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나를 싫어하는 그대에게 (9/33)
  • 9. 나를 싫어하는 그대에게

    [가입 승인이 완료되었습니다.]

    [환영합니다, 마탑주2v 님.]

    가입 신청한 지 이틀이 지나고 드디어 헌티드 가입 승인이 내려졌다.

    카페 대문에는 포커스가 올린 헌터명 변경권 도입 청원 내용과 링크가 박혀 있었고, 게시판은 거래게시판, 정보게시판, 자유게시판, 파티모집게시판, 길드홍보게시판 등 최소한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제일 먼저 내가 헌티드에서 검색한 단어는 테이머였다. 무려 472건이나 되는 글이 쫙 떴다.

    HUNTED

    [자유게시판] 테이머 몇 ㅌㅊ 예상?

    20XX-05-11 18:24 조회: 2,462 작성자: 내가바로키랏

    튀어나와서 애교 부린 몬스터가 무려 1급이라는 따끈따끈한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1급 몬스터를 칼복종시킬 정도면 1티어 천상계인 프리스트와 네크로맨서급 아니냐

    글고 비행형 몬스터 하나 테이밍하면 날아다니기도 ㄱㄴ이고 전투할 때도 소환수들 풀어놓고 뒷짐 지고 구경하고 있음 되잖아 와 이렇게 써 놓고 나니까 ㄹㅇ 개꿀이네?

    댓글(32)

    마이야히: S급이면 킹정인데 A급 이하면 밸붕 곧바로 1군 편입 쌉가능이지

    월요일싫어: 이제 천상계에 테이머도 추가되겠네

    디베인: 네크로맨서가 왜 천상계야 ㅅㅂㅋㅋㅋㅋ 하여간 시체대장 새끼들 자기들 올려치기는 오지게 잘해요

    └어둠의사령술사: 네크로맨서 정도면 1티어지

    └디베인: @어둠의사령술사 그러니까 기준이 뭐냐고 시체대장 씹1새꺄

    └어둠의사령술사: @디베인 왜 초면에 욕 박고 지랄이야 애1비없냐?

    └디베인: @어둠의사령술사 나와 개1새끼야 현피 뜨자 니 몇 급이냐?

    └어둠의사령술사: @디베인 니가 그걸 알아서 뭐 하게 ㅅㅂ롬아 나보다 등급 낮으면 쫄아서 빤스런하게?

    └자유지기: 분쟁 경고 알림 18:30

    설아: 부럽다ㅠ 게이트에서 온몸 바쳐 구르는 검사는 그저 웁니다ㅠㅠ

    └M19: 개쓰레기 직업 거너도 웁니다ㅠㅠㅠ

    └로빈후드티: 개쓰레기 직업2 궁수도 웁니다ㅠ

    └M19: @로빈후드티 기만자 안 받음

    └상윤: @로빈후드티 궁수 정도면 2.5티어는 가지

    로딩중: 1군에서 메이지 왜 빠짐????

    └rlkfdl: 대표 메이지 서열1위포커스가 검사 천우현에게 랭킹 발리면서 떡락함ㅠ

    스킬그레이몬: 일단 ㅅㅌㅊ라는 건 확실함

    …….

    [자유게시판] 테이머 분석글

    20XX-05-12 8:13 조회: 1,523 작성자: 슈라

    일단 게임이나 대중매체에서의 테이머는 몬스터를 복종시키고 귀속시켜 자신의 소환수로 만드는 직업군임. 주로 자신이 공격하는 대신 자신의 소환수를 이용해 상대를 공격함. 대표적인 예로는 「드X곤 길들이기」, 「포X몬스터」, 「디X몬」, 「백설 공주」 등이 있음.

    현실의 테이머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어서 무어라 정확히 정의 내리지 못하겠지만 일단 몬스터를 복종시키는 건 동영상으로 밝혀진 사실임.

    만약 동영상 주인공이 랭크 A가 나온다면 이건 정말로 밸런스 붕괴 직업임. 1급 몬스터를 A급이 테이밍할 수 있다는 소리는 나중에 등장할 S급 테이머가 1급 몬스터 여러 마리를 테이밍할 수 있다는 소리와 일맥상통하거든.

    그리고 또 하나 밸붕인 이유가 몬스터를 게이트 밖으로 데리고 나올 수 있다는 거임. 지금까지 몬스터가 완전히 게이트 밖으로 나온 사례는 전 세계를 통틀어 어제 그 제운대입구 버스정류장 앞에 생긴 그 게이트뿐이었음.

    이게 다른 헌터들에게도 악재인 이유가 이거 때문에 헌터 규제가 강화될 수도 있음. 지금도 공공기관이나 주요 시설에서 능력 못 쓰지? 만약 테이머가 데리고 다니는 몬스터가 일반인 문다? 그러면 이제 바로 게이트 외에서 능력 못 쓰게 규제 때려 버리는 거임.

    아마도 자세한 능력치는 이 테이머가 레이드에 끼어 봐야지 알겠지만 현재 나온 것들로는 테이머가 헌터계의 황소개구리가 될 확률이 높음.

    결론: 테이머는 능력치가 에바인 밸런스 붕괴 직업임

    댓글(12)

    ruru: 분석글이라더니 죄다 뇌피셜만 늘어놨네ㅉ 게이트 밖으로 몬스터가 스스로 기어 나온 건지 동영상 주인공이 불러낸 건지 어떻게 알아?

    └ㅈl니어스: ㄹㅇㅋㅋ

    unvrella: 진짜 어쩌라고다

    └unvrella: 백설 공주는 또 뭔데 ㅅㅂ 백설 공주가 동물들에게 왕비 쥐어뜯으라고 명령함? 뭔 개소리를 이렇게 정성스럽게 써 놔?

    씨바씨ㅏ바아이싸바: 밸붕임 이 한 단어를 몇 줄을 늘여 쓴 거

    └sai7811: ㄹㅇ 열폭도 정성스럽게 한다

    …….

    [자유게시판] 테이머가 조오온나 꿀 빠는 개씹 상타취 귀족 직업인 이유

    20XX-05-12 8:13 조회: 37,523 작성자: v해윤v

    무기계처럼 직접 안 구름. 메이지처럼 수식 계산도 안 함. 네크로맨서처럼 굳이 언데드나 사령 만들려고 몬스터 죽일 필요도 없음. 프리스트처럼 대가리 빠개지도록 타이밍 생각하면서 힐 넣어 주고 다른 헌터들에게 보호받을 필요도 없음.

    대표적인 예로 이 뉴비와 같은 테이머라는 호칭을 붙여 주는 디X몬을 봐라. 거기 주인공인 신태일이 직접 거대 디X몬에게 몸빵을 날리는 걸 본 적 있냐? X나 위급 상황 아니면 몸빵은 언제나 아구몬 몫이다.

    요약: 인생은 운빨이다 ㅅㅂ

    댓글(152)

    rado985: 부럽다 부러워 로또 당첨급이네

    └lotto: 게다가 ‘최초’ 타이틀까지 붙었으니 길드에서 서로 모셔 가려고 난리겠져

    메이야: 솔직히 어렸을 때도 디X몬 보면서 뒤지게 구르고 개고생하는 건 디X몬들인데 왜 ㅈ간들이 울고불고 생색내고 난린지 이해를 못 했지

    └3ㅁ54: 디X몬은 우리의 친구! 이 지랄하면서 친구를 배틀시키노ㅋㅋㅋ

    레이언: 디X몬 안 봐서 뭔 소린지 모르겠는디;; 난 포X몬세대라서

    └v해윤v: 이 정도 설명도 이해 못 하는 빡대가리인 너를 위해 포X몬스터로 설명해 드림 지우 새끼가 가라 피카츄! 외치는 장면이 더 많냐 지우 새끼가 직접 몸빵 하는 장면이 더 많냐?

    └레이언: @v해윤v ㅇㅎㅇㅎ 이해 완

    └LEVA: Tlqkf 나이가 몇인데 디X몬도 몰라?

    └레이언: @LEVA 나이 많아서 좋겠다 틀딱 새끼야 X나 디X몬 가지고 나이 부심 부리는 새끼는 또 처음이네

    …….

    [자유게시판] 그런데 ㄹㅇ 테이머 맞음?

    20XX-05-12 20:13 조회: 9,523 작성자: 내꿈은미래소년명탐정코난

    지금 몬스터가 앞에서 칼복종했다는 거 하나로 동영상 주인공을 테이머로 몰아가고 있는 거 같은데 동영상을 계속 보면 이상한 상황이 너무 많음.

    먼저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나온 거. 한 달 전에 서울 상도동 주택가에서 몬스터 머리가 게이트 밖으로 나온 적이 있긴 했지만 몬스터가 완전히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온 케이스는 이게 처음임.

    동영상 주인공이 게이트에서 몬스터를 불러냈다는 의견도 있는데 그건 관심에 미쳐 버린 관종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함. 일반인 아님 최소 미등록 각성자인데 관심 한 번 받으려고 벌금 5천 물 짓을 하겠음?

    자, 몬스터가 물론 게이트 밖으로 나올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영상을 보면 이 몬스터는 처음 달려들 때부터 공격 의사가 없었음. 곧바로 이 사람에게로 달려가고는 바로 앞에서 멈춰서 뒹굼.

    그리고 동영상 주인공은 몬스터가 자기를 덮쳐 오는 데도 동요가 없음. 보통 일반인들은 1급 몬스터가 달려오는 상황이라면 주인공 옆의 사람들처럼 미친 듯이 뒤돌아 달려가거나 다리가 풀려 주저앉음. 하지만 동영상 주인공은 정말 무심히 몸만 쓱 피함. 한두 번 피해 본 솜씨가 아님. 심지어 제게 치대 오는 몬스터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함.

    그래서 가설을 세워 봤음. 동영상 주인은 존X게 강한 귀환자이자 한때 몬스터의 주인이었고 자기가 버리고 온 몬스터랑 조우한 거임. 이제 능력 측정 검사하면 SSS급 떠서 천우현 제치고 랭 1위 먹을 거임.

    물론 아닐 수도 있음. 문제 있으면 둥글게 말해 주길 바람

    댓글(102)

    아지: 아니, 진지하게 보고 있었는데 결론이 왜 이따구야?

    └8282: 내 말이ㅋㅋㅋㅋ 귀환자가 갑자기 왜 튀어나오는뎈ㅋㅋㅋㅋ

    └레이디스: 가설이 너무 급발진 아닝교

    └nunnun: 님 혹시 웹소 작가임?ㅋㅋㅋㅋㅋ

    전투연금이될거야!: 1. 던전 밖으로 몬스터를 불러낸 것이 본인인가 아니면 몬스터가 나온 후 복종을 시킨 건가

    2. 만약 불러낸 것이 본인이라면 왜 몬스터를 밖으로 불러냈는가

    3. 만약 나온 후 복종을 시켰다면 왜 자동차 위로 몬스터를 구르게 했는가

    4. 능력을 쓰는 게 꽤 능숙해 보이는데 재능충인가 아니면 노양심 미등록 각성자였나

    5. 왜 실검을 조작했는가

    피드백 부탁

    └시리야불꺼줘: 갸 아직 헌티드 가입도 안 했겠다

    └슈언: 벌써부터 피드백 지옥에 가둬 버리누…….

    피럿: 그런데 1급 몬스터를 앞에 두고 너무 반응이 태연하긴 하다 거의 베테랑 헌터급이네

    └피럿: 그래도 귀환자는 좀 에반 듯 너무 나갔어

    …….

    여기저기 올려져 있는 내 모습이 담긴 동영상과 진지한 토론글, 분석글을 보며 혀를 찼다. 가상의 직업인 테이머를 열심히 물고 뜯는 모습이 참…….

    열폭하는 글들은 무시하고 나머지 게시글들을 쫙 훑어보니 S급이면 몰라도 만약 A급이라면 능력치가 밸런스 붕괴라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이미 A급을 받아 온 나는 절로 망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라도 능력 측정 검사 재신청해서 S급으로 올릴까?

    그러기에는 관심이 너무 많이 끌릴 텐데. 관심이 쏠린 상태에서 한 번이라도 스킬을 쓴다든지, 마기로 짓누른다든지 하는 실수를 하면 끝이다.

    그리고 마지막 글.

    이거 뭔데? 이 사람 대체 정체가 뭐야?

    회귀자야? 무당이야? 거의 신내림급이다. 내가 귀환자인 것도 맞혔고 몬스터의 주인인 것도 맞혔고 내가 버리고 온 몬스터랑 조우한 것도 맞혔다.

    다행히 댓글들은 이게 뭔 개소리냐는 반응이 압도적이었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나는 가슴께가 순간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신고 버튼을 연타하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거 어떻게 못 내리나?

    * * *

    하지만 나에게는 당장 헌티드의 테이머 여론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바로 조별 과제였다.

    [박서라 님? 자료가 너무 부족한데요] 오후 3:32

    [그리고 보내 주신 자료 대부분이 나무X키 마석란에서 긁어 온 거네요?] 오후 3:33

    [조별 과제 박서라(자료조사) - 죄송합니다ㅠㅠ 논문을 못 찾아서 자료조사를 못 했어요ㅠㅠㅠ] 오후 3:37

    [조별 과제 박서라(자료조사) - 국내 학술지랑 논문 사이트 다 뒤져 봤는데 논문 딱 하나밖에 안 나와서ㅠ] 오후 3:39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미리 내려받은 해외 논문들을 단체 채팅방에 보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발표까지는 2주도 안 남았는데 팀원들이 너무 노답이었다.

    [이거 보고 다시 자료조사 해서 보내 주세요] 오후 3:41

    [조별 과제 박서라(자료조사) - 네, 감사합니다ㅠㅠㅠ] 오후 3:43

    [조별 과제 박서라(자료조사) - 내일까지 꼭 보내 드릴게요] 오후 3:44

    왜인지 번역기로 돌린 문장을 다듬지도 않고 그대로 보내 올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지만 애써 내리누르고 다른 자료를 열었다.

    인터넷에서 긁어 온 티가 역력한 마석 사진들이 쫙 떴다. 응, 링크 없이 오직 사진들만.

    [사진 출처가 없네요] 오후 3:46

    [조별 과제 박서라(자료조사) - 앗, 죄송합니다!] 오후 3:50

    [조별 과제 박서라(자료조사) - 다시 보내 드릴 테니까 그 파일 삭제해 주세요ㅠㅠ]

    [조별 과제 박서라(자료조사) - (이모티콘)] 오후 3:51

    PPT 담당자에게 보낼 자료 취합 및 정리를 맡은 나는 한마디로 지금 똥을 치우는 중이었다.

    내 새내기 시절을 떠올리며 애써 침착을 찾으려 해 보아도 500년 전 일이라 내가 조별 과제 때 어떤 트롤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났다. 그래도 나무X키에서 복붙 해 오는 이런 무개념 짓은 안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조별 과제 박서라(자료조사) - 아 그런데 저희 마석으로 실험하고 실험 결과 넣기로 했잖아요] 오후 3:53

    [조별 과제 박서라(자료조사) - 그거 의논하게 혹시 내일 수업 끝나고 다들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세요?] 오후 3:54

    이쯤 되면 그 생각을 포기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논문 사이트를 뒤져 봐도 논문이 안 나오는 것에서 눈치 못 챘니? 한낱 학부생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조별 과제 김선운(발표) - 전 시간 괜찮습니다]

    [조별 과제 유선한(자료조사) - 저도 괜찮습니다]

    [조별 과제 성혜진(PPT) - 저도 괜찮아요!(이모티콘)]

    줄줄이 보내오는 대답에 어쩔 수 없이 나도 긍정의 답장을 보냈다. 노트북을 탁 덮고는 침대에 뻗어 머리를 쥐어뜯었다.

    “말년에 팀플이라니, 말년에 팀플 조장이라니!”

    대학교 막학년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내 외침에 마계에서의 산책 시간을 끝내고 돌아온 페리가 우다다 달려왔다. 폴짝 내 품에 안긴 페리를 쓱쓱 쓰다듬자 새하얀 손이 페리를 쓱 들어 올렸다.

    “비켜, 고양이.”

    휙 성의 없이 방바닥에 페리를 내려놓은 애쉬가 내 옆에 누워 쓰다듬어 달라는 듯 머리를 들이밀었다. 훌쩍 점프해 애쉬의 가슴팍에 올라탄 페리가 하악질을 하며 발톱으로 애쉬를 긁어 댔다.

    둘은 언제 눈 딱딱 맞출 정도로 친했냐는 듯 다시 예전의 앙숙 사이로 돌아가 있었다.

    “힘들면 마계로 돌아가요, 폐하. 여긴 집도 좁고 폐하 시중들 사람도 없고 요리사도 없어서 폐하께서 직접 식사를 차려 드시고…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요.”

    투정 부리듯 중얼거린 애쉬가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껴 왔다. 한 번 믿음이 깨지면 의심하지 않고 믿어 보려 해도 생각과 해석은 절로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떻게 돌아왔는데, 어떤 마음으로 그 지옥에서 버티며 내 세계로 돌아왔는데 너는 왜 나를 그 지옥으로 다시 끌고 가려 해.

    “전 폐하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요.”

    “내가 마계에 있는 것 자체가 더 힘들다고 하더라도?”

    가시 박힌 물음에 애쉬가 고개를 저었다.

    “어디든 상관없어요. 폐하가 행복하시고 제가 폐하의 옆에 있는 세계라면.”

    해츨링 시절 자주 지었던 미소를 얼굴에 띤 애쉬가 느릿하게 손깍지를 한 손끝에 힘을 주었다. 맞닿은 손에 두근거리는 맥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러니 버리지만 말아 주세요.”

    달콤하고 애절한 목소리로 내가 저를 버렸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며.

    애가 안 본 사이에 가스라이팅 장인이 되어서 돌아왔다.

    죄책감을 건드려서 모두 네 잘못이라고 가스라이팅하여 여주를 제 옆에 묶어 놓는 건 로설의 흔한 쓰레기 남주 클리셰죠. 물론 멘탈이 튼튼한 여주에게는 절대로 들어 먹히지 않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내 정신력 스탯은 S급이었다.

    * * *

    강의를 마치고 나를 비롯한 팀원들은 공대 휴게실에 모였다.

    “저희가 마석 실험을 하기로 했잖아요. 2주 뒤에 발표니까 모레 실험하고 실험 결과 내면 어떨까요?”

    모레면 금요일이었다. 내 소중한 금공강을 지금 팀플의 쓸모없는 실험 때문에 날리라고? 도수 없는 안경을 쓱 올리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실험에 쓸 마석은 어떡할 건데요. 구매하시게요? 찾아보니까 마석 시가가 조약돌만 한 크기가 30만 원이던데.”

    N빵 한다고 해도 한 사람당 지출이 무려 6만 원이다. 30만 원이라는 대학생한테는 무시무시한 가격에 유선한과 나무X키 자료조사를 제외한 나머지 둘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눈을 깜빡인 조별 과제 트롤 새내기가 태연하게 내 말을 맞받아쳤다.

    “가격이 부담되면 게이트에서 주워 오면 되죠.”

    “혹시 아는 게이트라도 있으세요?”

    일반인인 내가 게이트에서 마석 하나 주워 오는 건 문제도 안 된다는 저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에 얘가 혹시 협회장이나 이재의나 주태윤, 이 셋 중 하나의 조카인가 의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느이 삼촌이 게이트 관할권이라도 넘겨줬니?

    내 물음에 고개를 주억인 조별 과제 새내기가 해맑게 대답했다.

    “저희 학교 도서관 게이트 있잖아요.”

    학교 도서관은 구관과 신관, 두 개가 있었고 현재 신관에는 내가 휘말렸던 대규모 A급 게이트가 여전히 열려 있는 상태였다. 마석 채굴해야 한다나 뭐라나.

    분명히 익숙한 마수가 있던 걸 보면 마계에서 넘어온 놈들 같은데 내 명령에도 왜 던전을 없애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언제 날 잡고 한번 들어가서 던전 관리자 놈 불러 기강 좀 잡아 줘야겠군.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 협회 관할인 저 게이트에 마석 하나 주우러 몰래 들어가자고?

    이게 대한민국 최상위 대학의 학생 머리에서 나올 생각인가? 대한민국의 입시 제도는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한 사람한테만 맡기면 좀 그러니까 저희 다 같이 들어가죠!”

    해맑게 덧붙인 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선한에게 님만 유일하게 등록받은 헌터니까 혼자 들어가라 하는 것도 빡칠 것 같았지만, 이 무데뽀 사고방식도 나름 사람을 빡치게 만들었다.

    유선한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일반인이시잖아요. 던전 공기도 버티기 힘드실 거고 일반인이 게이트에 들어가면 과태료 300만 원…….”

    “제가 찾아봤는데 클리어한 게이트는 공기 괜찮댔어요. 그리고 몰래 들어가면 되잖아요.”

    퍽이나 괜찮겠다. 만약 던전 안에서 위급 상황이 발생하거나 우리가 들어갔다는 걸 걸리면 책임은 누가 질 거냐고. 네가 총대 메고 우리 몫까지 과태료 싹 낼래?

    “마석만 얼른 줍고 나오면 되죠.”

    “마석은 게이트와 한참 떨어진 던전 안쪽에 있는데요. 조약돌처럼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에이, 뭔 상관이에요. 선배, A급이시잖아요. 이쪽 선배도 요즘 난리 난 테이머이시고!”

    “아하하, 테이머라니, 누가요? 저는 그 테이머랑 동명이인인데요?”

    마스크를 쓱 올리며 반사적으로 물었다. 안경에 모자에 마스크까지 동원해서 얼굴을 가렸는데 어떻게 저렇게 확신하는 거지?

    “엥, 아닌데? 분명 상메에 그 동영상 쥔공 맞다고 써 놓으시지 않았어요?”

    젠장, 내 프로필 못 보게 오픈 채팅방으로 팔걸. 어차피 들통난 거, 마음 편하게 마스크를 벗었다.

    “아무튼 전 반대예요. 너무 위험부담이 커요.”

    “그런데 저희 솔직히 자료가 너무 적잖아요. 실험 내용이라도 넣어야지 발표 분량 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맞아요, 지금 PPT 다섯 장밖에 안 나와요.”

    “그러니까 제가 분명히 다른 대체에너지로 발표 주제 정하자고 했을 텐데요.”

    다들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니?

    “지금이라도 주제 바꾸든지요.”

    “당장 2주 후가 발푠데요? 시간 부족하잖아요.”

    “아, 그럼 다 같이 망하든가.”

    아무튼 난 안 들어갈 거라고. 너 지금 A급인 내가 들어갈 거라고 믿고 다 같이 들어가겠다면서 뻗대는 거잖아. 미간을 팍 찌푸리자 PPT를 맡은 새내기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저 이번 수업 A 못 받으면 장학금 못 타는데…….”

    “그거야 그쪽 사정이고요.”

    화학과 후배도 아닌 터라 까칠하게 대꾸하니 울먹이던 새내기가 기어이 훌쩍이며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진짜로 울 줄은 몰랐기에 얼결에 후배를 울려 버린 못된 선배가 된 나는 당황했다. 게다가 우리 과도 아닌 타 과 후배를.

    “혜진아, 울지 마……. 아, 진짜 실험 과정만 넣으면 점수 잘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선배들이 이 교수님은 발표에 실험 과정 들어가면 무조건 A 준다 하셨는데…….”

    “그냥 마석 주워 오죠. 발표 주제 뜯어고치는 것보단 쉬울 것 같은데요.”

    “빨리 들어가서 슬쩍 작은 마석 하나만 주워 오면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믿었던 유선한마저 내게 등을 돌렸다. 저게 만약 완벽하게 계획된 정치질이었다면 새내기 쟤는 정말 대통령감이었다.

    그리고 10분 뒤,

    “그… 헌터증 아직 없으시죠?”

    “…네.”

    “모자랑 마스크로 얼굴 잘 가리시고요, 발광 아티팩트 있으세요?”

    “하아, 아니요.”

    “…하아.”

    나는 결국 유선한과 단둘이 도서관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깊은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팀플의 여론은 이미 마석을 주워서 실험하는 거로 기울어져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짐이 될 게 분명한 저 세 명의 일반인들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뿐이었다.

    “게이트 안에 몰래 들어갔다가 다치면 이 경우에는 보험 처리도 안 되는 거 아시죠?”

    “아니, 불평 안 한다니까. 그냥 안 따라 들어오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요.”

    난 아직도 내 고향 동네의 잼민이 사례를 잊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활성화된 던전 때문에 얼마나 당황했는데.

    인고의 설득 끝에 최종적으로 실험에 쓸 마석을 주우러 게이트에 들어가는 인원은 나와 유선한, 둘이었다.

    게이트는 A급이었기에 지문 인식과 헌터 라이선스 인증을 해야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나 혼자였으면 순간 이동으로 이 스피드 게이트를 가볍게 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내 대외적인 직업은 테이머.

    CCTV에 찍히지 않도록 사각지대에 서서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였다.

    “지금 제 헌터증 유무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닌데요.”

    헌터 라이선스를 찍으면 당연히 기록이 남는다. 그 기록으로 허가받지 않은 침입자를 걸러 내는 거다.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혹시 협회 소속이세요?”

    내 물음에 유선한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낸 그는 버튼을 꾹 누르더니 내게 손짓했다. 휴대폰 화면에 띄운 QR코드를 찍자 스피드 게이트가 스르륵 열렸다.

    “CCTV는 어쩌고요……?”

    “지금 CCTV 영상 교란기로 잠깐 신호 교란했으니 괜찮아요.”

    보통 헌터들이 교란기를 들고 다니나? 그리고 QR코드는 또 뭔데?

    설명을 요구하는 내 눈빛에 열린 스피드 게이트를 지나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며 유선한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D급 출신이다 보니까 이제까지 파티 위주로 레이드를 뛰어서… 파티는 거의 게이트 스틸을 업으로 하거든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금고 전문 털이범처럼 게이트 스틸범들도 있다는 소리였다. 방금 유선한이 한 건 게이트 스틸범들이 쓰는 수법이었고.

    사실 현 상황을 보면 파티 뛰는 헌터들이 전문 기기까지 써 가면서 게이트 스틸할 만도 했다.

    가치 있는 던전 부산물은 C급 이상 게이트에 있는데 그건 웬만큼 규모 있고 세력 있는 길드들이 독점하고, 소규모 길드 및 길드에 들어가지 못한 헌터들은 길드들이 관심도 가지지 않는 E, F급 게이트밖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면 이제 돈벌이가 안 되니까 게이트 털고. 길드 놈들은 자기들이 독점하는 건 생각 안 하고 이걸 사회 문제라고 몰아가고.

    뭐, 저쪽 과거가 게이트 털이범이었건 뭐건 간에 나한테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끼친 건 없었으니 상관없었다. 이쪽이야 안 들키고 들어가서 좋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건 처음이시죠?”

    내가 처음 게이트에 들어가 긴장했다고 생각했는지 유선한이 살갑게 말을 붙여 왔다. 휘말린 것까지 친다면 딱히 처음은 아닌데.

    내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어색하게 웃은 그가 게이트에 발을 내디디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지난달에 이 게이트가 열렸을 때는 게이트가 출입을 허가하지를 않아서 갇혀 있던 사람들이 못 나갔었어요.”

    “알아요, 저도 그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여기 휘말렸었거든요.”

    “아, 그러시구… 네?”

    “저 기억 안 나세요? 유선한 씨가 저 잡고 던전 안쪽에서 오셨냐고, 생존자 따로 없냐고 물어보셨는데.”

    곰곰이 생각하던 유선한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몬스터를 바로 코앞에서 마주하고 실드 깨지고 난리가 났는데 그저 생존자 1인 나를 기억할 리가 없지.

    『A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몸을 빨아들이는 감각이 한차례 지나간 후, 나와 유선한은 대략 한 달 전 우리가 휘말렸던 던전 안에 서 있었다.

    던전 초입은 조명을 켜지 않은 방 정도의 어둠이었다. 시야 확보가 되고 앞에 있는 사람을 식별할 수 있을 만한 어둠. 유선한이 발광 아티팩트를 꺼내 공간을 밝혔다.

    숨을 들이쉬다가 멈칫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공기가…….

    ‘뭔가 달라.’

    확실히 이전에 이 게이트에서 느꼈던 공기와는 다르다.

    이 도서관 A급 던전을 비롯하여 이전에 휘말렸던 던전의 공기는 분명 익숙하고 포근했다. 하지만 지금 내 폐부를 찔러 오는 공기는 황사 바람을 마신 것마냥 미세하게 불쾌하고 까끌거렸다.

    어째서 게이트에 들어간 일반인 및 헌터들이 던전 공기가 불편하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던전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멈칫했다. 바닥에 핏자국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F급 헌터가 몬스터에게 물려 죽었던 그 자리였다.

    방금까지 앞을 밝히던 빛이 마구 떨리며 흐릿해지더니 옆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옆을 돌아보니 입을 틀어막은 유선한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허리를 잔뜩 수그리고 있었다.

    “허억, 허억!”

    “유선한 씨? 괜찮으세요?”

    내 물음에도 그는 덜덜 떨며 몸을 더욱 웅크렸다. 시선은 바닥의 핏자국을 향해 있었다.

    비틀거리다가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털썩 쓰러진 유선한이 머리를 움켜쥐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빠르게 중얼거렸다.

    “…죽을, 죽을 거야. 우리 모두 죽을 거야. 저, 저 F급 헌터처럼 몬스터에게 찢겨서, 헉, 허억!”

    발밑의 바닥을 물들인 핏자국을 표정 없이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유선한에게 트라우마의 트리거로 발동한 모양이었다.

    고등급 헌터 없이 D급으로 A급 게이트에 휘말려 바로 코앞에서 몬스터가 사람을 잡아먹는 걸 보았고 그 피를 뒤집어쓰기까지 했으며 함께 있던 C급은 생존자들과 섞여 도망가는 바람에 오로지 혼자 죽을 각오로 1급 몬스터를 막아야 했으니.

    그 세 명의 새내기를 필사적으로 말린 게 다행이었다. 만약 그 셋까지 끌고 들어왔다가 유선한이 이 상태가 되었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저주 ‘수면(A)’을 실행합니다. 설정 시간: 10분』

    이제는 숫제 바닥에 드러누운 채 발작하는 유선한을 잠재운 나는 곧바로 페리를 소환했다. 나타난 페리는 이리저리 고개를 기웃거리더니 털을 곤두세우고 사방을 경계했다.

    “뭐가 있긴 있구나?”

    내 물음에 페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중간고사 기간에 휘말렸던 카페 게이트처럼 던전 관리자를 불러 보아도 응답은 없었다. 감히 간 크게 내 명령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게 아니라면 내 마족 부하들은 이곳에서 철수했다는 소린데. 그러면 어째서 던전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거지?

    작은 고양이 모습에서 오랜만에 원래의 거대한 마수 외형으로 돌아온 페리를 쓰다듬으며 명령을 내렸다.

    “던전 안쪽까지 갔다 올 테니까 이 사람 잘 지키고 있어.”

    페리가 자신도 따라가겠다는 듯이 낑낑거렸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와 같이 유일하게 1학년이 아닌 저 인간까지 다치거나 죽어서 팀에서 빠지면 조별 과제는 100% 망한다.

    그리고 굳이 페리가 내 옆에 없더라도 내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리가. 이곳이 정말로 내게 위험했다면 위험 예지라도 떴겠지.

    유선한의 손에서 발광 아티팩트를 쓱 빼서 쥐고 거슬리는 공기를 들이마시며 던전 안쪽으로 향하는 내 걸음에는 망설임 따위 담겨 있지 않았다.

    안쪽으로 들어가도 밝은 시야에 슬그머니 발광 아티팩트를 과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뭐야, 아티팩트 없어도 됐잖아?”

    던전 벽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발광 마석과 아티팩트가 붙어 던전 안쪽을 밝히고 있었다.

    너튜브에 올라온 던전 구조 동영상에 따르면 던전 안에 던전 부산물을 얻을 수 있는 여러 공간이 있고 가장 깊숙한 곳에 보스룸, 그리고 보스룸 안에 보스 몬스터가 지키고 있는 던전의 핵이 있었다.

    던전의 핵을 박살 내면 게이트가 닫힌다는 건 기본 상식이고.

    마석이 붙어 있을 만한 던전 공간으로 들어가 봐도 이미 채굴이 끝났는지 깔끔하게 패여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계속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채굴자들이 얼마나 꼼꼼했는지 바닥에 마석 쪼가리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의견 낸 놈과 동조한 놈들은 게이트 밖에서 심신 편하게 있는데 반대했던 나만 개고생이구나.

    그렇게 마석을 찾고 찾아 마침내 내가 도달한 곳은 보스룸이었다.

    보스룸은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아직 채굴이 덜 되었는지 벽면 이곳저곳에 마석들이 광물처럼 붙어 있었다. 뾰족하게 툭 튀어나온 마석 하나를 벽에서 떼어 낸 나는 대충 인벤토리에 마석을 던져 넣고는 보스룸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내 착각인지, 실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슬리는 공기가 이곳에서는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던전의 가장 깊숙한 곳, 그곳에 핵이 있었다.

    “…이게 뭐야?”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인상을 찌푸린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검은색 덩굴 같은 촉수가 핵을 뒤덮고 있었다. 내가 느낀 불쾌한 기운이 촉수에서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다시 핵 가까이 다가가 촉수에 칭칭 감긴 핵을 자세히 살펴보니 푸른색 핵은 반쯤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협회 놈들, 이런 광경을 보면서도 아무 발표를 안 했다고? 이런 이상 현상을 보면서도 경각심이 안 들어?

    소설 속 여러 흑막 협회들과 누가 봐도 흑막같이 생긴 협회장 김도빈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여전히 핵은 기묘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소설에서는 항상 이런 걸 건드려서 무슨 문제가 일어나곤 하지.

    예를 들면 고향의 놀이터 앞 던전처럼 갑자기 클리어된 던전이 재활성화된다던가, 보스 몬스터가 튀어나온다던가, 던전 브레이크를 유도한다던가.

    마석도 얻었겠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핵을 건드릴 이유는 없었으니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

    무언가가 내 발목에 감겨 오더니 나를 힘껏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당김에 균형을 잃은 몸이 뒤로 넘어갔다.

    물컹한 촉수가 뒷머리에 불유쾌한 감촉을 선사하며 닿아 왔다. 패닉에 빠져 머리카락에 엉키는 촉수를 미친 듯이 떼어 내다가 핵의 촉수에 뒤덮이지 않은 부분에 손등 뼈가 툭 닿았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차원 #SF789-1과의……?』

    손을 떼자마자 그 상태창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관리자의 권한? 차원?’

    내 머리카락에 엉긴 촉수를 잡아 뜯고 발목에 감긴 촉수를 자근자근 밟으며 핵에 기대다시피 한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마석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이번에는 온전히 상태창의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차원 #SF789-1의 근거지입니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차원 #SF789-1과의 연결을 영구히 끊으시겠습니까?』

    “차원 #SF789-1이 어딘데?”

    설마 마계인가? 이 연결만 끊으면 이제 내 책임은 없는 거?

    [차원 #SF789-1]

    사막이 80%를 덮고 있는 차원. 맹독을 가진 마수들이 살고 있는 차원으로 생명체들의 전투력이 높고 생명력이 끈질겨 지구에서 최소 C급, 최대 A급의 판정을 받을 것으로 예측됨. 현재 철수하는 차원 #SF105-2의 통로를 따라 지구에 도킹 중

    그러니까 해석해 보자면 차원 #SF105-2가 마계고, 차원 #SF789-1은 내 명령으로 철수한 빈 게이트에 홀랑 눌러앉은 차원이라는 소리지?

    그리고 이곳은 소유자가 마계에서 차원 #SF789-1로 바뀌는 중이고.

    “그럼 영구히 끊어지는 건 뭔데? 조건이라도 있는 거야?”

    『동료이자 마왕 놈의 궁금증을 해결해 드릴 관리자1 등장입니다. (゚▽゚)/』

    『이 던전처럼 차원의 근거지를 찾아 관리자의 권한으로 연결을 끊으면 그 차원은 더 이상 지구에 게이트를 늘릴 수 없게 됩니다. ƪ( ˘⌣˘ )ʃ』

    『다시 도킹하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테니까요. ♪(´ε`***)』

    그 말에 내가 딜레마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차원의 연결을 끊지 않는다면 재활성화된 던전에서 헌터들이 죽어 나갈 테고, 연결을 끊는다면 갑자기 사라진 게이트로 인해 협회가 발칵 뒤집힐 게 뻔하다. 분명 한국대의 온 CCTV를 뒤져 범인을 찾아낼 것이다.

    그럼 이제 게이트 불법침입죄로 고소장이 날아올 테고 나는 헌터 라이선스 구경도 못 한 채 벌금을 내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하겠지. 사고 친 딸 벌금을 울 부모님이 내주실 리가 없으니까.

    “그래, 대한민국 헌터계에 경각심을 줄 때 한번 됐지.”

    꺼진 불도 다시 보고 클리어한 던전도 다시 보자. 표어 대회 1등은 따 놓은 당상이군.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았다. 스스슥, 내 발치에서 기어 다니는 작은 전갈을 팍 밟아 찌부러뜨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채굴한답시고 이렇게 오래 방치하면 던전이 재활성화가 되니까 빨리빨리 닫으라고. 한국대 학생들이 언제까지 구관 도서관을 써야겠어?

    시간은 이제 6분을 겨우 지나고 있었고 유선한이 깨어나려면 아직 4분이 남았다. 그래도 꿈틀거리며 징그럽게 움직이는 촉수와 계속 있기엔 심히 불쾌해서 게이트 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흐릿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X됐음을 감지했다.

    “…기요! 일어나 보십시오!”

    걸음을 빨리하여 유선한이 있는 곳으로 가니 한 남자가 페리를 한껏 경계하며 축 늘어진 유선한의 몸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이런 X발!”

    짓씹듯이 욕을 내뱉은 남자가 유선한을 부축해 세우자 나한테서 유선한을 지키라고 명령받은 페리가 경고하듯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1급 몬스터의 기세에 짓눌린 남자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곧바로 기절시키고 기억을 지우려던 나는 불빛 밑에 드러난 낯익은 남자의 얼굴에 멈칫했다. 발소리에 고개를 든 남자가 나를 발견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채현 씨……?”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눈을 가늘게 뜬 협회 소속 헌터, 이세혁이 내게 질문해 왔다. 그러고 보니 전에 이 게이트에 휘말렸을 때 자취방 건물까지 태워다 준 사람도 이 사람이었지.

    “여기는 대체 왜 들어오셨습니까? 아니, 그전에 헌터증도 없으시면서 어떻게 들어오신 겁니까?”

    “저기 일행이랑 같이 들어왔죠. 조별 과제 발표 주제가 마석이 미래의 대체에너지 어쩌고거든요. 그래서 실험에 쓸 마석이 필요해서, 하하…….”

    과제 하나 때문에 삼엄한 게이트 경비를 뚫고 들어온 나를 세기의 미친놈 보듯이 바라보는 이세혁의 표정에 서러움을 꾹 내리눌렀다.

    그래, 댁이 들어도 말이 안 되는 미친 소리지? 난 분명히 말렸다니까? 그런데 기어이 하자고 우기더라니까?

    “이리 와.”

    여전히 페리를 향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 이세혁의 모습에 손을 까딱이며 페리를 불렀다. 순순히 내 쪽으로 다가온 페리를 역소환시키자 이세혁이 놀란 기색을 보이며 눈을 깜빡였다.

    “제가 테이밍한 마수예요.”

    “그러고 보니 영상에서 본 마수랑 똑같네요.”

    한결 안심된 표정의 이세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선한을 부축해 일으켰다.

    “왜 이분은 던전 초입에서 기절해 있고 이채현 씨는 홀로 던전 안쪽까지 간 건지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으윽.”

    때마침 작은 신음과 함께 부축을 받고 있던 유선한이 느리게 눈을 떴다. 저를 부축하고 있는 손길에 화들짝 놀란 그는 후다닥 이세혁에게서 떨어졌다.

    유선한의 놀란 토끼 눈에 한숨을 푹 내쉰 이세혁이 손짓했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죠.”

    입장과 달리 퇴장할 때는 헌터증이 필요 없었다.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스르륵 열리는 스피드 게이트를 통과해서 나오자 이세혁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기세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일단 저희가 이 게이트에 들어온 건 아까 말했다시피 조별 과제를 위해서였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그쵸, 말이 안 되죠.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말렸는데 오히려 절 조별 과제 점수를 망치려는 쓰레기로 몰아갔다니까요?”

    드디어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나자 내 목소리가 절로 절절해졌다. 내 눈빛이 반짝이자 이세혁이 당황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솔직히 저는 제가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일반인 세 명이 따라 들어온다는 거 겨우 말렸다고요. 아니, 무슨 마석이 해변가 조약돌이냐고. 아무 던전 들어가서 주워 오게!”

    억울함에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한탄을 늘어놓자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이세혁이 주제를 바꿨다.

    “…예, 그만하면 들어간 이유 설명은 충분하고요. 그러면 이분은 왜 기절해 계셨던 건지?”

    “아, 제가 이 장소에 트라우마가 좀 있어서 정신을 놓은 모양…….”

    “트라우마로 발작하시길래 제가 기절…….”

    동시에 대답하다가 멈칫했다.

    “네, 이분이 정신을 놓으셨답니다.”

    “예, 이분이 절 기절시켰답니다.”

    다시 엇갈리는 증언에 혀를 찬 이세혁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일단 알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두 분이 이 게이트에 들어간 일은 상부에 보고를…….”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도 저희 의사가 아니라 떠밀려서 들어간 건데.”

    “안 됩니다.”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이세혁을 향해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우리 아현이를 봐서라도 한 번만 봐주시죠.”

    이세혁은 백아현의 남자 친구였다. 비록 울 아현이가 남친이 꽤 자주 바뀌는 편이긴 하지만 일단은 현 남친. 심지어 사내 연애다.

    그러니까 나는 이세혁한테 여자 친구의 친구지. 동공이 떨리는 이세혁을 보며 꽝꽝, 못을 박았다.

    “그러고 보니까 곧 아현이 생일인데 아현이가 생일날은 친구들이랑 보낸다고 했거든요? 만약 이거 눈감아 주시면 그날 이세혁 씨에게 양보해 드릴게요.”

    그대로 KO. 사랑의 힘은 위대했다.

    이번 한 번만이라고 신신당부한 이세혁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그를 기절시켜 기억을 지우지 않은 용건을 꺼내 들었다.

    “참, 말씀드릴 게 있는데 던전이 좀 이상하더라고요. 사막 동물인 전갈이 던전 바닥에 돌아다니던데.”

    게이트에 몬스터가 돌아다님을 슬쩍 흘리며 운을 뗐다. 내 말에 그가 굳은 표정으로 다급하게 뒤돌았다.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도 던전에 휘말린 적만 있었지 들어가서 자세히 본 적은 처음이라 평소 던전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는데 분명 클리어한 게이트라 했는데 공기도 이상하고, 던전 핵도 색깔이 변하고 있고…….”

    아무튼 이상하다는 걸 어필하며 말끝을 흐리자 심각한 분위기가 된 이세혁이 인사하고는 조사를 위해서 급히 다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이걸로 준비 못 한 채로 갑자기 활성화된 게이트에 헌터들이 희생당하는 일은 없겠지.

    뿌듯하게 웃으며 유선한에게 잠시 스틸했던 발광 아티팩트를 내밀었다. 내 눈을 피하며 아티팩트를 받아 든 유선한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하고는 물었다.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네요. 혹시 마석은 구하셨을까요?”

    대답 대신 인벤토리에서 조약돌만 한 크기의 마석을 꺼내 허공으로 던졌다가 받자 그가 한결 안도한 표정이 되었다.

    마석 사진을 찍고 팀플 단체 채팅방에 사진을 보냈다.

    [(사진)]

    [마석 주워 왔습니다] 오후 3:08

    [실험 날짜랑 시간 잡고 실험실 예약하죠] 오후 3:09

    [조별 과제 박서라(자료조사) - 헐 수고하셨습니다ㅠㅠㅠ]

    [조별 과제 박서라(자료조사) - (이모티콘)] 오후 3:15

    [조별 과제 박서라(자료조사) - 두 분 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시죠?ㅠ] 오후 3:16

    [조별 과제 성혜진(PPT) - 두 분 다 수고하셨습니다!]

    [조별 과제 성혜진(PPT) - 다음 수업 때 카페에서 음료라도 사다 드리려고 하는데 혹시 마시고 싶으신 음료 있으세요??] 오후 3:38

    [조별 과제 김선운(발표) - 수고하셨습니다] 오후 6:07

    그렇게 마석 일이 일단락되고, 남은 조별 과제 활동은 순탄…할 줄 알았다.

    “어떡하죠……? 실험실 예약이 다 찼대요. 혹시 화학과 실험실은 사용 안 될까요……?”

    참을 인(忍) 한 번.

    “혹시 실험 실패하면 어떡하지?”

    “헐, 그러게. 왜 마석 하나만 가져오셨어요. 세 개 정도는 주워 오시지…….”

    “어쩌겠어, 실패하면 다시 가져와야지. 그때는 저희도 같이 들어갈게요!”

    참을 인(忍) 두 번.

    [조별 과제 성혜진(PPT) - PPT 파일입니다! 혹시 수정 사항 있으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오후 7:10

    [PPT 한 장에 글자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는데요] 오후 7:25

    [한 장에 글자 세 줄 이상 안 나오게 수정 부탁드려요] 오후 7:26

    [조별 과제 성혜진(PPT) - 네? 그게 최선을 다해 줄인 건데ㅠㅠ] 오후 7:39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결국 내가 PPT 싹 수정해야 하잖아!”

    참을 인(忍) 두 번 반.

    그래도 곧 있으면 발표가 끝나니 참고 또 참았다.

    그리고 드디어 다가온 대망의 발표일.

    일찌감치 강의실에 도착해 메일함에 있던 PPT 파일을 열고 발표자에게 토스하자 휙휙 PPT를 넘기던 발표자가 떫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야? 이러면 발표를 어떻게 해?”

    “발표문 작성 안 하셨어요?”

    “네, 당연히 PPT 보고 발표하면 되는 줄 알고…….”

    강의 시작 20분 전, 노트북 자판을 두드려 미친 듯이 발표문을 작성하며 이를 갈았다.

    참을 인(忍) 세 번. 조별 과제 두 번만 더 했다간 내가 세상 멸망시키겠다.

    * * *

    나한테 큰 스트레스만을 안겨 주었던 팀플은 무사히 끝났다.

    역시나 발표 자료를 숙지하지 않아 쏟아지는 질문에 어버버하던 발표자 대신 내가 질문에 답한 것까지 내 예측을 벗어난 게 하나 없는 지랄맞은 조별 과제였다.

    협회에서 고소장 날아오고 과태료 300만 원 물 뻔한 위험을 무릅쓰고 발표에 넣을 실험을 위한 마석을 주우러 다녀온 대가는 맛없어서 잘 안 마시는 스X벅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었다.

    그렇게 팀플이라는 큰 산이 지나자 기말고사 기간이 훌쩍 다가왔다.

    “야, 이채, 미쳤어? 연수도 안 받은 게 게이트를 들어가긴 왜 들어가! 내가 세혁 씨에게 듣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

    “저기요, 저 지금 공부하고 있거든요? 방해하실 거면 집으로 돌아가 주시죠.”

    “대체 왜 들어갔냐니까?”

    “말했잖아. 조별 과제 팀원들이 미친 의견을 내서 반대하다가 정치질에 휩쓸려 당해 버렸다니까.”

    “그게 말이 돼? 너는 1학년 애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의견을 냈으면 말려야지 뭐 했어?”

    “에휴, 직접 그 상황 돼 봐. 말이 쉽지.”

    이세혁에게 전해 들었는지 내 자취방까지 찾아와서 나를 탈탈 터는 백아현을 기말 공부 카드를 내어 퇴치하고는 기분 좋게 『그 꽃을 꺾지 마세요』 최신 업데이트 연재분을 터치했다.

    아쉽게도 오늘은 『꽃꺾마』에서의 내 별, 내 태양, 내 한 줄기 빛이자 희망인 마탑주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주태윤을 생각나게 해 은근 밉상이었던 북부 대공이 큰 활약을 했다. 드디어 능글맞게 구는 것보다 진중한 모습을 보이며 이브를 지키려는 모습이 더 점수를 따기 쉽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북부 대공 주식이 미친 듯이 치솟으며 북부 대공파 독자들이 댓글창에서 축배를 드는 걸 보며 현실판 북부 대공 놈 주태윤은 언제쯤 그 사실을 알아챌지 궁금해졌다.

    귀찮아서 저녁은 배달을 시킬까 고민하던 도중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그 초인종 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들려왔다. 우리 집이 아닌 앞집 초인종이었다.

    미친놈인가. 아니, 그리고 민서 언니는 손님이 초인종을 1초에 한 번씩 눌러 대는데 나가 보지도 않고 뭐 한대?

    드디어 문을 열었는지 초인종 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정확히 1분 뒤,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왔다. 명백한 다툼 소리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대충 후드집업을 걸치고 현관문을 슬쩍 열어 그 틈새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5억을 주든 10억을 주든, 그 새끼들 댁 길드에서 내치지 않는 한 적벽 길드랑은 계약 안 한다고!”

    “참 신기하네. 하이랭커면서 이런 후진 집에서 계속 살고 싶어, 민서야?”

    “내가 전부터 항상 생각했던 건데 당신은 주둥이에 필터를 달아야 할 필요성이 있어.”

    문 앞에 서 있는 이를 향해 민서 언니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 사람이 민서 언니랑 마주하고 있는 탓에 내 눈에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키가 크고 몸이 탄탄했다.

    “그 간신배 새끼들이 솔직하고 호탕하다고 옆에서 올려쳐 주고 찬양하니까 정말로 그런 거 같지? 정신 차려, 당신 그렇게 말하는 거 솔직한 게 아니라 진짜 예의 없고 사회성 없어 보이니까.”

    항상 여유로운 동네 날백수 인상이었던 민서 언니가 이렇게까지 가시를 세운 건 처음 봤다. 의외의 모습에 눈을 깜빡이고 있자 내 기척을 느낀 건지 민서 언니 앞의 여자가 고개를 휙 돌렸다.

    날카로운 눈매와 입가의 흉터가 눈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나를 찬찬히 뜯어보던 여자가 입꼬리를 쓱 올리며 입을 열었다. 입가의 흉터가 꿈틀했다.

    “엿듣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옆집 주민분?”

    여자의 얼굴을 보자 다시 한번 내가 스급버스에 타고 있음을 실감했다.

    천우현의 등장 전까지는 한국 랭킹 Top 5였고 현재는 6위로 밀려난 검사계 S급, 와룡 서해량이었다.

    대체 왜 검사면서 헌터명은 책사인 와룡으로 지었나 항상 의문이 들게 만드는 유명한 『삼국지』빠이자 적벽 길드의 길드장.

    이로써 나는 그렇게도 얼굴 한 번 보기 힘들다는 S급 일곱 명, 아니 이제는 여덟 명을 모두 만나게 되었다.

    나를 탐탁잖은 눈으로 보는 서해량을 향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엿듣긴요, 하도 시끄럽게 초인종을 1초 간격으로 눌러 대는 게 앞집까지 들려와서 어떤 미친놈인가 얼굴 한 번 보려고 문 열었죠.”

    그 말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내비치며 빤히 나를 바라보던 서해량이 피식 웃었다.

    “얼굴이 왠지 익숙하다 했더니… 요즘 유명한 그 테이머구나?”

    “이채현, 얼른 들어가. 이 인간이랑 더 말 섞지 말고.”

    “나한테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 우리 길드에 들어오려는 생각은 없나 보네?”

    가소롭다는 듯 웃는 서해량을 보며 혀를 찼다.

    와, 성격 진짜 싸가지 없고 오만하다. 검사라면 응당 고고하고 올곧은 면이 있어야 하지 않나? 『삼국지』빠라더니 조조의 싸가지와 관우의 오만함만 『삼국지』에서 쏙쏙 빼서 배웠나 보다.

    “채현이가 그 미친 X목 길드에 왜 들어가? 만약 들어간다고 해도 내가 말릴 테니까 김칫국 마시지 말지?”

    민서 언니와 서해량의 사이는 썩 좋지는 않아 보였다.

    예전에 민서 언니가 게이트 사태 초기 때 S급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당시 서해량의 설명은 ‘같은 검사계라서 비교 많이 당했다.’가 전부였다. 하지만 둘의 대화를 종합해 보니 분명 둘 사이에는 과거가 있었다.

    나중에 민서 언니에게 물으면 알려 주려나. 슬쩍 민서 언니를 보니 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닫고 전공책을 펼쳐 읽고 있자 10분쯤 지났을까, 아마 높은 확률로 민서 언니일 가능성이 큰 사람이 초인종을 눌렀다.

    “너 계약금 몇억을 제안받든 절대 적벽 길드 들어가지 마. 알았지?”

    민서 언니는 문을 열기가 무섭게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그 말부터 대뜸 던졌다. 마치 러스터 길드에 가지 말라고 천우현을 말리던 내 모습 같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요? 러스터 길드보다 더 끔찍해요?”

    “러스터 길드는 주태윤 그 한 놈만 끔찍하지만 적벽 길드는 윗대가리들이 다 끔찍해. 간신배 놈들이 X목 제대로야.”

    슬리퍼를 대충 현관에 벗고 들어온 민서 언니는 내 물음에 진저리 치며 고개를 저었다.

    추리닝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불은 붙이지 않고 한참을 필터만 잘근잘근 씹던 민서 언니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전에 적벽 길드가 만들어지기 전에 적벽 길드의 초본이 있었거든. 검사계로만 이루어진 파티였는데 파티장은 서해량이었고 일곱 명인가가 파티에 있었어. 나도 그중 한 명이었고.”

    이 언니는 참 양파 같다. 까도, 까도 어두운 과거가 계속 나와. 이 언니도 은근 힘숨찐 메타 주인공 자질이 넘쳐 났다.

    “맨날 파티원 전멸하는 것만 보고 살아오던 나한테 그 인간이 그러더라. 자기 파티는 전멸할 일 없으니까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돈 좀 만진 대형 길드 수장이라서 거만해진 줄 알았더니 그냥 타고난 성격이 오만했던 거구나.

    “그때 꽤 지쳐 있었던 터라 밑이고 자시고 흔쾌히 승낙했지. 그렇게 그 파티에 들어갔는데 뭔가 서해량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나를 썩 반기는 기색이 아니더라고. 원년 멤버들끼리 친목이 좀 심했달까.”

    역시 과도한 친목질을 하는 모임은 믿고 걸러야 한다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다가 한 게이트에서 서해량 없이 갔던 파티가 위험에 빠졌다고.

    민서 언니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미끼로 C급 헌터를 밀어 넣더라? 서해량이랑 친해지는 내가 거슬리는데 S급인 나를 밀어 넣기는 불가능하니까 나랑 친한 그 C급 헌터를 밀어 넣었대.”

    “인성이 사람의 인성이 아닌데요? 서해량한테는 말했어요?”

    “당연히 말했지. 그놈들 겨우 그딴 이유로 사람을 사지로 밀어 넣은 미친 새끼들이라고. 그러니까 그 인간이 뭐라 했는 줄 알아?”

    잠시 말을 멈춘 민서 언니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듯 쓰게 웃었다.

    “걔들이 그럴 리가 없단다. 자기는 자기 사람들을 믿는대.”

    주변의 좋은 사람들 다 내치고 간신배들만 주변에 남기는 유형이 전형적으로 하는 말이었다. 자기 사람이 누구인지 식별조차 하지 못하는 멍청한 놈들.

    “그때 딱 알았지. 나랑 그 C급 헌터는 서해량 사람이 아니었구나. 여기는 X발,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X목 파티구나.”

    “그리고 그 X목 파티가 지금의 적벽 길드고요?”

    “맞아, 그것도 그 미친 새끼들이 주요 간부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길드지.”

    그런데 어떻게 대형 길드로 성장한 건지 모르겠다. S급 네임 밸류가 그렇게 컸나?

    적벽 길드를 가느니 차라리 러스터 길드를 가라고 진지하게 내 어깨를 잡고 설득하는 민서 언니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적벽 길드는 믿고 거를게요.”

    선택지가 많은데 굳이 똥통에 기어 들어갈 필요는 없지. 천우현에게도 적벽 길드는 가지 말라고 말해 줘야겠다.

    설마 이미 계약금 받고 입사한 건 아니겠지……?

    * * *

    마침내 여름방학이 코앞으로 훌쩍 다가왔다. 그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게이트에 제 발로 들어가 포커스를 마주한 쓰디쓴 기억 덕에 원래 공부하던 카페를 외면하고 여러 카페를 찾아다녔지만 돌고 돌아 다시 내가 원래 공부하던 자연대 앞 24시간 카페였다.

    여기가 음악 선곡과 아메리카노의 맛이 제일 내 취향에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즐거운 벼락치기♬. 속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카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전공책을 펼쳤다.

    테이블 밑으로 툭 떨어진 필통을 줍다가 옆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중간고사 때도 내 옆자리에 앉아서 마감 X발을 중얼거렸던 그 여자분…….

    X발, 포커스다.

    내가 한창 보고 있는 로판, 『꽃꺾마』의 작가님이자 새 부리 가면을 쓰고 다니는 전 랭킹 1위, 현 랭킹 2위, 한반도부대장 서열1위포커스다.

    내가 변명으로 대충 둘러댔던 말이 하필 현실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나를 제대로 컨셉충으로 오해하고 있을 포커스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나를 꿈을 이룬 컨셉충이라고 단단히 믿는 듯한 포커스는 떨떠름한 시선으로 잠시간 나를 보더니 먼저 시선을 쓱 피했다.

    아마 포커스는 내가 자기 정체를 안다는 사실을 모를 거다. 흐르는 어색한 기류에 자리를 옮기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시험 기간이라 그런지 이미 카페는 만석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필사적으로 서로를 모른 척하며 카페에서 불편하게 밤을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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