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11. 헌터 연수원 (2) (11/33)

목차

11. 헌터 연수원 (2)

12. 판타지 vs 무협

13. 흑막이 나를 의심하는데 내가 사실 최고 흑막임

14. 회귀자, 귀환자, 여기에 책 빙의자까지 있으면 완벽하군!

15. 역시 악당이 있어야 제맛

16.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17. 내 인생 장르가 로판으로 바뀔 거라는 희망이 보이다가 말았다 (1)

11. 헌터 연수원 (2)

일주일간의 능력 훈련 기간이 끝나자 연수의 하이라이트인 실전 레이드 기간이 다가왔다.

이 상태로 게이트에 들어가는 건 위험하단 걸 드디어 깨달은 건지 연수원 측은 유명 도시락 업체에서 도시락을 배달시켜 주었다.

“진작 이럴 것이지.”

불고기와 치킨이 있는 도시락의 플라스틱 뚜껑을 까며 투덜거렸다.

“솔직히 훈련이랑 실전은 위험성부터 다르잖아. ‘연수원에서 굶겨서 훈련에서 쓰러졌다.’랑 ‘연수원에서 굶겨서 실전 훈련에서 쓰러졌다.’가 언론을 탔을 때 같을 순 없지.”

냠, 도시락을 우물거리며 진솔이 말을 얹었다.

제일 처음으로 들어가는 게이트는 E급 게이트였다. F급 게이트와 함께 가장 높은 빈도로 열리는 게이트.

들어가는 인원은 룸메이트 네 명. 어쩐지 밸런스가 묘하게 맞춰져 있더라니, 실전을 위해서 방 구성원을 짠 모양이었다.

현재 경기도권까지 확대하여 확보한 E급 게이트가 여섯 개였기에 오늘은 여섯 팀, 내일은 일곱 팀으로 나누어 들어가기로 이야기가 끝나 있었다.

“질문 있습니다. 내일 E급 게이트 일곱 개가 확실히 열리긴 합니까?”

“E급 게이트는 수도권에서만 하루 평균 열다섯 개가 열립니다. 그러니 훈련생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자, 그럼 이어서 게이트 내에서 주의해야 할 점들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턱을 괴고 게이트 안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을 줄줄이 늘어놓는 조교와 보기 드물게 경청하는 훈련생들을 심드렁하니 둘러보았다.

주의 사항을 제대로 안 듣다가 X되는 건 클리셰였지만 EX급 가오가 있지, 설마 E급에서 X되려고.

“401호는 수원 E급 게이트입니다.”

우리 방은 네 개나 되는 서울 쪽 게이트를 제치고 하필 단둘뿐인 경기도 게이트를 배정받았다. 아무리 봐도 임 조교의 사심이 들어간 것 같은데.

수원까지는 차로 이동해야 했기에 오랜만에 연수원을 벗어나 바깥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이 후텁지근하고 습기 찬 공기, 오랜만이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차 문을 연 조교가 손짓했다.

“빨리 타세요. 늦어도 5시까지는 무조건 복귀해야 합니다.”

혀를 차며 차에 타자 차는 달리고 달려 수원의 인적 드문 빈 공장 터에 도착했다. 공장 내부로 들어가니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게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소지한 발광 아티팩트 켜시고 제 뒤를 잘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조교의 통솔에 따라 게이트 안으로 발을 디뎠다.

『E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콜록!”

우리 중 E급으로 등급이 제일 낮은 김나연이 입을 막고 기침을 뱉었다. 공기는 내겐 딱히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발광 아티팩트의 빛에 의지해 던전 안쪽으로 계속하여 걸어 들어갔다. 아직까지 몬스터는 나오지 않았다.

“쓰, 쓰읍…….”

아까부터 계속 끙끙거리더니 배를 붙잡고 안절부절못하던 조교가 고개를 팍 들었다.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 먼저 레이드하고 계십쇼! E급이라 별문제 없을 겁니다!”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쏜살같이 게이트 밖으로 달려 나가는 조교를 바라보는 룸메들의 눈에 황당함이 감돌았다.

하지만 회귀자(추정) 천세연은 이 상황을 이전에도 한 번 겪었는지 초연한 표정이었다.

진솔 언니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이제는 자리에 없는 이를 향해 쏘아붙였다.

“미친 거 아니야? 우리끼리 레이드를 어떻게 해?”

“그냥 하죠. 저렇게 말하는 꼴 보니까 돌아오기까지 상당히 시간이 걸릴 듯한데.”

빨리 끝내고 나가서 쉬자. 내 심드렁한 대꾸에 진솔이 식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게이트도 한 번 안 들어가 본 사람들끼리 어떻게…….”

“저 들어간 적 있어요. 휘말린 거긴 하지만.”

내 말에 나연이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헐, 그럼 언니도 로또 샀어요?”

“웬 로또?”

게이트랑 로또에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거지. 어리둥절해하는 내 표정에 김나연이 친절히 설명을 덧붙였다.

“게이트 휘말리면 액땜했다고 복권 사던데요? 저희 아빠도 게이트 휘말리고 로또 사서 5만 원 당첨됐어요!”

그냥 직감 스킬 켜 놓고 숫자 찍으면 세 번에 한 번은 5만 원씩 나오던데.

“오, 그래? 한 번 사 볼걸. 아깝다.”

(대외적으로) 최연장자인 진솔이 삼천포로 빠진 대화에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고는 교통정리를 시도했다.

“얘들아, 로또고 뭐고 일단 우리가 어떻게 할지부터…….”

캬아악―!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진솔과 김나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태연한 건 오직 나와 천세연뿐이었다. 타다다, 여러 개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진솔이 떨리는 손으로 활과 화살을 꺼냈다.

7급 몬스터가 불빛 아래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리가 긴 도마뱀처럼 생긴 몬스터의 이빨은 쇠도 씹어먹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이게 어떻게 E급 게이트야?”

덜덜 떨던 김나연이 울음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그런 김나연의 손을 꼭 잡아 주는 천세연을 흘깃한 나는 태평하게 기지개를 쭉 켜며 한 발 앞으로 나갔다.

“게이트 클리어 그닥 어렵지 않아요.”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내 소환에 즉시 튀어나온 페리는 바닥을 밟자마자 원 상태로 돌아가더니 달려드는 몬스터를 턱턱 물어 죽였다.

페리가 앞발로 힘차게 후려치자 몬스터 한 마리가 저 멀리 날아가는 꼴을 보며 고개를 휙 돌려 싱긋 웃었다.

“어때요, 참 쉽죠?”

“으, 으응……. 참 쉽네…….”

활에 막 화살을 메기던 진솔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방금까지의 울상 가득한 표정은 어디 가고 우사미 눈이 된 김나연이 한마디 거들었다.

“네, 언니. 아주 밥 아저씨급으로 쉽네요.”

* * *

페리 버스에 탑승해 꿀 빨며 보스룸까지 향했다. 우리 착한 페리는 몇몇 몬스터를 진솔에게 양보해 주기까지 했다.

“와, 보스룸까지 진짜 빨리 왔다. 역시 A급 헌터는 다르구나.”

‘…뭐가 빨라. 느려 터졌구먼.’

김나연의 찬양을 들으며 하품했다. 그도 그럴 게 페리의 힘은 지금 3분의 2가 봉인된 상태였다.

1급 몬스터 중에서도 S급 던전의 보스 몬스터급인 페리는 거의 치트이자 데우스 엑스 마키나나 다름없었고, 그건 내 정체가 들키기 쉽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상식적으로 A급이 그 정도 몬스터를 테이밍했다고 하면 누가 봐도 등급을 숨긴 힘숨찐이잖아.

그래서 힘을 모두 쓰지 못하도록 관리자 데이터를 이용해 얻은 적당히 다른 1급 몬스터 정도의 힘으로 봉인해 놨다.

물론 우리 페리가 약육강식이 원칙인 마계에서 쥐어 터지는 꼴은 주인으로서 못 보기에 봉인 조건은 이 세계로 넘어올 때로 한정했다.

“어라? 원래 게이트에 보스룸이 두 개예요?”

김나연의 의문 어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입구가 있었다.

“어차피 E급따리 게이트니까 둘씩 나눠서…….”

“무슨 소리예요, 채현 언니! 다 같이 들어가야죠!”

내게 착 달라붙은 채로 김나연이 바락바락 우겼다. 만약 둘씩 나눠서 들어가더라도 꼭 나와 들어가겠다는 결의가 내 팔을 붙잡은 손에서 여실히 느껴졌다.

굳이 E급을 이렇게 성가시게 공략해야겠니? 이래서 솔플이 최고라니까. A급 게이트도 솔플로 10분 컷이었는데.

가만히 두 개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는 회귀자(추정)에게 선택의 기회를 양보했다.

“세연아, 네가 고를래?”

한 번에 보스룸까지 가면 내가 널 회귀자로 완전히 인정하겠다. 내 말에 잠시 주저하던 천세연이 왼쪽 입구를 가리켰다.

“여기로 가죠.”

천세연이 가리킨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발광 아티팩트의 빛을 집어삼킨 어둠이 우리의 시야마저도 가렸다. 꼭 게이트를 통과하는 느낌이 들었다.

짧고도 기묘한 감각이 지나자 빛이 다시 눈앞을 밝혔다.

『B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펼쳐진 풍경에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보스룸 대신 나타난 또 하나의 던전.

이중 던전이었다. 그것도 난이도가 훅 뛴.

* * *

분명 회귀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진솔과 김나연도 있는데 굳이 저를 쿡 집어 입구를 고르게 한 게 이상했지만 지금 그런 것에 의문을 품을 때가 아니었다.

입술을 깨문 천세연은 제게로 달려드는 페어리를 피해 허리를 숙였다. 딱딱, 칼날이 서로 부딪히는 것 같은 스산한 소리가 머리 바로 위에서 들려왔다.

길게 찢어져 있는 페어리의 입 안에는 강철도 아그작아그작 씹어먹을 수 있을 듯한 날카롭고 긴 송곳니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게이트가 사라졌어! 우리 B급 게이트에 갇힌 거라고!”

절망 어린 목소리로 소리치는 진솔의 외침을 들으며 세연은 고개를 들었다. 완전히 갇힌 건 아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하면 E급 던전으로 나갈 수 있다.

이중 던전은 회귀 전에도 몇 번 경험해 봤기에 침착할 수 있었다.

한구석에서 패닉에 빠져 덜덜 떠는 김나연과 자꾸만 헛손질하며 화살을 떨구는 진솔의 모습에 세연은 제 오빠가 사 준 힐러용 스태프를 단단히 쥐었다.

제게로 덮쳐 오는 페어리에 힘겹게 반투명한 방패를 불러내는 김나연을 보며 세연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상하다, 분명 이런 일은 회귀 전에 없었는데 자꾸만 기시감이 들었다.

은빛 가루를 뿌리며 날아다니는 요정들을 올려다보다가 무심코 숨을 들이마시자 은빛 가루가 세연의 코로 들어왔다.

『중독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방에 정화 스킬을 걸며 해독 스킬로 자힐을 마친 천세연이 모두에게 충분히 들릴 정도로 외쳤다.

“가루에 독 있어요! 숨 크게 들이쉬지 마세요!”

진솔이 드디어 정신을 붙든 건지 화살들이 빠르게 페어리를 꿰뚫었다.

이 수많은 페어리 떼를 뚫고 보스룸까지 가야 했다. A급, B급, C급, E급의 조합으로 B급 게이트를 클리어해야지 자신들이 살 수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 확률은 0%에 가까웠다. B급 게이트 안의 몬스터는 3급에서 5급 사이의 몬스터들이었으므로. 지금 그들에게 달려드는 페어리도 4급 몬스터였다.

“채현 언니, 얼른 테이밍해 봐요!”

김나연이 실드 스킬로 페어리를 막으며 소리쳤다. 성가신 일이라도 생긴 듯한 표정으로 이채현이 한쪽 손을 들었다.

무서운 기세로 허공에서 득달같이 달려들던 페어리들이 주춤하더니 안색이 시커멓게 되어 뒤로 물러났다.

저 능력은 테이밍 따위가 아니라…….

코가 욱신거리더니 코피가 기어이 주르륵 흘렀다.

“우웨에엑!”

옆에서 김나연이 구토했다. 진솔 역시 메슥거리는 속에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수백 개의 바늘로 쿡쿡 쑤시듯 지끈거리는 천세연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스치듯 지나갔다.

“잠시 자고 있어. 눈 뜨면 이곳은 기억 못 할 거야.”

그 목소리의 주인이 손바닥으로 제 눈을 덮기 전 들어온 풍경은 분명 이곳이었다. 페어리가 날아다니는 이 B급 던전.

스태프를 꽉 움켜쥔 천세연의 손가락 마디가 새하얗게 질렸다.

돌아와서 미래를 바꾸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아등바등했지만 바뀌지 않는 것도 존재했다.

천우현과 이채현은 만났고, 신청했던 8월 연수는 전산 오류로 회귀 전과 같은 7월이 되었다. 자잘한 것들도 어떻게든 원래의 미래로 돌아왔다.

그런데 제가 유일하게 믿을 구석인 기억마저 온전하지 않단다.

그러면 세계의 결말도 결국 똑같이 흘러가는 걸까. 아무리 악을 쓰고 발버둥 쳐도 바꾸지 못하고 그렇게 세계도, 오빠도…….

“천세연!”

방금 되살아난 기억 속과 똑같은 목소리에 천세연은 웃었다. 맞아, 언니하고의 관계는 확실히 달라졌네.

제멋대로 내 기억을 지운 사람이 당신이구나.

“정신 차려!”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페어리를 피해 제 몸을 끌어당기는 손에 세연은 제 어깨를 잡은 이를 똑바로 마주 보며 물었다.

“저희가 방해죠?”

* * *

갑자기 등장한 B급 던전과 페어리에 당황한 것도 잠시, 겁 없이 달려드는 페어리를 파리 쫓듯 내쫓았다.

Easy 모드로 공략 중에 Hard 모드로 바뀌어 패닉이 제대로 온 건지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래, 천세연의 얼굴마저도 말이다.

회귀자가 아닌 건가, 아니면 이 일이 회귀 전에 일어나지 않은 일인가?

원래 위급 상황에서 성장 폭은 더 커지는 법이지. 정말로 위험하면 그때 간섭하려고 한 발짝 물러나 룸메이트들이 스킬을 쓰는 모습을 관조했다.

하지만 역시 초보는 초보. 김나연이 친 실드가 박살 나기 직전, 마기를 아주 살짝 풀었다.

내 마기를 느낀 페어리 떼는 상위 포식자의 기운에 짓눌려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문제는 마기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아주 미약한 마기였음에도 코피를 흘리고 구토와 헛구역질을 해 대는 이들을 바라보며 볼을 긁적였다. 배려 차원으로 일부러 마기도 아주 조금 흘렸는데 이들한테는 이것도 못 버틸 수준이었던 모양이었다.

페어리도 버틸 수준을 인간들이 못 버티면 어떻게 하냐. 마기를 극복해 내고는 힘차게 다시 날아드는 페어리에 혀를 차며 페어리의 비행을 눈으로 좇았다.

페어리가 노리는 건 천세연이었다. 그런데 애가 눈빛이 멍하다.

“천세연! 정신 차려!”

그의 어깨를 붙잡고는 휙 잡아끌었다. 눈에 점점 초점이 돌아오는 걸 보고 마음을 놓았다. 나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천세연이 매우 의외의 물음을 던졌다.

“저희가 방해죠?”

확신 어린 목소리에 표정을 굳혔다.

“역시, 너 뭐 알고 있구나.”

얘가 회귀자건 아니건, 무언가 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건 이제 기정사실화였다. 움찔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나는 천세연을 따라 걸음을 성큼 옮겼다.

『저주 ‘수면(A)’을 실행합니다. 설정 시간: 5분』

수면 저주에 걸린 김나연과 진솔이 스르륵 쓰러져 잠들었다. 페리가 그들을 덮쳐 오는 페어리를 사정없이 물어뜯고 앞발로 후려쳤다.

나를 잔뜩 경계하는 천세연의 표정에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걱정하지 마. 난 너희 오빠한테 빚이 있고―”

나를 지나 천세연에게로 날아드는 페어리의 몸통을 잡아챘다. 손아귀에 꾹 힘을 주니 페어리가 손 안에서 터져 나갔다.

“네 오빠가 너를 아끼는 이상 딱히 널 해칠 생각은 없어.”

네 오빠 덕분에 그 빌어먹을 마계에서 몇백 년 만에 숨통이 트였는데 그 사람이 아끼는 너 하나 못 살려 주겠니.

손바닥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액체와 잔해를 털어 내며 천세연과 시선을 맞췄다. 눈을 살짝 접어 웃자 천세연이 이를 악물었다.

“날 해치든 말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언니… 아니, 당신이 오빠를 죽이려 한다면 그땐 절대로 가만 안 있을 거니까 그것만 알아 둬요.”

…내가 왜 천우현을 죽이려 해? 얘 진짜 회귀자 맞아? 혹시 어디 2P 세계관에서 건너온 애 아니야?

언젠가 한번 날 잡아서 기억을 털어 보리라 다짐하고 한숨을 푹 쉬며 천세연에게 말을 건넸다.

“잠이나 자고 있어. 참, 눈 뜨면 이곳은 기억 못 할 거야.”

“기절시키게요? 그리고 남의 기억은 왜 지워요?”

픽 웃으며 여상히 대꾸했다.

“청소년관람불가거든.”

“저 성인이거든요?”

유감이지만 마계 기준이라서 말이야. 내 앞에서 성년 주장하려면 180살만 더 먹고 오렴.

힘없이 허물어지는 천세연의 몸을 붙들어 곱게 바닥에 눕혀 놓은 나는 곧바로 보스룸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내 뒤로 페어리가 가루가 되어 터져 나갔다.

보스룸으로 들어가자 던전의 핵을 끌어안고 있던 어린애 크기만 한 요정이 나를 휙 돌아보았다. 크기는 어린애만 했지만 얼굴은 노인이었다.

『던전 보스 몬스터 ‘에를킹(3급)’이 나타났습니다.』

입을 쩍 벌리자 끔찍한 수준의 송곳니가 빽빽이 박혀 있었다. 자르르, 날개가 떨리는 소리가 울렸다.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입을 열었다.

“너도 킹이냐?”

바닥에서 그림자처럼 스멀스멀 크기를 키운 마기가 솟아올랐다. 뱀처럼 꿈틀거리던 마기는 에를킹의 사지를 칭칭 감았다.

촤악―!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투두둑, 몸뚱이가 바닥으로 하나둘 떨어졌다.

피로 물든 던전의 핵을 내려다보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턱 얹었다.

『차원 #SF398-0의 근거지입니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차원 #SF398-0과의 연결을 영구히 끊으시겠습니까?』

한국대학교 도서관 A급 게이트와 똑같은 상태창이 나타났다.

헌터증 발급받으면 편히 쉬기는 글렀네. 차원 연결 끊어 내러 다닐 내 미래가 훤했다.

“허가.”

『차원의 연결을 끊어 냈습니다.』

『게이트가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 - 00:05:00』

보스룸을 나와 곧바로 수면 저주에 걸려 뻗어 있는 룸메이트들에게로 달려갔다.

『스킬 ‘염력(SS)’을 실행합니다.』

축 늘어져 있는 몸들이 둥실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다시 생겨난 게이트를 통해 무사히 E급 던전으로 다시 빠져나온 후 수면 저주가 끝나 깨어나기 전에 급히 이들의 기억을 조작했다.

『스킬 ‘메모리얼(SSS)’을 실행합니다.』

『기억 삭제를 완료했습니다.』

이중 던전인 B급 던전으로 들어간 기억을 깔끔하게 삭제했다. 아마 이들은 깨어나면 자신들이 B급 던전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리라.

『저주 ‘수면(A)’을 해제합니다.』

저주 설정 시간이 끝나자 부스스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키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메모리얼 스킬을 써 기절해 있었다는 기억 또한 삭제했다.

이제 이들에게는 무사히 보스룸 앞까지 도착했다는 기억밖에 없었다.

마침 5분이 지났는지 입을 벌리고 있던 B급 게이트가 스르륵 소멸했다. 우리의 앞에 있는 건 이제 E급 보스룸 하나였다.

B급 던전에 들어간 시간은 겨우 10분 남짓. 조교가 화장실에 다녀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얼른 들어가서 해치우고 빨리 쉬죠!”

자신이 B급 던전에 들어가서 죽을 뻔한 기억은 싹 잊은 김나연이 해맑게 말했다.

“401호! 401호 훈련생들! 아직 보스룸 안 들어갔죠?”

뒤에서 조교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우리를 불렀다. 급히 뜀박질해서 달려온 그는 보스룸 앞에 서 있는 우리를 보고 한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실전에 강하시네요. 그래도 보스룸은 지금까지 지나온 몬스터들보다 위험도가 높으니 제 통솔 아래에 레이드를 진행하겠습니다.”

그러면 보스룸 앞에서 기다리라고 하던지. 먼저 레이드하고 있으라는 말만 하면 어떡해.

아무래도 초보자들끼리는 무서워서 보스룸에 못 들어가고 있을 거라 예상했던 모양인데, 만약 내가 EX급이 아니었다면 오늘 401호 훈련생들은 B급 던전에서 전멸이었다.

내 정체가 밝혀질 위험만 아니었으면 직무 유기로 확 찌르는 건데.

못마땅해하는 표정으로 혀를 차고 E급 던전의 보스룸으로 앞서 들어가는 조교의 뒤를 따랐다.

『던전 보스 몬스터 ‘그레이트 리자드맨(5급)’이 나타났습니다.』

다른 이들의 성장을 위해서 이 사기캐 치트키는 한발 빠져 주지.

확실히 조교가 지켜보고 있으니 안심되는지 한결 안정된 포즈로 보스 몬스터를 향해 연속으로 화살을 날리는 진솔과 조교의 조언에 따라 리자드맨의 도끼를 막는 실드를 펼치는 김나연.

그리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들어가는 천세연의 힐과 버프.

레이드의 정석을 지켜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굳이 내가 끼지 않은 이유는 저 보스 몬스터가 페리가 살짝만 장난식으로 물어도 죽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또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막타를 양보하세요, 양심 없는 관리자님!’ 문구가 뜨며 내 속을 뒤집겠지.

내가 구경만 하고 있자 조교가 슬그머니 제안을 건네왔다.

“이채현 훈련생도 테이밍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글쎄, 테이밍 스킬은 없다니까? 복종하게 만드는 방법은 있어도 말이야.

마기로 짓누르자니 아까 룸메이트들이 구토하고 코피 흘린 게 마음에 걸리고, 여기서 몸을 빼자니 아무것도 안 한 사람으로 조교의 눈에 각인될 것 같고.

『마왕의 권능 ‘복종’을 실행합니다.』

쿵, 거대한 리자드맨이 짓누르는 힘에 의해 강제로 무릎을 꿇었다. 권능이 내 세계의 마수뿐만 아닌 다른 차원의 몬스터들에게도 먹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어떤 페널티가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예를 들면 다른 차원의 몬스터들은 몇 급 이하만 복종시킬 수 있다든가.

“우와, 언니 능력이에요?”

눈이 커진 김나연이 멋있다고 내 팔에 매달려 왔다. 진솔의 화살이 보스 몬스터의 목과 심장을 꿰뚫음으로써 레이드가 끝났다.

조교가 보스룸 가장 안쪽에 있는 던전의 핵을 박살 내자 게이트 클리어를 알리는 상태창이 모두의 눈앞에 떴다.

『게이트 클리어!』

“왜 게이트가 안 닫히는 거죠?”

“지금 닫히면 큰일 나죠. 사람이 다 빠져나가면 그때 자동으로 닫힙니다. 그래서 클리어하고 모두 나와도 게이트가 닫히지 않으면 다시 들어가 생존자 수색에 나서곤 하죠.”

진솔의 물음에 한 것도 딱히 없으면서 은근슬쩍 핵을 제가 박살 내 경험치를 챙긴 조교가 자세히 답했다.

시간제한은 아무래도 연결을 끊었을 때만 주어지는 모양이었다.

나 혼자만 이중 던전의 기억을 안고 우리 방은 무사히 오후 5시 전까지 복귀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우리는 레이드 인원만 차츰 늘려 가며 D급, C급, B급 게이트 레이드를 뛰었다.

B급 게이트 레이드는 무려 기수의 절반인 스물다섯 명이 한 팀이 되어 게이트에 들어갔으며 조교단뿐 아니라 협회 공대까지 동행했다.

“어, 어어? 몬스터 놓쳤다!”

“저거 잡아! 원거리 딜러 어딨어?”

“악! 제 쪽으로 스킬을 날리면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물론 숫자가 늘어났다 한들 훈련생 레이드 팀이 오합지졸 애송이 집합체라는 건 변함이 없었지만.

협회 공대는 이런 훈련생들을 한두 번 본 게 아닌지 웃겨 죽을 것만 같은 시트콤적 상황이 빵빵 터지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훈련생들이 놓친 몬스터를 잡고 샛길로 새려 하는 훈련생을 익숙하게 제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 기수는 훌륭하네요.”

공대원 한 명의 감탄을 들으며 눈을 깜빡였다. 예? 저게요?

“부상자도 없고 기절한 사람도 없고 울다가 탈진한 사람도 없고 스킬 빗맞았는데 자기에게 일부러 날린 거라고 주먹 날리는 사람도 없고,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거죠.”

당신은 대체 지금까지 어떤 레이드를 지켜봐 왔던 것입니까…….

B급 게이트 레이드를 사고 없이 무사히 마치고 이제는 집처럼 익숙해진 연수원 기숙사로 다시 돌아왔다.

벌써 날짜는 17일. 이제 일정은 A급 게이트 레이드와 퇴소식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3일 후면 집 가네.”

내 중얼거림에 김나연이 환한 목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진솔이 웃으며 김나연에게 장난식으로 물었다.

“나연아, 우리들이랑 헤어지는 게 그렇게 좋아?”

“에이, 솔 언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해요. 어차피 나가도 다시 만날 수 있잖아요. 설마 이 중에서 연락 씹는 사람 나오는 거 아니죠?”

예상 가는 사람이 있긴 하다. 바로 나. 마계에서의 연락 트라우마로 인해 나는 연락을 잘 안 하는 편이었기에.

[천우현 - 그래도 3일 후면 퇴소네요]

[천우현 - A급 게이트는 확실히 난이도가 다르니까 꼭 몸조심하세요] 오후 7:00

이렇게 먼저 연락해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이었다면 ‘랭킹 1위가 난이도가 다르다고 할 정도면 얼마나 위험한 게이트지?’라며 걱정했겠지만 이미 A급 게이트를 솔플하여 닫은 경험이 있는 난 내가 얼마나 강한지만 새삼 다시 깨달을 뿐이었다.

A급 게이트? 정확히 10분 컷이던데. 물론 내가 클리어한 게이트는 오직 보스 몬스터밖에 없었지만.

[별걱정을]

[저 우현 씨보다 강한 거 아시잖아요ㅎㅎ] 오후 7:02

[우현 씨 여동생은 제가 잘 챙길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오후 7:03

답장을 보내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얼른 시간이나 갔으면 좋겠다. 연수원에서 나가면 일단 제대로 된 음식부터 사 먹어야지.

* * *

A급 게이트에 들어가기 하루 전. 임 조교가 훈련생 전체를 소집했다.

그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강의실에 모인 훈련생들을 천천히 돌아본 임 조교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이제 단 하나의 게이트 실전만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겪어 온 실전으로 인해 여러분들의 실력에 자신감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벼락같은 소리침에 모두의 시선이 임 조교에게로 집중되었다. 순식간에 긴장 어린 분위기가 조성됐다.

“내일 들어갈 A급 게이트는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들어갔던 게이트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제 말 이해하겠습니까?”

“예!”

오랜만에 군기가 잡힌 훈련생들이 입 모아 대답했다.

“내일은 19기 전체가 레이드 인원이며 게이트에는 저희 조교단뿐만 아니라 협회 공대와 적벽 길드 공대까지 함께 들어갑니다.”

무시무시한 라인업에 게이트의 위험성을 실감했는지 훈련생들의 표정이 긴장으로 어두워졌다.

“저희 연수원 측은 여러분의 안전 및 무사 귀환을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니 여러분들 역시 저희를 믿고 협조를 부탁합니다. 알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게이트 내에서 개인행동 절대 금물입니다. 만약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 즉시 게이트 밖으로 내보내겠습니다. 레이드 중 부상을 제외하고는 자의든 타의든, 다른 이유로 게이트 밖으로 나간 사람은 수료증은 받을 수 없습니다.”

옆에서 진솔이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 같았으면 ‘어떡해요, 언니.’ 이러면서 내게 붙어 왔을 김나연도 진지한 표정으로 임 조교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내일만 무사히 넘기면 여러분들은 정식 헌터가 되어 연수원을 퇴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내일의 A급 게이트 레이드가 안전하고 성공적인 레이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 컨디션 조절 잘 하시고 이만 해산!”

임 조교의 말이 끝났지만 사람들 절반은 강의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내일의 레이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18기까지 부상자는 있었지만 사망자는 없었대요.”

열심히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던 김나연이 뉴스 기사를 화면에 띄워 우리에게 내밀었다.

판소 주인공급인 천세연을 힐긋 보며 생각했다.

소설을 보면 항상 주인공이 이런 곳을 들어갈 때 최초가 생기곤 하지. 이를테면 예상외의 상황 혹은 사고라든가, 최초의 사망자라거나.

아무래도 내 예상으로는 이번 A급 게이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소설 클리셰는 둘째 치고 천세연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한테 피해만 안 오면 되지, 뭐. S급도 아닌 A급 게이트에 나한테 해를 끼칠 수 있는 게 설마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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