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18. 내 인생 장르가 로판으로 바뀔 거라는 희망이 보이다가 말았다 (2) (18/33)
  • 목차

    18. 내 인생 장르가 로판으로 바뀔 거라는 희망이 보이다가 말았다 (2)

    19. 클리셰 is 클래식

    20. 마왕님은 졸업이 하고 싶어!

    21. Q: 꿈에 자꾸 죽은 선임이 나오는데 무슨 뜻이죠? A: 굿하라는 뜻입니다

    22. 인생은 드라마인데 장르가 계속 바뀌는

    23.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

    18. 내 인생 장르가 로판으로 바뀔 거라는 희망이 보이다가 말았다 (2)

    지끈거리는 미간을 문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켜 옷장을 열었다. 무늬 없는 검은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꺼내 들었다.

    애쉬가 다급히 나를 만류했다.

    “폐하, 그 몸으로 어딜 나가시게요!”

    “가야 해. 여기서 더 귀찮아질 순 없어.”

    살의에 차 중얼거리며 상의를 쓱 올리니 애쉬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옷을 갈아입고 휴대폰과 카드를 챙겨 문밖으로 나섰다.

    택시는 쉽게 잡혔다. 새벽이라 할증요금이 쭉쭉 붙는 게 문제였지. 진세빈 개X끼. 택시비 꼭 청구한다.

    강남으로 들어간 택시는 곧 목적지에 멈췄다.

    이비스. 클럽에 관심이 없던 나조차도 심심찮게 들어 본 이름이었다. 길게 늘어진 줄과 진을 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줄을 무시한 채로 앞으로 가니 가드가 나를 가로막았다. 가드가 입을 열기 전 선수 쳐 말했다.

    “진세빈이 자기 이름 대라던데요.”

    잠시 뒤로 빠져 무전을 주고받던 가드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곧 다른 가드가 나를 클럽 안으로 안내했다.

    아주 내가 진세빈 덕분에 클럽도 다 와 보네. 고막을 때리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몸 상태에 텁텁한 공기까지 더해지자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나를 VVIP룸으로 안내한 가드가 문을 열었다. 룸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저거 설마…….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놓인 하얀 가루가 담긴 봉지에 경멸 어린 눈으로 진세빈을 바라보았다. 약쟁이같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약쟁이였다니.

    “어라? 진짜 왔네?”

    양주가 가득 담긴 잔을 흔들던 진세빈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세빈의 옆에 있던 남자가 킬킬거리며 물었다.

    “뭐야, 세빈이 네가 불렀어?”

    기분 나쁜 눈길로 나를 훑은 다른 남자가 질 나쁜 웃음을 흘리며 품평질을 해 댔다.

    “딱 진세빈 스타일이긴 하네.”

    “정확히는 주태윤 스타일이지. 이 새끼 여친 다 주태윤 여친이었잖아.”

    뭐가 웃긴지 자기들끼리 웃어 대는 인간들에게로 날아간 양주 병이 벽에 맞고 산산조각 났다. 촤악, 양주와 병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일제히 나를 노려보는 눈빛을 여유롭게 맞받아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사람을 불렀으면 세워 놓지 말고 부른 용건을 이야기해야 할 거 아니야.”

    노려보는 눈깔들을 보아하니 아직 정신 못 차린 것 같은데 한 병 더 던질까? 큽, 침묵을 깨고 진세빈이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가.”

    진세빈의 한마디에 의기양양해진 놈들이 빨리 꺼지라고 내게 윽박질렀다. 피식거리던 진세빈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니, 쟤 말고. 너네 나가라고.”

    “야, 진세빈! 또 왜 변덕 부리고 지랄이야!”

    “왜, 진영아? 또 양주 병으로 대가리 깨지고 싶다고?”

    히죽거리는 웃음에 진영이라고 불린 남자가 입술을 깨물며 벌떡 일어났다. 그 남자를 선두로 사람들이 줄줄이 룸을 나가자 곧 나와 진세빈, 단둘만 남았다.

    양주를 박살 낸 탓에 룸에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제 발치에 떨어진 양주 병 조각을 발끝으로 툭 차며 진세빈이 내게 말을 걸었다.

    “제법 성깔 있으시네.”

    “다 죽여 버리고 싶었던 거 참은 거니까 용건이나 말해요.”

    싸늘하게 맞받아치자 진세빈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사는 게 즐거워서 좋겠다, 새끼야.

    “용건? 별 건 없고 딱히 신상을 올리지 않아도 테이머가 귀환자라고 밝히면 얼마나 세상이 뒤집힐지 궁금해서.”

    제가 우위를 차지했음을 확신하는 거만한 웃음이 진세빈의 입가에 비스듬하게 걸렸다. 잔에 든 양주를 홀짝인 진세빈은 흥얼거리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몬스터를 게이트 밖으로 나오게 만들고 몬스터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이가 게이트 사태로 지목된 귀환자 중 하나라고 밝혀진다면, 과연 대중들은 무슨 반응일까.”

    말없이 진세빈을 노려보고 있자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웃은 진세빈이 쐐기를 박았다. 마지막 말은 약 올리는 속삭임이나 다름없었다.

    “대한민국에만 서른이 넘는 귀환자가 있다고 한다면 여론은 어떻게 흘러가려나.”

    “협박질은 그쯤하고, 원하는 게 뭐냐고.”

    내 으르렁거림에 편히 소파에 기대어 살짝 고개를 기울인 진세빈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랑 사귈래요?”

    제안의 탈을 쓴 강요였다. 들고 있던 잔을 쭉 비운 진세빈이 다시 잔에 술을 채우며 피식거렸다.

    “많은 건 안 바라고, 그냥 주태윤 앞에서 내 옆에 얌전히 서서 내게 웃어 주기만 하면 돼.”

    “왜?”

    “태윤 형이 당신을 좋아하니까. 또 뺏겼을 때의 그 절망하는 표정을 오랜만에 보고 싶거든.”

    아주 지랄을 해라. 별 희한한 방식으로 주태윤을 맥이네. 주태윤이랑 내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려는 빅픽처인가.

    무엇보다 난 약쟁이에 클럽 죽돌이랑 사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싫다면?”

    “한국의 공식적인 두 번째 귀환자에 테이머 씨 이름 올리는 거지.”

    아, 이렇게 나오시겠다?

    “해 봐.”

    성큼성큼 걸어가 진세빈의 앞에 섰다. 자신만만한 내 웃음에 진세빈의 표정이 비틀렸다.

    “그게 언론에 터지는 순간 나도 네가 귀환자고…….”

    손을 뻗어 진세빈의 멱살을 단단히 붙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목이 조인 진세빈이 기침을 내뱉으며 그대로 끌려왔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새카만 눈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이번 레벨레이션 참극의 범인이란 걸 밝힐 테니까.”

    마지막 말은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증거 있어?”

    “물론 있지.”

    손을 내저어 리와인드를 실행시켰다.

    『스킬 ‘리와인드(L)’를 실행합니다.』

    양주 병이 깨지는 장면과 소파에 앉아 있던 이들이 놀라 몸을 피하는 장면이 방 전체에 홀로그램처럼 재현되었다.

    리와인드는 두 가지 시간을 다루었다.

    하나의 물체의 시간을 돌리는 것과, 장소의 과거를 재현하는 것. 물론 이 경우에는 지나간 시간이기에 보이는 장면에는 실체가 없었다.

    진세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난 장소의 과거를 재현할 수 있거든. 이게 단순한 환영이 아닌 재현임을 증명하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우리는 사이좋게 서로를 협박할 거리 하나씩을 쥐고 있었다. 그 협박 줄은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서로의 발목을 잡으리라.

    쥐고 있던 멱살을 망설임 없이 놓자 구겨진 옷을 편 진세빈이 표정을 느릿하게 지우며 나를 바라보았다.

    “봤죠?”

    몸을 돌린 내 등 뒤로 진세빈이 짧은 물음을 던졌다. 무시하고 룸의 문으로 향했다.

    “봤잖아. 아우터 갓.”

    걸음을 옮기던 발을 멈칫했다. 그걸 저놈이 어떻게……?

    내 앞에는 어느새 문 대신 희생자의 기억에서 보았던 징그러운 촉수들이 공간을 찢고 내 눈앞에 우글거리고 있었다.

    급히 뒤돌아 진세빈을 마주 보자 그가 나른하게 웃었다.

    “꿈이 시공간에 구애받는 거 봤어요?”

    촉수가 내 발목을 휘감았다. 당기는 힘에 비틀거리며 마기로 촉수를 꽉 옥죄였다. 촉수가 바스러져 사라짐과 동시에 그대로 몸이 앞으로 거꾸러졌다.

    “너, 대체 뭐랑 계약한 거야?”

    아슬아슬하게 손으로 진세빈의 머리 위를 짚어 몸을 지탱하고 사납게 속삭였다. 히죽 웃은 진세빈이 내 이마를 툭툭, 쳤다.

    “말했잖아, 외신이라고.”

    3, 2, 1. 진세빈이 입 모양으로 숫자를 세는 게 눈에 들어왔다. 대체 무슨 카운트다운이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로 진세빈을 노려보고 있자 그가 내게 팔을 뻗었다.

    진세빈이 내 목을 팔로 휘감고는 그대로 제 쪽으로 끌어당기자 룸의 문이 벌컥 열렸다. 동시에 균형을 잃은 몸이 진세빈의 몸 위로 무너져 내렸다.

    “내가 분명 이딴 곳으로 부르지 말라고…….”

    화를 꾹꾹 눌러 참는 서늘한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뜨자 싱긋 웃은 진세빈이 내 얼굴이 잘 보이도록 나를 안은 제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채현 씨?”

    나를 보는 주태윤의 표정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절망과 체념이 공존하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진세빈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손이 꽤 맵네, 채현아. 태윤이 형 앞에서 부끄러워서 그래?”

    붉게 부어오르는 볼을 부여잡은 진세빈이 키득거렸다. 채현아? 이게 진짜 미쳤나. 내가 니 친구냐?

    콰앙!

    분노를 담은 주먹이 진세빈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그의 바로 옆에 꽂혔다.

    주먹 모양으로 움푹 파여 복구되지 않는 소파에 진세빈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방금 주먹을 정면으로 맞았다면 뇌진탕으로 응급실 실려 갈 건 본능적으로 알았나 보다.

    참고로 내 힘 스탯은 한 대 맞으면 골로 가는 S급이었다.

    “미친놈이 진짜 돌았나…….”

    스산하게 중얼거리며 손을 뚜둑, 풀자 상황 파악을 마쳤는지 주태윤이 급히 나를 말렸다.

    “채현 씨, 참아요! 저 새끼가 아무리 죽이고 싶은 놈이라지만 살인은 안 됩니다!”

    “아, 놔 봐요! 누가 죽인대요? 한 대만 더 치자고요! 저 인간, 그 정도로 안 죽어요!”

    소란에 가드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쫓겨난 놈들도 가드의 어깨 너머로 룸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놔요, 내 발로 나갈 거니까.”

    내 팔을 잡는 가드를 신경질적으로 탁탁, 내치고는 마지막으로 진세빈을 돌아보며 서늘하게 경고를 던졌다.

    “야, 적당히 해. X나 한심하니까.”

    진세빈이 미친놈처럼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경멸 어린 눈으로 진세빈을 한 번 보고는 망설임 없이 룸 밖으로 나왔다.

    나를 따라 나와 옆에서 나란히 걷는 주태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혹시 진세빈에게 약점 잡힌 거라도 있어요?”

    나야 캡처본 퍼질까 봐 걱정 및 진세빈 협박도 할 겸 순순히 오라는 곳으로 왔다지만 주태윤은 왜 오라는 대로 달려온 거지?

    “글쎄요, 저도 어느새 저 자식의 패악질에 길들여져 버린 모양입니다.”

    주태윤이 고개를 저으며 쓰게 웃었다. 이제까지 안 오면 얼마나 지랄발광을 했길래 저런 말이 나와?

    드디어 클럽에서 나와 신선한 새벽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택시를 잡으려 어플을 켜는 순간, 나를 끌어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내 어깨에 이마를 댄 주태윤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룸으로 막 들어왔을 때 나를 보던 그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던 감정을 눈에 담은 이상 내게 안겨 오는 이 남자를 마냥 외면할 수는 없었다.

    에휴, 한숨을 쉬며 주태윤의 등을 도닥였다. 미친 사촌 놈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다.

    “사실 문을 열었을 때 채현 씨가 없길 바랐습니다.”

    나를 안은 채로 주태윤이 고해성사하듯 말을 꺼냈다. 한숨 같은 실소가 고막에 꽂혀 왔다.

    “…항상 같은 패턴이었거든요.”

    “진짜 미친놈이네.”

    이렇게 NTR을 계속 해 왔다고? 질색하며 고개를 젓자 주태윤이 나직하게 웃었다. 댁 사촌 동생이 댁이 나를 좋아한다는 개소리를 했다고 말할까, 하다가 괜히 분위기만 어색해질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정말 제가 했던 말처럼 아주 잠깐 나를 끌어안고 있던 주태윤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지 미련 없이 팔을 풀었다.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손을 내민 주태윤이 싱긋 웃었다. 이렇게 보니까 진세빈이랑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사촌이라 하기에는 자세히 뜯어보니 닮은 구석이 꽤 보였다.

    …설마 출생의 비밀? 사실 이복동생? 아니, 이모 아들이라고 했으니까 동복동생? 머릿속에서 막장 드라마 한 편이 스쳐 지나갔다.

    얼떨결에 손을 잡자 시야가 전환되며 곧바로 원룸 건물 앞에 도착했다.

    “잘 자요.”

    살짝 고개 숙여 부드럽게 내 귀에 속삭인 주태윤이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전에 나를 데려다줬을 때는 항상 내가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보고 갔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게 안긴 게 그렇게 부끄러웠나.

    자취방으로 들어가자 내게 후다닥 달려온 애쉬가 코를 찡긋하더니 내게 물었다.

    “폐하, 설마 술 드셨어요? 그 몸 상태에서요?”

    “우리 사이에 그렇게 믿음이 없다니, 이 폐하는 슬프다.”

    술 마신 게 아니라 술병 깬 거야, 인마.

    몸의 긴장을 풀었더니 힘이 쭉 빠져 그대로 자취방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렇지 않아도 외신의 본체를 봐서 타격을 입은 몸 상태에서 너무 무리했다.

    애쉬가 서늘한 온도의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휴대폰을 꺼내 귀환자 오픈 채팅방에 접속했다. 나를 애타게 기다릴 윤선아에게 결과 보고를 해 줘야 했기에.

    〉Local Channel-ROK

    〉귀환자 단체 채팅방

    〉〉공지 사항: 이름은 차원 이동한 곳에서의 직업, 혹은 세계관으로 부탁드립니다

    마왕: 범인 귀환자 맞고요

    마왕: 자세한 건 노코멘트할 테니까

    마왕: 범인이 알아서 뒤처리하세요 돈을 먹여서 대역을 세우든 뭘 하든

    마왕: 보고 있지 씹1새꺄?

    드래곤슬레이어: 마왕 님 왤케 빡치셨어요ㅠ 급발진 ㄷㄷ

    마왕: 참고로 무림맹주 님 범인 아닙니다

    무림맹주: 제 결백이 밝혀지다니 기쁘네요

    천마: 뭔 수상 소감 발표해요?ㅋㅋㅋㅋ

    스팀펑크: 뭐임? 진짜 여기 안에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범인이었음?

    성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벌이신 건지……?

    소드마스터: 진짜 누구냐???

    진리를깨달은연금술사: 캐내지 말고 그냥 두죠. 마왕 님이 보내신 채팅 보니까 충분히 덮을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사람 같은데.

    천마: 22 어차피 우리 죽이려 하던 새끼들 아닙니까? 잘 죽은 거지 뭐ㅋ

    그리고 다음 날 오후.

    - 레벨레이션 한국 지부 참사의 범인이 오늘 오전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서대문경찰서에 자수했습니다. 이현정 기자입니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뉴스를 틀어 놓고 양치질을 하다가 들리는 소식에 칫솔질을 멈추고 후다닥 TV 앞으로 달려갔다.

    - 범인 A씨의 직업은 소환사로 자신이 직접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소환수를 풀어 넣었다고 자백했습니다. A씨의 소환수는 낫 모양 발톱을 지닌 거대한 조류로 레이드에서 주로 몬스터의 살가죽을 찢는 용도였다고 A씨의 동료가 증언했습니다. 전문가들은 A씨의 소환수가 충분히 사람을 찢을 수 있다고 보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루 만에 범인과 스토리를 만들어 내다니. 진세빈의 집안의 힘인가, 아니면 진세빈과 계약한 그것의 힘인가.

    〉Local Channel-ROK

    〉귀환자 단체 채팅방

    〉〉공지 사항: 이름은 차원 이동한 곳에서의 직업, 혹은 세계관으로 부탁드립니다

    꽃집주인: 하루 만에 범인이 자백을 했다? 이게 말이 돼요?

    마탑주: 찐범인 ㄹㅇ 뭐 하는 새끼야?

    마탑주: 저거 죄 덮어씌운 거 맞죠??

    드래곤슬레이어: 와 개무서워

    스팀펑크: 진짜 재벌 아님? 레알루다가 엮이고 싶지 않은 완전체 사이코다;;;

    범인이 우리 중에 있음을 알고 있는 귀환자 오픈 채팅방에서만 현 사태에 소름 돋아 할 뿐이었다.

    HUNTED

    [이슈] 레벨레이션 한국 지부 참사 범인 자수해..범인은 헌터 (+856)

    [이슈] 내가 죽이지 않았다, 내 소환수가 죽였다..이 경우에는 과실치사? 살인죄? (+991)

    [자유게시판] ㅆㅂ놈들아 제발 범죄 좀 저지르지 말라고

    20XX-08-30 11:20 조회: 372 작성자: 레온하르트

    헌터 규제의 지름길이라고. 현판 헌터물도 안 봤냐? 계속 헌터 범죄율 늘어나면 민간인 보호법이랑 헌터 규제법 따로 생긴다니까? 민간인에게 욕만 뱉어도 바로 철컹철컹이라니까?

    댓글(6)

    내가바로키랏: 내 친구가 관리국 고위직인데 안 그래도 지금 헌터 규제법 검토 중이랬음

    └내가바로키랏: 이번 레벨레이션 참사에 일반인들도 꽤 섞여 있어서

    └레온하르트: 거봐 tlqkf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벨리스: 와 그럼 지금은 공공장소에서만 능력 사용 금지지만 나중에는 아예 게이트 이외의 장소에서 능력 사용 금지되는 거 아님?

    └벨리스: 막 단말기 목에 채우고 능력 쓰나 안 쓰나 감시하고

    └orange: 그건 걍 디스토피아 아니냐

    [자유게시판] 그런데 진짜 그 사이코 새끼 진지하게 왜 그런 거임?

    20XX-08-30 14:25 조회: 813 작성자: RET2

    지가 귀환자야? 귀환자도 아니라며 ㅅㅂ. 그런데 왜 74명이나 죽여서 기어이 헌터 규제법 검토를 하게 만들어. 왜 한 놈이 싼 똥에 우리가 다 같이 떨어야 하냐고. 지금 벌써 소환사들에게 소환수 등록하라고 통지서 갔다며. 이럴수록 우리 자유만 더 규제되는 거 몰라? 진짜 그 씹1새끼 감옥에서 꺼내서 멱살 잡고 싶네

    댓글(20)

    전투연금이될거야!: 왜 살인마를 이해하려 해? 그 새끼가 자백할 때 ‘그냥’이랬잖아 별다른 이유 없었을걸

    노투모로우: 내 친구가 범인이랑 같은 길드 공격대였는데 범인 도박충이었댔음 맨날 스포츠토토 하고 사다리 게임 하고 돈 생기는 족족 도박에 꼴아박는 인생 포기자

    └뉴인: 차리리 강도 짓을 하지 사람을 왜 죽이냐고 그것도 74명이나

    └afljfas: 내가 듣기로는 빚이 장난 아니었다는데

    └369369: @afljfas 범인 B급이라며 B급이 빚 못 갚을 정도면 얼마나 쓰레기 인생을 살아왔다는 거?

    하리: 그런데 냉정하게 말하면 소환수가 죽인 거지 범인이 죽인 건 아니지 않아? 그냥 헌터라서 잡는 거 같은데?

    └헬파이어: 뭔 개소리야 개가 사람 물어 죽이면 견주는 처벌 안 받냐?

    └하리: @헬파이어 개가 사람 물어 죽이면 견주는 과실치사로 처벌되잖아 그런데 왜 헌터는 살인죄로 처벌받냐 이 말이지

    └루루쥔: @하리 나 소환산데 소환수는 소환자 의지에 전적으로 따름 개는 흥분하면 안 말려지지? 소환수는 바로 말려짐 사람을 죽이는 데 제지조차 안 했다는 건 현직 소환사가 보기에도 충분히 문제 있고 살인사건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함

    M19: 그런데 레벨레이션 걔들도 귀환자 죽여야 한다는 광신도 집단 아니었음? 귀환자 집 쳐들어가서 진짜 죽이려 했잖아ㅋ 딱히 동정 안 해도 될 듯?

    └스나이플: ㄹㅇㅋㅋ 예비 살인마들이 사이코 살인마 잘못 만나서 죽은 거지 뭐ㅋㅋㅋ

    └세리: @스나이플 지금 이게 피해자들에게 할 소리야? 귀환자 공격한 레벨레이션 신도들은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살았고 무고한 사람들만 죽었는데?

    └뉴빌리니시: @세리 왤케 급발진임? 님도 레벨레이션임? 솔직히 피해자라서 레벨레이션 여론 유해진 거지 지금까지 레벨레이션 이미지 완전 ㅈ창이지 않았나? 거의 베리칩 666급이었는디

    …….

    헌티드에서는 의심조차 제기되지 않고 한목소리로 범인을 욕하고 있었다. 귀환자를 향한 뾰족한 여론은 ‘평범한 헌터’인 범인이 자수하자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물론 한편에서는 범인이 귀환자인데 숨기고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지만 B급이 귀환자일 리가 없다는 여론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그 주장은 계속 묻혔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진세빈의 일 처리는 깔끔했다. 범인이랍시고 자수한 남자를 어떻게 회유했는지 궁금증마저 들 지경이었다. 여론 보니까 무기징역 나올 것 같던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해, 불행이라고 해야 해?”

    “폐하께서 신경 쓰실 일 하나가 덜어졌다면 당연히 다행이죠.”

    애쉬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이번 일로 분명히 진세빈은 나를 주태윤과 나란히 제 데스노트의 가장 위쪽에 올려놨을 것이다. 언제 나를 죽인답시고 달려들지 몰랐다.

    진세빈의 말에 따르면 아우터 갓의 꿈속 꿈인 S급 게이트에서 진세빈을 상대했을 때에도 권능 ‘영역 선포’는 제약에 의해 30%가 최대치였다.

    그리고 메모리테이크로 인하여 간접적으로 마주했던 아우터 갓의 본체.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초월자인 나조차도 마주치는 순간 속이 뒤집혔던 그 끔찍하고 압도적인 존재.

    망할, 기르카스 놈과 7마계 마왕 놈은 죽일 수 있기라도 했지. 그 아우터 갓은 도저히 죽일 수 있을 거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 시간을 즐기고 있는 와중, 조별 과제 단체 채팅방처럼 별다른 대화 없이 고요하던 401호 채팅방에 오랜만에 채팅이 올라왔다.

    [김나연 - 다들 9월 1일 안 잊었죠?] 오후 5:13

    [김나연 - 방학 때 한 번 만나자니까 그렇게 미루더니 결국 방학 끝나고 만나고ㅠㅠ] 오후 5:14

    [천세연 - 난 언제든지 ㅇㅋ였어] 오후 5:19

    [진솔 - 미안해 다들ㅠ] 오후 6:00

    [진솔 - 내가 8월에 일이 좀 많았어서] 오후 6:01

    [김나연 - 괜찮아여ㅎㅎ 그래도 내일 만나니까!]

    [김나연 - 다들 내일 봐요♥♥] 오후 6:20

    [그래 내일 보자☺] 오후 6:23

    답장을 보내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내일은 퇴소 이래 처음으로 연수원 19기 룸메이트들을 밖에서 만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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