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내 인생 장르가 로판으로 바뀔 거라는 희망이 보이다가 말았다 (1) (17/33)
  • 17. 내 인생 장르가 로판으로 바뀔 거라는 희망이 보이다가 말았다 (1)

    “저희는 부산 살아서요. 조심히 올라가세요!”

    이단심문관과 성녀가 인사하고 뒤돌아 떠났다. 이제 남은 건 우리 셋뿐. 류사현이 나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도 올라가죠?”

    류사현의 말을 무시한 천우현이 손을 내밀었다.

    “해운대 갈래요? 아니면 광안리도 괜찮고요.”

    부드러운 제안에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내 얼굴에 의문이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눈을 접어 웃은 천우현이 조용히 덧붙였다.

    “그때 채현 씨가 돌아가면 함께 바다 보러 가자고 했잖아요. 바다가 너무 보고 싶다고.”

    돌아와서 나름 바쁜 삶과 갑자기 변해 버린 세상에 치여 지내느라 잊고 있었던 다짐과 잊고 있었던 약속.

    천우현이 꺼내자마자 다시 생각난 그 그리움과 추억과 약속에 쓰게 웃었다.

    나는 그곳에서 했던 얼마나 많은 다짐과 약속을 잊었을까. 후텁지근한 여름의 해가 가장 강한 시간, 열기를 품은 바람이 내 머리를 흩트리고 지나갔다.

    햇빛이 쨍한 푸른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천우현이 내민 손을 잡았다.

    “…가요, 해운대.”

    큼큼, 류사현의 헛기침 소리에 둘만의 세상에서 벗어난 나는 짜증스럽게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내 인생 장르가 로판으로 바뀌는 분기점에서 무슨 방해냐, 망할 천마야.

    내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류사현이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얼굴로 나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두 분이 바닷가에서 데이트하시든, 나 잡아 봐라 놀이를 하시든 그건 상관없는데 일단 저 좀 집으로 데려다주시면 안 될까요.”

    『스킬 ‘타인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1인』

    소소한 복수로 류사현의 집이 아닌 내 원룸 건물 앞으로 그를 보낸 나는 천우현의 손을 잡고 동반 순간 이동을 발동했다.

    순식간에 해운대 모래사장에 도착한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볼을 긁적였다.

    그러니까 내가 원한 건 이런 풍경이 아닌데. 조금 더 고즈넉하고 잔잔한 파도가 몰아치는 푸른 바다와 모래사장, 그리고 나랑 천우현, 단둘만 있는 그런 풍경을 원했지…….

    “…사람이 많네요.”

    “아무래도 휴가철이니까. 그걸 생각 못 했네…….”

    파라솔로 빼곡히 뒤덮인 모래사장과 사람과 물이 1 대 1 비율로 있는 이런 풍경이 아니었다고.

    꼬맹이들이 꺄르르 웃으며 뛰어다니면서 모래를 튀기고 지나갔다. 시끌벅적한 풍경을 바라보다가 픽 웃으며 푹신한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턱을 괴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내 옆에 앉은 천우현도 말없이 푸른 하늘과 그보다 더 푸른 바다를 보고 있었다.

    둥실둥실 파도에 몸을 맡기고 튜브에 타 떠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때는 분명 돌아오면 하고 싶었던 일들이 많았거든요.”

    철썩, 파도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바다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커플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우리의 앞을 지나갔다.

    “그런데 돌아오니까 다 잊게 되더라고요. 내가 무슨 다짐을 했는지조차.”

    그저 조금 긴 악몽을 꾼 것처럼 곧 현실에 적응했고, 작금의 사태가 내 잘못이라고 눈앞에 들이밀어지기 전까지 외면했다. 답답함에 푹 한숨을 내쉬었다.

    “채현 씨가 홀로 한 다짐과 소원은 모르겠지만…….”

    천우현이 모래사장에 파묻힌 내 손등 위로 손바닥을 덮었다.

    “저와 함께 있을 때 했던 말은 기억하고 있어요.”

    왼쪽 눈 밑에 박힌 눈물점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다정한 눈웃음을 지으며 천우현이 말했다.

    “언제든지 물어보셔도 돼요.”

    “내가 또 뭐 하고 싶다고 했어요?”

    “하루 종일 자고 싶다고도 했고, 아무 준비 없이 훌쩍 여행 가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참, 술도 꼭 끊을 거라고 하셨는데 끊으셨어요?”

    그럴 리가. 말없이 천우현의 눈을 피하자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킨 천우현이 내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바닷가에 발을 담그고 싶다고도 하셨죠. 기왕 온 김에 소원은 이루고 가야 하지 않겠어요?”

    가만히 천우현의 찬란한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뻗어진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바지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고 파도가 치는 바닷가로 향했다. 사람이 그나마 없는 곳에 멈춰서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바지는 다행히도 반바지라서 굳이 걷을 필요가 없었다. 천우현이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륵 놓자 나 홀로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파도가 몰려와 시원한 바닷물이 내 발등을 간지럽혔다. 한 발짝,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갔다. 바닷물이 출렁이는 곳으로.

    발목을 넘어 출렁이는 바닷물을 내려다보다가 천우현을 돌아보았다.

    “우현 씨는 안 들어와요?”

    “들어가고 싶지만 옷이…….”

    긴 바지를 힐끔 내려다보며 난감한 미소를 짓는 천우현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물에 안 들어간 것처럼 옷 되돌려 놓는 건 일도 아니거든요.”

    못 이긴 척 내 손을 잡은 천우현이 신발과 양말을 벗어 내 신발 옆에 두고는 바닷물에 발을 내디뎠다. 멍하니 제 발을 적신 바닷물을 내려다보던 천우현이 중얼거렸다.

    “여름에 바닷가에서 발 담그는 건 그때 이래로 처음이네요.”

    추억을 돌아보는 아련한 표정에 어색하게 웃었다. 저거 돌아가신 부모님 이야기지? 아무리 봐도 내가 과거 스위치를 제대로 건드린 거지?

    이번에는 큰 파도가 밀려 들어왔다. 꺄아―! 신난 아이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반바지 끝자락을 기어이 적시는 파도에 종아리에서 잘게 찰싹거리는 파도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기억해 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부산까지 와서 소원 풀고 가네요.”

    몰려오는 해풍에 가볍게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천우현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걸렸다.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지는 눈꼬리와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매가 유독 눈에 들어와 박혔다

    문득 그 미소가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을 것임을 예감했다.

    * * *

    『스킬 ‘리와인드(L)’를 실행합니다.』

    바지의 시간이 되감기고 순식간에 옷이 말랐다. 마계에서도 한 번밖에 쓰지 못했던 L급 스킬이 지구에 돌아와서 겨우 옷 말리는 데에 쓰이고 있었다. 참, 전에는 집수리하는 데에도 썼지.

    아쉬움에 바다를 한 번 돌아보자 천우현이 웃었다.

    “다음에 또 오면 되죠.”

    “우현 씨랑요?”

    “친구분들이랑 오셔도 되고 채현 씨만 괜찮으시다면 저랑도…….”

    장난스러운 내 물음에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다가 얼굴이 확 붉어진 천우현이 정말 별 뜻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달라며 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래, 나도 이제 그린 라이트 켜고 끄는 거 지쳐서 오해 안 하련다.

    “그럼 이제 돌아갈까요?”

    해가 긴 여름이라 그런지 여전히 푸른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이번에는 내가 먼저 천우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서 사람의 시선이 없는 틈을 타 곧바로 순간 이동을 실행했다.

    『순간 이동(S) - 저장된 좌표』

    - 자취방

    - 본가

    - 자연대 건물…….

    『스킬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2인』

    순식간에 해운대에서 서울의 내 자취방 빌라로 장소가 바뀌었다.

    “…어?”

    정확히는 내 자취방 현관으로. 습관적인 자취방 좌표 터치로 인한 폐해였다. 게다가 정말 운도 없게도…….

    “폐하, 오셨어요? 그리고 이쪽은… 용사?”

    애쉬가 하필 내 자취방에 떡하니 있었다. 해맑게 인사를 건네던 애쉬의 얼굴이 천우현을 발견하고 서서히 굳다가 정체를 알고는 완전히 정색했다.

    애쉬의 얼굴을 보자마자 천우현의 기세 역시 단번에 날카로워졌다.

    ‘애쉬가 천우현이 용사인 걸 어떻게 아는 거지? 천우현은 왜 애쉬를 보고 저렇게 경계를 세우는 거고?’

    혹시 둘이 내가 없을 때에 만난 적이 있었나? 하지만 단순히 만났다기엔 천우현이 보이는 적대감이 설명되지 않았다.

    설마… 애쉬에게 죽었던 회차가 있었나? 서른 번의 회귀를 반복했다 했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가설이었다.

    당황도 잠시, 금세 평소의 페이스를 되찾은 애쉬가 천우현을 향해 이죽거렸다.

    “제국에서 용사와 성검이 사라졌다고 지명수배를 내걸더니, 폐하와 함께 돌아갔던 모양이네요.”

    “내가 넘어가기 직전에 네가 기도실 문을 열지 않았던가?”

    “전 폐하의 모습밖에 못 봤어요. 폐하밖에 눈에 안 들어오기도 했고요.”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한데 애쉬 너, 천우현에게 대체 뭔 짓을 한 거니. 보통의 경계가 아닌데.

    황급히 나를 돌아본 천우현이 떨리는 눈동자로 물었다.

    “마족이 어떻게 게이트 밖을 이렇게 마음대로 활보하고 다니는 겁니까? 설마 채현 씨가 허가한 겁니까?”

    그게 설명하려면 좀 긴데 어디부터 설명을 시작해야 하는 거지. 볼을 긁적이며 머릿속으로 말을 정리하는 내 모습을 천우현은 말하기 난감해서 그러는 것으로 오해했는지 한숨을 뱉었다.

    “괜찮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나중에 이야기하죠.”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천우현이 내 자취방에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니, 사람 말은 끝까지 들으라고! 그리고 아직 말 시작도 안 했어! 급히 천우현의 옷을 잡아당겼다.

    - 다음 소식입니다. 종교 단체 레벨레이션 한국 지부의 신도들이 오늘 오전 1시, 귀환자 윤 씨의 집을 습격했습니다.

    공중파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에 문고리를 잡던 손을 멈칫한 천우현이 뒤돌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둘 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소식이었으니.

    - 소음을 이상하게 여긴 옆집 주민이 경찰에 신고하였고 윤 씨의 집을 습격한 레벨레이션 신도들은 곧바로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아니, 밤중에 계속 시끄럽게 소리가 들려오니까, 처음에는 뭐 이 시간에 부부 싸움 하나 했거든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아가씨 혼자 사는 집이더라고. 놀라서 바로 신고했지. 귀환자? 귀환자라는 건 몰랐는데. 평소에 전혀 태가 안 났어요. 난 그 아가씨 헌터인 줄도 몰랐어.]

    - 윤 씨는 현재 정신적인 충격만 받았을 뿐 별다른 부상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레벨레이션 신도들은 익명의 제보자가 그들에게 귀환자의 신상을 제공했다고 자백하여 관리국과 경찰은 익명의 제보자를 찾는 데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관리국 요원일 확률이 높다고 보고… 윤민아(가명) 씨에게는 관리국 측에서 어떻게든 신변 보호와 보상을…….]

    심상치 않은 상황에 표정이 굳었다.

    귀환자들이 뭉친 이 시기에, 레벨레이션이 한국의 공식 귀환자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오전에 세인이가 관리국 비상 걸렸다고 당분간 또 야근 당첨이라고 한 게 저거였구나.

    윤세인뿐만 아니라 나한테도 비상이었다. 저 광신도 놈들, 일 저지를 것 같더니만 기어이 저질렀군. 익명의 제보자는 분명 직업 정신보다 자기의 신념이 더 중요한 레벨레이션 소속 관리국 놈이겠지.

    심지어 가명도 성의 없어. 그냥 윤○아로 표기하는 거랑 다를 게 뭔데.

    귀환자인 거 걸리면 진짜 X되는 거다. 내가 그중에서도 원인 제공자인 걸 알면 글로벌 날달걀 세례에, 코리안 죽창 세례 날아온다고.

    밤마다 잠 못 자게 레벨레이션 놈들 찾아오고 난 소음 조장으로 원룸에서 쫓겨나고…….

    “우연이겠죠?”

    잔뜩 굳은 천우현의 물음에 쉬이 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봐도 우연이라기에는 일이 터진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기 때문이다.

    내 손짓에 물러감을 청한 애쉬가 마법진 너머로 사라졌다.

    “하필 귀환자들이 뭉쳤을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뉴스는 곧 다음 소식으로 넘어갔지만 나와 천우현은 한참을 뉴스가 나오는 TV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묻지 않겠다는 눈을 한 천우현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에서 나는 한 자락의 의심을 쉬이 읽어 냈다.

    “쉬세요, 채현 씨.”

    다정하게 속삭이고는 몸을 돌리려는 천우현을 잡아챘다. 항상 후회물 소설을 보면 모든 오해는 소통의 부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소통의 부재로 인한 고구마였다. 대화만 하면 끝날 것을 뭘 그렇게 질질 끄냐고.

    “쉬긴 뭘 쉬어요. 찝찝해서 잠도 안 오겠는데.”

    신발을 휙 벗고는 당황하는 천우현을 끌고 원룸 바닥에 앉혔다. 말끔히 청소되어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탁, 오렌지주스가 담긴 머그컵이 식탁용으로 쓰는 접이식 탁자 위에 놓였다. 마주 보고 앉은 우리 둘 사이에는 오후의 간질간질한 분위기 대신 취조실의 비장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머그컵의 오렌지주스를 단번에 들이켜고 잔을 탁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천우현 씨 질문에 답을 해 드릴게요. 마족이 어떻게 게이트 바깥을 활보하고 다니냐면요…….”

    내 손짓에 환영 스킬이 거둬지며 벽면에 큼지막하게 자리한 마법진이 드러났다.

    “저 빌어먹을 마법진 때문이에요.”

    “저, 저게 뭐죠?”

    당황으로 말을 더듬는 천우현을 향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우현 씨, 혹시 우현 씨가 받은 천신의 축복을 거두고 우리를 지구로 돌려보내 준 마신 기억나요?”

    “물론이죠.”

    “그 망할 인간, 아니 신 짓이에요. 마계의 어떤 놈의 소원이라나.”

    누군진 몰라도 잡히기만 해 봐라. 소원을 빌어도 곱게 빌 것이지, 어디서 주군이 X되는 소원을 빌어? 눈을 매섭게 부라리며 까득, 이빨을 갈자 천우현이 흠칫했다.

    “그리고 저 마법진은 애쉬… 그러니까 아까 봤던 은발 마족의 저택과 연결되어 있어서 실질적으론 애쉬 하나만 들락거리는 용이에요. 다른 마족은 거의 못 넘어와요.”

    “그럼 채현 씨가 허가한 게 아니라는 소리죠?”

    “제가 미쳤다고 그러겠어요? 아니, 그전에 제가 지구 정복이나 계획할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그렇게 신뢰가 없었다고? 울컥해서 말을 쏟아 내자 천우현이 오해해서 죄송하다며 한껏 미안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내가 천우현에게 질문할 차례였다.

    “애쉬 만난 적 있어요?”

    “총 두 번 만났죠. 회귀 15회 차인가 그쯤에 한 번, 그리고 채현 씨를 만나고 난 후에 한 번.”

    “…혹시 15회 차에서 애쉬가 당신을 죽였나요?”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내 세계보다는 아니었지만 나름 정을 붙이고 아껴 왔던 이가 내가 못지않게 소중히 여기던 이를 한 번 죽였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느끼는 혼란이 고스란히 내 얼굴에 묻어 나왔는지 천우현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죽이진 않았습니다. 그저 마왕성과 정반대의 길을 알려 줬을 뿐이었죠. 그 정반대의 길이 하필 마수 소굴이었던 게 제겐 불행이었지만.”

    돌겠네. 죽이진 않았지만 죽음의 원인 제공은 맞잖아. 제가 애를 잘못 키워서 죄송합니다. 애가 원래 그렇게 삐딱한 애는 아닌데…….

    “혹시 애쉬가 불구대천의 원수라거나, 죽음의 원인이니 꼭 죽여야 한다거나 그렇지는 않죠?”

    “별 유감은 없습니다. 저도 마족을 많이 죽였으니까요.”

    음, 그렇구나. 경계의 숲 경비 맡겨 놨던 하위 서열 따까리들이 계속 죽어 나갔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구나. 그런데 중앙의 고위 서열 마족들은 천우현의 지금 수준으로는 절대 못 죽일 텐데.

    그중 강하기로 손꼽히는 애쉬라면 더더욱. 복수할 마음이 없다고 하니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우우웅―

    천우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어, 세연아. 오빠 지금 잠시 친구 집에 왔어. 알겠어, 금방 갈게. 배 안 고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김치찌개? 그래, 오빠가 끓여 줄게. 응, 그래.”

    다정하게 통화를 이어 나가던 천우현은 곧 전화를 끊고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나도 천우현을 배웅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밖까지 나올 필요는 없다며 나를 만류한 천우현은 신발을 신다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파득 고개를 들며 물었다.

    “참, 채현 씨. 혹시 세연이가 회귀자라고 채현 씨에게 말했던 사람이 있습니까?”

    회귀자가 아닐 거라 한 톨의 의심도 보이지 않는, 동생을 향한 신뢰 어린 말에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필사적으로 부정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자기 오빠한테 제가 회귀자라고 제 입으로 밝힌 건가? 비밀 엄수를 부탁하던 김도빈이 생각나 씩 웃으며 내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제가 눈치가 좀 빨라요.”

    거짓은 아니지. 내 앞에서 너무 티 나게 나를 경계하고 미래 지식을 늘어놓았는데 말이야. 내 말에 한숨을 내뱉은 천우현이 곱슬거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주의를 시켜야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귀환자로 떠들썩한 세상에서 회귀자의 존재까지 알려지면 어떻게 될지…….”

    아마 미래를 보고 온 선지자로 추앙받지 않을까. 레벨레이션 같은 광신도 집단이 성녀로 받들어 모실 거다.

    이제 귀환자 때문에 세계가 멸망했다는 말이 천세연 입에서 나오면 그날은 레벨레이션 축배 드는 날이다.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창문에 비치는 붉은 노을은 작별 시간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슬리퍼에 발을 쓱 집어넣고는 배웅 목적으로 문 앞까지 나갔다.

    “잘 들어가요, 우현 씨. 오늘 덕분에 재미있었어요.”

    “저도요. 그럼 푹 쉬어요, 채현 씨.”

    내 인사에 천우현이 눈을 접어 웃으며 화답했다. 천우현이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 옆집 문이 열렸다.

    “아, 짜식. 남친이 없기는 뭐가 없… 천우현?”

    담배 한 대를 물고 킬킬거리던 민서 언니가 천우현의 얼굴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물고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검사 떡상의 원인이라고 날마다 천우현을 찬양하던 민서 언니였기에 저 반응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런 민서 언니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천우현이 계단을 내려갔다. 그가 작은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나를 툭툭, 친 민서 언니가 속닥였다.

    “너 혹시 S급 콜렉터냐? 주태윤이랑 백야랑 나부터 시작해서 주변에 무슨 S급이 이렇게 많아?”

    “그러게요.”

    귀환자까지 세면 아주 S급이 득실거리네. 이젠 놀랍지도 않아서 그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담배를 피우러 내려가는 민서 언니에게 담배 좀 줄이라는 메크로 소리 한 번 해 주고는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물론 돌아오는 너나 술 좀 끊으라는 소리는 가볍게 무시했다.

    뉴스는 어느새 스포츠 뉴스로 넘어가 있었다. TV를 끄고 곧바로 휴대폰을 켰다. 예상대로 귀환자 단체 채팅방은 난리가 나 있었다.

    〉Local Channel-ROK

    〉귀환자 단체 채팅방

    〉〉공지 사항: 이름은 차원 이동한 곳에서의 직업, 혹은 세계관으로 부탁드립니다

    백마왕: 미친미친 다들 뉴스 봤어요?

    백마왕: 울아부지 뉴스 보고 쟤 같은 귀환자들이 원인이면 당연히 잡아 족치는 게 맞다고 해서

    백마왕: 하마터면 부모님 앞에서 귀밍아웃할 뻔;;;

    백마왕: 아부지 아들도 잡아 족쳐야 할 귀환자인데요,,,

    마탑주: 미친 광신도 집단은 어느 차원에든 있네요 ㅉㅉ

    용병왕: 혹시 윤민아(가명) 씨 여기 계시는 분이심까?

    혁명군 수장: 그분이잖아요 화산파

    무림맹주: 예, 다들 조심하세요 보통 미친놈들이 아니에요

    혁명군 수장: 아 맞다 화산파가 아니라 무림맹주

    무림맹주: 귀환자가 다 죽어야 세상에 평화가 온다나 뭐라나

    무림맹주: 거적때기 덮어쓰고 몽둥이 들고 덤벼들어서 순간 개방 거지들인 줄 알았네요

    무림맹주: 그리고 화산파 맞습니다^^

    천마: 개방 거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천마: 맹주 댁이랑 같은 정파잖아욬ㅋㅋㅋ 개방한테 너무하넼ㅋㅋ

    마탄의저격수: 무림맹주 님 금융 치료받으시고 그 돈으로 꼭 보안 좋은 곳으로 이사 가세요

    꽃집주인: 세상 무서워서 살겠나,,, 지들도 솔직히 이상한 세계로 뚝 떨어지면 지구로 다시 돌아오려고 할 거면서

    암살길드 수장: 역지사지를 겪어 보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차원 닫을 때 같이 처넣고 닫는다거나ㅋ

    드래곤 친구: 그 새끼들 백퍼 멘탈 터져서 자살할 듯ㅋㅋㅋㅋ 드래곤에게 햄스터 취급당해 봐야지 타 차원 무서운 줄 알지

    위협에 대한 걱정보다는 감히 우리를 배척하고 해치려 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더 커 보였다. 뭐, 떼거리로 몰려온다 한들 다들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사람들이 아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지금 내 코가 석 자인데. 이쪽은 심지어 전 세계로 얼굴이 팔렸단 말이다. 전 세계 레벨레이션 신도들이 날 죽이겠다고 달려들 거라고.

    ‘부모님도 문제고.’

    일반인에, 따로 떨어져 사는 우리 부모님은 만약 내가 귀환자로 밝혀졌을 때 위협 대상 1순위일 것이다.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나는 절대로 들키지 말아야 했다.

    오늘의 습격 사태로 인해 슬슬 나오기 시작하는 귀환자 동정 여론을 보며 제발 여론이 이대로만 가라고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세상사는 언제나 그렇듯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지.

    * * *

    “그래서 저희 레벨레이션에 입교하고 싶으시다고…….”

    레벨레이션 한국 지부장이 손을 싹싹 비비며 얼굴에 비굴한 웃음을 한껏 띄웠다.

    그 말에 작은 사무실을 둘러보던 진세빈이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상체를 기울였다.

    “왜요, 기부금이 이걸로는 부족해?”

    “어유,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지부장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 5억은 기부금으로 받기에는 모자라긴커녕 차고 넘쳤다. 눈앞에 들이밀어진 5억에 눈이 먼 남자는 진세빈의 얼굴에 걸린 음산한 미소를 보지 못했다.

    사무실을 훑어보던 중, 사무실 벽에서도 문 위쪽에 걸린 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글씨로 휘갈겨 적힌 ‘심판의 날이 도래했도다.’라는 문장이.

    진세빈은 가만히 입속으로 그 문장을 따라 읽었다. 소리 없이 속삭이는 문장에 어딘가에서 만족스러워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직 진세빈, 그에게만 들리는 웃음소리가.

    ‘마음에 들어요? 난 마음에 드는데.’

    으음, 대답 없이 웃기만 하는 걸 보니 마음에 꽤 드는 모양이네. 심판의 시간이 곧 도래할 테니 틀린 말은 아니군. 진세빈이 히죽 웃었다.

    그런 그를 눈치채지 못한 채 진세빈이 내민 기부금을 탐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지부장은 툭툭,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에 퍼득 정신을 차리고는 저를 빤히 보는 진세빈과 마주했다.

    흠흠, 멋쩍음에 헛기침을 한 지부장이 입을 열었다.

    “세계 곳곳에 터진, 그리고 지금도 터지고 있을 게이트를 닫는 게 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잠시 후에 저와 함께 가실 집회에서 들으실 수―”

    “아니. 여기서 설명해 봐. 난 지금 듣고 싶어.”

    명령조의 말에 속으로 욕을 내뱉은 지부장은 겉으로는 미소를 유지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레벨레이션은 신의 미움을 받고 이 땅에서 쫓겨난 귀환자들이 다시 돌아오며 재앙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게이트 사태를 끝내려면 귀환자들을 이 땅에서 다시 쫓아내야 합니다.”

    “으응, 참 재미있는 시각이네요. 멍청한 거 같기도 하고.”

    얇은 손가락으로 턱을 쓸어내린 진세빈이 키득거렸다.

    ‘불신자 놈이 대체 왜 입교한다고 찾아온 거냐.’

    이 기부금만 아니었어도 당장 쫓아내는 건데. 지부장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다. 물질만능주의 세상에서 자본주의 미소를 띠는 건 그닥 어렵지 않았다.

    몸을 일으킨 그가 싹싹하게 웃으며 진세빈을 향해 제안했다.

    “그럼 이제 곧 시작할 집회에 한번 참석해 보시겠습니까? 집회에서는 제가 방금 간단히 설명했던 것보다 더 양질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 많아요?”

    “하하, 오늘 집회는 따로 모이는 집회가 아닌 숙소에서 지내는 이들 대상이라 60명 정도…….”

    “그 정도면 충분하지.”

    고개를 끄덕인 진세빈이 몸을 일으켰다. 안내하라는 오만한 턱짓에 치밀어 오르는 성질을 꾹꾹 눌러 참은 지부장이 그를 집회실로 안내했다. 벌써 신도들은 집회실에 집합해 있었다.

    에덴 프로젝트에 발을 담근 열댓 명쯤 되는 청년들이 어제 귀환자를 죽이는 것에 실패하고 경찰에 잡혀가는 바람에 빈자리가 눈에 띄게 보였다.

    에덴 프로젝트.

    신의 낙원인 지구에 신의 미움을 받고 쫓겨난 이들이 기어코 다시 발을 디뎌 신의 분노를 샀으니 그들을 쫓아내 다시 낙원을 되찾자.

    전 세계로 퍼진 레벨레이션교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한국 지부는 어제 단 한 명의 귀환자를 죽이는 데에 실패했다. 무려 열 명이 넘는 건장한 청년들을 보냈음에도.

    ‘일반인으론 안 돼. 헌터를 입교시켜야 해.’

    진세빈을 힐끔 보며 지부장이 생각했다. 지부장이 보았을 때 진세빈은 성격이 글러 먹긴 했으나 A급 메이지에 5억이라는 기부금까지 들고 온, 그야말로 넝쿨째 굴러온 호박이었다.

    5억이나 통 크게 기부한 신도님을 일반 신도들이랑 같은 취급을 할 수는 없기에 앞쪽 간부들의 자리에 진세빈을 안내한 지부장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자, 모두 고개 숙여 기도합시다. 이 모든 계시를 보증해 주시는 분이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하고 말씀하셨으니…….”

    갑작스레 저를 밀치는 손길에 지부장은 기도의 서문을 마치지 못하고 힘없이 밀려났다. 당황하여 옆을 돌아보니 어느새 단상 위로 올라와 방금까지 제가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는 진세빈이 보였다.

    “귀환자들을 죽이고 싶지? 놈들이 사회의 악이 되어 외면받고 손가락질받다가 알아서 죽어 줬으면 좋겠지?”

    마이크를 타고 울리는 진세빈의 나른한 목소리에 기도하느라 고개 숙였던 신도들이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당황하기도 잠시.

    허공을 찢고 나온 촉수가 그의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지부장에게로 뻗어졌다. 무슨 일인지 눈치채기도 전에 촉수에 몸이 칭칭 감겼다.

    “방법은 간단해. 너희들이 순교하면 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도 채 감지 못하고 몸이 갈기갈기 찢긴 지부장의 시체가 투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비린내와 함께 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진세빈이 느릿하게 시체를 밟고 한 발짝 앞으로 나온 동시에 풍선이 터지듯 신도 무리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괴물!”

    신도들이 우르르 문으로 몰려들었다. 무대 앞쪽에 앉아 있던 간부들 역시 다급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지부장과 똑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열어! 열라고!”

    “망치나 도끼 없어?”

    신도들은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고 문고리를 잡아 흔들며 절망 어린 비명과 통곡을 터트렸다.

    촤악, 허공에서 튀어나온 촉수가 옆 사람을 찢었다. 얼굴에 피가 흠뻑 튄 채로 주저앉은 신도가 느릿하게 제게로 다가오는 촉수에 벌벌 떨었다.

    두려움과 분노, 혼란, 공포.

    진세빈의 뒤에 있는 그것이 입맛을 다셨다. 피부로 느껴지는 생경한 감정들에 단상에 걸터앉아 제가 만든 풍경을 바라보던 진세빈이 배를 잡고 웃었다.

    “저 새끼 죽여! 아니면 우리 이러다 다 죽어!”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지르던 이의 목을 촉수가 관통했다. 조용해진 공간에 진세빈의 웃음소리만 퍼져 나갔다. 침묵도 잠시, 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집회실 안을 메운 피비린내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끼며 진세빈은 단상에 드러누웠다.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

    나른한 중얼거림이 곧 비명에 묻혔다.

    * * *

    [속보] 레벨레이션 한국 지부 건물에서 74명 사망… CCTV 모조리 고장 나 원인 불명

    - 레벨레이션 한국 지부 건물 집회실에서 신도 74명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27일 오전 9시, 집회를 나간 딸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A씨의 신고를 받고 레벨레이션 한국 지부 건물로 출동한 경찰들은 건물의 집회실에서 신도 74명이 사망한 것을 확인했다. 발견 당시 시신들의 상태는 처참했으며 최초 발견자들은 하나같이 시신들이 ‘갈기갈기 찢긴 상태’라고 증언했다.

    국과수는 부검 결과 명백한 타살이며 74구의 시신이 모두 강력한 힘의 무언가에 찢겨 사망했다는 1차 소견을 내놓았다.

    (중략)

    경찰은 건물 내의 모든 CCTV가 완전히 망가져 복구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이석영 경찰청장은 28일 오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유족에게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경찰은 범인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 밝혔다.

    댓글(1,712)

    rlmt****: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odb****: 혹시 단체로 자살한 거 아니냐?

    └wads****: ㅁㅈ 얘들 교리도 요한묵시록에서 따온 거라면서 충분히 가능성 있는데

    └ad89****: 국과수에서 타살이라고 결과 나왔다고 기사에 적혀 있잖아요 제발 기사 좀 읽고 댓글을 다세요

    nsak****: 귀환자가 복수한 거 아님? 날 죽이려 했으니까 너희는 죽어라!

    └jam7****: 무림에서 돌아왔다 했으니 말이 안 되는 말은 아닐지도…….

    └fnql****: 확실히 무림이 은원을 중요시하긴 하죠 특히 복수는 몰살이 기본이고

    └dydr****: 등급도 S급이라면서 그럼 74명 죽이는 것도 가능하겠는데?

    └amf5****: 그러기엔 너무 사파나 마교의 방식 아닌가……? 화산파라며 화산파는 정파인데

    └zlfd****: 정파나 사파나 다 똑같은 깡패입니다. 그저 인간쓰레기 깡패와 인간성은 챙기는 깡패로 나누어질 뿐. 부딪혔는데 사과 안 했다고 팔이나 목 자르는 놈들이 무협 깡패 놈들이에요.

    └mmx5****: 여기 무협지 덕후 아재들 많네 그런데 여기서 토론해 봤자 진실이 밝혀짐?ㅋㅋㅋ

    slrs****: CCTV까지 고장 낼 정도면 계획 범행인데

    qns8****: ㄹㅇ 무섭다 우리 지금 74명을 찢어 죽인 살인범이랑 같은 나라에 있다는 거잖아

    vjds****: 어떻게 74명이 찢겨 죽은 건지,,, 정말로 말세가 도래했나,,,

    orti****: 공격당했던 귀환자가 범인이다에 조심스레 한 표 던져 봅니다

    └ytw7****: 2222

    (댓글 더 보기)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었네. 기름을 끼얹다 못해 들이부었어.”

    지금 온 우주가 나보고 마계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귀환자 엿 먹으라는 사건이 하루걸러 터질 리는 없어.

    포털 메인에 도배된 뉴스 기사와 댓글을 읽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을 찢어 죽일 수 있을 정도면 역시 검사인가?

    어떻게 찢겼는지 봐야지 감이 잡힐 것 같은데 당연히 시체 사진이 뉴스 기사에 올라올 리가 없었다.

    〉Local Channel-ROK

    〉귀환자 단체 채팅방

    〉〉공지 사항: 이름은 차원 이동한 곳에서의 직업, 혹은 세계관으로 부탁드립니다

    혁명군 수장: 설마 진짜 무림맹주 님 짓은 아니죠……?

    드래곤슬레이어: 귀환자 이미지 나락 갔죠? 우리 이제 망했죠? 들키면 바로 죽창이죠?

    스팀펑크: 무림맹주 님 해명 부탁

    무림맹주: 저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무림맹주: 저 방금 경찰 출두해서 알리바이 다 말하고 오는 길이에요

    무림맹주: 전 결백합니다

    천마: 저 정도는 혈교 놈들도 혀를 내두를 수준인데요

    천마: 정파를 대표하는 무림맹주가 할 짓은 아니죠

    그래도 같은 세계에서 넘어왔다고 류사현이 슬그머니 윤선아의 편을 들었다. 나 역시 윤선아가 한 짓이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정도(正道)의 길을 걷는 사람이 한 짓이라기엔 방식이 너무 잔인했다.

    강력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윤선아가 다시 채팅을 보냈다.

    무림맹주: 도와주세요, 마왕 님

    드래곤슬레이어: 오, 공개 SOS

    도움 요청이었다.

    * * *

    “아무래도 이건 레벨레이션을 없애고 싶어 하던 세력이 저한테 그들의 범행을 덮어씌우려는 음모 같습니다.”

    비장한 얼굴을 한 윤선아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사약 들이켜듯 절도 있는 자세로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습격당한 지 이틀 만에 레벨레이션 놈들을 몰살시켰을 리가 없죠. 그러니까!”

    쾅!

    머그컵을 세차게 카페 테이블에 내려놓은 윤선아가 눈을 번뜩였다. 미리 방음 스킬을 쳐 놔서 다행이군. 우리 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지 않은 걸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건 귀환자들과 그 세력 사이의 전쟁입니다. 진짜 범인을 찾아야지 여론이 다시 동정 여론으로 돌아올 겁니다.”

    윤선아가 내게 쓱,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아무 생각 없이 봉투를 열어 그 안에 있는 사진과 서류를 꺼낸 나는 사진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인간적으로 사진 꺼내기 전에 유혈 예고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죄송합니다. 저한테는 그래도 익숙한 풍경이다 보니… 제가 배려가 부족했네요.”

    나한테도 익숙한 풍경이긴 한데 굳이 블루베리가 올려진 와플을 먹는 중에 피투성이가 된 현장을 담은 사진을 보긴 좀 그렇다는 거지.

    “제가 수사 협조를 약속하고 받아 온 사진입니다.”

    “윤선아 씨, 용의자 아니었어요?”

    “제 알리바이가 워낙 명확해서 바로 용의자 혐의는 벗었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을 찢는 미친놈이 범인이다 보니 제가 협조 의사를 밝히니까 반색하시더라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일곱 장의 사진을 천천히 훑었다. 검으로 찢었다기에는 찢긴 단면이 꽤 거칠었다.

    윤선아에게 의문을 제기하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무딘 검으로 사람을 베면 아무래도 힘이 들어가니 단면이 거칠 수밖에 없죠.”

    “…아니면 혹시 마물의 소행인가?”

    중얼거리다가 멈칫했다. 어라, 그러면 내가 의심받는 거 아니야? 게이트 밖으로 몬스터를 내보낼 수 있고 조종까지 할 수 있는 헌터는 내가 유일하잖아.

    아니야, 다시 한번 자세히 봐 보자. 마물보다는 꼭 마기에 찢긴 흔적…….

    ‘왜 계속 범인이 나 같지?’

    그래, 윤선아 말대로 이건 전쟁이다. 나한테 레벨레이션 몰살 사건을 뒤집어씌우려는 세력의 음해가 틀림없다.

    마물, 마기, 날이 무딘 검. 이 셋이 이 참사를 만들었다고 의심되는 목록이었다.

    “어서 오세요.”

    카페 문에 달린 종소리가 울리고 알바가 인사하는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퍼득 생각 하나가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범인이 정말로 귀환자 중 하나라면? 우리를 죽이려는 레벨레이션에 악감정을 품고 몰살시킨 거라면?

    나처럼 타 차원에서 구르면서 도덕심이고 생명의 경중이고 내다 버리고 온 사람이 한둘이겠나.

    나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기를 쓸 수 있는 이. 지옥도를 열어 마물을 풀 수 있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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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 백마왕 님 혹시 레벨레이션에게 돈 뜯겼거나 시비 걸린 적 있어요?

    백마왕: ??아니요?

    백마왕: 왜요? 왜 갑자기 저를 범인으로 의심하시는 거?

    백마왕: 그리고 저 그때 친구들이랑 게임 승급전 중이었거든요

    백마왕: 알리바이 확실하거든요?

    마왕: 별거 아니에요 그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둘 뿐

    마왕: 그러니까 베리 와플 하나 더 주문이요

    카운터에 서 있던 백마왕이 뚱한 표정을 짓고는 와플을 만들기 위해 몸을 돌렸다. 베리 와플 맛집이라 해서 약속 장소를 잡았더니 백마왕이 카페 카운터에 서 있을 때의 그 충격이란. 세상 참 좁았다.

    하지만 저렇게 어리바리한 모습 속에 잔인한 면모를 숨기고 있을지 누가 알아. 100년이나 지옥에서 굴렀다며.

    하지만 이걸 밝히면 채팅방에서 분열이 일어날 것은 확실했다. 서로를 범인으로 의심하고 몰아가겠지.

    그리고 귀환자는 우리 채팅방에 모인 이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제3의 귀환자가 범인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베리 와플 나왔습니다.”

    직접 와플을 들고 온 백마왕이 테이블에 베리 와플을 탁 놓고 빈 접시를 가져갔다. 불퉁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입을 비죽이는 게 어지간히 마음 상한 듯했다.

    와플 조각 하나를 포크로 찍으며 소견이 적힌 서류를 넘겼다. 강한 힘으로 찢긴 원인에 의한 쇼크사, 과다 출혈, 심장마비…….

    문을 손바닥이나 주먹으로 두드리고 민 흔적이 남아 있지만 막상 문에는 잠금장치가 없었다고 한다. 발견된 지문 역시 모두 사망자들의 것뿐.

    ‘밖에서 문을 막은 건가? 그렇다면 범인은 두 명 이상?’

    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봤자 이런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셜로키언이라지만 추리물은 내 인생 장르가 아니다. 판타지면 판타지답게 해결하자.

    * * *

    밤이 되었습니다. 탐정은 고개를 들어 주세요.

    『스킬 ‘투명화(AA)’를 실행합니다.』

    물론 몸이 투명해져서 보일 리는 없겠지만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마스크와 모자까지 눌러쓰고 곧바로 사건이 일어난 레벨레이션 한국 지부 건물로 순간 이동했다.

    건물 앞에 선 나는 숨을 죽였다. 신흥 종교답게 건물은 큰 편은 아니었다.

    폴리스 라인으로 봉쇄된 입구를 가볍게 넘어 건물 안으로 들어간 나는 건물 로비 벽면에 붙어 있는 안내도를 훑었다.

    집회실은 3층에 위치해 있었다. 살금살금 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몸을 꺾자마자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집회실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입구와 마찬가지로 폴리스 라인으로 출입을 봉쇄해 놓은 채였다.

    폴리스 라인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슬쩍 넘어 집회실 안으로 들어갔다.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바닥과 분필로 그려진 피해자들의 위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메모리테이크는 감정이 동화되기에 몸에 무리가 가고, 리와인드는 그때의 참사를 눈앞에서 재현하여 관람할 수 있지만 저 CCTV가 문제였다. 또 고장이 난다면 분명 의심받으리라.

    난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택했다.

    『스킬 ‘메모리테이크(L)’를 실행합니다.』

    핏자국에 손을 대고 스킬을 실행하자 촤르륵 눈앞에 필름이 펼쳐졌다. 그중 가장 선명한 하나의 기억을 선택했다.

    이름 모를 이가 남긴 기억을.

    [“살려, 살려 주세요……!”

    촉수가 간절히 손을 뻗은 옆 사람의 몸을 꿰뚫었다. 그대로 몸을 찢어발기는 광경을 바로 옆에서 보며 몸을 덜덜 떨었다.

    문은 열리지 않았고 사람들은 사방에서 허공을 찢고 튀어나오는 촉수에 의해 찢겨 죽어 가고 있었다.

    몸을 웅크려 귀를 틀어막고 눈을 꾹 감았다. 귀를 틀어막아도 죽음을 목전에 둔 이들의 끔찍한 비명은 고막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더는 비명이 들리지 않자 그는 슬그머니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사방에 널브러진 찢긴 시체들을 본 그는 덜덜 떨며 현실 부정이라도 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마지막 생존자였다.

    지나친 공포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코에 맴도는 피비린내에 자꾸만 구역질이 나왔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이 참극을 만들어 낸 원흉이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몸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덜덜 떨렸다.

    “넌 특별히 마지막이니까…….”

    나른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속살거려졌다.

    “보여 줄게. 누가 너희에게 죽음을 선사했는지.”

    ■■■■. 짧은 부름에 허공이 쫘악 찢기며 거대한 눈알이 나타났다. 수많은 촉수가 우글거리며 눈알을 비집고 서로 나오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우리는우주에바쳐지는제물이며그무엇도아닐지어니제물로바칠것이내육신과혼밖에없구나.

    콰득,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들리는 소리와 함께 암전이었다.]

    기억에서 겨우 빠져나오자마자 거칠어지는 숨소리에 혹여 녹음되고 있을까 봐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순간 이동(S) - 저장된 좌표』

    - 자취방

    - 본가

    - 자연대 건물…….

    『스킬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1인』

    애쉬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신발도 벗지 않고 자취방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뛰어갔다.

    “우욱!”

    변기를 붙잡고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해 냈다. 뇌를 헤집고 머리를 뒤집어 놓는 감각이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폐하! 왜 그러세요?”

    애쉬가 급히 달려와 내 등을 두드리며 물었다. 대답 없이 계속 헛구역질했다. 식은땀이 몸에서 줄줄 흘러내렸다.

    아직까지도 두려움과 공포에 떨던 감정의 잔해와 끔찍한 광기에 뇌를 좀먹히는 기분이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속이 좀 진정되자 애쉬의 부축을 받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입을 헹구고 화장실 밖으로 나가 그대로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 신발을 벗긴 애쉬가 가볍게 나를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혔다. 건네는 물잔을 받아 물을 마시며 진탕이 된 속을 진정시켰다.

    “대체 무슨 일이세요, 폐하? 폐하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게 이 차원에 존재할 리가…….”

    “그래, 당연히 이 차원에 존재할 리가 없지.”

    이 차원의 초월자가 아니다. 그건 분명 외신(Outer God)이었다. 그리고 분명 그 목소리는…….

    그때, 발신자 번호 제한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받기도 전에 끊긴 전화에 당황도 잠시, 문자가 도착했다.

    [알 수 없음 - 혹시 벌써 자는 건 아니지?] 오전 1:00

    [알 수 없음 - (사진)] 오전 1:01

    [알 수 없음 - 이게 퍼져 나가면 꽤 재미있겠다]

    [알 수 없음 - 그렇지 마왕 님?] 오전 1:02

    사진을 터치한 손을 멈칫했다. 사진은 귀환자 오픈 채팅방의 캡처본이었다.

    사진에는 신상이 특정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귀환자가 이렇게 많다는 것만으로도 세간의 주목이 쏠리기엔 충분했다.

    채팅방의 내부인인가? 대체 어떤 새끼야. 이를 악물고 답장을 보냈다.

    [뭘 원해?] 오전 1:03

    [알 수 없음 - 그 꼴 보기 싫으면 클럽 이비스로 와] 오전 1:03

    [알 수 없음 - 내 이름 대면 프리패스로 입장 가능할 거야] 오전 1:04

    놈이 뒤이어 보낸 제 이름에 흐릿한 기억 속 들렸던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냈다. 나직하게 범인의 이름을 읊조렸다.

    “…진세빈.”

    『던전 브레이크의 원인이 되어 버렸다』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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