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흑막이 나를 의심하는데 내가 사실 최고 흑막임
“보고부터 받지.”
캐리어를 휙 내팽개치고 옥좌 대신 침대에 털썩 걸터앉자 걸레를 내팽개치고 앞에 무릎을 꿇은 세이블이 입을 열었다.
“저희에게 투항하지 않은 7마계의 잔당들은 모두 잡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고문으로 정보를 얻은 결과 1마계에 남아 있던 기르카스의 세력이 2~7마계의 불만 세력을 모아 반군을 만드는 중이라 합니다.”
침대 매트리스를 툭툭, 치던 손가락을 뚝 멈췄다.
“…기르카스의 세력? 확실하나?”
분명 다 잡아 죽였잖아. 나중에 이렇게 기어오를까 봐 가담한 놈들뿐 아니라 그 삼족까지, 싹.
“그래서 지금 의심 가는 이들 위주로 조사 중입니다. 특히 중앙을 중심으로요.”
“폐하, 혹시 따로 빨아야 하는 옷 있을까요?”
“아니, 그냥 세탁기에 싹 돌려. 중앙에 기르카스의 세력으로 의심 가는 놈이 있다고? 그 정도로 거르고 걸렀는데도?”
“그때 기르카스를 배신하고 투항한 놈들도 꽤 있지 않습니까.”
그래, 한 번 배신 때린 놈들이 두 번은 때리지 말라는 법 있냐. 그래도 마계 대전 치르면서 같이 으쌰으쌰 하던 놈들이 내가 사라지자마자 뒤통수를 때려?
마왕 못 해 먹겠다, 진짜. 이 빌어먹을 크라토스 얼른 넘기고 이 꼴 안 보고 살아야지.
“그런데 굳이 중앙 세력이라고 특정 지은 이유는?”
“폐하께서 이 차원에 계신 건 오직 중앙의 마족들만 알고 있는 일급 기밀입니다. 현재 이 차원으로의 침략, 아니 차원 연결 역시 1마계 마족들만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말입니다.”
분명 암살자 놈이 ‘진짜 이렇게 쉽게 넘어오기가 가능하잖아.’라고 했지. 그렇다면 누구에게서건 차원을 넘어오는 방법이 있다고 들었다는 소리인데.
머리가 빠르게 팽팽 돌아갔다.
어느샌가 쓴 도수 없는 안경 렌즈가 조명을 받아 반짝 빛났다. 쓰윽 손가락으로 안경을 한 번 추켜올린 나는 손을 뻗으며 외쳤다.
“범인은… 1마계에 있어!”
“그 사실을 이 짧은 시간 만에 도출해 내시다니, 역시 폐하세요!”
세탁기 작동 버튼을 누르고 어느새 내 발치에 앉아 있던 애쉬가 살랑거리며 박수를 쳤다.
“제가 했던 말을 그렇게 새로운 걸 알아낸 것처럼 하지 말아 주시죠. 그리고 애쉬, 간신배 짓은 그만둬라. 무엇이 더 폐하를 위하는 길인지 생각하도록.”
세이블이 오랜만에 정색했다. 졸지에 간신배가 된 애쉬가 손뼉을 치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고 입을 비죽였다.
장난도 못 치냐. 이래서 어렸을 때 투X버스 안 보고 자란 애들하고는 대화가 안 돼. 혀를 차며 손을 휘휘 저었다.
“일단 잔당 놈들 놔줘.”
“미끼입니까?”
“좋아, 역시 말귀는 잘 알아듣는군. 고문도 받았겠다, 독기 가득 올라서 반군 합류하겠지. 계속 동태 살피면서 일망타진의 기회를 잡으란 말이야.”
“명을 받들겠습니다.”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고 주먹으로 가슴을 두 번 두드린 세이블이 물러났다. 마법진 너머로 사라지는 세이블을 보다가 참았던 한숨을 토해 냈다.
“내가 이래서 마계가 싫어.”
폭력과 배신만이 난무하는 빌어먹을 세계 같으니. 「런X맨」이야? 통수를 후리지 않으면 시청률이 안 나와?
투덜거리며 털썩 눕자 침대에 팔을 기대고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던 애쉬가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궁금한 게 있어요, 폐하.”
느릿한 목소리가 듣기 좋게 귓가에 울렸다. 말해 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애쉬가 물었다.
“폐하는 정말 단 한 번도 마계를 사랑한 적이 없나요?”
글쎄……. 대답 없이 방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길고 긴, 지독한 악몽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에도 분명 빛나는 순간들은 있었다.
“…사랑하지 않길 바랐지.”
밑바닥에서 구를 때는 증오스러웠지만 그 누구도 오르지 못한 자리에 올라 위에서 세계를 내려다볼 때는 얼마나 찬란했는지. 이제까지의 고난의 보상이 얼마나 달콤했는지.
내 뜻대로 움직여 주는 세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이가 있을까.
하지만 그 세계를 사랑해 버리면, 내 세계는? 내 삶의 목적은?
“내 세계를 위해서라도.”
조용히 덧붙여진 말에 잠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차라리 사랑한 적 없다고 하는 게 덜 잔인했으려나.
“감사해요, 폐하.”
의미 모를 감사 인사를 하는 애쉬의 앞머리를 사락 쓸어 넘겨 주며 물었다.
“뭐가?”
“사랑하긴 했다는 뜻이잖아요.”
애쉬가 눈을 접어 웃었다.
그것은 그 언젠가, 기르카스의 세력에 쫓겨 돌이 가득한 황무지에서 웅크려 노숙했을 때 불편하냐 물으니 혹시 목마르지 않으시냐 말을 돌리며 지었던 그 미소와 똑 닮아 있었다.
* * *
수료증도 나왔겠다, 이제는 헌터 라이선스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차원 연결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어쨌든 게이트 안에 들어가야 했으니 헌터 라이선스는 필수였고, 결과적으로 헌터 등록은 내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물론 내가 귀환자인 것과 EX급인 걸 들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각성자 등록 신고서, 연수원 수료증, 신분증을 가지고 구청 각성자 관리 부서로 향했다. 오늘도 각성자 관리 부서는 사람으로 바글바글했다.
“사업자 단위 과세 등록 신청하러 왔는데요.”
“그건 저희 관할이 아니라서 세무서로 가셔야 해요.”
“8월 3일에 인천국제공항에서 순간 이동 능력 사용하려고요.”
“여기 능력 사용 신고서 작성해 주세요. 지정된 시간에 지정된 좌표로만 순간 이동 가능하세요. 순간 이동 후에 허가증 꼭 보여 주시고요.”
“아니, 지원금이 왜 안 나와요? 헌터 지원금이라며? 지금 사람 차별해?”
“죄송합니다, 지원금 조건은 D급 이하 헌터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와, 이거 완전 역차별이네! C급이랑 D급이 버는 돈 차이가 나면 얼마나 난다고 D급은 되고 C급은 안 된다?”
“죄송합니다, 그게 매뉴얼이라…….”
“죄송하면 다야? 세금은 똑같이 내는데 지원금은 왜 안 줘?”
“거, 아저씨! 아저씨 말마따나 지원금 얼마나 한다고 와서 애꿎은 직원 잡고 있어? 지원금 신청하러 구청 왔다 갔다 할 시간에 게이트 들어가서 돈이나 벌어!”
싸움질 구경 개꿀잼. 끊임없이 서로의 등급과 능력을 물으며 따라 나오라고 소리 지르는 이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내 번호가 디지털 스크린에 떴다.
데스크로 다가가 서류 봉투에서 구비 서류를 꺼내며 말했다.
“헌터 라이선스 발급받으려고요.”
내가 내민 서류를 훑은 직원이 주민등록증을 건네받고는 헌터 라이선스 발급 신청서를 내밀었다. 신청서를 작성하자 작은 기계가 내 앞에 놓였다.
“지문 등록할게요. 여기에 손가락 대 주시겠어요?”
와, 민증 만들 때는 손가락에 잉크 발라서 찍었는데, 세상 참 좋아졌네. 기계 스크린에 손가락을 대며 생각했다.
지문 등록을 마치자 서류와 민증을 돌려주며 직원이 설명했다.
“발급에는 일주일 정도 소요되시고요, 오직 본인 수령만 가능하세요. 등기우편으로 받으시겠어요, 아니면 직접 수령하시겠어요? 참고로 등기우편을 신청하시면 수수료 3,800원이 별도 추가되세요.”
“직접 수령할게요.”
3,800원이면 삼각김밥이 세 개다. 그리고 나한테는 순간 이동 스킬이 있지.
“만약 분실 시 꼭 분실 신고하시고 재발급받아 주세요. 등급이 바뀌거나 새로운 직업군이 열린다면 꼭 재등록 후 헌터 라이선스 재발급을 받아야 하고요.”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주일 후, 다시 각성자 관리 부서를 방문한 내게 직원이 헌터 라이선스를 내밀었다.
[HUNTER LICENSE]
* RN: 356178-013745
* Hunter name: 이채
* Nationality: REPUBLIC OF KOREA
* Rank: A
* Class: 1st 법사계(Wizard) / 2nd 테이머(Tamer)
네이비 배경에 은색 글자로 박힌 글자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이 라이선스 하나 받으려고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을 한 건지. 능력 측정 검사부터 연수원까지의 추억이 머릿속을 쫙 스쳐 지나갔다.
집으로 와 헌터 라이선스를 지갑 카드 칸에 꽂아 넣으며 후련한 감정을 담아 물었다.
“이제 드디어 끝인가?”
“협회 가입 남았네.”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던 아현이가 네일 파츠에 얹힌 티끌을 훅 불며 대꾸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고? 현판 헌터물 등장인물들은 이 지독한 과정을 모두 거쳐 왔던 것인가.
“협회 가입 꼭 해야 해?”
“물론 안 해도 되지. 혜택이나 복지 이런 거 싹 필요 없으면.”
“제발 협회 가입은 서류 필요 없이 5분 컷이라고 말해 줘.”
“인터넷으로도 가입 가능한데 이채현 씨는 직접 방문하셔야 해요.”
“왜?”
날벼락 같은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묻자 아현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협회장이 그렇게 전해 달라는데? 원래 S급만 특별 관리이긴 한데 넌 최초 직업인 테이머라서 그런가?”
음, 확실히 신빙성 있네. 뭐, 별일이야 있겠어? 협회장이 내가 귀환자라는 걸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걸음 한 협회에서 나는…….
“가입 시 직접 방문하라고 전달받았는데 혹시 협회 가입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아,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이채현이요.”
“이채현 씨? 네, 잠시만요. 이쪽으로 따라오시겠어요?”
무려 협회장이랑 독대를 하게 되었다.
영문도 모른 채 직원에게 이끌려 와 협회장실 문 앞에 서 있던 내가 상황 파악이 덜 끝난 얼굴로 눈을 깜빡이자 사무실 방문객 소파에 앉은 김도빈이 손짓했다.
흑마법사에게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이지 잃은 얼굴로 소파 가까이로 다가갔다.
“편히 앉으시죠, 이채현 씨. 아니면 이채 헌터라고 불러 드릴까요?”
“…그냥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볼을 긁적이며 대꾸하자 김도빈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도 몹시 흑막 겸 중간 보스 같았다. ‘그걸 이제 아시다니, 눈치가 꽤 느리시군요?’ 같은 대사를 칠 것 같은.
곧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녹차가 담긴 종이컵이 앞에 놓였다. 문이 닫히자 김도빈이 손깍지를 낀 손을 무릎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제가 왜 독대를 청했는지 아십니까?”
“스카우트? 참고로 주태윤이 계약금 5억 제시했거든요. 그것보다는 올려서 주세요.”
녹차를 홀짝이며 대답하자 김도빈이 고개를 저었다.
스카우트가 아니었다고? 괜히 김칫국만 마셨네. 내 귓불이 다 화끈거렸다. 내 떫은 표정에 피식 웃은 김도빈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한국 헌터의 대표자로서 거래를 제안하려고 불렀습니다, 관리자2님.”
그 말에 난 녹차를 주르륵 내뱉었다. 저, 저 인간, 정체가 뭐야?
“아하하, 제 헌터명은 관리자2가 아니라 이채인데요.”
“그렇게 대답하실 것 같아서 앞서 헌터명도 불러 드렸죠.”
여유로운 표정으로 녹차를 한 모금 들이켠 김도빈이 대꾸했다. 곧바로 ‘시스템 간섭’을 소리 없이 발음해 김도빈의 정보를 불러냈다.
『김도빈』
* 계열 - 법사
* 직업 - 메이지
* 등급 - S
* 칭호 - 관리자1의 계약자
* 스킬 - SSS급(목록 보기), SS급(목록 보기), S급(목록 보기) … F급(목록 보기)
* 스테이터스 - 체력 S, 힘 A, 민첩 A, 지력 S, 정신력 S, 마력 S
“…계약자?”
칭호에 적힌 글자를 읽으며 김도빈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 장르가 성좌물이었어?
“말이 좋아 계약자지, 사실상 심부름꾼입니다. 뭐, 덕분에 협회를 만들고 협회장 자리를 손에 넣었기에 불만은 없지만요.”
내 앞에 앉은 사람의 제일가는 업적이 떠올랐다. 단번에 김도빈을 돈방석에 앉게 해 주고 그의 명성을 드높여 협회를 설립하는 데에 가장 큰 기반이 된 그 업적이.
“…그러면 헌터들의 능력 측정 기술을 알아낸 이유도?”
“예, 관리자가 전해 줬죠. 저는 그걸 그대로 세상에 전달했을 뿐이고. 일찍 각성 등록을 하신 걸 축하합니다, 이채현 씨. 조금만 더 있으면 등급뿐 아니라 직업까지 띄울 수 있는 기술이 완성되거든요.”
큽. 사례가 걸려 콜록, 기침을 내뱉었다. 좋아, 침착하게…….
“저 테이머 맞는데↗요?”
망할, 삑사리 났다. 내 말에 김도빈이 턱을 쓸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상하네, 아직 테이머라는 직업은 세상에 없다고 했는데.”
『마왕 놈아, 이미 다 까발려졌으니까 그냥 협조해요. (-᷅_-᷄)』
『참고로 내가 밝힌 거 아니니까 오해는 말고요? (´~ヾ)』
『나는 그냥 테이머라는 직업이 없다는 말밖에 안 했거든요. (●´⌓`●)』
손을 덜덜 떨어 대는 내가 보기 안쓰러웠던 건지 관리자1이 불쑥 등장했다. 나의 시크릿이 대체 어느 정도까지 까발려진 건데?
그리고 테이머라는 직업이 없다고 밝힌 게 제일 큰일 아니냐? 졸지에 난 각성자 등록 신고를 가짜로 한 게 들통났는데?
“그, 혹시 어디까지 알고 있으신지?”
조심스러운 물음에 김도빈이 등을 소파 등받이로 젖히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들어 올렸다.
“첫째, 이채현 씨가 이 게이트 사태의 원인인 귀환자라는 것. 둘째, 헌터들의 등급을 올리거나 내릴 수 있는 이 차원의 관리자라는 것. 셋째, 지닌 힘이 S급… 혹은 그 이상이라는 것.”
하하, 그냥 중요한 핵심 정보는 다 아는구나.
곧게 펴고 있던 몸을 소파에 편히 기댔다. 내 기세가 변한 걸 느꼈는지 김도빈은 이전의 나처럼 자세를 바로 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김도빈을 뜯어보며 나직하게 경고했다.
“그 ‘거래’에서 당신이 내미는 패와 조건이 부디 내 정체를 가지고 나를 협박하며 휘두르는 것만은 아니길 바라죠.”
만약 그러면 난 당신을 죽여야 할 테니까. 피차 골치 아파지지 말자고.
내 경고에 눈을 나른하게 내리깔며 웃은 김도빈이 손을 내저었다.
“그런 종류는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전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사람이라서요. 남의 약점을 잡고 휘두르는 것도 딱히 취향이 아니고.”
“우와, 의외다. 생긴 건 딱 그런 협박 전문으로 생겼는데.”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마음속 생각에 김도빈이 잠시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소파 팔걸이에 댄 손으로 턱을 괴며 턱을 오만하게 들어 올렸다.
“거래 조건부터 말해 봐요. 일단 들어 보고 결정할 테니까.”
“별 건 아닙니다. 당신이 관리자로서 가지고 있는 그 권한. 그 권한의 제한에 대한 조건입니다.”
등급 조절. 확실히 이 권한이 치트키이기는 했다.
성장 가능성보다는 유선한의 경우처럼 내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등급이 조절되니까.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던 김도빈이 말을 이었다.
“유선한 헌터의 등급이 D급에서 A급으로 올랐을 때 헌터계가 뒤집혔죠. 재각성은 전 세계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케이스였으니까요.”
툭, 툭, 팔걸이를 두드리는 간격이 점차 좁혀졌다.
“어느 생태계든 밸런스가 중요하다는 건 이채현 씨 역시 알고 계시겠죠.”
김도빈이 만들어 낸 피라미드가 홀로그램처럼 허공에 둥둥 떴다. 가장 밑에 깔린, 가장 많은 수의 F급과 가장 꼭대기에 있는, 희귀한 S급.
F급도 내 자비 한 번에 S급으로 오를 수 있었고, S급도 내 변덕 한 번에 F급으로 곤두박질칠 수 있었다. 이 세계의 균형이 내 손 안에 있었다.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였던 내 권한이 갑자기 묵직한 무게로 내게 내려앉았다.
“제가 이채현 씨에게 제안하는 건 단 두 가지입니다.”
피라미드가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한 김도빈이 단호하게 말했다.
“S급과 A급을 늘리지 말 것. 그리고 범죄를 저지른 헌터 이외에는 등급을 다운시키지 말 것.”
“대가는?”
“내게 당신의 정체를 알려 준 이의 신상.”
생각보다 더 쓸모 있고 쇼킹한 대가에 놀랐다.
보통 고발자 신상은 보호해 주지 않나……? 보호를 대가로 정보를 주는 게 거래 기본 아니었어? 이 사람, 그렇게 보긴 했지만 아주 못된 사람이네.
내 신상도 나중에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돼서 털리는 거 아니야? 이런 사람의 뭘 믿고 거래를 하겠어. 신용이 없는데, 신용이.
내 눈빛이 심히 의심스럽다는 듯 날카로워지자 김도빈이 오해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제보자분이 내민 거래 조건은 신상 보호가 아닌 다른 조건이었습니다.”
“아니, 당연히 고발자 신상 보호는 디폴트 아니에요?”
“저는 그저 거래 조건을 지켰을 뿐입니다.”
김도빈이 뻔뻔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왜인지 그 제보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지만 기왕이면 확실한 게 좋기에 신상을 받기로 결론지었다.
딱히 그 권한을 남발할 생각도 없었기에 나쁘진 않은 거래였다. 아니, 오히려 내게 호재지.
“받아들이죠. 거기에 조건 하나 더 추가요. 내 신상이랑 댁이 알고 있는 내 정보 다른 사람에게 유출 금지.”
앞선 이의 실수를 교훈 삼아 조건을 추가했다. 고개를 끄덕인 김도빈이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제가 헌터 신상을 유출했다는 이야기가 밖에서 들려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쪽이 맞불 놓을까 봐 무서워서라도 못 하겠네요. 댁 관상 보니까 죽어도 절대 혼자 죽을 상은 아니거든. 어떻게든 X되게 한 놈 끌고 갈 상이야.”
“용하시네요.”
김도빈이 특유의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웬만하면 이 사람이랑 마주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은근 기 빨린다.
어째서 관리자가 김도빈을 계약자로 정했는지 알 것 같았다. 기X나셈의 표본이었다.
“이제 이야기는 끝났죠? 저 집에 가도 되죠?”
“물론입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이채현 씨.”
부쩍 지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비척 사무실 문으로 걸어가니 등 뒤에서 김도빈이 말을 건넸다.
“한 명쯤은 S급으로 올리셔도 됩니다.”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보자 김도빈이 입꼬리를 올렸다.
“단, 채현 씨가 이 사람은 자격이 있다는 확신이 드신다면. 그게 제가 부탁드릴 조건의 전부입니다.”
대답할 기운도 없어 고개만 끄덕이고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협회 로비까지 나온 후에야 내가 협회에 방문한 용건이 떠올랐다.
다시 협회장실이 있는 층까지 올라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있던 김도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두고 가신 물건이라도 있으십니까?”
“협회 가입 서류 작성하고 가려고요.”
기왕 집 밖으로 나온 거 용건은 모두 마치고 가야지. 나를 보는 김도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표정이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서류를 작성했다. 김도빈 같은 사람들 앞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미친놈 흉내 정도는 내줘야지 만만하게 안 보는 법이거든.
* * *
협회 가입 서류 작성까지 야무지게 마치고 자취방에 도착하자마자 서류 봉투를 열어 본 나는 익숙한 증명사진의 얼굴에 픽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제보자는 바로 천세연이었다. 이로써 천세연이 회귀자라는 사실은 기정사실화가 되었다.
그러면 이제 남은 의문은 왜 그렇게 나를 경계하냐는 건데.
회상해 보면 천세연이 내게 유독 예민하게 반응할 때는 제 오빠가 엮여 있을 때였다.
자, 이제까지 내가 봤던 수많은 회귀물 소설들을 떠올려 보자.
회귀한 여주인공이 경계를 세우는 대상들은 주로 1. 회귀 전에 자기를 죽인 대상, 2. 흑막, 3. 자기 가족을 죽게 만든 대상… 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게는 천우현을 죽일 만한 이유가 없는데? 천세연의 기억이 잘못된 거 아니야?
그러면 두 번째 가설, 내가 전생에 천세연을 죽였다. 하지만 전생에 자기를 죽인 사람을 대한다기에는 너무 안정적인 태도였다.
자고로 전생에 자기를 죽인 사람을 보면 죽기 살기로 달려들거나 얼굴만 봐도 벌벌 떨어야 하거늘, 우리의 회귀자 씨는 그저 껄끄러움이 가득 담긴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쓱 지나갈 뿐.
그러므로 이 가설도 패스.
그러면 마지막 가설, 내가 흑막이다.
흑막의 의미가 세상을 무너뜨릴 무시무시한 계획을 짜고 있는 악당이라면 난 흑막이 아니지만, 만약 그 의미가 게이트 사태를 일으킨 원흉이자 힘을 숨기고 있는 놈이라면 난 흑막이 맞았다.
아니면 내가 진짜 세계를 무너뜨렸을 수도 있겠다. 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의 힘은 충분하니까.
그러면 왜 무너뜨렸냐, 가 문제인데…….
1. 대학원에 끌려갔는데 교수가 졸업을 안 시켜 줬다.
2. 블랙 기업에 취업해서 주 5일 야근을 했는데 일이 남아서 주말에도 출근하기를 반복했다.
3. 배달 음식 배달비 만 원 시대가 도래했다.
4. 사는 게 지루해졌다.
이거 말고는 딱히 세계를 무너뜨릴 이유가 없는데. 애초에 500년간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겨우 돌아온 세계를 내가 무너뜨릴 이유가 있나?
곰곰이 생각하는 도중 폰이 짧게 울렸다.
[천우현 - 채현 씨, 혹시 다음 주에 시간 괜찮나요?] 오후 4:20
[천우현 - 그때 약속한 식사 한번 대접하고 싶은데] 오후 4:21
도착한 문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다는 건 도저히 말이 안 되니 나를 대하는 천세연의 반응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첫 번째 가설, 내가 천우현을 죽였다는 것이 제일 신빙성 있었다.
딱히 내가 죽이지 않았더라도 내가 그 죽음의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고. 후자가 더 신빙성 있어 보이긴 하군.
[아무 때나 괜찮아요]
[어차피 방학이라] 오후 4:25
[우현 씨 편한 시간에 잡으시면 돼요] 오후 4:26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여 문자를 보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게 의미 있던 인연을 내 손으로 끊어 내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 큰 각오가 필요했다.
아쉬워하지 말자. 어차피 차원 이동이 아니었다면 현생에서 엮일지, 아닐지도 몰랐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2년 동안 안 보고도 잘 지내 왔잖아. 이 사람 얼굴 안 보고 산다고 일상생활 불가능한 것도 아니잖아.
[천우현 - 그러면 다음 주 월요일 괜찮으실까요?] 오후 4:30
“…너무 빠르잖아.”
중얼거리며 세운 무릎에 머리를 푹 묻었다. 그저 인연 하나 끊는 것뿐인데 마음이 왜 이렇게 심란한 건지 모르겠다.
* * *
천우현과의 약속 장소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마지막이라고 차려입고 오길 잘했네. 그냥 평소처럼 대충 반팔 티셔츠 하나 걸치고 나왔으면 이 분위기에 쪽팔릴 뻔.
크림파스타를 포크로 돌돌 말며 생각했다. 음식이 맛있어서 더 아쉬웠다. 앞으로 이 식당은 천우현이 생각나서 못 올 것 같았기에.
아, 맞아. 적벽 길드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도 말해 줘야 하는데. 옆머리를 넘기며 슬쩍 운을 떼었다.
“어디로 들어갈지는 결정했어요?”
뭐, 해외로 가지 않는 한 한국에서 천우현 정도의 헌터가 들어갈 만한 곳은 네 군데뿐이지만.
협회, 관리국, 러스터 길드, 적벽 길드.
세상에 정체를 드러낸 S급들의 적절한 배치로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협회에는 수완 좋은 협회장과 S급 힐러가, 관리국에는 공권력이, 러스터 길드에는 재력과 인재가, 적벽 길드에는 무기계 길드라는 네임 밸류가.
각각의 무기를 쥐고 서로를 견제하며 몸집을 불릴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등장한 S급, 천우현은 세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패였다. 특히 협회와 관리국의 견제를 한 몸에 받는 길드에게 있어서는 조커나 다름없겠지.
역시 무기계, 그중에서도 검사가 꽤 우대받는 적벽 길드려나? 민서 언니가 거기 X목질 엄청 심하다고 했는데.
“그냥 프리 헌터로 남기로 했습니다.”
“아, 프리에 들어가… 네?”
예상외의 말에 당황하여 샐러드에 두고 있던 시선을 올렸다.
“계약금이 다 시원찮았어요? 아니면 아무 곳에서도 제안을 안 했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 나중에 천우현 씨 길드라도 만드시게요?”
따발총같이 쏟아지는 내 물음에 천우현이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협회장과 독대를 했는데 그가 그러더군요. 자신은 현재의 균형이 깨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고. 제가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만으로도 판도는 흔들릴 것이라고.”
김도빈 그 인간은 균형광공이야, 뭐야?
“그래서 아무 곳도 들어가지 말래요? 프리 헌터들 대우가 어떤지 알면서 그런대요?”
프리 헌터가 게이트에 들어가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솔플을 하거나, 파티를 결성하거나, 용병 개념처럼 의뢰를 받아 길드 혹은 협회의 공대와 함께 들어가거나.
하지만 일시적 모임인 파티는 법의 보호를 못 받았고, 프리 헌터들은 길드에게 번번이 갑질당하곤 했다. 수익도 프리랜서들이 다 그렇듯 들쑥날쑥하였다.
특히 천우현이 프리 헌터로 나선다면 러스터 길드와 적벽 길드는 절대로 천우현이 게이트를 이용해 인맥을 쌓고 명성을 올리도록 두지 않을 게 자명했다.
프리 헌터로 활동하며 인맥을 쌓아 길드를 만드는 건 흔한 루트였으니. 랭킹 1위가 세운 길드로 헌터들이 몰릴 건 당연하잖아.
그래서 김도빈의 제안이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균형이 어쨌든 고생하는 건 천우현뿐이었으니.
“협회에서 뒤를 봐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길드의 방해를 막고 의뢰 또한 꾸준히 물어다 준다고 하더군요. 태풍의 눈이 되고 싶지도 않고 딱히 나쁜 조건도 아니니 수락했습니다.”
“세연이는 괜찮대요? 그 애 혼자 길드 들어갈 리는 없을 거 같은데.”
“네, 제가 적벽 길드 들어간다는 건 그렇게 반대하더니, 이건 괜찮다네요.”
천세연이 김도빈과 내 비밀을 패로 거래한 게 바로 이거였구나.
적벽 길드 정도는 천우현이 들어가도 판도가 그리 거세게 흔들리진 않았을 것이다. 약간 불안정한 위치였던 적벽 길드가 그 4파전에 우뚝 서는 정도가 됐겠지.
하지만 협회장이 굳이 이리 좋은 조건까지 걸며 프리 헌터로 남아 달라 한 것은 역시 거래가 끼었다고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
뭐, 이제 내가 걱정할 일은 없겠네.
“채현 씨는 어디로 들어가실 생각이세요? 스카우트 제안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은데.”
“글쎄요, 적벽 길드는 어쩌다가 길드장 눈 밖에 나서 절대 입사는 못 할 것 같고, 러스터 길드는 거기 길드장이 마음에 안 들고, 협회랑 관리국은 제가 입사하면 친구가 상사가 돼서…….”
어디 귀환자들 모아서 파티라도 만들어 게이트 안에 들어가야 하나? 이름은 ‘우리가 싼 똥 우리가 치우기’ 파티.
어쨌든 차원 연결을 끊으려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긴 해야 하니까.
음식은 어느새 빈 접시가 되었고, 디저트가 예쁜 그릇에 담겨 나왔다.
셔벗을 느리게 퍼먹으며 어떤 말로 서두를 떼야 앞에 있는 이가 덜 상처받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상처 입는 이 없이 인연을 끊는 방법 따위는 없었다.
마침내 빈 셔벗 그릇에 티스푼을 탁 내려놓으며 천우현과 눈을 마주했다.
“우현 씨, 앞으로는 연락 안 해 주셨으면 해요.”
내 입에서 나온 차가운 말에 천우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채현 씨……? 갑자기 그게 무슨―”
“우리가 만나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고요.”
천우현의 말을 자르고 단호하게 말했다. 흔들리는 눈동자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저 눈동자에 빛이 꺼진 모습을 상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마왕과 용사로도 모자라서 옆에 있으면 죽는 운명이라니, 운명 한번 더럽게 얄궂네.
“거기에서는 고마웠어요. 우현 씨 덕분에 그 답답한 곳에서도 숨통이 트였거든요.”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조금 솔직해지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한숨처럼 작게 웃음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먼저 일어나 볼게요.”
이젠 순전한 우연으로 마주하는 것 말고는 볼 일이 없겠지. 노을이 지면 가끔 당신이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계산서를 몰래 챙기고 레스토랑 출구로 향했다. 코너를 돌 때 천우현의 모습이 살짝 보였다. 그는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계산이요.”
종업원에게 내 카드와 계산서를 내밀었다. 계산을 마치고 레스토랑 문을 여니 내 기분을 대변하듯 노을빛 하늘에서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 비 오네…….’
우산 안 챙겨 왔는데.
예고 없는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나처럼 우산을 챙기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냥 곧바로 빗줄기 사이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장대비가 내 몸 위에 내려앉았다.
기껏 차려입고 나온 오프숄더 블라우스가 빗물을 머금고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택시 앱을 켜다가 멈칫했다. 몸이 이렇게 젖어서 택시라도 탈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휴대폰 화면 역시 빗물로 엉망이었다.
그냥 걸을까. 비가 그칠 때까지.
머리를 가리고 황급히 뛰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천천히 걸었다.
무슨 청승 떠는 드라마 여주인공도 아니고. 인연 하나 끊어 냈다고 이러는 내 꼴이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언제나 노을 지는 때에 헤어졌는데 하필 마지막 작별도 노을 지는 하늘이네.
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다급히 내 팔을 붙잡아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얼마나 급히 달려온 건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이유라도.”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흐릿하게 들려왔다.
“이유라도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몸을 돌리자 비에 젖은 처연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가 선명히 보였다.
“…울어요?”
빗물은 차가운데 천우현의 볼에 닿은 내 손끝은 따뜻했다. 빗물과 눈물이 섞여 엉망이 된 얼굴을 마주했다.
“왜 울고 그래요. 이러면 내가 아까처럼 매정하게 두고 못 가잖아.”
노을과 소나기 아래로 씁쓸한 웃음을 내뱉었다.
“제가 혹시 채현 씨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아니면…….”
“우현 씨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문제지.”
어떤 형태로든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갈 내가.
그러니 기뻐해. 이건 당신이 제일 아끼는 당신 동생이 무엇보다도 원하는 결말일 테니.
“그게 무슨 문제든 상관없습니다.”
천우현이 눈물 젖은 얼굴로 웃었다. 그 대답에 까득, 이가 갈렸다. 내가 어떤 각오로 그 말을 하고 나온 건지도 모르면서. 뭐가 상관이 없다는 건데.
“오늘의 선택으로 당신이 죽는다고 해도? 나 때문에 당신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을 할 수 있어?”
“서른세 번.”
나직한 목소리가 귓전에 꽂혀 왔다.
“무려 서른세 번의 죽음을 겪었습니다. 죽는 게 뭐가 무섭겠습니까.”
“이봐요, 천우현 씨. 이번엔 천신의 가호 따위 없어요. 당신 여기서 죽으면 진짜 죽는다고!”
비에 젖어 이마에 축 눌어붙은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어느새 눈물을 그친 천우현이 쓰게 웃었다.
“이번엔 제가 채현 씨에게 묻고 싶네요. 왜 당신 때문에 제가 죽을 거라고 확신하시죠?”
“그렇게 나를 경계하던 당신 동생에게 물어봐요. 회귀자잖아, 당신 동생.”
내 입에서 나온 날카로운 말에 천우현이 잠시간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잠시간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던 천우현이 한결 단단해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이 결정이 채현 씨를 위한 거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위한 거라면…….”
“…….”
“그러지 마십시오, 제발.”
잠시간의 침묵 끝에 덧붙여진 말은 거의 애절한 속삭임이었다.
“…왜요?”
“전 채현 씨와 계속 인연을 이어 가고 싶으니까요.”
여름비가 쏟아지는 노을 아래, 고백 같은 말을 하며 남자는 떨리는 눈을 하고는 웃었다.
술렁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에는 기필코 그린 라이트라고 착각하지 않으리라.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요.”
“후회할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반쯤 포기한 내 말에 천우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탓도 하지 말고.”
“그건 더더욱 일어날 일 없겠네요. 제 선택이잖습니까.”
말이 쉽지. 막상 그런 상황이 닥쳐오면 원망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돌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난 저 말을 믿지 않는다. 믿음보다 의심이 더 안전하니까.
“편의점에서 우산이라도 사 올까요?”
“됐어요.”
그냥 비 맞고 싶어서 놔둔 거니까. 발끝으로 젖은 땅을 한 번 툭, 쳤다. 발밑에 고인 물웅덩이가 철벅거렸다.
『스킬 ‘날씨 조종(L)’을 실행합니다.』
『날씨 선택 - 맑음』
소나기가 차츰 잦아들었다. 젖은 몸에 찬 기운이 훅 올라왔다. 온몸에 닿아 오는 축축한 느낌에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내젓자 뜨거운 바람이 나와 천우현을 훅 훑고 지나갔다.
어느새 보송보송해진 몸에 천우현이 잠시간 놀란 표정으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채현 씨가 계산해 버리셔서… 다음번엔 정말로 제가 대접할 수 있게 해 주시겠습니까?”
자연스럽게 다음을 기약하는 천우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젠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하늘을 붉게 물들였던 노을이 물러가고 짙은 밤하늘의 어둠이 그 자리를 채웠다. 노을 밑에서 하지 않은 최초의 작별이었다.
* * *
[천우현 - 혹시 감기 걸리진 않으셨죠, 채현 씨?] 오전 9:30
“아이씨, 이래도 되나…….”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꼭 그게 된 느낌이다. 그 뭐냐, 인간이랑 함께 사는 곰.
자기를 죽일 거라고 의심조차 안 하는 해맑은 인간을 앞에 두고 무의식적으로 휘두른 앞발에 인간이 꽥 죽어 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곰 말이다.
난 널 죽일 수 있는 시나몬롤이라고 하기엔 내가 시나몬롤처럼 안 생겼다.
“죽이나 먹을까.”
전날 비 좀 맞았다고 내가 감기 걸리는 일은 당연히 없었고 그냥 죽이 당겼다.
편의점에 가기 위해 하품하며 자취방 문을 열고 계단으로 나가자 막 내려오는 이재의와 딱 마주쳤다.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지 손에는 가득 찬 종량제 봉투가 들려 있었다.
니넨 뭐가 더 설렐 것 같음? 옆집 남자가~ 썰 1번의 현실화 아니냐. 언제나 머리 올리고 슈트 차려입고 다니다가 흰티+추리닝 바지+부스스한 생머리 차림으로 마주친 옆집 남자.
물론 이재의는 윗집 남자였지만.
그런데 왜 화요일 아침에 집에 있는 거지? 관리국에서 이재의 정도의 인재를 내쳤을 리는 없고.
“사표……?”
“연차입니다. 윰서 씨도 아침에 똑같은 말을 하시더니…….”
한숨을 내쉰 이재의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쓰레기 버리러 가세요?”
“예, 그리고 제가 몇 번 봤는데 이채현 씨가 불법 쓰레기 투기 현장에 작은 쓰레기 하나씩 던져 놓고 가시더라고요. 과태료는 그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머쓱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그건 또 언제 봤대?
계단을 내려가 이재의는 쓰레기장으로, 나는 편의점으로 각각 걸음을 옮겼다.
분명 죽을 먹기 위해서 편의점에 왔는데 막상 편의점에 오니 수많은 음식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컵라면이랑 컵밥은 연수원에서 질릴 정도로 먹었으므로 패스, 편의점 김밥이랑 도시락은 맛없으니까 패스.
닭죽과 즉석조리 스파게티를 사 가지고 나오는 길, 골목길 안에 게이트가 열려 있는 걸 발견했다. 게이트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건지 앞에 출입을 금하는 그 무엇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면 들어가서 차원 근거지인지 확인해 볼까? 이제 나는 헌터 라이선스도 발급된 정식 헌터니까.
『E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들어가자마자 너구리 굴을 방불케 하는 현장에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휘저었다.
성냥팔이 소녀마냥 발광 아티팩트 하나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고삐리들의 탈선 장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나라가 디비진다.
“야, 진짜 여기까지 몬스터 안 나오는 거 맞지?”
“확실하다니까. 나 못 믿냐?”
“X발, 믿을 게 없어서 7등급 빡대가리 새끼 말을 믿겠냐. 정보 출처가 정확히 어딘데? 느그 형 게이트 한 번 못 들어가고 군대 갔잖아.”
“지식in, X발롬아.”
참지 못하고 기침을 내뱉자 미어캣처럼 일제히 양아치 놈들의 고개가 내 쪽을 향했다.
“아, X됐다. 교복 보고 학교에 우리 찌르면 어떡함?”
“그냥 다구리 까.”
“헌터면 어쩌려고. 우리가 역으로 처맞을 듯. 조폭이 헌터에게 처맞은 뉴스 못 봤냐.”
“아, 걱정하지 말라니까. 다 방법이 있다고.”
한 놈이 쭈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더니 건들건들 내게로 다가왔다.
“야, 나 B급 헌터거든? 그러니까 신경 끄고 꺼…….”
헌터증을 척 내밀던 그놈은 내 얼굴을 보고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캐, 캐롯?”
“아, 개쫄았네. 니는 X발, 캐롯마켓 거래를 이딴 곳에서 잡냐? 하여간 개념 없는 새끼.”
“아니, 그게 아니고!”
내 발광 아티팩트를 켜고 불빛 앞에 드러난 안면 있는 얼굴에 씩 웃으며 뻗은 채로 굳은 팔에서 헌터 라이선스를 탁 낚아챘다.
“아, 이게 군대 갔다는 너희 형 헌터증이야?”
“아, 누나. 한 번만 넘어가 주세요. 민원 들어오면 학주 또 X나 지랄한단 말이에요.”
뒷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내게 장물을 판매하려고 했던 캐롯 거래 고딩이 애원했다.
“너희들이 너희 의지로 자기 수명 줄인다는 데 내가 뭐라고 간섭을 하겠니.”
양아치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하지만 희망과 기대를 무너뜨리는 건 나의 몇 안 되는 즐거움이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그런데 얘들아, 일반인이 게이트 들어가면 과태료 300만 원인 건 아니?”
“아, 말도 안 돼! 진짜 그걸로 찌르게요?”
그럼 니들이 교복 입고 게이트 안에서 이 짓거리 하는 건 말이 되고?
“아오씨, 별 X발련이 다―”
“야, 저 사람 몰라? 최초 테이머잖아! A급! 니 진짜 뒤져!”
표정을 구긴 남자애 하나가 침을 찍 뱉고는 위협적으로 내게 다가오다가 옆에서 만류하는 친구의 속삭임에 즉시 태도가 공손하게 변했다.
“누님, 넓은 아량을 베풀어 한 번만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저 진짜 이번에 걸리면 아버지한테 맞아 죽는데요.”
강약약강의 자세가 참 바람직하구나, 아가야.
하지만 내가 여기서 그냥 물러가면 이 녀석들은 또 게이트 안에 들어와서 이 짓을 반복할 것이 뻔했기에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심했다.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얘들아, 뒤 좀 봐봐.”
툭, 바닥에 끈적하고 투명한 액체가 떨어졌다. 바닥뿐 아니라 양아치들의 어깨, 그리고 머리까지.
머리 위에 드리우는 그림자와 등 뒤를 덮쳐 오는 위압감, 그리고 내 말에 양아치들은 공포영화 등장인물처럼 덜덜 떨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거대한 몬스터가 입을 쩍, 벌렸다.
“으아아아악!”
“엄마야아아아!”
“살려 주세요!”
제각각의 비명을 지르면서 발이 안 보일 정도의 빠른 속도로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고딩 양아치들의 뒷모습을 보며 뿌듯한 얼굴로 웃으며 마계에서 랜덤으로 데려온 마수를 역소환했다.
『게이트 클리어!』
『아니, 양보 좀 하시라니까… 이제 말하기도 질리네.』
보스몹을 잡고 던전의 핵까지 깔끔하게 박살 내자 또 나를 타박하는 상태창이 떴다. 익숙해져서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클리어까지 정확히 2분 걸렸다. E급 게이트는 2분 컷.
던전 이곳저곳에 박힌 광물을 떼어 내고 몬스터 시체를 급속 냉동해 인벤토리 안으로 던져 넣으며 다시 게이트로 향했다.
인스턴트 죽과 스파게티가 담긴 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게이트 밖으로 나오니…….
“학생들이 학교는 안 가고 게이트 안에서 뭐 하는 짓입니까? 지금 이게 잘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제게 큰 소리를 치신 겁니까?”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양아치들과 그 앞에서 양아치들을 훈계하는 이재의의 모습이 보였다.
슬금슬금 이재의의 눈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나를 발견한 양아치 놈 하나가 나 들으란 듯 투덜거렸다.
“저 누나는 게이트 닫지도 않고 바로 나올 거면 대체 왜 들어온 건데?”
그 말에 이재의가 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타이밍 한번 더럽게 좋게도 게이트가 스르륵 소멸했다.
“저분이 언제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습니까?”
“5분 됐나? 5분 덜 된 거 같은데. 헐, 아까 한 말 취소요. 능력 짱이다.”
양아치의 솔직한 답변에 이재의의 눈이 빛났다. 인재를 찾았다는 그 눈빛을 보며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죄송한데 전 철밥통 생각 없는데요.
* * *
“세연아,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제 오빠의 무거운 목소리에 천세연은 읽고 있던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묘하게 어둡게 내려앉은 천우현의 표정에 세연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어디 아ㅍ―”
“너… 회귀자야?”
어렵사리 꺼낸 질문에 천세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설마 협회장이 말해 줬어?”
천우현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천세연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마침 잘됐네. 오빠가 내 말을 헛소리로 치부할까 봐 못 밝히고 있었는데, 나 회귀자 맞아.”
천우현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내가 그렇게 믿음직스럽지 못한 오빠였나.
“오빠가 적벽 길드 들어가서 그 미친 간부 놈들 갑질로 맘고생 몸 고생 엄청 했고, 그래서 내가 이번에는 오빠 편하라고 협회장에게 미래의 정보로 딜을 건 거야.”
제 오빠의 속도 모르고 천세연이 짐 하나를 덜어낸 표정으로 밝게 웃었다.
“그러니까 협회장이 내건 조건 너무 수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그럼 협회장만이 알아야 할 제 동생의 정체를 어째서 채현 씨까지 알고 있는 건가. 협회장이 정보를 유출한 건지, 아니면 채현 씨가 자력으로 동생의 정체를 알아낸 건지.
아직 제 눈에는 어리고 미숙하여 지켜 줘야 할 동생이었다.
“…오빠한테 빨리 말을 하지 그랬어.”
“시간 거슬러 돌아왔다고 하면 누가 들어도 이상하잖아.”
천세연이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이 점차 사라지고 어두운 낯빛을 한 세연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리고 오빠, 나 회귀 전에 오빠를 죽인 사람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