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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클리셰 is 클래식 (19/33)

19. 클리셰 is 클래식

9월 1일.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하는 날이지만 주말이기에 방학의 실질적인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다들 오랜만이네요. 한 달 만인가?”

“한 달에서 9일 더 지났죠!”

“벌써 그렇게 됐어? 시간 참 빠르네.”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룸메이트들은 변한 게 없었다. 김나연은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달라붙어 오고 천세연은 여전히 나를 경계하고 진솔은 반갑게 모두를 맞이했다.

가벼운 점심 약속이었기에 곧바로 예약해 놓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음식이 나올 동안 시시콜콜한 근황을 털어놓았다.

“솔 언니는 회사 그만 안 뒀어요?”

“으응, 회사 복지가 꽤 괜찮은 편이라 헌터 활동은 부업으로만 하려고. 채현이 너는 어디 길드 들어갔어? 주태윤이랑 친하던데, 역시 러스터?”

“길드 안 들어갔어요. 나 그냥 언니처럼 프리 헌터 하려고.”

내 말에 김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요? 희귀 직업 A급은 길드 들어가면 계약금 억대라던데.”

“딱히 한 곳에 묶이고 싶지는 않아서.”

어깨를 으쓱하자 김나연이 축 처졌다.

“이쪽은 불러만 줘도 땡큔데……. A급은 진짜 다른 세계구나…….”

D급 실더였던 유선한도 파티를 떠돌며 게이트 스틸범 짓을 했는데, E급 실더인 김나연이 반듯한 중형 길드를 들어가기는 냉정히 말하자면 무리였다.

진지하게 한 C급 정도로 김나연의 등급을 올려 줄까 고민하고 있자 진솔이 천세연에게 질문했다.

“세연이는? 프리스트도 꽤 모셔 가려는 직업 아니야?”

“저도 오빠랑 프리 헌터로 있어요.”

“맞아, 세연이 오빠 천우현이잖아. 오빠가 랭킹 1위면 어떤 기분이야?”

금방 기운을 회복한 김나연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천세연에게 질문해 왔다.

“그냥 게이트 안에 들어갈 때 오빠가 날 버리고 갈 일은 없겠다, 그리고 이 게이트 안에서 죽을 일은 없겠다, 이 정도?”

“맞아, 힐러 버리고 튀는 놈들 있댔지. 확실히 든든하긴 하겠다.”

음식이 나와도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언니, 차 아직 안 뽑았어요?”

“장롱면허 3년이란다. 난 지하철 타고 다니는 게 편해.”

“지하철이 편하다고요? 언니가 지옥철을 안 겪어 봤구나.”

“올 때는 2호선 웬일로 널널하던데.”

그리고 나에겐 순간 이동 스킬이 있었기에 딱히 차를 사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간단히 카페에서 음료로 입가심을 하자 시간은 5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천세연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갈까요?”

어차피 더 나눌 이야깃거리도 떨어졌기에 다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나연과 진솔을 배웅하자 이제 남은 건 천세연과 나뿐이었다.

일부러 단둘이 남기를 기다렸지.

“너 혹시 진세빈 아니?”

내 물음에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천세연이 눈을 깜빡였다.

“그 사람이 누군데요?”

“주태윤 사촌 동생인데……. 몰라?”

고개를 끄덕이는 천세연의 얼굴에는 한 점 거짓도 담겨 있지 않았다. EX급 미친놈을 회귀자가 모른다고? 진세빈이 최종 보스가 아니었어?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요?”

“아무것도 아니야.”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키며 고개를 저었다. 잘 가라고 손을 흔들며 막 몸을 돌리려던 순간,

“채현 언니.”

“응?”

나를 부른 천세연이 제 오빠와 똑 닮은 눈웃음을 지었다.

“집에 갈 때도 꼭 지하철 타고 가세요.”

의미 모를 말을 남기고 천세연이 후련한 표정으로 뒤돌았다.

잠시간 가만히 서서 천세연의 말을 해석했다. 회귀자가 꼭 나한테 지하철을 타고 가라고 굳이 콕 집어서 이야기했다는 것은, 분명 지하철역에서 내가 해결해야 하는 사건이 터진다는 뜻이렷다.

‘그럼 당연히 순간 이동으로 가야지.’

귀찮게 뭐 하러 사건 터질 지하철역으로 가. 어두컴컴한 지하철역에 게이트 터지는 거 나름 헌터물 클리셰잖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순간 이동할 장소를 물색하다가 발걸음을 멈칫했다.

만약 정말 큰 사건이 일어나는 거라면? 예를 들면 내 부하 놈들 때문에 지하철역 안에 S급 게이트라도 터진다거나.

대중교통 이용하는 하이랭커가 얼마나 될까.

“아이씨, 찝찝하게…….”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결국 나는 발걸음을 돌려 신촌역으로 향했다. 신촌역은 언제나처럼 사람으로 바글바글했다.

곧 혼란과 어둠에 잠길 지하철역입니다. 가만히 스크린도어 앞에 서서 게이트가 터지기만을 기다렸다.

‘이쯤 되면 터져야 하는 거 아니야? 지하철 들어오는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지하철이 도착할 때까지 지하철역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지하철 화장실로 가서 순간 이동으로 집에 가?

고민하다가 그냥 지하철에 탑승했다. 환승역인 대림역에서 터질 수도 있잖아. 비어 있는 좌석 하나를 운 좋게 차지하고 오랜만에 밀린 꽃꺾마 정주행을 시작했다.

마탑주 강화 기간인지 마탑주 분량이 꽤 늘어났다. 혹시 내가 단 댓글 덕분인가. 김칫국을 한 사발 드링킹하며 정성스럽게 마탑주 찬양 댓글을 달았다. 열심히 댓글 달면 우리 탑주님이 남주가 될지 혹시 알아?

환승해야 하는 대림역 바로 앞의 신도림역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지하철 안으로 몰려들었다.

점점 지옥철이라는 명성답게 빽빽이 채워지고 있는 지하철 공간을 질린 눈으로 보다가 출입구까지의 거리를 계산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려면 미리 일어나 있어야 하나?

- 이번 역은 대림, 대림역입니다.

판단을 끝내고 몸을 일으킨 순간.

『위험 예지가 발동됩니다.』

덜컹―!

지하철이 갑자기 급정거했다. 어두컴컴한 창밖은 지하철이 멈춰 선 곳이 역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잘 터지던 인터넷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에 네트워크를 찾을 수 없다는 알림과 통화 불가 지역이라는 알림이 떴다.

“왜 갑자기 멈췄지? 고장 났나?”

“뭐야? 폰 왜 먹통이야?”

“혹시 인터넷 연결되세요? 제 폰도 안 돼서요.”

“왜 이래? 방송이라도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웅성웅성, 지하철 안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승객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휙휙 돌아보았다.

『A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눈앞에 뜨는 상태창에 표정을 굳혔다. 미친 거 아니야? 여기서?

완전히 잘못 짚었다. 게이트가 터지는 곳은 역 안이 아니었다. 지하철 선로였다.

휴대폰은 먹통에 창 바깥으로 보이는 건 칠흑 같은 어둠뿐. 점점 사람들의 불안감이 커져 갈 때 즈음, 기관사의 안내 방송이 열차 안에 울렸다.

- 승객 여러분들께 알립니다. 현재 열차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온 상황입니다. 곧 구조대가 도착할 터이니 동요하지 말고 침착하게 열차 내에서 구조를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게이트는 보통 생물체만 집어삼켰다. 그 말인즉슨, 지하철을 통째로 삼킨 이 게이트는 보통에서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나 있다는 소리였다.

돌연변이 게이트에 만원 지하철째로 갇힌 상황.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전화도 안 되고 문자도 안 되네.”

“와, 돌겠다. 구조대 언제 올 줄 알고 기다려? 그냥 내려서 게이트까지 걸어가면 안 되나?”

“그러다 몬스터 나오면 어떡하려고.”

“설마 열 량이나 되는 지하철 칸에 헌터 하나 없겠어?”

“우리 헌터 있는 칸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야?”

“헌터 있는 칸이 어디인지 알고 가? 그리고 X발, 하도 사람 많아서 몬스터랑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겠다.”

지하철 안이라는 공간이 안정감이라도 주는 건지 난리가 날 줄 알았던 승객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차분했다.

그때, 지하철이 세차게 흔들렸다. 쿵, 쿵! 무언가가 지하철을 박아 대고 있었다. 챙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휙 돌아갔다.

“으아아아악!”

흐릿한 비명이 앞쪽 칸에서 들려왔다. 이윽고 앞쪽 칸에서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에 그렇지 않아도 없던 공간이 숨도 못 쉴 정도로 빡빡해지고 있었다.

“미쳤어? 밀지 마! 넘어오지 말라고!”

“몬스터가 창을 박살 내고 객차 안으로 들어왔어요!”

“문 닫아! 연결 통로 문 얼른 닫으라고!”

내가 탄 열차 칸까지 퍼지는 피비린내에 승객들이 빠른 상황 파악을 마치고 곧바로 연결 통로의 철문을 닫았다.

“살려 주세요! 제발 열어 주세요!”

쾅쾅,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간절했지만 누구도 철문을 열고 옆 칸에 갇혀 버린 이들을 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곧 철문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다. 잠시간 객차 안에 숙연함이 감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빽빽이 찬 객차에 표정을 굳히며 철문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과호흡 증상이 왔는지 숨을 컥컥거렸다.

그러니까 보통 영화나 소설에서 지하철 안에 몬스터가 나타나면 그 지하철에는 승객이 얼마 타고 있지 않았다. 다들 좌석에 앉아서 가다가 몬스터가 나타나면 비명을 지르며 옆 칸으로 대피했다, 이 말이다.

그 널널한 지하철 공간에서 주인공은 멋있게 몬스터와 싸우는 액션신을 선보이고 말이다.

한 치의 공간조차 없이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이런 지옥철 안이 아니었다고.

“옆 칸으로 좀 넘어가세요!”

“옆 칸도 공간 없어요!”

와, 그나마 앉아서 간 게 천만다행이다. 저기에 끼었다고 생각해 봐. 벌써 사람들 기억 지우고 순간 이동으로 탈출했다.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앞칸에서 넘어오신 할머니께 망설임 없이 좌석을 양보하는 옆자리 여자를 보며 볼을 긁적였다. 그 훈훈한 광경에 내 앞에 서 있는 등산복 할아버지가 나를 보는 눈길이 심히 띠꺼워졌다.

옆자리를 본받아 어서 자리를 양보하라는 무언의 압박에 모른 척 눈을 피했다. 죄송하지만 나이는 제가 님보다 더 먹었습니다.

콰앙―!

다시 진동이 울렸다. 세차게 흔들린 열차 때문에 뒤통수가 창에 부딪혔다. 이번에는 또 어디에서 몬스터가 들이박고 있는 건지.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자 멍하니 앞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쾅!

또 충돌음이 울리며 열차가 흔들렸다. 유독 거세게 느껴지는 충돌과 곧바로 등에 전해져 오는 진동에 조심스레 뒤를 돌아본 나는 유리창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샛노란 눈을 마주했다.

이런 망할…….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몬스터가 이번에는 내가 있는 열차 칸으로 타깃을 잡은 모양이었다.

뒤로 물러나고 싶어도 객차에 공간이 없었기에 도저히 물러날 수가 없었다. 몬스터를 발견한 객차 안의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 댔지만 물러날 곳이 없는 건 나와 마찬가지였다.

“개폐구 찾아서 수동 개폐 장치로 지하철 문 열어요!”

내 외침에 곧바로 날카로운 반박이 돌아왔다.

“미쳤어? 밖에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데 문을 열라고?”

“맞아요, 여기서 몬스터가 더 들어오면 어떡해요!”

반박에 동조하는 의견들과,

“이 상태에서 몬스터 들어오면 답 없어요! 우리는 옆 칸으로 대피하지도 못하잖아요!”

“그래, 차라리 넓은 곳에 있으면 몬스터 피할 수라도 있지, 여기 있으면 그냥 다 같이 잡아먹히는 것밖에 더 돼?”

내 의견에 동조하는 목소리들.

열차 칸의 승객들이 서로를 향해 목소리를 높일수록 몬스터가 들이받는 창은 점점 금이 가고 있었다. 답답함에 결국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는 능력 못 쓰니까 문 열라고!”

막말로 나는 저 몬스터가 들어와도 안 죽는다니까? 죽는 건 댁들이지. 그러니까 제발 협조들 좀 합시다.

그 외침에 내게로 시선이 쏠렸다. 수군거림이 객차 안에 퍼져 나갔다.

“능력? 저 사람 헌터인가 봐. 헌터면 믿을 만한데.”

“어? 저 사람, 테이머 아니야?”

“테이머래! X발, 우리 살았어!”

“뭐 해, 빨리 문 열라잖아!”

여론은 순식간에 내 쪽으로 기울었다.

수동 개폐 장치를 당겨 몬스터가 있는 쪽의 반대편 문이 덜컹거리며 틈을 만듦과 동시에 강하게 창을 들이받은 몬스터가 기어이 지하철 창을 박살 내고 머리를 내밀었다.

키아아악―!

생생히 들려오는 몬스터의 울음소리에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서로를 밀치며 좁은 문틈으로 빠져나갔다. 아무도 완전히 문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빠져나가기에만 급급했지.

어느 정도 공간이 확보되고 사람들이 옆을 둘러볼 여유가 생기자 그제야 질서가 좀 잡히기 시작했다.

“밀지 말고 노약자부터 차례로 나갑시다!”

“아, 거 아저씨! 애 밀치고 얼마나 더 사시려고! 애부터 내보내요, 애부터!”

자리를 양보했던 옆자리 여자는 나가지 않고 객차 안에서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문까지 부축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콰앙―! 챙그랑!

“으아아악!”

“나가! 빨리 나가라고!”

몬스터가 창을 완전히 박살 내고 객차 안으로 들어오자 질서는 금방 흐트러졌다. 하긴, 누가 남의 안위가 제 목숨보다 중요하겠냐마는.

아직 객차에 남은 사람들은 꽤 많았고 그 사람들이 한꺼번에 문으로 몰리자 한국대 도서관 A급 게이트에서와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악! 나 끼었어! 숨 막히니까 밀지 말라고!”

“빨리 나가!”

“잠깐만요! 들어갈게요! 잠시만 비켜 주세요!”

출입구 근처에 있다가 인파에 떠밀려 아이의 손을 놓치고 제 의지와 상관없이 출입구 밖으로 떠밀린 애 엄마가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지하철 객차 안으로 들어오려고 시도했지만 제 한 몸 빠져나가기에도 급급한 사람들이 순순히 비켜 줄 리가 없었다.

“엄마아아아…….”

아이는 무정한 어른들에 의해 뒤로 떠밀려 울상인 얼굴로 엄마를 찾고 있었다.

깨진 창문으로 몬스터 두 마리가 더 들어왔다. 사탄의 흑염소처럼 생긴 몬스터는 2급 몬스터였고 이빨과 뿔이 아주 날카로웠으며 눈깔이 360˚ 돌아 있었다.

사탄의 흑염소는 아이의 앞에서 목을 돌아 있는 제 눈깔 각도로 꺾는 기행을 보여 주었다. 그 그로테스크한 광경을 눈앞에서 직관한 아이가 주춤하며 뒷걸음질 치다가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왕의 권능 ‘복종’을 발동합니다.』

『이미 타 존재의 지배 아래 놓인 개체입니다.』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대폭 축소됩니다.』

이미 이 사탄의 흑염소 놈들은 타 존재의 지배를 받는 존재였고 내가 놈들에게 시킬 수 있는 건 영향력의 축소로 인하여 눈동자 깜빡거리기나 콧구멍 벌렁거리기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이 지하철 객차에서 페리를 부르기에는 객차가 페리의 몸집보다 작아서 불가능했다. 지하철 수리비 나한테 청구하면 어떡해.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지하철 문 활짝 열어요!”

남은 이들이 일제히 문에 달라붙어 문을 활짝 열었다. 아이 엄마가 문 앞을 빽빽하게 메운 인파 너머에서 아이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엄마의 목소리에 반응한 아이가 등을 돌려 출입구로 뛰어갔다. 맹수에게 등을 보이는 건 맹수의 공격성을 더욱 자극하는 행동이죠. 저기 사탄의 흑염소 한 마리가 결국 아이를 덮칩니다.

내가 염력으로 몬스터를 끌어당김과 거의 동시에 옆자리 여자가 아이를 감싸 안았다. 여자는 놀란 얼굴로 나뒹군 몬스터를 보다가 놀란 가슴에 울먹이는 아이를 달랬다.

“괜찮아. 언니도 헌터야.”

감동적인 장면에 속으로 박수갈채를 보내기도 잠시, 옆쪽에서 깨진 창문을 타고 몬스터가 예상치 못하게 여자와 아이를 덮쳐 왔다. 힘껏 아이를 출구로 떠민 여자의 얼굴이 비장했다.

대체 몇 급이길래 저렇게 겁도 없이 2급 몬스터 앞을 턱턱 막아?

‘시스템 간섭’

『시스템에 접근합니다.』

『관리자 ‘이채현’ 님 확인되었습니다.』

스카우터가 곧바로 옆자리 여자의 정보를 띄웠다.

『차유림』

* 계열 - 법사

* 직업 - 원소술사(공기)

* 등급 - F

* 스킬 - E급(목록 보기), F급(목록 보기)

* 스테이터스 - 체력 D, 힘 E, 민첩 E, 지력 C, 정신력 C, 마력 F

F급……? 내가 아까 C, D급도 일반인들 밀치고 지하철 밖으로 나가는 걸 봤는데 지금 F급이 저렇게 2급 몬스터를 막고 있는 거야?

어째서 전래동화 속 산신령이 정직한 나무꾼에게 금도끼와 은도끼까지 안겨 줬는지 알 것 같다. 이러면 안 줄 수가 없잖아.

몬스터를 향해 산들바람 수준의 바람이 불어왔다. 그 정도가 차유림의 한계였다.

협회장님, 제가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S급으로 올라갈 자격이 있다는 확신이. 차유림 씨에게 관리자 재량으로 슈퍼패스 드리겠습니다.

『관리자 권한을 사용합니다.』

『각성자 ‘차유림’의 능력에 개입합니다.』

『수정 기능을 사용합니다.』

『등급 변경: F → S』

『승인이 완료되었습니다.』

사탄의 흑염소를 닮은 몬스터가 길게 찢어진 입을 쩍 벌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멍하니 앞을 보고 있던 차유림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칼날 같은 돌풍이 불어와 몬스터의 가죽을 촤악, 찢어 내며 몬스터를 저 멀리로 밀쳤다.

“S… S급이라고? 말도 안 돼…….”

입을 틀어막은 차유림이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압축된 바람이 작은 허리케인처럼 불어와 다시 그에게 달려들려는 몬스터를 집어삼켰다. 바람이 잦아들자 너덜거리는 몬스터의 시체가 지하철 객차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크, 그래, 이거지! 위기의 순간 S급으로 재각성하는 선한 F급 주인공! 클리셰 is 클래식이다!

요즘 주인공들은 다들 S급에서 SSS급은 기본으로 달고 시작하는데 가장 낮은 등급 주인공이 꼭대기로 재각성하는 이 클리셰는 언제 봐도 안 질린다고.

치밀어 오르는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박수를 치자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객차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나를 따라 박수를 쳤다. 박수갈채를 받으며 차유림이 머쓱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저희 애 지켜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차유림 덕분에 아이와 무사히 만난 아이 엄마가 차유림의 손을 잡고는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넸다.

지하철 밖으로 나오자 어두컴컴한 게이트가 나를 반겼다. 이미 다들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있는 터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밝았다. 인벤토리에서 발광 아티팩트를 꺼내어 켰다.

다른 칸의 사람들도 밖으로 나오길 택한 듯 옆 칸의 출입문도 열려 있었다.

“생존자 분들, 지하철 출입문 다시 닫고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에 헌터 분들도 계십니다! 문 꼭 닫고 오셔야 합니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지하철 출입문을 닫는 이들을 힐금 본 후 나도 사람들 틈새에 섞여 생존자 무리에 합류했다.

팔짱을 끼고 우뚝 서 있는 익숙한 새 부리 가면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뭐야, 진짜 포커스야?”

“짭커스 아니겠지? 나 저번에 같이 게이트 휘말린 놈이 저 가면 쓰고 있어서 엄청 안도했는데 포커스가 아니라 포카리였단 말이야.”

“랭킹 2위가 왜 지하철 타고 다녀? 짭 아니야?”

랭킹 2위가 지하철 타고 다닐 수도 있지. 거참, 사람들. 융통성 없기는.

“헌터들은 이쪽으로.”

헌터들은 일반인들과 따로 모여 있었다. 헌터 무리에 합류해 얼굴들을 빠르게 스캔했지만 아는 사람은 없었다. 포커스가 박수를 짝짝, 치고는 입을 열었다.

“다들 주목해 주세요. 현재 상황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마력으로 만들어 낸 3D 홀로그램이 허공에 펼쳐졌다. 동굴 같은 던전 안을 대각선으로 비스듬하게 멈춘 지하철이 막고 있었다.

“지하철을 기준으로 왼쪽은 던전 안쪽과 연결되어 있고 현재 우리가 있는 오른쪽은 게이트가 있는 쪽입니다.”

그래서 몬스터들이 왼쪽 창문을 깨고 지하철 안으로 침입한 거였구나. 출입문 꼭 닫고 오라고 한 것도 이 이유였고.

포커스의 설명에 한 시민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럼 게이트로 나가면 되지 않나요?”

“문제는 게이트 위치가 지도에 잡히질 않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던전을 클리어해야지 게이트 위치가 드러나는 종류인 듯합니다.”

게이트 위치가 잡히지 않는다는 말이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는지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일단 지하철째로 사람들을 삼킨 것만으로도 충분히 변칙적인 게이트였다. 그러니 빨리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이곳에서 나가는 것이 제일 베스트였다.

“게이트가 있는 쪽이라면서. 난 나갈래. 계속 걸으면 게이트 보이겠지.”

한 사람의 선동에 꽤 많은 사람이 동요했다.

“맞아요, 어차피 여긴 지하철이 막아 주고 있어서 안전하잖아요!”

“나도 그냥 걸어서 나갈래.”

점점 사람들이 두 파로 갈라지고 있던 그 순간.

쾅! 쾅!

지하철 문의 투명한 유리문을 통해 미친 듯이 출입문에 머리를 박아 대는 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점점 금이 가는 유리창을 보는 생존자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침내 유리창을 박살 낸 후 머리를 내밀고 우렁차게 울던 몬스터가 전기에 지져졌다.

새카맣게 탄 채로 툭 쓰러지는 몬스터를 보던 포커스가 게이트 쪽으로 나간다고 주장했던 이들을 향해 고개를 쓱 돌렸다.

“보시다시피 이곳 역시 완벽하게 안전한 곳이 아니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걸어서 게이트 밖으로’파 사람들이 슬금슬금 생존자 무리에 다시 합류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었다.

* * *

“구조대는 언제 온대요?”

“애초에 우리가 지금 게이트에 휘말렸는지 바깥에선 알까? 휴대폰도 안 터지고, 뭐 아무것도 바깥에 소식을 전할 만한 게 없는데…….”

“설마요. 지하철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는데 당연히 수색하겠죠.”

생존자 무리가 희망 회로를 돌리는 한편, 헌터들은 절망 어린 소식을 접했다.

“혹시 시간 확인하신 분?”

한 헌터의 물음에 모두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했던 때가 몇 시였지? 갑자기 터진 게이트에서 시간을 확인할 정신이 있을 리가 없었다.

왜 묻냐는 눈빛들에 묵직한 한숨을 내쉰 그 헌터가 말했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오고 난 후 시간이 3분밖에 흐르지 않았어요.”

“3분요? 체감상 30분은 된 것 같은데.”

“그래요, 여기에서 30분 넘게 있었던 거 맞아요. 그런데 우리 휴대폰이랑 시계는 게이트 바깥의 시간이 표시되잖아요.”

“그럼 그 말은 설마…….”

“네, 이곳 시간의 흐름이 바깥 시간보다 현저히 느려요. 구조만 기다리고 있기엔 생존자들이 분명 지쳐 갈 거예요. 그러면 통제하기도 점점 힘들어질 테고요.”

그렇다면 답은 하나네. 차마 먼저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이를 대신해서 제안했다.

“저희가 먼저 게이트 닫죠. 몇 명은 남아서 생존자들 지키고요.”

“이 게이트가 A급인데요? 지금 저희 숫자로 어떻게 클리어해요.”

곧바로 반박이 돌아왔다. 누가 봐도 던전 안쪽으로 들어가기 꺼리는 얼굴에 등급을 확인했다. C급 검사였다. F급도 몸 던져서 사람들 지켰는데, 괜한 핑계 대지 말고 그냥 들어가기 싫다고 말해.

“서른세 명이면 충분하지 않아요?”

“저기요, E급 이상 던전 안 돌아봤죠? 꼭 이렇게 티를 낸다니까. A급 게이트를 어떻게 헌터 서른세 명이 클리어해요? 그리고 막말로 지금 다들 등급 높아? 하이랭커들이 외제차 뽑아서 타고 다니지 지하철 타고 다니겠냐고. 우리 다 B급도 못 넘는 쩌리잖아.”

“S급인 포커스도 있고 A급인 테이머도 있잖아요!”

가면을 쓰고 있어 가면 너머의 표정은 보지 못하지만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포스로 손을 휘저은 포커스가 C급 검사에게 차갑게 말했다.

“그럼 그쪽은 남아서 생존자 지키세요. 물 그만 흐리고. 지금 상황에서는 게이트 닫는 게 맞아요.”

C급 검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차마 S급인 포커스 앞에서 대거리하지는 못하겠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우터를 띄워 놓고 생존자 무리를 훑자 역시나 예상대로 상태창이 툭툭 튀어나왔다. 생존자 무리를 향해 손짓했다.

“미등록 각성자 분들도 이쪽으로 오세요. 절대 신고 안 합니다.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내 말에 생존자 무리에서 서너 명이 주춤거리며 몸을 일으켜 헌터 무리에 합류했다. 끝까지 모르쇠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해했다. 나도 저랬으니까.

무리에 합류한 이들 중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깜박였다.

‘농노1 님?’

‘마왕 님?’

입을 벙긋거리며 익숙한 서로의 호칭을 불렀다. 음. EX급인 나에, 한반도부대장 포커스에, 곡괭이마스터 농노1 님까지 있으니 이번 게이트는 문제없겠군.

“생존자들 지키고 통제할 헌터들은 남기고 가야 하는데…….”

“제가 남을게요.”

차유림이 망설임 없이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역시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구나. 따스해지는 가슴에 차유림을 보며 훈훈한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혹시 등급이?”

“S급입니다. 방금 재각성으로 등급 올랐어요.”

“제가 옆에서 봤어요.”

차유림의 당당한 말과 내가 심드렁하게 거든 한마디에 헌터들은 금방 수긍했다.

“그럼 다섯 명 정도만 이곳에 남고 나머지는 던전 안쪽으로 들어가죠.”

선택지의 어느 한쪽이 쉬운 길이라면 그쪽으로 우르르 몰리겠지만 지금 이곳에 휘말린 헌터들의 앞에 내밀어진 두 선택지의 난이도는 비슷했다.

던전 안쪽으로 들어가면 1, 2급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고, 남으면 다섯 명이서 저 많은 수의 인원을 통제하며 지켜야 한다.

“저도 남겠습니다. 관리국 요원이라 사람들 통제하는 건 자신 있습니다.”

한 명이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오, 공무원은 믿을 만하지.

두 명이 더 생존자 무리 지킴이에 지원하자 다섯 명이 채워졌다. C급 검사가 다섯 명이 어떻게 이 많은 인원을 통제하냐고 구시렁거리다가 눈초리를 받은 건 덤이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예, 다들 꼭 무사히 돌아오세요.”

차유림과 포커스, 두 S급이 가볍게 악수했다. 생존자 무리 지킴이들은 생존자 쪽으로 향하고, 게이트 클리어 팀인 우리는 던전을 가로막은 지하철을 바라보았다.

『스킬 ‘대규모 순간 이동(SS)’의 범위 안에 포함되었습니다.』

마력이 몸을 감싸고 우리는 순식간에 지하철 왼쪽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포커스도 주태윤이랑 같은 메이지였지. 천우현 덕분에 1티어에서 떡락해 버린 메이지.

각자 소유한 발광 아티팩트로 인해 시야 확보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키아아악―!

우리 앞에 나타난 사탄의 염소 떼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A급이라는 이유로 반강제로 선두에 선 나는 몰려오는 몬스터 무리를 훑으며 페리를 소환했다.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페리, 물어!”

선두에서 달려오던 몬스터가 페리의 이빨에 모가지를 뜯겼다. 몬스터 무리의 대열이 흐트러지자 그때를 놓치지 않고 헌터들이 공격을 퍼부었다.

곡괭이마스터의 정확한 곡괭이질을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원 샷, 원 킬이구먼. 단연 눈에 띄는 건 포커스였다. 화려한 스킬과 능숙한 레이드 실력. 역시 최고 혼란기였던 게이트 사태 초기 헌터다웠다.

거대한 덩치로 몬스터 무리를 헤집고 다니는 페리를 뿌듯하게 바라보다가 내게 덤벼 오는 몬스터의 옆구리를 발로 뻥, 걷어찼다. 내 발에 차인 사탄의 염소가 저 멀리 날아갔다.

덜덜 떨며 뒷걸음질 치던 헌터 한 명이 내 뒤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확 몸을 피해 버릴까 하다가 E급이 숨지 않고 지원한 게 갸륵해서 봐줬다.

2급 몬스터인 사탄의 염소 떼가 바닥에 모두 널브러지자 그제야 헌터들은 한숨 돌렸다. 급조된 파티의 유일한 C급 힐러 한 명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부상자에게 힐을 걸었다.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힐러가 부탁했다.

“포션 가지고 계신 분은 포션 드셔 주세요. 제가 C급이라 힐량이 적어요.”

“아, X발. 힐러 한 명이야? 파티 밸런스 X망이네.”

당연함. 다들 한 시간 전까지는 게이트에 휘말려 파티 레이드를 뛰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지하철 탄 시민 1이었음.

짧은 휴식과 치료 후, 우리는 다시 던전 안쪽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아, 사람만 없었어도 5분 컷 하고 나오는 건데.

이번에 우리의 앞을 가로막은 건 아무렇게나 뭉쳐진 진흙 같은 생물체 무리였다. 뭐야, 이거? 이게 1급이라고? 아무리 봐도 1급 몬스터의 비주얼은 아니었다.

페리가 입을 쩍, 벌리는 순간,

“엄마!”

갑자기 내 옆에 있는 이가 외쳤다. 엄마? 당황하여 옆을 돌아보자 멱살이 잡혔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미쳤어? 지금 우리 엄마 죽이려는 거야? 빨리 저 몬스터 치워!”

저 진흙 더미가 엄마라고? 미친 건 댁이겠지. 눈깔이 제대로 삔 거 아니야? 같이 멱살을 붙잡고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마구 흔들었다.

“님네 엄마가 왜 여기 계시겠어요! 저거 몬스터라고요!”

“…어, 그러네? 우리 엄마가 왜 저기 계시지?”

내 멱살을 쥔 손을 스르륵 푼 헌터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끄아아아악!”

갑자기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와 다급히 비명의 진원지를 바라보니 몬스터 하나의 품에 꽉 안겨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헌터가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 구해요! 몬스터랑 너무 붙어 있는데 어떻게 공격―”

“안 돼! 공격하지, 컥, 마……!”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축 늘어졌다. 툭,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사망한 헌터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무언가에 홀린 듯 진흙 더미 몬스터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중얼거리자 내 뒤에 서 있던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테이머 씨는 저것들이 다 본모습으로 제대로 보이시는 모양이네요.”

“그럼 뭐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내 물음에 진흙 더미 몬스터 중 정확히 하나를 가리키며 여자가 말을 이었다.

“전 저게 지금 제 할머니 모습으로 보이거든요. 몇 달 전에 돌아가셔서 여기 계실 리가 없지만.”

“할머니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가 절 키워 주셨거든요.”

생판 남에게 가정사를 방출하며 씁쓸하게 웃은 여자는 자신이 가리킨 진흙 더미 몬스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방금 내 멱살을 잡은 이는 몬스터를 엄마로 인지했지.

‘제일 소중한 이의 형체를 띠는 건가? 환술?’

내가 저것들이 모조리 본모습으로 보이는 이유는 저 몬스터들의 환술에 걸려들 급이 아니어서고.

그리고 그 환술에 걸려들어 몬스터에게 가까이 다가가 안기면 사망한 저 헌터처럼 온몸의 뼈가 으스러져 죽는 거다.

“우와, 삐쳤다고 여친 내버려 두고 자기 혼자 택시 타고 집에 간 개새끼 아니야?”

“뭐지, 울 어무니는 지금 집에서 낮잠 주무시고 계실 텐데.”

“우리 아빠 오늘 강원도로 낚시 가셨다, 이 몬스터 새끼들아!”

“악! 저건 우리 호두가 아니다! 호두가 아니라고! 상식적으로 호두일 리가 없잖아!”

“아, 저는 저희 아들로 보이는데 오늘 시어머니가 맡아 주셔서요. 어머님이 돌도 안 지난 애 데리고 대중교통 이용하실 분도 아니시고.”

“와이프인데… 친구들이랑 제주 여행 가서 여기에 있을 리가…….”

“핳, 우리 도야지캣은 나를 보며 그렇게 반갑게 꼬리를 흔들지 않아! 나를 속이려면 더 연습하고 와라!”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모두가 환술에 걸려들지는 않았다.

환술에 걸려들지 않은 이들은 홀린 듯이 진흙 더미 몬스터에게 다가가는 이들을 만류하며 차마 제 손으로 몬스터를 해치지 못하는 그들을 대신해 몬스터를 해치우고 있었다.

또 누가 환술에 걸렸나 살펴보던 중 익숙한 사람이 시야 끝에 들어왔다.

“…자넷.”

중얼거리던 농노1이 진흙 더미 몬스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급하게 달려가 농노1의 뒷덜미를 잡고 쭉 잡아끌었다.

“정신 차려요! 쟤는 자넷이 아니라 머드잖아요!”

다급한 손길에 질질 끌려온 농노1이 힘없이 웃었다.

“알아요, 저게 몬스터인 걸 아는데……. 자넷이 살아 있을 리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아는데…….”

주르륵, 농노1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냥 가짜라도 좋으니 다시 한번만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아련한 중얼거림에 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를 몰라 떫은 얼굴을 했다. 오. 이분, 차원 이동한 세계에서 아주 끝내주는 사랑을 했나 본데?

페리가 감상에 빠질 틈을 주지 않고 머드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맛이 어지간히 없는지 바로 퉤, 머리통을 뱉어 내는 페리를 멍하니 보던 농노1이 눈물을 소매로 닦고는 곡괭이를 고쳐 쥐었다.

설마 자기의 자넷을 죽였다고 우리 페리의 정수리에 그 곡괭이를 내리찍으려는 건 아니겠지……?

“덕분에 벗어났네요.”

의심 어린 눈초리로 저를 지켜보는 내게 꾸벅 고개를 숙인 농노1은 곧바로 페리에게로 달려들더니 페리의 바로 옆에 있는 진흙 더미 몬스터의 머리에 곡괭이를 내리꽂았다.

제 앞에서 자넷을 흉내 낸 것에 화풀이라도 하듯 진흙 더미 몬스터를 양민 학살하는 농노1을 보다가 내 옆으로 쓱 다가오는 이에게 무심하게 손을 흔들었다.

새 부리 가면 아래 얼굴을 가린 포커스가 변조된 음성으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 했네요.”

“그러게요, 카페 게이트 이후로 만나는 건 처음인가?”

물론 1학기 기말고사 기간에 다시 한번 24시간 카페에서 맨얼굴로 만난 걸 나도, 알고 포커스도 알지만 헌터명도 못 바꾸는 서열1위포커스의 성공적인 힘숨찐을 위해서 슬쩍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아참, 소원 이룬 거 축하해요.”

소원? 설마…….

“진짜 게이트 밖으로 몬스터 불러낼 줄은 몰랐는데. 원하던 대로 화려하게 데뷔하셔서 좋으시겠어요.”

“…아, 네, 그렇죠, 하하.”

비꼬는 것도 아닌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포커스의 말에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둘러댔던 말이 씨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사건으로 인해 포커스는 나를 제대로 컨셉충으로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슬슬 진흙 더미 몬스터 무리도 정리가 되고 있었다. 농노1처럼 깊은 사연을 가진 게 아니라면 다들 빠르게 정신 차리고 환술에서 벗어났다.

소중한 것이라고 해 봤자 보통은 가족, 애인, 친구, 반려동물, 이 정도였으니.

마지막 진흙 더미 몬스터가 농노1의 곡괭이에 명을 달리했다. 사망자는 한 명이었다. 끝까지 공격하지 말라고 하며 몬스터의 품 안에서 죽어 간 이.

대체 누굴 봤기에 죽어 가는 순간까지도 제 전신의 뼈를 으스러뜨리는 몬스터를 공격하지 말라고 말렸을까. 시신의 앞에서 짧게 묵념하며 생각했다.

“시신은 돌아오는 길에 수습하죠.”

포커스의 제안에 사망자의 시신이 몬스터에게 뜯어먹히지 않게끔 던전 한구석에 숨기고 계속해서 던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차유림은 초조한 얼굴로 게이트 쪽과 던전 안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게이트 쪽에선 구조대가 올 기미도 안 보이고 던전 안쪽에서는 레이드 파티가 돌아올 기미가 안 보였다.

“A급 게이트는 레이드 시간이 꽤 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랭킹 2위도 있지 않습니까.”

그때 옆에 있던 관리국 요원이 그의 걱정을 읽었는지 그를 다독여 왔다. 멋쩍게 웃은 차유림이 변명처럼 대꾸했다.

“몰랐네요. A급 레이드를 한 번도 안 해 봤거든요.”

“아, 방금 재각성하셨다고 하셨죠. 혹시 원래 등급이 뭐였습니까?”

“F급이요.”

차유림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놀라움이 묻어 나오는 시선을 마주하며 차유림은 씩 웃었다.

F급 헌터로 살아왔던 그의 삶은 초라하긴 했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 차유림은 그렇게 자기 자신한테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

키이익!

그 순간 깨진 지하철 창으로 침입해 온 몬스터가 생존자 무리를 발견하고 눈을 빛내며 달려왔다. 곧바로 강한 돌풍이 몬스터를 찢었다. F급이었을 때는 꿈도 못 꾸었던 광경이었다.

차유림은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등급이 S급으로 재조정됩니다.』

처음에 그 상태창이 눈앞에 떴을 때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평생을 F급으로 살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폐급이라고 조롱받고 무시받으며,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이들을 외면하고 제 안위부터 챙기는 헌터들을 보며 내가 저 등급이라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생각만 하는 그런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 줄 알았다.

D급 헌터가 A급으로 재각성했다는 기사가 떴을 때도 그 행운이 자신에게 올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 그 행운이 찾아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이채현이 차유림의 생각을 읽었다면 코웃음을 치며 그 말을 정정해 주었으리라. 이건 행운이 아닌 네 힘으로 얻어 낸 기회라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냥 게이트 찾아서 나가자니까.”

“왜 구조대 안 와요? 지금 우리 기다린 지 세 시간 넘은 거 같은데.”

“저기요, 관리국 요원이 연락 수단 하나 없어요?”

“어떡해, 내 휴대폰 고장 났나 봐. 시계가 이상해.”

기다림에 지친 생존자들이 하나둘 불만을 내뱉기 시작했다. 금세 또 생존자 무리가 시끌시끌해졌다.

“설마 헌터 자기들끼리 나간 거 아니야? 저쪽이 게이트 있는 쪽, 이쪽이 던전 안쪽 아니냐고!”

“목숨 걸고 들어간 사람들에게 그게 할 소립니까?”

“인터넷 안 터지니까 죽겠네…….”

“이한율, 뛰어다니지 말고 얌전히 앉아 있어! 너 자꾸 그렇게 돌아다니면 헌터 형이 이놈 한다.”

아이들은 가만히 앉아 있는 거에 질려 뛰어다니고, 휴대폰도 안 터지는 곳에서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은 괜히 아무 죄도 없는 헌터들과 옆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오만상을 찡그린 채로 욕을 중얼거리던 C급 검사가 검을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아, 좀! 다들 닥치고 있으면 어디가 덧나나?”

그의 거친 행동과 짜증 어린 외침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당황한 관리국 요원이 다급히 다가가 C급 검사의 어깨를 잡았다.

“생존자 분들도 현재 두려우시고 긴장한 상태이시니까 저희가 배려를…….”

“어린놈의 새끼 말 꼬락서니 보소. 너 몇 살이냐! 어디서 어른한테 싸가지 없이 큰 소리야?”

해병대 모자를 쓴 노인이 벌떡 일어나 C급 검사를 향해 삿대질했다.

“어유, 선생님도 조금만 진정하시고…….”

“허벅지살이다, 이 쌍놈 새꺄.”

C급 검사가 양손의 중지를 곱게 치켜들고는 흔들었다. 씩씩거리며 지팡이를 치켜올리는 노인의 앞에서 검사가 때려 보라며 정수리를 마구 들이밀었다.

이게 대체 몇 번째지. 또다시 예고 없이 일어난 싸움을 말리며 차유림은 몇 시간 전에 했던 제 선택을 후회했다.

그냥… 그냥 던전 안쪽 따라갈 걸 그랬어…….

* * *

“보스룸이다!”

발광 아티팩트의 불빛 끝에 보이는 거대한 방에 누군가가 기쁨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던전 제일 안쪽의 보스룸에 당도했다.

반복되는 전투와 손발이 맞지 않는 파티원 조합에 피로가 꽤 쌓인 채였으니 레이드의 끝을 알리는 보스룸이 반가울 만도 했다.

보스룸의 안으로 들어가자 텅 빈 보스룸이 우리를 반겼다. 보스룸의 가장 안쪽에 붉은색 핵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보스 몬스터가 없는데요……?”

“이런 경우가 있었나?”

이미 그런 경우를 한 번 겪어 본 포커스만이 여유로운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경우는 내 부하가 내 명령을 듣고 보스 몬스터를 보스룸에서 치운 거였고, 이 경우는 진짜 없는 거고.

바닥에 발 올리자마자 함정 쏟아지는 거 아니야? 푹 꺼진 바닥 밑에 죽창이 박혀 있다든가, 석궁이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다든가, 철퇴가 천장에서 덜컹 내려와서 휘둘러진다든가…….

영화와 소설에서 보았던 온갖 함정들을 상상하며 경계를 곧추세웠다.

“솔직히 게이트가 지하철까지 삼킨 것도 처음 있는 일이죠.”

“위험할 거 같은데……. 그냥 구조대 올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될까요?”

“시간 흐름 봐서는 며칠 기다릴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물도, 식량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며칠씩이나 버텨요.”

겁도 없이 바닥에 성큼 발을 내디딘 헌터 하나가 곧바로 던전의 핵을 향해 걸어갔다.

의외로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벽에서 석궁이나 창이 날아오는 일도 없었고, 바닥이 푹 꺼지며 함정이 나타나는 일도 없었다.

“…뭐 하세요?”

하지만 그 헌터는 계속 뒤를 힐끔거리기만 하더니 절반은커녕 5분의 1도 못 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심스러운 물음에 뒤를 돌아본 헌터가 다급하게 외쳤다.

“여기 이상해요! 분명 다섯 시간 넘게 걸었는데 아직도 여기예요!”

“다섯 시간이요? 그쪽 핵 깨겠다고 나선 지 1분도 안 지났어요.”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헌터가 다시 우리가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땀에 흠뻑 젖은 몸이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

바깥과 게이트 안의 시간이 차이가 나듯, 던전의 보스룸과 게이트 안의 시간도 차이가 나는 모양이었다.

화살로 핵을 겨눈 궁수가 활시위를 당겼다. 빠르게 날아가던 화살은 100m도 채 가지 않아 툭 떨어졌다. 법사들의 스킬도 마찬가지였다. 스킬은 중간도 못 가 족족 소멸했다.

마지막 관문에서 맞이한 난관에 헌터들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그렇다면 순간 이동으로……!”

“저기까지 좌표 계산이 도저히 안 되는데요.”

포커스가 새 부리 가면을 긁적이며 말했다.

계산해 보니 체감상 꼬박 하루를 쉬지 않고 걸어야지 던전의 핵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미친 짓이야…….”

누군가가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몬스터나 때려잡게 해 줄 것이지. 어떤 싹수없는 차원이 던전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 놨는지.

“어? 문이 있는데요?”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궁수가 미닫이문을 드르륵 밀자 보스룸의 문이 완전히 닫히며 둥근 돔 형태의 방이 되었다. 궁수의 옆에 있던 힐러가 왈칵 화를 냈다.

“미쳤어요? 그걸 왜 닫아요!”

“왜요, 다시 열리잖아요.”

어깨를 으쓱하며 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던 궁수가 다시 문을 닫았다. 달칵, 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렸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궁수가 급히 문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문은 전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옆에 있던 헌터에게 멱살을 잡혔다.

“X발, 그러니까 왜 장난질을 하고 지랄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궁수를 보는 눈초리들은 싸늘했다. 중도 포기도 못 하고 갇혔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어떡할까요? 이제 아무래도 방법은 체감상 하루를 걸어서 저 핵까지 도달하는 것뿐인데.”

포커스의 여상한 그 말에 헌터 한 명이 울컥하는 얼굴로 쾅! 발로 문을 걷어찼다. 동시에 원형 바닥이 번쩍, 빛났다.

“…뭐야?”

바닥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날개가 너덜너덜하게 찢긴 채로 손에 독사를 쥔 천사상이었다. 쓰윽, 문을 걷어찬 헌터에게 미끄러지듯 다가온 천사상이 입을 벌렸다.

- 나는 구시언.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알며 의문을 가진 문제를 해결해 줄 터이니 질문하라.

“뭐? 뭐를 질문하라는 거야?”

질문을 받은 헌터가 잔기침을 내뱉으며 반문했다.

- 그것이 네 질문인가?

급하게 그 헌터의 입을 틀어막고 물었다.

“이곳의 시간의 흐름을 정상으로 되돌릴 방법을 알려 줘.”

- 오직 나를 부른 자만이 내게 질문을 할 수 있다.

입을 막은 손을 떼고 문을 발로 차 구시언을 불러낸 헌터의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방금 들었죠? 제가 했던 질문 똑같이 하면 돼요.”

내 강경한 눈빛에 주춤하며 고개를 끄덕인 헌터가 내 질문을 그대로 옮겼다. 구시언의 입이 다시 열렸다.

- 퍼존을 찾아라. 그는 숨겨진 것을 모두 알고 있으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대답을 마친 구시언이 그를 불러낸 헌터를 향해 팔을 뻗었다.

- 소환의 대가를 받아 가겠노라.

구시언을 소환해 낸 헌터가 눈 한쪽을 움켜쥔 채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구시언은 피투성이가 된 손에 무언가를 꽉 쥐고 다시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향했다.

곧 바닥이 구시언을 삼켰다.

모두가 급히 달려와 그 헌터를 살폈다. 왼쪽 눈이 있어야 하는 자리가 뻥 뚫려 있었다. 그럼 구시언이 쥐고 있었던 게 이 헌터의 눈알?

급히 힐을 퍼부어 지혈을 마친 힐러가 다급히 포션을 외쳤다.

“독기에 중독됐어요!”

시커멓게 변하는 안색에 인벤토리를 뒤져 해독 포션을 꺼낸 이가 구시언을 소환한 헌터의 입에 병 주둥이를 쑤셔 넣었다.

꿀꺽, 목구멍으로 포션이 넘어가자 그의 안색이 차츰 나아졌다. 왼쪽 눈을 잃은 헌터를 한쪽에 고이 눕혀 놓고 나머지 이들이 토론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분이…….”

“문을 발로 찼죠.”

선명하게 신발 자국이 나 있는 문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하필 신발 자국은 문에 음각된 문양 중앙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우리 주변의 벽을 살피자 문과 마찬가지로 문양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슬쩍 벽을 밀어 보니 벽이 회전목마처럼 빙그르르 돌아갔다. 벽에 음각된 문양은 총 72개.

안경을 쓱 올린 남자가 전형적인 오타쿠 특처럼 묻지도 않은 설명을 늘어놓았다.

“황도 12궁을 6분할한 솔로몬의 72악마, 그것처럼 악마를 봉인해 놓은 진인가 봅니다. 참고로 솔로몬의 72악마를 부르려면 인장이 필요한데 그 인장은 게티아에 서술…….”

“어쩐지 던전 몬스터가 사탄의 흑염소처럼 생겼더라.”

“크흡, 사탄의 흑염솤.”

안경남의 말을 자르며 투덜거렸다. 옆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양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빙그르르 벽을 돌린 포커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퍼존을 찾으라 했는데 퍼존이 여기서 뭔 줄 알고…….”

“찾는 건 둘째 치고 누가 부를 건데요. 소환의 대가를 누가 감당할 거냐고요. 저 사람은 눈 한쪽이었지만 만약 악마가 원하는 게 심장이나 영혼이면?”

옆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따지듯이 쏘아붙였다. 얼마나 더 많은 악마를 거쳐서 해답에 도달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럼 그때마다 대가를 바칠 희생자는 꼭 필요했다.

“으아아아! 난 나가겠어! 나갈 거라고!”

패닉이 왔는지 궁수가 악을 지르며 굳게 닫힌 문을 마구 두드렸다. 바닥에 다시 번쩍, 빛이 들어왔다. 문양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번쩍이던 빛을 보았는지 문을 두드리던 손을 멈칫한 궁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옷의 등 부분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가고 있었다.

바닥에서 올라온 검은색 표범이 궁수에게로 다가오자 그가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벽에 막힌 그는 표범을 내려다보며 덜덜 떨었다.

- 나는 오세. 네가 원하는 어떤 지식과 진리이든 네게 전달해 줄 수 있다. 무엇을 알고 싶은가.

그래도 운이 좋네. 도움이 안 되는 악마는 안 불러냈잖아. 사시나무 떨듯 떨며 도움을 청하는 듯 우리를 돌아보는 궁수에 친절하게 해답을 알려 주었다.

“저 문양들이 각각 어떤 악마를 나타내는지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세요.”

더듬거리며 궁수가 그대로 내 말을 옮기자 상체를 일으킨 표범, 오세가 궁수의 이마에 앞발을 짚었다. 고양잇과답게 몸이 쭉쭉 늘어났다.

- 소환의 대가를 받아 가겠다.

앞발을 거둔 오세가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 박힌 입을 쩍 벌렸다. 콰직, 궁수의 오른손이 물렸다.

“아아악! 안 돼애애!”

궁수가 절망과 고통이 뒤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입에 세 개의 손가락을 물고 오세가 만족스럽게 뒤돌아 바닥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바닥이 다시 오세를 삼켰다.

“내 손!”

검지, 중지, 약지가 잘린 손을 쥐고 궁수가 오열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모두 실수로라도 벽을 건드릴세라 벽에서 최대한 몸을 떨어뜨렸다.

“악마 새끼. 다른 것도 아니고 궁수 손가락을 가져가냐…….”

치가 떨린다는 목소리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한순간에 손가락을 잃게 된 궁수가 불쌍하긴 했지만 일단 이곳을 클리어하고 나가는 게 먼저였다.

“그냥 하루 걸어서 핵까지 가면 안 돼요……?”

“만약 이 던전이 시간에 장난질을 쳐서 하루가 아니고 1년이 걸리면? 10년이 걸리면?”

“절대 안 돼! 그럼 내 눈은? 내 눈은 누가 보상해 주는데!”

구시언을 소환했던 헌터가 발악하듯 외쳤다. 그의 남은 한쪽 눈이 광인처럼 번들거렸다.

정신을 거의 놓다시피 한 궁수에게로 비틀거리며 다가간 외눈 헌터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벽 앞까지 끌고 갔다. 그러고는 머리채를 잡아 강제로 얼굴을 들게 했다.

“퍼존 문양 찾아.”

외눈 헌터의 손에 벽이 천천히 돌아갔다. 내심 바라던 일이었기에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멍하니 돌아가는 벽을 응시하고 있던 궁수가 문양 하나를 덜덜 떨리는 왼쪽 손으로 가리켰다. 휙, 외눈 헌터의 고개가 나머지 헌터들을 향해 돌아갔다.

“불러.”

그의 한쪽 눈이 기이한 빛으로 번뜩였다.

“퍼존 부르라고.”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누가 저 꼴이 될 걸 뻔히 알면서 자원하려 하겠는가.

“그래, 죽이면…….”

고개를 숙이고 엄지손톱을 까득, 물어뜯으며 음침하게 중얼거리던 한 헌터가 퍼득 고개를 치켜들었다.

“보스몹을 죽이는 개념으로 악마를 죽이면 되잖아요! 저것도 결국 몬스터 아니에요? 대가를 받아 내기 전에 죽이자고요!”

그리고 말리기도 전에 문양의 정중앙에 손을 턱 대었다. 모두 안도와 불안이 뒤섞인 얼굴로 그 헌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에서 목이 잘린 인간의 몸에 사자의 잘린 머리를 얹고 있는 악마가 나타났다. 생기 없이 뻣뻣이 굳은 사자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는, 노래하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나는 퍼존. 숨겨진 것을 모두 알고 있으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단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비밀스러운 모든 것과 신적인 것들에 대해, 그리고 세상과 그 창조를 감싼 진실을 네게 말해 줄 수도 있지.

“이곳의 시간의 흐름을 정상으로 되돌릴 방법이 뭐지?”

딱딱한 물음에 다행히 거쳐 가야 할 악마의 이름이 아닌 해답이 곧바로 나왔다.

- 느릿하게 움직이는 초침과 분침, 시침의 속도를 돌려놓아라. 그것들은 시간을 먹으며 움직이느니.

그 말에 모두 반사적으로 돔 형태의 방을 훑었다. 핵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곗바늘이 어디 있다는 거야?”

- 에리고스를 찾으렴. 그는 숨겨진 것을 찾아낼지어니.

소환자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도 퍼존은 착실하게 답을 해 주었다. 또 악마를 불러내야 한다는 것에 남은 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 소환의 대가ㄹ,

푸욱, 말을 마치기도 전에 검날이 악마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검자루를 양손으로 꽉 쥔 소환자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미친놈처럼 웃었다.

“하, 하하……! 대가는 무슨. X까세요, 빌어먹을 악마 새끼야! 뭐 해요, 다들 공격 안 하… 커억!”

퍼존의 손이 소환자의 가슴을 관통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소환자가 무너져 내렸다. 아직도 펄떡거리는 심장을 한 손에 든 퍼존이 쓰윽 몸을 돌렸다.

- 소환의 대가를 받아 가겠도다.

만족스러워하는 목소리가 고요한 방을 울렸다. 심장을 들고 바닥으로 향하는 퍼존을 공격하려 스킬을 캐스팅하는 포커스를 급히 제지했다.

“하지 마요. 공격하면 그쪽도 죽어요.”

저 악마들이 괜히 봉인되어 있는 게 아니었다. 따지자면 보스급 1급 몬스터 세 마리와 한꺼번에 맞서는 급이었다. 가면 너머의 눈으로 나를 보던 포커스가 순순히 물러났다.

곧, 바닥이 퍼존을 삼키고 사람들은 모두 심장을 잃은 채 쓰러진 시체에서 최대한 멀어졌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처참한 시신의 상태에 누군가가 헛구역질했다.

싸늘하게 식은 시체와 신체 부위를 잃고 정신을 놓은 두 명.

지금 남은 이들의 미래일지도 모르는 모습에 두려움이라도 느낀 건지 무리에서 울음을 겨우 참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이곳에서 나가려면 우리는 다시 악마를 불러야 했다. 누군가의 희생을 발판 삼아.

“에리고스, 에리고스…….”

흥얼거림에 가까운 중얼거림이 침묵만이 감돌던 방에 들려왔다. 누군가의 입에서 참지 못하고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빙그르르 돌던 벽이 딱 멈췄다. 에리고스의 문양 앞에서 한쪽 눈을 잃은 헌터가 우리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다음은 누구?”

당연히 선뜻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정하죠.”

제일 공평한 게임 아니냐. 내 제안에 껄끄러움이 가득한 얼굴들로 스물아홉 명이 모였다.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수를 나누어 가위바위보를 진행했다.

『직감이 발동됩니다.』

가위를 낸 사람들이 절망했다. 가볍게 쥔 내 주먹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쓱 거뒀다.

최후의 한 명이 정해질 때까지 공포의 가위바위보가 이루어지는 걸 지켜보다가 높은 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악마가 단 세 명만 거쳐 간 것도 기적이었다. 만약 운이 좋지 않아 저들이 도움 되지 않는 악마를 소환해 냈다면 저들과 함께 정신 줄 놓은 사람들이 더 늘어 있었겠지.

마침내 최후의 한 명이 정해졌다.

“하아…….”

한숨을 내뱉은 포커스가 망설임 없이 에리고스의 문양으로 다가갔다. 잠시 멈칫하더니 뻗은 손이 문양의 중앙을 턱 짚었다.

바닥에 빛이 번뜩이고, 중세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나타났다. 손에는 창과 깃발, 뱀을 쥔 채였다.

- 나는 에리고스. 숨겨진 것을 찾아내며, 다가올 일을 미리 알 수 있다. 예지를 원하는가? 이곳에 숨은 것이 당신의 눈에 드러나길 원하는가?

“숨겨진 것을 드러나게 해 줘.”

포커스의 대답에 바닥이 마구 흔들렸다. 쩌저적, 갈라지는 바닥의 밑에서 거대한 초침과 분침, 시침이 올라오고 있었다.

시계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여야 할 초침은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거의 움직임이 없는 수준이었다.

- 소환의 대가를 받아 가겠다.

에리고스가 손을 뻗자 모두의 얼굴에 긴장이 맴돌았다.

가장 큰 전력인 서열1위포커스에게 과연 무슨 대가를 받아 갈 것인가. 우리 작가님 손가락은 절대 안 되는데.

예상과는 달리 에리고스는 포커스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확히는 그가 쓰고 있는 메디코 델라 페스페를 향해.

가면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포커스가 한숨을 내쉬며 가면을 풀었다. 새 부리 가면을 얻은 에리고스는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았다.

포커스는 고개 숙인 채 필사적으로 맨얼굴을 가리며 인벤토리를 뒤적이고 있었다. 포커스의 손에 잡혀 인벤토리에서 딸려 나온 예비용 가면을 보며 생각했다.

‘…지독하다.’

곧바로 다시 가면을 착용하자마자 에리고스가 바닥으로 사라졌다. 포커스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외눈 헌터가 중얼거렸다.

“진짜 가면만 받아 갔다고……?”

앞사람들은 운이 없었던 걸로.

드디어 우리 앞에 드러난 거대한 시곗바늘을 내려다보았다. 안경남이 안경을 쓱 올리며 입을 열었다.

“분명 퍼존이 이 시곗바늘은 시간을 먹으며 움직인다고 했죠. 그러면 답은 하나네요. 저희의 수명을 바쳐야 한다는 뜻!”

“어떻게, 그리고 얼마큼?”

“글쎄요…….”

제일 중요한 물음에 답을 하지 못한 안경남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이미 지식in 뺨치는 악마 응답기의 맛을 알아 버린 이들은 문양이 음각된 벽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무엇이든지 대답해 준다는 애 누구지? 오세였나? 걔 다시 부르죠. 포커스 님이 부르면 되겠네요.”

“왜 포커스 님이 다시 불러요? 공정하게 가위바위보로 다시 정해야죠!”

“어차피 포커스 님은 가면만 대가로 바치면 되잖아요.”

“그건 아까 그 악마 취향이고요! 이번에도 손가락 뜯어 갈지 누가 알아요?”

포커스가 다시 불러야 한다, 아니다 가위바위보 해서 다시 정해야 한다로 나뉘어 헌터들이 다투던 중 바닥에 빛이 번뜩였다.

바닥에서 다시 나타나는 검은색 표범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벽을 짚고 있는 이에게 향했다. 그는 바로 오세에게 손가락을 잃은 궁수였다.

훌쩍 뛰어오른 오세가 다시 궁수의 앞에 섰다.

“시곗바늘에 수명을 바치는 게 맞아? 만약 맞다면 어떻게 수명을 바치는 건지,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되돌리는 데에 수명 몇 년이 필요한지 말해.”

- 수명 80년이 필요하다. 수명을 바치는 방법은 초침을 쥐면 된다.

소환의 대가로 왼쪽 손의 손가락까지 내준 궁수가 후련하게 웃으며 시곗바늘로 향했다. 초침은 마침 우리의 발치에서 깔짝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손가락을 잃은 채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걸까, 아무도 그런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남은 수명은 알아서 잘 부탁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궁수는 손가락이 두 개 남은 손으로 초침을 덥석 쥐었다. 뒤돌아 있어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등이 점점 구부러지고 체격이 왜소해지며 머리가 하얗게 세어 갔다. 드러난 목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52…….”

숨이 꺼지기 직전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숫자 하나를 내뱉은 궁수가 옆으로 툭 쓰러졌다. 동시에 시계의 초침이 보통의 시계보다는 느릿하게, 하지만 방금보다는 현저히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폭삭 늙어 버린 시체를 들어 퍼존의 희생자 옆에 놓았다.

“52년을 바쳤단 소리겠죠? 지금 우리가 서른 명이니까 두 명 제외하고 다들 1년씩만 기부하죠.”

“테이머님 몬스터 수명 기부는 안 될까요?”

“그쪽 도야지캣인가 하는 고양이 키우죠? 그쪽 반려동물 수명 내놓으라는 거랑 똑같은 소리 한 거야, 당신.”

“죄송, 실언했네요.”

궁수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는지 멍하니 정신을 놓은 외눈 헌터와 악마를 불러낸 포커스를 뺀 나머지 이들이 초침을 잡고 수명을 1년씩 내놓았다.

1년이면 평균수명 천 년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수명이 빠져나가는 기분은 썩 좋진 않았다.

초침이 완전히 보통 시계의 속도로 돌아왔다. 바닥에 발을 내디디고 걷자 시간의 흐름이 원래대로 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제일 먼저 핵에 다다라 붉은색 핵에 슬쩍 손바닥을 올렸다.

『차원 #SF9001-0의 근거지입니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차원 #SF9001-0과의 연결을 영구히 끊으시겠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끊고 싶었지만 던전 안에 갇혀 있는 그 수많은 생존자들을 통솔하여 5분 안에 게이트에서 나가기는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무리였다.

미련 가득 남은 손짓으로 손바닥을 떼자 곧 다른 이들에 의해 핵이 완전히 박살 났다.

“문 열린다!”

방금까지만 해도 열리지 않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 나란히 누운 두 구의 시체는 건장한 체격의 헌터들이 업어 들었다.

정신을 놓은 외눈 헌터까지 챙긴 헌터들이 급히 보스룸을 빠져나가는 걸 맨 뒤에서 지켜보다가 보스룸이 텅 비는 순간 미리 캐스팅해 놓은 스킬을 시전했다.

『스킬 ‘타임스톱(L)’을 실행합니다.』

시간이 완전히 멈췄다. 멈춘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건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망설임 없이 벽으로 걸어가 퍼존의 문양에 손을 올렸다.

바닥이 스르륵 열리며 다시 지상으로 나온 악마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악마 놈들이 보스몹들 찜쪄먹을 격의 소유자라 한들 내 밑이었다.

- 외지의 초월자이시여, 우리가 침략한 이 땅의 그릇 된 자이자 시간을 돌린 자이자 황금 열쇠의 주인이시여, 억겁의 카르마를 짊어진 속죄자이시여. 당신의 질문에 내 대답은 한계가 없노니 얼마든지 하문하십시오.

이럴 줄 알고 안 나서고 있었지. 헌터들 앞에서 이 소리 들어 봐. 그 많은 사람들 기억 삭제를 일일이 해야 한다고.

휘황찬란하고 장황한 수식어들을 듣다가 거슬리는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가 시간을 돌렸다고?”

- 과거와 미래가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그 시기에 다다르면 고리는 저절로 끊길 것. 반복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님이 시간 돌린 거 마즘 ㅇㅇ’.

내가 시간을 돌렸는데 왜 내가 아니라 천세연이 회귀한 거지? 대체 왜?

-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기억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 아니죠.

내 마음을 읽은 악마가 세상의 진실을 속살거렸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회귀자는 홀로 시간을 거슬러 온 게 아니라 홀로 돌아가기 전 시간의 기억을 가진 자라는 소리였다.

“왜 돌린 건지도 알 수 있나?”

- 제가 알 수 있는 건 오직 과거와 현재와 미래뿐. 과거도, 미래도 아닌 시간의 일은 제 시야 밖이랍니다.

그냥 모른다고 하면 어디가 덧나니. 굳이 사교계 귀족 영애 화법으로 빙빙 돌려 말하는 이유가 뭔데. 한숨을 쉬며 퍼존을 소환한 본론을 꺼냈다.

“이 차원에 들어온 아우터 갓을 죽일 방법은?”

죽은 것의 몸을 한 채로 살아 움직이는 기묘한 악마는 사자의 머리로 종달새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 머지않아 초월자께서 외신과 맞서게 될 미래가 보이는군요. 그곳은 곧 신의 영역. 아직 신에 도달하려면 한참 모자란 초월자의 격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초월자가 신으로 등극하는 게 어째서 ‘기적’이겠습니까.

끄응, 답이 안 보이네. 이만 물러가라고 손을 휘젓자 깊이 허리 숙인 퍼존은 소환의 대가도 받지 않고 사라졌다.

악마 놈들의 논리에 따르면 저보다 아랫사람인 헌터들이 윗사람인 저를 불렀으므로 대가를 받은 거고, 이번 경우는 저보다 윗사람인 내가 아랫사람인 자신을 불렀으므로 소환에 응하는 게 당연한 일인 거다.

멈춰 선 헌터들의 무리에 슬쩍 낀 후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스킬 ‘타임스톱(L)’을 해제합니다.』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진흙 더미 몬스터에게 사망한 다른 한 구의 시체까지 챙겨 생존자 무리가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언뜻 보니 꾸준히 공격해 온 건지 몬스터 시체가 제법 쌓여 있었다.

“던전은 클리어했고요, 게이트 확인하고 다 함께 나가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잘 협조 부탁드립니다.”

포커스가 헌터 대표로 생존자들에게 상황을 브리핑했다. 생존자들을 통솔하고 있던 이들을 게이트 수색대로 보내고 나머지 헌터들은 지하철 안을 돌아다니며 시체를 수습하는 일을 맡았다.

몬스터가 습격한 지하철 객차로 들어가니 처참한 풍경이 펼쳐졌다.

“우욱! 이걸 어떻게 수습해!”

“시체 망가지니까 조심히 들어요.”

피투성이의 객차. 철문 유리 부분에 찍힌 붉은 손자국.

몬스터가 파먹다 말아 끔찍한 상태가 된 시체, 여기저기 물어뜯긴 시체를 조심히 들어 옮겼다. 시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 신체 부위나 뼛조각만 남은 이들도 제법 되었다.

입을 틀어막고 구역질하던 한 헌터가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가 구토했다.

천세연은 어째서 내게 지하철을 타라고 한 거지? 내가 정체를 드러내고 모두를 구할 거라 생각했나?

시체를 들어 옮기는 내 얼굴에 냉소가 걸렸다.

“젠장, 꿈에 나오겠다.”

“며칠간 육회는 꿈도 못 꿀 것 같네요…….”

자조 섞인 농담을 나누며 우리는 지하철 안을 돌아다니며 희생자들을 밖으로 옮겼다.

시체를 어느 정도 수습하자 게이트 수색대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돌아왔다.

“게이트 생겼습니다!”

이곳에 들어온 이래 제일 반가운 소식이었다.

수색대의 말에 생존자와 헌터들 사이에 안도가 퍼져 나갔다.

“시신이 많아서 저희끼리 수습하는 건 무리예요. 일반인들에게 부탁하기도 그렇고.”

“뭐가 그래요. 저도 며칠 전까지 민간인이었는데요.”

“시체 훼손 정도가 심해서 어차피 들것 없으면 못 옮겨요. 그냥 몇 명이 시신 지키면서 게이트 안에 남아 있죠.”

시체를 모두 수습하려면 구조대가 와야 했고, 모두가 나가면 게이트가 닫혔기에 포커스를 비롯한 여섯 명의 헌터가 운신하기 어려운 정도의 부상을 입은 이들과 함께 게이트에 남는 것을 자원했다.

나머지 헌터들은 관리국 요원의 지시에 따라 생존자들을 통솔했다. 나는 게이트 밖으로 나가는 무리에 슬쩍 끼었다.

열차는 아마 게이트가 닫히기 전에 견인하든가, 게이트에 휩쓸리게 내버리든가 하겠지.

“모두 일어나세요! 게이트로 다 같이 이동하실게요! 위험하니까 옆 사람 잘 챙기시고요!”

“부상자 부축 좀 도와주세요!”

“휴대폰으로 플래시 계속 비춰 주세요!”

천 명이 넘는, 제법 많은 수의 생존자들이 있었기에 그들이 낙오되거나 옆길로 새지 않게 신경 쓰며 걷는 것은 제법 고초였다.

특히 반짝거리는 던전 벽의 마석을 보고 달려가는 아이들은 특별 감시 대상이었다. 다른 던전들처럼 공기가 무겁거나 쓰지 않은 터라 애들은 비극인지, 희극인지 활발함을 잃지 않았다.

“아빠, 저기 통로 있어! 비밀 공간인가 봐! 나 저기 한 번만 가 볼래!”

“씁, 얌전히 있자. 이탈하면 안 돼.”

“엄마엄마, 저기 보석! 나 저 보석 떼어 오면 안 돼?”

“엄마가 안 된다고 했지! 저런 거 함부로 만지면 헌터 형, 누나들에게 혼난다?”

그러면서 힐끔 나를 보는 눈길에 착실하게 부모들이 원하는 답을 아이들을 향해 내뱉어 주었다.

“너네, 부모님 말 안 듣고 계속 그렇게 떼쓰면 몬스터에게 잡혀간다.”

“에이, 거짓말!”

“그런 말은 일곱 살 애들이나 믿죠. 전 여덟 살이라 안 속아요.”

요즘 애들은 눈치가 빠르군. 그런데 뛰어 봤자 내 손 위다, 꼬마야. 코웃음을 치는 초1 잼민이를 내려다보며 삐딱하게 웃었다.

“그래, 계속 떼써 봐라. 그럼 내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겠지. 어이쿠, 몬스터 오기 전에 도망가야지.”

내 심드렁한 말에 ‘어라, 이게 아닌데?’라는 표정을 지은 꼬맹이들이 괜히 뒤를 힐긋거렸다. 제 보호자의 손을 꼭 잡는 작은 손에 작게 키득거렸다.

“테이머님, 애들 겁주지 마세요.”

“아니,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통솔이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하러 걸음 한 관리국 요원의 경고에 볼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아티팩트와 플래시로 계속 앞을 비추며 걸으니 드디어 꾸물거리는 검은색 포털이 나타났다. 너도 알고, 나도 알다시피 내 마지막 방학 날이자 소중한 주말을 말아먹은 이 빌어먹을 던전의 게이트였다.

밖으로 나가니 폴리스 라인과 환한 조명이 우리를 반겼다.

“생존자들 나왔습니다!”

역무원과 사회복무요원들이 우르르 게이트 밖으로 몰려나오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급히 무전을 쳤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이가 지친 표정으로 한숨 돌리는 관리국 요원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열차 실종 신고받고 곧바로 구간 폐쇄했습니다. 실종 신고 들어온 지 10분밖에 안 됐는데 굉장히 빨리 나오셨네요.”

“10분이요?”

던전 안에서 일곱 시간은 넘게 있었던 거 같은데 바깥 시간은 겨우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니. 왜 빨리 구조대를 보내지 않았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중년남이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경상을 입은 부상자들이 제일 먼저 부축받아 지하 철로를 벗어났다.

계속해서 게이트 안에서 몰려나오는 생존자들에 밀려 폴리스 라인이 끊어졌다. 인파에 쏠려 멍하니 앞으로 나아가다가 갑자기 시야가 확 밝아져 앞을 바라보니 스크린도어와 역이 보였다.

게이트가 터진 곳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대림역이었다. 스크린도어는 활짝 열려 있는 채였다.

“살았다…….”

생존자 무리에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도가 짙게 깔린 그 목소리에 몇몇이 눈물을 터트렸다.

철로에서 도보로 훌쩍 올라가 사람들이 올라오는 것을 도왔다.

“던전 등급 확인됐습니까? 열차 탑승한 인원 파악은 됐고?”

이재의가 관리국 긴급 대응 팀을 이끌고 누군가와 통화하며 급히 걸어왔다. 그 뒤로 구조대원들이 도착했다.

일 처리를 맡은 이들을 남겨 두고 이재의 및 관리국 긴급 대응 팀이 구조대원들과 함께 곧바로 게이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바쁘게 뛰어가는 세인이의 뒷모습을 보고 쩝, 입맛을 다셨다. 하도 혼잡스러워서 친구에게 인사도 못 하는구먼.

“던전 클리어는 완료했습니다. 자세한 건 게이트 안에 있는 서열1위포커스 헌터에게 들으시고 부상자와 시신만 부탁드린다고 이재의 과장님께 전해 주십쇼.”

“던전 클리어를 완료했다고요? 뭐 게이트가 E, F급이었습니까?”

“아니요, A급이었습니다.”

“지금 농담합니까? A급 게이트를 10분 만에 클리어했다고요? 헌터가 몇 명이나 있었는데요?”

“서른세 명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10분이 아니라 안에 일곱 시간이 넘도록 갇혀 있었습니다. 일단 던전 클리어 소식 먼저 안쪽에 전해 주시죠.”

껄끄럽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쉰 긴급 대응 팀원이 무전기를 켜 입가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과장님, 던전 클리어는 완료했답니다. 부상자 내보내고 시신 운구만 남았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무전기로 던전 안에 있었던 관리국 요원의 말을 전달한 긴급 대응 팀원이 헌터들을 불렀다. 농노1을 비롯한 미등록 각성자들은 그 부름에 슬쩍 빠져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헌터 라이선스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셨고 게이트 클리어 보상금은 협회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그 표창장 같은 건 안 나옵니까? 화재만 솔선수범해서 진압해도 용감한 시민상 막 주던데…….”

안경 헌터의 물음에 헌터 라이선스를 받아 들던 수습 요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드러났다. 그가 더듬더듬 말을 전했다.

“그건 저희가 드리는 게 아니라 정부, 정부 측에서 검토를 먼저…….”

“아, 뭔 표창장이야. 집에나 좀 가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비켜. 저기요, 교통비 지원해 줘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헌터 하나가 용감한 시민상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안경 헌터를 밀치고 질문했다.

“지금 당장 현금 지급은 곤란하죠……?”

수습 요원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 집에 어떻게 가라는 거냐고 고래고래 욕설을 내뱉는 진상 헌터를 말리는 손길이 분주했다.

헌터 라이선스를 다시 건네받고 농노1이랑 말없이 인사를 나눈 후 환승 구간으로 걸어갔다. 순간 이동으로 사라지면 지하철 CCTV로 추적당할지도 몰라.

다행히 7호선은 정상 운행했다. 그나마 환승역 바로 앞까지 가서 게이트가 터진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미친, 대림 2호선에 게이트 터졌대. 지하철이 통째로 휩쓸렸다는데?”

“2호선 임시 폐쇄된 게 그거 때문이야? 와, 주말이라 망정이지 만약 하루만 늦게 터졌어도…….”

스크린도어 앞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 내 주위에서는 방금 내가 휩쓸렸던 게이트 이슈를 쑥덕이고 있었다.

하암, 피곤해. 입을 가리고 하품하자 옆에 서 있던 여자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속닥거렸다.

“설마 저 사람도 게이트에 휩쓸렸던 거 아니야? 여기 환승역이잖아.”

“야, 게이트 터졌다고 속보 뜬 지 10분도 안 지났다. 그냥 어디서 굴렀겠지.”

“아니야, 지금 구조됐대. 속보 떴어.”

어라, 어떻게 알았지? 무심하게 아래로 시선을 내리다가 흙먼지로 엉망이 된 옷을 발견했다. 볼을 손으로 쓱 훔치니 시커먼 먼지가 묻어 나왔다.

안 봐도 지금 내가 거지꼴인 건 알겠다. 얼굴이라도 씻기 위해 화장실로 가려는 순간 타이밍 참 좋게도 열차가 도착했다. 열리는 스크린도어를 보며 고민하다가 지하철에 성큼 탔다.

에이씨, 그냥 집 가서 씻지, 뭐. 그런데 혹시 또 가다가 게이트가 터지는 일은 없겠지……?

* * *

“세연아, 무슨 일 있어?”

연수원 같은 기수 룸메이트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뉴스 채널을 틀어 놓고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TV만 응시하는 동생을 보며 천우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오늘 오후 5시 20분경, 서울 신도림역을 지나 대림역으로 가던 열차가 철로에 터진 게이트에 휩쓸렸습니다.

6시 뉴스에 속보로 떠 현장을 중계하던 그 뉴스는 9시 뉴스에 다시 등장했다. 이번에는 정확한 수치를 동반한 채였다.

- 열차에 탄 탑승객 1,521명 중 사망자는 127명, 부상자는 총 368명으로 역대 게이트 중 최다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현장에 있던 헌터는 총 33명으로 그중 세 명이 게이트 안에서 사망하고 한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뉴스 화면에는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를 들것에 실어 나르는 게이트 바깥 상황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카메라는 새 부리 가면을 매만지며 게이트 밖으로 나오는 포커스를 잠시 잡고는 담요를 덮어쓴 채로 덜덜 떨고 있는 생존자를 비추었다.

회귀 전에는 200명이 넘었던 사망자와 500명에 육박했던 부상자 수가 확실히 줄었다.

게이트가 만들어 낸 최악의 참사로 일컬어지던, 손꼽히는 한국 역대 재난 사건에 발을 디뎠던 그 사고가 바뀌었다. 천세연은 그 변화에 아마도 큰 기여를 했으리라 추측되는 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니는 확실히 강했으니까.’

시간을 되돌아오기 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친언니나 다름없이 가까웠던 이를 회상하며 천세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대체 왜 그랬어, 채현 언니.

“헌터가 서른세 명밖에 없었다고……?”

기울이던 물컵을 멈칫한 천우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정확히는 헌터라고 밝힌 사람이 서른세 명이었다는 거지. 민간인들이랑 같이 갇힌 A급 게이트 안에서 D, E, F급들이 자기들이 헌터라고 밝힐 리…….”

- 게이트에서 헌터 A씨가 재각성 후 S급으로 등극하며 한국은 총 열 명의 S급 보유국으로 등극했습니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에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천세연이 급히 고개를 뉴스 화면으로 돌렸다.

S급으로 재각성한 헌터. 분명 회귀 전에는 없었던 사람이었다. 아니, 없었던 사람인 건지, 아니면 ‘재각성’이 없었던 일인 건지.

나비효과. 나비의 날갯짓이 큰 폭풍을 불러온다.

“그러니 모든 게 네가 원하던 대로만 될 수는 없을 거야.”

회귀 직전, 도저히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속삭였던 말을 되새기며 천세연은 꽉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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