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판타지 vs 무협 (12/33)

12. 판타지 vs 무협

원래는 적벽 길드 소유의 삼척 A급 게이트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마침 운 좋게 실전일 바로 전날 서울에 A급 게이트가 터져 그곳으로 실습 게이트가 바뀌었다.

삼척 A급 게이트에 몬스터가 거의 남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유례없는 꿀 게이트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우리는 한순간에 유례없는 헬 게이트에 들어가는 입장으로 바뀌어 버렸다.

“자, 마지막으로 주의 사항 말씀드리겠습니다.”

훈련생들을 태운 관광버스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임 조교가 다시 주의 사항을 줄줄 읊었다.

B급 게이트까지만 해도 소풍 분위기가 낭랑했다면 지금은 전쟁 최전선으로 걸어 들어가는 분위기였다.

마침내 버스가 A급 게이트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훈련생들은 게이트 앞에 이미 도착해 있는 협회 공대와 적벽 길드 공대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렁찬 목소리의 인사가 끝나자 후배들을 향한 격려의 박수가 쏟아졌다. 참 훈훈한 광경이었다.

연수원 19기 50명이 조교단, 협회 공대, 적벽 길드 공대와 함께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게이트에 입장했다.

『A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이제까지 너무 많이 봐 와서 감흥 없는 문장을 손을 휘휘 내저어 치우고는 목에 걸린 발광 아티팩트를 켰다.

수많은 아티팩트의 빛에 던전이 바깥처럼 환하게 밝혀졌다.

“A급 게이트 안 몬스터의 등급은 모두 1급에서 3급 사이입니다. 항상 주변 경계를 놓치지 마시고 옆 사람이 잘 있나 수시로 체크 바랍니다.”

협회 공대장이 덤덤한 목소리로 경고와 충고를 던졌다.

긴장 가득한 분위기 속, 레이드 팀이 던전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도 몬스터가 코빼기도 비치지 않자 협회 공대와 조교단, 적벽 길드가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한데요.”

“그러게 검증된 데로 데리고 가자니까…….”

“하도 훈련 점수가 안 좋다 보니 실전 점수에서라도 만회해야 하니까 그렇죠.”

“모르겠다. 이거 영 느낌이 그래.”

물론 그 수군거림은 새내기 헌터들에게 불안감만을 가중시켜 줄 뿐이었다.

그때, 밟고 있던 땅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무언가가 스카이콩콩이라도 탄 듯 던전 안쪽에서 콩, 콩 뛰어오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더니 빛이 비치는 곳까지 나왔을 때는 눈으로 쉬이 좇을 수 없는 속도로 가장 앞에 있는 훈련생에게로 달려들었다.

“강시……?”

아니, 이제 하다 하다 강시가 있는 차원도 있어? 무서운 힘으로 훈련생의 목을 조르는 강시를 거칠게 떼어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앞으로 쭉 뻗은 팔, 뻣뻣하게 굳은 몸과 무시무시한 힘. 이마에 부적만 안 붙어 있는 걸 제외하면 대중매체에서 보던 그 강시가 맞았다.

뻣뻣한 몸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자마자 다시 벌떡 몸을 일으킨 강시가 이번에는 다른 훈련생에게로 훌쩍 뛰어 그를 덮쳤다.

“으, 으아아아악!”

목을 물어뜯긴 이가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물어뜯긴 부분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베테랑 헌터들이 급하게 달려와 강시를 떼어 내고 지혈 후 포션을 붓고 힐을 걸었다.

다행히 숨이 끊기지는 않은 듯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붙잡힌 강시의 입 부분은 피범벅이었다. 흐으, 어디에선가 두려움을 담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람의 것에서 한참을 벗어난 초월적인 힘으로 저를 붙잡은 이들을 털어 내고 곧바로 다른 헌터를 향해 달려든 강시의 팔에 검날이 내리쳐졌지만 오히려 검이 튕겨 나갔다.

“비켜!”

대검을 쥔 이가 부웅, 검을 휘둘렀다. 강시의 몸이 반쯤 패이더니 툭 쓰러졌다.

“와, 이 정도 공격에도 반 토막이 안 나다니, 대체 얼마나 단단한 거야?”

강시를 베어 낸 여자가 질린 표정으로 쓰러진 강시를 발끝으로 툭툭, 치더니 대검을 연신 콱콱, 내리쳐 강시를 완전히 반 토막 냈다.

쿵, 쿵, 쿵.

안쪽에서부터 땅이 울려왔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던전 안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빨리 부상자 데리고 나가!”

임 조교의 외침에 조교 두 명이 급히 부상자를 부축해 게이트로 향했다.

부상자와 조교들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어둠 속에서 인영(人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수많은 강시 무리가 우리의 앞에 나타났다. 공대원들과 조교들이 거친 손길로 우리를 뒤로 보냈다.

“이런 미친! 죄다 2급이야!”

“흩어지지 마! 훈련생들 보호해!”

“강시 퇴치법 아는 사람 없어?”

“햇빛에 태우거나 이마에 부적을 붙이면…….”

“햇빛이랑 부적이 지금 어디 있냐고!”

거친 말들이 오가는 동안 쿵, 쿵 뛰어 우리를 포위하듯 둘러싼 강시들은 점차 간격을 좁혀 왔다.

“게이트 쪽만 뚫고 훈련생들 우선으로 빠져나간다. 후방에서 최대한 버텨.”

“X발, 이런 말은 없었잖아! 누가 미끼로 지원했냐고!”

“이럴 줄 예상 못 했나?”

“그래, 못 했다, 새끼야! 너나 후방 맡으세요, 난 이 X 같은 게이트에서 나갈 테니까!”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국에 베테랑 헌터들 무리에는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자기는 절대 희생 못 한다고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적벽 길드 공대원들에게 동조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자 이 중 생존율이 가장 낮은 무리인 훈련생들의 얼굴에 하나둘 두려움이 감돌았다.

우르릉, 갑작스럽게 던전이 흔들렸다.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물러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바위에 강시들이 흩어졌다. 탈출구가 확보되자 공대원들과 조교들이 게이트 쪽으로 훈련생들을 떠밀었다.

저 멀리 게이트 쪽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게이트가 안 열린답니다!”

“빌어먹을……! 일단 그래도 게이트 앞으로 가!”

먼지구름에 시야가 흐릿해진 틈을 타 빠르게 안쪽으로 달려 나갔다.

이미 대열과 집중력은 흐트러졌고, 이대로 가다간 전멸이다. 그전에 이 빌어먹을 게이트를 한시라도 빨리 닫아야 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내 등 뒤로 벽이 무너지며 경계가 생겼다. 벽 너머의 강시들은 아마 베테랑 헌터들이 잘 처리해 줄 것이다.

‘역시 A급 게이트에서 무슨 일이 생길 거 같았어.’

어쩜 이리도 클리셰를 벗어나지를 않니.

보스룸을 향해 던전 안쪽으로 걸어가다가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곧바로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콰가가강―!

벽을 긁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슬쩍 고개를 빼서 던전 안쪽까지 굳이 들어온 이의 정체를 확인했다.

‘류사현?’

검을 쥐고는 희열 어린 웃음을 얼굴에 건 채로 강시들을 도륙하는 이는 바로 중2병 1호선 광인 류사현이었다.

촤악,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대검으로 몇십 번을 내리쳐야 겨우 토막 나던 강시들이 뚝뚝 잘려 바닥으로 투툭 떨어졌다. 거의 양민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검격은 이전에 날린 그 미약한 검격과는 수준이 달랐다. 역시 저 새끼, 힘숨찐이었어.

저게 어떻게 C급이란 말인가.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시스템 간섭을 하려는 순간, 웬 사람이 내게 달려들었다.

죽은 자 특유의 눈이었고 몸에 생명력이라고는 한 톨 보이지 않았지만 강시라기에는 움직임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웠고 팔 역시 앞으로 뻗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등급은…….

‘1급이라.’

대체 뭐지? 좀비? 좀비가 이렇게 속도가 빠르나? 생각에 빠져 있자 묵직한 힘을 실은 주먹이 내게 날아왔다. 그냥 주먹이 아닌 틀림없는 권법이었다.

살아 있는 그 시체는 소리 없이 마기에 짓눌려 으스러졌다.

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저를 덮쳐 오는 시체의 검을 막은 류사현에게서 나왔다.

“이건 혈강시인가.”

혈강시. 무협 소설에서 강시술을 쓰는 무력 집단 혈교에서 만들어 낸 강시로, 고수들을 강시로 만들어 살아생전의 무력을 지닌,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강시.

갑자기 무협으로 드리프트한 장르에 당황했다. 아무리 내 장르가 지금 퓨전 판타지라고 해도 현판에, 판소만으로도 설정 과다인데, 여기에 무협까지 끼면 너무 투머치 아닌가?

“상대하기 귀찮긴 하지만 돌파법은 간단하지.”

까드드득, 검날이 맞물리며 팽팽한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짧게 휘둘러 대치를 끊어 낸 류사현의 검이 곧바로 혈강시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깔끔한 베어 내기에 혈강시의 머리가 툭 떨어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몸뚱어리와 머리를 짓밟고 앞으로 나아간 류사현이 손을 뻗어 벽 뒤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잡힌 머리채가 아니었으면 저걸 사람으로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피부가 흉측하게 녹고 눈꺼풀이 뜯겨 사람의 형체를 잃은 이가 류사현의 거친 손길에 질질 끌려 나왔다.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것마냥 휙 바닥에 그것을 집어 던진 류사현이 씩 웃었다. 검이 높게 치켜들어졌다.

“술사를 죽이면 되니.”

콱, 검이 잔뜩 일그러진 형상을 한 사람의 몸을 급소를 피해 꿰뚫었다. 꽤나 악취미였다.

“본좌를 끊임없이 귀찮게 하던 버러지 같은 혈교 놈들이 이곳까지 따라왔군. 차원을 넘는 데에 차암 힘이 들었던 모양이야. 어느 누가 이제 네놈을 사람으로 보겠나.”

허리를 편 류사현은 무심히 검을 뽑았다.

“아하하하하! 마침 지루한 터였는데 잘됐구나!”

즐거워 죽겠다는 웃음소리가 던전 안을 울렸다. 웃음을 뚝 그친 류사현이 턱을 쓰다듬으며 흥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하긴, 혈교 놈들이 사람인 적이 있었냐마는. 언제나 피와 힘을 갈구하는 버러지였지.”

으, 말투 왜 저래? 그리고 본좌? 보오온좌아? 지금 본인보고 본좌라고 칭한 거야?

내가 질색하든 말든 류사현은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그의 앞을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어가는 이의 뒤를 가벼운 발걸음으로 쫓았다.

꿈틀거리는 붉은 몸체에 다시 한번 검이 꽂혔다. 온몸을 뒤틀던 술사가 잔뜩 갈라져 쉬어 빠진 목소리로 외쳤다.

“…교…주께서 네놈을… 죽…이라고… 명하셨…다… 천마……!”

뭐라고? 내가 잘못 들었나?

귀에 들려온 이상한 단어에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고 있는데 혈강시 하나가 내 뒤를 덮쳐 왔다.

퍼억,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려 날린 내 주먹에 후려 맞은 혈강시가 날아가 류사현의 발치에 철퍽 떨어졌다.

갈비뼈가 박살 나 제 발치에서 꿈틀거리는 혈강시를 내려다보던 류사현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멈춘 시선 끝에 있는 건 바로 나였다.

나와 류사현은 잠시간 대치 상태로 마주했다. 그러니까 난 류사현이 이곳에 있을 줄 몰랐고 류사현 역시 내가 이곳에 있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시스템 간섭.’

『시스템에 접근합니다.』

『관리자 ‘이채현’ 님 확인되었습니다.』

곧바로 스카우터를 통해 류사현을 바라보았다.

『류사현』

* 특성 - 귀환자

* 계열 - 검사

* 직업 - 천마

* 등급 - S

* 스킬 - SSS급(목록 보기), SS급(목록 보기) … F급(목록 보기)

* 스테이터스 - 체력 S, 힘 S, 민첩 S, 지력 B, 정신력 A, 마력 SS(내공)

직업에 버젓이 써진 ‘천마’ 두 글자를 보고 잠시 뇌가 정지했다. 이 1호선 광인 놈, 컨셉충이 아니고 진짜 천마였다. 심지어 S급.

어째 앉아 있던 모습이 딱 동양풍 폭군 같은 자세더니만, 동양풍 판타지 세계관에서 건너오신 귀환자셨다. 진작 등급 확인해 볼걸.

무슨 소리 안 들려요? 검사 떡상하는 소리. S급에 점점 검사 비중이 늘고 있으니 떡상 가능성은 충분했다.

딱 봐도 정상이 아닌 눈깔에 어색하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류사현이 의도치 않게 천밍아웃을 했다고 나까지 마밍아웃을 할 필요는 없었다.

“수고하세요. 그럼 전 이만 다른 길을 찾아서…….”

“이런, 어딜 가신다는 건지.”

지그시 나를 보고 있던 류사현이 입을 열었다. 입꼬리가 스산하게 호선을 그렸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든 채로 내게로 한 발짝, 한 발짝씩 다가온 류사현이 나를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기세가 묵직하게 나를 찍어눌렀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들으셨을까?”

“혈강시부터 천마까지.”

내가 진짜로 대답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이 잠시간 류사현의 얼굴에 스쳐 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를 보는 표정이 흥미로 물들었다.

“그쪽, 귀환자 맞죠?”

내 물음에 류사현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귀환자 맞습니다. 이곳까지 돌아오는 데에 아주 오랜 시간과 노력이 걸렸죠. 차원을 연다는 저 버러지 같은 혈교 놈들에게 속고 또 속아 가며 말입니다!”

미친놈처럼 허리를 꺾어 가며 광소를 터트린 류사현이 제 발치에 널브러진 술사의 몸에 검을 마구잡이로 푹푹, 꽂아 넣었다.

술사가 피를 줄줄 흘리는 몸을 뒹굴며 비명을 질러 댔다. 귀가 따가울 정도의 비명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 오랜 시간이 500년 안 넘으면 뒤진다. 혈교가 6지부 이하면 뒤진다, 진짜. 어디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고 난리야?

심히 띠꺼운 눈으로 류사현을 바라보고 있자 웃음을 뚝 멈춘 류사현이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천천히 제 입가를 쓸어내렸다.

“이채현 씨도 알다시피 귀환자 여론과 대우가 영 안 좋지 않습니까?”

그의 말대로였다.

며칠 전 영국 출신 귀환자가 분명히 혁명이 성공했는데 왜 아직도 왕이 존재하냐며 현실과 귀환 전 세계를 분리하지 못하고 여왕 시해를 시도하여 귀환자들이 시한폭탄 취급을 받는 데에 한몫했다.

게다가 광신교들은 여전히 게이트 사태를 끝내기 위해서는 귀환자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귀환자로 밝혀진 이들에게 끊임없이 암살과 테러 시도를 해 대는 중이었다.

귀환자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도 끊임없는 위협과 협박에 고통받았다. 공식적인 첫 번째 귀환자인 사무엘 르웬의 형은 광신도 단체 레벨레이션의 테러로 인해 사망했다.

내가 절대로 귀환자임을 들켜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게, 왜 사무엘 르웬인가 노답인가는 그런 발표를 해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류사현이 피에 젖은 검날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내공까지 틀어막아 가며 등급도 C급으로 받아 냈던 거고요.”

내가 관리자 권한으로 검사 결과에서 A급을 받았다면 이놈은 제 내공을 틀어막아 C급을 받았단 소리였다.

류사현과 같은 놈이 한둘이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나도 등급을 속였고 류사현도 등급을 속였는데 다른 놈이라고 등급을 속이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저 입 무겁거든요.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로 할게요.”

“그러니…….”

기척도, 예고도 없이 검이 훅 찔러 들어왔다. 아주 찰나의 차이로 내 심장을 뚫지 못하고 스쳐 간 검날이 섬칫했다.

“이만 죽어 줘야겠어. 가장 무거운 건 죽은 사람의 입이거든.”

살기가 담긴 목소리가 속삭여졌다.

제가 찌른 것이 내 몸이 아닌 허공임을 깨닫고 수려한 미간을 찌푸린 류사현이 이번에는 내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휘휙. 휙. 휙피. 피했지롱.

큰 동작도 필요 없이 슬쩍 몸을 뒤로 젖혀 검끝을 피하자 류사현의 얼굴에 사나운 미소가 걸렸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

“한 번은 우연이지만 두 번은 아니지!”

허공섭물로 띄운 바위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공중에 던져진 바위를 사뿐히 밟고 위로 오른 재주를 보인 류사현이 힘껏 뛰어올라 허공에서 검을 횡으로 강하게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격이 바닥을 긁고 벽을 파헤쳤다. 동시에 바위가 내 머리 위로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쏟아지는 바위의 비를 피하며 외쳤다.

“저기요, 우리 대화 좀 할까?”

“역시 본좌의 감은 죽지 않았군. 처음 봤을 때부터 재미있을 것이라곤 예상했는데 확실히 본좌의 기대를 뛰어넘어!”

왜 내게 관심을 가지는가 했더니 강자는 강자를 알아본다고, 무인의 감각으로 내가 강자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모양이다.

“그러니 쥐새끼처럼 도망 다니는 얍삽한 짓은 그만두고 이제 본격적으로 붙어 보자꾸나!”

대화를 하자고, 대화를, 인마. 몸의 대화 말고! 그리고 말투 진짜 더럽게 올드하네! 무림에서 우화등선까지 하고 왔냐? 울컥하여 돌아보자마자 다시 검이 내게로 쇄도했다.

판타지 대빵 마왕 vs 무협 대빵 천마

진짜 세계관 최강자들의 싸움이다.

내가 현재 불러오는 스킬의 캐스팅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수식 하나라도 뒤틀리면 곧바로 말짱 도루묵이기에 일단은 피하는 것에 주력했다.

검을 피하기가 무섭게 주먹이 옆구리를 노리고 파고 들어왔다.

무림에서는 여자, 노인, 아이를 조심하라더니, 류사현은 그 말을 잘 지키고 있는 듯했다. 최선을 다해 나를 상대하는 꼴을 보니 말이다.

심지어 난 반격조차 하지 않는데도!

류사현이 무림에서 겪었을 수천, 수만 번의 생사결이 쉽게 상상되었다. 실력을 보아하니 제법 구른 모양이다. 그러니 무림 세계에 뚝 떨어진 이방인에서 천마 자리까지 올라갔겠지.

“테이머라고 했던가? 테이밍한 몬스터라도 불러내지 그래?”

류사현이 걸음을 한 걸음 떼자 땅이 울리며 위압감이 묵직하게 공기를 감쌌다. 저게 그 유명한 천마군림보인가?

지형을 바꾸는 보법으로 훅 내 옆으로 다가온 류사현이 내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설마 본좌가 네 몬스터를 죽이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건가?”

꾸욱, 목의 살을 파고드는 시린 검날에 눈가를 꿈틀했다. 와, 감히 내 목에 칼을 들이대는 건방진 새끼는 마계 통일한 이래로 참 오랜만인데?

“왜 대답이 없지? 본좌에게 먼저 대화를 요청한 건 그쪽이 아닌가? 막상 열어야 할 때 열지 않는 그 건방진 혀를 잘라 주리?”

내게 이 정도까지의 막말을 한 놈은 1마계의 역적 기르카스 놈 이래로 처음이다. 지나친 신선함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오늘부로 ‘날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따위의 대사를 치는 인소 남주 놈들이 얼마나 정상이 아닌지를 깨달았다.

막말을 들었을 때의 빡침을 두근거림과 착각하는 놈들은 정상이 아니지. 암, 암.

“네 입으로 정답을 말해 놓고는 확인은 왜 바라?”

실소를 내뱉으며 대꾸했다.

페리는 힘의 봉인이라는 페널티가 있었기에 인정하긴 짜증 나지만 저놈의 상대가 안 됐다. 페널티를 풀려면 시간이 5분 정도 걸리는데 저놈이 순순히 기다려 줄 리도 없고.

“어차피 죽을 거긴 하지만 죽음이 억울하지 않도록 최대한 발버둥 쳐 봐야지. 벌써 포기했나?”

“내가 죽으면 바깥의 공대원들과 조교들에게 어떻게 둘러대려고 그래?”

목에 닿는 서늘한 검날의 감각을 애써 무시한 채 묻자 류사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글쎄, 강시와 자멸했다고 할까? 아니면… 본좌를 구하고 떨어지는 바위에 짓눌려 죽었다고 할까? 어떤 시나리오가 더 마음에 드는지 네가 골라 봐라.”

그 짧은 시간에 시나리오를 두 개나 짜서 가져왔다. 물론 둘 다 마음에 안 들지만.

“제법 열심히 머리 굴렸네.”

이제 놀아 주는 것도 슬슬 질려 와 억눌려 있던 마기를 확 풀었다.

순식간에 공기가 짙은 마기로 물들어 갔다. 류사현의 발목을 칭칭 감고, 어깨에도, 등에도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점점 어깨에 가해지는 무게에 침음을 흘린 류사현이 내 목에 바싹 붙이고 있던 검을 천천히 내렸다. 속 역시 진탕이 되었는지 검붉은 피 한 줄기가 주르륵 류사현의 잇새로 흘러내렸다.

그가 검을 든 손을 완전히 꾹 내리누르며 비소했다.

“그런데 그쪽, 나 절대 못 죽여.”

내 장담이 떨어짐과 동시에,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알림이 눈앞에 떴다.

『캐스팅이 완료되었습니다.』

『스킬 ‘메테오(L)’를 실행합니다.』

하나둘 밤하늘의 별처럼 나타난 운석이 던전의 천장을 뒤덮었다. 단 한 번에 확실히 판을 뒤엎고 누가 우위인지 뼛속까지 각인시켜 줄 스킬이.

상대를 찍어눌러 서열을 각인시켜 주는 건 내가 지난 500년간 지겹도록 해 온 일이었다.

이글거리는 공기에 머리 위를 올려다보고 아연한 표정을 지은 류사현이 이를 갈며 물었다.

“마법사……. 메이지였나?”

“아니.”

그런 류사현에게 씩 웃어 주고는 살짝 올리고 있던 손의 주먹을 콱 쥐었다.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비틀렸다.

“마왕.”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테오가 쏟아져 내렸다.

재현된 공룡 멸종의 날의 중심에 서서 검으로 운석을 베어 내고 뒹굴어 몸을 피하며 난리를 치는 류사현을 가볍게 뒷짐 지고 지켜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짐이 무림 천하 천마 놈에게서 세계관 최강자 자리를 지켜 냈도다.

* * *

메테오가 지나가고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 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움푹 파인 크레이터로 메테오의 위력을 대강 예측할 수 있었다.

모락모락 일어나는 흙먼지 사이에서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류사현이 바닥에 꽂힌 검에 몸을 지탱하고는 킬킬거렸다.

“…크크큭, 무림 패도의 길을 걸은 본좌가 이리도 쉽게 패배할 줄이야.”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항마력이 몹시 딸려 왔다. 나를 공감성 수치사로 죽이려는 빅픽처인가?

내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단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킬킬거리던 류사현은 흙먼지 구름이 가라앉자 고개를 들고 나를 마주 보았다.

“마왕이라, 그럼 너 역시 본좌와 같은 귀환자인가?”

“그렇다, 짐 역시 귀환자니라.”

“실례지만 지구에는 언제 돌아오셨는지?”

“2년 전이요.”

역시 반면교사가 있어야지 부끄러움을 아는구나.

헛구역질을 꾹 누르고 똑같이 근엄하게 맞받아치자 곧바로 말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살기와 전투의 광기가 넘실대던 눈빛 역시 한풀 꺾여 있었다. 서열 정리는 확실하게 된 모양이었다.

“뒤!”

갑작스러운 외침에 뒤를 돌아보니 검을 든 혈강시가 내 등 뒤를 덮쳐 오고 있었다.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당황했다.

『스킬 ‘염력(SS)’을 실행합니다.』

휙 뒤로 날아가는 혈강시를 돌아보며 볼을 긁적였다.

“너무 방심했나.”

“방심은 아닐 겁니다. 혈강시는 생전 무림 고수들로 만든 강시이니 당연히 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수밖에.”

슬금슬금 모여드는 혈강시들을 둘러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놈 적당히 조질걸. 한눈에 봐도 걸레짝이 된 몸은 혈강시를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다 상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닥에서 검을 뽑아 든 류사현이 비틀거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술사가 죽으면 혈강시들 역시 영면에 들 테니까.”

달려드는 혈강시를 마기로 으스러뜨리는 장면을 눈에 담은 류사현이 너덜너덜해진 몸을 하고는 씨익 웃었다.

“협업하죠. 난 술사를 잡아내서 숨통을 끊고, 이채현 씨는 우리에게 달려드는 혈강시를 막고.”

공동의 적 앞에서 협력하는 적대 관계. 오랜 클래식이자 클리셰다. 그렇게 원수가 친구 되고 여보 되는 거지.

그런데 공동의 적 앞에서 협력하는 마왕과 천마? 뭔가 이상하자너. 막 세계관 파괴 같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난 1호선 광인과 친구고 여보고 나발이고, 그냥 아무 사이도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스킬 ‘치유(C)’를 실행합니다.』

아주 간단한 치유 스킬로 대충 걸레짝이 된 류사현의 몸을 치유해 주고 반대편으로 휙 내던졌다.

협업은 무슨. 각자도생이다, 인마.

* * *

던전 바닥을 기어 몸을 숨기며 도망 다니던 술사를 찾아내서 숨통을 끊자 남은 혈강시들은 평범한 시체가 되어 투두둑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니까 이 게이트의 차원은 말하자면 류사현이 길을 뚫은 거나 마찬가지인 차원이었다.

“공대원 헌터 놈들이 왔을 때 할 변명을 생각해 내야 하는데……. 좋은 아이디어 있나?”

운석에 털썩 걸터앉은 류사현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말이 갑자기 은근슬쩍 반 토막 났지?”

내 물음에 훗, 한껏 오만한 미소를 지은 류사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검을 맞댔으면 깊은 인연이지.”

“검과 검이 아니라 검과 돌이 맞닿았는데? 그리고 깊은 인연이랑 반 토막 난 말이랑 뭔 상관?”

“내가 100살이 넘었는데 새로이 인연이 된 아해에게 굳이 존대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말이다. 혹시 반로환동이라고, 알까 모르겠군.”

“X발, 마족 기준으로 100살은 더 처먹어야지 성년 되는 미자 주제에 얻다 대고 반말이야? 난 500살이 넘었다, 500살, 새끼야! 아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어린노무 새끼가 어디서 100살밖에 안 먹어 놓고 반말 찍찍이야?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자 류사현이 순순히 양팔을 들어 올려 항복을 표했다.

“그러면 이채현 씨 몬스터가 몸통 박치기해서 벽이 박살 났다고 말 맞추죠. 그래서 꼼짝없이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류사현의 말이 다시 존대로 돌아왔다. 페리를 팔아야 하는 것이 매애애우 마음에 걸렸지만 그 변명이 아니라면 두 힘숨찐이 필연적으로 힘을 들킬 수밖에 없었기에 순순히 동의했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를 구조하러 올 공대원들과 조교들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이 바위 무덤을 우리 힘으로 헤치고 나간다? 바로 힘숨찐인 거 들키는 거야.

“나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내 말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류사현이 고개를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연수원 퇴소 전에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연수원 급식은 어떻게 먹은 거예요? 미뢰가 쌍욕 안 하던?”

그의 표정이 아련하게 변했다.

“벽곡단만 5년간 먹으면 세상 어떤 음식도 맛있게 느껴집니다. 빌어먹을 폐관수련…….”

“헐, 진짜 물이랑 벽곡단만 먹으면서 수련해요?”

“네, 깨달음을 무조건 얻을 수밖에 없는 구조죠. 깨닫지 않으면 굶어 뒈지거든…….”

나도 마계에 떨어진 처음 200년간은 부실한 식사로 때웠지만 그게 송홧가루랑 곡식 가루 뭉쳐 만든 경단은 아니었다.

벽곡단만 5년간 씹어서 성격이 저리된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 보았다. 이번에는 류사현이 먼저 질문해 왔다.

“2년 전에 돌아왔으면, 이세계로 떨어진 건 몇 년 전입니까?”

“2년 전이요.”

“…그게 말이 됩니까?”

“말 되죠. 내가 떨어진 시간으로 다시 돌려보내 주라고 신에게 부탁했으니까.”

내 중얼거림에 류사현이 실소를 흘렸다.

“신에게 부탁해서 돌아왔다니, 참 쉽게도 돌아왔네. 누구는 X발, 혈교 놈들에게 뒤통수 맞고 인신 공양까지 하면서 돌아왔는데…….”

“응, 아니야. 신 불러내려고 500년 동안 허리띠 졸라매면서 전쟁했어.”

적어도 남의 노력 후려치진 말자, 천마야. 내가 무협 소설 좀 읽었는데 무림은 영약 좀 주워 먹고 기연 좀 만나면 개꿀 빠는 곳이라 말하면 솔직히 빡칠 거잖아.

치유 스킬로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혈강시를 잡은 게 무리가 되었는지 류사현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때, 숨소리와 외부의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자 발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이채현 씨, 류사현 씨!”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벽을 때려 부순 장본인이자 강시를 조진 두 힘숨찐은 목소리 높여 위치를 알렸다.

“여기예요, 여기!”

“여기 사람 갇혔어요! 살려 주세요!”

곧 앞길을 막은 바위들이 치워지고 협회 공대장과 임 조교의 얼굴이 보였다. 임 조교가 다급히 물었다.

“두 분 다 무사하십니까?”

“…아니요.”

나는 류사현의 검격에, 류사현은 내 메테오 스킬에 의해 멀쩡한 꼴은 아니었다.

덕분에 비주얼로는 강시에 쫓기며 구르고 구르다가 숨을 곳 찾아 기어 들어간 불쌍한 훈련생 두 명으로 보였다.

구조대가 만들어 준 바위 틈새 사이로 기어 나와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들것! 들것 가져와!”

“바로 병원으로 이송하겠습니다!”

“남자분 상태가 더 심각한데요! 구급차 먼저 태워 보내야…….”

움직이기 귀찮아 드러누웠을 뿐인데 정말로 상태가 심각한 류사현과 나란히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저기요, 저 멀쩡한데요?

* * *

부상자가 많아 원래 내일 예정이었던 퇴소식은 이틀 후로 미뤄졌다. 훈련생 중 두 명이 게이트 안에서 사망하여 19기는 최초로 사망자가 나온 기수가 되었다.

인터넷 뉴스는 이미 연수원 A급 게이트 실전 훈련에서 사망한 두 훈련생 기사를 경쟁하듯 내보내고 있었고, 하필이면 그중 한 명이 나랑 동갑인 바람에 내 휴대폰에는 연락이 쏟아졌다.

하필 내가 게이트 안에 있어 전화를 받지 못했던 터라 내가 구급차에서 전화를 걸자마자 부모님은 다행이라고 펑펑 우셨다. 백아현과 윤세인 역시 울 부모님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채현 언니, 진짜 제가 얼마나 식겁했는지 알아요?”

안 그래도 자리가 부족한 응급실로 이송되자마자 나이롱환자인 게 밝혀져 다시 연수원으로 돌려보내진 나는 흙먼지 가득한 몸을 이끌고 기숙사 침대에 곧바로 뻗었다.

김나연이 울상을 지으며 나를 마구 흔들어 댔다.

“겨우 빠져나와서 인원 점검하는데 옆에 있었던 언니는 사라졌지, 교관들은 안 그래도 멘탈 나간 나한테 계속 언니 행방이랑 마지막 위치 캐묻지!”

그러고 보니 게이트 닫겠다고 들어가서 게이트도 못 닫고 나왔네. 류사현이 천마에, S급이라는 쓸모없는 정보만 얻었을 뿐.

“이채현 훈련생, 잠깐 조교실로 방문 바랍니다.”

씻기 위해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마자 조교가 벌컥 문을 열고는 나를 찾았다. 아, 젠장. 씻고 좀 자고 싶은데.

속으로 투덜거리며 조교의 부축을 받고 조교실로 향하자 벌떡 일어나 나를 반긴 임 조교가 의자를 빼 주었다.

“혹여 다음 날 기억이 온전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어 불가피하게 금일 부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임 조교는 어째서 안쪽으로 들어갔느냐, 류사현 훈련생과는 어떻게 그곳에서 만났느냐, 왜 안쪽의 돌벽도 무너졌느냐, 강시 말고 또 다른 몬스터가 안쪽에 있었느냐 등의 질문을 던졌다.

류사현과 미리 말을 맞춘 대로 강시와 내 쪽으로 쓰러지는 돌벽을 피해 도망가다 보니 던전 안쪽이었고 테이밍한 몬스터가 강시를 공격하다가 돌벽을 박살 냈다, 던전 안쪽에 게이트 초입에서 본 뻣뻣한 강시가 아닌 살아생전의 모습과 별다를 바 없이 움직이는 강시가 있었다고 대답했다.

한숨을 푹 내쉰 임현수 조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류사현과 말이 안 맞은 건가 싶어 지레 찔려 힐긋 눈치를 보니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임 조교가 입을 열었다.

“이채현 훈련생이 무사 복귀하여서 매우 다행입니다. 전해 들으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망자로 인해 퇴소식은 이틀 후로 미뤄졌습니다. 푹 쉬고 회복된 모습으로 퇴소식에서 뵙겠습니다.”

그는 따뜻한 레몬티까지 손에 쥐여 주고는 나를 조교실에서 내보냈다. 레몬티가 든 테이크아웃 컵을 내려다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사람이 갈 때 되면 변한다더니 진짜 갈 때가 됐나 보다. 연수원 나갈 때.

* * *

“이 분위기에 꼭 퇴소식 해야 해? 그냥 수료증만 나눠 주고 알아서 퇴소하라 하면 안 돼?”

입소할 때 가지고 들어온 캐리어에 짐을 싸며 투덜거렸다. 내 말에 김나연이 입을 비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말이요. 그냥 집에 보내 주지. 또 입소식처럼 지루하게 박수만 칠 게 뻔한데.”

“추모식도 같이 한대. 아마 그래서 퇴소식 하는 걸 거야.”

천세연이 김나연의 말에 한마디 거들었다. 추모식이면 어쩔 수 없지. 빠른 태세 전환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입을 옷만 미리 빼 놓고는 짐 정리를 마친 나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안부를 묻는 수많은 메시지들이 쌓여 있었다.

◎lee_chae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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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신고

#무사함 #답장안해도 #그러려니 #해줘요

인X타에 셀카를 올려 생존 신고를 마치고는 다시 채팅창에 들어가 몇몇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주태윤 - 그러게 제가 수료증 받아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후 1:02

[왜 갑자기 정색?]

[내가 죽은 것도 아니고 부상으로 입원한 것도 아닌데 뭔 상관?] 오후 1:05

[주태윤 - 갇혔다면서요 C급 헌터랑 단둘이] 오후 1:05

[주태윤 - 그리고 정색한 거 아닙니다^^] 오후 1:06

[ㅇ 갇혔는데 그게 뭐요? 무슨 문제 있어요?] 오후 1:10

[주태윤 - 아닙니다^^] 오후 1:11

이 인간은 왜 갑자기 혼자 급발진이야? 내가 진짜 수료증을 자기한테서 받기를 바랐다면 데이트 조건을 애초에 걸지 말던가.

[천우현 - 채현 씨, 괜찮으세요?] 오후 2:10

[천우현 - 세연이에게 들었는데 이번에 사고 난 A급 게이트에 갇히셨다고……] 오후 2:11

[괜찮아요ㅎㅎ]

[우현 씨도 동생분 때문에 많이 놀랐겠다] 오후 2:12

천우현에게는 최대한 다정하게 답장을 보내 주었다. 따지지 말고 천우현처럼 걱정을 해 주란 말이다, 주태윤아.

오후에는 단체로 게이트 안에서 사망한 동기들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했던 사람의 얼굴이 영정사진에 담겨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우리 딸 살려내! 왜! 왜 그런 데에 데리고 들어가서! 왜 이제까진 사망자가 없었다면서 우리 딸만 죽었냐고! 아이고, 내 딸 불쌍해서 어떡해!”

상복을 입은 동기의 어머니가 임 조교의 가슴을 퍽퍽, 치다가 주르륵 주저앉았다. 동기의 아버지가 죄송하다고 임 조교에게 사과하고는 땅과 가슴을 치며 오열하는 부인을 간신히 일으켜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갔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비통한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장례식장을 나왔다.

담배를 입에 물고는 막 불을 붙이려 하는 류사현의 등을 쿡, 찔렀다.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본 류사현은 나를 발견하고 눈썹을 치켰다.

“한 대 드릴까요?”

흡연자였냐는 무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담배 냄새 싫어해서.”

“어쩌죠, 난 피울 건데.”

픽 웃은 류사현이 라이터를 담배 끝에 가져다 댔다. 담배에 불이 붙는 것보다 라이터의 불이 꺼지는 게 더 빨랐다.

그게 몇 번이 반복되자 물고 있던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던진 류사현이 제 머리를 헤집으며 물었다.

“용건이 뭡니까? 왜 남의 담타를 방해하는 건지?”

“어떤 방식으로 귀환한 건지 좀 듣고 싶은데요.”

내 입에서 나온 말에 급히 주변을 둘러본 류사현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 으르렁거렸다.

“당신 지금 미쳤어? 이렇게 광고하려면 아주 모교에 귀환자라고 플래카드라도 걸어 놓지 그래?”

“별걱정을 다 하네.”

담배 대신 막대사탕을 까 류사현의 입에 친히 쑤셔 넣어 주고는 나 역시 하나를 까 입에 물었다.

“당연히 방음 스킬 쳐 놨지.”

날 뭐로 보고. 이래 봬도 한국대 정시 최초 합격자다.

사방을 노려보던 류사현이 눈에 힘을 풀고는 맥이 탁 풀린 표정을 지었다. 입에 들어온 딸기우유 맛 막대사탕을 우물거리던 그가 까득, 사탕을 씹으며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궁금해합니까?”

주차장에 서 있던 김나연이 나를 향해 급히 손을 흔들었다. 단체 버스가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

성큼성큼 버스를 향해 걸어가며 대꾸했다.

“차원 간의 연결을 끊을 방법을 알 수 있을까 해서요.”

“그거참, 흥미 생기는 대답이네.”

씩 웃은 류사현이 내 손에서 휴대폰을 스르륵 가져갔다. 제 휴대폰 번호를 찍고 제멋대로 저장한 그는 다시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나중에 연락해요. 편하게 이야기하게.”

시건방지게 손을 흔든 류사현이 버스에 먼저 탑승했다. 그의 뒤를 따라 버스에 올라타 진솔의 옆자리에 앉으니 옆쪽 좌석에 앉아 있던 김나연이 나를 쿡쿡, 찌르고는 음흉하게 웃었다.

“뭐예요, 언니? 혹쉬 썸?”

“하하, 나연아, 차라리 욕을 하렴.”

어디 썸 탈 사람이 없어서 저 1호선 광인 천마 놈이랑 썸을 타겠니.

다음 날.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수원 퇴소일이 다가왔다.

“지금부터 헌터 연수원 제19기 퇴소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앞자리의 빈 의자 두 개에는 흰 국화꽃과 수료증이 놓여 있었다. 입소식에서는 생략했던 묵념을 하며 힐긋 류사현이 있는 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만약 자신이 저 둘의 죽음에 큰 기여를 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저 천마 놈은 무슨 표정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할까.

물론 답은 알고 있었다.

인신 공양까지 해 가며 원래 세계로 돌아온 류사현이나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생명을 꺼뜨리고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온 나나 별다를 바 없는 인간 군상이었으니.

고개를 돌리고 내 책임은 없으리라 태연한 얼굴로 외면하겠지.

내가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다음, 이채현 훈련생.”

호명되는 이름에 단상 위로 올라가 수료증을 받았다. 이거 하나 받으려고 22일 동안 고생 많았다, 나 자신.

이름순으로 줄줄이 단상 위로 나가 수료증을 받고 나니 퇴소식의 끝순이 다가왔다.

“이상으로 퇴소식을 마치겠습니다.”

사회자의 선언에 진심 어린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19기가 모두 모여 연수원 홈페이지에 걸릴 기념사진을 찍은 후.

“나중에 길드에서 선후배로 만나면 모른 척하지 말고 챙겨 줘요.”

“다들 게이트 안에서 만납시다!”

22일 동안 함께 지내며 제법 가까워진 동기들과 번호를 교환하며 나중에 길드나 게이트 안에서 만나자고 농담 섞인 인사들을 던졌다.

“언니이, 진짜 밖에서도 꼭 만나 줘야 해요.”

“당연하지. 맞다, 솔 언니, 나 언니 인X타 팔로 걸었는데.”

“아, 진짜? 지금 맞팔할게. 그런데 나 인X타 디엠 잘 안 보니까 웬만하면 쳇으로 보내.”

룸메이트들과는 거의 헤어질 시간이 다가온 이산가족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작별 인사를 나눴다.

물론 천세연은 제외하고. 내가 이중 던전에서 기억을 지운 이후 그나마 가까워질 만한 기회는 영영 날아갔지. 하지만 기억을 안 지울 수도 없던 상황이라.

“다들 꼭 연락해요!”

“잘 가!”

“모두 잘 돌아가십시오!”

그렇게 우리를 굴리고 쥐 잡듯이 잡아 댔으면서 마지막이라고 훈훈하게 웃으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조교들을 보며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수련회같이 끝나네. 아, 수련회 PTSD.

* * *

캐리어를 끌고 연수원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아현이가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채현 씨!”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천우현이 나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 앞에 서서 걱정 어린 눈을 한 채 이리저리 나를 살피던 그가 중얼거렸다.

“무사하시네요. 다행이다…….”

안도가 물씬 묻어 나오는 아련한 말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다문 입매를 꿈틀했다.

마계의 전쟁이 끝난 평화로운 시기에 만났으니만큼 천우현은 내가 마계에서 살벌하게 벌이고 다닌 수많은 여포 짓을 잘 몰랐다.

겨우 A급 게이트에 C급과 단둘이 갇혔다고 저런 반응인 걸 보니 내가 마왕인 것만 알았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물론 A급 게이트는 웬만한 S급들도 혼자 갇히면 사지 멀쩡히 빠져나오긴 어려운 수준이긴 했다.

“오빠!”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천세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세모꼴로 눈을 치뜨고 나와 천우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귀지도 않는데 바람피우는 걸 들킨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아니, 난 그냥 가만히 있는데 너네 오빠가 나를 막 꼬신다니까? 비자각적 그린 라이트를 막 눌러 댄다고.

“당신이 오빠를 죽이려 한다면 그땐 절대로 가만 안 있을 거니까…….”

이중 던전 안에서 천세연의 기억을 지우기 전, 경고하듯 그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굳이 천우현을 죽일 이유는 천우현이 진심으로 나를 죽이려 해서, 혹은 천우현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 이 두 개뿐이었다.

“이채현!”

때마침 나를 부르는 백아현의 목소리에 손을 들어 화답해 주고는 천우현의 등을 떠밀었다.

“세연이 왔네요. 얼른 가서 짐 들어 줘요.”

“푹 쉬어요, 채현 씨.”

둥글게 눈을 휘어 웃은 천우현이 손을 흔들고는 천세연에게로 걸어갔다. 나 역시 캐리어를 끌고 아현이의 차로 향했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조수석에 올라타니 시동을 걸던 백아현이 우리가 탄 차 앞을 지나가는 천 남매를 발견하고 곧바로 물어 왔다.

“뭐야, 너 저 세탁비랑 같은 기수였어?”

“같은 기수뿐이겠니. 심지어 룸메이트였단다.”

“세상에, 방 바꿔 달라고 하지는.”

혀를 찬 아현이가 차를 출발시켰다.

한참을 달려 무사히 원룸 건물 앞에 나를 내려 준 아현이는 주말에 보자고 인사하고는 다시 협회로 향했다.

22일 동안 집을 비웠다니, 월세가 아깝다. 집에 먼지 엄청 쌓였겠지. 귀찮아 죽겠는데 청소는 언제 하냐.

혀를 차며 자취방 문을 열자 텅 빈 집 특유의 냉골 대신 사람의 온기가 묻은 깨끗한 집이 나를 반겼다.

“폐하, 오셨어요?”

“…오셨습니까, 폐하.”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애쉬와 상당히 지친 표정으로 나를 반기는 세이블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애쉬는 그렇다고 쳐도 세이블 너는 왜 여기 있어?”

“보고 드릴 게 있어 이 녀석에게 소환 좀 해 주시라 전달하라 했는데 오늘 폐하가 돌아오시는 날이니 같이 넘어가자는 꼬드김에 넘어가서 말입니다.”

퀭한 세이블의 손에 들려 있는 먼지 가득 묻은 걸레를 보고 상황 파악을 완료했다.

애쉬 이 녀석, 자기 대모를 청소에 동원하다니.

군자보구 십년불만(君子報仇 十年不晩)이라더니, 방치당하고 구박당하던 어린 날의 복수를 이렇게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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