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헌터 연수원 (1) (10/33)
  • 10. 헌터 연수원 (1)

    “자, 보던 거 모두 집어넣으세요. 휴대전화 전원은 꺼 주시고요. 시험은 10시 반부터 11시 반까지 총 한 시간입니다. 강의실 퇴장은 11시부터 가능하세요.”

    드디어 대학교 4학년 1학기 기말고사의 마지막 시험이 시작되었다. 이번 학기에 18학점을 듣느라 개고생한 덕분에 다음 학기에는 널널하게 6학점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게이트에 휩쓸리고 S급 스토커가 붙고 내가 게이트 사태의 원인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게 된 중간고사 때와는 다르게 그때의 일로 멘탈 단련이 되어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게 된 나는 기말고사 공부를 제법 했다.

    학점 F만은 피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직감이 발동됩니다.』

    『직감이 발동됩니다.』

    『직감이 발동됩니다.』

    『직감이 발동됩니다.』

    직감과 공부의 콜라보로 막힘없이 문제를 풀고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오는 내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3일 밤샘 공부의 결과였다.

    일단 집에 가서 못 잤던 잠부터 푹 자고 여름방학 여행 계획 세워야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취방 원룸 건물로 돌아오자 언제나 비어 있던 편지함에 봉투 하나가 꽂혀 있었다. 헌터 협회에서 보낸 우편물이었다.

    ‘설마 이세혁 씨가 양심에 못 이겨 날 고발한 건가……?’

    그랬기만 해 봐. 당장 아현이에게 이세혁 씨랑 헤어지라고 바람 넣을 거다.

    우편물을 무슨 폭발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끝으로 잡고 조심스럽게 자취방까지 들고 온 나는 곧바로 방바닥에 편지를 내팽개쳤다.

    진짜로 고소장이면 어떡하지? 나 지금 전 재산 50만 원밖에 없는데. 벌금 300만 원 나왔을까? 최소 300이던데 300만 원보다 더 나왔으면 어떡하지?

    잘못이 있어 지레 찔린 터라 불안감에 엄지손가락을 초조하게 물어뜯다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편지 봉투를 개봉했다.

    ‘휴우.’

    다행히도 고소장이 아닌 헌터 연수원 입소 안내장이었다. 안내장을 펼쳐 당부 사항을 꼼꼼히 확인했다.

    입소일은 7월 1일. 입소 기간은 7월 1일부터 7월 20일까지.

    훈련 21시간, 인성교육 8시간, 실전 다섯 번을 모두 마쳐야만 수료증을 받을 수 있음.

    개인 무기 소지 불가. 생필품과 식사는 연수원에서 제공. 개인 준비물은 옷가지와 본인에게 필요한 물품, 발광 아티팩트.

    달력을 슬쩍 보니 입소 날까지 D-10이었다.

    내 주변 헌터 중 백아현과 윤세인은 연수원이 지어지기 전부터 헌터 활동을 했으므로 연수원 생활을 겪어 본 적이 없었고 그 둘과 같은 세대인 민서 언니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므로 패스.

    그래서 난 연수를 들었을 만한 사람에게 무작정 메시지를 보냈다.

    [우현 씨, 혹시 연수 마쳤어요?] 오후 1:30

    답장은 빨랐다. 내가 원하던 답장이었다.

    [천우현 - 네, 저는 6월에 연수 신청했습니다] 오후 1:31

    [그러면 연수원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저 7월 연수거든요ㅎㅎ] 오후 1:32

    페리를 쓰다듬으며 나른하게 하품한 나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문자로 이야기하려나, 아님 전화 통화로 이야기해 주려나. 그 사람 은근 목소리 듣기 좋아서 기왕이면 통화가 좋은데.

    [천우현 - 그러면 우리 만나서 이야기할까요?] 오후 1:33

    [천우현 - 언제 시간 괜찮으신지 편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오후 1:34

    “페리, 굳이 만나자고 하는 것도 그린 라이트일까, 아니면 내가 또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걸까?”

    내게 하품이 전염됐는지 입을 쩌억 벌려 하품한 페리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강한 햇살이 커튼 틈새로 부서지듯 비쳐 들어왔다.

    긍정의 답장을 보내고는 방 천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던 마왕성의 내 넓디넓은 침실이 떠올랐다.

    족히 사람 열 명은 뒹굴어도 될 정도로 넓었던 침대와 방 이곳저곳을 채운 화려한 고급 장식품, 고급 천으로 된 침대의 휘장과 벽의 커튼, 벽난로가 항상 켜져 있었음에도 서늘한 방의 공기.

    서늘하고 어두컴컴한 방, 홀로 넓은 침대 한가운데에서 웅크려 자는 동안 안락했던 내 본가의 방을,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이 자취방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전쟁까지 불사하며 힘들게 쟁취해 낸 이 평화가 깨지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나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기분이 좋은 건지 페리가 골골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몸 위로 살며시 내리쬐는 햇볕이 따스했다. 드디어 여름방학의 시작이었다.

    * * *

    “20일간 연수원에서 지내며 능력 훈련을 받아요.”

    조곤조곤한 천우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머그잔에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오늘 만난 카페는 크로플 맛집이었다.

    “먼저 입소하면 간단히 입소식을 하고 OT 후 다음 날부터 교육이 시작됩니다.”

    “첫날 OT는 짧게 끝나죠?”

    “네, 두 시간 정도로 끝나고 같은 기수 연수생들끼리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진 후 기숙사에 짐을 풀 시간을 줍니다.”

    20일 동안이나 집 떠나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고 살아야 한다니. 애쉬가 또 엄청 울상이겠구나.

    따라간다고 달라붙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세이블에게 네 대자 좀 마계에 꽉 잡아 놓고 있으라고 명령 좀 내려야겠다.

    “인성교육은 하루에 네 시간씩 이틀 동안 이루어지고 3일째 되는 날에 간단한 테스트를 봐요. 중학교 도덕 시험 정도의 난이도라 낙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중학교 도덕 시험 난이도라, 그러면 인성교육에서 탈락해서 수료증 못 받을 일은 없겠네.

    “혹시 인성교육 시간에 연수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졸면 깨우거나 그러지는 않죠?”

    “예, 그냥 강의식으로만 진행됩니다.”

    좋아, 인성교육 시간은 수면 시간이다. 뒷자리에서 네 시간 동안 푹 자야겠다.

    “훈련은 하루에 세 시간씩 의무 훈련 시간이 있고 그 후 일정은 모두 자율입니다.”

    “의무 훈련 시간 끝나면 쉬어도 되고요?”

    “물론이죠. 그 시간만 끝나면 조교들도 따로 터치하지 않습니다.”

    수련회 1박 2일도 죽을 맛이었는데 19박 20일이라니, 벌써부터 고생길이 보이는 듯했다.

    “훈련은 같은 직업군인 조교가 트레이닝을 이끌어 주긴 하는데 채현 씨 같은 희귀 직업의 경우는 대부분 그냥 홀로 자율 훈련이더라고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빤히 보던 천우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훈련 시간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테이밍 스킬이… 진짜 있나요?”

    맞다, 천우현은 내가 테이머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 테이밍 스킬이 진짜 있을 리가. 고개를 저은 거로 부정을 표하고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연수원에서 훈련용 마수를 구해서 제게 가져다줄 것도 아니고, 그냥 페리 한 번 소환했다가 역소환해야죠, 뭐.”

    훈련 시간도 꿀 빠는 시간이 될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 천우현이 다음 설명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실전은 헌터들의 통솔하에 A, B, C, D, E급 게이트에 들어가 실전 레이드를 겪는 건데요, A급 게이트는 마지막 날에 들어가고 조교뿐 아니라 협회 공대와 적벽 혹은 러스터 길드도 함께하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혹시 발광 아티팩트는 구매하셨을까요?”

    “네, 어제 샀어요. 내일 배송 온대요.”

    스케줄 은근 빡빡하네. 방학인데 쉬지도 못하고 이게 뭐야. 한숨을 푹 내쉬자 둥글게 눈꼬리를 휘어 웃은 천우현이 나를 달랬다.

    “그래도 연수 과정이 나름 도움이 됩니다. 실전에 곧바로 투입도 가능하고 연수원 동기들끼리 친해져서 헌터 인맥을 쌓기에도 좋고요.”

    “제가 낯을 좀 가려서 모르는 사람들하곤 친해지기가 좀…….”

    “아는 사람은 있을 거예요. 저희 세연이도 7월 연수거든요. 8월 연수를 신청했는데 전산 오류로 7월에 배정이 되어 버려서…….”

    당신 동생이랑은 걔가 프라푸치노를 내 옷에 엎질러 놓고 사과도 없이 도망갔을 때부터 어색한 사이가 되어 버렸는데요.

    그렇다고 면전에서 당신 동생이랑은 못 친해지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으니 어색하게 안타까움을 표했다.

    “저런, 안타깝네. 8월로 이전은 안 된대요?”

    “네, 8월은 인원이 꽉 차서 이전이 불가능하답니다.”

    그 친구는 복도 없네, 쯧쯧. 혀를 차 주고는 크로플 위에 얹어진 바닐라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진짜 이 나이에 수련회 다시 가는 느낌이네요.”

    내 한탄에 천우현이 그래도 수련회보다는 나을 거라며 웃었다. 당연히 나아야지. 우리 때 수련회는 돈 내고 기합받으러 가는 곳이었잖아.

    조교라는 탈을 쓴 아르바이트생 새끼들이 초중딩 기합 주면서 희열을 느끼는, 지금 생각해도 이해 안 가는 곳. 맨날 ‘지금 여기 놀러 왔습니까?’라면서 호통치는데 그러면 우리가 돈 내고 놀러 왔지 돈 내고 니들한테 기합받으러 왔겠냐고.

    잠깐, 그러고 보니 연수를 마쳤다면 헌터 라이선스를 발급받았다는 것과 일맥상통.

    “헌터증 발급받았어요?”

    “한번 봐 보실래요?”

    슬쩍 묻자 지갑에서 곧바로 헌터 라이선스를 꺼낸 천우현이 내게 라이선스를 내밀었다.

    [HUNTER LICENSE]

    * RN: 353259-726439

    * Hunter name: 천우현

    * nationality: REPUBLIC OF KOREA

    * rank: S

    * class: 1st 무기계(Weapon) / 2nd 검사(Sword)

    오, 신기하다. 아현이는 1st에 힐러(Healer), 2nd에 프리스트(Priest)였는데. 그럼 나는 1st에 법사계(Wizard), 2nd에 테이머(Tamer)이려나?

    S급의 헌터 라이선스는 다른 등급의 헌터 라이선스와는 달리 컬러가 블랙 앤 골드였다. 검은색 바탕에 고급스럽게 새겨진 금색 글자가 조명 아래 반짝였다.

    참고로 A부터 F까지는 새로 바뀐 대한민국 여권 색과 똑같은 네이비 앤 실버.

    확실히 블랙카드 같고 고급지긴 했다. 탐나긴 하지만 색깔만 다른 헌터 라이선스 받겠다고 세계의 관심을 끄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

    현재 냄비의 민족답게 대한민국에서는 슬슬 테이머 이슈 거품이 가라앉고 있었다. 이제 내가 거품 다 빠질 때까지 조용히만 지낸다면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가끔 헌티드에 올라오는 ‘직업군 ㅁㅌㅊ?’ 같은 글에나 비교 대상으로 한 번씩 언급되겠지.

    * * *

    “백야, 혹시 연수원에 아는 사람 있어?”

    입소 이틀 전, 헌터 연수원에 가지고 들어갈 짐을 싸다가 내 침대에 누워 휴대폰 화면을 툭툭 터치하는 백아현에게 묻자 흘러내리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긴 아현이가 무심하게 답했다.

    “있기야 있지.”

    “혹시 네 빽으로 편하게 연수원 생활 할 수는 없니?”

    “왜, 훈련도 안 하시고 하루 종일 기숙사 침대에서 잠만 자려고? 내가 널 모르냐?”

    “으이구, 이 웬수야.” 하고 투덜거린 아현이가 침대 위의 인형을 집어 던졌다.

    내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인형을 탁 낚아채 캐리어에 넣을까 고민하다가 다시 침대로 던졌다. 이 나이에 집 밖에서까지 인형 안고 자긴 좀 그렇지.

    협회가 주관한다 해서 친구 찬스 좀 써 볼까 했더니. 캐리어에 비상용 세면도구를 넣으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만약 조교가 괴롭히거나 나를 빡세게 굴리면 전화할 테니까 꼭 면회 와, 백야. 와서 협회 No. 2로서 기강을 잡아 줘. 설마 휴대폰까지 걷지는 않지……?”

    “무슨 수련회 가는 줄 알아? 거기 조교들도 성인 상대하는 거라서 우리 초중딩 때 수련회 조교들처럼 그렇게 싸가지 없게 못 대해.”

    세탁 시설이랑 세제도 다 구비되어 있으니까 옷 적당히 챙겨 가라고 충고를 던진 아현이가 문득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참, 이채. 협회장이 네게 감사하다고 전해 달래.”

    우리가 그때 우리 동네 S급 게이트 앞에서 만난 이래로 또 만난 적이 있었던가? 도저히 가늠이 안 되는 말에 눈썹을 치키자 엎드리고 있던 상체를 일으킨 아현이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한국대 A급 게이트 이상 현상 말해 줬던 거. 네가 핵 색깔 바뀐 거랑 몬스터 나온 거 이세혁 씨한테 말해 줬다며.”

    그랬었지.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시험기간 동안 쭉 도서관을 게이트가 차지하고 있는 꼴을 보면서 그냥 기절시키고 기억 조작이나 할 걸 뭐 하러 힘든 길 돌아갔을까 한탄도 했었지.

    “역시 던전이 재활성화된 모양이네.”

    “어, 맞아. 하마터면 들어가 있던 채굴단들 전멸당할 뻔했어. 게이트 이상 현상을 보고받은 덕분에 예의주시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즉각 대응 들어가지 않았으면 그 게이트에서 사상자가 스무 명은 넘었을 거야.”

    이 안전불감증 대한민국 국민들 좀 봐라. 내가 말해 줬을 때 재깍 안 닫고 뭐 했어?

    기말고사 끝날 때까지 안 닫더니만 기어이 도킹에 성공하게 만들었구먼. 던전 재활성 사례도 불과 한 달인가 두 달 전에 있었잖아.

    “그래서 지금 그 말은 내 경고에도 채굴하느라 던전을 계속 방치했다는 뜻이지?”

    “누가 흑막 협회 아니랄까 봐…….” 하는 중얼거림에 아현이가 흑막 협회 아니라고 빽, 소리를 질렀다.

    “이놈의 웹소설이 사람들 인식을 다 망쳐 놓고 있어! 뭐만 하면 역시 흑막 협회래! 대체 어떤 놈이 처음 협회를 흑막으로 설정한 거야?”

    부패한 협회와 일 잘하는 관리국은 나름 클리셰……. 가끔 썩어 빠진 적폐 관리국도 등장하긴 하지만.

    “암튼 덕분에 인명 피해 줄였으니까 감사하다고 전해 달래.”

    “아직 그 게이트 안 닫혔지?”

    “응,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에 닫을 듯?”

    휴, 아직 안 닫혔구나. 그렇다면 차원 연결을 영구히 끊을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소리군.

    아무도 게이트에 들어오지 않을 오늘 새벽에 확실히 연결을 끊어 놓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는 투명화 스킬+순간 이동으로 움직일 예정이라 CCTV와 스피드 게이트에 막혀 출입을 들킬 가능성은 0%.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며 계획을 짜는 나를 아현이가 다시 불렀다.

    “아, 맞다. 이채, 돈 꼭 두둑하게 챙겨 가. 컵라면이나 즉석식품, 컵밥도 몇 개 챙기고.”

    “왜?”

    “연수원 밥 더럽게 맛없거든. 식단 괜찮게 나올 때 한 번씩 먹고 매점 털어, 그냥.”

    밥이 맛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절망했다. 아니, 천우현 씨는 왜 이런 가장 중요한 별 다섯 개 고급 정보를 알려 주지 않은 거야?

    모든 인사를 밥으로 하는 한국인에게 밥만큼 중요한 게 또 어딨다구!

    * * *

    잠들기에도 애매하고 밤을 새우기도 애매한 시간인 새벽 3시.

    투명화 스킬을 건 나는 지도에서 한국대 신관 도서관 좌표를 검색했다.

    『순간 이동(S) - 저장된 좌표』

    - 자취방

    - 본가

    - 자연대 건물…….

    『스킬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1인』

    좌표를 찍고 순간 이동을 실행하자 순식간에 자취방에서 도서관 게이트 앞으로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다시 순간 이동을 이용해 스피드 게이트를 통과하려는 순간, 등 뒤에서 한껏 낮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다.

    “야야, 확실한 거 맞지?”

    “확실하다니까! 내가 일일 채굴 팀 지원했다가 직접 겪었다니까. 게이트가 싹 바뀌었다고.”

    “마석도 새로 생긴 거 확실하지?”

    “아, 이 형님이 후퇴하면서 다 봐 놨다. 내 닌X도 스위치를 걸고 말하는데 확실히 새로 생겼어.”

    다섯 명의 복면인들이 내 뒤에 서 있었다.

    곧바로 유선한의 것과 똑같은 CCTV 교란기로 CCTV의 연결을 흩트린 이들은 헌터증 대신 QR코드를 찍고는 유유히 스피드 게이트를 통과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들은 말로만 듣고 뉴스에서만 접했던 현직 게이트 전문 스틸범들이었다. 게이트 안에서는 CCTV가 작동되지 않는다는 걸 악용하는 도둑놈들.

    어쩌다 보니 얼떨결에 투명 인간의 모습으로 게이트 전문 스틸범들과 동행하게 되어 버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A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덕분에 좌표 계산할 필요 없이 편하게 들어왔긴 한데…….

    “와이씨, 대박! 진짜 마석 새로 생겼네!”

    “야야, 얼른 떼어 내서 담아! 인벤토리 싹 비우고 왔지?”

    “공기 더럽게 건조하네. 무슨 사막이야?”

    목을 건조하게 쿡쿡 찔러 오는 따가운 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틸범들은 열심히 곡괭이질하여 채굴한 마석을 자루에 쓸어 담고 있었다.

    물론 투명화한 나한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걸음을 빨리하여 핵이 있는 보스룸으로 향했다.

    전에 보았을 때만 해도 푸른색과 초록색이 반반으로 섞여 있던 핵은 이제 완전히 초록색이 되어 있었다. 핵을 덮고 있던 기분 나쁜 검은 덩굴은 보이지 않았다.

    『던전 보스 몬스터 ‘스콜피언 킹(1급)’이 등장합니다.』

    거대한 검은색 전갈이 어둠 속에서 스스슥 기어 나왔다. 감각이 예민한 건지 보스 몬스터는 곧바로 투명화 스킬을 유지 중인 내 앞으로 다가왔다.

    “킹?”

    턱을 쓱 쓰다듬으며 내 머리에서 한참 위에 있는 스콜피언 킹의 눈을 올려다보고는 비소 섞인 물음을 던졌다.

    위협하듯 검은 독이 뚝뚝 떨어지는 독침을 내 눈앞에 휘두르는 스콜피언 킹이 밟고 있는 바닥에서 검은색 그림자가 치솟았다.

    뾰족한 가시처럼 치솟아 오른 마기가 스콜피언 킹의 단단한 껍질을 꿰뚫었다.

    상태창은 내게 있어서 있으면 편한 것이었지만 순간 이동 좌표 저장 말고는 굳이 필요하지는 않은 것이었다. 마계에서 500년 동안 반복해 온 전투 방식에 상태창 따윈 없었으니까.

    내 명령에 따라 마기가, 마력이 요동쳤다.

    지독히도 첨예한 기운이 스콜피언 킹을 노리고 사방에서 쏟아졌다.

    난 지금 빈집에 슬그머니 눌러앉아서 감히 도서관 신관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여 포커스와 불편한 시간을 보내게 만든 차원 #SF789-1 놈들에게 매우 유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나를 향해 꽂혀 들어오는 독침을 실드로 막자 실드에 꽂힌 독침에서 시커먼 독이 뚝뚝 떨어져 실드를 타고 흘러 바닥을 치이익, 부식시켰다.

    혹시나 스틸범 놈들이 보스룸으로 들어올까 봐 마기로 보스룸 입구를 틀어막고는 피식 웃으며 투명화를 해제했다.

    “그쪽이 킹이라면 이쪽은 제왕이라서.”

    Evil Overlord. 마왕(魔王).

    그 이름에 걸맞게 오랜만에 억누르고 또 억누르고 있던 마기를 반쯤 풀었다.

    땅이 잘게 진동하고 공기마저도 미지의 두려움에 떨려 왔다. 희열 어린 웃음이 절로 얼굴에 걸렸다.

    잠깐 평화를 누렸다고 맹수가 초식동물이 되는 건 아니지.

    똑똑히 봐라. 너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지배자의 얼굴을. 감히 내 세계를 침범하려 한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까 건방지게 올려다보지 말고…….”

    풀려난 마기가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한곳만을 덮쳤다. 쿵, 거대한 몸체가 바닥으로 짓눌렸다.

    드디어 눈높이가 맞는 전갈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며 한쪽 발을 들어 전갈의 머리를 콱 짓밟았다.

    “꿇어.”

    드디어 내 밑으로 내려간 시선에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어딜 감히 나를 올려다보려고 해?

    콰직, 완전히 짓눌린 채 마기 밑에 으깨진 스콜피언 킹의 사체에서 망설임 없이 발을 뗐다.

    『던전 보스 몬스터 ‘스콜피언 킹(1급)’을 처치했습니다.』

    『관리자는 경험치를 받을 수 없습니다.』

    『좀 다른 인간들에게 양보하시라고요, 양심 없는 관리자2님.』

    아니, 지금 상황이 양보할 상황이 아니었잖아!

    그럼 내가 스틸범 놈들 불러와서 ‘저기요, 이거 제가 거의 다 잡아 놨는데 제가 관리자라서 경험치를 못 받는다네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막타 치실래요?’ 이러리?

    스콜피언 킹의 사체를 사뿐히 지르밟고 던전의 핵으로 향한 나는 곧바로 핵에 손바닥을 얹었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차원 #SF789-1과의 연결을 영구히 끊으시겠습니까?』

    “허가. 느그 집으로 가라.”

    『차원의 연결을 끊어 냈습니다.』

    『게이트가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 - 00:05:00』

    5분 안에 이 게이트를 나가지 않으면 차원에 휘말려서 운 좋으면 그대로 차원 #SF789-1로 넘어가는 거고 운 나쁘면 몸이 터져서 죽는 거다.

    마기를 갈무리한 후 투명화 스킬을 다시 걸고 후다닥 보스룸을 뛰쳐나와 게이트 쪽을 향해 달려가자 시커메진 안색으로 바닥에 뒹굴고 있는 던전 스틸범들이 보였다.

    “우욱! 속이……!”

    “방금 그거 뭐야? 대체 무슨 괴물이 던전 안에 있는 건데!”

    “흔들, 지금 던전이 흔들리고 있…….”

    “X발, 던전이 흔들린다고! 대장! 우리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푼 마기에 미약하게나마 영향을 받은 모양이었다.

    “헛소리하지 마! 이 자루까지는 채우고 나간다! 지금 나가는 새끼는 다시는 이 파티에 발 못 붙이는 줄 알아라!”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꿋꿋하게 곡괭이질을 계속 이어 나가는 남자의 뒤통수를 빡, 후드려 깠다.

    3분밖에 안 남았는데 채굴은 무슨 채굴이야. 뒤지기 싫으면 빨리 나가, 인마.

    그들을 짓누르고 속을 뒤집은 마기에 이어 보이지 않는 손의 사정없는 터치로 겁을 잔뜩 집어먹은 던전 스틸범들은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게이트를 뛰쳐나왔다.

    그들이 게이트를 막 나오기가 무섭게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던 게이트가 마구 일그러지고 소용돌이치더니 점차 크기를 줄여 갔다.

    마침내 게이트가 완전히 소멸하고, 긴 시간 게이트에 삼켜져 있었던 한국대학교 도서관 신관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뭐, 이 새끼야? 이 자루까지는 채우고 나가? X발, 너 때문에 시체도 못 찾고 개죽음당할 뻔했잖아!”

    “이 새끼가 하극상을 처해 대네? 죽다가 살아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냐?”

    “대장이라고 불러 주니까 지가 뭐라도 된 줄 아네. 좀도둑 대가리 주제에.”

    “지금 말 다 했냐? 야, 너 이리 와 봐.”

    “아, 형님. 이번에는 형님이 좀 너무했슈. 까딱하면 형님 때문에 우리 다섯 명 싸그리 실종될 뻔했잖어.”

    “야! 너 지금 내 앞에서 저 새끼 편드냐?”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CCTV 앞에서 멱살잡이를 하며 신명 나게 싸워 대는 던전 스틸범들을 지켜보다가 혀를 쯧쯧, 차며 몸을 돌렸다. 저 CCTV 신호 교란은 하고 싸우는 건지 모르겠네.

    아직 태양이 뜨지 않은 새벽하늘은 어두컴컴했다. 그럼 이제 내 할 일은 다 끝났으니 집에 가서 잠이나 푹 자 볼까?

    『순간 이동(S) - 저장된 좌표』

    - 자취방

    - 본가

    - 자연대 건물…….

    『스킬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1인』

    자취방 좌표를 선택하고 뒤바뀌는 시야를 보며 생각했다. 아냐, 그래도 역시 상태창은 꼭 있어야 하는 것 같아.

    * * *

    7월 1일. 드디어 연수원의 입소 날이 다가왔다.

    하루 동안 헌티드에서 열심히 연수원을 검색한 결과,

    HUNTED

    [자유게시판] 연수 시즌이 돌아왔으니 훈련 땡땡이치는 법 알려 드림

    20XX-06-29 14:30 조회: 1,472 작성자: 노투모로우

    만약 훈련 초반부터 꾀병 부리면서 드러누우면 시간 인정을 안 해 줘서 남들 쉴 때 훈련을 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므로 훈련 시작하고 한 시간 후쯤에 꾀병을 부리도록 해라.

    난 통으로 훈련을 빼고 싶다, 이런 연수생들은 팁 하나 알려 줄 테니 잘 들어라.

    매점에서 음식을 사 먹고 배탈 났다고 드러누우면 된다. 협회 새끼들 귀찮은 건 오질나게 싫어해서 식중독 어찌고 검사 나오는 거 막으려고 훈련 시간 인정해 줄 테니 약 먹고 푹 쉬라고 널 기숙사로 보내 줄 거다.

    물론 주의 사항이 있다. 너무 자주 하면 당연히 들키겠지? 만약 여럿이서 할 거면 제발 음식 종류라도 맞춰라. 매점 모든 종류의 음식이 상했다고 지랄하다가 들키지 말고.

    댓글(11)

    마젠가: 건빵 상했다고 우겨서 훈련 시간 추가된 븅딱 생각나네ㅋㅋㅋㅋ

    Tvrig: 그런데 꾀병 부린다고 ㄹㅇ루 들어 먹힘?

    └노투모로우: 연기를 할리우드 배우급으로 하면 당연히 들어 먹히지

    겟썹: 제일 만만한 게 우유임 서X우유 200ml 재고 딱 하나 남았을 때 사서 원샷 때리고 30분 후에 바닥에서 배 잡고 뒹굴어라 이게 ㄹㅇ 백전백승이다

    …….

    [자유게시판] 나 연수원 2기인데 연수원 급식업체 아직도 안 바뀌었냐?

    20XX-06-28 03:00 조회: 3,128 작성자: 네이비블랙

    내가 1X 군번인데 X발 군대 밥보다 더 맛대가리 없는 밥은 연수원에서 처음 먹어 봤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도 급식 존나 맛없기로 유명했는데 그 급식이 미슐랭으로 느껴질 정도로 맛없더라 매점 없었으면 진짜 굶어 죽었을 거임

    나 진짜 진지하게 정부에서 각성자 수 줄이려고 수 쓰는 거 아닌지 고민했다 한곳에 모아서 굶겨 죽이려는 정부의 빅픽처가 아닌가…….

    댓글(33)

    레이블K: 협회 고위 인사랑 급식업체 대표가 친척 간이라는 카더라가 있던데

    새내기빠악: 올해 5월 기수(17기)인데 맛 X나 없음 XX

    MNM: 조교 개1새끼들 급식 안 먹고 나가서 사 먹더라 ㅅㅂㅋㅋㅋ

    └MNM: 우리한테는 국민의 세금 ㅇㅈㄹ 하면서 다 처먹으라고 지랄하더니

    └뉴인: 협회 산하기관인데 왜 국민의 세금이야?

    └유플리스: @뉴인 정부지원금 받으니까

    차세리: 매점 가격 솔직히 너무 비싸ㅠ

    18757: 올해 7월 기수들아 저 정부 빅피처 개소리 같지? 급식 한 술 떠먹어 봐 혀끝 미뢰부터 시작해서 온몸으로 그 말을 이해하게 될 테니

    …….

    [자유게시판] 연수원 근처 편의점 및 맛집 모음

    20XX-06-30 7:30 조회: 11,010 작성자: 내가바로너희들의빛과소금이니라

    (지도)

    자매통닭(pm 3:00~am 1:00) 010-3XXX-8XXX

    bcq(pm 12:00~pm 11:30) 010-7XXX-1XXX

    서해수산회직판센터(pm 12:00~am 12:30) 010-4XXX-6XXX

    불불이통족발(pm 4:00~am 2:00) 010-5XXX-9XXX

    …….

    사천반점(pm 12:00~pm 10:00) 010-8XXX-8XXX

    먹는 걸로 외출 잘 안 끊어 주고 나갔다가 걸리면 수료증 안 준다고 지랄하니까 안 들키게 조심히 나가셈

    댓글(174)

    ehowlsms: 빛과소금님 당신이 바로 제 지저스이자 붓다이자 알라이십니다

    djg1241: 사람을 꼭 의학 기술로만 살리는 게 아니다 이런 친절한 글로도 충분히 사람을 살릴 수 있다

    하리: 자매통닭 옛날 양념통닭 진짜 개개개개개맛있음 저녁마다 연수원에서 동기들끼리 이것만 시켜 먹다가 5kg 쪄서 나옴

    └하리: 서해수산 여기는 비싸긴 겁나 비싼데 회 양 X나 적어서 비추

    치킨교신자: 자매통닭은 프라이드 반 양념 반보단 간장 반 옛날 양념 반으로 시켜 먹어라 이게 진리다

    K준K: 편의점은 후문 쪽 편의점이 더 멀긴 한데 조교들 그쪽으론 잘 안 돌아다님ㅇㅇ

    베알제붑: 사천반점 가지 마라 돈 버린다

    네 저는 빡대가리입니다 그리고: 혹시 부모님 면회는 불가능함?

    └asfjdlk: @네 저는 빡대가리입니다 그리고 연수원이 무슨 군대냐? 20일따리를 면회를 왜 와 ㅅㅂ

    …….

    꽤 쓸 만한 정보들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연수원 근처 맛집 모음 게시글은 스크랩에 캡처까지 해 놨다.

    입소 시간은 오전 10시였고, 지금 시간은 오전 9시였다.

    각성자 등록 신고서와 지갑을 챙겼는지 확인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편의점에서 피난급으로 쟁여 온 컵라면과 컵밥, 즉석식품과 과자들을 24인치 캐리어에 집어넣고 캐리어를 들고 원룸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아현이의 차가 원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트렁크에 캐리어를 집어넣고는 조수석에 타자 패션 선글라스를 쓱 올린 아현이가 물었다.

    “이채, 내가 연수원에 세탁 시설 있다고 말 안 해 줬던가?”

    “말해 줬지. 그래서 옷 많이 안 챙겼어.”

    “그런데 캐리어를 왜 저렇게 큰 걸 가져가? 무슨 이민 가는 줄 알겠네.”

    “매점 가격이 비싸다고 해서 컵라면이랑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까…….”

    굶어 죽을 수는 없잖아. 머쓱한 웃음에 백아현이 혀를 찼다.

    차는 한참을 달리고 달려 헌터 연수원 앞에 도착했다. 휘날리는 현수막에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헌터로 발돋움할 19기 여러분들의 입소를 환영합니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20일 동안 무사히 버티렴, 이채. 이 언니가 보고 싶으면 전화하고. 물론 올지, 안 올지는 내 마음이지만.”

    뭐가 그렇게 웃긴지 까르륵 웃은 백아현은 나를 내려 주고는 쌩 연수원을 빠져나갔다. 연수원 앞에 홀로 남겨진 나는 캐리어를 질질 끌며 터덜터덜 연수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본인 확인 후 입장 가능이라는 팻말에 로비 데스크로 다가가 직원에게 민증과 각성자 등록 신고서를 내밀었다.

    “이채현 님 맞으시죠? 7월 연수 신청하셨고요.”

    “네.”

    “짐은 저쪽에 맡겨 주시고요, 이거 작성해서 캐리어에 붙여 주시겠어요?”

    명단에 서명하고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고 캐리어에 붙인 후 캐리어들이 줄지어 있는 곳을 향해 캐리어를 끌고 다가갔다. 캐리어 줄 끝에 슬쩍 내 캐리어를 합류시켰다.

    여름인데도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놓았는지 연수원 건물 내부는 제법 서늘했다.

    A4로 인쇄해 놓은 표시를 따라 입소식 진행 장소인 소강당에 도착해 적당한 자리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입소식 순서가 커다랗게 모조전지에 인쇄되어 강당 벽에 붙어 있었다.

    잠시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헌터 연수원의 역사를 되짚어 보자면 헌터 연수원은 게이트 사태가 터지고 정확히 6개월 후에 생겼다. 그래서 연수를 받지 않은 초기 각성자들은 헌터들끼리 기수를 따지는 걸 매우 싫어한다(고 백아현에게 들었다).

    각성한 헌터들이 무작정 게이트에 들어갔다가 능력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게이트 안에서 죽어 나가는 비율이 늘어나자 협회와 관리국이 머리를 맞대고 짜낸 최선의 방법이었다.

    최소한 제 능력을 어떻게 다루는지 훈련은 시키고 게이트 안에 들여보내자! 이것이 연수원의 설립 모토였다.

    그리고 헌터들의 일반인 대상 범죄율이 늘어나자 거기에 인성교육까지 추가되었다. 물론 딱히 교화 및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한 기수는 대략 25~50명으로 이루어지며 연수 수료증을 받아야지만 헌터 라이선스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이번 기수는 최대 인원인 50명. 7월, 8월, 1월, 2월의 기수는 항상 50명 개떼 기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달의 기수들은 다른 기수들보다 기수 동기 간의 끈끈함이 없다고.

    ‘나야 좋지.’

    헌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것도 아닌데 굳이 헌터 인맥 따위는 필요 없거든. 여기에서 인맥 쌓아 봤자 길드 못 들어간 헌터들이 모여서 그 게이트 스틸범들처럼 파티 생성하는 것밖에 더 돼?

    10시에 가까워지자 소강당에 들어온 사람들이 빠르게 자리를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아는 얼굴이 있을까 소강당에 앉은 사람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익숙한 얼굴과 시선을 마주했다.

    휙, 천세연이 먼저 불편한 얼굴로 내 눈을 피했다.

    천우현 때문에 거의 반강제적으로 일방적인 내적 친밀감을 쌓아 온 나는 천세연이 내게 보이는 저 반응이 참 당황스러웠다.

    아니, 내가 대체 뭘, 어쨌다고 그래? 먼저 음료 내 옷에 끼얹은 건 그쪽 아니야?

    * * *

    10시 정각이 되자 입소식이 시작되었다.

    “지금부터 헌터 연수원 19기 입소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국민의례가 있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있는 국기를 향해 주시기 바랍니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약식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헌터 협회장 김도빈의 간단한 축사와 연수원 설립 역사, 어쩌구저쩌구, 아무튼 지루한 과정이 쭉 펼쳐졌다.

    내가 입은 게 반팔 티인지 교복 하복 셔츠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학교 조례 온 거 같아…….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는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고 있어도 식은 계속 진행되었다.

    “다음으로는 입소자 대표 선서가 있겠습니다. 이채현 훈련생, 앞으로.”

    선서까지 나오면 이제 거의 끝났구나. 입소식 끝나고 OT 두 시간 하면 자유 시간이랬나. 잠결에 선서라는 단어를 듣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채현 훈련생?”

    당황한 사회자의 목소리에 비몽사몽 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아, 이채현 나가라잖아. 빨리 안 나가고 뭐, 하…….

    …나구나, 이채현이.

    아직 빙의한 몸에 적응 안 된 빙의물 주인공 같은 대사를 치며 내게로 쏠린 시선에 빠른 걸음으로 단상 위로 올라갔다.

    왜, 대체 왜 나한테 선서를 시키는 거냐고. 이런 건 원래 최연장자가 하는 게 국룰 아니었냐고. 안 그래도 전 세계에 얼굴 팔려서 서러운 사람한테 왜 이래.

    이를 박박 갈며 선서문을 넘겨받았다.

    “…나 이채현 외 49명은 다음과 같이 선서합니다. 하나, 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헌터로서 대한민국의 안정과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헌터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하나, 나는…….”

    내가 들어도 맥없고 의욕 없는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소강당에 울렸다. 분위기가 축축 가라앉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그러게 누가 나 시키래.

    “이상 엄숙히 선서합니다. 20XX년 7월 1일, 입소자 대표 이채현.”

    어조 변화 없이 줄줄 선서문을 읽어 내린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협회장 옆에서 선서문을 들고 사진까지 찍고 나서야 단상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입소식을 무사히 마치자 연수원 직원이 대학교 대형 강의실 같은 공간으로 입소생들을 안내했다.

    빨간 캡모자를 쓴 이들이 강의실 앞에 줄줄이 서 있었다. 그중 가장 키가 크고 스포츠 선글라스를 쓴 인상이 험악한 남자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20일 동안 여러분들의 관리를 맡게 된 조교 임현수라고 합니다.”

    남자의 딱딱한 말투와 우리를 바라보는 조교들의 눈빛에 수련회의 PTSD가 슬슬 올라왔다.

    몇몇 입소생 남자들은 눈에 띄게 움찔하거나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저 조교의 복장이 아픈 기억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임현수 조교는 빔스크린에 프레젠테이션을 띄워 기상 및 식사 시간과 시설의 위치, 훈련 커리큘럼과 입소 시 지켜야 할 주의 사항을 줄줄 읊었다.

    하루 일정이 생각보다 더 널널하다. 훈련은 하루에 세 시간만 의무.

    하지만 나는 일정이 왜 이러는지 알고 있지. 개인 훈련 시간은 다 성적으로 매긴다. 그리고 규모 좀 있는 길드와 협회, 관리국의 인사과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성적이 높은 훈련생이 스카우트를 제안받을 거란 건 굳이 말 안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정보 출처는 협회 No. 2라는 백아현이므로 확실할 거다, 아마.

    두 시간의 긴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프레젠테이션의 마지막 장에는 기숙사 방 배정 결과가 나왔다. 방은 4인 1실로 내 방은 401호, 룸메이트는 김나연, 진솔, 천세연…….

    천세연? 이게 웬 날벼락이야. 내가 방에서도 편히 못 지내게 만들려는 누군가의 음모가 분명하다.

    “여러분들의 짐은 방에 도착해 있을 테니 바로 푸시면 됩니다. 원래 저녁 식사 시간은 6시이지만 오늘은 입소식 때문에 점심을 걸렀으므로 4시에 저녁 식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곳에서 두 시간 동안 대기하시며 20일간 함께 지낼 동기들과 안면을 트도록 합니다, 이상.”

    조교가 나간 강의실에는 나서서 여기저기 살갑게 말을 붙이고 다니는 파워 인싸도 있었고 소소하게 옆자리 사람과 인사와 대화를 나누는 외향형 인간들도 있었으며 나같이 휴대폰만 보고 있는 내향형 인간도 있었다.

    [우현 씨 동생이랑 룸메 됐는데요]

    [동생분이 저를 너무 노골적으로 꺼리시는데] 오후 2:07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오후 2:08

    [천우현 - 채현 씨를 싫어하는 건 아니고 세연이가 낯을 좀 가려서요] 오후 2:09

    [천우현 - 아마 자기가 실수한 거 때문에 그럴 거예요]

    [천우현 - 잘 부탁드릴게요] 오후 2:10

    낯을 가리는 것과 나를 껄끄러워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할 만큼 난 둔하지 않았다. 천세연의 태도는 명백히 나를 ‘껄끄러워’하는 거였다.

    단지 음료를 엎은 실수를 저질러서 그렇다기에는 그 정도가 꽤 지나쳤다. 그게 꽤 거슬렸지만 그냥 천우현이 아끼는 그의 유일한 가족이자 여동생이니까 봐주고 있는 거지.

    노골적으로 나를 힐끔거리며 대화 각을 재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태연하게 휴대폰 화면을 엄지로 도도도 두드렸다.

    한참 천우현과 문자를 주고받고 있는데 주태윤의 메시지가 휴대폰 상단에 떴다. 무시하려 했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문자 내용이었다.

    [주태윤 - 오늘 연수원 입소했겠네요] 오후 2:10

    [주태윤 - 채현 씨가 원하신다면 굳이 연수 안 들어도 채현 씨 연수원 수료증 받아 내 줄 수 있는데^^] 오후 2:11

    벌써부터 이 지루한 연수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와 진짜 가능해요?] 오후 2:11

    [주태윤 - 물론이죠]

    [주태윤 - 연수 날짜만큼 저랑 데이트 20일이면 대가는 충분할 것 같군요] 오후 2:12

    [그냥 연수받음 ㅅㄱ] 오후 2:13

    망할, 주태윤이랑 데이트하느니 하루 네 시간씩 인성교육 받고 세 시간씩 훈련하는 게 낫지.

    그때, 누군가가 내 옆의 빈자리에 턱 앉았다.

    “능력 측정실에서 만난 그분 맞으시죠? 인사가 늦었네요, 류사현입니다.”

    기억 속에 있는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돌려 내게 말을 건 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능력 측정실에서 내 뒤 순서에 있던 그 남자다. 혼자 의자 세 개 차지하고 늘어져 있던 1호선 광인 같은 그 인간.

    “네, 이채현입니다.”

    ‘죄다 약해 빠졌군.’이라는 대사를 육성으로 내뱉는 이와는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단답으로 대꾸했다. 거기에 살며시 질문 하나만을 덧붙였다.

    “혹시 등급이 뭐예요?”

    “아, 그때 검사실 들어가셔서 못 들으셨겠구나. C급입니다. C급 검사계.”

    진짜 C급이라고……? 그냥 둘러댄 게 아니라? 눈을 깜빡이다가 내 등급을 궁금해하는 기색을 보이는 이에게 친절히 말해 주었다.

    “전 A급이요.”

    내 입에서 나온 알파벳에 강의실이 잠깐 술렁거렸다. 나를 S급으로 예상하던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던 모양이다.

    나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인 류사현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그냥 내려다보고만 있으니 호쾌하게 웃은 류사현이 입을 열었다.

    “타생지연(他生之緣)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옷깃 스치는 인연도 인연일진대 이렇게 두 번이나 얼굴을 마주하는 게 인연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뭐래, 왜 젊은 놈이 저렇게 올드한 작업 대사를 치고 난리야. 그리고 옷깃은 생각보다 가까이 붙어 있어야지 스친단다.

    “…악수 한 번 하자는 제안치고 타생지연이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지 않나요.”

    마지못해 손을 내미니 류사현이 손을 꽉 잡아 왔다. 관심 가는 이성에게 작업을 거는 행위라기보다는 힘겨루기, 혹은 힘 가늠에 더 가까워 보이는 행위였다.

    그리고 소설로 이런 미친놈 유형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결과 이런 놈들은 받아치면 더욱 흥미를 가지고 집착했다.

    내 주변 미친놈을 더 늘리고 싶진 않아 손에서 힘을 뺐다. 고개를 살짝 갸웃한 류사현이 미련 없이 내 손을 놓았다. 그의 손자국대로 붉게 물든 손을 보며 다짐했다.

    아무튼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절대 엮이지 말아야겠다.

    * * *

    “자, 식당으로 이동합니다!”

    지루했던 두 시간이 지나자 다시 들어온 조교가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보는 급식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만 학창 시절과 다른 건 자율 배식이라는 것?

    정말 딱 봐도 맛없어 보이는 반찬과 푸석한 밥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급식판에 눈곱만큼 밥과 반찬을 담자 옆에 서 있는 조교 하나가 나를 째릿, 노려보았다.

    어쩌라고, 버리는 것보단 낫잖아. 조교를 향해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를 잡고 앉아 밥을 한술 떴다.

    “X발…….”

    누군가가 내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어 주었다. 이런 밥을 먹으면서 훈련을 하라는 거야, 지금? 내가 다이어트 센터에 왔나, 헌터 연수원에 왔나?

    “진짜 맛없어.”

    “차라리 우리가 요리해 먹는 게 낫겠다. 이게 뭐야.”

    “우리 그냥 매점 갈래요?”

    목소리를 한껏 낮춘 속닥거림이 식당에 울렸다. 벌써 몇몇 사람들은 거의 건드리지도 않은 식판을 들고 잔반통을 향해 가고 있었다.

    “조용!”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임현수 조교가 소리쳤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식당에서 그가 말을 이어 나갔다.

    “이건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받은 식사입니다. 불평불만 터트리지 말고 남기지 않고 싹싹 먹습니다. 알겠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이런 미각 테러 수준인 밥을 남기지 않고 먹을 사람이 어디 있냐.

    “대답 안 해?”

    그리고 목소리와 위압감으로 기선을 누르고 제압하기엔 연수원의 훈련생들은 다들 머리가 크고 잔뼈가 굵은 성인이었다.

    여기가 군대야, 연수원이야? 여자들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고 남자들의 얼굴엔 반항기가 가득했다.

    조교와 훈련생 두 집단은 직감적으로 이 기 싸움에서 밀린 쪽은 남은 20일이 평탄치 못할 것을 깨달았는지 팽팽한 기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이런 건 원래 선빵 치는 쪽이 이기는 거지. 식판을 들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난 내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걸어 나와 잔반통에 밥과 반찬을 탈탈 털어 버리고는 물을 한 잔 마시고 식당을 벗어났다.

    나를 시작으로 반찬을 잔반통에 버린 이들이 식당을 하나둘 나왔다. 딱딱하게 굳은 임현수 조교의 얼굴을 보며 싱긋 웃어 주었다.

    조교 vs 훈련생, 현재 스코어 0:1이었다.

    * * *

    굳이 매점에 갈 필요는 없었기에 곧바로 배정받은 기숙사 방인 401호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가며 온수가 있는 정수기 위치를 확인했다.

    401호 앞에 도착하자 캐리어 네 개가 모여 있었다. 문에는 이채현, 김나연, 진솔, 천세연, 이 넷의 명패가 끼워져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문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멋지게 퇴장해 놓고 비밀번호 알려 달라고 다시 식당 돌아가면 가오가 안 사는데.

    한숨을 쉬며 내 캐리어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켜자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401호 비밀번호: 0826]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문이 열렸다. 방은 제법 크고 깔끔했다. 침대도 2층 침대가 아닌 1층 침대였고 옷장과 책상도 개인별로 배정되어 있었다. 화장실도 깨끗했고 미니 냉장고도 있었다.

    시설 좋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스킬 ‘염력(SS)’을 실행합니다.』

    크게 벌어진 문틈으로 네 개의 캐리어가 부드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 정중앙에 캐리어를 놓고 내 캐리어를 열어 짐 정리를 시작했다.

    야식으로 먹을 컵라면 하나를 미리 책상에 놓고 옷장에 옷과 속옷을 정리하고 있자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울리며 룸메이트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혹시 캐리어 그쪽이 옮겨 놓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어머, 고마워라.”

    예의상의 인사 후 짐 정리하는 소리만이 방을 울렸다. 이럴 때 친화력 좋은 사람 하나 있으면 좋은데.

    일단은 좋든 싫든, 20일 동안 한방에서 같이 지내야 할 사람들이었기에 친해져서 나쁠 건 없었다.

    “20일 동안 한 공간 써야 하는 사인데 인사부터 나누죠. 전 이채현, 나이는 스물셋이고요 등급은 A급, 직업은 법사계 테이머입니다.”

    “진솔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스물아홉이고 등급은 C급, 직업은 무기계 궁수입니다.”

    “김나연이에요! 스물하나고 등급은 E급, 직업은 법사계 실더예요.”

    “천세연입니다. 나이는 스물한 살, 등급은 B급, 직업은 치유계 프리스트입니다.”

    대체 방을 나눌 때 무슨 기준으로 나눈 걸까. 직업군이랑 등급도 일치하는 게 없어, 나이도 두 명 빼고 차이가 극단적이지. 이건 뭐. 친해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자기소개가 끝나자 다시 어색한 침묵이 맴도는 분위기에 슬그머니 컵라면을 집어 들어 흔들며 물었다.

    “혹시 컵라면 드실 분?”

    일단 친해질 때는 먹을 게 짱이지.

    * * *

    “언니! 채현 언니! 점심시간이에요!”

    나를 마구 흔드는 손길에 책상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며 부스스 눈을 떴다. 늘어져라 하품을 하고 눈에 맺힌 눈물을 쓱 훔치며 물었다.

    “…벌써?”

    “벌써라뇨, 두 시간이나 지났는데. 언니, 내일 테스트 본다는데 어떡하려고 그래요?”

    “괜찮아. 연수 마친 아는 헌터에게 들었는데 중학교 도덕 시험 수준으로 나와서 낙제 뜰 일 없대.”

    어느덧 벌써 입소한 지 사흘째였다. 첫 번째 커리큘럼이었던 인성교육은 이제 오후에 두 시간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기지개를 쭉 켜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를 깨우는 데에 성공한 나연이가 쪼르르 내 옆에 와 붙었다.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저 언니 나온 테이밍 영상 열 번 돌려 봤어요!”

    김나연은 내 열렬한 팬이었다. 대체 내가 갑자기 달려든 페리를 보고 당황하는 영상을 왜 열 번씩이나 돌려 본 건지 이해는 안 가지만.

    뭐, 경외와 찬양은 내게 꽤 익숙했기에 난 자연스럽게 김나연을 대할 수 있었다.

    내게 팔짱을 끼어 오는 나연이를 달고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노트 필기를 정리하는 솔 언니에게로 다가갔다.

    “솔 언니, 세연아, 밥 먹으러 갑시다.”

    “응, 잠시만. 나 필기 노트 좀 정리하고.”

    이 언니는 무슨 인성교육을 필기까지 하면서 들어? 진솔 언니는 섹시한 팜므파탈 외모와는 달리 착실한 모범생이었다.

    내 부름에 고개를 든 천세연이 제 오빠를 닮은 새초롬한 눈매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꾸 저 얼굴에 천우현이 겹쳐 보여서 나는 나도 모르게 천세연을 챙기고 있었다.

    내가 마계에서 천우현에게 확실히 많이 의지하긴 했구나. 그 여동생에게 이렇게까지 관대해질 수 있는 걸 보니.

    “이제 라면도 슬슬 질린다.”

    “그래도 솔 언니는 아직 완전히 안 질렸네. 전 이미 질린 지 오래입니다.”

    “언니들, 치킨 먹고 싶지 않아요?”

    “먹고 싶지. 그런데 307호가 치킨 배달받다가 걸려서 조교가 퇴소시킨다고 지랄했다며.”

    식당으로 향하며 오늘은 또 무엇을 먹어야 컵라면과 컵밥을 질리지 않고 남은 17일 동안 먹을 수 있나 고민했다. 좋아, 오늘 점심은 매점 빵이다.

    식당은 사람으로 바글바글했다. 식당의 인원은 그 급식을 기어이 먹는 3%의 사람과 매점에서 사 온 걸 먹는 97%의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날 기 싸움에서 밀린 뒤 조교들은 밥 먹는 걸 터치하지 않았다. 대신 배달시키거나 외식하는 건 엄격하게 잡았다.

    헌티드에서 말하길 기선제압이라고 한다. 조교에게 눌려 이 맛대가리 없는 급식을 억지로 먹었던 기수는 이제까지 여섯 기수 정도?

    “이걸 세금으로 제공한다고 그 지랄을 하더라니까요. 이런 개도 안 먹을 밥을 주는 게 말이 되냐고. 협회 연수원 비리 한번 싹 털어야 해, 하여간 망할 새끼들.”

    휴대폰으로 식판을 비춘 채로 열심히 혼자 떠드는 남자를 훈련생들이 한 번씩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그 맞은편에는 식탁에 빵을 늘어놓고 삼각대에 휴대폰을 얹은 채 열심히 각도를 조정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래서 오늘 점심은 매점 빵으로 때울…….”

    “아악, 씨바아아아! X나 맛없어!”

    “아, 저기요! 식당 혼자 써요? 제발 제 영상 좀 찍자고요!”

    빵을 집어 던지며 짜증을 내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까딱한 남자가 성의 없이 “죄송함돠~”를 외쳤다.

    “왜 저래?”

    “저 남자는 스트리머고 저 여자분은 너튜브에 vlog 올리잖아요. 둘 다 구독자 1만 넘던데.”

    눈살을 찌푸린 내 중얼거림에 천세연이 심드렁한 어조로 답했다.

    얘가 웬일로 내 물음에 답해 줬지? 의외의 상황에 멀뚱히 천세연을 쳐다보자 뒤늦게 자각했는지 화들짝 놀란 그가 고개를 휙 돌렸다.

    “아, 님들. 저 테이머 그분이랑 같은 기수 됐습니다. 마침 저기 뒤에 지나가시네.”

    아, 제발 초상권 보호 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쓱 가리며 빠른 걸음으로 카메라를 지나갔다.

    매점으로 향하는 식당 출입구 쪽에는 1호선 광인 류사현이 제 룸메들과 앉아 있었다.

    “사현이 형, 진짜 그 밥이 먹을 만해요……?”

    “벽, 아니 그 빌어먹을 에너지바보단 백배 나아.”

    류사현은 급식을 먹는 그 3%의 사람 중 하나였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수저를 움직여 입에 넣는 류사현의 모습에 감탄했다.

    미뢰가 쌍욕 하는 수준의 밥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먹다니, 생각보다 더 미친놈인가 봐. 역시 1호선 광인.

    * * *

    정말 천우현의 말처럼 중학교 도덕 시험 수준의 테스트는 단 한 명의 낙제자도 없이 무사히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커리큘럼의 다음 순서인 능력 훈련으로 넘어갔다.

    오전 10시에서 12시, 그리고 점심 먹고 나서 2시에서 4시로 하루 두 번씩 네 시간 이루어진 인성교육과는 달리 능력 훈련은 하루 한 번, 오전 9시에서 12시까지가 의무 훈련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일주일간은 꼼짝없이 늦어도 8시 30분에는 기상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아침 9시에 일어나는 것도 죽을 맛이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냐.

    강의실에는 훈련생들이 훈련받기 편하게 트레이닝복이나 편한 옷들을 입고 모여 있었다. 나 역시 세 줄 저지와 트레이닝복 바지 차림이었다.

    “내일부터는 바로 훈련장으로 집합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의무 훈련 시간 외에 무엇을 하든지는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기숙사 방에서 쉬어도 되고 개인 훈련을 하셔도 됩니다.”

    “연수원 밖으로 나가도 됩니까?”

    “훈련생,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몰래 나갔다가 걸리면 곧바로 퇴소 조치입니다!”

    조교를 따라서 도착한 넓은 훈련장에는 마네킹과 과녁, 장애물, 대련장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50명 정도는 충분히 수용하고도 남을 만한 넓이였다. 이곳저곳 놓인 아이스박스에는 생수통이 가득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바닥 한쪽 구석에 깔린 매트를 발견했다. 오, 체육 시간에 누워서 자던 그 매트다. 오랜만에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누워 볼까.

    “자, 지금부터 훈련 방식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9시부터 10시까지는 다 같이 체력 훈련을 실시합니다. 그리고 10시부터 12시까지는 직업군별로 나누어 해당 직업군인 조교의 트레이닝 아래 훈련을 시작합니다.”

    왜 저렇게 조교가 많나 했더니 최대한 다양한 직업군을 뽑아 데려온 모양이다. 굳이 게이트 안 들어가고 여기서 조교 하는 거 보니 협회에서 월급을 많이 주나?

    질문 있냐는 물음에 한 훈련생이 손을 들고는 물었다.

    “휴식 시간은 없습니까?”

    “게이트 안 레이드는 세 시간은 기본이고 길게 이어지면 최대 일곱 시간까지 갑니다. 세 시간 훈련도 못 버텨서 레이드 뛸 수 있겠습니까?”

    아닌데, 5분 컷이던데. 한 시간 의무 체력 훈련이라는 말을 듣고 입이 댓 발 나와 속으로 투덜거렸다.

    쑥덕거리는 훈련장에 훈련생들을 조용히 시킨 조교가 대열을 맞추라 지시했다. 양팔을 넓게 벌려 옆 사람과 거리를 벌리며 생각했다.

    무슨 체육 시간이야? 고등학교 졸업하고 다시는 안 할 줄 알았던 짓거리를 대학 졸업반 되어서 하고 있네.

    “여러분의 몸의 긴장된 근육과 관절을 풀어 주기 위해 6번과 8번 PT 체조를 각각 40회, 20회씩 실시하겠습니다.”

    “X발, 유격훈련 왔냐.”

    “그래도 체조 11번이 아닌 게 어딥니까, 형님.”

    6번은 뭐고 8번은 뭔데? 군필자들 외에는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 대부분이라 임 조교가 시범을 보였다.

    6번은 우리가 아는 발 벌려 뛰기. 체육 시간에 몸풀기 운동이랍시고 체육 쌤들이 항상 시키는 그 PT 체조.

    8번은 온몸 비틀기. 군대 예능에서 항상 나왔던 그 동작.

    이런 X발, 진짜 쓰러져서 양호실 가는 게 낫겠네.

    “힘차게 구령 붙여서 실시합니다! 마지막 구호는 외치지 않습니다! PT 체조 6번 40회 시작!”

    그 멘트에 수련회 PTSD가 올라왔다. 삑삑, 삑!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제자리에서 팔을 휘적이며 뛰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냥 집에 보내 줘…….

    * * *

    “60!”

    누군가가 우렁차게 외친 숫자에 모두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X발, 뇌 없나…….”

    뒷자리 여자가 나직하게 욕을 중얼거렸다. 여기저기서 욕과 불만이 튀어나왔다. 자신이 없으면 그냥 나처럼 구호를 외치지 마.

    “정신 똑바로 안 차립니까! 70회 실시!”

    임 조교의 버럭임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체력 스탯이 S급이라 이 정도로 지치지는 않았지만 눕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다시 호루라기 소리가 훈련소를 울렸다.

    “68! 69!”

    제발 이번에는 무사히 좀 넘어가자. 이번에도 그러면 확 광역 침묵 스킬 걸어 버릴라.

    간절히 바라며 마지막 동작을 하는 내 옆을 조교가 쓱 스쳐 지나갔다.

    “70.”

    난 똑똑히 봤다. 70을 발음하는 조교의 입 모양을.

    저, 저 사탄도 몰라뵀다고 인사할 인간 같으니. 마왕인 나마저 경악시키는 인성에 입을 떡 벌렸다.

    내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조교가 입술 위로 검지를 세웠다. 기가 막혀 어버버하고 있자 다시 임 조교의 호통과 함께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우리는 PT 체조 6번을 80까지 하고 나서야 8번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삑, 삐이― 삑! 삑삐삑, 삐― 삑!

    호루라기에 맞춰 L자로 만든 몸을 비틀어 다리를 양쪽 바닥까지 닿도록 기울이며 한탄했다.

    ‘하하, 내가 이러려고 돌아온 게 아닌데.’

    여기저기서 죽겠다는 곡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서 머리 안 떼냐는 조교들의 윽박지름을 들으며 기계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다행히 8번은 20번으로 끝났다.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쓱 닦으며 몸을 일으켜 시계를 보자 아직 20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아, 이제 휴식 시간을 주는 건가. 바닥에 닿지 않도록 들고 있던 머리를 바닥에 뉘이고 세우고 있던 다리를 눕혀 털썩 드러눕자마자 임 조교가 소리쳤다.

    “지금 누가 누워 있습니까! 모두 일어납니다! 20분 동안 훈련장 뜀박질, 실시!”

    이 넓은 곳을 20분 동안 뛰라고? 헌터들 능력 한 번씩 써 보고 게이트에 들어가라고 훈련 시키려는 거야, 아니면 특전사를 양성하려는 거야?

    물론 마계에서 세이블에게 받은 훈련은 이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힘들었지만 그건 목숨이 달린 상황이라서 다 감내했던 거지.

    여기는 내 목숨 위협하는 것도 없는데 내가 왜 굳이 사서 개고생을 해야 하냐고!

    하지만 이곳에서 내 신분은 마왕이 아닌 수료증이 인질로 잡혀 까라면 까야 하는 훈련생이었다. 빛 꺼진 눈으로 학교 운동장만 한 훈련장을 뛰면서 생각했다.

    어떻게 연수원까지 사랑하겠어, 이 세계를 사랑하는 거지.

    * * *

    한 시간 동안의 지옥 같은 체력 훈련이 끝나고 휴식 시간 없이 곧바로 지시에 따라 직업군별로 나뉘어 모였다.

    무기계, 법사계, 치유계.

    참고로 제작계는 연수원 입소를 따로 안 하고 각성자 등록 신고만 해도 헌터 라이선스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제일 부러운 직업군이었다.

    법사계에 끼어 메이지, 실더, 4원소 술사, 공간계, 심리계 등 세부적으로 나뉘어 조교에게로 향하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니 어느새 나 홀로 남았다.

    임 조교가 멀뚱히 서 있는 내게 다가왔다.

    “죄송하지만 이채현 훈련생은 현재 훈련생을 가르칠 만한 조교가 없어 자율 훈련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에 냉큼 물었다.

    “그럼 쉬어도 돼요?”

    “훈련생, 저는 지금 훈련생에게 휴식이 아니라 자율 훈련을 하라고 했습니다.”

    첫날 식당에서 급식을 버린 스타트를 끊은 이래로 임 조교는 나를 못마땅해하는 티를 팍팍 내곤 했다. 딱딱한 말에 삐딱하게 웃으며 손을 튕겼다.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페리, 원래대로.”

    턱시도 고양이 모습으로 나타난 페리가 내 명령에 훈련장의 3분의 2를 채우는 거대한 마수로 탈바꿈했다.

    “으아악! 몬스터, 몬스터다!”

    “허억!”

    갑자기 나타난 1급 몬스터에 혼비백산하여 물러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훈련생들을 뒤로 보내며 경계를 세우는 조교들을 쓱 훑어보고는 내게 머리를 기울이는 페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제가 개인 훈련을 하면 공간이 부족해져서. 막말로 연수원 측에서 제게 테이밍할 몬스터 구해다 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어디 물어 와 스킬이라도 여기서 한번 써 볼까요? 내 빈정거림 섞인 물음에 임 조교가 순순히 한발 물러났다.

    “좋습니다, 이채현 훈련생은 능력 훈련에서 제외하겠습니다.”

    “훈련 시간 인정해 주는 건 맞죠?”

    “능력 훈련에서 제외하는 거지 훈련 시간을 빼 준다는 말은 안 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휘이이잉―!

    날카로운 기운이 내 쪽으로 무섭게 날아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페리를 향해.

    『스킬 ‘소환(L)’을 해제합니다.』

    급히 페리를 역소환시켰다. 페리가 사라지자 갈 곳 잃은 검격은 벽에 옅은 흠집을 내고 사라졌다.

    약한 검격이었지만 강도가 약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감히 나와 페리를 노리고 한 공격이라는 게 문제지.

    검격이 날아온 곳을 향해 어금니를 꽉 깨물며 고개를 휙 돌렸다.

    “이런, 실수.”

    동양풍 검을 손에 쥔 류사현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뻔뻔하게 검을 쥐지 않은 한쪽 손을 흔들었다. 갑자기 전투 의욕이 팍 꺾였다. 중2병에 걸린 1호선 광인을 상대하고 싶진 않았다.

    분명 이번 공격도 튀고 싶어서 한 짓이겠지. 에휴, 중2병엔 약도 없다더니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쯧쯧…….

    “류사현 훈련생! 무방비 상태인 동기를 공격하다니, 지금 생각이 있습니까? 나중에 게이트 들어가서도 이런 식으로 행동할 거면 지금 말하십시오. 즉시 퇴소 조치를 시켜 드릴 테니.”

    류사현이 질책을 듣는 동안 슬금슬금 옆으로 빠져나와 아이스박스에서 생수통을 하나 꺼내 들고는 매트로 가서 털썩 앉았다. 남은 두 시간 동안 뭐 하지? 누워서 잘까?

    매트 위에 스르륵 드러누워 인벤토리에 넣어 놨던 휴대폰을 슬쩍 꺼냈다.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휴대폰 데이터를 막 켜던 내 머리 위에 그림자가 졌다.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고 슬쩍 위를 올려다보자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임 조교가 눈에 들어왔다.

    “휴대폰 집어넣고 일어납니다. 이채현 훈련생은 체력 단련으로 능력 훈련을 대체하겠습니다.”

    에휴, 뭔 놈의 체력 단련이야. 몸을 누인 그 자세 그대로 입을 열어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쪽 체력 스탯 몇?”

    “A급입니다.”

    “욜, 난 S급. 내가 오히려 그쪽을 단련시켜야겠네.”

    “계속 이러시면 수료증 못 드립니다. 협조하지 않으면 퇴소 조치하겠습니다.”

    아이고, 무서워라. 훈련생 서러워서 살겠냐? 빠르게 메시지 전송을 완료하고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백야백야 임현수 조교가 나 괴롭혀ㅠ] 오전 10:05

    [나 능력 훈련 못 하는데 자꾸 퇴소하라 그래] 오전 10:06

    읽음 표시가 뜨더니 곧바로 내 앞에 있는 임 조교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당황한 표정으로 화면을 두드리던 그는 곧이어 걸려 오는 전화를 공손히 받았다.

    “예, 백 이사님. 임현수입니다. 네, 이채현 훈련생 있습니다. 예? 이사님 친구분이요……? 예, 알겠습니다. 네, 들어가십쇼.”

    통화를 마친 임 조교가 매애애우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채현 훈련생은 이 시간에 휴식…해도 됩니다.”

    말 중간중간에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원하는 대답을 들은 나는 관대하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임 조교가 다른 이들의 훈련을 감시하기 위해 내 앞에서 떠나자마자 누워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히죽 웃었다. 빽 있는 삶 최고야, 짜릿해!

    [백야 - 그렇다고 너무 드러누워 있지만 말고 걸어 다니기라도 해] 오전 10:13

    [ㅇㅇ 땡큐 역시 너밖에 없다♥♥♥] 오전 10:14

    ㅇㅇ이라고 답장을 보냈지만 결코 누워 있는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트레이닝복 저지를 벗어 이불처럼 상체에 덮은 나는 팔을 베고 누웠다. 그럼 이제 못다 잔 아침잠을 자 볼까?

    * * *

    “아야, 온몸이 뻐근해…….”

    정오에 의무 훈련이 끝나자 우르르 훈련소를 빠져나오는 인파에 섞여 훈련소를 나오자 김나연이 팔을 주무르며 울상을 지었다.

    모두 식당으로 향하는 와중 천세연만 기숙사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세연아, 매점 안 가?”

    김나연의 물음에 천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밥 안 먹게? 배 안 고파?”

    “네, 방에 들어가 있으려고요.”

    “그래, 그럼. 배고프면 언니가 냉장고에 넣어 놓은 사과라도 먹고 있어.”

    진솔 언니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나도 가만히 있기는 뭐 해서 한마디 보탰다.

    “매점에서 뭐라도 사다 줄까? 빵이랑 우유? 컵라면? 과자?”

    내 물음에 빤히 나를 쳐다본 천세연이 괜찮다고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기숙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요즘 매점 음식 안 채워 놓는 거 안 느껴져?”

    “그러고 보니까 그렇네요. 어제 보니까 진열대도 텅 비어 있고 컵라면도 열 개밖에 안 남았던데.”

    “에이, 여기가 연수원 최고 수익처인데 곧 발주 받겠죠.”

    웅성웅성,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진원지를 따라가니 사람들이 매점 앞에 우르르 몰려 있었다.

    “돌았냐고! 아, 그러면 외출권이라도 끊어 주든가!”

    화를 못 이긴 외침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매점 불이 꺼져 있다. 왜인지 불안한 직감이 들었다. 힘없이 돌아 나오는 훈련생 무리를 붙잡고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납품 업체가 부도나서 발주를 못 받았대요. 그래서 잠시 매점 문 닫는다고…….”

    “외출증도 못 끊어 준대요. 급식 먹으래요. 이게 말이 돼요?”

    “아이씨, 훈련 때문에 배고파 죽겠는데 이게 뭐야…….”

    청천벽력 같은 말에 입을 떡 벌렸다. 이거 실화냐? 매점 문을 닫는다고?

    아무리 내가 비상식량을 가득 챙겨 왔다고 하더라도 캐리어에 40끼의 식량을 넣을 순 없었다. 많아 봤자 겨우 15끼 분량이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점심은 매점에서, 저녁은 내가 가져온 비상식량으로 때우고 있었다.

    그런데 매점이 닫혔다면…….

    “그럼 우리, 저 급식을 먹어야 한단 소리야……?”

    진솔 언니의 떨리는 목소리에 일제히 고개가 배식 칸을 향해 돌아갔다.

    정체 모를 푸른 풀떼기들과 말라 비틀어진 생선구이와 건더기가 둥둥 떠다니는 갈색 국물과 푸석한 밥으로 채워진 배식 칸으로.

    * * *

    “솔 언니, 그래도 우리 인간의 존엄성은 지키죠.”

    내 미뢰한테 미안해서라도 저건 못 먹는다. 내 진지한 말에 이미 앉아 급식을 먹고 있던 류사현이 혀를 찼다.

    “이게 다 배가 불러서 그럽니다. 아무 맛 안 나는 경단만 몇 년간 씹어 봐야지 식사의 소중함을 깨닫지.”

    그렇구나. 괜히 1호선 광인이 된 게 아니구나.

    오전에 있었던 검격 사건 이후 묘하게 나를 깔보는 눈빛으로 바뀐 류사현을 지나쳐 다시 기숙사 방으로 향했다.

    “일단 오늘은 라면으로 때우고…….”

    “전 급식 먹고 갈게요오……. 가져온 컵라면 다 먹었어요.”

    어깨가 축 늘어져 울망울망한 눈으로 배식 칸을 돌아보는 김나연을 툭툭, 쳤다.

    “내 거 하나 줄게.”

    “진짜요? 채현 언니, 제가 사랑하는 거 알죠?”

    김나연이 애교 섞인 미소를 지으며 착 달라붙었다. 진솔도 배식 칸을 힐긋 보고 고개를 젓더니 우리를 따라 몸을 돌렸다.

    “나도 방에서 사과나 먹어야겠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김나연은 동갑내기인 천세연에게 달려가 안겼다.

    “세연아, 큰일 났어어! 매점 당분간 안 연대!”

    “그래서 급식 먹고 왔어? 너 가져온 컵라면 다 먹었다며.”

    또래보다 어른스러운 편인 천세연이 김나연을 토닥였다. 매점이 문을 닫았다는 데도 얼굴에는 동요 한 점 없었다.

    “괜찮아. 채현 언니가 컵라면 하나 준다고 했어.”

    “라면 질린다며.”

    “그래도 먹어야지. 급식보단 낫잖아…….”

    입을 비죽이는 김나연에게 컵라면을 건네려 하자, 천세연이 먼저 선수 쳐 김나연에게 팩 같은 것을 건넸다.

    “…야전 식량?”

    저거 군대에서 먹는 전투식량 아니야? 군대 체험 온 것도 아니고 연수원에 전투식량을 대체 왜 챙겨 와……? 나뿐만 아니라 김나연과 진솔 역시 벙찐 표정으로 야전 식량 팩을 바라보았다.

    “인터넷에서 팔아서 등산 가는 사람들도 많이 가지고 다녀요. 부피도 별로 안 차지하고.”

    캐리어 안에 한가득 찬 전투식량을 보여 주며 천세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수상하단 말이지. 그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매점 문이 닫혔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은 태도도 그렇고, 이 방 사람들이 모두 일주일은 거뜬히 버틸 수 있을 만큼 한가득 챙겨 온 전투식량도 그렇고 찜찜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회귀자라면 당신을 보자마자 도망가거나 달려들거나 둘 중 하나겠져.』

    포커스를 만났던 날, 관리자1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세연이 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에 빙의된 빙의자가 아닌 이상 상황을 미리 아는 것과 나를 향한 이유 모를 경계의 답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뿐이다.

    ‘쟤 회귀자인가 벼.’

    대박.

    남매가 쌍으로 현판 주인공급이네. 한 명은 귀환한 용사, 한 명은 회귀자.

    그런데 왜 이렇게 나를 경계하는 거지? 서얼마 내가 이 게이트 사태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원인이란 게 밝혀진 건가?

    내가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미간을 찌푸린 천세연이 내 손에 야전 식량 불닭비빔밥을 쥐여 주었다.

    “……?”

    “먹고 싶어서 보고 있던 거 아니에요?”

    주면 감사히 먹지, 뭐. 다시 야전 식량 팩을 가져가려는 천세연의 손을 슬쩍 피하고는 물었다.

    “혹시 다른 맛은 없을까? 내가 매운 걸 잘 못 먹어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이 상황에서 편식해서 미안하긴 한데 기왕이면 쇠고기 비빔밥으로 부탁해.

    * * *

    “MSG 맛도 이제 슬슬 질린다.”

    제법 호화로운 투정을 하며 제육 맛 비빔밥을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그나마 우리 방은 내 컵라면, 컵밥, 에너지바와 천세연의 전투식량으로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조교들의 엄중한 감시 아래 외출 루트가 모두 차단되자 다른 방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그 끔찍하게 맛없는 급식을 어쩔 수 없이 입에 밀어 넣어야 했다.

    훈련이 끝나면 배가 주렸고, 그 상황에 뭐라도 먹지 않으면 그 고된 훈련을 버틸 수 없었으므로.

    훈련 4일째, 매트에 편히 누워 농땡이를 피우는 내 눈으로 봐도 훈련생들의 사기는 첫날의 반 토막으로 꺾여 있었다. 몸을 써야 하는 무기계는 특히 상태가 심각했다.

    연수원이 아닌 다이어트 센터에 입소한 것마냥 다들 살이 쭉쭉 빠지고 있었다. 나도 벌써 일주일 새 1kg 감량에 성공했다.

    배고파서 힘이 없는데 훈련생들이 자율 훈련을 하겠는가? 다 의무 훈련 시간만 겨우 채우고는 비척비척 기숙사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큰일인데요. 이번 기수는 점수가 엉망…….”

    “…편의점에서 공수받든지, 외출이라도 허가해 줘야…….”

    “…이번 기수만 예외를 만들 순 없잖아. 급식 먹으면 되지 무슨…….”

    자기들끼리 모여 쑥덕거리던 조교들의 대화가 생각났다. 그럼 매점 문 닫힌 건 예외가 아니고 뭐냐. 그리고 조교 댁들도 급식 먹던가. 왜 댁들은 나가서 사 먹는데.

    외출이 막힌 거지 바깥세상과의 소통까지 막히진 않았기에 몇몇 훈련생들은 헌티드에 도움을 요청했다.

    HUNTED

    [자유게시판] !SOS!SOS!SOS! 연수원 밖으로 나가는 방법 좀!!!!!

    20XX-07-08 13:00 조회: 2,472 작성자: 레바다

    매점이 납품 업체 부도났다고 문 닫음……. ㅋㅋㅋㅋㅋㅋㅋ ㅅㅂ

    지금 3일째 굶다시피 하는 중인데 세상이 노랗게 보인다……. 제발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조교한테 안 들키고 연수원 나가는 방법 좀 알려 주십쇼 선배님들

    댓글(27)

    TVS: 개웃기넼ㅋㅋㅋㅋ 니들 ㄹㅇ 운도 없닼ㅋㅋㅋㅋ

    └TVS: 7월이면 개떼 기수지? 개떼 기수는 안 그래도 대가리 덜 여문 대딩 많고 사람 많아서 사고 날 확률 높다고 조교들이 개빡시게 관리하는뎈ㅋㅋㅋ

    레드불R: 그 밥을 먹는다고? 니네 미각 괜찮냐????

    부산밤바다: 니들은 수련회 온 고등학생이 아니고 헌터다 머리랑 능력을 써라

    메이지1군이라고: 군머에서도 몰래 배달 음식 시켜 먹었는데 군머보다 훨-씬 널널한 연수원이라고 불가능하겠냐?

    호ho호ho호ho: 순간 이동 스킬 보유자 없음? 우리 동기 중에 순간 이동 스킬 있는 놈 있어서 걔가 배달비 받고 배달해 줬는데

    └pdalskf: 오, 혹시 몇 기임?

    └호ho호ho호ho: @pdalskf 10기

    └pdalskf: @호ho호ho호ho 반갑다 동기야ㅋㅋㅋ

    └리버폴: 우리는 은신 스킬 한 분 계셔서 그분이 조달 맡으심

    └유니스터: 우리 기수는 순간 이동, 천리안, 공간 왜곡 다 있어서 개꿀이었는데ㅎ

    └얼죽아평생회원: 헐 우리 기수만 매점 못 가고 급식 먹은 거야?ㅠㅠㅠ

    └ui: @얼죽아평생회원 조교랑 기 싸움 밀렸구먼ㅉㅉ

    lli135: 후문 편의점 가셈 거기는 경비 없어서 조교들만 뚫으면 갈 수 있음

    └레바다: 조교들 어케 뚫음?

    └lli135: @레바다 니들이 알아서 해야지 게이트 들어가서도 몬스터 어케 피하냐고 팀원들에게 물어볼래?

    789456: 사천반점 주인집 아들 순간 이동 스킬 보유 헌터여서 잠깐 부모 일 도와주러 왔을 때 개꿀이었는디 지금 갸 있을까 모르겠다

    └맨뉴: 입대함

    …….

    물론 19기에도 있었다. 한 몸에 순간 이동, 천리안, 공간 왜곡, 은신, 투명화 스킬을 다 보유한 미친 스펙의 소유자가. 그 스킬을 보유했다는 걸 들켜서는 안 되는 생존형 힘숨찐이라서 문제지.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깔끔하게 한 팩을 비우고는 쓰레기통에 빈 팩과 플라스틱 수저를 넣고 종이컵을 들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기숙사 복도에 있는 정수기로 향했다.

    짠맛이 남아 있는 입 안을 시원한 물로 헹구고 종이컵을 옆의 쓰레기통에 가볍게 던져 넣었다.

    ‘빨래 다 말랐겠다.’

    건조기에 있을 빨래가 생각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1층의 세탁실로 곧바로 향했다.

    기숙사 건물은 하나였지만 1~2호는 여자 동, 3~4호는 남자 동으로 나뉘어 있었고 두 동의 입구가 있는 로비는 CCTV로 상시 감시되었으며 다른 성별 기숙사로 들어가려는 시도만 하여도 즉각 퇴소 조치였다.

    로비 1층에는 여자 동, 남자 동에 각각 세탁실이 하나씩 있었고 로비의 중간에는 남녀 공용 휴게실이 있었다. 이곳은 주로 친목의 장이었다.

    나한테는 자판기가 있는 장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세탁물을 걷기 전에 캔 음료나 하나 뽑아 마시려 휴게실에 들어가자 휴게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모였다가 흩어졌다.

    자판기 앞으로 가 무슨 음료를 마실까 고민하던 도중, 자판기 옆 탁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머리를 맞대고 있던 무리 중 한 명이 나를 불렀다.

    “이채현 씨, 혹시 테이밍한 몬스터 목록에 비행형 몬스터 없을까요……?”

    “없는데요. 몬스터 한 마리밖에 없어요.”

    음료 자판기 대신 우유 자판기로 시선을 옮기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 대답에 모여 있던 남자들이 머리채를 움켜쥐며 절망했다.

    “거봐, 내가 없을 거라 했잖아.”

    한숨을 푹 내쉰 남자 하나가 종이 위에 X자를 끄적였다. 지폐를 넣고 딸기우유 번호를 누르고는 뒤를 힐긋 보니 1번부터 5번까지 적힌 종이에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

    “뭐예요?”

    “이대로 가다간 굶어 죽을 것 같아서 들키지 않고 나갈 계획 짜는 중임다.”

    방금 X표를 친 4번은 ‘비행형 몬스터를 타고 연수원 바깥으로 날아가기’였다. 자판기를 통해 덜컹 나온 딸기우유에 자연스레 빨대를 꽂아 입에 물며 종이에 적힌 계획을 천천히 훑었다.

    1번. 순간 이동, 은신, 공간 왜곡 능력자 찾기

    2번. 순찰 서는 조교 기절시키기(뒷일은??)

    3번. 뼈 부러뜨려서 병원 다녀오면서 편의점 쓸어 오기(조교 붙으면 어캄? 어디에 담아 옴? - 인벤토리)

    4번. 비행형 몬스터를 타고 연수원 바깥으로 날아가기(테이머)

    5번. 50명을 선동해 조교 놈들에게 혁명의 빨간 맛을 보여 주기(일단 내가 봤을 때 열 명은 넘게 협조 안 함)

    1번 빼고는 영 실행 가능성이 없는 계획들이다.

    “이채현 씨도 치킨팟 들어오실래요? 한국대생의 저력을 보여 주―”

    “미친놈아, 목소리 낮춰! 밖에 조교 있잖아!”

    치킨. 양념 반 간장 반 치킨이 내 머릿속을 둥둥 맴돌았다. 즉석식품만 먹다 보니 조리된 음식이 매우 그리웠다. 그렇다고 저 망할 급식을 먹고 싶다는 건 아니고.

    밖의 조교를 발견하고는 내게 제안을 건넨 입을 틀어막는 남자들을 보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치킨을 먹기 위해서라면 순밍아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 * *

    내 생각보다 바깥 음식을 향한 사람들의 열망은 강했다. 치킨팟이 뚝딱 만들어진 걸 보니 말이다.

    조교들의 눈을 피해 휴게실에 모인 치킨팟, 이름하여 반반무마니 모임은 모두 스물네 명. 기숙사 방 여섯 호실의 연합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희 기수에는 순간 이동 스킬 보유자가 없고요, 이중에선 차하율 씨가 은신 스킬 보유자이시고…….”

    물론 스물네 명이 모여 봤자 딱히 답은 안 나왔다. 25명밖에 안 되는 기수에서도 순간 이동 스킬 보유자가 있었는데, 어떻게 50명이나 되는 개떼 기수에 순간 이동 스킬 보유자 하나 없어?

    “제 스킬도 안 먹혀요.”

    은신 스킬 보유자, 차하율이 손을 들고 담담히 털어놓았다. 그 옆에 있던 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덧붙였다.

    “맞아요, 하율이가 은신 스킬 쓰고 나가려고 시도해 봤는데 후문에서 바로 잡혔어요. 요즘 경비 완전 빡세요.”

    이미 밖으로 나가기 위해 탈출을 시도해 본 듯했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실패인 듯하지만.

    “그러면 조교의 시선을 분산하죠. 한 사람이 후문 앞에서 나가려고 시도하다가 붙잡힌 틈을 타서 하율 씨가 나가는 거 어떱니까?”

    “그럼 그 미끼 역할을 누군가가 총대 메고 해야겠네요.”

    “어휴, 제가 해야죠, 당연히. 원래 이런 건 의견 낸 놈이 하는 겁니다.”

    모인 이들 중 최연장자로 리더 격인 남자가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치킨을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가까워져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에 찬물을 쫙 끼얹었다.

    “그러면 다시 들어올 때는요?”

    내 물음에 그 생각까진 못한 듯 대답 없이 조용했다. 주춤거리던 리더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또 미끼가 되어서…….”

    “같은 방식을 두 번 쓰면 분명 조교들이 수상하게 여기고 방 검사해서 치킨 잡아낼걸요?”

    그럼 그대로 압수당해서 치킨은 구경만 하고 못 먹는 거다.

    “맞아요, 최대한 제가 들키지 않고 저한테 피해 오지 않을 방향으로 부탁드려요.”

    차하율이 까칠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 리더를 보며 혀를 찬 나는 슬쩍 답에 가까운 힌트를 건넸다.

    “조교들이 다 동원될 정도의 큰 사고가 일어나면 되죠.”

    사고라는 말에 몇몇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사고? 누가 스킬 써서 훈련장을 무너뜨린다든가?”

    “그럼 수리비랑 배상액 물어내야 하잖아. 치킨 하나 먹자고 몇억을 써?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그럼 싸울까요? 몰래카메라처럼 크게 싸움 난 연기를 해서 조교들이 말리러 오게끔.”

    “죄송한데 싸움 하나 말리겠다고 조교들이 전부 달려오진 않을 거 같은데요.”

    “패싸움은?”

    “달라진 게 뭔데, 멍청한 새끼야. 24대 26도 아니고.”

    “아이씨, 게이트라도 터지면 직빵인데.”

    에잉, 답답해. 감을 못 잡는 이들을 위해 조금 더 직설적으로 힌트를 던져 주었다.

    “아니면 몬스터가 연수원에 돌아다닌다든가?”

    내 말에 모두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 이제 감이 좀 잡히…….

    “그건 애초에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나오는 게 전제 아니에요?”

    “아니지, 게이트가 연수원에 터지는 게 먼저지.”

    아이고, 속 터진다, 속 터져. 답답해 죽겠다는 내 표정에 김나연이 마침내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설마 채현 언니가 테이밍한 몬스터로?”

    그래, 나연아! 바로 그거야! 너라도 머리가 돌아가서 정말 다행이다.

    “지금까지 나온 계획을 종합해 보자면 차하율 씨가 나갈 때는 성찬 형님이 미끼가 되어서 입구 조교 시선을 끌고, 들어올 때는 이채현 씨가 몬스터를 풀어서 조교들을 집합시킨다, 이거죠?”

    딱 두 사람만 화살받이가 되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치킨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희생쯤이야. 그리고 미안하다고 돈도 안 내도 된다 했으니 개꿀.

    “저희 방은 한 마리면 될 거 같아요. 프라이드, 옛날 양념 반반이요.”

    “저희 방은 세 마리? 네 마리? 오케이, 세 마리. 프라이드, 옛날 양념, 간장 한 마리씩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네 마리 부탁드림다. 프라이드, 옛날 양념, 간장, 프라이드 반 옛날 양념 반 한 마리씩으로.”

    “저희는 두 마리만 먹겠습니다. 프라이드 하나, 옛날 양념 하나요.”

    “저희 방도 두 마리요. 옛날 양념, 간장 하나씩으로요.”

    “저희 방은 301호랑 똑같이요. 네, 한 마리.”

    여자 방은 한두 마리씩, 남자 방은 2~4마리씩 총 통닭 열세 마리를 배달해야 하는 차하율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열세 마리 튀기려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차하율의 중얼거림에 가만히 있던 천세연이 툭 말을 내뱉었다.

    “내일 점심에 전화해서 미리 시켜 놔요. 저녁에 재고 떨어져서 못 먹을 수도 있으니까.”

    오, 회귀 전에 재고 떨어져서 못 먹었나 봐.

    계획을 짜는 걸 마친 우리는 내일의 거사를 위해 더 늦은 밤이 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에 결의와 동지애가 감돌았다.

    방으로 올라오자 진솔이 걱정스러워하는 어조로 내게 물었다.

    “채현아, 괜찮겠어? 몬스터가 돌아다니면 분명 조교들이 퇴소 조치한다고 난리 칠 텐데.”

    “설마 퇴소까지 시키겠어요?”

    침대에 풀썩 누우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만약 퇴소 결정이 내려져도 내게는 최종 패가 있었다.

    내 친구 아현아, 믿는다. 이 언니는 수료증을 꼭 받고 싶구나.

    * * *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폐하.”

    분명 기숙사 침대 위에서 잠이 들었는데 난 어느새 꽃으로 가득한 들판에서 누군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투정과 함께 손바닥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내 눈을 가렸다.

    “좋지, 내일은 드디어 그 빌어먹을 컵라면과 전투식량에서 해방인데.”

    “폐하가 맨날 네가 창조해서라도 만들어 오라고 마왕성 주방장을 닦달했던 그 라면이요?”

    그러게, 그때는 그렇게 라면을 먹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질린다니. 사람 일 참 모른다, 그렇지?

    내 눈을 가린 손을 떼고 노을빛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살랑 불어와 내 앞머리를 흐트러뜨리는 산들바람의 방향을 손을 휘저어 가볍게 바꾸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꿈치고는 너무 생생한데.”

    “그야 꿈이지만 온전한 폐하의 꿈이 아니니까요.”

    내가 아는 남의 꿈에 간섭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꿈길의 저주?”

    내 말에 애쉬가 지레 찔린 표정으로 눈을 피했다. 팔을 들어 애쉬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이게 어디서 마왕에게 저주를 걸어? 이거 반역이야, 인마.”

    몇십 년간 꿈에 간섭해 꾸준히 꿈에서까지 괴롭혀 정적을 말려 죽였다는 내 전전전전……. 아무튼 먼 전대의 마왕이 개발한 저주였다.

    이렇게 꿈에서라도 얼굴을 보는 로맨틱한 저주가 아니라 창시 목적부터 구린 저주란 말이다.

    “봐주세요, 이렇게라도 얼굴 보고 싶은데.”

    붉게 달아오른 이마를 문지르며 애쉬가 배시시 웃었다. 내 얼굴을 향해 몸을 기울인 애쉬가 달콤한 어조로 속삭였다.

    “어차피 악몽이 아니라면 깨고 나서 기억도 안 남잖아요.”

    입술이 닿기 직전 손바닥으로 턱 막아 애쉬의 얼굴을 쭉 밀어냈다.

    “마왕의 권능은 네 생각보다 더 크단다, 애쉬.”

    눕히고 있던 상체를 일으키며 여상히 말한 나는 아쉬움이 짙게 묻어 나오는 눈을 보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이런 것도 가능하다는 소리지.”

    마치 유리에 금이 가듯 공간에 쩍, 실선이 생기더니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쉬움이 가득한 애쉬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나 내일도 8시 반 기상이거든? 방해 없이 잠 좀 자자.

    * * *

    능력 훈련 6일 차.

    6일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훈련생들은 눈에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다리 더 꺾습니다! 지금 누가 바닥에 누우라고 했습니까? 바닥에서 머리 뗍니다!”

    우리가 개밥 혹은 비상식량으로 연명하는 동안 밖에서 뜨신 밥 먹고 들어온 조교 놈들은 열과 성을 다해 우리를 갈궜다.

    치킨을 생각하며 힘겨운 체력 훈련과 지루한 능력 훈련 시간을 버텨 내고 자율 시간이 다가왔다. 반반무마니 모임 리더는 훈련이 끝나자마자 치킨집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여보세요, 자매통닭이죠? 혹시 치킨 열세 마리 가능할까요? 아니요, 지금 당장은 아니고 6시 반까지만 받으면 됩니다. 예, 옛날 양념 넷, 프라이드, 간장, 프라이드 옛날 양념 반반 셋씩이요. 어휴, 콜라는 그렇게 주시면 감사하죠.”

    전화를 끊은 리더가 손으로 슬쩍 오케이 사인을 만들어 들어 올렸다. 환희가 반반무마니 회원들의 얼굴에 스쳐 갔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거사를 약속한 5시 50분.

    연수원 밖으로 빠져나가려 시도하는 척을 하다가 붙잡힌 리더가 몸부림을 치며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질렀다.

    “놔, X발롬들아! 이러다 사람 굶어 죽게 생겼다고! 이거 인권 유린이야! 내가 청와대 청원 한번 올려 줘?”

    “급식 나오잖습니까!”

    “급식? 너 말 잘했다. 그 잘난 급식 왜 니들은 안 먹고 밖에서 사 먹고 오냐? 니들도 우리랑 같이 먹던가! 내가 그러면 말을 안 하지!”

    아무리 봐도 연기가 아니라 진심인데. 조교들의 시선이 리더에게로 쏠린 순간, 아무도 모르게 문이 쓱 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조교들이 진정하시라고 달래며 리더를 어디론가 데려가고, 무사히 차하율을 밖으로 보낸 우리는 가슴을 쓸며 기숙사 로비 휴게실로 향했다.

    30분쯤 지났을까, 차하율의 룸메이트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휴대폰 화면을 켜 문자를 훑은 그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하율이 10분 후에 도착한대요.”

    이제 내가 활약할 때군. 몸을 쓱 일으키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고양이 모습의 페리가 쨘, 나타났다. 당황한 사람들을 뒤로한 채 페리를 들어 올려 당부했다.

    “페리, 내가 신호 보낼 때까지 잡히지 마.”

    먉.

    페리가 대답하듯 한 번 울음소리를 냈다. 의심 어린 눈초리들이 쏟아졌다.

    “몬스터 맞아요?”

    “네, 제가 훈련 첫날에 불러낸 걔 맞습니다.”

    “저런 게 돌아다니면 딱히 위급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연수원 시설 부서지면 보상은 제 몫인데요? 저 대신 피해 배상액 물어 주실 사람?”

    내 물음에 너무 위압감과 위급성이 없지 않냐고 따지던 이들이 슬금슬금 눈을 피했다. 페리를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페리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좋아, 이제 10분간 어그로를 잔뜩 끌면 치킨을 먹을 수 있다, 이 말이야.

    페리가 자취를 감추자마자 나를 선두로 반반무마니 모임은 조교 대빵인 임현수 조교를 찾아 나섰다.

    조교실의 문을 벌컥 열자 여유롭게 믹스커피를 마시던 임 조교가 용건만 말하고 나가라고 태평하게 손을 휘저었다. 거기에는 아마 전혀 다급해 보이지 않는 내 표정 또한 한몫했으리라.

    “저기요, 조교님, 큰일 났어요.”

    좀 더 실감 나게 잘 해 보라는 눈길들이 등 뒤에 꽂혀 왔다. 유감이지만 이게 최선인데요.

    임 조교의 시선이 나를 향하자 휙 나를 밀어낸 천세연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채현 훈련생이 몬스터를 불러냈다가 그만 놓쳤대요!”

    나와 달리 소울이 담긴 천세연의 대사를 들으며 볼을 긁적였다.

    회귀 전에 내가 연기를 엉망으로 해서 들켰나?

    툭, 임 조교의 손에서 종이컵이 떨어졌다. 나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던 임 조교가 책상 위의 무전기를 낚아채더니 거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집합! 모두 5분 내로 집합한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조교 모자를 꾹 눌러쓴 임 조교가 화를 꾹꾹 눌러 참는 표정으로 물었다.

    “놓쳤다는 몬스터가 훈련 첫날 불러낸 그 몬스터 맞습니까?”

    “네.”

    고개를 끄덕이자 길게 한숨을 내쉰 임 조교가 다시 무전을 쳤다.

    “CCTV 돌려서 몬스터 찾고 동선 파악해. 나머지는 직원들이랑 훈련생들 대피시키고 몬스터 찾아.”

    계획대로다. 이제 차하율이 연수원 입구까지 도달했을 때 누군가가 슬쩍 문만 열어 주면 된다. 조교실 문을 연 임 조교가 손짓했다.

    “이채현 훈련생은 따라옵니다.”

    이해해라, 임 조교. 이게 다 먹고살려고 그러는 거 아니겠냐? 너희가 외식만 허가해 줬어도 이렇게 될 일은 없었잖아. 혁명은 억압에서부터 시작하는 거 몰라?

    - 선배님, CCTV를 아무리 돌려도 몬스터는 안 보이는데요. 조금 전부터 검은 고양이 한 마리만 돌아다니고 몬스터는 없습니다. 몬스터 풀려난 게 확실합니까?

    무전 음성에 임 조교가 나를 휙 돌아보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 고양이가 몬스터예요. 그런데 언제 다시 몸집이 커질지 몰라서…….”

    “검은 고양이 찾아!”

    상상력의 극대화를 위해 말끝을 흐렸더니 즉각 원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나 하나 때문에 발칵 뒤집힌 연수원을 보며 남의 집 불난 꼴을 구경하듯 뒷짐 지고 허허, 웃었다.

    “절대 윗선에 보고 안 되게 해! 묻어, 묻으라고!”

    “오늘 안으로 고양이, 아니 몬스터 못 찾으면 니들 다 잠 못 잘 줄 알아!”

    “이채현 훈련생, 몬스터 조종 못 합니까?”

    “얘도 자유 의지가 있는 터라.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네요, 하하.”

    페리는 내 명령에 따라 열심히 조교들의 눈과 손길을 피해 도망 다니는 중이었다. 눈에 띄면 쏜살같이 달려 나가 숨어 버리는 페리 때문에 연수원 온 곳을 헤집고 다니는 조교들은 점점 지쳐 갔다.

    태평하게 웃자 지금 웃음이 나오냐는 스산한 눈빛들이 꽂혀 왔다.

    “그냥 소환을 해제하면 안 됩니까……?”

    조교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욜, 머리 좀 굴러가는데? 모두가 내게 소환을 해제하라는 암묵적인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나한테는 차하율이 치킨과 편의점 즉석식품들을 들고 돌아올 때까지 조교들의 시선을 끌고 있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쏟아지는 눈길 속, 차하율의 룸메이트가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반반무마니- 하율이 들어왔대요] 오후 6:40

    화면에 뜬 문자 내용을 확인하고는 깔끔하게 소환을 해제시켰다.

    『스킬 ‘소환(L)’을 해제합니다.』

    “아, 됐다.”

    볼을 긁적이며 말하자 부글부글 끓는 표정이던 임 조교가 버럭 소리 질렀다.

    “이게 다 능력 훈련을 안 하니까 일어나는 일 아닙니까!”

    “그러면 테이머 데려오든가요. 나도 히든 클래스 걸려서 성가셔 죽겠구먼, 나보고 뭐 어쩌라고.”

    물론 난 테이머가 아니지만.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심드렁하니 대꾸하자 꾹꾹 화를 억누르며 한숨만 푹푹 내쉬던 임 조교가 딱딱하게 말했다.

    “이제 자율 시간은 없습니다. 능력 훈련 시간에 농땡이 피우지 말고 훈련합니다. 알겠습니까?”

    “네에.”

    설렁설렁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능력 훈련은 내일이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일로 단단히 찍힌 것 같긴 하지만 퇴소까지는 열흘밖에 안 남았고 게이트 레이드 실전에 들어가면 시간은 훅훅 지난다고 했으니 별문제는 없겠지.

    기숙사 방으로 돌아오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킨 두 마리가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나, 이채현은 태어나서 세 번 운다.

    마계에서 휴대폰이 완전히 고장 났을 때, 500년 만에 집에 귀환했을 때.

    그리고 열흘 만에 즉석식품 대신 갓 조리된 맛있는 음식을 영접했을 때.

    눈물 젖은 치킨을 먹지 못한 자, 인생을 논하지 말지어다.

    넷 다 감동의 눈물을 글썽이며 치킨을 뜯었다. 갓 튀긴 치킨은 더럽게 맛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텁텁하고 습한 여름 공기가 들어왔다.

    “세연아, 더운데 에어컨 틀게 창문 닫으면 안 돼?”

    “안 돼. 냄새 배잖아. 빨리 먹고 치우죠.”

    김나연의 물음에 천세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중간중간 방향제를 방에 뿌리기도 했다.

    설마 회귀 전에 기숙사 불시 점검이라도 나왔나? 거기서 치킨 먹은 거 들켰고?

    회귀자(추정)의 이상 행동에 나도 절로 불안해져 치킨을 먹는 속도를 빨리하며 바닥에 흘린 치킨 부스러기들을 싹싹 닦아 냈다. 치킨 두 마리를 20분 만에 먹는 기록을 세운 우리는 곧바로 뒷정리를 시작했다.

    “치킨 박스는 어떡하지?”

    “인벤토리에 넣어 놓고 내일 쓰레기 수거할 때 슬쩍 놓고 오면 돼요. 나연아, 너 입가에 양념 묻었어.”

    그 말에 나도 괜히 한 번 더 티슈로 입가를 쓱 닦았다.

    “기숙사 불시 점검입니다!”

    진솔이 인벤토리에 뼈만 남은 치킨 박스를 던져 넣기가 무섭게 벌컥 문이 열렸다. 거봐. 천세연 쟤, 아무리 봐도 회귀한 거 맞다니까.

    여자 조교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우리를 날카로운 눈으로 훑더니 신발을 벗고 다가왔다. 가운데에 놓인 과자 봉지를 가리킨 그가 물었다.

    “과자는 어디에서 났습니까?”

    “입소 전에 사 왔는데요.”

    매의 눈으로 기숙사 방 이곳저곳을 살피던 조교가 창문을 가리켰다.

    “창문은 왜 열어 놨습니까?”

    “공기 텁텁해서 환기 좀 시키려고요.”

    “방향제는 왜 뿌렸습니까?”

    “방에서 꿉꿉한 냄새 나서요.”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내려는 조교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태연히 맞받아치는 천세연. 가히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결국 우리 방에서 아무것도 잡아내지 못한 조교는 패배를 인정하고 순순히 물러났다. 조교가 가자마자 우리는 소리 없이 하이파이브했다.

    하지만 다음 날.

    “104호, 201호, 203호, 204호, 301호, 401호 훈련생들은 지금 당장 앞으로 나옵니다! 지금 제정신입니까?”

    반반무마니 모임은 발각되었고 우리는 훈련 시간에 호명되어 죽상을 하고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치킨을 먹기 위해 그 난리를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것에 임 조교는 더욱 날뛰었다.

    대체 어떻게 들킨 일인고 하니, 콜라를 엎지른 203호 멍청이들이 치킨 냄새를 풀풀 풍기며 기숙사 관리실에 가 물티슈를 얻어 왔단다.

    수건은 뒀다가 국 끓여 먹을래, 이 멍청이들아?

    그래도 203호는 의리를 지켰지만 마침 불시 점검에서 딱 걸린 204호가 너희만 퇴소시킨다는 협박에 같이 가담한 이들의 방 호수를 술술 불었단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다 같이 머리를 박고 있는 거고. 흘러내리는 옆머리 틈으로 204호 인간들을 째려보았다.

    이런 의리 없는 자식들. 니들이 인간이지 마족이냐?

    “몬스터를 풀어 놓고 연수원을 빠져나가?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입니까?”

    그래도 치킨을 먹었으니 후회는 없…….

    “여러분들은 의무 훈련 세 시간 추가입니다! 추가 훈련은 능력 훈련이 아니라 체력 훈련으로 진행할 예정이니 점심 먹고 다시 훈련장으로 집합합니다. 알겠습니까?”

    ……?

    * * *

    “이번 기수는 영 인재가 없군요.”

    보고서를 넘기며 주태윤이 혀를 찼다. 훈련생들의 개인 평가점수는 하나같이 형편없었다.

    그나마 점수가 높으면 등급이 낮고, 등급이 높은 놈들은 제 등급만 믿고 훈련은 내팽개쳤는지 점수가 엉망이고.

    “하하, 이번 기수는 식사가 부실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다른 기수 중에도 급식만 먹었던 기수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도 그 친구들은 밖에 나가는 걸 암암리에 눈감아 줄 수 있기라도 했죠. 이번엔 하필 상황이 영 나빠서…….”

    머리를 긁적이는 조교의 말에 보고서를 내려다보는 주태윤의 얼굴에 비소가 걸렸다.

    “하긴, 협회가 발칵 뒤집혔는데 산하기관인 연수원이라고 그 불똥이 안 튀겠습니까?”

    하루아침에 사라진 한국대학교 도서관 A급 게이트. CCTV에 찍힌 이들은 자신들은 게이트 근처에서 마석 채굴만 했을 뿐 보스룸에는 발도 디디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등급 역시 1급 몬스터를 잡을 수 있을 만한 등급조차 아니었다.

    이미 클리어된 게이트가 재활성화된 것도 충분히 머리 아픈 일인데, 거기에 게이트의 소멸은 불붙은 데에 기름 부은 꼴이었다.

    그리하여 연수원까지 신경 쓸 전력이 없으니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훈련생들을 단단히 통제하라는 윗선의 신신당부로 인해 지금의 유례없이 엄격한 감시 체제가 탄생했다.

    19기만 불쌍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아직 실전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때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도 아마 있을 겁니다.”

    “글쎄요……. 낭중지추라는 말이 있죠. 뾰족한 송곳은 가만히 있어도 주머니를 반드시 뚫고 비어져 나온다고.”

    보고서 장을 넘기는 손길이 점점 성의 없어졌다.

    “그저 가만히만 있어도 눈에 띄는 이, 그게 제가 찾는 인재상인 걸 아시는 분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이번 기수에는 어지간히 인재가 없는 모양이군.”

    실소를 흘리며 보고서를 넘기던 중, 어느 순간 그의 손이 뚝 멈췄다. 페이지에 박힌 증명사진을 본 주태윤의 입꼬리가 슬쩍 호선을 그렸다.

    천천히 평가점수를 훑어보던 그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 훈련생은 점수가 마이너스네요?”

    페이지를 슬쩍 본 조교가 볼드체로 박힌 이름을 훑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친구가 임 선배님 눈 밖에 단단히 나서 말입니다.”

    “저런, 어쩌다가?”

    “첫날부터 마찰이 있었는데 그 후로도 소소하게 임 선배 속을 긁었달까, 사고를 좀 쳤달까…….”

    “푸하하하!”

    쉽게 상상되는 장면에 주태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책상에 휙 던지듯이 놓았다.

    “역시, 이 자료는 참고 수준으로만 써야겠네요.”

    “…예?”

    “이렇게 사람 보는 눈들이 없어서야, 어디 믿고 맡기겠습니까?”

    영문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를 보는 조교를 뒤로한 채 주태윤은 조교실을 나왔다.

    어디,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갈까? 이번엔 또 어떤 반응을 보여 주려나. 그의 눈꼬리가 샐쭉 휘어졌다.

    * * *

    마지막 날의 의무 훈련 시간이 끝나자 훈련생들은 점심 식사를 위해 우르르 훈련장을 빠져나가 식당 혹은 기숙사로 몰려갔다.

    하지만 어차피 점심 먹고 다시 훈련장으로 돌아와야 하는 반반무마니 회원들은 그냥 훈련장에 드러누웠다.

    알고 보니 203호와 204호 그리고 104호를 제외한 나머지 방(여자 방)은 우리처럼 불시 점검 전에 치킨을 싹 먹고 뒤처리까지 깔끔히 끝낸 터라 들키지 않고 무사히 넘어갔단다.

    204호가 불지만 않았으면 저 열두 명만 들키고 조용히 넘어갔을 거란 소리다. 대역 죄인이 된 204호 넷은 구석에서 쭈그려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와, 체력 훈련 세 시간이라니. 차라리 날 죽여라.”

    내 한탄에 누군가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체력 훈련 세 시간이라면 식사를 걸러서야 되겠습니까?”

    “와, 스토커가 이제는 연수원까지 따라 들어오네. 경찰 아저씨, 여기예요.”

    “이런, 잠깐 들를 일이 있어서 왔다가 마침 생각나 얼굴 보러 온 거니 오해는 말아 주시죠.”

    내 앞에 서서 드러누워 있는 내 얼굴을 웃음기 서린 얼굴로 내려다보는 주태윤을 힐긋 올려다보고는 다시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가 높구나, 주태윤아.

    유명인 S급의 등장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내 옆에 무릎을 굽혀 앉은 주태윤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저 안 반갑습니까, 채현 씨?”

    “맛있는 점심밥 사다 주면 좀 반가울 듯?”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십니까?”

    “음……. 초밥? 기왕이면 계란 초밥, 유부초밥, 한치 초밥, 크래미 초밥 없는 거로.”

    까다로운 조건에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인 주태윤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우리 항상 먹는 초밥집 있지, 거기에서 특선 초밥 포장 좀 해 와. 아니, 스물네 개.”

    훈련생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졸지에 주태윤 이미지만 좋게 만들어 준 꼴이 되어 버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전화를 끊고 나른하게 미소 지은 주태윤이 다시 물어 왔다.

    “이제는 반겨 주실 마음이 좀 드나요?”

    “와아, 반가워라.”

    동태 눈깔로 팬싸를 치르는 아이돌급의 감정 없는 대꾸에도 주태윤은 사르륵 웃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잘 지내고 계시는 것 같네요.”

    “네, 잘 지내죠. 비록 급식이 너무 맛이 없어서 컵라면이랑 전투식량으로 식사를 때우고 체력 단련을 무슨 진천 선수촌급으로 시키고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치킨 한 번 먹었다고 대가리를 30분간 박게 하지만 아주 잘 지냅니다.”

    표정 변화 없이 줄줄 늘어놓는 말에 살짝 상체를 기울인 주태윤이 내 귀에만 들리게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게 제가 수료증 받아 와 준다니까. 지금이라도 마음 바뀌면 말해요.”

    “아, 됐어요. 이제 열흘도 안 남았는데, 뭘.”

    그러니 어여 내 앞에서 사라지라고 손을 휘저었다. 타이밍 좋게 초밥 도시락이 가득한 봉지를 한 손 가득 쥔 주태윤의 비서가 도착했다.

    “그럼 맛있게 드시고 힘내서 체력 단련하세요, 채현 씨.”

    놀리듯 말끝을 늘인 주태윤이 멋들어진 미소를 짓고는 비서와 함께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훈련생들이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은 캐러밴처럼 초밥 도시락에 달려들었다.

    구석에서 쭈그려 있던 204호 넷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초밥을 집어 갔다.

    “이것 참, 채현 씨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주태윤 헌터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하하!”

    초밥 도시락 포장을 열며 호탕하게 웃는 반반무마니 리더에게 깔끔한 답을 내려 주었다.

    “돈 낸 사람에게 고마워해야죠, 뭐.”

    돈 많은 주태윤 단골집이라 그런지 초밥은 꽤 맛있었다. 초밥을 먹고 있자 슬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온 김나연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물었다.

    “언니언니, 주태윤이랑 아는 사이예요?”

    눈에 그득한 팬심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주태윤 좋아해?”

    “네!”

    경쾌한 즉답이 돌아왔다. 설마 너도 나 싸불한 주태윤 빠돌이들 중 하나니……?

    “…대체 왜?”

    “잘생겼잖아요. 완전 배우상. 저 얼굴로 스크린 데뷔를 안 하고 행시 준비를 했다니, 얼굴 낭비 아니에요?”

    하긴, 잘생기긴 했지. 연어 초밥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문제지. 저런 묵직한 스타일보다는 좀 더 샤랄라한 스타일이 내 취향이다. 예를 들자면…….

    ‘그래, 딱 저기에 눈물점 있고…….’

    내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그 스타일’과 닮은 사람인 천세연에게로 향했다. 무슨 용건이냐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는 천세연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너 말고 너네 오빠.

    배부르게 초밥을 먹고 뒷정리를 마치자마자 벌컥 훈련장 문을 열고 들어온 임 조교가 훈련장에서 뒹구는 반반무마니 회원들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어제 먹은 치킨이 입 밖으로 다시 나올 만큼 지독한 지옥 훈련이 시작되었다.

    “치킨 먹은 힘으로 속도 더 냅니다!”

    훈련장을 토끼뜀으로 돌며 이를 악물었다. 치킨 한 번 먹었다고 더럽게 잡아 대네.

    『던전 브레이크의 원인이 되어 버렸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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