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퇴원도 했겠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일을 할 시간이었다. 방학이 곧 끝나기에 지방 게이트들부터 해치워 버려야 했다.
수도권이랑 충청도까지는 개강하고도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4학년 2학기는 6학점이거든!
〉Local Channel-ROK
〉귀환자 단체 채팅방
〉〉공지 사항: 이름은 차원 이동한 곳에서의 직업, 혹은 세계관으로 부탁드립니다
마왕: 혹시 자기가 돌아온 곳이 게이트였다, 손
서른 명 중 여섯 명 빼고 스물네 명이 답장했다.
마왕: 이 중 자기가 돌아온 게이트 위치 기억하는 사람?
이번에는 스물네 명 중 세 명 빼고 스물한 명이 답장했다.
마왕: 게이트 위치 좀 말해 주세요
게이트 위치 알림 앱을 켜 보내 준 위치를 확인해 보니 A급 게이트가 대다수였고 대부분이 아직 공략이 완료되지 않았거나 닫히지 않았거나 앱에 뜨지도 않는, 그러니까 발견되지도 않은 게이트였다.
마왕: 그러면 이틀 후부터 거리가 먼 순부터 쫙 도는 걸로
마왕: 혹시 연결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거나 그러면 얼마든지 편하게 말하세요
마왕: 같이 처넣고 닫게ㅎㅎ
드래곤슬레이어: 마왕님, 원래 인성이 그랬어요 아님 차원 이동해서 조진 거예요?
마왕: 원래 이랬는데 차원 이동하고 더 조짐
마왕: 그리고 자기가 돌아온 게이트 레이드는 무조건 참가 의무 ㅇㅋ?
마왕: 경남 양산시 누구였죠?
이단심문관: 저랑 성녀요!
드래곤슬레이어: 저도 참가 ㄱㄴ?
마탄의저격수: 오 저도 가고 싶은데
농노1: 제 곡괭이가 녹슬기 전에 한 번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네요
백마왕: 저도 오백마왕 님 얼굴 함 보고 싶어서 참가함
백마왕: 누가 진정한 마왕인지 만나서 진위를 가려 보죠
드래곤슬레이어: 마왕님 얼굴 영상 뜨지 않았나?
백마왕: 영상 찾아보니까 다 모자이크 됐던데ㅡㅡ
성녀: 오, 정모 각?
마왕: 투표(레이드 참가 여부/중복 투표 불가)
마왕: 그러면 참가에 투표하신 열 분 모두 이틀 뒤 아침 10시에 경남 양산시 게이트 앞에서 만납시다
투표 결과 참가를 원하는 이들은 총 열 명. 그리하여 게이트에 들어갈 인원은 나를 포함해서 열한 명으로 정해졌다.
- 그럼 이틀 후에 제가 채현 씨 댁으로 차 끌고 가겠습니다.
“피곤하게 무슨 운전이에요. 바로 갈 수 있는데. 약속 시간 10분 전에 집 앞까지만 와요. 눈 깜빡할 사이에 집합지에 도착해 있을 거니까.”
자신만만하게 시간을 말해 주고는 게이트 레이드 인원에 포함된 천우현의 전화를 끊었다.
귀환자들이 어떤 사람들일지 궁금했다.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유명 헌터로 이름 날리는 사람도 있을 거고 힘을 숨기고 헌터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
지금 내게 메시지 보낸 이 인간처럼.
[류사현 - 혹시 순간 이동으로 가실 거면]
[류사현 - 저도 데리고 가시죠ㅎ] 오후 4:01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혀를 차며 답장을 보냈다.
[한 번 이용하는 데 이용 요금 408,300원] 오후 4:03
[류사현 - 뭐죠 그 근본 없는 요금은?] 오후 4:04
[근본 없다뇨 서울에서 부산까지 택시비인데] 오후 4:05
[그럼 공짜로 이용할 생각이셨음? 양심 없네] 오후 4:06
천우현 씨는 공짜지만 너는 아니다, 천마야.
* * *
“너무 비싼 거 아닙니까? 좀 깎아 주시죠?”
“싫으면 고속버스나 KTX 타고 오시든지.”
“…약속 시간 5분 전인데요? 그럼 혹시 12개월 할부 됩니까?”
“와, 류사현 씨는 택시비도 할부받아요? 대박이네.”
한창 순간 이동 가격을 흥정하는 나와 류사현의 앞으로 차 한 대가 스쳐 가 원룸 앞에 주차했다. 차 문을 열고 내린 천우현을 발견한 류사현이 득달같이 달려가 물었다.
“혹시 용사님도 40만 원 내고 순간 이동으로 이동합니까?”
“…40만 원이요?”
떨떠름한 얼굴로 되묻는 천우현에 표정을 확 구긴 류사현이 사람 차별도 유분수라고 구시렁거렸다.
“어? 누구는 공짜로 데려다주고, 누구는 부득부득 택시비로 계산해서 받고. 차원 이동 인맥 없는 사람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류사현이 천우현 다 들으라는 듯 크게 중얼거리자 천우현이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짓고는 내게 다가왔다.
“40만 원 드리면 될까요, 채현 씨? 그러고 보니 채현 씨 덕분에 편하게 가는 건데 제가 그 보답을 미처 생각 못 했군요.”
“맥이는 거죠? 지금 저 맥이는 거죠, 용사님? 이래서 정도(正道) 걷는 놈들은 안 된다니까?”
흔쾌히 40만 원을 낸다는 천우현의 옆에서 류사현이 펄쩍펄쩍 뛰었다. 한숨을 내쉬며 중재했다.
“KTX 가격만 받을게요. 59,800원. 우현 씨는 굳이 내고 싶다면 28,600원만 내세요.”
“왜 저긴 반값인데요?”
“천우현 씨는 무궁화호 가격. 댁은 KTX 가격.”
“만 65세 이상은 경로 할인 30%인데 30%만 깎아 주시죠.”
“류사현 씨가 KTX 표 창구에서 경로 할인받아서 표 끊어 오면 인정해 드릴게.”
KO. 축 어깨를 늘어뜨리는 류사현에게 농담이라고 말해 주고 나서야 그가 기운을 차렸다.
『스킬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3인』
좌표가 촤르르 펼쳐지고 순간 이동이 발동되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고 다음 순간 우리는 양산시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오, 파티장님, 일찍 오셨네?”
검을 어깨에 턱 걸치고 연석에 걸터앉아 있던 여자가 내 얼굴을 보고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러스터 길드에 계약금 3억 받고 들어간 A급으로 유명해진 전 랭킹 10위였다.
“…소드마스터 님?”
“아하하, 바로 알아보시네. 반갑습니다, 마왕님.”
넉살 좋게 내민 손을 마주 잡자 소드마스터가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그 인사에 옆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하고 있던 청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백마왕 님 왔다고요? 어디? 어디?”
두리번거리던 청년, 아니, 백마왕이 나를 발견하고 헛! 손가락질했다.
“오백마왕 님?”
“그 앞에 망할 ‘오백’ 좀 떼죠?”
시스템 간섭으로 불러낸 스카우터가 백마왕의 정보를 털었다.
『정윤수』
* 특성 - 귀환자
* 계열 - 법사
* 직업 - 마왕
* 등급 - S
* 칭호 - 지옥의 지배자
* 스킬 - SSS급(목록 보기), SS급(목록 보기), S급(목록 보기), AAA급(목록 보기) … F급(목록 보기)
* 스테이터스 - 체력 S, 힘 A, 민첩 A, 지력 B, 정신력 A, 마력 S
진짜 마왕은 맞네. 하지만 어디서 S급따리가 나와 맞먹으려고 하는 거지. 이쪽은 EX급이라고.
그때 음료수가 가득 담긴 봉지를 들고 저 멀리서 걸어온 여자가 내게 음료수 캔 하나를 내밀며 인사했다.
“오, 파티장님 오셨네. 안녕하심까.”
“혹시 누구시죠?”
대답 대신 저격 총을 인벤토리에서 꺼낸 여자가 총을 흔들었다.
“아, 마탄의저격수 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마탄의저격수는 다른 이들에게도 음료수를 하나씩 돌렸다. 음료수를 받아 든 천우현과 류사현 역시 용사와 천마로 자기소개했다.
“아이고, 빨리들 오셨네!”
각각 20대 후반과 30대쯤 되어 보이는 두 남자가 나란히 걸어왔다. 20대 남자가 툭툭, 가슴을 두드리며 먼저 정체를 밝혔다.
“제가 혁명군 수장입니다. 농노1 님하고는 우연히 옆좌석에서 만나서 같이 왔습니다, 하하.”
“농노1입니다.”
묘하게 피곤해 보이는 인상의 30대 남자가 뒤이어 소개했다. 마탄의저격수에게 음료수를 받아 든 혁명군 수장이 넉살 좋게 인사했다. 농노1은 말없이 묵례하고는 곧바로 캔을 까 들이켰다.
“헉, 벌써 다 모였어. 야, 내가 빨리 오자고 했지!”
“아니이! 아침부터 이렇게 막힐지 몰랐다고!”
각각 탈색 머리와 검은 머리의 20대 여성들이 뒤이어 헐레벌떡 뛰어왔다. 천우현을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진 검은 머리 여자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귀환자 모임 맞죠?”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혹시 자기소개할 때 이름이랑 나이도 말해야 해요?”
“아니요, 그냥 채팅방 닉네임만 말하시면 돼요.”
“제가 이단심문관이고 얘가 성녀예요!”
이단심문관과 성녀, 이번 게이트의 주인공들이었다. 같이 오는 거나 대화하는 걸 보니 원래 아는 사이였나? 아니면 같은 곳에서 떨어져서 친해진 건가.
대충 다 온 것 같아 보여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열. 한 분 안 오셨는데.”
“드래곤슬레이어 님 안 오셨네.”
혁명군 수장이 빠르게 대답했다. 항상 채팅방에 상주하며 제일 많이 떠들어 대는 드래곤슬레이어가 없었다. 모두가 드래곤슬레이어의 등장을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때, 저 멀리서 잘 쳐줘 봐야 대학교 새내기, 누가 봐도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걸어왔다.
“아, 친구들하고 바람 좀 쐬러 나왔다고. 아, 엄마, 쫌! 방학이잖아! 수능 100일도 안 남은 거 나도 알지. 알았다고, 저녁엔 학원 간다니까!”
빽, 소리를 내지르고는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은 소년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도저히 채팅방에서의 모습과 매치가 되지 않았지만 현재까지 도착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기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드래곤슬레이어 님?”
“네, 드래곤슬레이어요. 그쪽은 마왕님 맞죠?”
더벅머리를 긁적이던 고3… 이고깽(이계 진입 고교생 깽판물)을 이루고 귀환한 드래곤슬레이어가 뿔테안경을 쓱 올리며 물었다.
“그런데 제가 저녁에 학원을 가야 하는데 혹시 레이드 몇 시에 끝나요?”
이고깽의 주인공도 헬조선에서는 사교육에 시달리는 한낱 수험생일뿐이었다. 모두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스쳤다.
“학원은 몇 시까지 가야 하는데요?”
“오후 5시요.”
KTX를 타도 어림잡아 세 시간에, 학원까지 가는 데에 넉넉히 한 시간 잡으면 오후 1시까지는 레이드를 마쳐야 한다는 소린데…….
그때, 백마왕이 손을 들고 툭 끼어들었다.
“저도 카페 알바 있어서 6시 전까진 서울 가야 해요.”
지금 시간은 오전 10시. 레이드에 세 시간이면 충분하지.
다 모인 열한 명의 귀환자들을 훑었다. A급인 혁명군 수장만 빼고 모조리 S급이었다. 갑자기 생태계를 파괴하지 말라던 협회장이 생각났다.
제가 굳이 파괴하지 않아도 S급이 흘러넘치는데요.
천우현을 빼고는 대외적인 S급은 한 명도 없는 걸 보니 다들 용케 각자의 방식대로 힘을 잘 숨긴 모양이다.
마왕과 용사와 천마와 성녀와 이단심문관과 대공직을 받은 소드마스터와 혁명군 수장과 농노가 같은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이 참 아이러니했다.
금방이라도 무기를 뽑으며 대치해야 할 것만 같은 이 조합은 이곳이 한국이기에 가능한 조합이었다.
“그런데…….”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연 농노1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농노1의 손짓에 따라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오늘 제가 몰래 들어갈 게이트는 모 길드 소유 게이트라는데 게이트 안에 있는 문이 안 열려서 공략을 못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문을 열어 보겠습니다. 제가 오늘을 위해서! 돌멩이 파티에 잠입해 들어가 게이트 스틸 요령을 배워 왔습니다.”
손가락 끝에는 셀카봉을 쥔 채로 휴대폰에 끊임없이 떠드는 남고생이 있었다.
“저 아이는 누구죠?”
현재 인원은 정확히 열한 명. 그러니 저 남고생이 귀환자일 리는 없고.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살피다가 어디서 봤던 얼굴임을 깨달았다.
“DJ 민이었나?”
“BJ 민이라고! 알파벳도 모르냐, 뇌가리 없는 새끼야?”
내 중얼거림에 신경질적으로 소리 지르며 고개를 돌린 남고생, BJ 민이 게이트 앞에 모여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뜯어먹을 시체 찾은 하이에나처럼 눈을 빛냈다.
“와, X발. 방송 분량 생겼다.”
히죽 웃으며 손을 뻗어 휴대폰을 터치한 BJ 민이 휴대폰 화면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행님들,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콘텐츠는 던전 스틸범들 참교육입니다. D, E, F급따리 놈들이 또 게이트 스틸하려고 모여든 모양인데요, 과연 법사계 A급은 근거리에서 돌멩이와 폐급 몇 명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가, 궁금하시면 구독과 좋아요, 눌러 주십쇼!”
돌멩이는 D급을 부르는 멸칭이었고, 폐급은 E, F급을 묶어 부르는 멸칭이었다. 그리고 저런 말을 면전에서 뱉는 놈치고 인성 제대로 된 놈을 못 봤지.
“저거 설마 생방인가?”
미간을 찌푸린 소드마스터의 중얼거림에 백마왕과 농노1이 슬그머니 제 얼굴을 가렸다.
그나저나 BJ 민 쟤는 지금 천우현이 안 보이나? 이 빛나는 랭킹 1위의 얼굴이 안 보인다고?
방송 주제나 바꿔라. A급 하나가 귀환자 무리를 만났을 때 깝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걸로. 어그로 아주 잘 끌리겠네.
“일단 저 휴대폰부터 뺏죠.”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드루와를 연발해 대는 BJ 민을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앙, 개꿀띠. 사정거리까지 알아서 기어들어 왔죠? 이래서 D급따리들이 지능도 D급이라는 거ㅈ―”
『저주 ‘수면(A)’을 실행합니다. 설정 시간: 세 시간』
어휴, 내 귀가 다 썩는 느낌이네. 곧장 저주에 걸려든 BJ 민이 코를 골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충돌하기 일보 직전인 휴대폰을 잡아채 화면을 확인했다.
다행히 생방이 아닌 단순 동영상 촬영이었다.
갤러리로 들어가 동영상을 싹 삭제하고 축 늘어진 채 코를 고는 BJ 민을 적당한 장소에 옮겼다. 여기서 적당한 장소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 만한 곳을 뜻했다.
『스킬 ‘메모리얼(SSS)’을 실행합니다.』
『기억 삭제를 완료했습니다.』
기억 삭제를 마치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제 들어가죠. 1시까지 레이드 끝내려면 서둘러야겠네요.”
* * *
내가 단체 순간 이동을 실행하려는 것보다 헌터 라이선스를 꺼낸 소드마스터가 스피드 게이트의 단말기에 헌터 라이선스를 대고 지문 인식기에 지문을 찍는 게 한발 더 빨랐다.
“아, 여기 러스터 길드 소유 게이트라서요.”
열린 스피드 게이트로 들어오라고 손짓한 소드마스터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막 찍고 들어가도 됩니까……?”
혹여 잘못되어서 귀찮아지는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 담뿍 묻어 나오는 농노1의 물음에 소드마스터가 씩 미소 지었다.
“요즘 러스터 길드 바빠서 괜찮을걸요. 이런 변두리 애물단지 게이트에 신경 안 써요.”
“애물단지요?”
“아까 들으셨다시피 문이 안 열리니까 들어갈 수가 있어야지.”
“헐, 우리가 돌아온 게이트가 애물단지래.”
쑥덕이는 성녀와 이단심문관을 보며 식은땀을 삐질 흘린 소드마스터가 그런 뜻이 아니라고 애써 변명했다.
『A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짧은 통로의 끝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틈새도, 문고리도 없이 알아볼 수 없는 언어가 새겨진 문은 가볍게 밀거나 당겨 보아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마 문에 새겨진 문장을 읽어야 할 거예요. 이런 문은 언령으로 열리는 문이거든요.”
성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어느새 화려한 보석이 가득 박힌 스태프를 쥔 채였다. 성호를 긋고 손을 모은 성녀가 나직하되 힘이 실린 목소리로 문장을 읊었다.
“정의는 지존하신 뒤마누스를 움직여 성스러운 힘, 최상의 지혜, 그리고 태초의 사랑으로 나를 만들었노라.”
문이 소리 없이 스르륵 열렸다.
“요올, 최하얀. 성녀님, 멋있어요!”
“아, 조용히 해! 쪽팔려!”
얼굴이 붉어진 성녀가 옆에서 박수를 치는 이단심문관의 등짝을 짝짝, 내리쳤다.
웅장한 돔 형태의 방에 입성하자 입장을 알리는 상태창이 떴다. 벽에 걸린 횃불이 한꺼번에 켜지며 어둑한 방을 밝혔다. 컴컴했던 시야에 서서히 방의 풍경이 담겼다.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문이 닫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우뚝 선 여섯 개의 석상이었다. 석상의 크기는 모두 고대 그리스 석상 정도는 가볍게 씹어 먹을 정도로 거대했다.
뻣뻣이 서 팔을 가슴께에 모으고 있는 미라.
앞다리를 치켜들고 있는 검은색 말.
다섯 개의 촛대를 쥐고 있는 악마.
새 부리 가면을 쓴 검은 코트의 남자.
사람의 머리에 사자의 몸에 전갈의 꼬리를 지닌 웬 끔찍한 혼종.
잘린 제 머리를 겨드랑이에 끼운 채 목 잘린 말에 앉아 있는 목 없는 기사.
만든 사람의 취향이 의심될 만큼 하나같이 음산하고 끔찍한 석상들을 둘러보았다. 류사현은 어느새 검을 꺼내 들어 석상을 한 번씩 검끝으로 툭툭, 치고 있었다.
방을 가득 채운 쌀쌀한 냉기와 바람 소리 하나 없는 기괴할 정도의 고요함, 창백한 푸른 불빛, 생명력이라고는 보이지를 않는 돔 형태의 방은 이곳을 꼭 무덤처럼 느껴지게 했다.
입구와 직선으로 가장 떨어져 있는 곳에는 제단이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거대한 천사상이 제단을 보호하듯 큰 검을 땅에 꽂고 서 있었다.
악마 숭배라도 하는 것 같은 석상들 사이에 홀로 있는 천사상이라, 이 무슨 아이러니지.
“헉, 하얀아, 저거 나기엘 아니야?”
“맞네. 설마 이것들, 조각상이 아니라 마물을 봉인해 놓은 건가?”
천사상을 알아보는 건지 천사상의 이름을 부르며 대화를 나누는 둘에게로 슬쩍 다가가 물었다.
“두 분은 같은 세계에 떨어지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네네, 저희가 신입생 오티 때 처음 만났는데 그때 저녁에 술 먹고 새벽에 잠이 안 와서 같이 산책하다가 떨어졌거든요.”
성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찌른 이단심문관이 키득거렸다.
“거기가 흑발이랑 흑안이 아예 안 나오는 색이나 다름없어서 얘가 성녀 감투 썼죠. 저는 그때 탈색해서 검은 머리가 아니니까 성녀를 보좌하기 위해 내려온 성녀의 시녀라곸. 그런데 이제 머리가, 제 원래 검은색 머리가 나잖아요. 그러니까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이단심문관으로 승진했어요.”
말만 들으면 꼭 성력이 없는데도 머리 색만으로 감투를 썼다는 것 같은데…….
“아, 그럼 성력은 없는 거고?”
“아니요, 믿으니까 생기던데요?”
뭐지……? 얘들, 혹시 사이비에 떨어졌던 건 아니겠지?
내가 의심 어린 눈빛을 보내건 말건, 천사상 뒤의 제단으로 다가간 성녀가 제단에 새겨진 문장을 줄줄 읽어내려갔다.
“월요일엔 목 없는 기사가 대문에 피를 쏟아붓고,
화요일엔 악몽이 방문하고,
수요일엔 다섯 개의 촛대가 불행을 몰고 왔고,
목요일엔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들렸으며,
금요일엔 망자가 창문을 기웃거리고,
토요일엔 역병이 문고리를 잡았으며,
일요일엔 죽음이 문을 두드렸도다.”
옆에서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이단심문관이 고개를 팍 치켜들며 물었다.
“동요 「일요일의 토머스 씨」 아니야?”
“맞네! 듈라한, 나이트메어, 다섯 촛대의 악마, 맨티코어, 미라, 메디코 델라 페스페, 사신!”
성녀가 조각상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이름을 줄줄 읊었다.
동요 내용 참 음산하다. 일주일 동안 조리돌림당하다가 결국 죽었다는 소리 아니야. 이런 게 동요라니.
“이런 형태의 던전은 저희가 그 세계에서도 몇 번 클리어해 봤거든요? 저희 지시만 잘 따라 주세요!”
이단심문관이 손을 들어 올리고는 모두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조각상을 살피고 있던 시선들이 이단심문관과 성녀에게로 집중됐다.
“지금 이 석상들은 마물을 봉인해 놓은 석상이에요. 아마 석상의 입 안에 마석이 있을 거거든요? 그 마석을 저 보스룸으로 향하는 문에 요구하는 순서를 맞춰 끼우면 보스룸의 문이 열려요.”
“지금 석상들이 입을 다 다물고 있는데요.”
“아, 그건 이 나기엘… 그러니까 천사상을 박살 내면 제약이 풀려요. 그럼 그때 마석을 빼면 돼요. 보스룸으로 넘어가면 또 클리어 방식이 있는데 그건 넘어가고 설명할게요!”
“그럼 시작하죠.”
내 지시에 류사현이 천사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천사상이 산산이 조각나며 무너져 내렸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혁명군 수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다섯 개의 촛대를 지닌 악마 조각상을 천천히 살피다가 무언가가 발에 툭, 채여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돌바닥의 어긋난 턱에 걸린 모양이었다.
다시 고개를 든 나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분명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던 조각상의 표정이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잘못 봤는가 싶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자 이번에는 눈동자가 또르르 움직였다.
촛대를 쥐고 있는 손 역시 조금 내려와 있었다.
내 눈이 이상한 게 아니라 정말로 조각상이 움직인 것이었다.
콰앙―!
그 순간 큰 소리가 들려와 일제히 고개가 그쪽을 향했다. 미라 조각상을 향해 검을 내리친 소드마스터가 손을 털고 있었다.
“오, 마석 하나 겟.”
검을 반대쪽 손으로 옮겨 쥐고 얼얼한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던 소드마스터가 빠른 반사 속도로 뒤돌아 검을 치켜들었다.
그의 등 뒤에 앞발을 높이 치켜든 채로 멈춰 있는 거대한 검은색 말 석상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촛대가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손을 뻗은 채로 멈춘 악마 조각상에게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콰앙, 말 석상을 박살 냈는지 묵직한 돌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기가 석상을 휘감았다. 묵직하게 누르는 힘 그대로 쩌억― 박살 냈다. 조각들을 발로 헤집었다. 바스러진 잔해 속에서 빛나는 검은색 보석을 발견했다.
‘이게 마석인가.’
보석을 주우려고 몸을 숙인 순간, 내 등 위로 서늘함이 스쳐 지나갔다. 듈라한의 석상이 창을 휘두르는 모양새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눈을 떼면 움직이는 모양입니다!”
듈라한 석상을 향해 검을 힘껏 꽂아 석상을 박살 낸 천우현이 외쳤다.
“완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네. 사람 수가 석상보다 더 많았기에 망정이지.”
검을 소환해 낸 드래곤슬레이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아마 사람이 석상 수보다 더 적었으면 상황은 지금보다는 조금 더 어렵게 흘러갔을 것이리라.
귀환자들의 석상 학살 타임이 시작되었다. 이제까지 힘을 숨기느라 참아 온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분출하기라도 하듯 모두들 석상에게 과도할 정도의 공격을 퍼부어 댔다.
마침내 모조리 석상이 박살 나고, 여섯 개의 마석을 얻은 우리는 정중앙에 있는 제단 앞으로 모였다.
여기저기 박살 난 석상들의 잔해가 널려 있었다. 그나마 제일 깨끗한 중앙 자리에 모여 뻐근한 몸을 주무르며 한숨 돌렸다.
단단한 석상에게 얻어맞아 욱신거리는 상처 부위가 성녀의 힐 한 번에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하게 회복되었다.
“아이고, 죽겠다. 무슨 미술관이 살아 있다도 아니고, 왜 석상이 움직이고 난리야.”
“차라리 진짜 몬스터가 낫지. 석상이 하도 단단해서 우리 에고소드 이 나가겠―”
투덜거리며 검날에 묻은 돌 부스러기를 가볍게 털어 내던 소드마스터의 말이 뚝 끊겼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 그가 중얼거렸다.
“분명, 다 박살을…….”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기도 잠시.
“우욱!”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신발에 검붉은 핏방울이 튀었다. 하얀색 신발에 점점이 튄 핏방울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등에 무언가가 닿는 감촉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바닥을 물들인 검붉은 피 웅덩이였다. 시선을 위쪽으로 옮기자마자 담긴 끔찍한 광경에 경악하며 피를 토한 이의 이름을 비명처럼 외쳤다.
“우현 씨!”
“으윽…….”
다시 한번 울컥 피를 토한 천우현이 신음을 내뱉으며 발을 버둥거렸다. 그는 새 부리 석상에게 목이 단단히 붙잡혀 허공에 들어 올려져 있었다.
상황은 심각하다 못해 최악이었다. 소드마스터의 등에는 찔리면 즉사 수준이라는 맨티코어의 전갈 꼬리가 박혀 있었고, 천우현은 새 부리 석상에게 목이 졸리는 중이었다.
흑사병을 일으키는 메디코 델라 페스페.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잡힌 목에서부터 피부가 검붉게 물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일단 저 손을 떼어 내는 게 먼저였다.
“…젠장, 쉽지 않네.”
머리 위에 그림자가 져서 주위를 둘러보자 허탈한 웃음만이 터져 나왔다.
분명히 다 박살 냈다고 생각했던 석상들이 어느새 원 상태로 돌아와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 * *
마왕의 중얼거림에 모두 고개를 들어 재생된 석상을 확인했다.
혹시 마석이 저것들의 원동력인가 싶어 각자의 손에 쥐고 있던 검은색 마석을 박살 내 봐도 석상들은 여전히 멀쩡했다.
순식간에 두 명이 리타이어된 상황. 소드마스터의 치유에 집중해야 하는 성녀와 무방비 상태에 빠진 용사를 보호할 이까지 빠지자 남은 이는 총 일곱 명.
여섯 개의 석상보다 겨우 한 명이 많은 인원이었다. 여기서 더 인원이 줄어든다면 이제는 귀환자 쪽이 위험했다.
쓰러진 이들에게 시선이 몰리는 바람에 움직일 찬스를 얻은 조각상들은 귀환자들을 곧바로 공격해 왔다.
탕―!
총알이 공격을 한 번 맞은 나이트메어 석상의 금이 간 부분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쩌적, 갈라지더니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나이트메어의 잔해를 보며 혁명군 수장은 권총의 총구에 바람을 훅, 불었다.
타앙―!
다음 순간 강한 총소리가 들려오자 그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옆을 향했다. 안정된 자세로 제단을 엄폐물 및 지지대 삼아 스나이퍼 라이플을 겨눈 마탄의저격수가 다시 한번 총구를 당겼다.
빠르게 날아간 총알이 방금 총알이 관통한 곳에 날아가 박혔다. 그대로 콰앙! 폭발음을 내며 미라의 머리가 폭발했다.
멀쩡한 미라를 총질 두 번으로 박살 낸 마탄의저격수를 멍하니 보던 혁명군 수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뭐 하시던 분이셨는지……?”
“특전사 출신입니다.”
“아니, 한국에서 말고 떨어졌던 세계에서요…….”
스나이퍼 라이플이 라이플로 모양을 변형했다. 라이플을 어깨에 걸치고 혁명군 수장의 등 뒤를 노리는 맨티코어의 독침을 저격한 마탄의저격수가 픽 웃었다.
“그냥 미래 SF 세계 군부에 몸담았다고 해 두죠.”
한편, 드래곤슬레이어는 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식을 벗어난 일에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저거 오러 아니야?’
곡괭이에 일렁이는 건 분명히 오러였다. 제게 휘둘러지는 다섯 개의 촛대를 가볍게 피한 농노1이 힘껏 곡괭이를 악마상의 머리에 내리찍었다.
콰앙―!
굉음이 울리고 악마상에 쩌적, 금이 갔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다.
“농노1님, 용사였어요? 아님 용병? 기사?”
튜토리얼 마을에서 은퇴하고 정체를 숨긴 채 요양하던 전설의 드워프 대장장이 할아범이 만들어 준 미스릴 검을 쥔 채로 드래곤슬레이어가 입을 떡 벌리며 물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농노1이 다시 한번 곡괭이를 휘두르며 대꾸했다.
“열심히 세금 내고 노역 동원되는 불쌍한 농노였다니까요. 왜 난 하필 떨어져도 그런 X같은 곳에…….”
곡괭이질 두 번 만에 악마상은 그대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니, 거짓말! 어떻게 곡괭이로 오러를 써요? 나도 은퇴한 소드마스터 용병 출신 스승님께 몇 년을 두들겨 맞으면서 겨우 피워 낸 오런데?”
“몇십 년간 농지 망가뜨리려고 몰려오는 마물을 곡괭이로만 잡으면 오러 정도야 충분히 불러일으키죠.”
“검은요? 왜 검 안 쓰고 곡괭이로 오러를 써요?”
“농노에게 검 살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쾅, 빗나간 곡괭이가 돌바닥을 찍었다. 바닥에 틀어박힌 곡괭이의 끝을 힘주어 뺀 농노1은 다시 복구되어 제게 달려드는 나이트메어를 향해 곡괭이를 힘껏 휘둘렀다.
드래곤슬레이어는 성격 괴팍한 은퇴 용병 스승에게 거둬져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는 하루 종일 체력 단련하고 검만 휘둘러야 했던 제 차원 이동 일대기가 제일 극한이었다고 생각했던 걸 반성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러를 불러일으키는 경지까지 왔음에도 검 살 돈이 없어 곡괭이를 휘두르고 다녔던 농노보단 나은 것 같았다.
“확실히 사람이 빠지니까 성가시긴 하네요.”
바닥에 누워 있는 소드마스터와 용사, 그리고 용사를 부축하는 마왕과 소드마스터를 치료하는 성녀를 힐끔 보며 농노1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마왕 님은 저 상태에서 나름 캐리하시는 거 같은데요.”
바닥에서 치솟는 마기를 보며 드래곤슬레이어가 중얼거렸다. 시커멓고 지독한 기운이 석상을 감싸고 무서운 기세로 조여 왔다. 쏟아지는 스킬은 위력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했다.
“저도 저 정도쯤은 하거든요?”
홀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던 백마왕이 질 수 없다는 듯 마기를 불러냈지만…….
“아닌데. 채도부터 다른데.”
“이런 젠장! 500년 묵은 마기랑 100년 묵은 마기랑 같겠냐고요!”
“아니, 백마왕 님이 먼저 저 정도쯤은 한다면서요.”
미스릴 검을 깔끔한 자세로 휘두르며 드래곤슬레이어가 툴툴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아슬아슬하게 저를 스쳐 가는 검격에 잠시간 굳었다.
“어이쿠, 죄송.”
류사현이 태연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 그를 보는 드래곤슬레이어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와, 방금 그거 천마삼검이에요? 저도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제 본진이 사실 판타지가 아니고 무협이거든요. 사부라고 부를까요?”
“하하, 드래곤슬레이어 님, 일단 이거부터 먼저 해결하고…….”
“사부! 여기서 구배지례 올릴까요?”
낡고 지친 류사현은 현직 고딩의 노빠꾸력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아니…….”
해맑게 제게 달라붙어 오는 드래곤슬레이어를 떼어 내며 류사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능력치도 저랑 비슷하면서 사부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사부.
* * *
내게 달려드는 나이트메어 석상을 향해 벼락을 날리며 마기로 천우현의 목을 조르는 새 부리 가면 석상의 팔을 감았다.
쩌적, 새 부리 가면 석상의 팔에 금이 가더니 완전히 박살 났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천우현을 받아 냈다. 온몸이 불덩이였다. 목을 붙잡고 컥컥거리던 그가 또다시 피를 토해 냈다.
발열과 각혈, 호흡 곤란, 출혈성 반점. 흑사병의 증상이었다.
당장 힐이 필요해 보였지만, 성녀는 맨티코어의 독침에 찔린 소드마스터를 치유하느라 이쪽까지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우현 씨, 정신 놓지 마요!”
천우현을 흔들며 급한 대로 러스터 길드와 B급 게이트 레이드할 때 받았던 A급 포션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그의 입에 흘려 넣었다.
천우현이 힘겹게 포션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열이 조금 내려가는 것도 같았다.
소드마스터의 손을 꽉 붙들고 치유의 기도를 읊는 성녀의 손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소드마스터의 입에서 검은 피가 울컥 토해졌다.
“끄응, 아이고 죽겠네. 숙취에 찌든 거 같구먼.”
드러누운 소드마스터가 제 위를 덮치는 자세 그대로 멈춘 나이트메어 석상의 배에 에고소드를 찔러 넣으며 투덜거렸다.
소드마스터가 제 위로 쏟아지는 돌조각을 몸을 굴려 피하는 동안 성녀가 천우현을 향해 급히 다가왔다.
그의 상태를 살핀 성녀가 천우현을 넘겨주고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턱 잡으며 말했다.
“흑사병이네요. 마왕 님도 용사 님 힐 끝나기 전까지 여기 계세요. 흑사병은 전염병이라 마왕 님께도 옮았을 수 있으니까요. 마왕 님이 돌아다니면서 더 옮기고 다니시면 머리 아파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제일 위험 분자인 새 부리 가면 석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다음 가는 위험 분자인 맨티코어는 이미 소드마스터가 재생할 때마다 열심히 다지는 중이었다.
다시 재생된 석상을 향해 권총을 갈기며 혁명군 수장이 소리쳤다.
“어떡하죠? 이쯤에서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은데요! 계속 박살 내도 다시 재생되니까 끝이 없잖아요!”
“일단 저 보스룸 문을 열죠!”
이단심문관이 굳게 닫힌 보스룸 문 앞으로 뛰어가며 외쳤다. 문에 새겨진 글자를 읽은 이단심문관이 뒤를 돌며 지시했다.
“요일별로 맞는 마석을 끼워 넣어야 해요! 월요일부터 순서대로 갈게요! 듈라한 마석 좀 가져다주세요!”
모두 반사적으로 제 손에 쥐고 있는 마석을 확인했다. 하도 섞인 탓에 지금 손에 있는 것이 어떤 석상의 마석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부수고 새로 얻죠. 어려운 건 아니잖아요?”
류사현의 말에 모두 망설임 없이 마석을 휙 내던졌다. 듈라한과 가장 가까이 있던 마탄의저격수가 듈라한이 타고 있던 말에 한 발, 듈라한의 머리에 한 발 저격총을 쐈다.
터져 나간 듈라한 석상의 잔해에서 마석을 주운 마탄의저격수가 곧바로 이단심문관에게 마석을 전달했다. 그것을 받아 든 이단심문관이 가장 첫 번째 홈에 마석을 끼웠다.
“화요일에 나이트메어! 수요일은 다섯 촛대 악마상!”
쾅! 콰앙!
연속으로 석상들이 박살 났다.
나머지 이들이 열심히 마석을 배달하는 동안 천우현과 나는 성녀에게 힐을 받았다. 내가 힐을 받는 동안 새 부리 석상을 보며 옆에 있던 천우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괜히 따라와서 짐만 됐네요.”
“짐 되신 것치고는 되게 잘 부수고 다니시던데…….”
성녀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열이 내리고 검붉은 반점이 사라지자 천우현은 몸을 일으켰다. 나는 다행히 전염되진 않았는지 치유를 마쳐도 살짝 개운한 정도였다.
토요일인 마지막 여섯 번째의 홈까지 차례로 마석을 끼우자 잠금이 풀리는 달칵, 소리가 났다. 이단심문관과 함께 문을 밀던 혁명군 수장이 당황한 얼굴로 뒤돌았다.
“문이 안 열립니다! 두 명으론 턱도 없는 것 같은데요!”
석상은 여섯 개, 남은 사람은 아홉 명이었기에 세 명을 더 보냈다. 그래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외침이 돌아왔다.
석상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빤히 보고 있던 백마왕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소드마스터 님이랑 천마 님까지 있으니 힘은 충분할 텐데.”
“힘은 상관없어요. 아마 이 방에 들어온 모두가 밀어야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되었을 거예요.”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하는 성녀의 말에 모두가 합류해 거대한 문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리고 힘껏 밀었다. 이게 PUSH가 아니라 PULL인가 싶을 정도로 더럽게 빡빡했다.
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쐐애액, 무언가가 날아오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지만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팔에 힘을 주었다. 듈라한의 창이 내 옆에 아슬아슬하게 날아와 꽂혔다.
마침내 문이 활짝 열렸다. 내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촛대를 피해 뒹굴듯이 문 너머로 들어갔다.
귀환자들이 모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문이 쾅, 닫혔다. 벽의 횃불이 타오르며 어두웠던 공간을 밝혔다.
『보스룸에 입장하셨습니다.』
보스룸은 전에 거쳐 왔던 돔 형태의 방과 형태나 크기가 비슷했다.
단지 다른 점은 제단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석상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다는 것과 석상들이 놓여 있던 자리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것.
여섯 개의 벽화는 문을 사이에 두고 집 안과 밖을 한 번에 보여 주는 형식이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배경의 시간대가 밤에서 낮으로 변했다. 왼쪽에 있는 그림부터 천천히 둘러보았다.
첫 번째 그림은 침대에 누워 평화로운 표정으로 잠든 사람과 문밖에서 그 앞에 피를 쏟아붓는 목 없는 기사.
두 번째 그림은 침대에 누워 고통스럽게 얼굴을 찌푸리며 잠든 사람과 문밖에 있는 검은 말.
세 번째 그림은 침대에 걸터앉아 손에 얼굴을 묻은 사람과 문밖에서 촛대 다섯 개를 쥐고 사악하게 웃고 있는 악마.
네 번째 그림은 침대에 엎드려 귀를 막은 사람과 문밖에서 입을 벌린 맨티코어.
다섯 번째 그림은 이불을 뒤집어쓴 사람과 창문으로 집 안을 훔쳐보는 미라.
여섯 번째 그림은 울긋불긋한 피부로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과 문밖에서 문고리를 잡은 새 부리 가면의 남자.
그림들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생생해서 볼수록 기분이 찝찝해졌다. 특히 밝은 배경으로 갈수록 점점 생기를 잃고 말라 가는 사람의 얼굴은 불쾌한 골짜기나 다름없었다.
“제단에 적혀 있던 시랑 순서가 똑같네요.”
그림을 집중해서 보던 혁명군 수장이 말했다. 그 말대로 벽화는 시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일요일엔 죽음이 문을 두드렸도다.’라는 일곱 번째 문장의 그림은 없었다.
그다음으로 돔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석상을 살폈다.
천을 뒤집어쓰고 시퍼렇게 날이 선 거대한 낫을 든 해골 조각상이 뻥 뚫린 눈구멍으로 우리를 내려다보며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석상은 발 없이 허공에 떠 있었다.
실종되었던 일곱 번째 문장의 주인공이었다.
“사신이네.”
보기만 해도 살벌한 거대한 낫을 보며 드래곤슬레이어가 중얼거렸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 발치의 바닥이 갈라지더니 거대한 모래시계가 굉음을 울리며 올라왔다. 모래시계의 안에는 황금빛 모래가 가득 들어 있었다.
모래시계가 천천히 기울어지더니 완전히 뒤집혔다. 윗부분으로 향한 황금빛 모래가 좁은 틈을 통과해 아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핵이다!”
모래시계 위쪽에 있는 모래가 아래로 쏟아지며 그 안에 있는 보라색 핵이 드러났다. 그것도 잠시, 사신 석상의 망토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모래시계를 감쌌다.
싸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목뼈가 180˚ 돌아간 해골바가지가 나를 반겼다. 반질반질한 검은색 해골의 크게 뚫린 눈구멍 안에서 붉은빛이 번뜩이는 착각마저 들었다.
예고도 없이 내 머리 위로 서늘함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한번 나를 향해 휘둘러지는 거대한 낫을 피해 바닥을 굴렀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추수철 벼 잘리듯 잘려 나갔다.
“얘는 아무래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인데.”
옆에서 류사현이 중얼거렸다. 시선이 닿았음에도 움직이는 석상을 보며 볼을 긁적였다. 심지어 허공에 떠서 날아다니기까지 한다.
그리고 사신 석상이 지금까지의 석상과 다른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박살이 안 나요!”
“그럴 리가……! 헉, 진짜!”
사신 석상은 아무리 내리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핵에 손을 대 연결을 끊기 위해서는 모래시계를 지키고 있는 저 석상을 어떻게든 치워야 했다.
스태프를 한 번 바닥에 내리찍은 성녀가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석상은 진짜가 아니에요. 어딘가에 봉인된 진짜 사신을 찾아 그걸 죽여야지 저것 역시 멈출 거예요.”
“진짜 사신은 어디에 있는 건데요?”
“찾아야죠.”
벽화와 모래시계, 사신 석상이 전부인 방에서? 두리번거리자 성녀가 스태프로 벽화를 가리켰다.
“저 벽화 안에서요.”
“엥, 들어가져요?”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으며 슬쩍 벽화에 손을 댄 드래곤슬레이어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나이트메어가 그려진 벽화 안으로 넘어갔다.
“싸부우우우!”
드래곤슬레이어가 넘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외침이 돔 형태의 방을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사부 부르네. 얼른 들어가 봐요.”
내가 키득거리며 등을 쿡쿡, 찌르자 한숨을 쉰 류사현이 드래곤슬레이어가 넘어간 벽화로 성큼 들어갔다.
“위험도가 높은 듈라한과 맨티코어만 두 명씩, 그리고 나머지는 한 명씩 들어가죠. 흑사병을 옮기는 메디코 델라 페스페 벽화는 저까지 셋이 들어가고요.”
성녀의 말에 남은 이들이 각자 자신이 들어갈 벽화를 골랐다. 소드마스터는 당연하다는 듯이 맨티코어를 선택했다. 백마왕이 슬쩍 소드마스터에게 붙었다.
미라는 농노1, 듈라한은 혁명군 수장과 마탄의저격수, 다섯 개의 촛대를 쥔 악마는 이단심문관. 그리고 남은 메디코 델라 페스페는 나와 천우현과 성녀.
날아드는 낫을 피해 성녀와 천우현을 잡아끌고 여섯 번째 벽화로 뛰어들었다.
물컹한 슬라임이 온몸을 감싸는 듯한 느낌도 잠시, 서늘한 공기를 느끼며 딱딱한 나무 바닥 위로 발을 내디뎠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중세 시대의 평범한 가정집 안이었다. 벽난로와 그 앞의 탁자, 한쪽 구석에 놓인 침대.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가 침대에 엎드려 귀를 꽁꽁 막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는 그의 등을 쿡쿡, 찌르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속닥거림… 속닥거림이 들려. 밖에서 속닥거림이 들린다고! 이봐, 자네는 들리지 않나? 내 살을 썩히고 내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토해 내게 만들 거라는 저 속삭임이 들리지 않냐고!”
남자의 얼굴과 몸은 온통 검붉은 반점으로 뒤덮인 채였다. 공황 상태에 빠져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남자와의 대화는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자 남자가 발악했다.
“열지 마! 열지 말란 말이야!”
“신을 버린 놈이 어디서 명령질이야?”
성녀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 말에 천우현이 다급히 물었다.
“혹시… 이 사람, 진짜 인간입니까?”
“보통 악마들이 인세(人世)에 이런 마물을 풀어놓기 위해서는 인간의 부름이 필요하죠. 마물을 이렇게 봉인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붙잡아 놓을 인간의 영혼이 필요해요.”
고개를 끄덕인 성녀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무고한 자들을 희생시킬 수 없기에 부른 이의 영혼으로 봉인을 한 거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라고요.”
그러니 동정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끝맺으며 성녀는 차가운 눈초리로 침대에 웅크린 채 울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숨을 푹 내쉬며 문을 열어젖혔다. 찍찍, 발밑에서 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시궁쥐들이 물결같이 몰려들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문 앞에서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듯 움직이고 있었다. 포커스를 떠올리게 하는 새 부리 가면이 선명하게 보였다.
놈을 죽여야지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쥐 떼가 새 부리 가면에게로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스킬 ‘로기의 화염(AAA)’을 실행합니다.』
화르륵, 뜨거운 불길이 우리를 향해 뛰어드는 쥐 떼를 삼켰다. 내 손길에 따라 불길이 확 벌어지며 길을 내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성검을 단단히 쥔 천우현이 길을 따라 새 부리 가면에게로 달려들었다.
촤악―!
성검의 날카로운 검끝이 검은 코트를 모로 스쳐 지나갔다. 코트가 찢어지며 그 틈으로 시커먼 나방 무리가 와르르 몰려나왔다.
“삿된 것들은 모두 뒤마누스의 자비 아래 스러질지어니.”
성녀의 읊조림이 끝나자마자 새하얗고 성스러운 빛이 터져 나와 나방 무리를 삼켰다. 그대로 바스러져 재로 화해 사라지는 나방 무리를 보던 새 부리 가면의 몸뚱어리가 타르처럼 주르륵 흘러내리더니 짙은 그림자가 되어 제게 검을 겨누는 천우현을 덮쳐 왔다.
“가면을 박살 내요! 그게 놈의 근원이에요!”
성녀의 외침에 저를 공격하는 그림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든 천우현이 성검을 휘둘렀다. 그에게 닿기 위해 한껏 뻗어진 그림자들은 내가 불러낸 마기에 의해 막혀 갈 곳을 잃고 꿈틀거렸다.
카앙―!
성검이 메디코 델라 페스페를 베어 냈다. 가면이 스르륵 두 동강 나며 바닥으로 투둑 추락했다.
검은 가루로 박살 난 그림자가 흩어져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우리를 덮쳐 왔다. 코와 입으로 들어간 가루에 반사적으로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검은 가루가 내가 불러낸 바람에 모조리 흩어지자 겨우 시야가 확보되었다.
퍼즐 조각 하나가 방금까지 메디코 델라 페스페가 있던 자리에 떨어져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퍼즐 조각에는 검은색 천과 낫이 그려져 있었다. 혹여 잃어버릴까 봐 인벤토리에 퍼즐 조각을 집어넣었다.
점점 지끈거림이 심해지는 머리를 붙잡고 있자 검은 피를 토해 내며 남자가 우리를 향해 연신 삿대질했다.
“내 집에서 당장 나가!”
“댁이 제발 여기서 살아 달라고 애원해도 나갈 거거든?”
뜨거워지고 부어오르는 목을 문지르며 까칠하게 대꾸했다. 그저 기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입 안에서 자꾸만 쇠 비린 맛이 났다.
“치료는 받고 나가야죠.”
자힐을 끝내고 나를 붙잡은 성녀가 힐을 시전했다. 까끌거리던 목구멍과 뜨겁게 달아오르던 몸이 차츰 진정을 되찾아 갔다.
“마왕 님은 포털을 찾아 주세요. 벽화 밖으로 나가는 포털이 분명 있을 거예요.”
성녀가 천우현을 치유하는 동안 나는 남자의 집을 둘러보다가 유난히 흐릿해 보이는 벽을 발견했다. 치유를 마치자마자 나는 둘에게 손짓하고는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벽 안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갔다.
들어올 때와 같은 물컹한 기운이 내 몸을 잠시간 감쌌다. 그리고 잠시 후, 그림에서 나와 보스룸에 발을 디뎠다.
아직 전부가 나오진 않았는지 보스룸에는 아직 사람이 다섯뿐이었다.
“드디어 나오셨네요, 마왕 님, 용사 님, 성녀 님! 빨리 얘 본체 좀 찾으면 안 될까요? 아니, 그전에 얘 좀 같이 막아 주세요! 지금 제 모가지가 추수당하기 일보 직전이거든요?”
제 목을 노리는 거대한 낫을 미스릴 검으로 막고 있던 드래곤슬레이어가 비명처럼 외쳤다.
저를 잡아당기는 마기에 거대한 낫이 드래곤슬레이어의 목 대신 바닥을 긁었다. 후다닥 뒤로 물러난 드래곤슬레이어가 내 등 뒤로 쏙 숨었다. 그러고는 류사현에게 왁왁거렸다.
“사부로 삼는단 말 취소! 제자 한 번도 안 받아 봤어요? 우리 스승님보다 더한 인간 처음 봤네!”
“최선의 수련은 실전이죠.”
“악! 스승님이랑 똑같은 말 하지 마!”
그때 소드마스터와 백마왕이 엉망인 몰골로 벽화 안에서 나왔다.
“역시 지옥도를 여는 편이 나았다니까요.”
“그런 놈들은 그냥 두들겨 패는 게 최고라니까.”
벽화 속 남자는 아무래도 저 둘의 심기를 거슬려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 벽화에서 귀환자들이 모두 나왔다. 총 여섯 개의 퍼즐 조각이 모였다.
그 퍼즐 조각을 받아 든 이단심문관은 곧장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보스룸 출입문의 오른쪽 벽으로 향했다. 벽에 직사각형 모양의 홈이 파여 있었다.
이단심문관은 그 홈 안에 퍼즐을 조심스럽게 맞췄다. 마지막 조각까지 끼워 넣자 그림이 완성되었다. 비쩍 말라 차갑게 굳은 사람과 문을 두드리는 사신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이 점점 몸집을 키우더니 옆에 그려진 벽화와 같은 크기가 되었을 때 멈췄다.
“그럼 여기가…….”
“네, 사신의 본체가 봉인되어 있는 곳이죠.”
이단심문관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내 말을 가볍게 받았다. 앞서 보았던 여섯 개의 벽화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음산한 분위기의 그림을 지그시 쓸어내렸다. 그림이 이리저리 일그러졌다. 선두로 그림 안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침대 위에 뻣뻣한 시체로 누워 있는 남자에게 무심한 눈길을 한 번 던지고 계속해서 노크 소리가 나는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헉. 이 남자, 진짜 죽었어요? 벽화에 갇혀 있는 남자는 다 같은 사람이에요?”
내 뒤를 따라 들어와 시체를 본 드래곤슬레이어가 이단심문관에게 질문을 쏟아 냈다.
“하나의 쪼개진 영혼이죠. 여기는 영원한 죽음으로 가장 강력한 마물을 잡아 놓는 역할을 하는 봉인진이고요.”
“그래도 돼요……? 인권 침해 아닌가……?”
“이 남자가 이 마물들을 인세에 불러냈으니까요. 설마 봉인진이 그대로 지구에 열릴지는 몰랐는데…….”
혁명군 수장이 오두막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 게이트로 귀환했다면서요. 그럼 밖으로 나올 때 이 던전 보지 않았어요?”
“그때는 드디어 귀환했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었거든요. 문이 다 열려 있기도 했고.”
이단심문관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때, 콰앙! 굉음이 들리더니 거대한 낫이 문을 뚫고 들어왔다. 쾅, 콰직! 몇 번의 낫질 끝에 문이 완전히 박살 났다.
뻥 뚫린 공간으로 낡은 검은색 천을 펄럭이며 미끄러지듯 날아온 사신이 거대한 낫을 들어 올렸다. 성녀의 속도 감소 디버프를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신이 로브처럼 덮고 있는 천 위로 푸른색 화염이 확 일어났다. 공기의 흐름을 조종해 놈의 비행을 방해하며 목을 노리다가 위쪽에서 내 손목을 덮쳐 오는 낫을 황급히 피했다. 소매가 낫에 베여 크게 입이 생겼다.
낫이 다시금 덮쳐 왔다. 거대한 낫은 사정거리가 넓어 피하기가 꽤 성가셨다. 게다가 사신은 우리의 머리 위에서 자유자재로 비행까지 하고 있었다.
“그 정도 힘도 없어? 계속 버텨!”
“버티고 있다고요!”
까드득―!
류사현과 드래곤슬레이어가 크게 휘둘러지는 낫을 검으로 막았다. 시커먼 망토가 천우현의 성검에 의해 촤악, 찢어졌다. 치솟던 사신의 몸이 그대로 거꾸러졌다.
이단심문관이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사신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낫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기도문이 이어질수록 점점 망토의 끝이 검은 재로 바스러지고 있었다.
탕, 탕!
혁명군 수장의 총질에 총알이 정확히 손목뼈에 틀어박혔다. 사신의 손목뼈가 투두둑, 부서지며 낫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러를 두른 소드마스터의 검에 두개골과 목뼈가 깔끔하게 분리되며 두개골이 바닥으로 데구르르 떨어져 굴렀다.
잠시 멈춘 사신이 다른 쪽 손으로 낫을 줍고는 분노한 듯 사방으로 미친 듯이 낫을 휘둘러 댔다. 발치에 아슬아슬하게 낫이 푹푹 찍혔다.
사신이 낫을 휘두르며 향하는 건 제 두개골이 있는 쪽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저것이 다시 두개골을 되찾는다면 좋은 꼴은 못 볼 것이 자명했다. 마기로 낫을 부식시키며 외쳤다.
“두개골 회수 못 하게 해요!”
“넵, 문한고 메시 나갑니다!”
다시 한번 속도 감소 디버프가 먹힌 짧은 틈을 타 드래곤슬레이어가 힘차게 외치며 두개골을 축구공 차듯 발로 뻥, 찼다.
때를 놓치지 않고 라이플을 겨눈 마탄의저격수가 두개골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사신의 손이 닿기 직전, 한발 먼저 탄환이 두개골을 꿰뚫고 지나갔다.
두개골이 박살 나자마자 뼈밖에 남지 않은 손에서 낫이 툭 떨어지더니 해골이 조각조각 나 바닥으로 풀썩 내려앉았다.
먼지를 내려다보던 성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시간제한이 있을 건데… 얼마나 지났지?”
“시간제한요?”
“네, 시간 안에 클리어를 못 하면 영원히 갇혀요. 모래시계 다 떨어졌나?”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이제 말해!
모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그림 밖으로 나오니 한 줌밖에 남지 않았던 모래시계의 황금빛 모래가 마저 떨어졌다.
마지막 모래알 한 알이 떨어짐과 동시에 쩌적, 소리가 나며 석상에 실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1분도 채 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나서 잔해가 바닥으로 우르르 떨어졌다.
모래시계가 빙글 뒤집히더니 던전의 핵이 다시 아래쪽으로 향했다. 다시 쏟아지는 모래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퍼부어 댄 공격에 모래시계가 박살 났다.
보랏빛 핵에 손바닥을 올리니 이제는 몇 번 보았다고 익숙해진 상태창이 눈앞에 떴다.
『차원 #SF3107-3의 근거지입니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차원 #SF3107-3과의 연결을 영구히 끊으시겠습니까?』
“연결 정말로 끊어도 되죠?”
“당연하죠.”
내 물음에 아쉬움 한 점 없는 후련한 얼굴로 성녀와 이단심문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의 연결을 끊어 냈습니다.』
『게이트가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 - 00:05:00』
쩍 열린 보스룸 문으로 나간 우리는 마지막 자세 그대로 멈춘 석상들을 지나쳐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왔다.
게이트가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소멸하는 게이트를 바라보던 성녀와 이단심문관이 게이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오자마자 곧바로 시간을 확인한 드래곤슬레이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엄마한테 죽었다, 난.”
힘없는 중얼거림에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3시 반. 5시까지 서울에 있는 학원으로 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6시에 아르바이트가 있는 백마왕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숫제 머리를 쥐어뜯는 드래곤슬레이어를 툭툭, 치며 물었다.
“집에 들러야 해요, 아니면 학원으로 바로 가도 돼요?”
“바로 가도 돼요. 혹시 몰라서 인벤토리에 가방 챙겨 왔거든요. 마왕 님, 혹시 방법 있어요?”
울상을 지으며 하는 대답과 간절한 물음에 혀를 차며 지도 어플을 켜 내 휴대폰을 내밀었다.
“지도에 학원 위치 찍어 봐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휴대폰을 받아 든 드래곤슬레이어가 학원 이름을 검색하고 내밀었다. 곧바로 대치동에 위치가 떴다.
위성사진으로 돌려 좌표 근처에 장애물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후 순간 이동 스킬을 발동해 좌표를 찍었다.
인벤토리에서 백팩을 꺼내 메는 드래곤슬레이어를 보자 우리가 아침 10시부터 오후 3시 반까지 게이트에만 있었음을 깨달았다.
“점심도 굶어서 배고플 텐데.”
“괜찮아요. 학원 근처에 편의점 있어요.”
줄 수 있는 게 5만 원밖에 없다. 저녁이라도 든든하게 사 먹으라고 5만 원을 내밀자 나머지 귀환자들도 명절날 조카에게 용돈 주는 이모, 삼촌처럼 드래곤슬레이어한테 지폐를 턱턱 쥐여 줬다.
“에이, 뭘 이런 걸 다…….”
함박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로 지폐를 쥐고 볼을 긁적이던 드래곤슬레이어가 제 몸을 감싸는 마력에 먼저 가 보겠다고 꾸벅 인사했다.
『스킬 ‘타인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1인』
순식간에 드래곤슬레이어의 신형이 우리의 앞에서 사라졌다. 백마왕은 말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제 휴대폰에 자기 집 주소를 찍어서 내밀고 있었다.
“뭐지, 이 뻔뻔함은……?”
“알바 잘리면 저 각성자 등록하러 가야 하거든요? 그러면 이제 귀환자의 존재가 세상에…….”
“이미 드러났는데. 왜요, 설마 의리 없이 옾챗방 털려고?”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백마왕을 보자 저를 뭐로 보는 거냐며 백마왕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한숨을 쉬며 백마왕도 친절히 집으로 보내 주었다. 그래도 오늘 레이드 하느라 수고했으니까 특별 서비스다.
“그럼 저희끼리 술이나 한잔―”
사람 좋게 웃으며 제안하던 혁명군 수장은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진동벨에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네, 교수님.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아쉽다는 감정이 만연한 채로 머리를 긁적이며 그가 말했다.
“어쩌죠, 제가 급하게 일이 생겨서 가 봐야겠는데…….”
교수님이라는 단어와 전화 받을 때의 그 공손한 태도에 직감이 왔다. 설마…….
“대학원생이에요……?”
“예, 사회학 석사과정 밟고 있습니다.”
머쓱하게 웃는 혁명군 수장을 짠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혁명을 성공시키신 분이 귀환해서 교수님의 노예 신세로 다시 전락하게 된 거냐고.
심지어 전공도 사회학이라니. 사회학과 최고 아웃풋이군. 이론으로만 배우던 혁명의 빨간 맛을 직접 실천하다니. 논문 주제 짱짱하겠는걸.
“저도 이만 서울로 돌아가겠습니다. 내일 출근이라.”
농노1도 슬쩍 손을 들었다. 다들 사회인인가 벼. 나만 졸업 앞둔 백수인가.
혁명군 수장과 농노1은 이곳으로 도착할 때처럼 나란히 택시를 잡으러 걸어갔다.
이제 남은 이는 성녀와 이단심문관, 소드마스터, 마탄의저격수, 나, 천우현, 류사현. 인벤토리에 라이플을 던져 넣은 마탄의저격수가 손을 흔들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친목질은 망한 모임의 지름길이랬거든요. 그러니까 깔끔하게 헤어지죠.”
“거참. 사람들, 정 없기는. 그래도 뭐, 틀린 말은 아니네. 다들 잘 올라가요.”
소드마스터도 우리에게 인사하고 마탄의저격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
쿨하다 못 해 냉기가 느껴지는 모임이었다. 내가 정말로 원하던 모임의 형태가 재현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