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마왕님은 졸업이 하고 싶어! (20/33)
  • 20. 마왕님은 졸업이 하고 싶어!

    9월 2일. 대학교의 마지막 학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왜 학교 안 가고 집에 있냐? 자체 휴강이야?”

    “6학점이라서 화, 목 수업이지. 월, 수, 금 공강을 이뤄 냈다, 이 말이야.”

    자취방에 쳐들어와 이불을 확 걷어 낸 아현이의 물음에 드러누워 손가락을 까딱이며 대꾸했다.

    그리고 만약 오늘 수업이 있었어도 어제 있던 2호선 게이트 사태를 핑계로 자체 휴강을 했을 거다.

    - 일각에서는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시민들을 통솔한 서열1위포커스 외 스물아홉 명의 헌터들에게 용감한 시민 표창장을 수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으며 보건복지부는 게이트 안에서 사망한 세 명의 헌터를 의사자로 인정하는 건에 대해 검토하고 있습니다. 게이트 안에서 사망한 헌터가 의사자로 인정받은 사례는 아직까진 단 한 건도…….

    뉴스에서는 아침부터 2호선 게이트 소식을 다루고 있었다. 내가(정확히는 스물아홉 명의 헌터들로) 언급된 뉴스에 리모컨을 들어 볼륨을 높였다.

    “오, 나 표창장 받나? 포상금 얼마지?”

    “야, 정부가 검토하는 건 의사자 인정이지 네 용감한 시민 표창장은 정부가 검토한다는 소리조차 안 나왔다. 괜히 김칫국 드링킹하지 말고 보상 증명 서류나 작성해서 협회에 제출해.”

    아현이가 내 행복한 상상에 찬물을 쫙 끼얹었다.

    지인들에게 동영상 링크를 포함한 메시지가 또 우르르 쏟아지는 걸 보니 그새 어떤 놈이 내 영상을 찍어 올린 모양이었다. 한숨을 쉬며 링크를 들어갔다.

    YxxTube

    (동영상)

    뛰는 잼민이 위에 나는 테이머

    ☝11만 ☟36

    [JK Y] • 1일 전

    “그런 말은 일곱 살 애들이나 믿죠. 전 여덟 살이라 안 속아요.”ㅋㅋㅋㅋㅋㅋㅋㅋ

    좋아요 3.5천 답글 6개

    [조세운] • 1일 전

    그리고 결국은 속아서 쫄은 게 레게노ㅋㅋㅋㅋ

    [둥둥이사랑해] • 6시간 전

    안 속는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치곤 3초에 한 번씩 뒤돌아보는 게 넘 귀여웤ㅋㅋㅋ

    …….

    [제트팟] • 16시간 전

    라떼는 망태 할아범이었는데 요즘 애들 겁주는 건 몬스터구나

    좋아요 2.5천 답글 12개

    [룬룬] • 14시간 전

    팩트) 저 헌터 분은 정말로 잼민이가 몬스터에게 잡혀가게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좋아요 2.1천 답글 10개

    [adsfjkl] • 12시간 전

    그래서 내가 틀린 말 했냐고 그랬던 건가ㅋㅋㅋ

    [터닝이랑 포인트 영원하자] • 15시간 전

    어이쿠, 몬스터 오기 전에 도망가야지. ← 이 말이 과장 없이 너무 단조로운 어조에 심드렁해서 더 웃곀ㅋㅋ 레알루 몬스터 오면 제일 먼저 튈 거 같아

    좋아요 1.4천 답글 3개

    [유구한] • 10시간 전

    진짜 도움 청하려고 옆 딱 돌아보면 텅 빈 옆자리가 맞이해 줄 것 같은…….ㅋㅋㅋㅋ

    …….

    꼬맹이들을 통솔하며 겁주기 위해 했던 대화가 찍힌 동영상이었다. 다행히 영상에는 아이들의 뒷모습과 힐끔거리는 옆모습만 담겼지만 내 목소리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내 영상 좀 그만 올렸으면 좋겠다. 물론 내 얼굴은 안 나오고 목소리만 나오긴 하지만 이미 난 테이머로 신상이 까였는걸.

    “그러고 보니까 이채 너도 참 운도 없다. 어떻게 휩쓸리는 게이트마다 A급이야?”

    “그러게 말이다.”

    앞선 몇 번의 A급 게이트는 내 부하 놈들의 짓이고, 이번 게이트는 회귀자 충고 들었다가 휘말린 거라 운 없게 휘말린 적은 따지자면 없지만.

    “그러니까 타로점 보러 가자, 이채.”

    “갑자기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나 지금 졸업논문 주제 생각해 놔야 해.”

    뜬금없는 제안에 눈썹을 치켰다. 내 지도교수님이 워낙 FM이라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지옥이 펼쳐질 거라고 나와 같은 지도교수를 거쳤던 선배가 충고해 줬지.

    과연 교수님의 마음에 드는 졸업논문을 무사히 써서 졸업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이런 중대사를 앞두고 있는데, 타로? 타아로?

    “너 그때 용한 타로라고 나 끌고 갔던 거 기억 안 나? 연애운 있다고 하더니 내가 그해 연애를 했냐고!”

    타로점을 봤던 해에 나는 마계에 떨어져 두근두근한 연애는 개뿔, 심장 떨리는 심리전만 질릴 정도로 했다.

    “이번에는 진짜진짜 용한 데 맞다니까! 내가 보증할게! 내가 돈도 다 낼게!”

    “진짜?”

    그럼 가야지. 공짜 타로 한번 보러 가 보실까. 내가 졸업을 할 상인지 물어봐야겠다.

    * * *

    “…여기라고? 확실해?”

    골목길에 숨어 있는 아주 작은 인X타 명소 카페 같은 건물을 올려다보다가 백아현을 휙 돌아보며 물었다.

    명인은 촌스러운 이름이어야 신뢰가 가듯이 타로 가게도 음침한 분위기여야 신뢰가 간다고, 이렇게 감성 카페 같은 분위기가 아니라.

    아현이의 손에 떠밀려 카페인지, 타로 가게인지 모를 곳으로 들어갔다. ‘Americano 5.0’이라고 적힌 메뉴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진짜 카펜데……?

    “또 오셨네요. 타로 자주 보면 정확도 떨어진다니까요.”

    커피를 내리고 있던 여자가 백아현에게 말을 건넸다. 내 어깨에 손을 턱 얹은 아현이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제가 아니고 이 친구가 보려고요.”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이 타로 카페의 주인이었다. 카운터에서 나온 주인장이 카페 입구의 open 표시를 close로 돌려놓고 나를 두 개 있는 테이블 중 하나로 불렀다.

    스물한 장의 메이저 아르카나 카드를 섞으며 주인이 물었다.

    “무엇을 알고 싶어서 오셨을까요?”

    “그냥 앞으로 일어날 일이랑 제 인생 좀 제일 자세하게 봐주세요.”

    특히 제가 졸업을 올해 안에 할 수 있을지를 중심으로 부탁합니다.

    곰곰이 생각하더니 56장의 카드를 더 꺼내어 미리 꺼내 놓았던 21장의 카드와 현란하게 섞은 여자가 내 앞에 카드를 촥 펼치고는 십자 모양과 1자 모양으로 배치된 판을 탁 올려놓았다.

    총 열 개의 칸이 판에 그려져 있었다.

    “여기서 카드 열 개를 뽑고 여기에다가 뽑은 카드 순서대로 올려놔요.”

    뒷면을 보이는 카드들을 내려다보다가 망설임 없는 손길로 카드 열 장을 뽑아 배열했다. 어차피 고민해 봤자 카드 뒷면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빠르시네요. 친구분은 30분을 고민해서 고르시던데.”

    주인장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백아현이 옆에서 헛기침했다. 얘가 타로 볼 때 같이 안 따라와서 다행이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속 터져서 내가 대신 뽑아 줬을 듯.

    내가 카드를 순서대로 다 놓자 주인은 내가 첫 번째로 고른 카드를 집어 들어 공개했다.

    “먼저 현재 처한 상황… 지팡이 9 카드가 나왔네요. 정방향이고… 이미 힘겨운 일을 겪어 왔고 그럼에도 잘 지켜 왔어요. 하지만 아직은 마음을 놓기에는 이릅니다. 앞일에 경계하세요.”

    한 학기에 21학점까지 들어가며 졸업학점을 겨우 채우긴 했지. 그리고 아직 졸업논문이 남았으니까 마음을 놓으면 안 되고.

    흠, 좀 맞는 거 같기도?

    “다음으로는 당신을 방해하는 것, 혹은 당신에게 영향을 행사하는 것.”

    주인장이 흰 손으로 카드를 뒤집자 매달린 남자 카드가 역방향으로 놓여 있었다.

    “…지나친 맹목. 손님을 놓아주질 않군요. 삶에서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때가 올 거예요.”

    그래, 꼭 거쳐야 하는 빌어먹을 졸업논문. 졸업이냐, 졸업 유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지.

    3번 칸의 카드를 뒤집은 주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먼 과거의 카드는 검 10 카드네요. 클로징 카드에 정방향. 지독한 고생과 불행을 겪고 고통받아 왔다가 새로운 희망을 찾았군요.”

    이제까지 스쳐 갔던 수많은 팀플과 과제, 밤샘 공부. 그리고 다가온 졸업이라는 새로운 희망. 이게 끼워 맞추기인지, 진짜 내 운명의 카드인지 슬슬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건 끼워 맞추기의 수준을 넘은 것 같은데?

    내가 혼란스러워하든 말든, 카드 해석은 계속되고 있었다.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까운 과거, 혹은 얽매인 과거의 사념은 세계 카드 역방향. 미완성과 미해결이라……. 불안정하네요. 끝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끝냈군요. 그게 당신의 발목을 잡을 거고요.”

    “헐, 맞아요.”

    아직 논문 주제 안 정한 걸 어떻게 알았지?

    “다음, 직면하고 있는 가까운 미래. 탑 정방향 카드네요. 몰락과 붕괴… 상실. 외부에서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보입니다.”

    교수님께 욕을 먹고 자존심의 몰락과 멘탈의 붕괴, 그리고 졸업장의 상실…….

    안, 안 돼요, 쓰앵님……! 저 졸업해야 해요!

    내가 다급한 표정으로 주인장을 바라보자 그가 6번 칸에 놓인 카드를 쓱 집어 들었다.

    “다음,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을 때의 결과, 그러니까 5번에 대한 일반적인 해답을 드리자면.”

    흰 말을 타고 갑옷을 입은 해골. 죽음(Death) 정방향 카드였다.

    “실패하고 이별하게 될 거예요. 종결 후 부활……. 그러니까 리메이크를 한다고 한들 죽음은 죽음입니다.”

    졸업에 실패하고 졸업장과 이별. 아니, 그전에 엄마가 남들 다 하는 대학 졸업도 못 하는 쪽팔린 딸내미라고 날 죽일 수도. 그럼 세상과의 이별이겠지.

    종결 후 부활은 졸업 시즌 끝나고 졸업논문을 다시 쓸 거라는 소리인가?

    7번 자리에 놓인 카드를 손끝으로 두드린 주인이 설명했다.

    “이 자리는 현재 질문자의 심리와 감정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1번 카드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조금 더 명백한 내면을 투사해 주죠.”

    손끝으로 카드를 집어 든 그가 쓱 뒤집었다.

    달(The Moon) 카드. 하필 또 정방향. 왜 나는 계속 나쁜 패만 뽑는 거지. 아무리 별 고민 안 하고 뽑았다지만 카드가 다 안 좋은 카드냐.

    “불안해하고 계시네요. 의심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압박감을 느끼고.”

    “네, 맞아요. 딱 요즘 제 심리 상태예요.”

    내 마음을 읽은 듯한 말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졸업 여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있긴 하죠. 졸논 압박감도 느끼고.

    내 말에 피식 웃은 주인장이 8번 카드를 뒤집었다.

    “외부 요인을 봐 볼까요. 당신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타인은… 교황 카드 역방향이네요. 오만하고 잔혹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말이 곧 신의 뜻이라 생각하는 끔찍한 기만자군요.”

    곧바로 과제로 작성했던 내 논문이라고 하기도 뭐 한 쓰레기의 발표가 끝나자마자 팔짱을 끼고는 혹평하던 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교수님……!’

    와, 여기 완전 신통방통하네.

    속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주인장이 9번 카드로 손을 뻗었다.

    “그럼 이제 무거운 이야기는 실컷 들었으니 희망으로 넘어가죠. 심판 정방향이네요. 재회와 구원. 부활과 개선이라……. 그 희망을 잘 이용하면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이건 뭔 소리지. 논문을 뜯어고치라는 소리인가? 내가 사실 지금까지 어거지로 해석을 끼워 맞추고 있었나?

    9번에서 삐끗한 해석에 굳은 표정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자 주인장이 말했다.

    “이 타로는 꼭 하나의 상황을 콕 집어 말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의 상황에 가두지 말고 넓게 보세요.”

    “넓게요?”

    넓게 보면 교수님이 내 구제 불능 논문을 구원해 준다는 뜻일 수도. 너무 넓게 봤나.

    볼을 긁적이고 있자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려 웃은 주인장이 홀로 뒷면을 보이고 있는 마지막 카드를 집어 들었다.

    “마지막, 문제의 총체적 해결 카드를 보죠.”

    카드가 오픈되었다. 검 1(ACE) 카드 정방향. 왕관이 꽂힌 검을 들고 있는 손이 그려진 카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모험이 필요해요. 냉정한 판단으로 단호하게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어쨌든 끝은 승리네요.”

    다행이다. 9번은 모르겠지만 일단 졸업할 수 있나 보다.

    한숨 놓은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자 카드를 한곳으로 모아 정리한 주인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것이 운명이라지만 인간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 하죠.”

    내가 눈을 깜빡이며 주인장을 바라보자 그가 가만히 웃었다.

    “별의 움직임에 변수를 주는 건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에요.”

    뭔가 알고 있는 NPC 대사 같네. 결제를 위해 아현이가 내민 카드를 긁고는 다시 아현이에게 건네던 주인장이 지나가듯 내게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인생사가 무난하지는 않으셨네요.”

    카드를 다시 받아 든 아현이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인사하고 카페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아현이가 내게 물어 왔다.

    “이채,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별일 없었는데.”

    “그렇지? 갑자기 마지막 말 들으니까 신뢰도가 훅 떨어졌어.”

    눈가를 꿈틀하며 타로 카페를 돌아보는 아현이를 보며 쓰게 웃었다. 백아현은 내 8년 지기 친구였기에 마계 차원 이동을 제외한 이제까지의 내 가정사와 삶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그러니까 내 마계에서의 500년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내 인생만큼 무난한 게 없을 터였다.

    부유하진 않지만 가난하지도 않은 적당한 중산층의 화목한 가정, 나쁘진 않은 외모, 우수한 성적, 원만한 교우관계, 어디 가서 부끄럽진 않은, 아니 오히려 자랑스러운 학력.

    마계에 뚝 떨어지기 전까지 나는 평범하고 순탄한 인생 코스를 밟아 오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돌아오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이런 인생을 영영 잃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미련이 지독하게 남아서.

    “그래? 나는 그래도 제법 맞는 거 같은데?”

    픽 웃으며 푸른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한때는 영영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지구의 푸르른 하늘을.

    * * *

    방학도 끝이구나. 몇 달 만에 오는 학교인지.

    대형 강의실을 쫙 둘러봤지만 역시나 아는 얼굴은 없었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휴대폰 화면을 쓱쓱 내렸다.

    레벨레이션 참사로 한참 떠들썩하던 헌티드는 두 번째 재각성자가 나타나자 레벨레이션은 싹 잊은 듯 새로이 S급으로 등극한 재각성자 이야기로만 떠들썩했다.

    HUNTED

    [이슈] 재각성 헌터 또 등장해……. 한국에만 두 번째 (+984)

    [이슈] F급에서 S급으로…….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FULL 인터뷰]

    20XX-09-03 09:04 조회: 92,674 작성자: 업로더

    출처: https://m.news.navxxr.com/hunter/general/article/1685354671

    (사진)

    전 세계에서 오직 한국에만 열린 S급 게이트에 이어 재각성한 헌터가 한국에서만 연속으로 두 명이 나옴으로써 대한민국이 또 한 번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영광스러운 재각성의 주인공은 유림 헌터로 F급에서 S급으로 재각성하여 그야말로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S급 헌터 열 명 이상 보유국이 되어 명실공히 헌터 강국으로 등극했다.

    Q. 전 세계에서 두 번째 재각성자이자 F급에서 한국 열 번째 S급이 됐는데 소감이 어떤가.

    A. 처음에 재각성 알림 상태창이 떴을 때는 내가 꿈꾸고 있는 줄 알았다(웃음). 그도 그럴 게 당시 상황이 2급 몬스터를 바로 앞에서 마주한 상황이라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F급일 때는 힘이 없어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마음껏 내 이상을 펼칠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

    전문 출처로

    댓글(812)

    네이먼: 이런 사람이 재각성하는구나

    산타할아버지는세상에없단다: 전에 재각성했던 사람도 A급 게이트에서 끝까지 사람 지킨 헌터 아니었나?

    └illilll: ㅁㅈㅁㅈ 같이 있던 C급 쉑 자기 재각성했다고 거들먹거리면서 등급 재검사도 안 받고 자기는 A급이라고 A급 게이트 기어들어 갔다가 뒈졌잖아ㅋㅋㅋ

    └얼죽아협회회원: 그 C급 놈이 재각성 걔가 사람들 버리고 튀었다고 거짓 증언 안 함?ㅋㅋㅋ 사실 튄 건 지였다며ㅋㅋ

    B급인생: 재각성하는 방법… 민간인들까지 대규모로 휘말린 A급 게이트에서 사람들을 끝까지 지킨다……. 끄적

    정의의철퇴킥: 와 그런데 F급에서 S급이라니 진짜 판소 쥔공 같다

    크리스피깜놀란: 이제는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대ㅠㅠㅠㅠ 롬곡줄줄ㅠㅠㅠ

    └리아논: 너무 바른 사람이 잘돼서 시기 질투가 전혀 안 든다ㅠ

    └디베인: @리아논 돈맛 보면 달라질지 누가 아누ㅋㅋㅋㅋ

    일냥이냥: 관리국 들어간다고??? S급이면 길드 안 들어가고 프리로만 뛰어도 몇억씩 들어올 텐데 왜 굳이 월급도 짠 철밥통 관리국을……?

    └너어디야: 이재의가 이 댓글을 싫어합니다

    └철밥통임: 아 지금 이재의 S급 후배 받을 생각에 신났다고 찬물 끼얹지 말라고ㅋㅋ

    mdk6745: 내 동생이 유림이랑 같은 지하철 칸 타고 있었는데 끝까지 객차에 남아서 노약자들 부축하고 먼저 내보내려 하고 그랬댔음 재각성할 때도 어린애한테 몬스터 달려드는 거 가로막다가 재각성했다는데

    └피통치드: ㅁㅊ F급이 2급 몬스터 앞을 가로막은 거임? 다른 헌터들은 뭐 했대?

    RENI: 울 오빠도 생존잔데 오빠가 지하철 타고 있을 때 유림 앞쪽에 서 있었대 옆 칸에서 몬스터 침입해서 사람들 넘어오니까 거의 압사 직전이었는데 유림이 바로 앞에 있는 할머니께 자리 양보해 드렸대

    └RENI: 아 근데 유림 바로 옆자리에 테이머 있었는데 테이머는 앞에 할아버지가 눈빛으로 무언의 압박 주는데도 끝까지 안 비켰대ㅋㅋㅋㅋ

    └망러: 앜ㅋㅋㅋ테이머 왤케 웃기냨ㅋㅋ 뛰는 잼민 위에 나는 테이머 영상도 그렇고ㅋㅋㅋ

    └tsfklf: 테이머 개념 없네ㅋ

    └구일: 솔직히 유림이 인성 넘사인 거지 나 같아도 테이머처럼 행동했을 거 같아서 욕은 못 하겠음

    …….

    벌써 인터뷰도 땄어? 빠르네. 유선한은 인터뷰 이런 건 없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하긴, 그때 유선한은 지켜야 할 민간인들을 버리고 도망치려 했던 쓰레기 D급 헌터로 찍혀 전 국민의 욕을 먹었지. 그나마 생존자들이 증언해 줘서 오해는 벗었지만.

    2호선 게이트에 휩쓸렸던 헌터들은 제 몸 아끼지 않고 게이트 클리어에 뛰어든 이들로 칭송받고 있었고, 그중 리더 역할이나 다름없었던 서열1위포커스는 거의 영웅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채현? 너도 이 수업 듣냐?”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얼굴에 눈을 크게 떴다.

    마계에서 지구로 귀환한 후 갑작스레 평화로워진 세상에 은근 적응하지 못하고 과에서 겉돌았던 나를 챙겨 준 화학과 한주희 선배였다. 다음 해에 선배가 휴학해서 연락도 끊기고 얼굴도 못 봤지만.

    반가움에 활짝 웃으며 선배를 반겼다.

    “선배! 언제 복학하셨어요? 와, 전공 강의에서도 못 만났는데 이렇게 일선 강의에서 만날 줄이야.”

    “그러게 말이다. 복학은 진작 했지. 나도 졸업반이야, 인마.”

    픽 웃은 선배가 가방을 의자에 턱 내려놓으며 내 옆옆자리에 앉았다.

    “참, 취뽀 축하한다.”

    “에이, 길드도 안 들어갔는데 취뽀는 무슨. 선배는 취업하셨어요?”

    “행정고시 2차 합격자 발표 기다리고 있어. 너는 좋겠네. 각성해서 취업 걱정은 없을 거 아니야.”

    “아하하, 그렇긴 하죠. 게이트 사라지면 바로 백수 신세지만요.”

    “내가 봤을 때는 게이트 안 사라져. 나중에는 우리가 게이트 없는 세상이랑 있는 세상 둘 다 겪은 1세대 될걸.”

    거의 2년 만에 만나는 건데도 대화는 어색하게 끊기지 않고 제법 잘 이어졌다. 그나저나 선배도 행시 준비하는구나. 면접에서 떨어져서 행시 때려치운 주태윤 생각나네.

    “졸논은 어느 정도 썼냐?”

    “주제도 못 정했는데요……. 리뷰 논문보단 실험 논문을 덜 깐깐하게 본다고 해서 일단 실험 논문으로 할 생각이긴 해요.”

    “졸논 시즌엔 실험실 예약 꽉 찬다. 미리미리 주제 정해서 실험 마쳐 놔. 지도교수에게 초안도 11월까지 보내야 하니까.”

    미리 졸업한 선배들의 피와 살이 되는 충고라며 주희 선배가 씩 웃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한탄처럼 중얼거렸다.

    “저 졸업할 수 있을까요.”

    “졸논 제출 한 달 전에 밤새우면서 개판으로 작성해서 제출한 놈도 졸업하더라. 너무 걱정하진 마.”

    심드렁한 대꾸에 마음이 좀 놓였다. 강의 시간이 되자 주희 선배는 칼같이 대화를 끊고 몸을 돌렸다. 휴학했다고 연락 끊을 때부터 알아봤는데 참 칼 같은 인간이다.

    가방에서 사과패드와 펜을 꺼내 필기할 준비를 마치자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강의는 꽤 지루했다. 교수님의 목소리가 단조로워서 지루함이 두 배였다. 연신 하품하며 힐긋힐긋 책상에 내려놓은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리던 중, 채팅이 도착했다.

    〉Local Channel-ROK

    〉귀환자 단체 채팅방

    〉〉공지 사항: 이름은 차원 이동한 곳에서의 직업, 혹은 세계관으로 부탁드립니다

    꽃집주인: 죄송한데 혹시 제가 넘어온 게이트 내일 닫을 수 있을까요?

    꽃집주인: 수도권이라 뒤 순서인 건 저도 아는데

    꽃집주인: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계속 게이트 열어 두기가 영 불안해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돌아온 건지 제일 궁금했던 꽃집주인의 요청이었다.

    강의도 지루했겠다, 곧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어 화면 밝기를 최대로 내린 채 답장을 보냈다.

    마왕: 그래도 순서가 있다 보니까 한 명 예외 두면 우르르 밀리거든요

    마왕: 혹시 그 사정이 뭔지 말해 주실 수 있으세요?

    꽃집주인: 여기서 말하긴 좀 그런데…….

    꽃집주인: 혹시 마왕님한테만 따로 말해도 괜찮나요?

    마왕: 다른 분들도 괜찮으신지?

    마왕: 투표(괜찮 or 안괜찮/중복 투표 불가)

    드래곤슬레이어: 투표 익명으로 바꿔 주세여

    거참, 요청 많네. 투덜거리며 투표를 다시 올리자 괜찮 쪽의 그래프가 쭉쭉 올라갔다. 이 정도면 다 투표하지 않아도 찬성일 게 분명했다.

    마왕: 그러면 꽃집주인 님 사정 듣고 판단해서 올릴게요

    마왕: 꽃집주인 님은 언제 시간 되시는지?

    꽂집주인: 지금 당장도 가능해요

    꽃집주인: 최대한 빨리 부탁할게요 좀 많이 급해서

    간절함마저 느껴지는 채팅을 빤히 바라보며 뭐가 그렇게 급한지 고민했다. 뭐, 던전 브레이크 예지라도 받았나?

    마왕: 제가 만남이 4시 이후에 가능하거든요? 그때 다시 옾챗방에 연락 드릴게요

    내가 연락 가능한 시간을 알려 주고 다시 칠판을 향해 고개를 드니 화이트보드가 어느새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주희 선배에게 필기 노트 보여 줄 수 있냐고 부탁이라도 해 볼까?’

    그 생각으로 옆을 슬쩍 돌아보자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놓은 선배는 빠른 속도로 빈 필기 노트에 칠판의 글씨를 써 내려갔다. 음, 저 선배도 휴대폰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군.

    어쩔 수 없이 교수님이 칠판을 지우기 전 미친 듯이 글씨를 휘갈겼다. 알아보지 못하는 글자는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해석을 해 줄 것이다.

    강의가 끝나자 가방에 필기 노트를 집어넣던 주희 선배가 제안했다.

    “이채현, 오랜만에 점심이라도 같이 먹을래?”

    “저야 좋죠. 학식도 슬슬 질리는데.”

    흔쾌히 승낙하며 몸을 일으켰다. 저 마이 웨이 강한 선배가 먼저 식사 제안을 하다니, 웬일이람. 내가 그렇게 반가웠나?

    항상 점심을 해결하던 학생 식당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교내의 식당으로 향했다. 1학년 때 학식을 먹기 싫어서 동기들과 꽤 자주 왔던 식당이었다.

    장어 덮밥을 먹을까, 연어구이 덮밥을 먹을까, 스테이크 덮밥을 먹을까. 키오스크 앞에서 고민 끝에 스테이크 덮밥을 선택했다. 연어구이 덮밥 선택을 마친 주희 선배와 자리를 잡고 앉으니 선배가 내게 물었다.

    “너 다음 수업 몇 시냐?”

    “3시요.”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것보단 카페에서 이야기하는 게 더 편하지?”

    “당연하죠. 그런데 왜요? 할 말 있으세요?”

    수저를 놓으며 심드렁하게 묻자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두 잔 떠온 선배가 내 앞에 물잔을 놓으며 여상히 말했다.

    “응, 내가 꽃집주인이거든.”

    콰아앙, 폭탄이 떨어졌다. 뭐, 뭐라고……?

    갑작스럽게 투척된 핵폭탄에 내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선배가 귀환자였다고?

    아니야, 이채현. 과대 해석하지 마. 진짜 꽃집 운영한다는 소리일 수도 있잖아. 아무 생각 없이 들이켜던 물을 사레가 들리기 직전 급히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 꽃집 운영하신다고요?”

    “무슨 말인지 알면서 그렇게 현실도피 하지 말고. 자세한 건 식사 끝나고 카페에서 이야기하자. 나 밥 먹으면서 심각한 이야기하는 거 딱 질색이거든.”

    전광판에 우리의 주문 번호가 뜨자 주희 선배가 몸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나도 멍한 정신으로 몸을 따라 일으켰다.

    내 스테이크 덮밥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도 아닌 바위를 던져 놓고선 태연한 얼굴로 식사하는 선배를 힐끔힐끔 쳐다보자 선배가 한마디 했다.

    “내 얼굴 닳겠다. 일단 밥이나 먹어.”

    밥을 다 먹기 전까진 절대 이야기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얼굴에 목 끝까지 차오른 질문 세례와 궁금함을 꾹 내리누르고 열심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세상 한번 더럽게 좁네.

    * * *

    카페에 앉아 방음 스킬을 치기가 무섭게 선배가 쓰윽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휴대폰 화면에 선명히 뜬 귀환자 오픈 채팅방의 오른쪽 채팅에는 꽃집주인이 내게 보냈던 채팅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려놓고 질문했다.

    “선배는 언제 귀환했는데요?”

    “다행히 시간 축이 어그러진 덕분에 그곳에 있었던 건 10년이지만 우리 날짜로 치면 그 세계로 떨어진 날에서 한 달 뒤에 귀환했어. 그 때문에 수강 신청도 놓쳐서 공통 기간에 부랴부랴 여석 잡았지만.”

    선배가 카페모카가 담긴 머그잔을 쥐며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폭탄 같은 말을 투척했다.

    “내가 너 챙겼던 것도 그래서야.”

    “네? 제가 귀환자인 거 알았다고요?”

    식겁해서 외치니 선배가 진정하라고 손을 우아하게 까딱였다.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까득, 씹으며 머리를 겨우 차게 식혔다.

    난 선배가 귀환자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내가 귀환자라는 게 그렇게 티 났나?

    선배가 한창 나를 챙기던 2학년 2학기는 게이트 사태가 터지기 전이었다. 2학기가 끝난 겨울방학에 게이트가 터졌으니까.

    내 표정에 혼란이 묻어 나왔는지 주희 선배가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안 그러던 애가 갑자기 적응 못 하고 겉도니까 나도 혹시나 했지. 너 방학 동안 어디 외국 나갔다가 온 거 아니냐고 소문 떠돈 건 알아?”

    500년 동안 전쟁과 배신뿐인 비문명 사회를 겪다가 문명사회로 돌아온 내가 귀환 후 몇 달간은 갑자기 유해진 인간 사회에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는 건 알았지만, 외국 나갔다가 왔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였다니.

    “실종 신고는 안 들어갔어요? 저는 사라진 그 두 시간으로 실종 신고 직전까지 갔는데 선배는 한 달이나 사라졌다면서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가 여름방학 한 달 동안 유럽 여행 다녀오기로 계획을 짰었거든. 그래서 다들 내가 여행 갔다가 온 줄 알더라.”

    하늘이 도운 게 아닐까. 사라진 기간 동안 차원 이동했다고 했으면 믿기는커녕 진지하게 정신과 상담 권했을걸.

    가볍게 미소 지으며 나와 소소한 대화를 나누던 선배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목을 감싸 쥐었다. 작게 앓는 소리가 선배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가벼운 긴팔 겉옷에 가려진 손목을 증오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던 주희 선배가 고개를 들어 나랑 시선을 마주했다.

    “게이트를 내일, 아니 내일이 아니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닫아야 해.”

    진지하고 간절함까지 느껴지는 눈빛에 말없이 선배를 바라보니 선배가 치가 떨린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놈이 찾아올 거야, 분명.”

    “그놈이요?”

    대답 대신 소매를 쓱 걷은 선배가 내게 손목을 보여주었다. 귀족 가문의 문장 같은 화려한 문양의 낙인이 화상 자국처럼 찍혀 있었다.

    “이게 뭐예요……?”

    낙인에 흐르는 마력에 표정을 굳히고 조심스럽게 선배에게 물었다. 아마 오래전부터 내려져 왔을 고대 마법. 목적은 아마 추적인가.

    “내가 떨어졌던 나라의 황제 놈이 내게 찍은 거야. 그 개새끼는 나를 자기 소유물로 알아서 내 일거수일투족이 제 손 안에 있길 바랐거든. 그 세계에 있던 10년 중 황궁에서 벗어나서 아무도 날 모르는 시골에서 꽃집 운영했던 1년간이 제일 행복하더라.”

    그래서 선배 닉네임이 꽃집주인이었구나.

    이거 완전 로판 집착 후회남과 도망 여주 클리셰 아니여. 남들 로판 찍을 때 난 왜 마계 정복 일대기 찍었냐.

    “트로웰……. 나와 계약한 땅의 정령왕이 이 낙인의 추적을 막아 줬지만 다시 귀환하며 계약이 끊겼어. 이 세계에는 정령이 없어서 지금의 나는 아무런 능력이 없고.”

    선배는 무려 정령왕과 계약한 정령사였다. 이 세계엔 정령이 없어 능력을 못 쓴다는 말을 듣자 내가 더 억울했다. 한순간에 능력이 사라졌다는 소리잖아.

    “그리고 며칠 전부터 이 낙인이 욱신거리기 시작했어. 분명 놈이 이곳으로 넘어올 거야. 그전에 게이트를 닫아야 해.”

    “혹시 선배는 어떻게 넘어왔는데요?”

    “트로웰이 정령왕들에게 부탁해서 차원을 열었어. 4대 정령왕의 힘이 모두 모여야 차원이 열린다나.”

    선배 계약 정령이었던 트로웰이 협조 안 해 주면 끝 아닌가? 그리고 트로웰이 계약자에게 그렇게 집착한 미친놈 말을 들어줄까?

    낙인까지 찍어서 일거수일투족 감시할 정도면 보통 미친놈이 아닌 것 같은데, 그 미친놈 집착으로 얼마나 고통받는지 옆에서 내내 지켜봤을 거 아니야.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정령왕들이 황가와 예전에 했던 약속이 있댔어. 단 한 번, 소원을 들어주기로.”

    선배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설마 그 소원을 이런 데에 쓸 리…….”

    말하다가 멈칫했다. 이제까지 읽었던 로판의 폭군 남주 놈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놈들은 사랑에 미쳐서 나라도 말아먹을 미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내일 당장 닫죠.”

    어차피 내일은 공강이었기에 시간은 남아돌았다. 미친 폭군 놈이 대학 졸업을 앞둔 선배를 끌고 가기 전에 내가 선배를 지켜야 했다. 구상해 놓은 졸업논문도 못 제출하고 미친놈에게 끌려가긴 억울하잖아.

    〉Local Channel-ROK

    〉귀환자 단체 채팅방

    〉〉공지 사항: 이름은 차원 이동한 곳에서의 직업, 혹은 세계관으로 부탁드립니다

    마왕: 내일 게이트 닫으러 가실 레이드 팟 구함

    드래곤슬레이어: 내일은 학교 가야 함 ㄸㄹㄹ

    농노1: 출근해야 해서…….

    소드마스터: 저도 하필 내일 길드 공대 레이드가 있어서요. 아쉽게 됐네요

    마탄의저격수: 저 가능합니다 지금 휴가라서

    무림맹주: 저요 오랜만에 몸 좀 풀죠

    성녀: 게이트 위치 어딘데요?

    성녀: 개강해서 수도권이면 좀 어렵

    백마왕: 저여 내일 알바 없는 날이라서 가능함요

    마탑주: 심심했는데 잘됐네ㅋ

    마왕: 힐러 없어요?

    진리를깨달은연금술사: 회복 포션 보내 드릴까요?

    마왕: 그럼 감사하죠ㅎ

    확실히 방학이 끝난 평일이라서 그런지 지원자는 방학 주말에 진행되었던 양산 게이트 레이드보다 현저히 적었다.

    “선배가 떨어졌던 세계에도 몬스터 있었어요?”

    “오염된 대지에서 태어난 괴물들이 있었어. 정령의 힘으로만 정화할 수 있어서 정령사들이 대우받았고. 황족이 특별했던 이유도 정령의 힘을 타고난 덕분이었지.”

    로판 세계관 같은 세계 설명을 들으며 나는 오늘도 실의에 빠졌다. 야, 관리자 나와. 남들은 저런 곳에 떨어뜨려 놓고 왜 나만 통수 마계 500년 체험을 시킨 거냐?

    * * *

    경기도 고양시.

    주희 선배가 넘어온 게이트가 열린 곳이었다. 어느 도시든 외진 곳 한 군데쯤은 있었고 귀환자들을 다시 지구로 데려다준 게이트들은 그런 곳들만 쏙쏙 골라 열렸다.

    “뉴페이스들이 좀 보이네?”

    검을 턱 어깨에 걸친 류사현이 건들거리며 걸어와 모인 이들을 쭉 훑었다.

    저번에 레이드를 함께했던 마탄의저격수와 천마, 백마왕, 새로이 합류한 무림맹주 윤선아와 마탑주와 추기경, 그리고 오늘 닫을 게이트의 주인공인 꽃집주인 주희 선배.

    나까지 총 여덟 명이 오늘 레이드의 파티원이었다. 아쉽게도 천우현은 오늘 협회와 함께하는 레이드가 있어서 불참했다.

    “이야, 이게 누구야? 맹주도 오셨네? 혹시 귀환자라고 감시 붙어 있는 거 아닙니까? 이제 우리 다 귀환자인 거 들키는 건가?”

    류사현은 히죽거리며 슬슬 윤선아의 속을 긁어 댔다.

    “그렇지 않아도 감시 인원을 따돌리고 오는 길이다. 천마 네놈이 웃는 면상을 보기 싫으니까 내 앞에서 그 얼굴을 치우도록.”

    허리춤의 검을 빼 든 윤선아가 류사현을 향해 이를 갈았다. 개와 고양이처럼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는 둘을 떼어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한국인끼리 왜 이래요, 진짜.”

    “마교와 정파가 어찌 친하게 지내겠습니까.”

    “용사랑 마왕도 친하게 지내는데 안 될 게 뭐예요? 아니, 나 진짜 궁금해서 그래.”

    “저 도덕경 꼰대 같은 인간이 훈수만 덜 둬도 충분히 친하게 지낼 용의가 있는데 말이죠.”

    윤선아와 류사현이 나를 사이에 끼고 서로를 긁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자 성별은 다르지만 하필 직업이 똑같아서 자꾸만 꽃꺾마의 탑주님을 생각나게 하는 마탑주가 무심하게 한마디 보탰다.

    “내가 봤을 땐 정파랑 마교를 떠나서 그냥 두 사람 성격이 사람 대 사람으로 안 맞는 거 같은데.”

    물론 성격은 울 탑주님이랑 전혀 닮지 않았지만.

    쓰고 있던 캡모자를 벗어 머리를 정리하고는 다시 쓱 눌러쓰는 마탑주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인벤토리에 넣어 놨던 박스를 꺼내어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총 열여섯 병의 유리병이 담겨 있었다.

    “이건 진리를깨달은연금술사 님이 협찬해 주신 S급 포션이고요, 한 병에 30만 원이나 하는 비싼 거니까 숨 간당간당해서 넘어가기 직전에만 드시라고 전해 주라네요.”

    “이 조그마한 유리병 한 병이 30만 원? 무슨 금이라도 넣고 만들었대요?”

    “세상 물정 모르시네. 포션은 F급도 5천 원부터 시작해요.”

    경악하는 백마왕을 향해 친절히 물가를 알려 주고는 한 사람당 두 병씩 포션을 배부했다.

    추기경이 내게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눈 반쪽을 덮어 음침하다는 느낌까지 주는 앞머리와 귀에 주렁주렁 달린 피어싱 때문에 도저히 성직자라고 보기 어려운 몰골이었지만 일단 자기가 추기경이었다고 주장하니 믿을 수밖에.

    포션을 받아 든 추기경은 내 앞에 멈춰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저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마탄의저격수에게 포션 두 명을 건네며 말하라는 뜻으로 눈썹을 추키자 추기경이 본론을 꺼냈다.

    “혹시 정화의 기도 한 번만 해 봐도 될까요? 삿된 것들에게 고통을 주는 기도인데 혹시 마왕님에게도 적용되나 궁금해서요.”

    이미 기도하듯 모으고 있는 두 손을 떨떠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새끼가 나한테 고통을 주고 싶다는 소리지?

    “될 것 같―”

    “기도가 안 먹히네…….”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내 앞을 쓱 스쳐 가는 추기경에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렸다. 쟤 지금 내가 허가 내리기도 전에 정화의 기도를 한 거야?

    저런 음침 또라이를 팀의 힐러로 데려가도 되는 건가……?

    눈이 마주치자 추기경이 맹한 얼굴로 손을 마주 쥐며 기도하듯 고개를 숙였다. 또 정화의 기돈가 뭔가 하고 있는 거 아니야?

    빈 포션 박스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다시 게이트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이번 게이트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아 스피드 게이트와 CCTV가 없었다.

    “혹시 저기는 누구? 저희 일행?”

    마탑주가 팔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껄렁한 걸음걸이로 걸어오고 있는 교복 입은 고등학생이 있었다.

    “행님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제가 고양시에 아직 선점이 안 된 게이트가 있다는 제보를 듣고 무려 학교도 째고 찾아왔습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본격 던전 솔플 레이드! 채널 고정해 주시고 구독과 좋아요, 눌러 주십쇼!”

    열심히 셀카봉에 끼운 휴대폰을 향해 떠들어 대는 익숙한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도 아니고 저번에 왔던 관종 잊지도 않고 또 왔네.

    “DJ 민?”

    “BJ 민이라고! 알파벳 못 읽냐, 이 뇌가리 실종된… 어라, 이거 데자뷰?”

    전에도 말했다시피 기억이란 건 거미줄처럼 엮이고 연결되어 있다 보니 아주 조금의 변수만 있어도 다시 떠오르기 마련이다.

    기시감이 곧 지워진 기억의 부활로 이어지는 건 말 안 해도 알겠지.

    『저주 ‘수면(A)’을 실행합니다. 설정 시간: 네 시간』

    혼란스러워하는 얼굴로 연신 고개를 기우뚱거리던 BJ 민이 픽 쓰러졌다. 그 위로 떨어진 휴대폰이 BJ 민의 코를 퍽, 치고 주르륵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옮겨 놓을 만한 데가…….”

    마탄의저격수는 이미 한 번 겪어 본 일이라 익숙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외진 곳을 찾고 있었다. 마탑주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BJ 민을 들쳐 멘 우리를 보며 물었다.

    “무슨 시체 유기해요?”

    “이게 다 저희 안 들키자고 하는 짓 아니겠습니까.”

    류사현이 히죽거리며 사람의 눈길이 절대 닿지 않을 외진 곳에 BJ 민의 머리를 털썩 내려놓았다. 나 역시 발을 잡고 있던 손을 망설임 없이 뗐다.

    영상과 기억 삭제를 마친 후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으로 BJ 민의 몸을 잘 덮어 놓고 제 손목을 꽉 움켜쥔 채로 게이트 앞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주희 선배의 옆에 섰다.

    “내가 짐이 되면 어떡하지? 난 이제 정령도 다루지 못하고 신체 능력도…….”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꾹 입술을 깨무는 선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나를 돌아보는 선배를 향해 씩 웃었다.

    “제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세요.”

    선배가 도움 주려고 손 내밀었던 그 후배가 바로 세계관 최강자인데.

    내 말에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선배가 게이트 안에 발을 디뎠다. 나도 인벤토리에서 발광 아티팩트를 꺼내 들며 선배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B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러 왔다. 모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니 주희 선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게 오염된 곳의 독기라서 공기를 정화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지금 정령의 힘을 못 써서…….”

    “이번엔 되네. 대체 정체가 뭘까.”

    마주 잡은 손을 푼 추기경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시선은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어느새 공기는 언제 악취를 풍겼냐는 듯 깨끗하게 정화된 상태였다. 나를 보는, 앞머리에 가려진 눈에 뚝뚝 넘쳐흐르는 호기심과 음침함에 이를 갈며 다짐했다.

    다음에는 절대 힐러로 추기경 안 데려와야지. 내가 순간 이동으로 모시고 오는 한이 있더라도 성녀를 데리고 와야지.

    타앙!

    마탄의저격수의 라이플이 총성을 냈다. 우리에게로 달려들던 몬스터가 총알에 관통당해 거꾸러졌다.

    타르에 푹 절인 것처럼 검고 끈적한 물을 뚝뚝 흘리며 시뻘게진 눈을 빛내는 짐승들이 슬금슬금 등장했다. 어느새 우리를 포위한 몬스터를 보면서도 다들 여유로운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되살아나는 석상보단 낫네!”

    뛰어들어 저를 덮치는 몬스터에게 검을 휘두른 류사현이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십사수매화검법 제10 초식, 매화만개(梅花滿開).”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매화 향이 흐드러지게 퍼져 나갔다. 꽃잎을 닮은 검기가 사방으로 흩어져 몬스터를 베어 나갔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터져 나오는 탄성에 윤선아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류사현을 힐끗 돌아보았다. 류사현의 눈가가 꿈틀하더니 곧바로 천마삼검 파천황의 초식을 선보였다.

    두 무림인이 천하제일 무림 대회를 펼치는 동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낀 격이 되어 버린 몬스터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추기경은 무슨 짓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 앞에 뛰어드는 몬스터를 녹이고 있었다. 저게 설마 ‘정화’인가? 저 새끼, 나 저렇게 녹이려 한 거야? 팔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뒤에서 가만히 팔짱 끼고 지켜보던 마탑주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슬슬 끝내죠.”

    번쩍, 바닥에 마법진이 빛나더니 마법진 위에 있던 몬스터들만을 노리고 번개가 정확히 내리쳤다. 새카맣게 탄 몬스터들이 바닥으로 투둑 쓰러졌다.

    아무도 반응이 없자 마탑주가 혀를 찼다.

    “7서클 마법인데 아무도 호응을 안 해 주네. 하여간 마알못들이랑은 상종을 말아야 해.”

    들으란 듯 중얼거리는 소리에 눈앞에서 메테오를 날려 주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짝짝짝, 마탄의저격수가 절도 있는 박수를 정확히 세 번 보냈다. 물론 안 보내니만 못한 박수였다.

    그렇게 한참을 몬스터를 해치우며 걷자 보스룸에 마침내 다다랐다. 가장 깊숙한 곳에서 연녹색 핵이 반짝 빛났다.

    “제가 던전을 한 번도 안 들어와 봐서 그러는데 저기 원래 그래요?”

    마탑주의 물음에 모두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핵 앞의 공간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손목을 꽉 쥔 선배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늦었어, 늦었다고…….”

    선배가 절망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간이 완전히 찢어지고, 그 틈에서 등장한 건 굉장히 잘생긴 미남자였다.

    황금을 녹인 듯한 찬란한 금발에 푸른빛이 도는 투명한 벽안. 신이 공들인 조각 같은 얼굴을 한 그 남자는 싸늘한 눈으로 우리를 훑더니 망설임 없이 선배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가 선배의 앞을 가로막는 것보다 저 남자, 그러니까 선배에게 집착하는 황제가 선배의 앞에 서는 것이 한 발 더 빨랐다. 선배의 숨소리가 한층 더 거칠어졌다.

    “줄리엣.”

    “호우.”

    마탑주가 나지막하게 덧붙인 추임새에 우리 나이대면 다 알 만한 모 보이 그룹의 노래가 생각나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시리어스한 재회의 장면이 개그물이 되어 버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크흡.”

    백마왕의 꾹 다문 입에서 참지 못한 웃음이 새어 나오자 황제가 경멸 서린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았다.

    가치 없는 것을 보았다는 듯 곧 시선을 거둔 황제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선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돌아가자,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일단 선배가 진정을 찾을 때까지 시간을 벌 작정으로 슬그머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사람 잘못 찾으신 거 같은데요. 제가 알기로 이분 성함은 줄리엣이 아닌데.”

    선배를 바라볼 때만 해도 열기로 일렁이던 눈빛이 나를 보자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차디찬 벽안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귀환자 무리를 쭉 훑은 황제가 짓씹듯 읊조렸다.

    “천것들이 감히 건방지게…….”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일곱 쌍의 눈길이 황제에게 쏟아졌다.

    저 집착 남주 황제 놈이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이곳에 있는 대부분이 황제에 꿀리지 않는 신분과 위치들의 소유자라는 거였다.

    각각 마계와 지옥을 지배했던 마왕이 둘, 천마신교의 지존인 천마에 정파를 대표하는 무림맹주, 진리를 탐구하고 기적을 선보이는 마탑 소속 마법사들의 우두머리인 마탑주, 교황의 최고 고문이자 교황 다음가는 최고위 성직자인 추기경. 마탄의저격수 님은 뭐 하다가 온 건지 알 수 없어서 패스.

    “우리 제국 황제였으면 확 파문해 버리는 건데. 눈 내리는 날씨에 얇은 옷 한 장 입고 교황청 앞에서 며칠을 무릎 꿇고 애원하는 꼴을 보고 싶게 만드네.”

    추기경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무슨 카노사의 굴욕이냐?

    황제와 말없이 대치하고 있자 주희 선배가 나를 살짝 밀치고 앞으로 나왔다. 한겨울 같던 황제의 인상이 선배의 얼굴을 보자 사르르 풀렸다.

    이를 까득, 간 선배가 자신을 향해 내민 황제의 손을 탁 내치며 말했다.

    “돌아가자고? 웃기지 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여기가 내가 네게 수백, 수천 번을 말했던 내 세계라고!”

    뒤로 갈수록 선배의 말은 악에 받친 외침으로 변해 갔다.

    “줄리엣, 진정하고…….”

    “줄리엣이라고 부르지 마! 내 이름은 한주희라고! 내 이름마저 네 멋대로 바꿔 놓고, 이제는 겨우 되찾은 내 인생까지 네 멋대로 휘두르려고? 제발 내 인생에서 꺼져!”

    그렇지. 멀쩡한 이름 로컬라이징해서 바꾸어 부르는 건 선 넘었지. 주희라는 이름이 어째서 줄리엣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나 역시 마계에서 이채현이라는 멀쩡한 내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었다. 언제나 인간, 마왕, 폐하, 이 세 호칭 중 하나로만 불렸으니.

    “짐을 버리겠다고? 감히 그대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나직하게 으르렁거린 황제가 낙인이 찍힌 선배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렇다면 어째서 10년 전에 내게 손을 내민 거지? 내가, 짐이 무슨 각오로 형님들을 죽이고 황제가 되었는데!”

    심지어 가성비 구원 서사였냐? 제발 지나가는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건넬 만한 선의에 구원받았답시고 집착하면서 인생 베팅하지 말고 정신과를 가라고.

    그런 거로 차원까지 넘으면서 집착하는 게 말이 되니? 그렇게 치면 초반 내가 Lv 1. 마왕이었을 때 유일하게 내 편이었던 세이블이랑 애쉬는 나에게 집착으로 모자라서 감금까지 당해야겠네. 그리고,

    “굳이 황권을 노리는 경쟁자들을 무슨 각오를 가지고 죽여야 하나……?”

    떨떠름한 얼굴로 볼을 긁적이며 황제 놈 들으란 듯 중얼거리자 옆에서 백마왕이 머리를 크게 끄덕이며 격한 공감을 표했다. 황제의 눈가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씰룩였다.

    있는 힘껏 황제의 손을 뿌리친 선배가 붉게 부어오른 손목을 매만지며 부러 매정하게 말했다.

    “네가 이렇게 자랄 줄 알았다면 난 그날 결코 네게 손을 내밀지 않았을 거야.”

    “짐을 상처 주려 한 말이라면 실패했어, 줄리엣. 그대에게 더 독한 말도 들어왔던 짐이 그 정도 말로 상처받을 리 없지 않나.”

    고구마 열 개를 먹은 듯한 감정에 가슴을 퍽퍽, 쳤다. 대화를 시도하는 데도 상대에게 말이 안 통하면 이 고구마는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 거죠? 사이다, 사이다가 필요해……!

    “하나만 물을게. 네 나라를 버리고,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세계로 홀로 넘어올 수 있어?”

    대답 없이 저를 바라보는 황제를 향해 선배가 비소했다.

    “아니잖아, 너는 그저 네가 가진 소유물에 나를 추가하고 싶은 것뿐이잖아.”

    “아니. 그대가 짐이 가진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건 맞다. 하지만 짐은 한 제국의 황제. 나라를 함부로 버릴 수는 없을 뿐이다.”

    그 말에 귀환자들이 6인실 병실에서 막장 주말드라마 보는 할머니들처럼 술렁이며 한마디씩 보탰다.

    “왜 못 버려?”

    “맞아, 왜 못 버림? 간절하지가 않구만?”

    “저 정도 각오로 뭘 하겠다고, 쯧쯧.”

    “진짜 소중해 봐라. 제국이고 황제 자리고,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오지.”

    이미 자신이 이룬 모든 것들을 버리고 이 세계로 돌아온 귀환자에게는 핑계로밖에 안 보였다. 아직 덜 간절하니까 저딴 말을 하는 거야.

    우리를 돌아보며 이를 악문 황제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왜, 뭐, 우리가 틀린 말 했냐? 귀환자들이 일제히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제국에 딱 한 번만 허가된 4대 정령왕의 힘을 겨우 이곳에 넘어오는 데에 썼으면서 나라를 위하는 척하지 마. 가증스러우니까.”

    “그건 짐이 그대를 사랑해서……!”

    “그건 사랑이 아니야. 이기심이자 집착이지. 상대방을 망가뜨리는 게 어떻게 사랑이야.”

    선배의 단호한 말에 황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스킬 ‘투명화(AA)’를 실행합니다.』

    투명화 스킬로 은신하고 황제 놈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갔다. 더 대화해 봤자 선배 속만 터질 것 같으니 저 공간으로 다시 밀어 넣고 차원 연결 끊는 게 현 상황에서는 제일 베스트다.

    “짐은 그대를 이런 세계에 두고 갈 수 없어. 그대도 알잖아. 짐에게 현자의 눈이 있다는걸.”

    황제가 애원하듯 선배에게 말했다.

    “이 세계는 쌓아 올린 카르마를 버텨 내지 못하고 곧 무너져 내릴 거다. 지옥이나 다름없이 변할 거야.”

    황제가 카르마를 입에 올리는 그 순간, 시린 벽안은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그 말과 그 시선에 멈칫했다.

    저놈 눈에 내가 보일 리가 없는데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저 벽안이 마냥 우연은 아닌 것 같아서.

    “카르마가 자기 자신의 생만을 짓누르는 사람이 있고, 쌓아 올린 카르마가 자기 자신의 생을 넘어 세계를 짓누르는 사람이 있지.”

    그 말에 7마계 마왕이 피를 토하며 내뱉던 저주 같은 예언이 떠올랐다.

    전쟁이 끝나 피로 물든 황무지와 햇빛 한 점 없는 흐릿하고 어두운 하늘 아래 나를 그 무엇보다도 증오스럽다는 눈길로 노려보며, 제 목숨을 깎아 내며 쏟아 내던 예언이.

    “네놈에게 달라붙은 저주는 결코 네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도록 끊임없이 너를 방해할 것이고, 네가 쌓은 카르마는 너를 지옥으로 끌고 들어갈 거다. 네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너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걸을 것이다.”

    크라토스의 봉인을 풀고 마신과 이 세계에서 마주했을 때 마신이 했던 말도 생각났다.

    “참, 다시 돌아오는 게 그대한테도 좋을 거야. 그대가 쌓은 카르마는 이 차원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거든.”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냥 마지막 순간 패배자가 내뱉은 원망이자 희망 사항이었을 뿐이야. 그저 내가 마계에 다시 돌아가게 만들려는 수작일 뿐이야.

    내가 필사적으로 부정하자 서늘한 비웃음이 황제의 입가에 걸렸다.

    “얼마나 업을 쌓은 건지. 달라붙어 있는 저주가 보통 사람이었으면 하루 만에 잠식되어 죽을 정도로 지독하다는 건 아나? 그런 저주마저도 몸과 혼을 잠식하지 못하고 발밑에서 주저하며 맴돌기만 하는 걸 보면 얼마나 잔혹한 인간이었는지 잘 알겠군.”

    꾹 입술을 깨물었다. 투명화를 하고 있기에 다른 이들이 내 표정을 보지 못한다는 것만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줄리엣, 저건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도살자다. 저런 위험한 자 옆에 그대를 둘 수 없어. 그리고 이곳에 있는 다른 인간들 역시…….”

    그는 나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거두고 백마왕과 천마, 추기경을 차례로 훑었다.

    하나같이 차원 이동한 세계에서 미친 짓을 하고 돌아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황제의 말에 조금 신뢰감이 생겼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내가 쌓은 카르마는 어떻게 덜어야 하는 거지?

    그러니 제발 이리로 오라고 팔을 벌린 황제에게로 선배가 한 발짝 다가갔다. 혹시 미혹에라도 걸린 게 아닌가, 싶어 급하게 선배의 팔을 잡아채려고 하던 그 순간 선배가 선수 쳐 입을 열었다.

    “곧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졸업 전까지 한 부의 졸업논문을 쓰겠어. 내가 어떻게 논문 주제를 정했는데.”

    인정한다. 겨우 선점한 논문 주제는 못 참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선배는 차츰 황제와 거리를 좁혀 갔다.

    “그리고 한 달 뒤에 2차 시험 결과 확인해야 한단 말이야!”

    주먹을 꽉 쥔 선배가 그대로 황제의 얼굴을 후려쳤다.

    드디어 등장한 사이다에 속으로 환호했다. 스프라이트 샤워다!

    맞은 부위를 손으로 감싸 쥔 황제가 벙찐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금 황제에게 손을……?”

    “뭐, 여긴 대한민국이거든? 여기서는 네가 이방인이자 돈 한 푼 없는 무국적자거든? 법은 자국민을 우선으로 보호하는 거 모르니?”

    쌓인 게 많았는지 기다렸다는 듯 쏘아붙이는 주희 선배에 황제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얼마나 이방인이라는 가스라이팅을 달고 살았으면, 쯧쯧.

    행정고시 1차 시험 합격한 취준생을 얕본 대가는 컸다. 우리의 세계는 이곳이었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곳 역시 이곳이었다.

    이대론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황제가 설득 방식을 바꾸었다.

    “그대와 계약했던 트로웰 역시 그대를 많이 그리워한다. 그러니―”

    “난 그 세계에 미련 없어. 이곳으로 넘어오면서 다 그쪽 세계에 남겨 두고 왔으니.”

    선배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우리처럼 다른 세계로 떨어져 돌아오지 못한, 혹은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조금의 미련이라도 있었다면 결코 다 버리고 귀환하지 못했으리라. 미련이 있다 한들 버틸 수 있는 미련이겠지.

    “그냥 좀 가라. 구질구질하게 집착하지 말고. X나 전에 있던 곳 황제 새끼 생각나게 만드네.”

    가만히 관조하던 마탑주가 더는 못 참겠는지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황제의 몸이 강제적으로 뒤로 쭉 끌려갔다.

    “안 돼! 줄리엣! 당신을 두고 갈 순 없어!”

    점점 가까워지는 차원의 틈에 황제가 발악했다. 마지막까지 제가 멋대로 지은 이름을 부르는 꼴을 보니 정말 한 고집 하는구나. 선배도 이런 놈 옆에서 참 고생했겠네.

    『차원 #SF1498-2의 근거지입니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차원 #SF1498-2와의 연결을 영구히 끊으시겠습니까?』

    핵에 손바닥을 대고 선배에게 눈짓했다. 차원까지 찢으며 찾아온 집착남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기회였다.

    저 황제 놈이 영영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보아야 선배도 더는 놈이 또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털어 내고 잘 살 수 있겠지.

    한 발짝 앞으로 나간 선배는 뻗어진 황제의 손에 잡히지 않을 거리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부디 잘 살아, 카르젠. 남을 구원으로 여기는 건 그만두고. 너는 이제 핍박받던 열다섯 살 소년이 아니잖아.”

    틈의 바로 앞까지 밀려난 황제를 보던 선배가 충고했다. 이게 평생의 마지막 인사임을 직감한 듯 황제가 간절하게 손을 뻗었다. 물론 그 손끝은 선배에게 닿지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황제가 드디어 선배의 본명을 부르며 애원했다.

    “주희, 제발 그러지 마……. 그대마저도 나를 버리면 나는 어떡하라는 거지?”

    “네 옆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아. 단지 네가 나만 보느라 그들을 보지 않고 있었을 뿐이지.”

    역시 촌철살인의 주희 선배. 말 한마디, 한마디가 뼈를 때리는구먼.

    뻗어진 선배의 손은 자신을 향해 내민 손을 잡는 대신 그대로 황제의 어깨를 떠밀었다.

    “영원히 안녕.”

    선배가 후련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마지막까지 선배만을 바라보던 황제가 절망 어린 눈빛으로 틈 사이로 사라짐과 동시에 망설임 없이 ‘예스’를 외쳤다.

    『차원의 연결을 끊어 냈습니다.』

    『게이트가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 - 00:05:00』

    차원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다. 이제 선배가 떨어졌던 차원 #SF1498-2가 다시 지구에 도킹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게이트를 향해 걸어가는 선배의 옆얼굴을 힐긋거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입 털어놓고 실상은 주희 선배가 다 했잖아?

    “전에 있던 차원에서 나에게 집착하던 놈이 차원까지 찢으며 찾아온다니, 좀 무섭네요. 무슨 버려도 다시 돌아오는 에나벨 인형도 아니고.”

    마탄의저격수가 소름이 돋는지 팔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백마왕이 속없이 웃었다.

    “전 무서운지는 모르겠는데. 딱히 찾아올 놈이 없어서. 아마 지옥에서는 저 잘 사라졌다고 축배 들고 있을걸요, 하하. 마탄의저격수 님은 찾아올 사람 있으신가 봐요?”

    “후임 하나가 좀 돌은 놈이라. 군대 생활 20년간 그런 미친년은 처음 봤네요. 뭐, 제가 이쪽으로 오는 길을 박살 내고 오다시피 해서 찾아올 방법은 없을 겁니다. 만약 넘어오더라도 제힘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고요.”

    백마왕의 물음에 마탄의저격수가 고개를 까딱이며 대답했다. 말을 들어 보니 마탄의저격수 님은 군부에 몸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주희 선배의 경우는 차원 이동한 세계에서 힘과 권력이 없었을 때 연고도 뭐도 없는 차원 이동자가 겪을 수 있는 상황 중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권력자의 눈에 들어 마음은 불편할지언정 몸은 그나마 혹사당하지 않고 편했으니까.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나중에는 정령왕이랑 계약하며 황제의 곁에서 벗어날 힘도 생겼던 것 같고.

    내가 만약 크라토스를 넘겨받지 못했으면 나는 내가 처음 떨어졌던 경계의 숲에서 마수 혹은 마족의 장난감으로 그대로 끔살당했겠지.

    전대 마왕 놈에게 고마운 건 크라토스를 넘겨준 거, 오직 그거 하나뿐이었다. 그러다가 마탑주가 황제에게 염력 스킬을 걸며 했던 말이 생각나 슬쩍 물었다.

    “마탑주 님도 혹시 꽃집주인 님처럼 황제에게 집착당했어요?”

    “저 말고 제 휘하 조교 마법사가 당했죠. 황제랑 소꿉친구라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미친 황제 새끼가 감히 내 소중한 연구 인력을 빼 가려고…….”

    회상만 해도 열이 뻗치는지 마탑주가 뿌득, 이를 갈았다. 그렇다. 마탑주는 폭군 황제에게 집착당하는 여주인공이 아닌 (논문을 위해) 국가 권력에 맞서 랩실 대학원생을 지키는 교수였던 것이다.

    게이트를 무사히 빠져나오자 5분이 딱 지났는지 게이트가 스르륵 사라졌다.

    게이트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수면 저주에 걸린 잠자는 숲속의 관종 BJ 민을 근처 땅으로 옮기는 거였다.

    가위바위보에서 패배한 백마왕이 입이 댓 발 나온 채로 코까지 골며 태평하게 자고 있는 BJ 민을 둘러업었다. 백마왕이 간절한 얼굴로 나를 자꾸만 힐끔거렸다.

    “진짜 저 버스 타고 가요? 오늘 알바 있는데.”

    “알바 없는 날이라면서요.”

    “방금 나오라고 점장님께 문자가…….”

    “휴대폰은 던전 안에서 안 터지고 만약 문자가 왔다고 한들 게이트 밖으로 나오고도 휴대폰 한 번도 안 봤잖아요.”

    “으어어, 순간 이동으로 편하게 가고 싶은데…….”

    “패배자가 혓바닥이 왜 이렇게 길어? 그리고 공짜 체험 한 번 시켜 준 거 가지고 나를 댁 교통수단으로 여기지 맙시다?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라더니, 딱 그 짝이네.”

    끄응, 반박할 말이 없는지 백마왕이 앓는 소리를 냈다.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런 백마왕을 약 올리듯 마탑주가 순간 이동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은 류사현 빼고는 나한테 딱히 순간 이동을 요구하지 않기에 남은 이들과 나란히 제일 가까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류사현도 순간 이동비를 택시비나 기차비로 계산해서 뜯어 가니 내게 함부로 순간 이동을 요구하지 않았다.

    워낙 외진 곳이라 다행히 버스정류장에 사람은 없었다.

    타이밍 맞춰 도착한 버스에 나랑 주희 선배, 그리고 BJ 민을 업은 백마왕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먼저 올라탔다.

    백마왕이 BJ 민을 버스정류장 의자에 내려놓자 걸어 놓았던 네 시간짜리 수면 저주를 곧바로 해제시켰다.

    『저주 ‘수면(A)’을 해제합니다.』

    『설정 시간에 다다르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해제하시겠습니까?』

    “해제.”

    수면 저주는 해제한다고 해서 곧바로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는 건 아니었기에 BJ 민이 눈을 뜨기 전에 연기 잘 하라는 뜻을 담아 백마왕의 어깨를 두드려 준 나는 곧바로 다시 게이트가 있던 곳으로 선배와 동반 순간 이동을 했다.

    “선배 집 주소 찍어 주실래요? 바로 집까지 보내 드릴게요.”

    휴대폰에 지도 어플을 띄우고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선배가 휴대폰을 받아 들며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

    “에이, 뭘요. 전 오늘 딱히 한 것도 없었는데.”

    전 몬스터만 잡고 집착남 황제 앞에서는 선배가 사이다 하드 캐리했죠. 선배 장르가 로판 가성비 구원 서사 역키잡일지는 꿈에도 몰랐지만.

    개인적으로 집착 후회남, 도망 여주는 제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클리셰라. 그리고 행시 1차 붙고 2차 결과 나오기까지 한 달 남았는데 다시 이세계로 끌려가면 억울하잖아.

    “네가 귀환자들을 모아 주지 않았다면 난 던전 보스룸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거야. 정령과의 계약이 끊기며 힘이 다 사라졌으니 그 오염된 몬스터 한 마리 죽이는 것조차 힘에 부쳤겠지.”

    자조하며 주소를 찍은 선배가 내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이제는 아마 욱신거릴 일 없는 손목의 낙인을 매만지던 선배는 나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네가 내 앞을 막아 줬잖아. 그래서 덕분에 마음이 놓였어. 적어도 네가 날 끌려가게 두진 않겠다는 믿음이 생기더라고.”

    “같은 귀환자로서 당연한 거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돌아왔는데 다시 끌려가게 놔둬요.”

    내가 씩 웃자 선배가 턱을 괴고는 곰곰이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너 아직 졸논 주제 안 정했댔지? 보답으로 주제 하나 줄게. 버리는 주제 아니고 내가 둘 중 고민하다가 아쉽게 포기한 주제니까 오해하지는 말고.”

    눈이 부셔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주희 선배가 어디 있지? 내 눈에는 빛밖에 보이지 않는데?

    희망으로 뽑은 타로 심판 정방향 카드. 뜻이 재회와 구원이라 했던가. 이건 주희 선배를 뜻하는 게 틀림없었다.

    오오, 내 졸논의 구원자여.

    * * *

    BJ 민은 뻑뻑한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뭐지? 깜빡 잠들었나?’

    흐릿한 시야에 점차 초점이 잡혀 갔다. 한산하기 그지없는 도로가 보였다.

    볼에 닿는 차가움과 딱딱한 감촉에 BJ 민(본명 김민재)은 제 자세를 자각했다. 그는 버스정류장 의자에 몸을 모로 한 채로 누워 있었다.

    “이런 X발, 또!”

    버럭 외치며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키니 옆에서 저를 힐끔힐끔 보고 있던 남자가 슬그머니 눈길을 거뒀다. 그의 팔을 덥석 붙잡은 BJ 민이 대뜸 질문했다.

    “저기요, 여기 어디예요?”

    “경기도 고양시요.”

    X발, 고양시까진 대체 왜 온 건데. BJ 민이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흐트러뜨렸다. 제가 무슨 용건으로 학교 가야 할 시간에 고양시까지 온 건지, 왜 여기서 자고 있던 건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를 않았다.

    ‘저번에도 어디 이상한 데에서 눈 떴는데 이번에도?’

    기면증이라도 있는 건가? 혹시 몰라 갤러리의 동영상을 들어가 봐도 오늘 찍은 영상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오늘은 영상을 찍어 올리는 날. 휴대폰 메모장에 분명 어젯밤에 방송 콘텐츠 메모해 놓은 것이 있을 것이다. BJ 민은 의외로 계획적인 MBTI J 유형이었다.

    메모장을 휙휙 넘기던 BJ 민이 외쳤다.

    “아, 맞다, X발! 미선점 게이트!”

    쓰윽 몸을 기울여 BJ 민의 휴대폰 화면에 뜬 메모장을 훔쳐보고 있던 백마왕이 그 외침에 흠칫하며 모르쇠 몸을 바로 했다.

    몸을 일으켜 후다닥 미선점 게이트가 있다는 곳으로 달려간 BJ 민은 게이트 하나 없이 깨끗한 주변에 미친 듯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내 방송 콘텐츠으으!”

    던전 솔플 레이드로 조회 수 1,000만을 찍겠다는 내 야심 찬 꿈이……! 제보자가 다른 곳에도 제보해서 선점당할까 봐 학교까지 째고 달려왔는데!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린 꿈에 BJ 민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망했다.

    한편, 텅 빈 버스정류장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백마왕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다음에는 오백마왕 님에게 휴대폰 메모장도 수정하라고 해야겠네. 어린놈이 양아치처럼 생겨서는 뭐 저렇게 꼼꼼해?”

    백마왕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쭉 빼고 BJ 민이 뛰어간 곳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버스가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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