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역시 악당이 있어야 제맛 (15/33)

15. 역시 악당이 있어야 제맛

✆주태윤

걸려 온 전화 한 통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여보세요.”

- 잘 지냈습니까, 채현 씨?

“아니요.”

내 퉁명스러운 대꾸에 주태윤이 부드럽게 질문해 왔다.

-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는지?

“스몰토크 시도는 그만하고 용건.”

일부러 단호하게 끊어 내자 수화기 너머로 작은 실소가 들려왔다.

이 정도로 밥맛없게 굴면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떨어져 나갈 때 안 됐나? 러스터 길드는 채용할 때 인성을 안 보나?

- 이번 주 저녁에 시간 됩니까? 편하신 날 아무 때나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왜요?”

- 채현 씨가 제게 식사 한 번 대접하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아, 맞다. 그 영상 내린 대가. 내 옆에서 털을 그루밍하는 페리의 귀 뒤를 살살 긁으며 한탄했다. 페리야, 버리고 간 복수를 이렇게 하니.

어차피 주태윤이 계산할 거 같으니까 서로 안 만나는 거로 쌤쌤 치자고 해 볼까.

- 제가 장사치다 보니 계산은 칼같이 하자는 주의라.

아닌가 벼. 나 또 김칫국 마셨나 봐. 그래, 주태윤이 로설 남주일 리가 없잖아. 어디서 로설 남주들한테 주태윤을 비벼.

좋아, 김밥X국이나 데려가야지. 서민의 맛을 체험해 봐라, 주태윤.

“그럼 오늘이요.”

- 그렇게 절 빨리 만나고 싶으셨습니까.

“착각은 자유라죠.”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자 주태윤이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 그러면 5시에 데리러 가겠습니다.

전화가 뚝 끊겼다. 소화제나 하나 챙겨 먹고 가야겠네. 김밥 먹다가 체하는 거 아니냐고.

〉Local Channel-ROK

〉귀환자 단체 채팅방

〉〉공지 사항: 이름은 차원 이동한 곳에서의 직업, 혹은 세계관으로 부탁드립니다

마왕2: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닌 듯

마왕2: 왜 제가 닉을 늦게 선점했다는 이유로 마왕2가 되어야 하는지

마왕: 님 몇 살?

마왕2: 100살이요

마왕2: 지옥에서 100년 넘게 버텼는데요

마왕: ㅇㅇ 난 500살

마왕: 마왕 닉 쓸 수 있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시죠

- 마왕2 님이 백마왕으로 닉네임을 변경하였습니다 -

백마왕: 마왕님도 오백마왕으로 변경하시죠

마왕: 내가 왜?ㅋ

드래곤슬레이어: 그런데 농노1 님 대체 어떻게 돌아온 거?

농노1: 곡괭이로 드래곤 대가리 깨고 드래곤 하트 어디 신전엔가 바쳐서 돌아왔죠

드래곤슬레이어: 곡괭이로 드래곤 대가리를 깼다고???

농노1: 영주한테 세금이랑 농작물이랑 노동력 뜯기고 마물들한테 허구한 날 공격당하면 곡괭이 마스터 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귀환자 오픈 채팅방은 자기들의 귀환 서사를 늘어놓느라 항상 시끌시끌했다. 100년 버틴 주제에 내게 시비를 걸어 대는 마왕2 놈을 가볍게 제압하고는 시계를 보았다.

곧 약속 시간이었다.

대충 흰 티에 블랙 슬랙스를 꿰어 입고 준비를 마친 후 자취방을 나섰다. 이런 원룸 빌라에는 어울리지 않는 슈퍼카가 보였다.

람X르기니 아벤타도르가 원룸 건물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거 타고 김밥X국 가는 내 인생이 레전드군.

“오랜만이네요, 채현 씨.”

정장을 차려입고 차에 기대어 서 있던 주태윤이 나를 발견하자 눈웃음 지으며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조수석에 타자 주태윤이 시동을 걸었다.

이야, 차 진짜 쌔끈하다. 내가 이 차를 사려면 게이트를 몇 번 들어가야 할까.

“채현 씨?”

나를 부르는 주태윤의 목소리에 생각에서 벗어나 옆을 바라보았다. 픽 웃은 주태윤이 부드럽게 액셀을 밟으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곰곰이 하십니까?”

“이 차 사려면 게이트 노가다를 얼마나 뛰어야 하는지 계산 중이었는데요.”

“채현 씨가 저희 길드에 들어오시면 1년 만에 살 수 있겠네요.”

이 차가 6~7억 정도 하지 않나? 그걸 1년 만에 살 수 있다고?

“참, 식당은 제가 예약해 놨습니다.”

김밥X국 주소를 불러 주는 것보다 주태윤이 내게 예약을 통보하는 게 더 빨랐다.

주태윤이 불러 주는 레스토랑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했다. 호텔 레스토랑이 떴다. 가격을 확인해 봤다.

“…1인당 35만 원?”

쪼, 쫄지 마, 이채현. 지금 네 통장에는 300만 원이 있다고. 70만 원 지출 정도야…….

내가 입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1만 원 주고 샀던 기본템 흰 티와 슬랙스.

괜찮아, 서울에는 드레스 코드 있는 식당 따위 없다고. 쫙 차려입은 것보단 이렇게 프리하게 입고 먹는 게 더 멋있잖아?

…는 개뿔. 시선 꽂히는 건 아니겠지?

벌써부터 기운이 쫙 빠져 자동차 좌석 등받이에 축 늘어졌다.

“당신, 사실 나 싫어하죠.”

“그럴 리가요. 제가 채현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니야, 날 좋아하면 이럴 리 없어. 이건 분명 내게 개쪽을 주려는 수작이야…….”

멘탈이 나간 내 중얼거림에 주태윤이 웃음을 터트렸다. 여름은 해가 늦게 지는 터라 저녁 시간이 가까워졌는데도 아직 하늘은 밝았다.

* * *

백화점 VIP 쇼룸에서 퍼스널쇼퍼의 설명을 귓등으로 흘린 채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서민의 재벌 체험이야? 푹신한 소파에 앉아 행거에 진열된 옷을 바라보았다. 주태윤은 내 옆에서 태연하게 카탈로그를 넘겨보고 있었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옷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자 카탈로그에서 눈을 뗀 주태윤이 물었다.

“왜 그럽니까, 채현 씨? 혹시 마음에 드는 옷이 없습니까?”

“아아니요, 제일 왼쪽 원피스 마음에 드네요.”

그 말을 하자마자 원피스를 든 채로 탈의실로 떠밀렸다. 가격표가… 있을 리가 없지.

원피스에 어울리는 구두와 가방, 액세서리까지 추천받아 매치하고 나서야 나는 다시 소파에 앉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찬 귀걸이가 어색해 귀를 만지작거렸다.

“밥 사 달라더니 백화점은 왜 끌고 와요?”

“채현 씨가 입고 있었던 옷을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는 눈치이길래.”

그래, 합쳐서 3만 원도 안 되는 기본템 입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것보단 낫겠지.

직원이 내가 입고 왔던 옷과 신발을 쇼핑백에 넣어 건넸다. 주태윤이 자연스럽게 그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다시 백화점을 나와 주태윤의 차를 타고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최상층의 레스토랑에 발을 디디자 직원이 시티뷰 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보였다.

애피타이저부터 시작해 차례로 코스 요리가 나왔다. 내 몫으로 나온 레드와인을 홀짝이고 있자 주태윤이 물었다.

“저희 길드 입사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다른 곳은 판돈을 얼마나 키웠는지 궁금하네요.”

눈을 휘어 웃는 주태윤의 얼굴을 보다가 대답했다.

“제게 스카우트 제안한 데는 러스터 길드밖에 없는데요.”

그 말에 스테이크를 찍어 입 쪽으로 가져가던 포크가 멈칫했다. 포크를 내려놓은 주태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한쪽 눈을 찡그렸다.

“정말입니까?”

“적벽 길드는 거기 길드장이랑 트러블이 좀 생겨서요. 협회도 별말 없었고. 참, 이재의 씨가 특채 날짜 알려 주시긴 했다.”

“뭐, 적벽 길드는 이해가 갑니다. 서해량 그 인간은 인재 보는 눈이 참 없으니까요. 협회장은 의외긴 하네요. 그 능구렁이 같은 자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냉소한 주태윤이 물잔을 들어 물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언제 그렇게 차갑게 웃었냐는 듯 나를 보며 봄처럼 사르륵 웃었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군요.”

“그냥 프리 헌터 하려고요.”

말린 무화과가 콕콕 박힌 빵에 버터를 바르며 대꾸했다. 왜 선택지가 러스트 길드 하나라고 생각하니, 주태윤아?

내 입에서 나온 프리 헌터라는 단어에 주태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프리 헌터가 얼마나 힘든 길인지 알고 하는 소리입니까? 왜 쉬운 길을 저버리고 굳이 그렇게 힘든 길로 가는 겁니까?”

그야 러스터 길드에 들어가면 내가 마음껏 차원 연결을 못 끊잖아.

그리고 나도 천우현처럼 협회장이랑 담판 지어서 협회 비호만 받으면 편히 프리 헌터로 다닐 수 있는데, 굳이 내 정체를 들킬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길드에 소속되어야 하는 이유가?

“제 마음이죠. 마음 가는 대로 하려고요.”

흘러내린 옆머리를 넘기며 활짝 웃었다.

“정 스카우트하고 싶으면 의뢰나 팍팍 넣어 주든가. 그러면 혹시 알아요? 내가 러스터 길드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주태윤이 실소를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채현 씨는 참… 못 이기겠네요. 좋아요, 제가 졌습니다.”

그가 순순히 항복 선언을 했다.

“그럼 이 자리에서 이채현 씨에게 첫 번째 의뢰를 하죠. 저희 길드에서 주관하는 B급 게이트 레이드에 참가해 주시겠습니까?”

“조건은요?”

“선금 500, 그리고 완수 시 1,500. 이 정도면 나쁜 조건은 아니지 않습니까?”

500원과 1,500원일 리는 없고, 500만 원과 1,500만 원? 그러면 게이트 한 번 들어가는 데에 2천?

천만 원 정도를 생각했는데 그 두 배를 부르는 주태윤에 잠시 당황했다.

“레이드 날짜는 언제인데요?”

“5일 후입니다.”

5일 후면 딱히 할 것도 없고, 2천이나 벌게 게이트나 가볍게 한번 다녀와 볼까? 어차피 B급이면 8분 컷 같은데. 물론 힘을 숨겨야 하니까 좀 귀찮아지고 늦어지긴 하겠지만.

“좋아요.”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디저트로 나온 크림 브륄레를 한 스푼 떠먹었다.

확실히 음식은 비싼 값을 했다. 마계에서 매일 먹은 코스 요리보단 덜했지만 나름 먹을 만했다. 가격이 두려워서 문제지.

종업원이 가져다 놓은 계산서를 보려고 손을 뻗자 선수 쳐 그걸 채 간 주태윤이 쓱 제 블랙카드를 그곳에 끼워 종업원에게 내밀었다.

“뭐야, 밥 사라면서요.”

“아직 대학 졸업도 안 하신 분에게 밥 얻어먹을 수야 있겠습니까? 나중에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합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다음을 기약해야겠네요.”

아쉽다며 전혀 아쉽지 않은 얼굴로 주태윤이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원룸 빌라 앞에 도착하자 백화점과 호텔 레스토랑에 방문한 것이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그건 뇌물이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이건 세탁해서 돌려줘야 하나? 내가 입은 원피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자 내게 쇼핑백을 건넨 주태윤이 씩 웃었다.

“쉬어요, 채현 씨.”

내려서 차 문을 열어 준 주태윤이 내가 내리자 다정하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점점 멀어지는 람X르기니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리니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민서 언니랑 딱 마주쳤다.

“…양다리?”

“아, 뭔 양다리야! 나 사귀는 사람 없다니까요!”

편의점 봉다리를 휙휙 흔들던 민서 언니가 계단에 발을 디디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면 평소에는 티셔츠나 후드티만 뒤집어 입고 다니던 애가 왜 이렇게 풀 착장을 하고 주태윤 차에서 내리는지 이유나 들어 보자.”

“아니, 나 전에 테이머 동영상에 얼굴 팔린 거 주태윤이 도와줬거든요? 그래서 밥 한 끼 사라고 해서 나갔는데 호텔 레스토랑을 예약한 거예요, 그 인간이.”

계단을 오르며 쇼핑백에서 주섬주섬 흰 티를 꺼내 흔들었다.

“전 이거 입고 나갔다고요.”

난 무죄다. 애초에 오해할 여지를 안 줬다고.

“아, 그래서 주태윤이 옷 사 준 거야? 밥값은? 설마 자기가 호텔 레스토랑 예약해 놓고 밥값은 너한테 내라고 한 거 아니지?”

“아니요, 주태윤이 사던데요.”

“당연히 그래야지. 너랑 그놈이랑 재산 규모 차이가 얼만데.”

나 참, 저도 돈은 많거든요. 그 재산이 다 마계에 있어서 그러지.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자취방이 있는 2층에 도착해 있었다. 오랜만에 구두를 신어서 그런지 뒤꿈치가 욱신거렸다.

벅벅 뒷머리를 긁은 민서 언니가 진지한 얼굴로 충고를 던졌다.

“조심해. 그런 타입은 흥미 떨어지면 뚝 식을 타입이니까 괜히 넘어가서 마음 주지 말고.”

“역시 모쏠은 연애 이론에 빠삭하다더니.”

“그냥 데이고 후회해 봐라. 인생은 실전이지, 암.”

내 정수리를 한 대 쥐어박은 민서 언니가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 나도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는 내 자취방으로 들어갔다.

페리를 쓰다듬으며 누워 있던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킨 애쉬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왜?”

“폐하 이런 모습 처음 봐요.”

“그렇겠지, 마계에는 이런 스타일 옷이 없었으니까.”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옷 갈아입게 마계로 가라고 휘휘 손을 내저었다. 조심조심 명품 옷을 벗고 흠집이라도 날까 가방을 곱게 책상 위에 올려놓은 나는 귀걸이를 빼며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백야백야, 이거 얼마야?] 오후 9:00

찰칵,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패션계를 꿰고 있는 아현이에게 전달하자 잠시 후 답장이 도착했다.

[백야 - ₩3,670,000] 오후 9:20

[백야 - 뭐야? 이채 네가 샀어?] 오후 9:21

1만, 10만, 100만… 300만 원? 이 원피스 하나가 300만 원이 넘는다고? 가방이랑 구두는 물어보기도 겁난다.

“와, X나 부담스러워.”

내가 그래도 명색이 마왕이었는데. 이런 거에 간 떨릴 급이 아니었는데. 하긴, 회상해 보면 돈이 있어도 내 개인 재산까지 다 전쟁에 쏟아부었구나.

어느새 슬그머니 다시 마계에서 넘어온 애쉬는 평소의 편한 옷차림으로 돌아온 나를 보고는 햇살처럼 웃었다.

“역시 전 폐하의 이 모습이 제일 좋아요.”

“아, 꾸민 모습은 별로다?”

장난식으로 떠보니 애쉬가 울상을 하고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니요, 그건 아닌데 이 모습이 편해 보이시기도 하고, 제일 익숙하기도 해서요.”

하긴, 애쉬가 제일 많이 본 내 모습은 노숙하던 모습이었을 테니까. 1마계 내전 당시에는 숲이나 황무지, 마계 대전 당시에는 전쟁 막사.

내가 침대를 못 벗어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500년간 그렇게 땅바닥에서 개고생을 했는데 안락한 침대를 벗어나고 싶겠어?

“중앙 마족 놈들 중에 수상한 놈은 없었고?”

내 물음에 애쉬가 말간 눈동자로 고개를 저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애쉬가 슬쩍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주저하는 모습에 말해 보라고 턱을 까딱하자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애쉬가 속삭이듯 털어놓았다.

“안드라스가 자꾸 저를 요즘 이상한 눈으로 봐요, 폐하. 아무래도 찔리나 봐요.”

그래, 안드라스는 네가 수상하다더라. 둘이 무슨 일로 싸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추리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그만 화해해라.

* * *

시간은 훅훅 지나 B급 게이트 레이드 날이 다가왔다.

무려 직접 픽업 서비스까지 선사한 주태윤이 러스터 길드 공대에게 나를 소개했다.

“여기는 프리 헌터로 와 주신 이채 헌터입니다. 테이머로 유명하니 설마 이채 헌터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죠.”

차라리 하하버스 세계관 주인공이고 싶다. 내가 유명한 걸 나만 모르고 해맑게 다니고 싶다고.

꾸벅 고개를 숙이자 공대원들이 잘 부탁드린다고 살갑게 인사해 왔다.

인사를 하고 슬쩍슬쩍 주태윤의 눈치를 보는 꼴을 보니 내가 마음에 안 들지만 주태윤이 내 뒷배를 봐주고 있는 것 같으니 살갑게 대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굴러온 돌 취급? 프리 헌터 취급이 좋진 않다는 게 사실이었군.

현재 이 자리에 있는 공략대 인원은 무기계 일곱 명, 법사계 다섯 명, 치유계 세 명.

무기계는 검사 셋에 궁수 둘, 거너 하나, 채찍 하나. 법사계는 메이지 하나에 원소술사 셋, 네크로맨서 하나, 치유계는 프리스트 둘에 버퍼 하나.

이렇게 적절히 분배된 직업군으로 본격적인 레이드를 뛰는 건 처음이었다. 연수원의 그 실전은 솔직히 레이드로 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리바리하던 훈련생들이 답답했는지 협회와 적벽 길드 공대원들이 슬쩍 도와주고 가는 일도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공대원들을 둘러보던 주태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법사계 한 명이 없습니까?”

“그게, 계속 전화를 시도하고는 있는데 연결이…….”

“그 망할 자식이 또……!”

반 깐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주태윤이 신경질적으로 울분을 토해 냈다.

“내가 분명히 신청서 써내도 받지 말라 했을 텐데. 대체 내 말을 뭐로 들은 건지 모르겠군. 여기가 내 길드인지, 그 자식 길드인지. 며칠 전에는 돌로 내 머리를 찍더니.”

“마음에 조금만 안 들어도 와서 깽판 치는데 어쩌겠어요, 길마님. 요즘은 얌전해졌긴 한데 그래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인간이라.”

메이지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주태윤을 익숙하게 달랬다. 이마를 짚은 주태윤이 한탄을 내뱉었다.

“하아, 진짜 어머니 부탁만 아니었어도 내치는 건데.”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혈연으로 빨대 꽂은 능력 없는 낙하산의 갑질 문제가 꽤 심각한 모양이었다.

부와와앙, 거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주태윤의 얼굴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포X쉐 911이 빠른 속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차는 속도를 줄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포X쉐가 향한 곳은 바로 주태윤이었다.

금방이라도 그를 칠 것마냥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질주하는 차와 가만히 팔짱 끼고 차를 노려보는 주태윤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주태윤을 잡아끌어 몸을 피하게 해야 하는지, 그냥 둬야 하는지 고민했다.

이 아슬아슬한 치킨 게임의 승자는 주태윤이었다. 주태윤의 바로 앞에서 차가 끼이이익―!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멈췄다.

운전자가 조금만 더 늦게 브레이크를 밟았어도 차에 치여 큰 부상을 입을 뻔한 주태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차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내렸다. 창백한 피부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온 눈, 그 밑으로 보이는 생기 없는 표정은 혹시 약쟁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게 했다.

주태윤이 서리가 내려앉을 것만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진세빈.”

남자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한 바퀴 굴렀다. 똑바로 주태윤을 마주 본 남자가 태평하게 하품했다.

“미안, 어젯밤에 술을 좀 마셔서.”

태연한 사과에 주태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세상에, 저 인간이 사과를 했어.”

옆에서 쑥덕거리는 목소리에 물음표를 띄웠다. 사과만 해도 감탄을 받는 삶이라니,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건데.

“내가 분명 신청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가만히 길드에서 숨만 쉬고 있는 게 그렇게 어렵나?”

“형도 참. A급 메이지 정도의 헌터가 공략에 참가한다고 하면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다른 길드나 파티는 그 A급 메이지 하나 구하려고 난린데.”

“그럼 내 길드에서 나가서 다른 길드나 파티로 꺼져.”

차 문을 쾅, 닫은 진세빈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진세빈과 주태윤은 곧 대치하듯 마주 보는 자세가 되었다.

주태윤보다 살짝 작은 키 때문에 그를 올려다보던 진세빈이 질 나쁜 미소를 흘리며 목소리 낮춰 속삭였다.

“그러면 이모가 참 좋아하시겠다, 그렇지?”

주태윤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언제나 그를 감싸고 있던 여유롭고 능글맞은 태도는 싹 사라져 있었다.

그대로 주태윤을 지나 공대원들에게 합류한 남자, 진세빈은 힐긋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히죽거리는 진세빈의 표정은 사람 기분을 더럽게 하는 데에 뭐 있었다.

“그쪽이 테이머? 영상 자알 봤어요.”

실물이 낫네. 부러 느릿하게 덧붙이며 진세빈이 손을 내밀었다.

그냥 진세빈의 얼굴만 보고 있으니 그가 인상을 팍 구겼다.

“악수하는 법 몰라?”

“손 치워.”

어느새 다가온 주태윤이 내게 내밀어진 진세빈의 팔을 탁, 쳐서 치웠다. 붉게 달아오른 손등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진세빈이 히죽,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아, 형 이거야?”

빠악, 진세빈의 고개가 돌아갔다. 벌겋게 부어오른 볼을 붙잡고 저를 올려다보는 진세빈의 멱살을 휘어잡고 거칠게 제 쪽으로 끌어당긴 주태윤이 으르렁거렸다.

“입 닥치고, 조용히 게이트나 들어가.”

거칠게 멱살을 내팽개치자 진세빈이 균형을 잃고 땅을 나뒹굴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매정하게 스쳐 지난 주태윤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채현 씨. 못 볼 꼴을 보여 드렸네요.”

“이야, 태윤 형. 사과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맨날 사과하라고 해도 입 꽉 다물고만 있어서 이모께 혼나기만 했던 사람이, 의외네.”

진세빈이 킬킬거렸다. 의도적으로 속을 긁는 게 훤히 보였다. 아니, 낙하산이라며. 낙하산 주제에 사장에게 이렇게 깝쳐도 되는 거야?

주태윤의 눈가가 씰룩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언제 여유를 잃었냐는 듯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시끄럽고, 뒤에서 잘 따라오기나 해. 제발 딴 길로 혼자 새서 레이드 시간 늘이지 말고.”

“생각해 볼게에?”

놀리듯 길게 늘인 대답에 짧은 한숨을 뱉은 주태윤이 들어가자고 손짓했다. 그 신호에 주태윤을 선두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B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눈앞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던전의 형태에 당황으로 눈을 깜빡였다. 이건 대체 뭐야?

* * *

게이트에 들어가자마자 기다란 흔들다리의 향연이 우리를 반겼다. 다리의 밑은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이였고, 길이는 얼마나 긴지 저 끝에서부터는 아예 안개처럼 뿌옇게 보일 지경이었다.

다리의 건너편 끝, 던전의 핵이 안개에 가려져 흐릿한 황금빛으로 빛났다.

하지만 다리보다 시선을 잡아끄는 건 오른쪽 절벽에 박혀 있는 거대한 눈알이었다. 황금빛 홍채에서 반사되는 빛은 꼭 골짜기에 노을이 내려앉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거대한 눈동자가 또르르 움직여 우리를 향해 묘한 시선을 보냈다.

“으, 징그러워. 저기서 빔 나오는 거 아니야?”

“선배,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에요?”

“그럼 너는 저 눈깔이 왜 박혀 있다고 생각하냐?”

검사1의 갑작스러운 질문 공격에 궁수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빔 쏘려고?”

“물어본 내가 빙신이지.”

혀를 찬 검사1이 다리 앞 표지판에 새겨진 룬 문자를 읽었다.

“밤의 다리? 밤에만 건너라는 건가?”

힐긋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기에는 하늘에 아무것도 없는데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구별이 안 되잖아요.”

황금빛이 은은히 도는 잿빛 하늘에는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았다. 흔들다리로 시선을 옮겼다. 흔들다리의 폭은 사람 한 명이 겨우 서 있을 정도로 아주 좁았다.

소설 클리셰에서 항상 단순하고 쉬워 보이는 미션 혹은 스테이지가 제일 어렵듯이 분명히 이 흔들다리는 곱게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발 디디고 30초 만에 발판이 떨어진다든가. 아니면 밧줄이 풀린다든가.”

“몬스터랑 다리 위에서 마주친다든가.”

“와우, 다리 끊기면 다 죽는 거네.”

진세빈이 팔을 넓게 벌리며 뭐가 그렇게 웃긴지 킬킬거렸다. 저런 정신상태를 가진 놈은 진짜로 다리를 끊고도 남기에 같이 다리를 건너기가 영 불안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다리를 노려보다가 조심스레 다리 위로 발을 올렸다.

30초는커녕 1분이 지나도 다리는 금이 가지도, 판자가 떨어지지도 않고 멀쩡했다. 낡은 나무판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그냥 건너기만 하면 된다고? 너무 쉬운데?”

“분명 중간에 몬스터 나온다니까요. 하다못해 비행형 몬스터라도 나올걸요? B급 게이트가 이렇게 쉬울 리가 없죠.”

장총을 어깨에 척 걸은 거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말에 대꾸했다. 발소리와 삐꺽거리는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밧줄로만 지탱된 다리가 영 불안했다.

갑자기 다리가 양옆으로 마구 휘청거렸다. 기겁하며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난간을 움켜잡았다.

“미쳤냐? 다리는 왜 흔들고 지랄인데?”

“밧줄 튼튼한지 확인 좀 해 봤다, 인마.”

“네 두개골 튼튼한지도 확인해 봐도 되냐?”

한국 1, 2위를 다투는 길드의 공대라서 그런지 공대원들의 태도는 B급 게이트에서도 마실이라도 나온 듯 태연했다.

한참을 걸어 다리의 5분의 1 정도 구간에 도착했지만, 우리가 그 거리를 걸어올 때까지 놀랍게도 아무 일도 없었다.

무심코 빛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우리를 지켜보는 것만 같은 커다란 눈알과 시선이 마주했다.

잠시간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계속 보고 있으니 따갑게 눈을 찌르는 빛에 시선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쉽다고? 아무래도 이상한데?”

“그러게요, 이럴 리가 없는데. 쉬어 가는 던전인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긴장 놓지 말고 계속 가죠.”

주태윤의 말에 내 앞에서 걷던 화염술사가 태평하게 기지개를 켜면서 흥얼거렸다.

“뭐가 됐건 개꿀이네.”

망할, 플래그 꽂혔다.

저런 말 하면 꼭 무슨 일 일어나던데, 사건 플래그 제대로 세웠다.

그리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주변의 빛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 멈춰서 절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절벽에 박힌 눈알이 가느다랗게 좁혀지고 있었다.

화염술사가 경악하며 혼잣말처럼 물었다.

“뭐야, 저거 왜 갑자기 눈 감아?”

‘네가 플래그 세워서.’

절벽에 박힌 눈이 완전히 감기니 빛이 사라지고 눈앞이 컴컴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등 뒤에서 신경질적인 외침이 들려왔다.

“악! 미쳤냐, 새끼야?”

“누구요?”

“내 뒤에 있는 새끼! 왜 내 머리를 잡아당기고 지랄이야! 죽고 싶냐?”

그 으름장에 억울함이 그득 담긴 목소리가 반문했다.

“지금 선배 뒤통수는커녕 한 치 앞도 안 보이는데 제가 선배 머리를 어떻게 잡아당겨요?”

“뭐? 네가 손 뻗다가 잡아당긴 거 아니야?”

“저 아니라니까요? 저는 애초에 난간에서 손을 놓은 적이 없ㅇ, 으악!”

“야, 왜 그래?”

“누가 뒤에서 저 잡아당겼어요!”

그 상황 설명에 잠시간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뒤에서 세 번째로 가고 있었다. 그럼 뒷사람은 뒤에서 두 번째. 뒷사람의 뒷사람은 마지막…….

“…너 맨 끝이잖아.”

“제 말이요! 그러니까 빨리 불 좀 켜 봐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붉은 화염이 흔들다리 주위에 확 피어올랐다. 시야가 밝아지며 주변 풍경이 눈에 차츰 들어왔다.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건,

“…으.”

내 얼굴 바로 앞에 일그러진 안면을 들이민 채 히죽거리고 있는 유령이었다. 처참하게 뭉개진 이목구비를 보고 있으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유령들이 빼곡하게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심지어 이놈들은 물리력 행사도 가능했다.

어떻게 아느냐면 몇 놈들이 버퍼의 발목에 달라붙어서 그를 다리 밑으로 끌어내리려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X발, 미쳤냐? 안 떨어져?”

추락하지 않기 위해 밧줄을 꽉 부여잡은 버퍼가 발버둥 치며 욕설을 내질렀다. 버퍼의 발버둥에 따라 다리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 덕에 끌어올리기도 어려워 그를 잡아 위로 올리던 거너가 인상을 쓰며 가만히 좀 있으라고 버퍼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쪽 상황이 제일 심각해서 그러지 나머지 사람들도 평탄한 상황은 아니었다.

머리채를 잡힌 검사3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지만 빌어먹게도 유령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남들 눈엔 수상하게 보이게시리 내 쪽으로는 한 마리도 오지를 않았지만.

유령들이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로 웃으며 다리를 마구 흔들어 댔다. 유령이 몸을 통과할 때마다 사람들이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감싸며 덜덜 떨었다.

온도가 뚝 떨어져 차가운 김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태초에 빛이 있으리!”

프리스트들이 공대원들에게로 접근하는 유령을 쫓아냈다. 하지만 유령들은 다리를 흔드는 걸 멈추지 않았다.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절벽에 박힌 눈동자가 다시 눈을 뜨자 주변이 서서히 밝아지며 유령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거운 분위기 속, 주태윤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유령들은 어두워지면 나타나는 듯하군요. 어두워지면 쉬고 밝아질 때만 움직이죠.”

유령들이 하도 다리를 흔들어 대는 탓에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은 10분, 감은 시간은 5분. 다리의 반 정도를 왔으니까 앞으로 두 번 눈 깜빡일 때까지 다리 끝에 도달하기는 충분하다.

그래도 눈 뜨고 있을 때는 방해가 없어서 한결 수월하다. 달려야 하는데 유령까지 가세하면 얼마나 하드 난이도일까.

“…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뛰던 와중 무심결에 뒤를 돌아본 내 입에서 의문 어린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뛰기 시작했을 때 우리 위치는 다리 중간이었고, 적어도 5분은 넘게 쉬지 않고 달렸으니 지금쯤 3분의 2 정도 지점까지는 도착했어야 정상인데…….

“아직도 다리 중간이라고?”

내 말에 앞서 뛰던 이들이 모두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건너온 다리의 길이는 여전히 절반 정도였다. 우리는 계속해서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소리다.

당황스러운 건 둘째 치고 허탈함에 난간에 팔을 걸치고 늘어졌다. 이 무슨 때아닌 똥개 훈련? 휘청거리던 다리의 움직임이 점차 잦아들었다.

“밤의 다리? 밤에만 건너라는 건가?”

다리를 건너기 전 검사1이 중얼거렸던 말이 떠올랐다.

“밤의 다리!”

내 외침에 심각한 표정으로 흔들리는 다리에 몸을 맡기고 있던 공대원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저 눈이 뜨이면 낮, 감기면 밤이잖아요. 눈 감고 있을 때 건너라는 소리였어요.”

어쩐지 B급치고는 쉽다 했다고 공대원들이 투덜거림을 내뱉었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주태윤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 게이트 공략은 프리스트가 좀 수고해 줘야 할 듯한데.”

“보너스만 두둑하게 주신다면야.”

프리스트 한 명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절벽에 박힌 눈이 감기고, 유령들이 모여들었다.

“빛이 곧 삿된 것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리!”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모든 악령들을 지옥으로 쫓아 버리소서.”

프리스트 두 명이 스태프를 흔들며 축성과 구마 스킬을 퍼부어 댔다. 번쩍, 성스러운 빛이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졸지에 프리스트 버스 탄 쩌리가 되어 버린 나를 포함한 나머지 공대원들은 갓-프리스트님들의 뒤를 따라 다리를 가로질렀다.

2천만 원으로 계약했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꿀 빨아도 되나……? 지금 페리도 소환 안 했는데.

하긴, 여기서 소환하면 다 뒈지지. 설마 한 거 없다고 천만 원 깎는 거 아니야?

버퍼의 속도 버프 스킬까지 더해지자 확실히 밝을 때와 달리 점점 다리의 반대쪽 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밤과 낮이 두 번을 더 바뀌고, 마침내 다리 끝에 도착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던전의 핵이 있었다.

“핵 박살 내면 유령 이제 안 나타나겠죠?”

“난 그냥 흔들다리 건너는 것도 싫은데.”

핵 앞의 바닥에 주저앉거나 드러누운 공대원들이 자기들끼리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의외로 사고 안 치고 어그로도 안 끌고 얌전히 다리를 건넜던 진세빈이 핵을 툭툭, 건드렸다. 저러다가 주태윤에게 한 소리 들을 텐데.

혀를 차던 나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표정을 굳혔다. 잠깐, 저게 뭐야?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던 핵이 시커멓게 물들고 있었다. 우르릉, 던전이 뒤흔들렸다. 던전의 구조가 바뀌고 있었다.

『S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경고하듯 붉은 상태창이 눈앞에 떴다.

주태윤이 경악 어린 표정으로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S급 게이트라고?”

다른 공대원들도 그 글자를 확인한 듯 술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모두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S급 게이트라니. 공략도 아닌 탐색 한 번 하기 위해 한국의 S급 헌터들을 총출동시킨 미친 난이도의 게이트가 아니던가.

동네에 S급 게이트가 열렸을 때 몰려들었던 인원을 상기해 내고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B급 게이트 레이드를 위해 만들어진 공대의 인원과 전력으로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전멸은 예상된 수순이었다.

‘물론 내가 있는 한 걱정 없지만.’

S급 게이트 그까이거. 껌이지, 껌.

그런데 어째서 클리어하지도 않았는데 게이트의 등급이 바뀐 거지? 이중 던전도 아닌, 게이트가 끝나기 전 게이트의 등급 변경이라.

저 낙하산 새끼가 뭐 잘못 만진 거 아니야? 여전히 핵 앞에 서 있는 진세빈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자 B급 던전이 S급 던전으로의 탈피를 시작했다.

바닥이 마구 흔들리며 지축이 뒤틀렸다. 단순히 지형이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가 뒤바뀌고 있었다.

“나가, 나가야 해!”

“안 돼! 움직이지 마!”

다급히 외친 주태윤이 멘탈이 나가 흔들다리에 발을 디디려는 네크로맨서를 급히 잡아끌었다. 잡아당기는 힘에 끌려 뒤로 물러나기가 무섭게 흔들다리가 뚝 끊어져 시계추처럼 흔들거렸다.

절벽이 무너지고 낭떠러지의 빈 공간이 메워졌다. 발밑이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진동하더니 쿠르릉, 거대한 벽이 굉음과 함께 바닥을 뚫고 올라왔다.

사방에서 치솟는 벽을 피해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흩어졌다.

핵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고, 핵을 박살 내면 게이트는 클리어된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궁수의 화살이 핵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어?’

하지만 기다란 혀인지, 촉수인지 모르겠는 것이 허공을 찢고 나와 화살이 핵에 닿기 전 화살을 삼켰다.

내가 핵을 향해 다가가려고 하는 순간, 시공간이 마구 뒤틀리더니 완전히 박살 났다가 재정립되었다. 기절할 듯이 몰려오는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눈을 뜨니,

“…미로?”

영화 「메X즈 러너」에 나올 만한 거대한 미로가 나를 반겼다.

* * *

“이러다 다 죽는 거 아니야?”

나만 빼고. 내게 달려드는 1급 몬스터를 벼락으로 지지며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S급 게이트의 유일한 생존자로 뉴스를 타는 내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그러면 이제 내 힘숨찐 생활은 끝인데. 내가 EX급이라는 게 전 세계에 밝혀지게 생겼다고.

그런 끔찍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일단 흩어진 공대원부터 모아야 한다. 미로를 빠져나가는 건 그다음이다.

『스킬 ‘지도화(A)’를 실행합니다.』

내 눈앞에 미로를 단순화한 지도가 떴다. 핵의 위치가 지도에 황금빛 점으로 반짝 빛났다. 미로 안 사람들은 붉은색 점이었다. 몬스터는 푸른색 점, 검은색 점은 사망자. 벌써 검은색 점이 하나 보였다.

일단 제일 가까이 있는 붉은 점을 향해 달려갔다. 미로의 벽을 돌자마자 주저앉은 채 덜덜 떨고 있는 버퍼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는 침을 뚝뚝 흘리는 거대한 1급 몬스터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몬스터들의 급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 S급 게이트 안의 몬스터들은 싹 1급이었으므로.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페리, 물어!”

내 외침에 멍하니 몬스터를 올려다보고만 있던 버퍼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몬스터 뒤의 나를 발견한 버퍼가 바닥에 주저앉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몬스터의 뒷목을 노리고 펄쩍 뛰어오른 페리가 목덜미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두 거대한 몬스터가 뒹구는 틈을 타 풀린 다리에 힘을 주어 뛰어온 버퍼가 감동이 철철 넘쳐 흐르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테이머님……!”

쿠웅, 급소를 물어뜯긴 몬스터의 거대한 몸이 기울어지더니 바닥으로 쓰러졌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입으로 내게 달려온 페리가 칭찬해 달라는 듯 머리를 기울였다.

“히익!”

불쑥 머리를 들이미는 페리에 버퍼가 급히 숨을 들이켰다.

“제 파트너 몬스터예요.”

“어, 어억. 그, 그렇구나.”

내 말에 버퍼가 말을 더듬으며 연신 가슴을 쓸어내렸다. 또다시 붉은 점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이번엔 무려 두 명이었다. 채찍 무기계와 화염술사가 몬스터 한 마리를 향해 협공을 쏟아 내고 있었다.

끝에 갈고리가 박힌 튼튼한 채찍이 날아가 몬스터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칭칭 휘감았다. 화르륵, 몬스터에게로 거대한 화염이 화염방사기처럼 뿜어져 나갔다.

하지만 불이 닿기 전 몸을 털어 제 몸을 옥죄고 있던 채찍을 털어 낸 몬스터는 아주 간단하게 화염을 피했다.

“좀 잘 잡고 있어 보라니까!”

“잡고 있어. 잡고 있다고, 새끼야!”

“욕 그만 좀 하고, 욕할 시간에 똑바로 잡기나 해! 우리 이러다 다 죽어! 나 이제 궁극기 한 번 쓸 마력만 남았다고!”

다시 채찍이 몬스터의 몸에 날아들었다. 또 몸을 털려고 하는 몬스터를 향해 권능을 발동시켰다.

『마왕의 권능 ‘복종’을 실행합니다.』

『몬스터가 복종을 거부합니다.』

『당신의 권능이 몬스터를 억압합니다.』

묵직하게 내리찍어 오는 권능에 몬스터가 옴짝달싹 못 하고 뻣뻣하게 굳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거대한 화염이 분사되었다.

새까맣게 탄 몬스터가 쿠웅,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이파이브한 채찍 무기계와 화염술사가 몬스터 뒤에 서 있던 우리를 발견하고는 후다닥 달려왔다.

“은규아! 너 괜찮냐?”

“테이머님이 구해 주셔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죠.”

버퍼는 두 사람의 손에 어깨가 잡힌 채 멋쩍게 웃었다. 나를 돌아본 두 사람이 ‘제법인데?’라는 표정을 지었다.

제법이긴, 느그들만 없었으면 나 혼자 신나게 양민, 아니 몬스터 학살하고 다녔을 텐데.

“일단 핵이 있는 곳까지 도달해서 핵을 박살 내는 게 최우선입니다.”

“으, 왜 존대야, 오글거리게.”

“아, 그럼 테이머 분도 계시는 데 반말하리?”

이 상황에서도 투닥거릴 힘이 남아 있다니. 혀를 차며 다른 의견을 냈다.

“사람을 모으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요?”

“그것도 신빙성 있네. 이러다가 혼자 있는 다른 공대원들 다 죽겠잖아.”

“나머지 공대원들이 어디 있을 줄 알고 어느 세월에 사람 찾으러 다녀.”

“그러면 핵은 어디에 있을 줄 알고 찾으러 다니냐.”

그때, 내 눈앞에 경고를 알리는 붉은 상태창이 깜빡였다.

『위험 예지가 발동됩니다.』

게이트가 터질 때나 발동되던 위험 예지가 게이트 안에서 발동되었다. 그럼 그 말은…….

추운지 연신 어깨를 문지르며 몸을 떨던 채찍 무기계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등골이 계속 서늘한데. 뒤쪽에 아무래도 뭐가 있―”

말을 채 마치지 못한 채찍 무기계가 툭 쓰러졌다. 싸늘하게 식은 몸과 검은색으로 변해 버린 붉은색 점은 그의 사망을 알려 주고 있었다.

“뭐, 뭐야? 야, 눈 좀 떠 봐, 야!”

“이렇게 갑자기 죽는다고? 왜……? 뭔데……?”

화염술사가 채찍 무기계의 시체를 마구 흔들었다. 버퍼는 갑작스럽게 덮쳐 온 죽음을 눈앞에서 본 여파로 패닉에 덜덜 떨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본 순간,

『사안(死眼)과 마주했습니다.』

『당신의 급이 높아 사안(死眼)의 저주가 모두 적용되지 않습니다.』

속이 뜨거워지더니 컥! 붉은 피가 울컥 토해져 나왔다. 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토혈은 그치지 않았다.

채찍 무기계는 사안을 보았기에,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몬스터와 눈이 마주쳤기에 죽었던 거다.

나는 초월자였기에 사안을 마주 보았음에도 죽지 않고 내상 정도로 끝난 거였고. 진탕이 된 속이 쓰려 왔다. 피로 얼룩진 입가를 손등으로 쓱 닦아 냈다.

내게 이 정도 급의 타격을 입히다니, 충분히 위험 예지가 뜰 만했다. 확실히 S급 게이트는 달랐다.

“뒤에 대체 뭐가 있기에…….”

“안 돼! 뒤 돌지 마!”

급하게 외치며 고개를 돌리려는 버퍼의 눈을 피가 묻지 않은 손바닥으로 급히 가렸다.

『던전 보스 몬스터 ‘바실리스크(1급)’가 나타났습니다.』

몬스터의 접근을 알리는 상태창이 눈앞에 떴다. 머리 위로 쓰윽 그림자가 졌다. 무언가가 화염술사의 어깨에 한 방울 툭, 떨어졌다.

“아아악!”

치이익, 옷이 부식되고 피부에 끔찍한 화상을 남겼다. 옷이 녹는 바람에 훤히 드러난 어깨를 움켜쥔 채 화염술사가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뒹굴었다.

위에서 뚝, 뚝, 떨어지는 검은 액체가 돌바닥을 부식시켰다. 지독하고 위험한 맹독이었다.

버퍼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급히 포션을 화염술사의 어깨에 부었다. 화상 상처가 점차 아물어 갔다.

머리를 쓰윽 숙이는 바실리스크의 입 안에 박힌 거대하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위협적으로 빛났다.

“피해요!”

날카롭게 외치며 버퍼를 떠밀었다. 버퍼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이 슬쩍 염력으로 화염술사의 몸을 저 멀리, 미로 벽이 꺾어지는 곳에 옮겨 놓고는 버퍼의 손목을 잡고 화염술사의 몸이 있는 곳까지 뛰었다.

“바실리스크는 테이밍 못 해요?”

“못 해요, 젠장.”

그리고 난 테이머가 아니라고! 저거 잡아 죽이려면 일단 내가 니들 시야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스스스, 바닥을 기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벽이 꺾이는 부분으로 뛰어들어 벽에 딱 붙어서 숨소리를 죽이고 몸을 숨겼다.

이젠 붉은 자국만 남은 어깨를 움켜쥐고 벽에 기대어 있던 화염술사가 갑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몸을 몇 번 움찔거리더니 참았던 것을 시원하게 내뱉었다.

“에취!”

힘찬 재채기에 바실리스크의 몸뚱이가 스르륵 방향을 틀었다. 버퍼가 절망 어린 눈으로 벽에 등을 기대어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고양이 모습으로 바꾸어 놓고 안고 있던 페리를 땅에 내려놓으며 당부했다.

“페리, 물리지 말고 눈 보지 말고, 적당히 유인해, 알겠지?”

다시 거대하게 변한 페리가 바실리스크의 몸뚱이를 콱, 물었다. 바실리스크가 바로 몸을 돌려 페리를 쫓았다. 벽 너머로 나와 바실리스크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테이머님! 빨리 이쪽으로 오세요!”

다급한 소리에 옆을 보았다. 쿠르르릉, 벽이 움직였다. 벽이 맞물렸다 떼어졌다를 반복하며 다시 위치를 재정립했다.

미로의 모양이 변하고 있었다.

그냥 미로로도 복잡한데 하필 이 미로는 움직이는 미로였다. 벽에 가로막힌 바람에 바실리스크의 뒤를 더는 쫓지 못하자 미련 없이 페리를 역소환시키고는 다시 지도를 펼쳤다.

검은색 점이 어느새 네 개로 늘어나 있었다.

독도 성가시고 사안도 성가시지만 더 성가신 건 사안이었다.

독은 바실리스크에게 물리거나 독이 피부에 닿는 것만 피하면 되는데, 사안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니까.

몸통만 보고 레이드를 하더라도 언제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칠지 모르고.

“역시 눈을 없애야겠네.”

주머니에 손을 꽂고 흥얼거리며 망설임 없이 지도의 바실리스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게 달려드는 거대한 자칼 무리를 향해 마기를 불러냈다. 땅에서 치솟는 마기에 자칼 떼가 갈기리 찢겨 나갔다.

다행히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바실리스크와 대면했다. 다시 와 닿은 사안의 저주가 날 뾰족하게 찔러 왔다.

퉤, 피를 뱉어 내며 바실리스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를 삼키려는 듯 입을 쩍 벌리는 바실리스크에 방향을 틀어 미로의 벽으로 달려가 벽을 타고 힘껏 점프해 바실리스크의 몸뚱이 위에 안착했다.

바실리스크가 제 몸을 밟고 우뚝 선 나를 떨어뜨리기 위해 온몸을 뒤틀며 요동쳤다.

아랑곳하지 않고 몸뚱이를 밟으며 거대한 이 독사의 머리까지 도달한 나는 눈꺼풀 없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바실리스크를 향해 씩 웃었다.

“마계에는 너보다 더 독한 놈들이 많아서 말이야.”

마기가 바실리스크의 샛노란 눈을 파고들어 으스러뜨렸다. 나머지 한쪽 눈은 절단 스킬로 촥 베었다.

고통스러운지 몸부림치며 텁텁, 허공을 물어 대는 바실리스크에 나는 잡을 곳 하나 없는 놈의 정수리에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난폭하게 날뛰던 바실리스크는 내가 이제 본격적으로 제 숨통을 끊으려 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꼬리를 휘둘러 내 시야를 차단하고는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 봤자 지도가 있어서 독 안에 든 쥐 꼴인데. 쯧쯧, 불쌍한 바실리스크. 나만 없었어도 양학 하고 다니는 여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하필 사탄들의 던전에 루시퍼가 등장해 버려서.

한 걸음을 떼려다가 덮쳐 오는 고통과 피로감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멈췄던 피가 다시 속에서 역류했다.

『사안의 저주가 축적되어 현재 몸 상태가 위험 수준입니다.』

『해주(解呪)를 추천합니다.』

피를 토해 내며 차근차근 해주 과정을 밟았다. 내게 달려드는 몬스터들은 페리가 모두 처리했다.

마지막 저주까지 풀어내고 나니 엉망으로 들쑤셔졌던 속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쇠 비린 맛이 나는 입 안에 인상을 찌푸리며 레이드 전 지급받은 C급 포션을 들이켰다.

“으, 맛없어…….”

포션 중독을 예방하기 위해 맛없게 만들었다고 하던데 적어도 먹을 만한 수준으로는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빈 포션 병을 휙 던지고 지도를 보니 검은색 점이 일곱 개로 늘어나 있었다. 열일곱 명 중 벌써 일곱 명이 사망했다.

왜 그렇게 게이트 한 번 들어가는 데에 수당이 높은지 깨달았다. 이건 목숨값이었다.

오늘처럼, 혹은 연수원 실습에서의 이중 던전처럼 게이트 안에서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

원래 B급 게이트는 25~30명이 레이드 기본 인원이라고 했는데 주태윤이 직접 참가한다고 인원을 팍 줄였다고 들었다. 이게 이렇게 독이 되어 돌아올 줄은 주태윤도 몰랐겠지.

설마 지금 자기 탓이라고 자책하고 있을까?

지도에 붉은 점이 내 가까이에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급히 걸음을 빨리해서 그곳으로 다가갔다.

화려한 이펙트가 번쩍였다. 마치 지휘하듯 휘두르는 손에 요동치던 마력이 움직여 몬스터를 밀어붙이고 살과 가죽을 갈기갈기 찢었다.

제게로 덮쳐드는 사람 눈을 가진 들개 형상의 몬스터의 옆구리를 거칠게 걷어찬 주태윤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채현 씨, 무사하셨군요!”

안도감이 물씬 묻어 나오는 그 외침에 혀를 차며 페리를 툭, 쳤다. 페리가 주태윤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흠칫한 주태윤이 내 몬스터임을 알고 공격하지도 못하고 몸을 피하는 순간, 주태윤의 뒤를 덮치려던 몬스터가 페리의 이빨에 으스러졌다.

“전투 중엔 집중이 기본인 것도 몰라요?”

곳곳에 생채기가 가득한 주태윤의 몸을 보며 툭 쏘아붙였다. 그 말에 주태윤의 눈이 샐쭉 휘어졌다.

“저 걱정했어요, 채현 씨?”

그래, 내가 너 그 대사 칠 줄 알았다.

* * *

“아쉽다, 작별 인사라도 해 줄 걸 그랬나?”

검게 물든 핵을 쓰다듬으며 진세빈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핵에서 손을 뗀 진세빈은 곧 핵에 등을 기댔다. 심장박동 같은 두근거림이 등에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다크서클로 거뭇하게 물든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진세빈은 만지작거리는 돌에서 빛이 꺼질 때만을 기다렸다.

주태윤의 머리를 찍어 그 피를 묻힌 이 돌은 주태윤의 생명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피 한 방울이면 충분했지만 굳이 머리를 내리찍은 건 순전히 충동이었다. 주태윤이 순순히 제 피를 내줄 리도 없을뿐더러 그냥 내 손에 의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기에.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밑바닥을 구르며 힘들게 살아왔는데 왜 나와 같은 피가 섞인 너는 모든 걸 가진 채로 편하게 살아왔나.

그래서 그는 주태윤의 모든 걸 빼앗고 싶었다.

태윤의 어머니가 둘의 앞에서 저의 편을 들며 태윤을 꾸짖을 때 일그러지던 그의 표정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태윤의 두 형이 저들의 친동생을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볼 때 비치던 상처 어린 표정은 또 얼마나 희열을 느끼게 했던가!

“형, 불쌍한 태윤 형. 사업도 물려받지 못하지, 행시도 번번이 떨어지지, 가족들은 형에게 등을 돌렸지, 이제 형에게 남은 게 뭐야?”

“난 네가 더 불쌍하다, 세빈아. 난 적어도 너처럼 더러운 피는 안 섞였거든.”

그 한마디에 진세빈은 주태윤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죽이고 주태윤의 자리를 제가 차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상한 세계로 떨어졌어도 그 일념 하나로 저를 제물 삼아 바치기까지 하며 돌아왔다.

인간의 것도 그 무엇의 것도 아닌 언어가 소리의 형체를 띠고 그의 귀와 머릿속에 어지럽게 속삭여졌다.

“귀환자가 거슬리긴 하지만 제 계획에 크게 위협되는 존재는 아니잖아요?”

진세빈은 질 나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주태윤만 죽으면 러스터 길드는 제 손에 떨어진다.

설마 귀환자를 데려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하지만 귀환자도 귀환자 나름이지.

어서 돌에서 빛이 꺼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자신은 즉시 태윤의 시체를 찾아가 그 시체를 짓밟으며 한바탕 웃어 주리라.

“그 귀환자가 초월자가 아닌 이상 이곳에서 무사할 리가 없죠. 여긴 ■■■■, 당신의 꿈속 꿈이자 당신의 영역이니.”

그가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만들어 준 존재. 그의 오랜 숙원을 이뤄 줄 존재가 진세빈의 말에 배부른 웃음을 터트렸다.

* * *

“그 진세빈……? 그분이랑은 무슨 사이예요?”

“사촌입니다. 정확히는 이종사촌이죠. 이모께서 돌아가시며 저희 집으로 들어와 함께 살게 됐습니다.”

주태윤의 복잡한 표정에 내게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더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남의 집 사정을 캐어묻고 싶지는 않았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태윤이 집안 비밀을 자기 입으로 말하면 빼도 박도 못하게 플래그 꽂는 거야. 그냥 귀찮은 인간1에서 서브남까지 위치가 상승해 버린다고.

몬스터가 어디에서 덮쳐 올지 몰라 경계를 세우고 사방을 살피며 미로를 걷던 중, 발치에 무언가가 툭 채였다.

“아…….”

눈도 감지 못한 시체였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생기 있던 사람이 지금은 시체가 되어 늘어져 있었다.

마계에서 전쟁을 치러 오면서 질리도록 보아 왔던 풍경이었지만 평화롭다고 생각했던 이 세계에서 이 상황을 겪으니 마음이 어지러웠다.

활을 꽉 쥔 채로 사망한 길드원을 내려다보는 주태윤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허리를 굽혀 눈을 감겨 준 주태윤은 그의 손에서 활을 떼어 내 인벤토리에 넣고는 미련이 남은 듯 계속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서른 명으로 레이드 공대를 짤 걸 그랬습니다.”

주태윤이 고해성사하듯 무거운 목소리로 한탄했다.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로 축 처진 주태윤을 위해 기운이 나는 말을 해 주었다.

“오히려 잘된 거 아닌가? 서른 명 죽을 거 열일곱 명 죽는 건데. 열세 명 살렸다고 생각해요.”

“…하하, 그렇죠. S급 게이트에선 열일곱 명이든, 서른 명이든 소용이 없죠.”

실소하며 중얼거린 주태윤이 나와 눈을 마주했다.

“첫 만남 때도 그러더니 지금도 태연하시네요, 채현 씨는.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채현 씨를 구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미리 사과드리죠.”

“댁이 언제 나를 구했다고 그러시는지……?”

“기억 안 납니까? 열심히 과제 하고 계시던 채현 씨 뒤를 덮치려던 그 몬스터, 제가 잡았는데.”

야, 그 뽀짝한 몬스터. 갸는 위험 예지도 안 떴다. 무슨 낚시터에서 피라미 낚아 놓고 자랑하는 꼴이야?

그리고 우리 애들이었다고. 나 절대 공격 못 하는 마계 마수들이었다니까?

“그런데 왜 미리 사과하고 난리? 설마 나 두고 혼자 튀게요? 주태윤 씨, 그렇게 보긴 했는데 참 모옷된 사람이네.”

“혼자 도망갈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시죠. 다만, 제가 죽으면 채현 씨도 위험해질 테니까…….”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한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손을 뻗어 주태윤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당기는 힘에 어정쩡하게 주태윤의 허리가 굽어졌다.

얼굴과 얼굴 사이에 주먹 하나 들어갈 거리가 되어서야 끌어당기던 힘을 풀었다. 언제나 지켜지던 퍼스널 스페이스를 내가 먼저 박살 내고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했다.

“사람을 사지로 끌고 왔으면 책임을 져요.”

당황 어린 감정이 묻어 나오는 눈빛을 마주하며 한 자, 한 자 씹어 말했다.

“살아서 나 지키라고.”

네가 살아 나가서 완수금도 올려 줘야지, 주태윤아. 내가 S급 게이트에서 이리 고생하는데 아직 500밖에 안 줘 놓고 어디서 함부로 데드 플래그를 꽂고 있어?

멍하니 나를 보던 주태윤이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죽지 않는다는 약속은 못 하겠습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전 최선을 다해…….”

“아, 거참. 쫑알쫑알 말 많네.”

쥐고 있던 멱살을 짤짤 털었다. 주태윤이 내 손에 맥없이 흔들렸다.

“그냥 ‘꼭 죽지 않겠습니다.’ 한마디만 하라고. 주둥이로 괜한 데드 플래그 세우지 말고.”

“예, 꼭 죽지 않겠습니다. 채현 씨가 원하신다면.”

어느새 다시 제 페이스를 되찾은 주태윤이 눈을 접어 웃었다. 미련 없이 멱살을 쥔 손을 놓고 걸음을 옮기자 구겨진 옷을 툭툭, 쳐서 편 주태윤이 옆에서 발맞춰 걸었다.

코너를 꺾자마자 거대한 슬라임을 닮은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역시나 1급이었다. 우리의 등 뒤로는 짐승 떼를 닮은 몬스터들이 촘촘히 박힌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주태윤 씨가 앞쪽 맡아요. 난 뒤쪽 맡을 테니까.”

“앞은 한 마리고 뒤는 다섯 마린데, 제가 뒤쪽을 맡는 편이…….”

“우리 페리가 물컹한 걸 싫어해서요.”

페리가 달려들어 한 마리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나머지 네 마리를 향해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주태윤은 흐물거리며 덮쳐 오는 슬라임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이쪽에 신경 쓸 새가 없었다. 하지만 마기를 풀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였기에 노선을 틀었다.

『마왕의 권능 ‘지배’를 사용합니다.』

복종보다 한 단계 위의 권능, 지배. 이지를 앗아 간 꼭두각시로 만들어 내 손에서 굴릴 수 있는 권능.

『같은 차원의 생명체가 아닙니다.』

『행할 수 있는 권능의 힘이 70%로 축소됩니다.』

70%면 살짝 부족하겠는걸. 내 마음을 읽은 듯이 페리가 한 마리를 더 채 갔다.

좋아, 세 마리면 70%의 권능으로도 충분했다. 이지를 잃은 채 멈춰 선 몬스터 떼를 향해 명령했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내 명령에 몬스터 떼는 뒤엉켜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내 앞은 순식간에 피비린내 나는 동족 살육의 장으로 변했다.

뒤를 힐긋 돌아보니 주태윤이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었다. 확실히 공간 능력 스킬을 이용한 전투 센스가 좋았다.

화르륵, 강한 청염(靑炎)에 슬라임 몬스터의 몸이 점차 쪼그라들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물리적 공격이 쏟아졌다. 검은 가시 결정이 땅에서 치솟아 슬라임 몬스터의 몸을 꿰뚫었다.

마석이 박살 나며 슬라임 몬스터가 형체를 잃고 물웅덩이로 화해 사라졌다.

다시 앞쪽을 보니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몬스터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상처가 가득한 피투성이의 몸으로 겨우 서 있었다.

“페리, 마무리.”

그 말에 득달같이 달려든 페리가 몬스터의 몸에 콱, 이빨을 박았다. 맛있게 뜯어먹고 있는 페리를 보니 괜히 뿌듯했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바로 이런 기분일까.

방금까지 슬라임 몬스터였던 무언가가 만들어 낸 철벅거리는 물웅덩이를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1인칭 모드로 설정해 놓은 지도를 보며 주태윤을 마석이 있는 쪽으로 스리슬쩍 유도했다.

“에휴, 분명 세 달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대학생이었는데 내가 어쩌다가…….”

내 한탄에 주태윤의 얼굴에 죄책감이 감돌았다. 아니, 굳이 찔리라고 했던 말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계속 걸으면 생존자가 한두 명 정도는 나올 만했지만 보이는 건 시체뿐이었다.

이래서 미로가 무서운 거였다. 길이 엇갈리면 평생을 만나지 못한 채 미로 안을 헤매야 할 수도 있으니까.

한참을 미로를 걷던 중, 주태윤이 표정을 굳히며 팔을 뻗어 나를 뒤로 물렸다.

스르르, 마찰 소리가 스산하게 공기를 울렸다. 공기에 독기가 섞여 들어갔다. 뚝, 독니에서 독이 떨어질 때마다 바닥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부식되어 갔다.

사안(死眼)을 없애서인지 아까와 달리 위험 예지는 뜨지 않았다.

『던전 보스 몬스터 ‘바실리스크(1급)’가 나타났습니다.』

“…바실리스크!”

경악 어린 외침과 확 긴장하는 몸에 혀를 찼다.

참 운도 좋다. 이제까지 미로에서 한 번도 마주하지 않았나 보네.

위협적으로 쉿쉿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제 눈을 으스러뜨린 이라는 걸 후각으로 깨달았는지 독잇빡침뱀이 된 바실리스크는 끊임없이 쉿쉿거리며 머리를 치켜올렸다.

A급 한 명과 S급 한 명이 1급 보스 몬스터인 바실리스크를 죽일 수 있는 확률은 몇 %일까. 물으면 백이면 백 0%라고 답할 것이다.

주태윤 역시 그걸 알고 있기에 나를 제 뒤로 보낸 거고.

“제가 막고 있을 테니 채현 씨는 최대한 여기서 멀리 떨어지십시오.”

“1급 보스 몬스터 레이드를 홀로 뛴다고요?”

“거기에 눈을 감아야 한다는 페널티까지 추가되긴 하지만… 어떻게든 해 봐야겠죠.”

여유로운, 아니 정확히는 여유를 가장한 그 미소에 이를 악물며 물었다.

“대체 뭘 믿고 그래요?”

낮게 웃음을 터트린 주태윤은 가라앉은 눈빛을 내리깐 속눈썹에 반쯤 숨기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연인이 함께 죽는 것보단 남은 한쪽이 먼저 떠나 보낸 이를 평생 그리워하는 게 더 제 취향이라서 말이죠.”

“난 주태윤 씨랑 연인도 아니고, 평생 그리워하지도 않을 거거든요?”

“먼 훗날 제 무덤에 꽃 한 송이 놓아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데드 플래그 그만 꽂으랬지.”

내 으르렁거림에 부드럽게 미소 지은 주태윤이 흐트러진 내 옆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정리해 주었다.

“지금 S급 게이트에 휘말린 이 상황 자체가 데드 플래그야, 채현아.”

대략 500살 연하남과의 때아닌 야자 타임이었다. 어이없다는 내 표정에 주태윤이 눈을 곱게 휘었다.

“마지막이니까 한 번쯤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것도 나쁘진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계속 나한테 말을 놓고 싶었다? 아서라, 네가 나한테 말을 놓기는 500년도 이르다.

“눈 굳이 안 감아도 돼요.”

내 뜬금없는 말에 주태윤이 눈을 깜박였다. 시선을 주태윤의 눈에서 바실리스크의 얼굴로 옮겼다. 주태윤이 급히 손바닥으로 내 눈을 막았지만 바실리스크의 얼굴은 그보다 한발 빨리 내 시야에 담겼다.

“이미 눈 두 개는 조져 놨거든.”

눈 대신 두 개의 뻥 뚫린 구멍이 바실리스크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말에 주태윤이 휙 고개를 돌렸다.

내 말 너무 잘 믿는 거 아니야? 만약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 거였으면 어쩌려고.

하지만 눈을 잃었어도 바실리스크에게는 맹독이 있었고, 거대하고 유연한 몸뚱어리가 있었으며, 사람 하나의 온몸의 뼈를 바스러뜨릴 수 있을 만한 악력이 있었다.

앞서 말했지. A급 한 명과 S급 한 명이 1급 보스 몬스터인 바실리스크를 죽일 수 있는 확률은 0%라고.

그렇다면 EX급 한 명과 S급 한 명이 바실리스크를 죽일 수 있는 확률은?

S급이 낄 자리도 없이 오직 EX급의 힘 하나만으로도 100%.

“살아서 나가면 완수금이나 올려 줘요. S급 게이트에 2천은 좀 그렇잖아요? 그리고 계약금 5억은 아무리 계산해 봐도 손해야.”

주태윤을 지나쳐 바실리스크를 향해 걸어가며 피식 웃었다. 주태윤이 다급히 내 이름을 불렀지만 아마 발목을 휘감은 마기에 움직이지 못할 것이리라.

뱀의 왕, 바실리스크를 올려다보던 내 입꼬리가 비틀렸다. 하여간 왕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모가지가 뻣뻣해서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뻣뻣하면 그대로 부러져서 꺾이는 거지.

『캐스팅을 완료했습니다.』

『스킬 ‘메테오(L)’를 실행합니다.』

마침내 수식에 마침표가 찍혔다.

별이 하늘을 수놓듯 이글거리는 운석이 머리 위에 나타났다. 주태윤의 헛웃음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메테오가 바실리스크를 향해 쏟아졌다.

몸을 돌려 유성처럼 쏟아지는 운석을 등지고서,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환하게 웃었다.

“주태윤 씨가 생각해도 계약금 5억으론 어림없죠?”

* * *

운석이 모두 떨어졌다.

『던전 보스 몬스터 ‘바실리스크(1급)’를 처치하셨습니다!』

먼지구름이 가라앉자 돌에 짓눌리고 으스러져 축 늘어진 바실리스크의 거대한 시체가 보였다.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주태윤이 물었다.

“S급입니까?”

“왜요, 그때처럼 랭킹 1위냐고 물어보지?”

“한 각성자가 두 번 각성자 등록을 하고 랭킹 차트에 이름을 올리는 건 우리나라 행정법상 불가능하지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주태윤 씨가 S급이라고 생각하신다면 S급이고, A급이라 생각하면 A급이고.”

EX급이라 하기에는 뭔가 쪽팔린다, 응. 설렁설렁한 내 대꾸에 주태윤이 다시 질문했다.

“왜 굳이 숨기고 있던 힘을 드러내면서까지 저를 살리셨습니까? 제가 죽고 처리했다면 아무도 당신이 힘을 숨겼다는 사실을 몰랐을 텐데.”

“말했잖아요. 완수금 올려받기 위해서라고. 댁 죽으면 2천밖에 못 받잖아.”

“제가 채현 씨의 힘을 약점 삼아 휘두르려 하면 어쩌려고.”

기가 막힌다는 듯 웃는 주태윤을 보며 싱긋 마주 웃어 주었다.

“협회장도 내게 내 정체로 협박할 엄두를 차마 못 내는데, 협회장처럼 뒷배도 없고 그보다 랭킹도 낮은 주태윤 씨가 설마 그러시려고.”

내 말 아래 깔린 경고는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믿는다. 주태윤이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선수 쳐 주태윤을 왼쪽 갈림길로 휙 끌어당겼다.

미로의 끝, 그곳에 검게 물든 핵이 탁하게 빛나고 있었다. 핵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자 뒤에서 발소리가 울리더니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아 있었네, 형?”

주태윤의 이종사촌 겸 낙하산, 진세빈이었다. A급 메이지라더니 용케 살아남은 모양…….

진세빈의 현 상태를 보자 위화감이 들었다. 생채기는커녕 옷차림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전투를 치른 사람의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면 핵 가까이 있었으면서 지금까지 핵을 박살 내지 않았다고?

뭔가 쎄하다. 쎄믈리에가 곧바로 발동했다.

‘시스템 간섭.’

『시스템에 접근합니다.』

『관리자 ‘이채현’ 님 확인되었습니다.』

스카우터가 곧바로 진세빈의 정보창을 띄웠다.

『진세빈(?????)』

* 특성 - 귀환자

* 계열 - ????

* 직업 - ?????

* 등급 - EX

* 칭호 - ■■■■의 ■■

* 스킬 - ??????????????

* 스테이터스 - 체력 B, 힘 C, 민첩 B, 지력 B, 정신력 S, 마력 EX

뭐야, 저건……?

온통 물음표와 네모로 되어 있는 정보창에 흠칫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게이트 사태 첫날 떴던 내 정보창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다.

읽을 수 있는 거라곤 귀환자라는 특성과 EX급이라는 등급, 그리고 스테이터스 수치. 반질반질한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이 새끼, 귀환자였어?

진세빈의 새까만 눈동자와 내 눈이 마주했다.

귀환자에, 게다가 EX급이라고? 나 혼자만 EX급이 아니었어?

내가 ‘나 혼자만 XX 시리즈’ 주인공이 아니었다니.

내가 제 정보창 때문에 충격을 먹든 말든, 진세빈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느릿하게 주태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해, 형. 수명이 늘었네.”

“뭐?”

“그래 봤자 조금이지만.”

약 올리듯 덧붙이는 말에는 비소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할짝, 혀로 입술을 훑은 진세빈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이 게이트 얼마 받고 들어왔어요?”

“2천이요.”

풉, 진세빈이 입을 가리고 비웃음을 터트렸다.

“목숨값으로 너무 싸다. 내가 1억 더 부쳐 줄까요? 저승길 노잣돈으로 1억이면 미련 안 남기고 삼도천 건너기 충분하겠죠?”

“죽은 뒤에 1억 들고 가면 대체 무슨 소용인데요?”

“평생 못 만져 볼 돈 만지고 가잖아요.”

나를 노골적으로 깔보는 말에 미간을 팍 찌푸리며 진세빈을 노려보았다.

뭐래, 내가 한때는 1마계부터 7마계까지의 땅 주인이었어. 무려 성에 사는 부동산 재벌이었다고.

내 앞을 막은 주태윤이 경고하듯 진세빈의 이름을 불렀다.

“진세빈, 적당히 해.”

“형은… 응, 그래. 잠깐 빠져 있어 줘야겠다.”

나른하게 읊조린 진세빈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주태윤의 몸이 마치 갈대처럼 풀썩 꺾이더니 스르륵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주태윤 씨!”

다급하게 몸을 숙여 주태윤을 흔들었다. 대답 없이 축 늘어진 주태윤의 코밑에 급히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저벅, 발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진세빈이 검은 홍채에 흥미의 빛을 띠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이제 우리끼리 게임 하나 해 볼까요, 귀환자?”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이며 진세빈이 웃었다. 스산한 그 미소에 공기가 부르르 떨렸다. 팔을 넓게 벌린 진세빈이 빙글 몸을 돌렸다.

“여기는 ■■■■의 꿈속 꿈이자 상상이자 그의 영역이죠.”

분명 인간의 언어로 내뱉는 말이었지만 머릿속에서 자체 필터링이 되어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가 끼어 있었다.

그의 손짓에 미로가 순식간에 사라져 무(無)의 공간으로 돌아갔다가 갈림길이 없는 미궁으로 변했다가 다시 미로로 변했다.

“내 손아귀 안으로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라는 소리예요.”

앞으로 걸어가 던전의 핵을 쓰다듬던 진세빈이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태윤과 퍽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검게 물든 핵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핵을 박살 내면 꿈에서 깨어나겠죠? 그럼 이제 게이트 밖, 현실 세계로 나갈 수 있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핵을 향해 달려들었다. 핵에 손이 닿았다 싶었는데 난 어느새 쓰러진 주태윤의 옆으로 돌아와 있었다.

몇 번을 시도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 마기를 풀었다. 치솟은 검은 기운이 핵을 뚫으려는 그 순간, 허공을 찢고 나온 입이 마기를 꿀꺽 삼켰다.

눈을 부릅뜨고 진세빈을 노려보자 그가 오만하게 웃었다.

“박살 내 봐. 그럼 주태윤도 이번 게이트에서는 살려 줄게.”

명령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온갖 스킬들이 핵에 쇄도했다. 하나 그 스킬들은 족족 공간을 찢고 튀어나온 촉수에 의해 막혔다.

‘스킬은 어차피 막히니까……’

좋아, 답은 『손자병법』의 우직지계(迂直之計)다.

짐짓 길을 우회하는 것처럼 기만하고, 나아가 미끼를 내걸어 유인하여 적을 방심시킨다!

정신을 잃은 주태윤을 어깨에 들쳐 메고 빠른 속도로 핵의 반대편으로 달렸다. 뒤에서 진세빈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도망가는 거예요? 빠져나갈 길은 없다니까.”

미로의 벽이 내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내 앞을 가로막으며 스르륵 움직였다. 진세빈이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내 뒤로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나를 잡을 수 있는 곳까지 진세빈이 도달한 순간,

『스킬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2인』

핵이 위치한 바로 뒤로 위치가 바뀌자 곧바로 들고 있던 주태윤을 내던졌다.

됐다……! 희열 어린 눈으로 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조금만 더…….!

“내가 말했잖아요, 내 손아귀 안이라고.”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뒤틀리고, 나는 핵에서 떨어진 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쓰러진 나를 발끝으로 툭툭, 친 진세빈이 투정 부렸다.

“조금만 더 힘내 봐요. 명색이 귀환자잖아. 어디 귀족 집안 강아지 노릇이라도 하다가 왔어?”

꿈속의 꿈이자 영역이라고 했지. 그래서 놈의 명령대로 던전 안의 시공간이 움직이는 거고. 냉기가 도는 찬 돌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머리를 굴렸다.

나를 차는 발끝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이를 간 진세빈이 내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아 강제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라니까? 일어나서 빨리 게임에 참가하란 말이야. 날 지루하게 만들지 말고.”

광포한 살기로 눈을 번뜩이는 진세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내 머리채를 잡은 손의 손목을 덥석 쥐었다.

『마왕의 권능 ‘영역 선포’를 이행합니다.』

『차원 #SF105-2를 불러옵니다.』

놈의 영역이라 내가 힘을 쓰지 못하는 거면 내 홈그라운드로 바꾸면 되지.

『상위 존재의 간섭으로 권능이 50%로 제약됩니다.』

『상위 존재의 간섭으로 권능이 40%로 제약됩니다.』

『상위 존재의 간섭으로 권능이 30%로 제약됩니다.』

『관리자 권한을 사용해 간섭을 제한합니다.』

『관리자1도 간섭 제한을 허가한답니다! (⑅´•⌔•`)*✲゚*。』

두 관리자가 권한을 꺼내자 판도가 바뀌었다. 공기의 흐름이 변하며 탁했던 공기가 익숙한 공기로 바뀌었다.

손목을 쥔 손에 콱, 힘을 주었다. 내 손아귀에서 손목뼈가 그대로 으스러졌다. 진세빈이 비명을 지르며 내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주저앉았다.

진세빈과 나의 눈높이는 어느새 정반대가 되어 있었다.

“명령하지 마, 건방지게.”

진세빈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경고했다. 손을 떼고 핵을 향해 걸어갔다.

이번에는 공간이 뒤틀리는 일도, 허공을 찢고 나온 촉수가 나를 방해하는 일도 없었다.

“아아악! 왜 안 된다는 건데!”

등 뒤에서 히스테릭한 외침이 들려왔다. 무시하고 계속 핵을 향해 걷고 있는데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내 왼쪽 다리를 꿰뚫었다.

윽, 신음을 내뱉으며 주저앉으니 굳이 단검을 한 바퀴 비틀어 뺀 진세빈이 상처 부위를 배려 없이 콱 붙잡았다.

점점 피로 물들어 가는 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승리를 예감하며 히죽거리는 얼굴에 친절히 승부의 결과를 말해 주었다.

“이만 인정하지? 네가 졌어.”

“이 꼴로? 가능하다고 생각해?”

“물론.”

사나운 물음에 내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마기에 칭칭 감긴 핵에 쩌적― 금이 가더니 산산조각 났다. 동시에 공간 역시 방금의 핵처럼 수많은 금이 생겨났다.

진세빈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거칠게 진세빈의 멱살을 휘어잡고 끌어당겨 면전에서 씩 웃었다.

“이제 그만 기상 시간이야.”

내 말을 끝으로 금이 간 시공간이 그대로 퍼즐 조각처럼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 * *

덧씌워 낸 S급 게이트가 닫히자 나와 진세빈, 그리고 정신을 잃은 주태윤은 B급 게이트 앞에 있었다.

“왜 그렇게 태윤 형이 스카우트에 집착하는지 알아요?”

검붉게 멍든 손목을 붙잡은 채 고개 숙인 진세빈이 킬킬거리며 물었다.

“러스터 길드 키우려고겠죠.”

“아니요, 태윤 형은 사람이 고파서 그래. 예전부터 내가 다 뺏었거든. 친구든, 연인이든, 선후배든 모조리 싹 다. 그런데 이 형이 인복은 또 있어서…….”

당최 고립이 되질 않대? 진세빈이 스산하게 히죽였다.

“봐봐, 이번에도 죽이려고 끌고 온 던전에 당신 정도 급의 귀환자를 데려왔잖아. 인복도 좋고 목숨줄도 참 질겨요.”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심드렁하게 묻자 진세빈이 느릿하게 얼굴에서 웃음을 지워 나갔다.

“내가 성격이 좀 비틀려서 말이야, 예전부터 태윤 형 손에 있는 좋은 건 다 박살 내고 망가뜨려 버리고 싶었어요.”

흙덩이가 진세빈의 손 안에서 모래로 흐트러져 손 틈새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래 왔고.”

미친놈 아니야? 주태윤이 인재에 집착하는 스토커가 될 만도 했다. 생존 본능이었구나. 무죄다, 무죄.

내가 질색하든 말든 손을 탁탁, 턴 진세빈이 천천히 나와 주태윤을 훑었다.

“당신을 죽이면 형은 어떤 표정을 할까. 궁금하네.”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오늘 나한테 발려 놓고 나를 죽인다고? 퍽이나.

내 얼굴에 비웃음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는지 표정을 싹 지운 진세빈이 속삭였다.

“착각하지 마세요, 테이머 씨. 방금은 꿈속 꿈이었어. 꿈속이었으면 당신은 오늘 죽었을 거야, 주태윤과 함께.”

EX급, 그리고 관리자인 나조차도 읽을 수 없는 정보창. 놈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이쪽 역시 잘 느끼고 있었다.

다음에 또 한 번 부딪힌다면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죽겠지. 무표정으로 진세빈을 바라보고 있자 진세빈이 히죽 웃었다.

“오늘은 살려 줄게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뇌까린 진세빈은 몸을 일으켜 먼저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제대로 미친놈한테 걸린 것 같은데. 주태윤은 저런 미친놈이랑 대체 몇 년을 함께 지낸 거야?

머리를 긁적이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진 잠자는 공주님 주태윤을 부축해 일으켰다. 칼에 찔린 다리가 따갑고 쓰라렸지만 이 정도는 참을 만했다.

마계에서 지낼 때 칼빵은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야 귀여운 수준이지.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등 뒤의 게이트가 스르륵 소멸해 갔다. 게이트 안에 생존자가 없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게이트 클리어!』

『수고하셨습니다, 관리자님.』

언제나 꼽 주던 말이 아닌 공손한 인사가 상태창에 떠올랐다. 앞이 시끌시끌해서 소멸하던 게이트에서 눈을 떼고 앞을 바라본 나는 반사적으로 주춤했다.

“또 생존자 나왔다!”

“테이머다! 옆에 부축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

“러스터 길드장 아니야?”

수많은 사람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저 한쪽에는 가증스럽게도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따뜻한 차를 받아 마시고 있는 진세빈이 보였다.

표정이 잔뜩 굳은 이재의가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주태윤! 야, 주태윤! 정신 차려 봐! 들것! 빨리 병원으로 옮겨요!”

널브러진 주태윤을 내게서 받아 든 이재의가 다급한 목소리로 응급 대원들을 불렀다. 제 상사의 뒤를 쫓아 달려온 윤세인이 피범벅이 된 내 청바지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이채현! 너, 다리……! 여기요! 여기 빨리 힐러 좀 불러 주세요!”

아무도 진심 어린 걱정을 해 주는 이 없이 홀로 앉아 우리를 보던 진세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하, 느이 집에는 친구 없지?

* * *

입원했다.

교통사고로 보험금 타려는 목적이었던 나이롱 입원이 아닌 진짜 다쳐서 입원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회복 속도가 워낙 빨라 4일 후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답을 받았다.

편하게 1인실 병실 침대에 드러누워 수액을 맞으며 태평하게 휴대폰을 하고 있는데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성큼성큼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들에 당황으로 눈을 깜빡였다.

“어, 엄마? 아빠? 여긴 어떻게 왔어?”

들고 있던 큰 쇼핑백을 병실 바닥에 탁 내려놓은 엄마가 버럭 소리 질렀다.

“헌터 당장 그만둬라!”

이럴까 봐 입원했다는 말은 안 했는데. 어차피 입원 기간도 닷새라 굳이 지방에 있는 부모님을 부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도 하고.

누가 일러바친 거냐. 백아현이냐, 아니면 윤세인이냐.

“나 그래도 1억이나 벌었는데…….”

주태윤이 완수금으로 입금한 돈은 9,500만 원. 선금으로 받은 500까지 더하면 딱 1억이었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하자 내 어깨를 덥석 잡은 엄마가 나를 흔들었다.

“네 목숨값이 겨우 1억이야? 엄마가 얼마나 고생해서 너를 낳고 키웠는데 겨우 1억 받겠다고 사지로 들어가? 어?”

“아니, 이번 게이트가 그냥 특출나게 이상했던 게이트였다니까. 평소에는 레이드 인원도 많고 안전하다고.”

“또다시 그런 게이트에 안 들어가리란 보장이 있어? 너도 알고 들어간 거 아니잖아. 그래, 안 그래?”

논리적인 말에 받아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딸. 세상에 다른 안전한 직업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굳이 위험한 일을 해. 엄마 말 들어. 네 엄마 뉴스에서 네 소식 보고 뒤로 넘어갈 뻔했다.”

아빠가 옆에서 엄마의 말을 거들었다.

하나도 안 위험한데. 이번에는 그냥 미친놈이 끼어서 그랬던 건데. 헌터 일 완전 나한테는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인데.

하지만 이 말을 하는 순간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꼴이라 입만 비죽였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 * *

내게 걱정 어린 잔소리를 쏟아 내신 부모님은 병문안 온 날 저녁에 다시 집으로 내려가셨다. 오늘로부터 이 지루한 병원에서 3일만 더 버티면 됐다.

[센 - 퇴근하고 병문안 감] 오후 2:00

[ㅇ 올 때 치킨] 오후 2:01

[백야 - 나도] 오후 2:20

친구들의 병문안 통보에 답장을 보내며 하릴없이 병실에서 TV 리모컨만 눌러 댔다.

“보험을 들어야 하나…….”

어차피 안 죽으니까 사망보험은 패스하고 던전 내 상해보험을 검색하는 중 똑똑, 노크 소리가 내가 입원한 병실에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주태윤이었다. 바실리스크도 내가 잡고, 미친놈(진세빈)을 상대하는 것도 내가 했기에 주태윤은 입원할 필요도 없이 멀쩡했다.

“몸은 좀 괜찮나요, 채현 씨?”

수제 제과점 로고가 박힌 쇼핑백을 병실 침대 옆 선반에 내려놓으며 묻는 주태윤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힐도 받았고 S급 포션도 마셔서 애초에 그냥 푹 쉬어도 됐을 정도의 부상이었다. 내가 곧 뒤질 것처럼 대성통곡하는 윤세인 덕분에 얼떨결에 입원동의서에 서명한 거지.

“제가 병원으로 실려 간 후에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좀 듣죠.”

내 말에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앉은 주태윤이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가 게이트에 있던 시간은 꼬박 하루였단다.

보통 레이드 진행 시간은 일곱 시간 이하였다. 하지만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 이들이 하루째 나오지 않고 연락도 두절된 데다가 들어간 이 중 길드장과 길드장의 친인척까지 있으니 러스터 길드가 뒤집힌 건 당연지사.

설상가상으로 게이트는 출입을 거부했다. 그렇게 관리국과 러스터 길드가 게이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우리가 나왔던 거다.

열일곱 명이 들어갔지만 생존자는 오직 세 명뿐. B급 게이트에서 일어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주태윤과 내가 게이트가 미로 형태의 S급 게이트로 바뀌었다고 증언했지만, 진세빈이 협조하지 않아 수사는 난항을 겪고 있는 상태.

주태윤은 일단 돈으로 카더라를 쏟아 내는 언론을 막고 있다고 했다.

“카더라요?”

“제가 그 안에서 길드원들을 죽이고 발뺌을 한다부터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오는 중이긴 합니다. 진세빈 그 자식이 거기에 불을 붙이고 있고요.”

주태윤이 다물린 입매를 손으로 쓸었다. 거기 나까지 엮여 있는 건 아니겠지? 망설임이 묻어 나오는 표정으로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던 주태윤이 조심스럽게 질문해 왔다.

“혹시 제가 기절해 있던 동안 진세빈이랑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니면 무슨 이야기를 들었다던가…….”

미친놈과 엮인 댁의 안쓰러운 과거와 스카우트에 집착하는 이유와 나랑 당신의 살해 예고를 들었지.

주태윤의 눈에 아주 잠깐, 긴장과 두려움이 스쳐 갔다. 진세빈의 수작으로 그렇게 당신을 떠난 사람들이 몇이나 되기에 그런 눈을 하는지.

“일단 주태윤 씨 욕은 안 했어요.”

“…그놈이요? 의외네요.”

불신과 안도가 섞인 표정에 혀를 찼다. 주태윤에게는 불쌍하게도 하필 그 미친놈 등급도 주태윤보다 높은 EX급이라.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한 주태윤은 다음 일정이 있는지 몸을 일으켰다. 그가 허리를 숙였다.

“다시 한번 더 채현 씨를 위험에 빠뜨린 것에 사과드립니다.”

“딱히 위험은 아니었는데. 주태윤 씨도 봤잖아요.”

어깨를 으쓱하자 주태윤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채현 씨가 정말로 제가 알고 있던 등급인 A급이었다면 충분히 위험하고도 남았을 상황이었습니다. 이번 던전의 생존자도 0명이었겠죠.”

쓰게 웃는 주태윤의 얼굴을 보다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며 한마디 던졌다.

“역시 그쪽은 뻔뻔한 게 더 어울려.”

안 어울리게 무슨 죄짓고 눈치 보는 강아지 흉내야. 여우면 여우답게 굴든가.

“날 S급 던전이 될 줄 몰랐던 B급 던전으로 데려간 건 1억 받은 거로 쌤쌤 치죠. 스카우트는 그만하고. 나 데려가려면 러스터 길드 기둥 뽑혀요.”

주태윤이 내려놓은 쇼핑백을 집어 들며 이만 나가 보라고 손을 휘적였다.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중에 또 뵙죠, 채현 씨.”

눈웃음 지은 주태윤이 병실 문을 열고 나가고 1분 후,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이채! 설마 방금 주태윤 왔다 갔어?”

반응을 보아하니 병원 복도에서 마주쳤나 보다. 설마 병원에서 싸운 건 아니겠지.

“설마 이채 좋아하는 거 아니야?”

“누가, 주태윤이? 미쳤?”

“아니, 백야 너한테 한 것보다 이채에게 더 오래 달라붙는 거 같아서. 심지어 이채는 S급도 아니고 A급인데.”

“난 협회로 들어갔고 이채는 다른 곳으로 안 들어갔잖아. 계속 간 보는 거지.”

씩씩거리던 아현이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휙 돌렸다.

“이채, 내가 남소 시켜 줄까? 세혁 씨 친구들 만났는데 다들 괜찮더라. 내가 세혁 씨한테 부탁해서 제일 잘생기고 성격 좋은 남자 소개해 달라고 할게.”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이름에 아현이의 손을 덥석 잡고 당부했다.

“세혁 씨랑 꼭 오래가.”

그래야지 세혁 씨가 그 한국대 A급 게이트 침입 사건을 오래오래 묻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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