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Q: 꿈에 자꾸 죽은 선임이 나오는데 무슨 뜻이죠? A: 굿하라는 뜻입니다 (21/33)

21. Q: 꿈에 자꾸 죽은 선임이 나오는데 무슨 뜻이죠? A: 굿하라는 뜻입니다

“고민 하나 덜었네.”

화학과 졸업논문 hwp 파일을 열어 주희 선배에게 하사받은 주제를 타이핑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드디어 학번이랑 학과만 적어 놨던 졸업논문 파일에 무언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좋아,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니 주제를 정한 것만으로도 나는 벌써 반을 한 거야. 그럼 반이나 했으니 이제 좀 쉬어 볼까.

노트북을 탁 닫고 침대에 드러누우니 페리가 내 배 위로 훌쩍 올라왔다.

“컥! 페리… 네 무게를 생각하지 않을래……? 이 폐하 갈비뼈 박살 나겠다.”

“냐앍.”

태평하게 한 번 운 페리는 내 배 위에서 그루밍을 시작했다. 마왕을 방석으로 쓰다니, 많이 컸네, 우리 페리.

페리의 등을 쓰다듬다가 고개만 쓱 돌려 아직 덜 읽은 마계의 고서 더미를 바라보았다. 크라토스가 언급된 고서는 방대했지만 정작 그 안에 핵심 내용은 담겨 있지 않았다.

역대 마왕들의 힘을 담은 제2의 심장이자 마왕에서 마왕으로만 넘겨지는 계승권. 1마계에 주어진 마신의 축복.

그래.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이걸 어떻게 넘기냐고. 왜 그 방법이 적혀 있는 책이 단 한 권도 없냐고.

“페리, 전에 아이루스의 심장 이야기 찾았을 때처럼 한번 크라토스 책 좀 찾아볼래?”

페리를 덥석 안아 들어 책 더미가 있는 쪽으로 데려갔다. 전에도 페리 덕분에 집에 돌아왔으니까 이번에도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페리가 종종걸음으로 책 더미에 다가갔다. 하지만 페리가 앞발로 책을 짚는 것보다 누군가가 페리를 가볍게 들어 올리는 것이 한 발 더 빨랐다.

페리와 눈을 맞춘 애쉬가 음울하게 웃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걸? 네 행동이 불러온 결과를 벌써 잊었어?”

애쉬의 말에 페리가 축 처진 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너 지금 내 앞에서 일등 공신 구박하니?

“왜 그래? 페리 덕분에 7마계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뤘는데.”

“이 망할 고양이 때문에 폐하께서 마계를 떠나셨죠.”

애쉬가 페리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그 말에 페리가 애쉬를 향해 하악질을 했다. 너희 한때는 사이좋았잖아. 왜 나랑 다시 만나니까 다시 개와 고양이가 된 건데.

“페리가 없었어도 떠났을 거니까 애꿎은 페리 잡지 말고 마계 일 보고나 해 봐.”

손을 까딱하자 내 옆으로 다가온 애쉬가 진지하게 목소리를 내리깔고 속삭였다.

“체이스터가 수상해요, 폐하.”

“그래, 세이블도 수상하고 안드라스도 수상하고 아스타로드도 수상하고, 아주 내 최측근들은 다 수상하다고 하지 그러니.”

이제는 타깃이 안드라스에서 체이스터로 옮겨졌냐? 혀를 차며 타박하자 애쉬가 한껏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직접 불러서 물어보지, 뭐.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금발 적안 미청년이 내 자취방 한가운데에 뿅, 나타났다.

손에 쥔 컵케이크를 우물거리고 있던 체이스터가 멀뚱한 표정으로 내 자취방을 둘러보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컵케이크를 바닥에 내던지고 달려왔다.

“폐하아아! 제가 엄청난 걸 봤어요! 계속 안 불러 주실까 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기막힌 타이밍에 불러 주시다니!”

저런 해맑은 놈이 수상하다고? 불러도 지레 찔린다는 기색 하나 없이 건수 하나 잡았다고 원반 물고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달려오는 저 녀석이?

“애쉬 님이랑 아스타로드 님이…….”

“압존법, 압존법, 인마! 전에도 그냥 넘어갔더니. 애쉬랑 아스타로드가 나보다 위냐?”

“죄송함다, 애쉬랑 아스타로드가…….”

우렁차게 말하던 체이스터는 곧 제 눈에 들어오는 은발에 숨을 헙, 들이켰다.

“내가 뭐?”

애쉬의 나른한 물음에 털을 잔뜩 곤두세운 고양이처럼 경계하며 체이스터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애쉬가 쥐를 쫓는 고양이처럼 심술궂게 미소 지으며 체이스터를 좇았다.

마법진이 있는 벽에 체이스터의 등이 턱 닿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진 체이스터가 어금니를 악물며 날 선 눈빛으로 애쉬를 올려다보았다.

“폐하하고만 있을 때 말할 건데요.”

“아니야, 내 앞에서 말해 봐. 그래야지 체이스터 네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 내가 폐하 앞에서 똑똑히 해명하지.”

손으로 벽을 짚은 애쉬가 체이스터를 내려다보며 오만한 명령조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막 폐하께 네가 수상하다고 말씀드린 참이었거든. 마침 잘됐네. 서로 사이좋게 오해나 풀어 볼까?”

두 녀석이 취하고 있는 자세는 일명 벽쿵 자세였다. 너희들, 내 앞에서 지금 뭐 하니……? 내 허리춤에나 겨우 오던 녀석들이 벌써 저렇게 커서 벽쿵이나 하고 있다니.

“애쉬, 애 그만 잡고 이리 와라.”

내 말에 애쉬가 혀를 차며 체이스터를 향해 기울였던 상체를 바로 했다. 체이스터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와 내 발치에 던진 애쉬가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아스타로드 이야기는 일단 뒤로 미뤄 두고, 애쉬가 뭘 하는 걸 봤는데?”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7마계 잔당들을 몰래 풀어 줬습니다! 제가 똑똑히 봤어요!”

고개를 벌떡 치켜든 체이스터가 씩씩거리며 애쉬를 손가락질했다. 애쉬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여유로운 태도로 어깨를 으쓱했다.

어째서 체이스터가 애쉬를 오해했는지 깨달았다. 작전을 알고 있는 건 중앙에서는 세이블, 애쉬, 안드라스, 이 셋뿐이었으니.

“그건 내가 시킨 거니 문제없다, 체이스터.”

“맞아요, 폐하가 시킨… 네?”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맞장구치다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체이스터가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내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까딱하자 체이스터가 다급히 물었다.

“그러면 아스타로드도 폐하가 시킨 거예요?”

“걔는 왜? 걔는 뭐 했는데?”

“7마계 잔당들과 접촉하던데요?”

애쉬는 내가 시켜서 7마계 잔당 놈들 풀어 줬다 쳐. 그런데 아스타로드 그 자식은 왜 7마계 잔당들이랑 접촉해? 마계 대전 당시 나와 함께 전쟁터를 누빈 녀석이어서 충성도는 확실하다고 생각했는데.

혼란스러워하는 내 얼굴을 본 애쉬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곧바로 내게 속살거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안드라스와 아스타로드가 단둘이 서로 만나는 일이 부쩍 늘었던데……. 그렇지 않나, 체이스터?”

저를 향한 애쉬의 물음에 경계를 많이 누그러뜨린 체이스터가 대꾸했다.

“제가 중앙을 잘 안 가서 모르겠는데요.”

“그러면서 용케 내가 7마계 잔당들을 풀어 주는 장면은 봤군?”

“그러게 누가 그렇게 수상하게 열어 주랍니까? 누가 봐도 탈옥시켜 주는 배신자 모습이던데.”

“너같이 몰래 지켜본 놈들 속으라고. 너처럼 폐하께 호들갑 떨면 이쪽 편인 거고, 내게 접근하면 배신자라는 뜻이잖나.”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체이스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체이스터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일단 아스타로드는 내가 나중에 따로 문책할 테니 티 내지 말고 감시하도록.”

“네에? 폐하, 그러다가 아스타로드가 막 기밀까지 유출하고 그러면 어떡해요. 빨리 족쳐야져!”

“족쳐……. 그 말버릇은 대체 누구한테 배웠냐?”

이마를 짚으며 묻자 체이스터가 해맑게 답했다.

“폐하께서 마계 대전 당시에 매일 달고 다니시던 말이잖아요. 7마계 마왕 새끼 족쳐야 한다고.”

내 죄가 깊다……. 이래서 애 앞에서는 말조심하라 했던 거구나.

“그래, 일단 네가 내던졌던 컵케이크부터 치우자. 내가 분명 바닥에 음식을 집어 던지는 버릇은 고치라고 했을 텐데?”

머리를 긁적이며 한 입 베어 문 자국이 선명한 컵케이크를 주운 체이스터가 내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질문했다.

“폐하, 저번에 먹었던 마카롱은 없…….”

“먹고 싶으면 네가 삼고초려 해서 사 오라고 했다.”

“삼고초려가 뭐예여?”

“두 번 헛걸음 해서 세 번째 방문에 사 오라고.”

『스킬 ‘소환(L)’을 해제합니다.』

입을 비죽이는 체이스터를 역소환시켜 다시 마계로 보내고 여전히 내 발치에 무릎 꿇고 있는 애쉬를 일으켜 세웠다.

“그래서 네게 접근한 놈들은 있고?”

“아직은요. 추적 마법도 걸어 놨으니 반군의 근거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내 손을 잡고 들어 올린 애쉬가 정중히 내 손등에 입 맞췄다. 피부에 닿는 입술은 뜨거웠다. 속눈썹에 반쯤 가려져 나른히 잠긴 노을빛 적안이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폐하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모든 걸 치워 드릴게요.”

“그러니까 버리지 말아 달라고?”

“잘 아시네요.”

애쉬가 눈을 휘어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너 역시 내 대답을 잘 알고 있겠지. 우리가 함께했던 50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니.

침대에 눕자 익숙하게 품을 파고 들어오는 애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쓰게 웃었다.

알잖냐, 애쉬. 우리 관계는 내가 너를 버렸을 때부터 결코 이전과 같아질 수가 없다는 걸.

* * *

이 악몽도 오랜만이네. 빛 한 점 없이 어두운 경계의 숲을 둘러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의식적으로 내려다본 옷차림은 언제나 이 악몽에서 입고 있던 옷과 똑같았다.

흰 티와 청바지. 내가 이 빌어먹을 차원에 떨어졌을 당시 입고 있었던 옷. 누군가의 피로 물들어 있는…….

“…크윽.”

내 옷을 더럽혔던 장본인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밑에서 들려왔다. 시선을 내려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검붉은 적안과 마주했다.

이 남자는 또 내 심장께에 손톱을 찔러 넣고 크라토스를 넘길 거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를 올려다보며 즐겁다는 듯 웃으며 내게 빈정거림이 섞인 인사를 던질 것이다.

그리고 멋대로 죽어 버리겠지. 내게 거대하고 무거운 운명을 제 마음대로 얹어 줘 놓고.

크라토스를 넘겨받으면 난 인간의 몸으로 마왕이 되어 제국 입성은 물론이요, 인간들 틈에도 섞이지 못하고 나를 죽이려는 마족들에게 맞서 끊임없이 마계에서 구를 거다.

하지만 크라토스를 받지 못할 경우 운이 나쁘면 경계의 숲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마족이나 마수에 의해 죽겠지.

꿈에서의 난 그때와는 달리 선택의 결정권이 있었지만 언제나 과거와 똑같이 크라토스를 넘겨받는 걸 택했다. 그리하여 언제나 내 악몽은 과거의 재현이었다.

오늘도 분명 똑같이 흘러가리라. 난 전대에게 멱살을 잡히고 크라토스를 넘겨받고 빈정거림을 들으며 고통과 괴로움에 뒹굴다가 내 옆의 그 생기 없이 텅 빈 눈동자를 마주하고 꿈에서 깨겠지.

역시나 멱살이 잡혔다. 마계에서의 첫 순간이 다시 반복되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내게 있어서 가장 지독한 악몽이었다.

* * *

“허억!”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꿈에서 깼음에도 손톱이 박히고 크라토스를 넘겨받았던 심장께가 여전히 욱신거렸다.

빌어먹을 악몽. 그나마 이 악몽을 꾸는 주기가 길어서 다행인가.

“폐하?”

옆에서 자고 있던 애쉬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새벽빛이 흐릿하게 커튼을 뚫고 들어왔다. 새벽의 푸른빛에 잠긴 애쉬의 노을빛 눈동자가 걱정을 담고 나를 바라보았다.

“또 그 악몽 꾸셨어요?”

대답 없이 가만히 창문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몸을 일으킨 애쉬가 내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다독이는 손길에 점차 숨이 진정되었다.

다시 침대에 풀썩 눕자 애쉬가 조용히 내 눈을 제 손바닥으로 덮었다.

“…왜 하필 나였을까.”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 하필 내가 그 빌어먹을 세계에 떨어져야 했을까.

다른 사람들은 이세계에서 많아야 100년을 굴렀는데, 심지어 나와 같은 차원에 떨어졌던 천우현마저 내가 떨어졌던 시간보다 훨씬 뒤의 시간에 떨어졌는데 왜 나만 500년을 굴렀을까.

왜 하필 제국도 아닌 마계 경계의 숲에 떨어져서 크라토스를 넘겨받지 않으면 죽는다는 최악의 선택지만을 마주했을까.

이래서 이 악몽이 끔찍이도 싫었다. 한 번 꾸고 나면 끊임없이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을 원망하게 되어 버리니까.

“전대도 폐하께 가능성을 보셨겠죠.”

“가능성? 체력도 힘도 능력도, 아무것도 없이 타 차원에 뚝 떨어진 스물한 살에게 가능성?”

애쉬의 조곤조곤한 속삭임에 냉소가 새어 나왔다.

그냥 죽기 전 눈앞에 있던 아무에게나 넘겨줬겠지. 잘 가지고 있다가 세이블에게 넘기라는 뜻으로 넘겨준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이블이 전대의 유지인 줄 알고 나를 마왕으로 추대할지는 전대도 몰랐겠지.

“난 전대 마왕 그 자식이 빌어먹게 원망스러우면서도 고마워.”

같은 최측근이자 오랜 동료이지만 세이블 앞에서는 절대로 하지 못할 말. 오직 애쉬의 앞에서만 털어놓을 수 있는 말.

“그 자식이 크라토스를 넘겨서 내가 1마계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지만, 그놈이 넘긴 크라토스가 아니었으면 평생 이 세계로 다시 넘어올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 차원에서 그대로 죽었겠지.”

후에 전대 마왕의 무덤을 수습하러 내가 처음 떨어졌던 곳으로 간 적이 있었다. 그 경계의 숲에서 조금만 더 벗어나면 마을이 나왔다.

그 마을을 바라보며 얼마나 오랫동안 실소를 터트렸는지 모른다.

이 마을에서 평화롭게 늙어 죽을 것이냐, 다시 500년의 고난을 겪고 돌아갈 것이냐. 수십, 수백 번을 묻더라도 나는 수십, 수백 번을 똑같이 후자를 택할 걸 알기에.

누구 하나를 원망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택한 삶이었다. 오직 내가 택하지 않은 건 마계로 넘어온 거, 이거 하나였다.

때문에 전대에게 보내는 원망은 진심 어린 저주가 아닌 어린애들이 흔히 하는 그런 투정에 더 가까웠다.

새벽 감성에 젖어 중얼거리다가 마저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1분도 채 안 되어 다시 눈을 번쩍 떴다.

다시 잠들기에는 정신이 너무 맑았다. 애쉬의 손을 치운 나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잠이 안 와.”

새벽에 머리 팽팽 돌아갈 때 논문 작성이나 해야지. 그래도 졸업은 해야 할 거 아니야.

내가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향하자 나를 따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애쉬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내가 가라 하기도 전에 가고, 웬일이지?

“아침에 폐하께서 일어나시는 모습을 보고 가려 했는데 지금 일어나셨으니까요.”

“일이 많나 보네.”

말없이 배시시 웃은 애쉬가 마법진으로 넘어갔다. 커튼을 걷고 새벽하늘을 바라보다가 노트북을 켰다. 일단 논문 뼈대부터 잡아 놓을 생각이었다.

그전에 일단 밀린 꽃꺾마 한 편 보고.

「“대공 저하, 똑똑히 들으세요.”

이벨린이 에른스트를 돌아보며 오만하게 웃었다.

“겨우 그따위 이간질로 인해 저하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은 애초에 인연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러니 저하 자신을 탓하지 말라고요.”

발악하며 에른스트의 악의적인 소문을 고래고래 내뱉는 비스 백작을 뒤로한 채 이벨린은 고개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에른스트에게로 다가갔다.

접은 부채로 에른스트의 턱을 들어 올린 이벨린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아는 에른스트 칼리반 대공은 성격은 좀 짜증 날지언정 그런 악의적인 소문 속의 일을 행할 남자는 아니니까요.”

이벨린의 눈꼬리가 곱게 휘어졌다. 처음으로 정면에서 마주한 이벨린의 환한 미소에 에른스트의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에른스트 칼리반이 이벨린 엘리스터에게 온전히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하하하, 내 주식만 빼고 다 떡상하네. 황태자도 떡상, 북부 대공도 떡상. 불장에 홀로 워터 파크 개장한 내 보유 주식을 보는 느낌이었다.

마탑주는 혹시 잊으신 거 아니죠, 작가님?

복수의 시간이 다가왔도다. 마탑주 주식 떡상으로 축배를 들고 있던 한줌단 마탑주 주식 보유자들에게 찬물을 마구 끼얹어 댔던 북부 대공 주식 보유자 놈들에게 피의 복수를 돌려주지.

하여간 주식 비중은 황태자가 제일 높은데 꼴값은 북부 대공 파는 놈들이 제일 떨어 대요.

마탑주남주아니면마탑에서번지점프: 너무 늦게 자각한 거 아님? 그럼 지금까지 했던 플러팅은 뭔데ㅋㅋㅋ 마음 없는 상태에서 하는 플러팅만큼 최악인 게 어디 있어ㅋㅋ 대공은 남주 아님 땅땅 결론 났네 역시 어남마

└능글북부대공츄라이츄라이: 전에도 마음 없는 상태는 아니었고 인간적 호감, 능력에 대한 관심, 흠……. 내가 얘 좋아하나? 이 감정이었다가 이제 완전히 자각한 거죠

└대공아장모다: 그렇게 치면 님이 빠는 마탑주도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 아직 마음 안 나왔는데요

└784563: 님 땜시 마탑주 더 비호감 됨 ㅅㄱ

└유솔: 마탑주 솔직히 죽은 여동생 생각나서 이브 챙겨 주는 거 아님?? 그리고 솔직히 몇백 년 산 사람이랑 20대인 여주 엮는 건 좀;;;

└인외인간작품찾아다니는하이에나: 솔직히 나이 차는 여주 남주가 20, 30살 차이 나야지 역겨운 거고 몇백 년이면 인외인간 퍼먹기 딱 좋은 나이 차ㅎㅎㅎㅎㅎ

└JKY: @인외인간작품찾아다니는하이에나 님 취향도 역겨워용

오후가 되자 수북이 쌓인 댓글 알림에 댓글창을 들어가 봤더니 복수의 결과는 싸불이었다.

조리돌림 2절, 3절로 뇌절하는 댓글들을 보며 혀를 찼다. 하여간 한줌단 서러워서 살겠나.

* * *

애쉬는 마법진이 그려진 대저택의 제 침실에 발을 디뎠다.

드래곤의 취향대로 화려하게 꾸며진 침실을 보며 애쉬는 픽 웃었다. 500년 전, 기르카스의 세력에게 한창 쫓기던 해츨링 시절의 저한테 이곳이 제 침실이라고 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때는 정말로 잠자리의 바닥에 돌만 없어도 감지덕지할 판이었으니.

‘그때의 폐하께 500년 후의 폐하는 7마계를 통일시키고 마계의 대군주 자리를 움켜쥔다고 말하면 폐하께서는 믿으려나?’

몸을 숨기고 숨을 죽인 채 기르카스가 보낸 수하들의 손에 죽어 가는 어미를 보며 어린 애쉬는 생각했었다. 어머니는 주군을 잘못 선택하여 죽은 것이라고.

그리하여 다짐했다. 만약에 제가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반드시 저는 제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는, 강력한 주군을 선택할 거라고.

기르카스에게 투항하면 그가 저를 받아 줄까? 제게 반기를 든 정통파의 아들인데.

아니, 마족에게는 배신이 밥 먹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고 그 정도는 배신이라고 치지도 않으리라.

하지만 제가 레어를 벗어나기도 전에 대모이자 같은 정통파, 그중에서도 마왕의 최측근인 세이블이 찾아왔다.

그리고, 마계에서는 볼 수 없는 검은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세이블, 여기 해츨링 하나 있는데?”

“그쪽은 누구예요?”

“새로운 마왕.”

첫눈에 반했다든가 하는 그런 로맨틱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새로운 마왕은 솔직히 말하자면 실망스러웠다.

마족도 아닌 약해 빠진 인간. 크라토스가 없으면 금방 죽어 버릴 그런 인간. 제가 바라던 군주상과 전혀 맞지 않는.

하지만 제게 내민 손이, 저를 안은 품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멍청하게 어머니와 같은 선택을 하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었다. 세이블, 레느아, 이포스, 이 셋은 오랜 친구였고 레느아는 약해 빠진 주군을 오직 오랜 정만으로 선택했고, 결국 반대 세력에게 죽임당했다.

“난 안 죽어. 집으로 돌아가야 하거든.”

인간의 몸으로 마왕의 위에 오른 이가 습관처럼 하던 말이었다.

덜덜 떨리는 눈동자와 손으로 제 적을 죽이며, 위험할 정도로 찢긴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열이 올라 사경을 헤매며, 크라토스의 폭주로 죽음 직전까지 가며, 불편한 잠자리에 뒤척거리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종의 다짐처럼 하던 그 말.

그래, 당신이 과연 당신의 다짐처럼 안 죽을 것인지 내가 옆에서 지켜볼게. 어린 날의 애쉬는 그를 인정하는 대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과정이 어떻건 애쉬는 결과적으로 이채현을 주군으로 선택하고 인정했고, 그의 폐하는 7마계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며 역대 최고 업적을 세운 군주로 등극했다.

복도를 성큼성큼 지나며 애쉬는 지금 제 곁에 없는 이를 향해 중얼거렸다.

“저도 전대 마왕이 고마우면서도 원망스러워요, 폐하.”

고마운 건 크라토스를 넘겨주어 채현이 경계의 숲에서 죽지 않고 저를 만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

그리고 원망은, 어머니를 죽게 만든 건 별 유감 없다. 내전 중의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한 쪽이 죽는 건 당연한 거고, 유약했던 전대 마왕 역시 제 어머니가 죽은 그날 죽었으니.

원망스러운 이유는 그저…….

생각을 멈춘 애쉬는 저택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방의 문을 열었다. 제가 탈옥시킨 7마계의 잔당들이 한곳에 모여 모의하다가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자, 이만하면 반군에 합류할 준비는 마쳤겠지?”

제게 향한 여섯 쌍의 눈을 훑으며 문가에 기댄 애쉬가 나른하게 눈을 휘어 웃었다.

약속했잖아요, 폐하. 폐하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모든 걸 치워 드린다고. 그렇다면 제일 방해가 되는 것부터 먼저 치워야 하지 않겠어요?

* * *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를 훔치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이불을 콱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또, 또 그 꿈이야!”

같은 꿈을 꾼 지 벌써 닷새째였다. 그 빌어먹을 마계 첫날의 악몽이 밤마다 반복되고 있었다.

항상 새벽 3시에 잠에서 깨어나다 보니 하루가 피곤해서 등굣길의 버스나 강의실에서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잠이 깬 새벽에 시간 아까워서 졸업논문을 쓰다 보니 논문은 벌써 3장을 넘어가고 있었다.

하다못해 소주 한 병 사서 세이블에게도 부탁했다.

“이것 좀 전대 무덤에 뿌려라. 꼭 내가 올리는 술이라고 전해 주고.”

“술을 무덤에 왜 뿌립니까……?”

“제사주 몰라, 제사주? 그거 잘 마시고 나 좀 그만 괴롭히라고 전해라.”

“이포스가 폐하를 괴롭힌다고요?”

“그래, 요새 꿈에 계속 나와. 한두 번도 아니고 징해 죽겠어.”

“제 꿈에나 한번 나올 것이지, 뭐 하러 폐하 꿈에만 나타나는지…….”

소주병을 받아 든 세이블은 씁쓸하게 웃으며 마계로 역소환당했다.

버티다 못해 나흘째 되는 날에는 지식in에 글을 올렸다.

Q. 꿈에 자꾸 죽은 선임이 나옵니다.

계속 생전 마지막 모습을 반복하는데요 제가 그 선임이랑 좋았던 관계는 아니라서요

꿈으로 나오는 그때 상황도 그닥 좋은 상황은 아니고……

게다가 지금 4일째 연속해서 계속 똑같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

혹시 이게 무슨 꿈인지 꿈해몽 부탁드립니다

#꿈 #꿈해몽 #죽은사람

A. 연꽃선녀보살 답변

그냥 질문자님이 그 선임분이랑의 마지막 모습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요. 별거 아닌 일을 계속 심각하게 여기시다 보면 정말로 그 일이 안 좋은 일로 다가올 수 있답니다^^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합니다. 정 질문자님이 마음에 걸리신다면 선임분의 묘 혹은 납골당을 찾아가서 인사하고 술 한 잔 뿌리고 오시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 아니겠습니까.

A. 지식인상주자 답변

무당집 찾아가서 굿하세요

죽은 사람이 꿈에 나오는 건 결코 길몽이 아닙니다

혹시 종교 때문에 무당집 못 가시면 악몽 퇴치 부적이라도 사서 베개 밑에 넣어 놓고 주무세요

사소한 걸 무시하다가 큰일이 생기는 겁니다

옛날 속담에 이런 말이 있죠 호미로 막을 거를 가래로 막는다고

조상님들 말씀 틀린 거 하나 없습니다

A. 내공먹는길냥이

내공냠냠

마지막 내공냠냠 너는 신고다, 망할 자식아.

질문을 올린 지 하루 후인 오늘 지식in에 들어가 봤지만 역시 도움이 되는 답변은 없었다. 그나마 도움 되는 건 악몽 퇴치 부적의 존재 정도? 묘지는 마계에 있어서 술 뿌리러는 못 가겠슈.

인터넷을 켜고 악몽 퇴치 부적을 검색하자 인터넷 쇼핑몰에 부적과 드림캐처가 쫙 떴다.

요즘은 부적도 인터넷 배송이 되는구나. 굳이 무당집을 안 찾아가도 되겠지. 그런데 인터넷으로 배송받은 부적이 효능이 있을까?

“1,500원, 49,000원, 85,000원…….”

가격을 보고 신뢰도가 생겼다. 1,500원짜리 부적은 효능이 X도 없어 보였지만 85,000원짜리 부적은 악몽에 잡귀까지 막아 줄 것 같았다.

85,000원은 너무 투머치고 적당히 49,000원짜리로 한 장 살까? 모바일로 결제해야지. 그런데 이거 효능 없으면 환불 가능하나?

손으로 더듬거리며 옆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을 찾았다. 휴대폰을 집어 들다가 그 아래에 깔려 있던 마계의 고서를 심드렁한 손길로 펼쳤다.

33대 마왕의 일기였다. 자기 일기가 후대에 고서로 박제됐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오늘도 마왕 회담에서 1마계라고 개무시받고 왔다. 개쓰레기 마왕 새끼들. 미친개였다면 아마 회의장에서 칼부림이라도 하고 칼빵을 훈장처럼 단 채로 왔겠지만 나는 차마 그러진 못했다. 나는 미친개보단 상식적인 마족이었기 때문이다. 내 대에는 불가능하겠지만 내 후대엔 꼭 1마계가 짱이 되어서 타 마계 마왕 새끼들의 대가리를 짓밟을 날이 오길 바란다.]

[믿었던 최측근이 배신을 때렸다. 아직도 그 새끼가 쑤신 배때기가 얼얼하다. 마계에 믿을 만한 놈 하나 없다더니. 역시 조상님들의 충고는 새겨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날이었다. 크라토스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던데 미안하지만 나도 넘기는 방법은 모른다.]

[크라토스는 쓰레기다. 아무리 생각해도 쓰레기다. 작동 원리가 궁금해서 무슨 원리인지 알려 달랬더니 미친개를 꿈에서 만나게 주선했다. 오랜만에 보는 미친개는 내 표정이 여전히 어벙해서 속이 터진다고 크라토스의 원리를 알려 주긴커녕 나를 마구 팼다. 왜 때리냐고 물었더니 그냥 내 면상이 꼴 보기 싫다고 말하면서 또 때렸다. 그 새끼는 뒤져도 여전히 미친 개새끼였다.]

[미친개는 왜 나를 다음 대 마왕으로 선택한 거지? 그렇게 나를 싫어했으면서? 대체 왜? 물어보려고 하면 꼭 미친개는 비소하면서 등을 돌렸다. 하여간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점이라곤 찾아보려 해도 없다, 그 미친개는.]

[조사해 보니 지금까지 크라토스를 다음 대에 넘기고 살아남은 마왕은 없다. 원래 계승의 조건이 전대의 죽음이라고 하더라도 무언가 이상하다. 내 은퇴 라이프가 위험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크라토스의 완성? 미래를 위하여? 파면 팔수록 회의감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선배님, 이 후배가 2~7마계 마왕 놈들을 죽여서 선배님의 복수를 확실히 했습니다. 무시받던 1마계 시절이 떠올라 잠시 가슴이 울컥했다.

한 번 읽었던 책이라 내용은 익숙했다. 휙휙 책장을 넘기던 중 크라토스의 작동 원리와 미친개라는 단어에 손을 멈칫했다.

33대 마왕 역시 크라토스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의문을 가지자 그의 꿈에 등장한 크라토스를 그에게 넘겨주고 죽은 전대 마왕. 무언가 익숙한 스토리 아닌가?

‘지금 내 상황이랑 똑같잖아!’

급하게 책을 펼쳐 다시 정독했다. 그런데 나 이거 중간에 덮은 기억이 나는데. 그 이유가…….

[귀농을 결심했다. 어차피 내가 발버둥 쳐 봐야 나 역시 마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굴려지는 한낱 톱니바퀴일 뿐이거늘…….]

[오늘은 토마토를 수확했다. 아주 잘 익은 토마토를 내다 팔려고 기분 좋게 시장으로 갔다가 이곳까지 찾아온 부하 놈들 때문에 다시 후퇴했다. 그만 나 좀 포기하면 안 되냐? 크라토스는 알아서 후대에 넘어갈 거라고.]

[동네 꼬마 놈들이 감히 내 밭 서리를 시도했다. 내가 바로 마왕이라고 말했는데도 안 믿었다. 썩을 놈들…….]

갑자기 귀농 일기로 바뀌어서였지. 어떤 비료가 무슨 식물에 좋은지까지 동태눈으로 훑다가 책을 탁 덮었다.

이상 마왕직 때려치우고 귀농했다가 돈이 부족해서 자신의 일기 판권을 판 무책임과 비운의 마왕으로 잘 알려진 33대 마왕의 일기였다.

이게 만약 e북이었으면 뷰어에 ‘크라토스’라고 검색만 해도 크라토스 페이지만 쫙 나올 텐데. 내 밑 부하 놈들에게 타이핑하라고 맡길까?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내가 어제 끄적였던 크라토스 마인드맵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안드라스에게서 크라토스와 관련된 책을 공수받은 지 몇 달이 지났지만 크라토스를 넘기는 방법은커녕 크라토스의 자세한 설명조차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죄다 두루뭉술하게 설명되어 있기만 하지.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은 크라토스는 심장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십몇 대 마왕이 자다가 암살자에게 심장을 찔렸는데도 크라토스의 힘으로 멀쩡히 살아남아 500년을 더 살다가 갔다고 했다), 소유자가 죽기 직전에 후대에게 계승된다는 것, 축적된 거대한 힘은 마신의 힘에도 슬쩍 비벼 볼 수 있다는 것.

물론 마신의 힘에 비비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지만.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고민에 잠겼다. 졸업논문 작성 전까지 크라토스 정보 탐색은 좀 미뤄 놓을까?

* * *

“이채, 너 요즘 잠 못 자……?”

윤세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하품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로 봐도 내 몰골은 다크서클이 퀭하니 내려와 불면증 환자처럼 보였다.

“내가 요새 계속 악몽을 꿔서.”

똑같은 악몽 계속 꾼 지 이제 일주일 됐네. 찔린 가슴께에 멍만 있었어도 내가 무당집으로 달려갔을 텐데.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대꾸하자 세인이가 덥석 내 어깨를 잡아 왔다.

“너 혹시 2호선 게이트 휘말린 거 트라우마 된 거 아니야? 심장 뽑히는 거랑 죽는 거 눈앞에서 봤다며! 폭삭 나이 들어서 죽은 사람도 있었고! 얼른 당장 상담 예약하자!”

그건 트라우마 축에도 안 들어. 그 정도면 곱게 죽은 거지. 내가 마계에서 더 끔찍한 시체들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응, 그건 용감한 시민상 표창장과 포상금을 받으면 다 해결될 것 같아. 혹시 정부에서 의논 중?”

“절대 안 줄걸. 정부 측은 민간인이랑 헌터가 휩쓸렸으면 헌터가 게이트 닫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거든.”

내 포상금은 말 그대로 곱게 접어 하늘 위로 날아갔구나. 아니, 그렇게 훌륭한 일을 했는데 그게 의무라고 보상을 안 줘?

“하여간 썩어 빠진 대한민국 정부 같으니. 헌터가 국회의원이랑 대통령으로 선출될 게 아니라 대통령이랑 국회의원들이 각성해서 헌터가 되어야 한다니까? 역지사지 좀 느껴 보라고 각성한 국개의원 놈들 싸그리 A급 게이트 안에 처넣어 버려야 해!”

씩씩거리며 목소리 높여 불만을 토로하자 세인이가 익숙하게 내 입에 마카롱을 물렸다.

“그래, 알겠으니까 무슨 악몽을 꾸는데?”

“오, 진지한 거 보니까 무슨 대책이라도 있나 보다?”

“우리 할머니 절 다니시잖아. 거기 주지 스님이 엄청 용하시거든. 우리 할머니 흉몽 꾸면 바로 절 가심. 할머니께 전해 드릴 테니까 말해 봐.”

할머니가 다니는 절의 용한 주지 스님. 이건 그냥 못 넘어가지. 단편적인 설명만 들어도 신뢰도가 아주 쭉쭉 오르잖아.

“죽은 사람이 자꾸 꿈에 나와. 그런데 죽기 전 마지막에 만났던 상황이 계속 재현돼.”

“이거 굿해야 하는 거 아니냐? 너 주태윤 때문에 S급 게이트 휘말려서 돈 좀 벌었다며. 그걸로 굿판 벌여라.”

“홍대에 서서 도믿맨 기다리면 되냐?”

“왜 굳이 사기꾼에게 가? 그냥 용한 무당집을 가.”

그때, 택배가 도착했다. 문 앞에 놓인 상자 두 개를 후다닥 가져와 오픈했다.

상자 안에 곱게 담긴 드림캐처와 악몽퇴치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베개 밑에 악몽퇴치부를 놓고 드림캐처를 의자 모서리에 대충 걸어 놓고는 뿌듯하게 웃었다.

“굳이 센 네 할머니께 말씀 안 드려도 될 듯? 이제 오늘로 악몽은 굿바이다.”

“내가 봤을 땐 안 돼.”

그런 나를 보며 윤세인이 혀를 찼다.

* * *

드림캐처와 악몽퇴치부로 무장한 그날 밤.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이불을 덮고 스르륵 잠에 들었다.

까악, 까악―!

익숙한 까마귀 소리에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빌어먹을, 또 마계 경계의 숲이다. 49,000원짜리 부적은 제값을 못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1,500원짜리 부적이나 살걸. 그럼 ‘싸구려 쓰레기를 샀구나.’라는 마음가짐으로 인해서 덜 억울했을 텐데.

슬쩍 시선을 내려 밑을 바라보니 역시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순간 열이 받아 전대 마왕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왜 나한테 나타나냐고! 제에발 너 X나게 그리워하는 세이블에게나 가라고!”

아랑곳하지 않고 전대가 내 멱살을 향해 부들거리는 손을 뻗었다. 멱살을 잡아채 가까이 끌어당기는 놈의 손길에 포기하고 순순히 당겨가 주었다.

그냥 이 빌어먹을 악몽이 빨리 끝났으면. 이제 크라토스 어쩌고가 인간이라, 이 대사 내뱉겠지.

검붉은 눈동자를 짜증 어린 눈으로 마주하자 전대 마왕이 제 눈동자만큼이나 붉은 입술을 열었다.

“지금 넌 몇 살이지?”

매크로에서 벗어난 질문에 당황하여 전대를 내려다보았다. 코드 오류인가? 그런데 꿈에도 코드가 있나……?

“그 멍청해 보이는 표정은 여전하군.”

전대의 얼굴에 서늘한 냉소가 걸렸다. 상황 파악을 하느라 아무 말 없이 전대를 바라보고 있자 전대가 쥐고 있던 내 멱살을 가볍게 흔들었다.

“내가 물었지 않나. 대답부터 하지? 선대를 공경하는 마음가짐이 부족하군?”

“개꿈도 이런 개꿈이 다 있네. 그리고 언제부터 마계에서 유교 따졌다고? 여긴 강함이 곧 법이자 질서이자 정의인 강자존 아니었나?”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며 내 멱살을 쥔 손을 탁, 내쳤다. 어떤 놈이 꿈길의 저주를 열어서 내 꿈을 조종하기라도 하는 건가.

“500살 이후로는 안 세어서 까먹었는데. 아직 600살은 안 넘었다는 건 확실하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뼛속까지 각인된 유교걸 본능에 순순히 답해 줬다. 내 대답에 전대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500살이라……. 명줄 한번 질기군. 언제 죽을까 했더니 내 나이까지 살아남을 줄이야.”

중얼거린 전대가 비키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얼떨결에 전대의 몸 위에서 내려오자 상체를 일으킨 전대가 나를 바라보았다.

퇴폐미가 짙게 묻어 나오는 미남의 끈질긴 시선은 아무래도 좀 부담스러웠다. 처음 얼굴을 봤을 때 19금 로판 남주인공으로 착각할 정도였으니.

“이건 꿈인가?”

내 혼잣말 같은 물음에 전대 마왕 이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네 꿈이지. 난 죽었으니.”

“그런데 왜 네가 자아를 가지고 행동해? 내 꿈이면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난 네가 만들어 낸 꿈속의 존재가 아니라 내 자아이니까.”

역시 꿈길의 저주가 맞다니까. 어떤 놈이 내 트라우마를 정확히 건드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잡히면 똑같이 꿈길의 저주를 열어 수백 번 몸을 산 채로 다져 주지.

“네가 500살이면 애쉬도 이미 성년이 되었겠군. 세이블과 레느아는 잘 지내나?”

“세이블은 잘 지내고 레느아는 너와 같은 날에 죽었지, 아마?”

“레느아가……. 그럼 애쉬는 어미를 잃었군. 세이블이 제 대자를 굳이 챙겼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애쉬는 살아 있나?”

쓰게 웃은 이포스가 물었다. 세이블을 꿰뚫어 보는 그 말에 그들이 친한 사이이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살아 있지. 세이블이 안 챙겨서 내가 챙겼거든.”

“그 정신머리와 온정으로 용케 지금까지 살아남았군.”

“오직 애쉬만 예외로 뒀으니까. 다른 놈들에게까지 온정 베풀며 호구를 자처했으면 난 지금쯤 너처럼 마계 경계의 숲에 묻혀 나무들의 비료가 됐겠지?”

빈정거림이 담긴 내 말에 이포스가 미간을 꿈틀했다. 그것도 잠시, 그는 피식 웃었다.

“적응을 잘한 모양이야. 덜덜 떨고 있던 첫 만남 때의 모습은 못 찾아보겠군.”

“적응하지 않았으면 죽었을 테니까. 크라토스를 내게 넘겨주고 죽은 너처럼.”

“내가 죽은 걸 그렇게 계속해서 강조해 줄 필요는 없다만?”

내 전대 마왕은 이런 성격이었구나. 언제나 내 심장께에 손톱을 찔러 넣고 빈정거리는 말을 쏟아붓던 전대만 보다가 이렇게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니 기분이 이상했다.

“세이블이 너를 많이 그리워하던데. 그런 충성스러운 부하를 둬서 좋았겠어? 물론 지금은 내 부하지만.”

“당연하지. 오랜 친구였으니.”

“그렇다면 왜 세이블이 아닌 내게 크라토스를 넘긴 거지?”

내 물음에 추억을 회상하듯 가볍게 미소 짓고 있던 이포스의 얼굴에서 점차 웃음기가 사라져 갔다.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착각하지 마라. 난 네게 그것을 넘긴 적이 없으니.”

바람이 한차례 스쳐 지나가며 마계의 나무답게 날카로운 나뭇잎이 우리의 위로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그중 하나는 이포스의 볼을 기어이 긁고 가 흰 피부에 붉은 실선이 생기게 만들었다.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상처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쓱 훔친 이포스가 비소했다.

“내가 미쳤다고 약해 빠진 인간 따위에게 크라토스를 넘겨줬겠나?”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크라토스에 자아라도 있다는 소리야?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지. 왜 크라토스가 나한테 온 거지?”

공간이 흔들렸다. 마치 내가 하면 안 되는 질문이라도 했다는 듯이. 삐뚜름하게 미소 지은 이포스가 몸을 일으켰다.

“눈치챘잖아? 이 공간에서 그 질문에는 답을 못 해.”

“그럼 크라토스를 넘기는 방법이라도 말해.”

“방법? 방법이랄 게 있나.”

비웃음에 가까운 뇌까림에 내 표정이 굳자 이포스가 무슨 비밀이라도 말하는 양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네 마음대로 넘길 수도 없고, 넘긴다 한들 곧바로 죽을 거다.”

내 발밑을 맴돌던 시커멓고 끈적한 기운이 스멀스멀 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내게 쏟아졌던 저주였고 내가 쌓은 카르마였다. 콱콱, 땅을 짓밟자 요동치던 저주가 잠잠해졌다.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숲 안쪽으로 걸어가는 이포스를 급히 잡아챘다. 이대로 보내면 영영 답을 듣지 못할 거란 직감이 들었다.

“잠깐……!”

“아쉽겠지만 이만 꿈에서 깰 시간이다. 이제 우리가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야. 네 기억의 재현이라면 모를까.”

몸을 반쯤 돌려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 찌른 이포스의 말을 마지막으로 공간이 퍼즐 조각처럼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다음 순간 나는 현실 세계의 내 침대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바깥은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시간은 아침 9시 반. 평소 10시가 평균 기상 시간이던 나였지만 일주일 내내 새벽 3시에 깬 걸 생각하면 정말 푹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이나 진배없었다.

베개 밑에 손을 넣어 잔뜩 구겨진 49,000원짜리 악몽 퇴치부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이게 효능이 있었던 거야, 없었던 거야?”

의자 모서리에 대충 걸린 드림캐처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살랑살랑 흔들렸다. 마치 내게 대답이라도 하듯이.

* * *

“아스타로드에게 맡긴 임무라도 있나?”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책 더미를 턱 받아 든 안드라스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는 물었다. 색 조합이 백발 적안이라 더욱 토끼 같았다.

“애쉬가 너와 아스타로드가 요즘 만나는 횟수가 늘었다고 보고해서.”

“그 망할 실버 드래곤은 남 감시하는 것 말고는 할 일도 없답니까?”

내 입에서 애쉬의 이름이 나오자 안드라스가 표정을 잔뜩 구겼다. 글쎄다, 요즘 하는 걸 보면 걔도 나름 바쁘던데.

“그리고 체이스터가 내게 그러더군. 아스타로드가 7마계 잔당들과 접촉하는 걸 봤다고.”

“그 꼬맹이는 대체 언제……. 하아.”

이마를 문지른 안드라스가 설명했다.

“아스타로드가 상대의 외형을 카피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7마계 잔당 놈들이 투옥되었을 때 한 놈 몰래 빼고 스파이로 넣어 정보를 빼냈습니다.”

“그래서 쓸 만한 정보는 얻어 냈나?”

“반군은 정말로 존재합니다. 7마계 마왕의 측근이 저희의 추적을 피해 살아남아 1마계부터 7마계까지 폐하께 반기를 들 세력을 모으고 있더군요.”

“나머지 마계는 몰라도 1마계에서까지라…….”

심기 불편함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는 내 중얼거림에 안드라스가 고개 숙이며 담담히 답했다.

“폐하께서 순혈 마족도, 혼혈도 아닌 인간이신지라 불만을 가진 불온 세력들이 1마계에 있었습니다.”

그래, 그 인간에게 발린 순혈 마족들은 누구? 하여간 내세울 것 없는 애들이 꼭 혈통 내세우면서 우쭐거려요, 쯧쯧.

“그리고 1마계 중앙에 그들을 도와주겠다고 접근했던 이가 있다고 합니다.”

안드라스가 조심스럽게 덧붙인 말에 픽 웃었다. 그게 과연 내가 심어 놓은 스파이일지, 아니면 배신자일지…….

“오랜만에 눈치 게임이나 해 볼까?”

내가 내전 시절에 자주 하던 목숨을 내건 눈치 게임을 기억하는 안드라스가 내 미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드라스를 마계로 역소환시킨 나는 다시 쌓인 책 더미를 바라보다가 제일 위에 있는 책을 무심한 손길로 촤르륵 넘겼다.

아직 알아낸 사실이 없는 듯 책갈피는 없었다. 책을 덮으려던 찰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크라토스’라는 단어에 손을 멈칫하고는 페이지를 펼쳤다.

크라토스를 탄생시킨 7대 마왕의 다음 대인 8대 마왕이 남긴 짧은 기록. 크라토스의 탄생 비화였다.

마신이 봉인되지 않았고 1마계를 노린 7마계의 침략이 빈번했을 때, 7대 마왕은 1마계를 가장 강대한 마계로 거듭나게 해 달라 마신에게 소원을 빌었고, 그 소원의 대가로 마신은 그의 심장을 가져갔다. 마신은 제가 거둔 심장에 자신의 일부를 부여했다.

그리고 마신으로부터 그 심장을 넘겨받은 다음 대의 마왕, 그러니까 기록을 남긴 본인이 7마계의 침략으로부터 성공적으로 1마계를 지켜 냈다.

‘후계자를 정했고 그 후계자에게 크라토스를 넘겨줄 방법을 마신에게 묻자 마신은 그것은 네가 결정할 것이 아니라고 단호히 답했다.’라는 문장으로 기록은 끝을 맺었다.

이포스 역시 비슷한 말을 했지. 내게 크라토스를 넘긴 적이 없다고. 크라토스가 있을 심장 쪽에 손을 올리니 일반 사람보다 현저히 느린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설마 내 뜻대로 못 넘기나?’

어라, 그럼 안 되는데. 왜인지 정선 S급 게이트가 몇백 년은 더 열려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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