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것이 K-헌터국이다
팀원들의 번호를 모아 내가 단체 채팅방을 파는 걸로 강의는 끝이 났다.
다음 수업 시간까지는 대략 한 시간이 남았기에 학생증을 찍고 도서관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은 나는 마계 책을 펼쳤다. 곧바로 책갈피를 빙자한 살생부가 나타났다.
[Ash. 원탁회의 주도]
짧은 한 줄.
무의식적으로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다가 여기가 도서관임을 자각하고 손을 멈췄다.
‘누가 원탁회의를 주도했나 했더니.’
이 말을 달리 말하면 우리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부하 놈들이 지구로 쳐들어오도록 주도한 이가 바로 애쉬라는 뜻이었다.
현재 애쉬의 상황은 야구로 치자면 투아웃 원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두 번 더 나오면 바로 스리아웃 나가리다.
일단은 놔두어 보기로 했다. 정말로 그 녀석 말대로 나 하나 보고 싶어서 이 미친 스케일의 사고를 저지른 걸 수도 있으니.
폭군과 제왕은 한 끗 차이다. 거슬린다고 아무나 죽이면 폭군, 정당한 이유를 대며 죽이면 제왕. 그리고 폭군의 말로는 항상 좋지 않지.
인간 출신으로 마왕의 제위(帝位)에 오른 난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폭군과 제왕, 그 사이의 길을 걸었다. 만약 내가 최측근인 애쉬를 단지 심증만으로 죽인다면 나를 둘러싼 여론은 완전히 폭군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다.
그 이유도 있지만, 이 세계로 돌아오기 직전의 순간 마신 신전의 기도실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절망에 빠진 그 얼굴이 생각나서.
심란한 탓에 눈에 들어오질 않는 글자를 노려보다가 책을 탁 덮었다. 크라토스고 나발이고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코앞에 다가온 문제부터 먼저 해결하자.
책상에 엎드려 시동어를 입 모양으로 뻐끔거렸다.
‘시스템 간섭.’
공간이 푸르게 물들어 갔다. 차원의 공간에서 상태창이 튀어나왔다.
『너무 태평해서 타파할 방법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마왕 놈을 너무 과대평가했나 봐요. ¯\(ºдಠ)/¯』
“혹시 등급 조작 못 해?”
찾아보니 직업군은 어차피 연수원 훈련소 들어가면 훈련할 때 다 들통이 나기 때문에 조작하든 말든 상관을 안 한단다. 능력 측정 검사에서 중요시하는 건 오직 등급뿐.
그러니까 등급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 이 말이었다. 내 다급한 물음에 상태창이 글자를 스르륵 바꾸었다.
『관리자의 권한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강력해요.』
『당신 능력치 스스로 조절하는 거 하나 어렵겠어요?』
그러니까 방법을 알려 달라고. 게임도 시작할 때 튜토리얼 하는 거 몰라? 방향키부터 알아야지 움직이든, 말든 할 거 아니야.
* * *
오늘 있는 수업을 모두 들은 나는 3시가 되기 전, 각성자 관리국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타 3층을 꾹 누르자 내 뒤에서 엘리베이터 벽에 붙어 있는 층별 사무실을 보고 있던 남자가 몸을 돌려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을 멈칫했다.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3층에 도착했다.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남자 역시 능력 측정을 받으러 온 각성자인 듯 같이 내렸다.
대기자 좌석에는 이미 사람 셋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비상계단 입구 쪽에 사람 무리가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그 앞에는 관리국 요원들이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저게 설마 다 대기자는 아닐 테고.
“…저 여자는 D급? E급?”
“…얼굴 표정 어떤지 잘 보고… 모르겠으면 그냥 물어보는 것도…….”
“오늘은 글렀……. 죄다 E급 이하…….”
쑥덕거리는 목소리에 저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중소 길드 사람들과 헌터 헤드헌터들이었다.
중소 길드는 찾아오는 사람은 적은데 레이드 사망률은 높고, 길드를 유지하려면 인원은 계속 충당해야 하니 이렇게 능력 측정실에서부터 뉴비를 꼬드겨 입사를 시키는 거다. 전형적인 X소의 모습이다.
그리고 헌터 헤드헌터들은 대형 길드와 고등급 각성자를 중계하고 몇억이나 되는 계약금의 몇 %를 인센티브로 받기에 대형 길드에서 직접 스카우트가 들어오기 전 이렇게 뉴비에게 접근한다.
이상 세인이가 말해 준 능력 측정 검사 시 주의해야 할 놈들 목록이었다.
다행히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던 탓에 저 인간들은 내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니까 E급 아니냐고 쪼개고 있지.
낄낄거리는 놈을 보며 혀를 찼다. 사람 보는 눈도 더럽게 없는 데다가 인성까지 나쁘네. 그러니까 너희 길드가 X소 길드지, 쯧쯧. 차라리 보노보노 길드처럼 전단지 붙여 가며 열심히 발로 뛰기라도 해라.
곧바로 접수처로 향하자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능력 측정 검사 예약하고 왔는데요.”
“성함이?”
“이채현이요.”
내 이름이 공개됨과 동시에 중소 길드 사람들과 헤드헌터들의 시선이 빠르게 내게로 꽂혔다.
내게 다가오려다가 관리국 요원들에게 저지당하는 이들을 보자 은근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스펙 하나 없는 노답 취준생이었던 내가 헌터계에서는 스카우트 1순위?
명단을 체크한 접수처 직원이 명단을 낀 서류철을 내밀었다.
“여기 성함이랑 연락처 먼저 적어 주시고요, 신분증 한번 확인할게요.”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내밀고는 15시 명단에 이름과 연락처를 기재했다. 신분증과 내 얼굴을 쓱 훑은 직원이 다시 신분증을 돌려주며 말했다.
“대기석에서 기다리시다가 성함이 호명되시면 측정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참, 대기하는 동안 이 서류 작성해 주시고요. 체크된 곳만 채워 주세요.”
서류와 볼펜을 내민 직원은 다음 분을 호명했다. 서류의 체크된 공란은 이름,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 직업군, 세부 직업, 스킬 목록(등급 표기), 개인정보 수집 및 제공에 동의한다는 서명란.
일단 머리 비우고 작성하기 쉬운 개인 정보란부터 작성해 나갔다. 직업군은 법사계, 세부 직업은 일단 테이머라 쓰자. 마왕이라고 쓸 수는 없잖아.
스킬 목록은…….
“김진아 님, 들어오실게요.”
벌컥 측정실의 문이 열리더니 하얀색 연구 가운을 입은 이가 이름을 호명했다. 대기석 왼쪽 끝에 앉아 있던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급히 지식人에 테이머 스킬을 검색했다.
물론 내가 최초의 테이머라고 떠들어 대는 것에서 보다시피 헌터계에 테이머는 없었지만 게임에는 테이머가 있었다.
귀속(S), 소환(S), 복종(AAA), 빵야(AA), 물어 와(A), 앉아(A), 손(B). 점점 뒤로 갈수록 스킬명이 멍멍이 훈련 방법이 되어 가는 건 기분 탓이겠지.
서명을 끝으로 서류 작성을 끝내고 고개를 들어 옆 사람들을 힐끔 살폈다. 자신들의 등급을 미리 알고 있어서 그런지 얼굴에 큰 긴장감은 없었다. 이건 단지 등록 확인 절차일 뿐이니까.
심지어 나랑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온 남자는 아예 제집 소파처럼 편하게 의자 세 개에 발을 얹고 거의 눕다시피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딱 동양물 폭군이 가로로 널찍한 옥좌에 앉아 있는 그 자세였다.
내 시선이 지하철 1호선 광인을 보는 눈빛임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머쓱하게 웃으며 다리를 쓱 내리고 상체를 바로 했다.
“…습관이 되어서, 하하.”
묻지도 않았는데 어색한 변명이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머리를 긁적인 남자가 말을 붙여 왔다.
“유명하신 분인가 봐요. 이름 말하자마자 저 사람들이 다 쳐다보시던데.”
“동명이인을 착각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세상에 이채현이란 이름의 소유자가 얼마나 많은데. 물론 어제부터 이슈된 이채현은 나 맞지만. 그 말에 하나둘 나한테서 시선을 거뒀다.
10분이 지나고 제일 먼저 호명받아 들어간 여자가 나왔다. 그가 검사지를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하자 비상계단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검사지를 핸드백에 넣는 여자의 등급을 알아내지 못해 똥줄이 탔는지 누군가가 직설적으로 물어 왔다.
“실례지만 혹시 등급이 어떻게 되시죠?”
“C급이요.”
현판소에서 하도 주인공들이 S급부터 SSS급까지 해 먹어서 A급 정도는 쩌리로 느껴지겠지만 현실에서는 C급만 되어도 대박이었다.
C급이면 웬만한 중소 길드 길드장급이었고 대형 길드 입사까지 가능했다. 능력이 괜찮다면 계약금도 천 단위까지 받을 수 있다고 들었다.
띵―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여기저기서 명함을 내미는 손들을 탁탁 치운 여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타 빠르게 문을 닫았다.
검사 시간이 한 사람당 10분이라니. 어째서 시간별로 예약을 받는지 알 것 같았다. 기다리다가 깽판 친 놈이 분명 있었을 거다.
소설에서는 손만 대면 몇 초 만에 측정기가 결과 딱 내주던데. 역시 소설과 현실은 달랐다.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과 여자를 붙잡으려 비상계단으로 급하게 내려가는 이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내 옆자리 남자가 혀를 쯧쯧, 찼다.
“죄다 약해 빠졌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지만 청력이 인외급인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뭐야, 설마 S급이야? 저런 말 하는 놈치고 등급 낮고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가진 놈은 없는데.
“저기, 먼저 검사하실래요?”
“아, 저야 감사하죠. 그런데 왜 갑자기……?”
떨떠름한 표정의 남자를 보며 속으로 답했다. 댁 등급이 궁금해서.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여기서 조금 더 있다가 가야 하거든요.”
급조한 내 변명이 들어 먹혔는지 남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앞서 왔던 두 사람이 검사를 마치고 드디어 남자의 차례가 되었다.
가장 처음에 C급 판정을 받았던 여자 이후로 E, F급만 줄줄이 나오자 스카우터와 헤드헌터들의 눈빛은 점점 심드렁해지고 있었다. 10분이 지나고, 남자가 측정실 문을 열고 나왔다.
“이채현 님,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곧바로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일부러 걸음을 느릿하게 걸으며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남자를 힐긋거렸다.
남자의 여유롭기 그지없는 표정 때문인지, 씰룩이는 입꼬리 때문인지 스카우터와 헤드헌터들의 눈빛이 살아났다. 분명 고등급 헌터임을 예측한 표정들이었다.
“혹시 등급이 어떻게 되시죠?”
기대에 찬 목소리가 질문해 왔다. 나도 측정실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훗, 웃은 남자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답했다.
“C급.”
당당하게 등급을 밝히는 남자를 보자 한순간에 김이 샜다. 적어도 A급 정도는 할 줄 알았더니 C급이 약해 빠졌군, 이 지랄한 거야?
E, F급 크리에 지쳐 있던 이들은 그래도 C급이 어디냐고 명함을 내밀어 댔고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측정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측정실의 문이 닫히고 연구 가운을 입은 여자가 차트를 보며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이채현 씨 맞으시죠. 그럼 바로 능력 측정 검사 시작할게요.”
측정실보다는 사무실에 더 가까웠다. 측정기는 어디 있지? 두리번거리는 내게서 작성한 서류를 받아 간 연구원이 가운을 내밀었다.
“모자랑 마스크 벗어 주시고요, 상의랑 위쪽 속옷만 탈의하시고 가운 입고 나오시면 됩니다.”
엑스레이 검사실처럼 커튼이 쳐진 곳에서 가운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연구원이 쪽문으로 나를 안내했다. 쪽문을 열고 들어가니 커다란 기계가 놓인 방이 있었다.
BMI 지수 측정기와 매우 비슷하게 생긴 기계 발판에 올라 손잡이를 툭툭, 건드렸다.
이거 정말 생각보다 더…….
‘구려…….’
이게 뭐야. 건강검진 하는 거랑 별다를 바 없잖아. 내 로망과 너무 벗어난 거 아니냐고.
검은 판 같은 마력 측정기에 손을 딱 대면 몇 초 만에 등급이 쨘, 하고 뜨는 그런 모습을 원했는데.
게이트 사태 터진 지 고작 1년 반이 지났을 뿐인 시점에서는 너무 어려운 소망이었나 보다. 이래서 1세대는 피곤하다니까. 현판소 헌터물 배경이 3세대가 압도적인 건 다 이유가 있다.
그런데 분명 앞사람들 10분씩 걸리지 않았었나? 거대한 기계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설마 10분 동안 서 있어야 해요?”
“아니요.”
연구원이 대답했다. 휴, 다행이다. 2분 안에는 끝나려나? 능력 측정 끝나고 상담이라도 하나 보지. 한숨 놓으려는 순간,
“7분이면 끝납니다.”
연구원이 말을 덧붙였다. 내 표정이 절로 썩어 들어갔다. 젠장, 7분이나 10분이나.
“발판에서 발 떼지 마시고 중간에 손잡이 놓지 마시고 연결한 패드 떼지 마시고 최대한 가만히 서 계세요. 안내 음성 나오면 그대로 따라 주시면 되고요, 측정이 끝났다는 안내 음성 나올 때까지 자세 유지해 주세요.”
기계와 연결된 패드를 내 상체에 부착하며 주의 사항을 줄줄 읊은 연구원은 곧 기계 버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기계 파손은 절대 금물이고요. 만약 파손되었을 시 수리비는 본인한테 부담된다는 점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등급이 자기 등급과 일치하지 않으면 최대 두 번까지 능력 재측정이 가능하세요.”
버튼을 차례로 꾹꾹 누르며 매뉴얼을 설명해 준 연구원은 기계에 불이 들어오자 나를 기계와 내버려 두고 쪽문을 닫고 나갔다.
- 능력 측정을 시작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낭랑한 기계음이 울렸다. 기계가 준비하는 동안 나도 힘숨찐 정석 단계를 밟아 나갔다. 이름하여 등급 조정.
‘시스템 간섭.’
『시스템에 접근합니다.』
『관리자 ‘이채현’ 님 확인되었습니다.』
S급은 온 세상의 관심이 부담스러우니까 적당히 A급으로 하자. 최초의 테이머에 S급까지 나오면 설정 과다라고 욕먹을라.
『관리자 권한을 사용합니다.』
『관리자 본인의 등급을 일시적으로 조정합니다.』
『등급 변경: EX → A』
『유지 시간: 10분』
『승인이 완료되었습니다.』
- 손잡이를 양손으로 꽉 잡아 주세요.
무사히 A급으로 일시적 등급 조정을 마친 나는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몰라 긴장된 얼굴로 지시에 따라 손잡이를 꽉 쥐었다. 작은 모니터가 켜지더니 아이돌 뮤직비디오가 재생되었다.
위이이잉,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와 상큼한 노랫소리가 섞여 환장의 불협화음을 만들어 냈다. 뮤비를 연속하여 세 편쯤 보고 나니 기계음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 측정이 끝났습니다. 손잡이에서 손을 떼 주세요.
땀이 날 정도로 쥐고 있던 손잡이를 망설임 없이 놓자 한창 재생되던 아이돌 뮤비가 팟 꺼지더니 치직거리는 검은색 화면으로 변했다.
- 모니터의 측정 결과를 확인해 주세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내리누르며 모니터로 시선을 주었다.
[rank A]
다행히 측정 불가가 떠 능력 측정실이 발칵 뒤집히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무사히 A급으로 뜬 등급에 한시름 놓자 벌컥 쪽문이 열리며 연구원이 다가왔다.
[능력치가 현재 차트에 순위 조정됩니다.]
[Local ranking 29 / World ranking 97]
[현재 정보를 저장합니다.]
한국 랭킹 톱 30위 이내, 월드 랭킹 톱 100위 이내 정도면 무난하니 괜찮겠지? 어디 가서 무시는 안 받지만 사람들이 굳이 기억하지도 않을 랭킹이다.
당장 아무나 잡고 A급 랭커 이름 열 명만 대 보라고 해 봐. 대부분 열 명 못 채울걸. 대중들은 S급 아니면 기억 안 해.
모니터를 보고 파일철에 끼워 둔 내 서류에 A라고 휘갈겨 적은 연구원은 내게 부착된 패드를 떼 주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서류를 건넨 연구원이 물었다.
“능력 측정 검사는 끝나셨고요, 정식 등록 전까진 랭킹 차트에 안 뜨세요. 혹시 재검사 필요하실까요?”
“아니요.”
“그럼 앞으로 해야 할 일 간단히 설명해 드릴게요. 이 서류랑 구비 서류를 들고 거주지역 시청이나 구청에 방문하셔서 각성자 관리 부서에서 각성자 등록해 주시면 되세요. 만약 주민등록상이랑 거주지가 다르시다면 등록 전에 온라인이나 행정복지센터에서 꼭 전입신고 먼저 해 주세요.”
열심히 등본 뽑아 다닐 생각에 벌써부터 피곤했다.
“그리고 연수 과정을 마쳐야지 헌터 라이선스가 나오거든요? 이게 달마다 실행되는 거라 현재 이채현 씨는 5월에 각성을 하셨잖아요? 만약 5월 안에 각성자 등록을 마치신다면 6월부터 연수를 들을 수 있어요. 이건 헌터 협회 홈페이지에서 신청 가능하세요.”
헌터 라이선스, 일명 헌터증은 헌터들이 게이트에 들어가는 데에 필수였다.
게이트가 생기면 거주지나 영업점에 터진 비상사태가 아닌 이상 일단 그 앞을 봉쇄하고 스피드 게이트 같은 출입 기기를 세워 놓는다.
D급 게이트 이상부터는 헌터증을 찍어야지 들어갈 수 있었고, 위험과 가치가 높은 B급 게이트 이상부터는 싸이패스처럼 헌터증과 지문 인식을 해야지 들어갈 수 있었다.
“혹시 등록을 안 하거나 연수를 안 받으면…….”
“검사일로부터 90일 이내에 각성자 등록을 안 하시면 과태료 최대 500만 원이 부과되고요, 연수를 받지 않으시면 헌터증이 나오지 않아 게이트 출입이랑 헌터 지원 및 혜택들을 받기가 불가능하세요.”
기계는 구려도 행정은 최신식인 다이내믹 코리아 같으니라고. 미국은 헌터 등록법 검토한다는 소리에 현실판 「X빌 워」 찍고 있던데.
“아, 그리고 지방에서 올라오셨으면 데스크에서 교통비 지원받으실 수 있으세요. 더 궁금한 거 있으실까요?”
“아니요. 수고하셨습니다.”
건네는 봉투를 받아 들고 꾸벅 인사한 후 측정실에서 나오자 모두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내게 쏠렸다. 어째 10분 전보다 숫자가 더 늘어난 것 같다……?
애써 평정을 유지한 채 엘리베이터로 향하자 사람들이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슬금슬금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 등급 알 수 있을까요?”
“F급이요.”
서류를 슬쩍 가리고 대충 제일 낮은 등급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인간도 C급 아닐지도 몰라. S급이면 중소 길드 놈들이 귀찮게 달라붙을 게 분명하니까 일부러 낮춰 부른 건지도.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이 시원하지. 갑자기 조용해진 주변에 이상함을 느끼고 눈을 깜빡이기도 잠시.
“테이머! 그 테이머 맞네!”
“이채현 씨! 저희 길드랑 계약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제가 이 헤드헌터 김석명의 이름을 걸고 러스터 길드랑 중계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러스터 길드에 계약금 천 단위로 입사시킨 헌터만 지금까지 열 명입니다!”
마스크! 마스크 안 썼어! 급히 후드티 주머니에 구겨져 있던 마스크를 꺼내 썼지만 이미 내 얼굴은 팔린 지 오래였다.
여기저기에서 내미는 명함을 내치며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후다닥 올라탔다.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타려는 이들은 관리국 요원들이 제지했다. 미친 듯이 닫힘 버튼을 누르자 문이 스르륵 닫혔다.
그러고 보니 아까 비상계단으로도 내려가던데…….
“이채현 씨, 명함 받으시고 한 번만 고려라도 해 주십쇼!”
“적벽 길드는 어떠십니까? 요즘 적벽 길드도 법사계 채용 비중을 늘리고 있으니 제가 중계한다면 아마 계약금 7천도 충분히…….”
“1억! 저는 러스터 길드 쪽에서 최대 1억까지 부르게 판돈 키울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 앞을 막고 있는 인파에 절로 질린 얼굴이 되었다. 나 아직 등록도 안 했다고, 이 인간들아. 집에 좀 가자.
“1억?”
그때, 인파의 뒤에서 비소가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이들이 흠칫하며 물러났다. 스르륵 갈라진 틈으로 여유롭게 걸어 나온 주태윤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인사를 건넸다.
“또 보네요, 채현 씨.”
일단 내가 주태윤과 아는 사이라는 것만으로도 인파의 반이 순순히 물러났다. 저 인간이 이렇게 반가워 보이는 날도 있구나.
고개를 슬쩍 돌려 1억을 외치던 헤드헌터에게 시선을 준 주태윤이 피식 웃었다.
“지금 최대 1억이라고 했습니까.”
“예? 예.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저분을 과대평가…….”
“죄송해야지.”
나직한 말에 그 말을 내게 1억 정도의 가치는 없다고 해석한 이들이 얼마를 불러야 적당할까 머리를 팽팽 굴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주태윤의 다음 말에 그들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내 길드를 인재 영입 가격이나 후려치는 쓰레기 길드로 만들고 있는데.”
다시 나를 돌아본 주태윤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걸며 말을 이었다.
“명색이 최초의 테이머인데 최소 계약금 5억부터는 시작해야죠. 안 그렇습니까, 채현 씨?”
“혹시 저를 S급이라 착각하고 하는 소리일까 봐 말해 드리는데 저 A급인데요.”
“그래도 계약금은 변함없습니다. 채현 씨가 스스로의 가치를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네요.”
아니, 언제부터 A급이 계약금을 5억씩이나 받았냐고.
적벽 길드에서 S급인 윰서에게 계약금 5억 제안했다가 까였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A급에게 계약금 5억 줬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다.
내가 들은 A급의 계약금 최대치는 그때 당시 랭킹 10위였던 A급이 러스터 길드 들어가면서 받은 계약금이 3억인가 그랬다던데.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는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가볍게 웃은 주태윤이 들으란 듯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현재 채현 씨는 전 세계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테이머입니다. 그런 위치의 사람에게 이 정도 투자는 오히려 모자란 수준이죠.”
5억이 뉘 집 개 이름이야? 왜 요즘 헌터주택청약이 새로 생겨났는지 알겠다. 이렇게 목돈을 턱턱 받는데 나 같아도 집 한 채 내 명의로 사지.
그리고 10억을 불러도 댁이 길드장으로 있는 한 러스터 길드는 들어갈 생각 없음. 수고.
순간 이동으로 집으로 바로 가려 했더니 하필 사람들이 몰려들 건 또 뭐람. 안 그래도 밤새워서 피곤해 죽겠는데.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하품하자 주태윤이 우리의 앞에 몰려 있는 이들을 향해 꺼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남아 있던 이들마저 사라지자 주태윤이 물어 왔다.
“바로 집으로 가시나요, 아니면 들르실 데라도……?”
“집이요.”
내 대답에 살풋 웃은 그가 젠틀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집 앞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나갈까요, 레이디?”
“우웩, 레이디, 이 지랄……. 웁스, 죄송. 제가 잠을 못 자서 말이 필터 없이 막 나오네요.”
그리고 내 호칭은 레이디가 아니라 유어 마제스티다. 마계였으면 네가 나를 지금 한낱 귀족으로 보느냐고 경을 쳤을 텐데 하필 평등사회 대한민국이라.
하하, 웃은 주태윤이 관리국 로비 문을 열어 주었다. 무시하고 회전문으로 나갔다. 왜냐고? 회전문 재밌잖아.
회전문으로 나오는 나를 잠시간 멍한 얼굴로 보던 주태윤이 표정을 관리하며 순간 이동을 실행했다. 마력이 나를 감싸고, 순식간에 시야가 휙 전환되었다.
눈앞에 익숙한 원룸 건물이 보였다.
“가끔은 채현 씨 마음속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느릿한 목소리가 살짝 떨어진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가라앉은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휘어진 눈꼬리가 싸하게 내려앉은 눈동자를 반쯤 숨겼다.
내 옆머리 바로 앞에서 멈칫하더니 바로 거둬진 손을 보고 새삼 깨달았다. 주태윤은 언제나 내 일상에 불쑥 끼어들면서도 결코 내 퍼스널 스페이스까지는 침범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내 머리카락을 터치하려 했던 건 설마……. 로설에 흔하디흔한 ‘날 이렇게까지 무시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이 플래그를 내가 주태윤에게 꽂은 거 아니야?
내 스카우트 제안을 무시한 헌터는 네가 처음이야, 뭐 이런 건가? 그러기엔 백야랑 민서 언니부터 시작해서 많이 까인 걸로 아는데.
그러고 보니 내가 어째서 요즘 『꽃꺾마』에서 북부 대공만 나오면 빡쳐서 페이지를 휙휙 넘겼는지 알 것 같았다. 능글맞은 성격부터 계속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가지며 치대는 게 주태윤을 딱 닮아 있었다.
“5억은 너무 적습니까?”
“와, 누가 재벌가 셋째 아들 아니랄까 봐.”
나는 마왕이었음에도 7마계까지 마계를 싹 정복하기 전까지 풍족한 삶을 살았던 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약체에 내전이 일상이던 1마계가 부유할 리가 없었고, 마왕성에 그나마 남아 있던 돈은 전쟁 자금으로 줄줄이 빠져나갔으니까. 돈이 부족해서 제국에 몬스터 떼를 풀어놓아 삥 뜯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다.
그런 내 앞에서 지금 5억이 너무 적냐고 묻는 거냐, 주태윤아?
러스터 길드가 단기간에 이렇게 대형 길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주태윤이 공격적인 스카우트로 끌어온 인재들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그 비하인드에는 그들을 길드로 손쉽게 끌어올 수 있는 자본이 있었다.
이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 하면…….
‘잘생긴 데다 S급이라서’ 헌터 중에서도 가히 연예인급 인기를 누리는 주태윤의 정보는 굳이 찾아보려 하지 않아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대 행정학과 졸업생에다가 형제들과의 경영권 싸움에 끼기 싫어 행시를 준비했다는 TMI까지 싹.
“적은지, 아닌지는 다른 곳에서 제안을 받아 보고 비교해 봐야 알겠죠. 그리고 저 아직 등록도 안 했거든요? 내가 헌터 세계 잘 모른다고 순진한 사회 초년생 등골을 막 빼먹으려 하시네.”
인상을 찌푸리며 쏘아붙이자 큽, 입을 틀어막은 주태윤이 고개를 숙이고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로 독심(毒心) 스킬이 없는 게 한이네요.”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린 주태윤이 고개를 들고 진중한 눈빛으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럼 기꺼이 기다리죠. 좋은 조건을 제안받으신다면 꼭 말씀해 주세요.”
내가 왜? 심드렁하니 주태윤을 올려다보자 나른하게 웃은 그가 덧붙였다.
“저는 그 더블을 제안할 테니.”
순간 솔깃했다. 내가 만약 7억 제안받으면 14억 부르겠다는 소리 아니야.
물론 표면상 A급인 내게 계약금으로 7억을 제안할 길드는 없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EX급인 걸 밝히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주태윤이 제시한 5억이 내가 제안받을 수 있는 금액의 최대치겠지.
하여간 촉 한 번 좋다. 하지만 EX급을 5억으로 얻으면 주태윤 쪽이 너무 거저먹는 거 아닌가?
“고민해 볼게요.”
99%의 확률로 거절할 테지만 1%의 확률로 내가 승낙할 수도 있으니 희망 고문이나 당해 봐라, 라는 뜻의 대답을 내뱉고는 원룸 자취방으로 쏙 들어왔다.
갑갑하게 얼굴을 가린 마스크와 안경, 모자를 싹 내던지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능력 측정실에서 받아 온 봉투를 열어 보니 각성자 등록 절차와 구비 서류 등이 적혀 있었다.
필요한 건 주민등록초본과 신분증(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여권 중 택 1), 능력 측정 검증 서류, 3개월 이내에 촬영한 증명사진 두 장.
전입신고는 이 주소로 되어 있으니 패스. 내일은 소중한 금공강이었으니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내일 당장 각성자 등록을 끝내 버리기로 결심했다.
“내가 너 때문에 별 개고생을 다 한다.”
찹찹거리며 잘게 찢긴 마수 시체를 먹는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간을 먹일 수도 없기에 페리의 먹이는 애쉬가 마계에서 공수해 오는 중이었다.
지금의 이 세계는 일반인으로 살기에 꽤 괜찮은 세상이었다.
몬스터 웨이브도, 던전 브레이크도 없으니. 게이트에 휘말리지만 않으면 위험에 빠질 일은 많이 없었다. 그래서 일반인을 고집하고 있었던 건데.
내 말에 페리가 먹이통에서 입을 떼고는 힘없이 축 늘어졌다. 따지자면 페리를 버리고 온 내 잘못이라 할 말이 없었다. 급히 너 때문이 아니라고 둥가둥가하며 페리를 달랬다.
그래도 A급 떠서 큰 산 하나는 넘겼네. 이제 내가 귀환자라는 것만 필사적으로 숨기면 되겠다.
* * *
10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금공강을 고수한 이래 처음으로 아침 10시에 잠에서 깨어 침대를 벗어났다.
여전히 수상한 사람 룩을 고수한 채로 밖으로 나왔다. 요새 외출을 너무 자주 하네.
행정복지센터에 들러 주민등록초본을 뽑고 동네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바로 찍어 뽑은 후 자취방에서 제일 가까운 구청의 각성자 관리 부서를 찾아갔다.
능력자 등록뿐 아니라 헌터 라이선스 발급, 길드 법인 등록을 비롯한 각성자용 사업자 등록과 공공기관에서의 능력 사용 허가, 헌터 지원금 신청 등의 업무를 맡은 각성자 관리 부서는 오전인데도 사람들로 득실거렸다.
세상에, 서울 동작구 쪽에 이렇게 헌터가 많았다니.
벽에는 큼지막하게 각성자 자진 신고 캠페인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게이트 및 각성자 관련 범죄 신고는 국번 없이 1771이라는 포스터도 보였다.
번호표를 뽑고 앉아 자연스레 휴대폰을 켰다.
[님들, 나 각성자 등록하러 왔다] 오후 1:01
[센 - 등급 뭐임?] 오후 1:02
[A급, 한랭 29위, 월랭 97위임ㅋㅋㅋ] 오후 1:02
[백야 - 벌써 주태윤한테 넘어가서 도장 찍은 건 아니지?] 오후 1:13
[백야 - 헌터 라이선스 나오기 전에 한 계약은 무효야, 이채]
[백야 - 알았지?] 오후 1:14
이재의 밑의 공무원인 윤세인은 페리가 쏘아 올린 공 사태로 인해 머리도 못 감을 정도로 바빴고, 백아현도 정선 S급 게이트의 이상 사태로 바빴기에 둘은 밥 먹듯 드나들던 내 자취방에 며칠째 오지 못하는 상태였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채팅으로 시시덕거리고 있는 도중, 디지털 스크린에 내 번호가 떴다.
데스크에 다가가 앉으니 담당 직원이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각성자 등록하러 왔는데요.”
“모자랑 마스크 벗어 주시고 신분증이랑 주민등록초본, 증명사진 2매, 능력 측정 검증 서류 주시겠어요?”
모자와 마스크를 벗자 드러난 얼굴에도 직원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내 얼굴과 이름이 바다 건너까지 널리 팔린 이 시점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신분증과 증명사진, 두 장의 종이를 받아 든 담당 직원이 신분증의 사진과 내 얼굴을 번갈아 확인하고는 각성자 등록 신고서와 각성자 의무 동의서를 내밀었다.
“거기 빈칸 다 채워 주시면 됩니다. 각성일시에서 시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시면 대략 몇 시쯤이었다만 드러나게 작성해 주세요.”
의무 동의서에 빠르게 체크와 서명을 휘갈기고 신고서 작성을 시작했다. 의무 동의서가 다섯 페이지인 것에 비해 각성자 등록 신고서는 종이 반 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 등록번호: 356178-013745
* 이름: 이채현(한글) / 李綵炫(漢字) / Lee Chaehyeon(Eng)
* 성별: 여(✓) 남( )
* 헌터명: 이채
* 주민등록번호: 9X0821-2XXXXXX
* 주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XX로 41-7 새론빌라 201호
* 각성일시: 20XX-05-11 10:00
* 각성 장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1동 제운대입구역 버스정류장
* 등급: A
* 직업군: 법사계
* 세부 직업: 테이머
그 밑의 개인정보 수집, 이용 동의서에 서명하는 것으로 신고서 작성을 마쳤다. 신고서를 받아 든 직원이 복사 후 내 증명사진을 붙여 사본을 내게 내밀었다.
“공항이나 학교 같은 주요 시설 및 공공기관에서는 능력 사용이 금지고요, 앞서 언급한 장소에서 능력 사용이 불가피할 경우 미리 허가증 받아 주세요. 만약 어길 시 과태료 최대 100만 원 부과입니다. 그리고 각성자 대상 주거 실태 조사 시 전입신고가 되어 있지 않으면 벌금 최대 500만 원 부과되니 거주지를 옮기실 때는 잊지 말고 전입신고 부탁드릴게요.”
대학교에서 맨날 순간 이동 썼는데요……? 과태료 최대 100만 원이라니, 안 걸린 게 다행이다. 나 은근 운 좋게 2년 동안 이 세상을 살아왔구나.
“각성자는 국가비상사태 발생 시 우선 소집 대상이 된다는 점 유의해 주시고요. 소집령에 응하지 않으면 그에 따른 처벌이 주어집니다. 혹시 다른 궁금한 점 있으실까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일 묻고 싶었던 걸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각성자는 게이트 휘말리면 보상금 못 받아요?”
“네.”
“만약 각성하기 전에 게이트 휘말렸다고 해도요?”
“네, 전산 처리가 이제 각성자로 되기 때문에…….”
에이씨, 이럴 줄 알았으면 보상금 신청하고 각성자 등록할걸. 이게 뭐야.
* * *
각성자 등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오후 4시가 다 되어 갔다. 침대에 누워 휴식을 막 취하려는 찰나 초인종이 울렸다.
주인집 아주머닌가? 아직 월세 내는 날까지 2주나 남았는데? 101호가 시끄럽다고 컴플 넣었나?
온갖 의문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몸을 일으키다가 방의 풍경을 보고는 멈칫했다. 고양이와 외국인 성인 남자. 오우, 혹시 201호 학생, 방 빼 줄 수 있냐고 제안받기 딱 좋은 조합이다.
“애쉬, 페리 데리고 마계로 가 있어.”
“너무해요, 폐하. 맨날 쫓아내시기만 하고…….”
“너희가 있는 게 남들 눈에 걸린다면 나도 이 집에서 쫓겨날 수 있어.”
지금 이 원룸이 마계와의 통로에다 최종 보스 던전이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쫓겨날 사유란 말이다. 여긴 마왕성처럼 내 명의의 집이 아니라고.
방바닥에 엎드려 페리를 쓰다듬던 애쉬가 내 명령에 페리를 안고 마법진 너머로 자취를 감추자 그제야 난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이의 정체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아니라 윤세인이었다.
거무죽죽한 얼굴로 좀비처럼 비틀비틀 걸어 들어온 윤세인은 목에 걸린 관리국 사원증을 휙 벗어 던지고는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어라, 아직 퇴근 시간 아닐 텐데?
“때려치운다, 때려치운다 하더니 드디어 관리국 때려치웠냐?”
“아니, 일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서 과장님이 시켜 주신 조기퇴근……. 이채, 나 족발 먹고 싶어.”
조기 퇴근해 놓고 왜 우리 집으로 왔나 했더니 족발 먹고 싶어서였냐. 배달앱을 켜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직화숯불구이 中짜리 시켜?”
“아니, 반반 족발로. 매운 족발도 당긴다.”
“大짜리 시키고 백야 부를까?”
“걔 지금 정선에 있을걸. 적벽 길드랑 러스터 길드랑 협회 공대 싹 정선 갔어. 게이트 파장이 바뀌었다나 뭐라나. 안 그래도 지금까지 클리어 못 한 S급 게이트라 거기도 난리 났지, 뭐.”
“그래? 야, 리뷰 이벤트 콜라 업그레이드로 신청한다.”
“그게 관리국 소관이 아니라 협회 소관 게이트라서 참 다행이다. 지금 여기에 그 게이트 문제까지 합쳐졌으면… 와, 나 진짜 퇴사했다. 야야, 잠깐. 콜라 말고 막국수 안돼?”
“저번에 생각 안 나냐? 여기 막국수 한 입 먹고 다 버릴 정도로 맛없었잖아.”
사장님 요청 사항에 ‘리뷰 이벤트 콜라 1.25L’를 작성하고 배달 요청 사항에 ‘문 앞에 놓고 벨 눌러 주세요.’에 체크하고는 결제를 완료했다.
이번 달에도 배달앱 VIP 고객님 등급을 향해 순탄히 달려가고 있었다.
“이채 너, 각성자 등록 언제 할 거야?”
몸을 거대한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정장 재킷을 벗은 세인이가 방바닥에 편히 늘어진 채로 고개만 모로 돌려 나를 보며 물었다.
“각성자 등록? 이미 했는데?”
“했다고? 너 그제 각성했잖아. 대체 언제?”
“오늘.”
책상에 놓인 각성자 등록 신고서를 집어 들어 세인이의 눈앞에 살랑살랑 흔들었다.
“너도 참 신기한 인간형이야. 어떨 때는 참 게으른 인간의 표본인데, 또 어떨 때는 참 빠릿빠릿하단 말이야.”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감탄을 내뱉는 친구를 발끝으로 툭 차고 다시 책상에 신고서를 올려놓았다.
“센, 너 때도 등록할 때 이렇게 행정이 체계적이었어?”
“아니? 나 때는 능력 측정이나 연수 이런 건 없었고 각성자 등록 신고서만 작성하라 했지. 헌터명 잔혹사가 시작되었던 그 시절 대한민국의 헌터 행정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아니.”
게이트 사태 때 각성했던 세인이의 라떼 썰이 시작되었다.
“그때 진짜 등록 한 번 하려고 두세 시간씩 줄 서서 기다리고, 사람들 거기서 C급이 나대네, E급이 어디서 A급인 내 앞에 서네, F급 폐급 새끼가 새치기를 다 하네 이러면서 주먹 다툼하고 난리였지.”
“와우, 이게 과연 20XX년의 모습인가. 70년대라 해도 믿겠는데.”
“사람들 몰리고 대기시간 길어지면 뒤에서 욕하니까 신고서 진짜 1분 컷으로 써야 했다. 헌터명 고민할 시간이 어디 있어? 손 잠깐이라도 멈추면 직원이랑 뒷사람이 앞뒤에서 X나게 째려보면서 압박 주는데.”
그때 일반인이라고 뻗대고 있어서 다행이다. 거의 80년대의 대학 원서 접수 현장을 방불케 하는 등록 현장 썰을 들으며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참, 너 헌티드 가입했냐?”
“헌티드? 아, 그 헌터 커뮤니티?”
헌티드는 헌터들이 모여 정보를 주고받고 파티(공대)를 모집하는 인터넷 카페였다. 헌터 카페답게 헌터 인증을 해야 가입할 수 있었다.
“각성자 등록 신고서로도 가입 승인 가능하니까 미리 가입해 놔. 거기 은근 괜찮은 정보들 많아. 자유게시판은 맨날 별 걸로 싸움질하는 데니까 웬만하면 들어가지 말고.”
곧바로 인터넷에 헌티드를 검색해 뜨는 카페 링크로 들어갔다.
아니, 이런 커뮤니티도 도메인 사서 사이트 하나 새로 파야 하는 거 아니냐고. 홈페이지 대문에 H 하나 딱 박혀 있고. 가오 안 살게 카페가 뭐야.
대한민국 헌터들의 커뮤니티, HUNTED
- 닉네임 [마탑주2v] ※ 꼭 헌터명이 아니어도 됩니다
- 분란, 비방, 홍보 시 곧바로 강퇴 조치가 취해집니다. 동의하시겠습니까? [네]
- 각성자 등록 신고서, 연수 수료증, 헌터 라이선스 중 하나의 사진을 민증(혹은 여권이나 운전면허증)과 함께 찍어 업로드해 주세요. 인증 완료된 사진은 곧바로 삭제됩니다.
[불러오기]
각성자 등록 신고서 위에 민증을 놓고 찍은 사진을 업로드해 가입 신청을 누르고 세인이의 옆에 드러누웠다.
“연수는 언제 받을 거?”
“7월로 신청하려고. 6월은 기말고사 있어서 방학 때 연수받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
“하긴, 너는 당장 게이트 들어가야지 생계 유지되는 것도 아니니까.”
고개를 주억인 그가 충고를 던졌다.
“연수 과정에 실전으로 던전 들어가는 거 있거든. 그거 대비해서 미리 발광 아티팩트 사 놓는 게 좋을걸. 발광 아티팩트 수요 대비 공급처가 부족해서 품절 진짜 자주 되거든. 대량생산할 공장 짓고 있긴 한다는데 아직 멀었으니까.”
“어디에서 사는데? 혹시 헌터 마켓?”
소설처럼 헌터 라이선스로 입장 가능하고 제작계 장인들이 만든 명품들이 쫙 진열된 그런 헌터 마켓에 드디어 나도 입장하는 건가. 등급에 따라서 갈 수 있는 층수가 정해져 있고.
그런 내 기대를 윤세인이 와장창 깨부쉈다.
“네X버스토어. 거기서 제작계 헌터들이 발광 아티팩트 팔아. 절대 인X타 팔이피플들이 홍보하는 공구에서는 사지 마라. 거기 퀄리티 진짜 쓰레기 많아. 그냥 기능은 내다 버린 예쁜 쓰레기.”
게이트가 생기며 세상은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또 막상 까 보면 많은 것들이 그대로였다.
지금이 3세대 배경이면 몰라도 고작 1년 반 지난 시점에서 제작계 헌터들의 최고 아웃풋은 명품 브랜드가 아닌 스토어 등급 프리미엄이었다.
포션도 길드에서 제작계 채용해서 독점하거나 공방에서 예약받고 판단다. 포션을 의약품으로 분류해 약국과 편의점에 입점하는 법안을 검토 중이라 하던데 언제까지나 ‘검토 중’이라 언제 생활화될지는 의문형.
“싸게 사려면 중고월드나 캐롯마켓이나 헌티드 거래 게시판 뒤져 봐. 사람들이 팔긴 하더라.”
좋아, 캐롯마켓까지 나왔다. K-헌터 사회, 어디까지 가나 보자.
“고장 난 물품이나 벽돌 조심하고. 지난번에 추적 능력 헌터가 중고 아티팩트 거래하다가 벽돌 왔다고 자기 능력으로 사기꾼 찾아내서 벽돌로 사기꾼 대가리 깬 사건 있었잖아.”
벽돌, 벽돌 나왔습니다. 그래, 중고월드에 벽돌이 빠지면 섭섭하지.
“헌터 마켓 같은 건 없어? 아니면 백화점 헌터 전용 몰이라던가.”
“소설 적당히 봐라. 현재 대한민국에 헌터 전용은 헌터 전용 적금이랑 헌터 전용 신용카드랑 헌터주택청약밖에 없어.”
현판소에서 본 180˚ 달라진 헌터 사회가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에 헌터 향을 첨가한, 360˚ 돌아 제자리가 된 헌터 사회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1세대 진짜 노잼이다.”
“내 말이. 호출기도 진짜 쓰레기야. 영화관에서 영화 보고 있는데도 울리더라. 심지어 근무 시간도 아닌데도!”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호출기 기술이 얼마나 쓰레기인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윤세인이 벌떡 일어나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나도 빠르게 식탁용 탁자를 펼치고는 컵 두 개를 세팅했다.
문 앞에 놓인 족발 봉지를 들고 온 세인이가 순식간에 식탁 위에 족발과 채소, 주먹밥, 소스 세팅을 끝냈다. 어떤 배달 음식이든 간에 1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세팅을 마치는 저 능력은 언제 봐도 경이로웠다.
리뷰 이벤트에 올릴 사진 한 장을 찍고는 족발을 먹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업무로 인해 며칠째 배달 도시락과 관사 앞 국밥집의 돼지국밥만 먹었다는 윤세인은 족발 한 쌈을 야무지게 씹어 먹고는 이제 좀 살 것 같다며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족발도 돼지 아니니……?”
“그건 머리, 이건 발.”
“그래, 많이 먹어라.”
콜라를 콸콸 따라 세인이의 앞에 쓱 밀어주고 내 잔에도 콜라를 따랐다. 콜라를 마시며 윤세인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진짜 인X타에서 발광 아티팩트를 판다고?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내 피드에서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는데.
◎loel
(사진)
♡⌕⇗⚫⚪⚪⚪⚪⚪
dami_97 님 외 여러 명이 좋아합니다.
헌터분들 던전 들어갈 때 #발광 아티팩트는 필수죠 :)
이제는 #아티팩트도 패션이다! 간편하게 휴대 가능하면서도 눈에 띄는 독특한 디자인으로 던전 안에서도 당당한 #패셔니스타로 거듭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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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셜이나 문구까지 새길 수 있는 한정 수량 주문 제작 아이템이라 교환, 환불은 불가능하세요ㅠ 이 점 양해 부탁드릴게요!
가격 포함 기타 문의는 DM 주세요☺☺
#로엘 #로엘공구 #헌터 #게이트 #던전 #아티팩트 #발광아티팩트 #아이템 #패션템 #던전필수템 #공구 #주문제작 #선팔 #맞팔
“와, 진짜 있네.”
인X타에 #발광 아티팩트를 검색하자마자 뜨는 게시글을 휙휙 내리며 감탄을 터트렸다. 글마다 붙은 합장 이모티콘이 신뢰도를 더 떨어뜨려 주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몬스터 잡으러 들어가는 데 패션템이 왜 필요한 건데? 나도 인X타 하긴 하지만 인X타러들 심리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정말 족발만 먹는 게 목적이었는지 족발을 먹자마자 이만 집에 가서 자야겠다고 분리수거해 놓은 쓰레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를 배웅하고 집으로 다시 들어왔다.
한국 랭킹을 검색하니 29위가 내 헌터명인 이채로 바뀌어 있었다. 월드 랭킹은 시간이 좀 걸리는지 아직 내 헌터명이 올라오지 않았다.
‘까먹기 전에 연수 신청이나 해 놓을까.’
생각난 김에 헌터 협회 홈페이지에 접속해 연수 신청을 터치했다. 의외로 6월 연수는 널널한데 7월 연수 자리는 다섯 자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2030 중심으로 각성시킨다고 했던가…….”
그럼 3, 4, 5월에 각성한 나 같은 대학생들이 다 7월에 신청했나?
대학 졸업장이 필수가 되어 버린 사회에서 A급 이상이 아니라면 각성하더라도 대학 자퇴하고 바로 헌터 일에 뛰어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당장 아현이도 S급이라서 자퇴가 가능했던 거지. 세인이는 원래부터 대학 안 가고 바로 공시 준비하던 도중이었고.
아무튼 헌터도 대학생들이 많은 모양이구나. 남은 다섯 자리 중 한 자리를 선점하고는 침대에 풀썩 누웠다.
팔자에도 없는 테이머 시늉을 하려니 걱정이 앞섰다. 내 전문은 때려 부수는 거였지 복종시키고 길들이는 게 아니었다. 답답하거나 당황하면 스킬부터 먼저 날아갈지도 몰랐다.
세계 최초의 테이머는 사실 테이머가 아니었다?!
이런 기사 제목으로 대서특필되어 나갈 수도.
그러면 이제 내가 귀환자인 것까지 들통나는 거지. 절대로 내가 테이머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된다.
* * *
토요일 아침.
어제는 연수 신청을 마쳤으니 오늘은 발광 아티팩트를 구매하는 날이었다.
스토어에 뜨는 발광 아티팩트의 가격은 정가로 사기에는 꽤 부담이었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중고로 눈을 돌렸다.
아직 헌티드는 가입 승인이 나지 않았기에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곳은 중고월드와 캐롯마켓뿐이었다.
벽돌나라보다 그나마 더 믿음직스러운 캐롯마켓에서 발광 아티팩트를 검색하자 무려 5분 전에 올린 따끈따끈한 판매글이 나왔다.
솔탱팟캐리
동작구 상도 1동
매너 온도 22.2℃
발광 아티팩트
한 달 전에 구매하고 한 번도 사용 안 함. 고장 X
♡ 50,000원
5만 원이라니,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다. 반드시 사야 한다. 게다가 우리 동네다. 혹시 누가 선수 채 갈세라 곧바로 채팅으로 거래하기를 눌러 채팅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혹시 발광 아티팩트 구매 가능한가요] 오전 11:30
답장은 칼답이었다. 거의 채팅을 보내자마자 도착한 답장에 감탄했다.
[ㅇㅇ]
[직거래?] 오전 11:31
반 토막 난 말만 아니었으면 계속 감탄했을 텐데 말이다.
[ㅇ 언제?] 오전 11:31
오는 말이 짧으면 가는 말도 짧다. 깨닫는 바가 좀 있으라고 똑같이 반말로 응대해 주자 아무래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지 다시 반 토막 난 답이 돌아왔다.
[10분뒤 CS편의점 앞 ㄱㄴ?] 오전 11:32
[ㅇ] 오전 11:32
[ㅇㅋ 현금만 받음 계좌이체 X] 오전 11:33
지갑을 열어 보니 5만 원짜리 지폐 딱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내 현금 전 재산이었다.
잠옷용으로 입고 있던 반팔 티 위에 가볍게 과잠만 걸치고는 슬리퍼를 신고 동네 CS편의점으로 향했다.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사고 밖으로 나오니 시간은 얼추 약속 시간이었던 10분 후가 되어 있었다.
휙휙 주변을 둘러보자 편의점 근처에서 한 손에 무언가를 쥐고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는 껄렁한 인상의 남자애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캐롯?”
내 조심스러운 물음에 벽에 기대어 있던 남자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벽에서 등을 뗐다. 미성년자 특유의 앳됨이 얼굴에 고스란히 보였다. 미자 놈이 반말을 찍찍 까 댔던 거냐.
손에 들고 있던 아티팩트를 흔든 거래자가 시건방진 어조로 물었다.
“돈은 현금으로 가져오셨죠?”
대답 대신 신사임당 한 장을 내밀었다. 무슨 위조지폐 확인이라도 하는 건지 햇빛에 비쳐 보고 흔들고 뒤집어 보고 난리 부르스를 친 남자애가 발광 아티팩트를 쓱 건넸다.
건네받아 여기저기 확인해 본 결과 아티팩트는 사진상과 다름없이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새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걸 왜 겨우 5만 원에 파는지 의문을 넘어서 의심이 들 정도로.
발광 아티팩트의 가격은 최저가가 9만 원이었고 성능 좋은 아티팩트는 30만 원도 훌쩍 넘길 정도로 던전 필수품치고는 고가품이었다.
그런데 그런 발광 아티팩트를, 그것도 거의 포장만 뜯은 새 아티팩트를 5만 원에 판다?
설마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헌터의 꿈을 반대한다던가, 부상 때문에 게이트에 더는 못 들어간다던가…….
어느새 내 손 안의 발광 아티팩트는 사연 있는 아티팩트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쿨거래를 마치고 서로 깔끔히 헤어지려는 순간, 양애취 하나가 껄렁거리며 다가왔다. 내 얼굴과 과잠을 훑은 그놈의 얼굴에 히죽 웃음이 걸렸다.
“이야, 김수한. 지 여친 생일 5일 앞두고 대학생 누나랑 바람피우네? 니 여친에게 말해 드림.”
“뭐래, X발롬이. 지랄하지 마, 캐롯 거래야.”
거래자 고딩이 차진 욕설을 내뱉었다. 그래, 바람은 얼어 죽을. 나도 눈이 있다, 망할 양아치 놈아. 그리고 나랑 이 녀석 나이 차이가 500년은 넘게 나겠다.
요즘 애들은 참……. 속으로 혀를 차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자 내 손에 들린 발광 아티팩트에 시선을 준 거래자 친구 놈이 갑자기 빡빡 웃음을 터트렸다.
“쒸바, 이 새끼 미쳤나 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꺼져라, 진짜.”
필사적으로 제 친구를 보내려 하는 꼴이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니 히죽거리던 거래자 친구 놈이 입을 열었다.
“누님, 그거 이 새끼 물건 아니에요. 장물이에요, 장물.”
장물? 왠지 지나치게 싸다 했어. 이 자식, 이거 어디서 훔쳤구먼.
“X이발, 장물은 뭔 장물이야! 대가리 총 맞았냐?”
“지금 이 새끼 형님이 각성하셨는데 등록 직전에 입영통지서 나와서 헌터증 나오자마자 군대 끌려갔거든요. 근데 이 새끼가 지 용돈 떨어졌다고 즈그 형 물건 파는 중.”
심지어 자기 형 걸 훔친 거였다. 따지자면 친족상도례 규정에 의하여 친족 절도죄는 성립되지 않지만.
“아, 어쩔 수 없었어. 급전 필요하다고.”
“그거 5만 원에 판 거 알면 휴가 나온 느그 형에게 개뚜드려 맞을 듯.”
이런 상황은 높은 확률로 주인이 직접 말하든 제 물건을 팔아넘긴 동생을 통해 말하든, 다시 돈 드릴 테니 물건을 돌려 달라고 할 확률이 높았다.
다시 발광 아티팩트를 돌려주고 5만 원을 건네받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 싸게 사 보려다가 시간만 낭비했네.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헤집으며 오만상을 찌푸린 거래자가 투덜거리더니 내게 제안을 건넸다.
“아, 망했다. 유리 생일 선물 사야 하는데. 누나, 혹시 이거 7만 원에 살 생각 없어요?”
가격이 3만 원이라도 안 살 물건인데 왜 오히려 가격을 더 올리는 거니. 그리고 언제 봤다고 누나야, 인마.
“니 븅신이냐? 빡대가리 새끼가 이제 숫자도 못 세네. 7만 원이 5만 원보다 더 크단 건 기본 상식 아니냐, 수학 7등급 새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주는 거래자 친구 놈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아니, 7만 원에 팔았다고 하면 형도 뭐라 안 하지 않을까?”
“느그 형님이 퍽이나. 백퍼 7만 원 뱉어 내든지 아티팩트 돌려받아 오든지 뒤지게 처맞고 입원해서 니 보험비로 보상하든지, 셋 중 하나 택하라 할 듯.”
쿨거래는 그렇게 쿨하지 않게 파탄 났다. 저 꼴을 다시 보기 싫어서라도 발광 아티팩트는 그냥 정가로 사야겠다.
* * *
천우현이 S급, 그것도 랭킹 1위로 각성했고, 천세연 역시 B급 힐러로 각성했지만 남매의 집은 여전히 낡은 빌라였다.
아마 이맘때쯤, 남매는 적벽 길드와 계약했고 이사를 했다. 고등급 각성자는 대부분 헌터 라이선스가 나오기 전 대형 길드와 계약하는 추세였으니까.
회귀 전의 세연은 오빠가 적벽 길드에서 받은 억대 계약금으로 깔끔한 신축 아파트로 이사한 게 마냥 좋기만 했었다.
멍청하게 그게 무엇을 대가로 받은 돈인 줄도 모르고. 차라리 러스터 길드에 들어갔다면 상황이 좀 나았을까.
이번 생에는 세연은 오빠의 그런 얼굴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세계 멸망 저지는 2순위였고, 오빠의 꽃길이 1순위였다.
애써 밝은 목소리를 꾸며 낸 세연이 컴퓨터로 작업을 하는 오빠의 앞에 물컵을 놓으며 물었다.
“오빠, 6월 연수 신청했어?”
“이제 해야지. 세연이 너는 7월에 연수 들을 거지?”
마우스를 달칵거리던 우현이 묻자 세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8월에 들을래.”
“너무 늦게 듣는 거 아니니?”
“꼭 8월에 들어야 해. 나 7월에 할 일 있어.”
사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7월 연수만은 피하고 싶었다. 7월 연수에는 그 사람이 있었기에.
“천세연. 이름 예쁘다.”
“괜찮아? 힘들면 업힐래?”
그럴 거였으면 다정하지나 말지.
“맞아, 내가 이 모든 일의 원인이야.”
지독한 절망과 배신감, 충격에 휩싸여 유독 가슴에 박힌 그 기억만은 그 사람의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얼굴이 시커멓게 색칠되어 있었다.
행복했던 순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아도 선명한데, 끔찍했던 마지막 장면은 기억이 생생함에도 회상하면 항상 흐릿했다.
- 몬스터가 게이트에서 뛰쳐나와 한 여성에게 애교를 부리는 동영상이 SNS를 타고 퍼져 나갔는데요, 이 여성이 테이머가 아닌가, 하는 주장들이 일각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 직업이 존재하는 헌터계에서도 아직 테이머가 등장하지 않았기에 이 여성이 정말로 세계 최초의 테이머인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공중파 뉴스의 이번 주 이슈 코너에 요즘 핫한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짜증 어린 목소리로 찍지 말라고 소리치는 영상 속 모자이크된 여성을 보며 우현이 작게 웃었다.
[테이머 최초 등장?]
이라는 자막이 텔레비전 화면에 떴다.
“테이머 아니야.”
세연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부정의 말이 흘러나왔다. 뒤늦게 입을 헙, 다물었지만 우현에게 들리기에는 충분한 목소리였다.
“그걸 네가 어떻게…….”
중얼거림이 뚝 끊겼다. 당황 어린 감정을 한가득 담은 우현의 눈을 보며 세연은 직감했다.
제가 오빠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생겼듯 오빠 역시 저한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생겼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