 들어왔다. 전에 연결을 끊기 위해 온 보스룸에 이런 건 없었지. 그렇다면 누군가가 가져다 놨다는 소리인데.

    그것도 7마계에서만 자라는 마수의 알을.

    『스킬 ‘로기의 화염(AAA)’을 실행합니다.』

    붉은 화염이 타올라 알들을 덮었다. 역겨운 탄내가 코를 찔러 왔다. 타들어 가는 알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마구 튀기는 불똥에 한 발짝 물러났다.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숨길 생각 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라, 세이블.”

    나는 지구로 돌아와 크라토스의 봉인을 풀고 세이블을 소환한 첫날과 똑같은 말을 다시 하고 있었다.

    그때 귀찮다고 넘어가지 말고 조금 더 파고들었어야 했을까. 그랬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7마계 잔당들이 1마계의 던전에 침입하고 7마계의 마수의 알이 이곳으로 넘어온 건지.”

    “모두 제 죄입니다. 저를 벌해 주십시오.”

    “그딴 식으로 얼레벌레 넘어갈 생각 하지 말고. 난 정확한 설명을 들어야겠어.”

    내 차가운 말에 앓는 소리를 낸 세이블이 답했다.

    “반군이 조직되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1마계가 아니라 오직 폐하입니다. 폐하께서 이곳에 있다는 정보가 흘러나갔고, 반군은 이곳으로 침입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걸 못 막았다고? 지금 나랑 장난해?”

    내 으르렁거림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세이블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폐하. 부디 무례와 불충을 용서하여 주시길.”

    느릿하게 말한 세이블은 예전, 그러니까 내가 마왕성에 입성하기 전의 말투로 내게 말했다.

    “아직 통일된 마계들이 안정되지도 않았는데 마왕은 부재중에 관리해야 할 던전까지 생겼다. 부재가 길어질수록 다른 마음을 먹는 놈들이 하나둘씩 생겨서 겨우 관심을 네가 있는 이곳으로 돌려놓았는데, 넌 또 이곳으로 넘어오는 걸 금지했지.”

    “그래서 내 잘못이라고? 내가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 너는 알잖아! 적어도 너는 내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세이블의 멱살을 잡고 악에 받친 소리를 내질렀다.

    다른 마족들이 다 나를 이해하지 못해도 적어도 너만은, 처음부터 내 옆에 있으면서 내가 얼마나 내 세계를 그리워했는지, 얼마나 아팠는지 다 보아 왔던 너만은 그러면 안 되지.

    “말 잘했군. 너도 그러면 안 되지. 네 세계가 아니라서 그렇게 마음껏 짓밟고 휘저어 놓고 뒷마무리는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네 세계로 돌아가 버린 거잖아. 내 말이 틀리나? 만약 마계가 네 세계라도 이랬을까?”

    “내가 왜 떠날 세계를 신경 써야 하는데?”

    “만약 네가 화가 난 게 네게 보고를 올리지 않아서가 아닌 7마계 잔당들이 이곳으로 침입해 네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기 위해 알을 심어 놨다는 거라면, 넌 화낼 이유가 없군. 왜 그놈들이 어차피 떠날 다른 세계를 신경 써야 하지?”

    할 말이 없어져 입술만 꽉 깨물었다. 나는 논리적인 말싸움에 약했다. 분명 꼬투리를 잡을 게 있을 텐데 언뜻 듣기로는 존나게 논리적으로 들려서 맞받아칠 말이 없었다.

    왜 왕들이 충신을 싫어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 따박따박 맞받아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내가 개쓰레기가 된 것 같거든.

    “내가 이래서 네가 싫어, 조선 관료들 님 도르신?의 마족화 같으니.”

    “나를 싫어해도 좋고 사형을 내려도 좋으니 그만 돌아와라. 시기가 너무 안 좋았어.”

    내가 대답이 없자 세이블이 재촉하듯 다시 말을 덧붙였다.

    “안정시키고 다시 넘어가면 되잖나. 50년 정도면 안정되고도 남을 것 같은데 그 50년을 못 참아?”

    “인간 평균 수명은 85년이야, 망할 자식아. 난 그 50년을 위해서 돌아온 거라고.”

    다시 이 시간대로 돌아올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다. 마신의 성정상 소원은 이제 끝이고 분명 대가를 요구하겠지. 예를 들면 천계 정복이라든가…….

    전쟁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그리고 이제 돌아가면 천우현도 없이 완전히 나 혼자잖아.

    “크라토스를 넘길 방법을 찾겠어. 그럼 나는 마왕이 아니게 되니 이제 마계와의 인연은 끝. 깔끔하지?”

    “너는 왜 편한 길이 앞에 있는데도 굳이 불가능을 이루려고 하는 거지? 마계에서 지내면 되고, 마계로 돌아가면 되는데 왜 굳이 전쟁을 일으키고 크라토스를 넘기는 방법을 찾겠다고 하냐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묻는 세이블을 향해 오만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편하지만 원치 않는 삶보단 힘들어도 내가 원하는 삶이 더 가치 있으니까.”

    날 설득하려면 일단 마계에 무선인터넷 깔고 와이파이부터 설치해라. 내 방에 벽난로 대신 히터 들여놓고.

    내 대답에 미간을 문지른 세이블이 대꾸했다.

    “찾으려면 빨리 찾는 게 좋을 거다. 현재 1마계의 정세는 바람 앞의 촛불이니.”

    한 발짝 물러나 준다는 그 대꾸에 픽 웃었다. 혹시 단서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지나가듯 안부 인사를 흘렸다.

    “애쉬는 잘 지내?”

    “잘 지낸다는 입에 발린 소리는 못 해 주겠고…….”

    입매를 매만진 세이블은 턱을 쓸어내리며 덧붙였다.

    “그 녀석이 해츨링이던 시절, 네가 그 녀석을 챙기는 동안 놈은 네 뒤에서 끊임없이 네 이용 가치를 재고 있었다는 것만 알아 둬라. 순수하고 의존적인 마족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걸.”

    생각보다 더 크리티컬한 대답이 돌아왔다. 자라면서 삐뚤어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순진한 얼굴을 하고 그랬단 말이야? 충격에 입을 떡 벌리자 다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세이블이 내게 물러남을 청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폐하.”

    『스킬 ‘소환(L)’을 해제합니다.』

    세이블을 역소환시키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통일해 놨지만 몇만 년을 나뉘어 있던 마계들이 순순히 통합될 리는 없었고, 그로 인해 주도국인 1마계에 혼란이 덮쳐 오고 있다, 이 말이지.

    아니, 내 알 바냐고. 애초에 무슨 사명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마신 심장 강탈이 목적이었잖아.

    안드라스 놈의 생각도 얼추 알겠다. 내가 있는 이 세계가 혼란스러워지면 다시 마계로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겠지. 내가 지구로 휴양하러 갔다고 생각하는 놈이니.

    빨리 크라토스 넘기고 차기 마왕에게 크라토스 넘겨주는 대가로 차원 연결이나 끊으라고 해야지.

    던전 한 바퀴를 쭉 돌았지만 내가 불태운 마수 알 말고는 딱히 수상한 점은 없었다.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와 과잠을 바닥에 휙 던지고 침대에 누워 알림이 가득 쌓인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문자 한 통에 벌떡 일어났다.

    “내일 오전 11시에 재시험이라고? 온라인으로?”

    이런 미친, 나는 일주일 후에나 재시험 볼 줄 알았지. 지금 자면 100% 오후 2시 기상이었을 텐데, 문자 확인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 교수님은 왜 쓸데없이 부지런하셔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알람을 맞춰 놓고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세팅해 놓은 후 필기 노트를 꺼내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역시 몬스터가 학교 건물을 더 박살 내게 내버려 둬야 했어.

    * * *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 9시가 되어서야 부상자가 있으니 시험은 원래 시험 날짜에서 일주일 후로 미룬다는 웹 발신 단체 문자가 도착했다.

    다른 한 과목도 자동으로 미뤄졌다. 다른 대학들은 큰 피해가 없었는데 유독 한국대만 많이 박살 났다고 들었다. 전에 뉴스 댓글에서 본 것처럼 진짜 대학 터가 안 좋은 거 아니야?

    의자에 밤새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니 우드득, 뼈 어긋나는 소리가 울렸다.

    “변명은 충분히 생각해 뒀을 시간이니 굳이 듣고 싶지는 않네. 어차피 다 내 눈과 귀를 가릴 사탕발림일 터인데 들어 봤자 시간 낭비지.”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 이에게 말하니 침묵만이 되돌아왔다.

    “돌아가. 이곳으로 넘어오든 말든 네 자유지만, 나는 이제 너 신경 안 쓰련다.”

    “…말하려고 했어요.”

    애쉬가 입을 열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그런데 내가 듣지 않았다고? 내가 하는 말은 왜 일이 일어난 직후에 바로 보고하지 않았냐는 뜻이란다, 애쉬.”

    애쉬가 다시 침묵했다. 제일 최측근이 이 모양인 터라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솔직히 마계가 어떻게 되든 상관은 없어. 그래서 네가 의도적으로 내게 정보를 숨기는 걸 알고 있음에도 내버려 둔 거고.”

    미간을 문지르며 몸을 돌려 애쉬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내 세계가 엉망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머리 다섯 개가 자취방 바닥에 뒹굴었다. 내 발치까지 굴러온 머리를 보다가 애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반항하냐?

    “확실한 주범을 잡기 전까지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 판단했다고 한다면 늦은 거겠죠.”

    애쉬가 눈을 내리깔며 속삭였다. 머리가 한층 더 지끈거렸다.

    “그러니까 그 판단을 왜 네가 하느냐고.”

    “폐하는 마계에 없잖아요. 제가 이러는 게 싫으세요? 그럼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돼요.”

    “협박이야?”

    “아니요, 애원이에요.”

    노을빛 눈동자가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나 나나 참 똑같이 이기적이다. 서로의 행복보다는 자기의 행복이 우선이잖아. 하필 닮아도 이런 걸 닮냐. 우스운 상황에 쓰게 웃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끊은 것은 책상에 올려놨던 휴대폰의 진동 벨 소리였다.

    ✆천세연

    또 근 시일에 무슨 사건이 터지길래 회귀자가 친히 전화를 주셨을까. 심드렁한 손길로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 채현 언니, 저희 오빠 좀 살려 주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울먹임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 놀라 다급히 물었다.

    “뭐? 무슨 일인데?”

    - 오빠가, 오빠가아… 열이 40도가 가까운데도 병원을 안 간대요. 급한 대로 힐이라도 했는데 제 힐도 안 들어요.

    그러다 열 40도 넘으면 사람 죽는 거 아니야? 물론 마계에서 회귀 30번 넘게 하면서 굴렀으면 그 정도쯤은 근성으로 이겨 낼…….

    - 무슨 일인진 모르겠는데 자꾸 자기 탓이래요, 흑. 이러다가 오빠 또 죽으려 하면 어떡해요? 전에도 수면제 먹고 자살 시도까지, 흐읍, 했단 말이에요.

    서러운 울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자살 시도라는 말에 방금 하던 생각을 때려치웠다. 근성은 무슨, 비상이다.

    - 전에도 언니가 오빠 정신 차리게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제발 와서 오빠 정신 좀 차리게 해 주세요, 흐윽.

    아니, 그렇게 아끼는 동생 말도 안 듣는다는데 내가 가 봤자 달라지는 게 있어?

    하지만 한참을 이어지는 흐느낌에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울지 말고 일단 문자로 주소 보내 봐, 바로 갈 테니까.”

    - 크흥, 네에…….

    코를 훌쩍이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대충 손에 잡히는 옷을 꺼내 침대에 휙휙 던지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애쉬가 중얼거렸다.

    “가지 마요.”

    대답 없이 욕실로 향하자 애쉬가 내 바짓단을 움켜잡았다.

    “가지 마요, 폐하.”

    지금 사람이 죽네 마네 하고 있는데, 가지 말라고 하면 퍽이나 안 가겠다. 놓으라는 뜻으로 다리를 털자 애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물었다.

    “왜 저는 폐하가 1순위인데 폐하께 저는 항상 뒷순위죠?”

    “그럼 너도 1순위를 만들어. 그러면 되잖아.”

    솔로몬급의 답변을 던져 주고 욕실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어릴 때 애착 관계 형성이 잘못됐나 봐. 저건 전형적인 불안-몰입 애착 유형의 모습이잖아.

    내가 그렇다고 쟤를 상담에 끌고 갈 수도 없고. 마계는 그냥 나사 하나 빠진 놈들 집합소라 도움은커녕 정병 심화만 안 되면 다행이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욕실에서 나오자 애쉬는 다시 마계로 돌아갔는지 다섯 개의 머리와 함께 사라져 있었다.

    문자로 도착한 주소를 지도 앱에 찍어 좌표를 도출해 내고 약간의 수식 계산을 마친 후 곧바로 순간 이동을 실행했다.

    현관 앞에 서서 서성이다가 갑자기 나타난 내 모습에 천세연이 흠칫했다. 내 자취방보다 살짝 더 넓은 집은 오래된 티가 여실히 났다.

    눈가와 코끝이 붉게 물든 천세연이 나를 천우현의 방으로 안내했다. 열에 달뜬 채로 침대에 누워 있는 천우현이 눈에 들어왔다.

    “세연아, 열 옮으니까 들어오지 말랬…….”

    나를 발견한 천우현이 말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옆에 서 있는 천세연을 툭툭, 쳤다.

    “이야기 좀 하게 잠깐 나가 있을래? 너희 오빠 안 죽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 말에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인 천세연이 방문을 닫았다. 방에는 오직 나와 천우현만이 남았다.

    방음 스킬을 치고는 의자를 끌어당겨 침대 옆에 앉았다. 천우현이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그 말 때문이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우현이 자살 시도까지 하면서 자기 탓이라고 끙끙 앓을 만한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귀환자들이 게이트 사태의 원인이라는 말.”

    내 말에 정곡을 찔린 듯 그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리고 마신이 말한, 카르마가 온전히 나한테로 옮겨져서 세계가 버틸 수 있는 정도를 넘었다는 말.”

    천우현은 그 말에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음, 그렇다면 나를 원망하지는 않는 모양이군.

    “돌아온 걸 후회해요?”

    내 물음에 다시 그가 고개를 저었다. X발, 그러면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후회하지 않기에 스스로에게 더욱 실망했죠.”

    열에 들떠 느릿하고 버석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내가 화살을 나를 이세계로 떨어뜨린 내 세계 탓, 카르마를 내게 기어이 얹은 진세빈 탓으로 돌린 것과 정반대로 천우현은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다.

    이런 면까지 나는 마왕 같았고 천우현은 용사 같았다. 그 세계의 신도 역할 한번 기가 막히게 잘 맡겼네.

    진세빈 존재만 안 지워졌다면 진세빈 실컷 원망하라고 했을 텐데. 하여간 끝까지 도움 안 되는 자식.

    “원망하려면 차라리 저를 원망해요. 자기 자신 원망하지 말고. 카르마를 쌓은 사람도 나고, 심장을 모아서 이 세계로 돌아올 길을 만든 사람도 나잖아요.”

    물론 원망하면 손절임. 내 말에 그가 열이 올라 숨을 헐떡이면서도 힘겹게 말을 늘어놓았다.

    “관리자였던가, 그 존재와 대화한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이 세계를 짓누르는 카르마에 많은 몫을 공헌했다더군요.”

    천신의 축복. 그리고 회귀. 살상.

    나와 같이 세계에 영향을 미칠 카르마를 쌓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그리고 제가 채현 씨를 어떻게 원망하겠어요.”

    저기요, 희생캐처럼 아련하게 웃지 말아 주실? 바스러질 듯이 미소 지으며 나를 보는 천우현의 모습은 절벽 끝자락에 선 것처럼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X나 울고 싶다. 난 남 위로에는 X도 소질이 없단 말이다. 방에 들어오기 전에 천세연에게 천우현 MBTI나 물어볼걸. T인지, F인지 알았으면 MBTI 맞춤 위로라도 건넸을 텐데.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볼을 긁적이다가 진심 반 농담 반인 제안을 던졌다.

    “그러면 같이 마계 돌아갈래요? 뭐, 우리 둘이 수명 차이는 있겠지만 같이 있으면 마음은 편하겠네.”

    수명이야 어떻게든 늘릴 방법을 찾으면 되는 거고. 내 제안에 당황했는지 천우현이 눈을 깜빡였다.

    “우리에게 길은 두 가지밖에 없어요. 여기에서 죄책감 느끼면서 살든가,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든가.”

    아니면 죽든가. 음, 죽는 것까지 하면 세 가지구나.

    위로에는 소질이 없지만 현실 직시하게 하는 것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해 줄 수 있었다. 내 말에 천우현이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무엇을 선택하든 지옥이네요.”

    “그래도 다시 돌아가는 것보단 낫지 않나……?”

    도덕 정신이 참 투철하시네. 그냥 우리를 타 세계로 떨궜던 이 세계 탓으로 돌리면 편할 건데. 그 개고생을 하게 만들었는데 당연히 우리를 감당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 혼잣말에 그게 참 어렵다며 천우현이 마른세수하며 중얼거렸다.

    “자살 시도는 왜 했어요?”

    “…자살 시도라뇨?”

    “세연이가 그러던데요. 수면제 먹고 자살 시도했다고.”

    “제가 병원에 안 간다고 고집부린 탓에 세연이가 악몽이라도 꾼 모양이네요.”

    그러기에는 저 수면제 통이 너무 눈에 잘 들어오는데? 내 눈길이 닿은 곳으로 고개를 돌린 천우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이제 막 받아 온 거예요. 요즘 잠이 안 와서…….”

    내 눈에 비치는 불신의 빛에 천우현이 한층 단호하게 말했다.

    “적어도 세연이 앞에서 자살할 마음은 없어요.”

    그러니까 천세연이 말한 자살 시도를 회귀 전으로 본다면 그 루트였구먼? ‘잠을 도저히 못 자겠어서 수면제를 한꺼번에 먹은 거야. 자살할 생각은 아니었어.’ 이 루트.

    천우현의 눈꺼풀이 내려앉으며 긴 속눈썹이 나부꼈다. 아픈 사람 너무 무리시켰나.

    이마에 손바닥을 얹었다. 데일 듯이 뜨거운 열이 손에 닿아 왔다.

    『스킬 ‘치유(C)’를 실행합니다.』

    힐 먹히네. 한결 고른 숨소리와 서서히 내리는 열에 안도했다.

    천세연이 아마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힐을 못 걸었거나, S급인 천우현의 몸을 치유하기에 마력이 부족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어느 지옥이든 함께 떨어지면 외롭지는 않겠네.”

    곱슬거리는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 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른하게 반쯤 뜨인 눈과 시선이 마주했다.

    이 말 한마디로 당신의 마음의 짐이 덜어질 수 있다면 내게로 죄를 돌리는 것쯤이야.

    “그냥 이거 하나만 기억해요. 당신보다 내 원죄가 더 크다는 것.”

    이불 위를 다독이는 규칙적인 손길에 천우현은 결국 스르륵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색색거리는 고른 숨소리가 방에 울렸다.

    방음 스킬을 거두고 방문을 열고 나오니 천세연이 후다닥 달려왔다.

    “오빠는요? 저희 오빠 괜찮아요?”

    “열은 얼추 내렸는데 혹시 다시 열 오르면 해열제 먹여. 집에 해열제 있지?”

    “네, 그런데 열이 내렸다고요? 언니 힐도 가능해요?”

    왜 갑자기 거리가 훅 가까워진 거야. 경계하든 싹싹하든, 하나만 해.

    부담스럽다는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 나온 건지 자기가 더 흠칫한 천세연은 제가 좁혀 놓은 거리를 뒤늦게 자각하고 뒤로 물러났다.

    “내가 네 오빠 멘탈 붙들어 줬으니까 그 대가로 하나만 물어보자. 내가 저번 회차에서 무슨 짓을 했기에 그렇게 나를 경계하는 건데?”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던 천세연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바짝 벽에 붙어 경계심 심한 고양이처럼 나를 노려보던 천세연이 질문을 쏟아 냈다.

    “어떻게 알았어요? 누가 말해 준 건데요? 우리 오빠? 아니면 협회장?”

    “내 감.”

    연기 더럽게 못 하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회귀자인 거 티 안 내고 싶었으면 앞에서 대놓고 경계하기보다는 무난하게 대했어야지.

    하, 헛웃음을 터트린 천세연이 느릿하게 말했다.

    “무슨 짓을 했냐고요? 오빠를 죽이고 세계를 멸망시켰죠.”

    “뭐라고?”

    내가 잘못 들었나. 귀를 후비자 천세연이 참으로 친절하게도 또박또박 다시 말해 주었다.

    “다시 말해 드려요? 그쪽이 제 오빠를 죽이고 세계를 멸망시켰다고요.”

    X발, 내가 세운 가설이 진짜였다고?

    ‘설마…….’

    내가 던전 브레이크 원인이라서 세계가 망했다는 말을 내가 직접 세계를 멸망시킨 거로 알아들은 거 아니야?

    “내가 세계 멸망시키는 거 네 눈으로 확실히 봤어?”

    “네.”

    그렇다면 이야기가 좀 쉬워지지.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잘됐네. 그럼 기억 좀 읽어도 돼?”

    “아니요.”

    세계 멸망하게 내버려 두기는 싫고 그렇다고 내가 기억 읽게 해 주기도 싫고, 뭐 어쩌라는 거냐.

    “전 아직 언니 못 믿어요.”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대화 좀 할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세계를 멸망시키고 네 오빠를 죽일 이유가 없거든?”

    “나중에, 제가 확신이 생기면 말해 드릴게요. 오늘은 이만 가 주세요. 오빠 일은 감사했습니다.”

    대화를 딱 끊는 정중한 축객령에 한숨을 내쉬며 저장된 자취방 좌표를 터치했다. 자취방이 유독 서늘했다.

    내가 사흘째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했다는 것을 자각하자 뒤늦게 허기가 몰려왔다. 냉장고를 열어 보아도 먹을 것은 없었다.

    편의점 음식도 슬슬 질리는데. 밀키트나 배송받을까? 그대로 현관에 놓인 외출용 슬리퍼에 발을 꿰고 현관문을 열었다.

    어라, 지금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 아닌가? 왜 이재의가 보이지? 오늘 주말 아닌데?

    “야, 주태윤, 좀 진정해 봐! 너 그러다가 진짜 진상 스토커로 찍힌다고!”

    헛구역질하며 이재의에게 안기다시피 부축받고 있는 주태윤을 발견하고 눈을 깜빡였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나와 눈이 마주친 주태윤이 저를 부축한 이재의의 손을 뿌리치고는 비틀거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엉망이었다.

    “채현 씨도 기억하죠?”

    다급하고도 간절한 물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말은 목적어 붙여서 똑바로 해야지 알아듣지.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주태윤이 증오를 담은 이름 하나를 꺼냈다.

    “진세빈, 그 개자식…….”

    “죄송합니다, 이채현 씨. 이 녀석이 몇 시간 전부터 계속 진세빈이라는 사람만 찾아 대서요. 야, 정신 차리고 당장 나 다시 관리국으로 돌려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재의를 순간 이동시킨 주태윤이 쓰러지듯 내게 기댔다.

    “세상이 미친 건지, 아니면 제가 미친 건지… 어떻게 그 자식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싹 지워질 수가 있는 겁니까?”

    “그, 설명하기가 좀 복잡한데.”

    대꾸하면서도 어질어질했다. 그렇게 잊지 말라고 세뇌를 시키더니 결국은 소원을 이뤘구나, 진세빈.

    하긴, 완전히 잊히기에는 주태윤에게 진세빈의 존재가 컸지. 친구 뺏고 여친 뺏고 가족들이랑 갈라놓고 아주 별 지랄을 다 했던 거 같은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낮부터 빌라 앞에서 껴안고 있는 우리를 힐긋거렸다. 물론 껴안은 게 아니라 주태윤이 일방적으로 내게 기댄 거지만.

    밖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 일단 내 자취방 안으로 주태윤을 부축해 데리고 들어왔다. 정신 좀 차리라고 찬물이 담긴 컵을 앞에 놓으며 물었다.

    “기억은 언제 돌아온 거예요?”

    “그전부터 기시감을 느낄 때마다 파편처럼 조금씩 기억나긴 했습니다. 꿈에서 짧게 나올 때도 있었고.”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주태윤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휴지를 건네자 그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쓱 닦았다.

    “그리고 완전히 기억이 돌아온 건 몇 시간 전이고요.”

    이틀 전에 괜히 내게 진세빈에 관해 물어봤던 게 아니군. 일종의 사념(死念)인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다가 고개를 들었다.

    “궁금한 거 물어봐요. 아는 선에서 최대한 답해 줄 테니까.”

    “채현 씨는 그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겁니까? 아무도, 제 어머니마저 기억하지 못하고 심지어 행정 기록까지 사라졌는데.”

    처음부터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면 어떡하냐…….

    “그건 저도 모르죠.”

    아마 그 인간의 카르마를 넘겨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만 할 뿐.

    “그러면 어째서 진세빈의 존재가 지워진 거죠?”

    “주태윤 씨를 죽이기 위한 일념 하나로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걸었다나 뭐라나……. 카르마를 전부 제게 떠넘기고 소멸한 덕분에 일이 귀찮아졌죠. 이 던전 브레이크랑 몬스터 웨이브가 다 댁 동복동생 작품이에요.”

    그렇게 끝까지 쓰레기였으니까 그냥 깔끔하게 기억을 털어 버리라는 나름의 위로였는데 주태윤은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세계가 이렇게 된 게 모두 제 탓이군요.”

    대체 어디까지 점프한 겨? 대체 내 말의 어디에서 님 탓이라는 소리를 도출해 낼 수 있지? 왜 천우현이나 주태윤이나 자기 탓을 못 해서 안달이냐고.

    적어도 우리 애쉬는 버리고 간 내 탓이라고 떠넘기기라도 했어.

    “저를 죽이기 위해서 돌아왔다 했으니, 만약 제가 없었으면, 아니, 진세빈이랑 부딪히지만 않았으면―”

    “돌아왔겠죠. 세계 X돼 보라고. 아마 당신 죽이려고 계획할 시간에 귀환자들 죽이고 다녔을걸?”

    땅굴 파고 들어가려고 하는 주태윤을 강제로 끌어올렸다. 왜 다들 이렇게 멘탈이 약해?

    관자놀이를 문지른 주태윤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세계를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이전 상태로 되돌릴 수 있습니까?”

    “아마 제가 죽거나 진세빈처럼 존재가 지워지면 가능하겠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죠.”

    나 죽이기라도 하게? 다시 세계가 버틸 수 있을 수준의 카르마로 돌아가는 방법은 내가 인간의 손에 죽거나 마계로 떠나는 것, 이 두 가지였다. 물론 나를 죽인 인간 역시 카르마에 짓눌려 죽겠지만.

    “진세빈 기억, 잊고 싶어요?”

    내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주태윤이 나를 바라보았다.

    “방법이 있습니까?”

    언제나 오만하던, 자기 잘난 맛에 살던 남자가 무너지는 모습은 생각만큼 유쾌하진 않았다. 소멸했음에도 주태윤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진세빈은 어떻게 보자면 참 난놈이었다.

    “기억 삭제.”

    물론 완벽하진 않을 것이다. 세계 단위로 존재가 지워졌음에도 기억해 냈으니 내 기억 삭제 스킬은 언제든지 진세빈의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키겠지.

    “하지만 언제든지 다시 떠오를 수는 있어요.”

    그 말에 한참을 말없이 고민에 빠져 있던 주태윤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그냥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뭐, 나름의 속죄라고 생각하죠.”

    습관처럼 짓는 능글맞은 미소에는 평소보다 힘이 없었다. 저 대사는 나중에 닥쳐올 위기 상황 사망 플래그인데. 희생캐 되려고 작정했냐? 이 인간, 은근 비극 플래그 잘 꽂는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채현 씨는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진세빈 그 자식 때문에 던전 브레이크의…….”

    원인이 되어 버린 거? 주태윤은 말끝을 흐렸지만 뒷문장이 쉬이 짐작 갔다.

    “내가 원인인가. 진세빈 그 새끼가 원인이지.”

    한 일은 그저 뚝 떨어진 다른 차원에서 돌아온 것밖에 없는 내가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지? 물론 내가 돌아옴으로써 게이트 사태가 터지긴 했지만, 애초에 타 차원에 안 떨어지게 하면 된 거였고요?

    “그러니까 그쪽도 너무 죄책감 가지지 말라고요.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을 테니까.”

    주태윤에게 위로를 건네며 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되뇌었다.

    그래,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고. 내가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잖아.

    * * *

    “이곳이 마왕이 넘어간 세계란 말이지.”

    던전 안에 환희에 찬 목소리가 울렸다.

    “괜히 눈에 띄는 짓 하지 마라. 그 배신자 놈을 어떻게 믿나?”

    “믿지 않으면 어쩔 건데? 어차피 마왕이 죽으면 그놈 역시 우리의 손에 죽을 텐데 말이야.”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에 저 멀리서 흐릿하게 들려오는 발소리와 웅성거림이 섞여 들었다.

    “이런, 불청객들이 오셨네.”

    “우리가 기다리던 손님일 수도 있지.”

    서로를 마주 본 두 마족이 악의적인 미소를 걸치며 게이트 쪽으로 걸어갔다. 게이트 앞에 한 무리의 헌터가 몰려 있었다.

    “S급 게이트……? 미친, 나가, 나가야……!”

    다급히 외치며 몸을 돌리던 헌터는 스킬을 써 보기도 전에 목이 꺾여 절명했다. 시체의 얼굴을 확인한 마족의 얼굴에 실망이 감돌았다.

    흑발에 흑안. 계속해서 들어왔던 마왕의 특징이었지만…….

    “에이, 남자잖아.”

    “죄다 흑발에 흑안이군. 아무래도 색채로 찾는 건 무리겠는데.”

    어느새 바닥에 늘어진 시체를 보며 다른 7마계 마족이 투덜거렸다. 피 냄새를 맡고 다가온 마수들이 시체를 먹어 치웠다.

    “뭐, 그놈이 말했잖아. 최대한 날뛰면 마왕이 알아서 우리를 찾아올 거라고.”

    붉은 눈이 희열로 빛났다. 씨익 웃자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제 발로 무덤에 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그 말대로 마음껏 날뛰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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