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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세상에 나쁜 고양이는 없다 (7/33)
  • 7. 세상에 나쁜 고양이는 없다

    [충격! 이슈 TV] 종교 단체가 귀환자 사무엘 르웬을 저격?! 무려 살해 협박까지!

    - 현재 사무엘 르웬 헌터는 본인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까지 광신도 단체에 살해 협박 및 위협을 받고 있다고 밝혔는데요, 그가 말하는 광신도 단체는 게이트 사태가 생긴 후 새로이 뜨고 있는 신흥 종교 ‘레벨레이션(Revelation)’으로 밝혀졌습니다.

    제목만 믿고 너튜브 영상을 터치했던 내가 등신이었다. 나는 또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쥐어팬 줄 알았지. 제발 ‘사이비’ 종교 단체라고 제목에 붙이라고.

    너튜브 영상에 뜨는 레벨레이션 교주의 얼굴에 혀를 찼다. 눈빛이 맛이 갔네. 사이비 종교 교주 특유의 그 눈빛이잖아.

    - 레벨레이션은 신의 분노로 인해 게이트 사태가 일어났다고 믿는 종교로, 교리 역시 「요한묵시록」에서 따올 만큼 극단적인 성향을 띠고 있답니다. 이들은 사무엘 르웬과 같은 귀환자들을 제물로 바쳐야지 세상이 안정될 것이라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데요, 과연 그들이 죽는다고 해도 세상이 안정될지는 모르겠네요.

    기계음 섞인 목소리가 더는 듣기 싫어 영상을 껐다. 침대에 엎드리고 있던 몸을 빙글 뒤집어 바로 누웠다.

    홍대 감자탕집에서 나와 같은 귀환자의 폭탄 발언을 들은 이후 내 기분은 며칠째 수직 하락세를 찍고 있었다. 바닥인 줄 알았는데 더 깊은 지하가 있을 줄이야.

    사무엘 르웬이 스타트를 끊자 자기들이 귀환자라고 주장하는 놈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줄줄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증거랍시고 세공도 되지 않은 던전 부산물을 내미는 컨셉충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하지만 귀환자가 있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야.’

    일단 나랑 천우현부터 다른 차원에 떨어졌다가 다시 지구로 돌아온 귀환자였다.

    관리자의 말에 따르면 우주를 유영하던 차원들의 파장이 우연히 들어맞아 가장 파장이 약했던 우리 차원의 인간들이 타 차원으로 끌려갔단다. 그 사건이 차원 보수의 시발점이 되었다나.

    그리고 귀환 본능이 뼛속까지 박혀 있던 나를 비롯한 지구인들이 기어코 차원까지 찢으며 집으로 돌아왔고, 그 흔적을 따라 그렇게 범차원적 침략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서문을 연 게 바로 나. 다른 차원 놈들이 쳐들어오도록 우리 차원에 구멍을 뚫어 놓은 것도 바로 나.

    “그러게 진작 차원 보수를 잘 하셨어야지.”

    냉소적인 중얼거림이 절로 흘러나왔다. 근본적인 원인 제공은 차원 보수도 제대로 안 해서 차원 주민들을 이상한 세계로 끌려가게 한 관리자 및 신 잘못 아닌가?

    『그거야 맞는 말이긴 하죠. ( ᐛ )و』

    『그래서 당신을 비롯한 귀환자들을 추방하지 않고 그냥 두고 있는 거고요. ƪ( ˘⌣˘ )ʃ』

    『당신의 존재가 이 차원에 확실히 위협이 됨에도 불구하고 감투까지 주면서. (•̀ᴗ•́)و ̑̑』

    자기를 까는 말은 참을 수 없었는지 관리자1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먼저 툭 튀어나왔다. 따지자면 끝이 없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꼬리잡기 싸움이었다.

    원인 제공은 저쪽이지만 결론적으로 세계를 위험에 빠뜨린 건 이쪽이니까.

    “그래그래, 앞으로도 조용히 살 테니까 서로 터치하지 말자.”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귀환자의 존재로 난리가 난 인터넷을 훑었다.

    20XX-05-09 13:17 조회: 29,658

    [Best] 님들 그거 앎?

    이제까지 S급 게이트 열린 국가 한국밖에 없음 ㄷㄷ 우리나라에 대체 어떤 괴물이 등록도 안 하고 숨어 살고 있다는 거냐

    댓글(102)

    - 뭔 소리임?

    └만약 진짜로 귀환자들 때문에 게이트가 열린 거면 우리나라에 최종 보스 있다는 소리

    - S급 게이트 몬스터 있는 세상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올 정도면 ㅅㅂ 세계관 최강자 아니냐

    - HOXY 천우현 아님???

    └맞네 걔 있었네 한번 정선 S급 게이트 들어가 보라고 해라

    - 그런데 ㄹㅇ 귀환자들 때문에 게이트 열린 거 확실함?

    └자기가 원인 맞다자너

    └걍 지 뇌피셜 아님? 그냥 자기가 떨어졌던 차원에서 본 몬스터랑 똑같이 생긴 몬스터 봤다~ 이게 주장 근거 전분데?

    └애초에 저 양키 새끼 진짜 귀환자가 맞는지부터 의심됨ㅋㅋㅋㅋ 법사계던데 세공 기술은 스킬로 던전 부산물 깎고 있었던 건 아니고?ㅋㅋㅋ

    - 그럼 왜 대체 지금까지 한국에만 S급 게이트 열린 건지 설명 좀;;;

    └랜덤 운빨

    └게이트 사태 왜 터진 건지도 아직 설명 불가능한데 그걸 우리가 어케 알아 ㅅㅂ

    - 아 니들은 컨셉충 말을 믿냐

    └NASA 공인이라자나

    └나사가 뭔 대법관이냐 나사무새들 좀 꺼졌으면ㅉ 니들 대가리 나사나 조여

    …….

    20XX-05-09 13:21 조회: 658

    [잡담] 귀환자들 싸게싸게 튀어나와라

    니들도 양심선언을 하든지, 부정을 하든지 해서 이 게이트 사태의 원인을 좀 밝혀 봐라

    댓글(10)

    - 걔들이라고 알겠냐? 지금 얼굴 까고 나온 놈도 빈약한 논리로 뇌피셜 지껄이고 있는데

    - 벌써 한국에도 귀환자 한 놈 나왔던데

    └뭐 하는 놈인데?

    └스트리머

    └그걸 믿냐? 스트리머면 딱 봐도 컨셉충이자너

    - 나 귀환잔데 궁물 받음

    └허언증은 고질병임?

    └어디 떨어졌다가 돌아옴?

    └ㄷㅆ)소환사의 협곡

    └걍 처자라 ㅅㅂ 소환사의 협곡 ㅇㅈㄹ

    역시 예상대로 쓸모 있는 정보는 없었다.

    귀환자라고 얼굴 까고 등장하는 놈들은 죄다 너튜브에 어그로성 영상을 올리질 않나, 커뮤니티에 나타나는 놈들은 컨셉 잡고 롤플레잉을 즐기질 않나.

    지구의 자기 집에서 엄마가 해 준 뜨신 밥 먹고 살아온 놈들이 무슨 개고생을 했다고.

    짜증이 나 휴대폰 화면에 뜬 인터넷창을 신경질적으로 닫자마자 약속 시간 한 시간 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또다시 같은 기억을 공유한 유일이 되어 버린 이와의 약속이었다. 이세계에서나 지구에서나 한결같이 내 숨통이 되어 버린.

    * * *

    “채현 씨, 여기예요.”

    먼저 카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천우현이 나를 발견하자 손을 흔들었다.

    언제나 마왕성을 배경으로 한 경계의 숲에서 로브 걸치고 만나다가 카페에서 현대적인 복장을 갖추고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 둘 다 정말로 21세기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난달까. 미리 주문해 놓은 건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과 생크림이 얹어진 수플레 팬케이크가 테이블 위의 트레이에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채현 씨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죠?”

    “엄청 확신하시는 어조네요. 제가 전에 커피 취향 말했던가……?”

    “채현 씨가 전에 카페에서는 항상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드신다고 했던 말이 기억나서요.”

    지나가는 말로 했던 거 같은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니.

    반면 내가 천우현에 대해서 기억하는 건 말 잘 듣고 편식도 안 하고 착하고 공부도 잘하고 교우 관계도 원만하고 예의도 바른 여동생이 있다는 것과 그 여동생이 애플파이를 좋아한다는 것, 여동생이 카페에서 시키는 음료는 언제나 블랙티, 일상복은 원피스를 선호…….

    이 사람, 정말 주야장천 자기 동생 이야기만 했구나. 새삼 다시 깨달았다.

    잘 지냈냐는 안부 인사를 시작으로 소소한 대화가 오갔다. 분명 2년 만에 완전히 바뀐 환경에서 만나는 건데도 어제 만난 사람인 것마냥 편안했다.

    “그러고 보니 S급으로 각성하셨던데.”

    내가 먼저 꺼낸 말에 천우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돌아와도 능력치는 그대로더라고요. 이렇게 높은 등급을 받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댁은 S급이잖아. 난 EX급이었어.

    “헌터명은 왜 본명으로 지었어요?”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더라고요. 전 랭킹 1위 헌터명 보고 경각심이 들기도 했고.”

    “아, 그럼 혹시 우현 씨도 게이트 사태 첫날에 각성자들이 처음에 봤다는 그 상태창 떴어요?”

    “아니요, 저는 바로 제 정보창부터 떴습니다. 인터넷을 봐 보니 저처럼 정보창부터 뜬 경우는 전무하더군요. 그래서 일단 등록을 보류했습니다.”

    정보창부터 뜬 건 내 상황과 똑같았다. 하지만 능력 측정 시스템에 등급과 스탯은 측정이 됐다. 그렇다면 귀환자는 각성자로 친다는 건가.

    이제까지 비각성자라고 우겨 왔는데 이제는 그러지도 못하게 생겼다.

    “그런데 등록은 어쩌다가……?”

    “세연이가 B급 치유계로 각성했거든요. 혼자 헌터 활동을 하기에는 무섭다고 하기도 했고 힐러만 내버려 두고 게이트를 빠져나간 사례들도 몇 있던 터라 오빠로서 걱정돼서 같이 등록했죠.”

    그래, 이런 오빠가 있으면 천세연처럼 굴 만도 하지. 이해는 간다. 그렇다고 걔가 했던 무개념 짓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천우현은 먼치킨 현판소 주인공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1. 사이 좋은 여동생 있음

    2. 타 차원에서 회귀까지 하면서 구르다가 귀환했음

    3. 성검 보유한 전직 용사

    4. 흙수저에서 인생 역전

    5. 잘생김

    여기서 힘숨찐까지 했으면 소설 하나 뚝딱일 텐데 하필 정직하게 이름과 얼굴을 모두 까고 나올 줄이야. 내가 만약 저 조건이었다면 힘숨찐 하다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 멋있게 똭 등장할 텐데.

    머글의 정직함에 혀를 내두르며 수플레 팬케이크를 한 입 먹고는 내심 제일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갈 예정이에요? 적벽 길드? 협회? 아님 관리국?”

    러스터 길드는 당연히 예상 목록에서 제외했다. 만약 천우현이 러스터 길드를 들어간다고 한다면 도시락 싸 가지고 다니며 말릴 의향도 있었다.

    그리고 법사계보다 무기계가 더 우대받는 길드는 아무래도 S급 검사인 와룡이 길드장으로 있는 적벽 길드니까.

    아직 게이트가 터진 시점에서 1년 반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던 터라 현재 제대로 체계를 갖추고 몸집을 불리는 길드는 단 두 곳뿐이었다.

    하나는 내가 방금 언급했던 적벽 길드.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오, 천우현 씨, 여기서 다 만나네요. 앞의 여자분은 그때 뵈었던 여동… 채현 씨?”

    망할 스토커 주태윤이 길드장으로 있는 러스터 길드.

    나를 보며 놀란 눈을 하는 주태윤을 향해 파리 쫓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나는 댁 안 반가우니까 2년 만의 감동적인 재회 시간 방해하지 말고 부디 꺼져 주세요, 주태윤 씨.

    주태윤이 낭패 어린 기색이 짙게 묻어 나오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네네, 알아요. 나 스토킹한 거 아니라 여기가 그쪽 단골 카페인 거. 저도 그 정도까지 자의식 과잉은 아니라서요.”

    말을 자르고 심드렁하게 내 할 말을 했다. 점차 풀리는 표정과 눈빛에 보이는 설마 하는 기대감에 물기가 묻어 나오는 컵을 들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목구멍 너머로 넘기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혹시 오해할까 봐 말씀드리는데 저는 여기 수플레 팬케이크가 맛있다고 해서 찾아온 거지 댁 단골 카페라서 찾아온 거 아니에요.”

    내가 미쳤다고 그쪽 보려고 그쪽 단골 카페 왔겠어? 덧붙여진 내 말에 주태윤의 얼굴에 아쉬움이 슬쩍 감돌았다.

    “보아하니 우연히 천우현 씨 발견하고는 길드 스카우트 대답 재촉하려고 다가온 거 같은데, 설마 남의 소중한 약속 시간을 그런 쓸데없는 일로 허비시키지는 않겠죠?”

    주태윤이 눌러앉을 구석을 원천 차단한 나는 어서 가라고 다시 한번 손을 휘저었다. 묘하게 표정이 굳은 주태윤이 물어 왔다.

    “두 분, 혹시 아는 사이입니까?”

    “그럼 제가 이 나이에 소개팅 나왔겠어요?”

    내 까칠한 대답에도 여유로운 미소를 되찾은 주태윤이 상황 파악 중인 천우현에게로 몸을 돌렸다.

    “천우현 씨만 괜찮으시다면 두 분께 저희 길드의 비전과 강점을 말씀드리고 싶은데. 물론 이 자리에서 연봉 협상도 가능하고요.”

    능글맞게 웃으며 찡긋, 한쪽 눈을 감는 주태윤을 보며 질색했다. 눈살을 살짝 찌푸린 천우현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런 인간에게까지 딱히 예의 차릴 필요는 없는데 우현 씨도 너무 착해서 탈이야.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반인인 채현 씨께는 왜 길드 설명을 드린다는 건지……?”

    “일반인이요?”

    느릿하게 뇌까린 주태윤이 피식 웃으며 입매를 쓰다듬었다.

    “제가 촉이 좀 좋습니다.”

    긴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검은색 눈동자가 한순간 서늘하게 빛났다. 능글거리는 미소로도 완전히 가려지지 않는 싸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관리국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한, 아직 등급 발표조차 나지 않은 상태였던 우현 씨에게 제 명함을 내민 거고요.”

    이래서 저 남자랑 엮이는 게 싫었다. 쓸데없이 촉만 좋아서.

    특히 사람 보는 눈은 인정할 만했다. 러스터 길드가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주태윤이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직접 스카우트한 인재들 덕분이라는 건 유명했으니.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내 평화를 위협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표정을 싹 지우고 주태윤과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그래서 사람을 계속 미등록 각성자로 몰아가는 거예요? 촉 하나 믿고?”

    높낮이 없이 건조한 어조에 호선을 그리고 있던 주태윤의 입매가 움찔했다.

    내가 마왕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인 천우현이 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따지고 보면 나도 각성자는 맞으니까.

    정말 마음 같아서는 내 관리자 권한으로 저 인간의 등급을 F급으로 확 내려 버리고 싶지만 그러기엔 이미 우리나라에 주태윤의 존재감과 비중이 너무 커서 불가능했다.

    나도 모르게 눈빛이 살벌해지자 슬쩍 뒤로 물러난 주태윤이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채현 씨 말대로 제 욕심으로 두 분의 소중한 시간을 뺏을 수는 없죠. 그럼 답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천우현 씨. 동생분도 언제나 환영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 주태윤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싱긋 웃은 주태윤이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주태윤의 뒷모습이 멀어져 점이 되어 사라지자마자 들고 있던 포크로 수플레를 콱 찍었다.

    “방금 봤죠? 저 인간이 길드장으로 있는 한 절대로 러스터 길드는 안 돼요. 길드를 들어가려면 차라리 적벽 길드로 들어가요.”

    “적벽 길드도 괜찮긴 하지만 세연이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존중하려 합니다. 저야 어디로 들어가도 상관없으니까요. 정 들어갈 곳이 없다면 프리랜서 헌터도 괜찮고요.”

    프리랜서 헌터가 현판소 주인공 정석 루트긴 하지.

    항상 거기에 대형 길드와 정부의 견제가 따라붙지만. 주인공이 스카우트를 거절한 대형 길드 길드장은 비중 좀 큰 악당 1이 되고 말이야. 주태윤이 비중 큰 악당 역이라니, 아주 찰떡이네.

    “그럼 채현 씨는 계속 이대로 지내실 겁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우현 씨와 다르게 지켜야 할 게 딱히 없으니까요.”

    두 오랜 친구는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을 만큼 강하고, 부모님은 수도권보다는 현저히 게이트가 터지는 비율이 적은 지방에 계신다.

    이러한 환경에서 굳이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정체를 드러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 게이트 사태의 원인에, 등급이 S급도 아닌 EX급이라면 더더욱.

    소소하게 이야기를 더 나누고, 이제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데려다주겠다고 자기 차로 안내하는 천우현의 배려를 굳이 거절하진 않았다.

    “거기에서도 노을이 지면 작별 시간이었는데 돌아와서도 이건 똑같네요.”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원룸 건물 앞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내가 몸을 돌린 순간, 내 손을 잡아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만약 한국에서 다시 만난다면… 감사하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내 손에 닿은 그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채현 씨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요. 그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 절망이 아닌 기대로 하루를 시작했던 건 채현 씨를 만나고 처음이었습니다.”

    고백 같은 말을 들으며 볼을 긁적였다. 이 남자, 또 그린 라이트로 착각하게 만드네. 물론 한 번 속지 두 번은 안 속는다.

    “그리고 채현 씨가 저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제가 그 지옥 같은 루프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요.”

    잠시 말할까 고민했다. 내가 당신의 의지처이듯 당신 역시 내 유일한 숨통이었다고. 하지만 너무 낯간지러워서 몸을 돌리며 최선의 물음으로 대신했다.

    “고마우면 나중에 밥 한 끼 같이 먹을래요?”

    붉게 지는 노을 아래에서 천우현이 환하게 웃었다.

    “물론이죠.”

    * * *

    카페를 나오자마자 얼굴에 걸고 있던 능글맞은 웃음을 싹 지워 낸 주태윤은 카페 앞에 주차된 검은색 벤X 뒷좌석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운전석을 한껏 눕힌 채로 열심히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던 그의 비서가 튕기듯이 상체를 일으켰다.

    “아쉽게도 천우현은 포기해야겠네.”

    뒷좌석에 앉은 태윤이 좌석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대며 한숨 서린 말을 내뱉었다. 시동을 걸던 비서가 의문 어린 목소리로 질문했다.

    “갑자기요……?”

    “갑자기는 아니야. 만났거든, 카페 안에서.”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테이크아웃 한 라테를 한 모금 마신 태윤은 자동차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빠르게 휙휙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내다보던 그가 느긋하게 웃었다.

    “어차피 주도권은 동생 쪽에 있는 것 같다만 동생은 왜인지 몰라도 나를 꽤 꺼리는 눈치고, 오늘 오빠 쪽만 따로 만나 보니 오빠 쪽도 썩 우리 길드에 관심을 두는 것 같지가 않더라고. 채현 씨가 필사적으로 막을 것 같기도 하고.”

    더 설득하려 해 봤자 시간 낭비지.

    나직하게 덧붙여지는 중얼거림에 반박 같은 물음이 돌아왔다.

    “그러면 그 일반인 여자분은 왜 그렇게 쫓아다니신 건데요? 그것도 이재의 과장님에게 온갖 욕까지 들어 먹으시면서.”

    “일반인 아니라니까.”

    묘하게 확신 어린 목소리에 그의 비서가 투덜거렸다.

    “그렇게 확신하시면 미등록 각성자로 신고를 하세요. 그러면 관리국에서 강제로 능력 측정해서 각성 진위 여부 확인할 수 있잖아요.”

    “수호야, 그러면 안 그래도 채현 씨에게 마이너스인 내 이미지가 더 나락 가는 거야.”

    “이미 스토커로 찍힌 것부터 나락 같은데요, 뭘.”

    끼익, 차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자마자 길쭉한 다리를 쓱 들어 올린 주태윤이 운전석을 가볍게 걷어찼다.

    “억!”

    “대신 내 이미지는 머릿속에 확실하게 각인됐겠지. 절친한 친구들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이 많아 보이던데 과연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누구 손을 잡을까.”

    흥얼거리듯 중얼거린 주태윤이 컵을 기울였다.

    “자기 친구들 손을 잡겠죠. 뭐 하러 스토커로 찍힌 길드장님 손을 잡겠어요?”

    “친할수록 더욱 이야기하기 힘든 사연이 있는 법이지.”

    테이크아웃 컵에 가려진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 * *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천세연은 제법 큰 협회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계획을 세운 건 좋았지만 전제 조건부터 잘못되었다. 오빠와 채현 언니, 아니 이채현을 만나지 못하게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둘이 이미 아는 사이였을 줄이야.

    다시 재정립한 계획의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 봤을 때 최선은 이것뿐이다. 그리고 제 오빠가 절대로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천세연은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유리문을 열고 협회 로비로 들어갔다. 곧바로 데스크로 다가가자 직원이 무슨 일로 오셨냐고 친절한 어조로 응대했다.

    “협회장님 뵈러 왔는데요.”

    “약속은 잡고 오셨을까요?”

    “네, 오늘 오후 3시 천세연이요.”

    수화기를 집어 든 데스크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세연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 안내했다. 곧 세연에게로 협회 소속 헌터 한 명이 다가왔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의 안내를 따라 협회 건물 최상층의 한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똑똑, 정중하게 노크한 헌터가 문을 열었다.

    “협회장님, 천세연 씨 모시고 왔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이만 나가 보시죠.”

    헌터 협회 협회장, 김도빈이 책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저었다. 사무실 문이 소리 없이 닫히고 그 앞에 서 있던 세연은 접대용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의 앞에 앉은 김도빈이 나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헌터 라이선스도 나오지 않은 햇병아리 각성자께서 무슨 용건으로 저를 만나자고 하셨는지?”

    문이 열리고 들어온 비서가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그들의 앞에 내려놓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세연은 고개를 들고 여상히 미소 짓고 있는 김도빈과 눈을 마주했다.

    “거래를 하러 왔어요.”

    세계의 멸망을 보고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회귀자, 천세연이 진지한 얼굴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세상 흑막같이 생겨선 누구보다도 세계를 중요시하게 여기는 눈앞의 남자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패를 쥐고.

    * * *

    시험 기간이 끝났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다시 강의를 들으려 등교를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안타깝게도 아직 여름방학까지는 1개월 반이나 남았다.

    이번 중간고사를 깔끔히 말아먹었으므로 학점이 C 이상이라도 나오려면 기말에 모든 걸 쏟아부어야 했다.

    과잠을 걸치고 전공책과 아이패드를 가방에 쑤셔 넣다가 텅 빈 벽면을 바라보며 멈칫했다.

    내 손짓에 따라 환영이 흘러내려 마법진이 드러났다. 저 마법진은 그때 나를 암살하려 하던 검은 머리 마족 놈이 건너온 이래로 단 한 번도 빛나지 않았다.

    생각이 은발로 막 이어지려고 할 때, 버스 도착 15분 전이라는 알림이 휴대폰 버스 앱에 떴다.

    지금 나가야지 버스를 놓치지 않는다. 버스 대신 택시만 타고 다녀도 등굣길이 한층 나아질 것 같은데 말이야. 그래도 지하철 2호선 타고 등교 안 해도 되니까 다행인가.

    다시 마법진을 가리는 환영을 복구해 놓고는 허겁지겁 가방을 챙겨 현관문을 나섰다. 나도 아현이나 우현 씨처럼 차 한 대 뽑고 싶다…….

    면허가 있으면 뭐 해. 차가 없는데. 정확히는 차를 살 돈이 없는 거지만.

    내가 문을 열자마자 타이밍 좋게 문을 열고 나온 민서 언니가 태평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여, 이채현이. 연애하니까 얼굴이 폈다?”

    “…언니, 활자 남친도 연애로 쳐줘요?”

    『그 꽃을 꺾지 마세요』는 요즘 몰아치는 황태자의 플러팅 때문에 황태자 주식층이 한층 견고해졌고, 나는 마탑주 주식을 반쯤 내려놓은 채로 드림으로 마탑주를 파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울 탑주님을 붙들고 있고 싶었달까.

    하지만 그 속사정을 저 언니가 알 리가 없는데.

    내 떨떠름한 물음에 쩍 하품한 민서 언니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킬킬거렸다.

    “짜식, 모른 척하기는. 어제 이 언니가 너랑 웬 남정네랑 원룸 건물 앞에서 사이좋게 손잡고 있는 장면 다 봤는데. 야, 그런데 네 남친 키 크더라?”

    “남자 친구 아니에요. 그냥 아는 지인이거든요.”

    “그래, 아는 지인이 그렇게 자기 되고 여보 되는 거지. 근데 너는 그냥 아는 지인이랑 그렇게 애틋하게 손을 잡고 있냐.”

    하여간 우리나라는 이게 문제야. 뭐든지 연애로 엮으려 든다니까. 세상에 연애 말고도 얼마나 건전하고 건강한 관계가 많은데.

    “네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심드렁하게 대꾸하고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갔다. 예상에 없던 이웃과의 대화 때문에 버스 시간이 빠듯했다. 지금 오는 버스를 놓치면 200% 지각이었다.

    하교할 때처럼 순간 이동으로 마음 편히 등교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하필 학교에 고장 난 화장실도 없어서 제일 유용한 스킬도 마음껏 못 쓰잖아. 확 변기 하나 박살 내 버려?

    속으로 투덜거리며 S급 체력으로 열심히 달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앱을 확인해 보니 버스 도착까지 남은 시간은 3분이었다.

    ‘아슬아슬했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줄줄이 도착하는 버스 번호를 매의 눈으로 훑던 도중,

    『위험 예지가 발동됩니다.』

    오랜만에 보는 상태창이 나타났다.

    잠깐, 여기서 게이트가 터진다고?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차가 쌩쌩 지나고 있는 8차선 도로뿐. 갑작스러운 비상사태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구구구궁―!

    이내 공기가 떨리며 도로 위의 공간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상황을 빠르게 눈치챈 몇몇 차들이 끼익, 멈춰 섰다.

    쾅! 콰앙!

    연신 추돌음이 울렸다.

    빠앙―!

    클랙슨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리고 욕설과 비명이 혼잡하게 도로를 메웠다.

    그 모든 난장판의 한가운데에서 시커먼 게이트가 도로 중앙에 쩍, 입을 벌리며 생성되었다.

    웨에에엥,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경찰차들이 줄줄이 도착했다. 교통경찰들이 호루라기를 삑삑대며 차의 접근을 막고 게이트 앞에 멈춰 선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갑작스럽게 도로 위에 생긴 게이트와 혼잡하기 그지없는 교통 상황. 아무리 봐도 학교로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 난장판에 택시도 잡힐 것 같지 않고 지하철은 역에서 내려서 학교까지 30분은 걸어야 하니 패스.

    급히 결강 사유서에 제출할 현장 사진을 찍었다. 과연 교수님께서 받아 주실지는 모르겠지만 밑져야 본전이지.

    게다가 착물화학 교수님은 자연대 게이트에 휘말리신 경험도 있으신 터라 이 상황을 이해해 주실 거다. 게이트가 잘 보이도록 사진을 두어 장 더 찍고 몸을 돌리려던 그 순간.

    쿵! 쿵!

    땅이 울렸다. 게이트 앞에 멈춰 선 차들이 들썩였다. 여전히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진동이 커질수록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굳었다. 경찰들이 어서 나오시라고 도로 위에서 연신 호루라기를 불어 댔다.

    지난달 뉴스에 대서특필된 게이트가 있었다.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던, 내가 처음으로 휘말렸던 게이트.

    아마 그 게이트가 떠오르는 건 나뿐만이 아니겠지. 빵빵거리는 차들을 비집고 인도 쪽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도 그 대열에 살짝 합류하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크와아아앙―!

    우렁찬 울음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발에 닿는 진동은 방금보다 더 커져 있었다.

    “1, 1급! 1급 몬스터다! 다들 피해!”

    누군가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몬스터가 기어이 게이트 밖으로 나와 있었다.

    게이트 밖으로 나온 몬스터가 단지 한 마리이기에 몬스터 웨이브라 칭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던전 브레이크다! X발, 기어코 이게 터지네!”

    “으아아악! 헌터! 헌터 없어?”

    “살려 주세요!”

    던전 브레이크라고 칭해야 하는 게 맞겠지. 거대한 몬스터가 빠르게 달려오더니 나를 덮쳐 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있어 죽일 수도 없었기에 슬쩍 몸을 피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그때, 온전히 들어오는 몬스터의 외향에 멈칫했다.

    페리도트를 닮은 녹색 눈.

    온통 새까만 털에 흰 양말을 신은 듯한 하얀 발과 끝만 하얀 꼬리.

    익숙한 외형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내가 경계의 숲에서 주워 왔던 내 고양이.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매정하게 두고 오고는 잊고 있었던 내 반려동물이자 내 마수.

    “…페리?”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페리가 고개를 주억이더니 배를 까뒤집고 내 앞에서 뒹굴었다. 페리의 덩치에 눌린 자동차가 장난감처럼 짜부라졌다.

    뒹굴거리던 것도 잠시, 꼬리를 마구 치며 치대 오는 페리의 머리를 얼떨결에 쓰다듬다가 순식간에 지나치게 조용해진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경악과 감탄, 부러움이 섞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카페에 생긴 게이트에서 내가 포커스에게 했던 말이 환청처럼 맴돌았다.

    “제가 사실 로망이 있어요. 테이밍한 몬스터를 게이트 밖으로 불러내서 제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 최초의 테이머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겠다는 그런 로망이.”

    정말 진정한 R=VD이자 Dream Come True였다. 만약 포커스가 이 장면을 본다면 그는 이제 분명 나를 꿈을 이룬 컨셉충이라고 생각하겠지.

    일제히 내 쪽을 향한 휴대폰 카메라를 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찍지 마세요! 초상권 침해로 고소합니다! 아, 찍지 말라고!”

    파파라치에 둘러싸인 연예인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연예인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

    내 외침에 몇몇 휴대폰이 쓱 내려갔지만 여전히 나를 향한 휴대폰 카메라들은 많았다. 확 다 폭발시켜 버릴라.

    하필 또 오늘 패션은 쉽게 얼굴을 가릴 수 있는 후드티가 아니라 과잠에 반팔 조합이었다. 이를 갈며 백팩을 벗어 얼굴을 가렸다. 등굣길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여전히 페리는 내 몸에 제 머리를 비비적대며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하고 있었다.

    ‘던전 안에 있지 말고 차원에 다시 넘어가 있어, 페리. 이따가 내가 부를게. 알겠지? 몸집 작게 하고.’

    내 명령에 페리가 다시 터덜터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짧은 거리를 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모습에 양심이 쿡쿡, 찔려 왔다.

    대전으로 팔려 갔다가 진도로 다시 돌아온 백구를 보는 주인집 할머니의 기분이 이랬을까.

    타이밍 좋게도 헌터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어차피 저 던전 안에는 페리가 없을 테니 마음이 좀 놓였다. 물론 우리 페리가 헌터들에게 쉽게 당할 수준도 아니고.

    그럼 일단 집으로 가자. 이 대형 사고를 어떻게 타파해 나가야 할 건지 고민 좀 해 보게.

    * * *

    ☼연결 상태 확인 중…….

    +라이브 방송 on

    [게이트 열리더니 몬스터 튀어나온 현 제운대입구역 버스정류장 상황 중계ing]

    팔로워에게 회원님이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다는 알림을 보내고 있습니다.

    게스트를 초대해 보세요.

    ol_99: 저거 몬스터야?

    mulee_p: ???

    zenny_x.x: 드디어 소설에서만 보던 던전 브레이크의 시작인가

    ulhee: 와 지구 X됐네 이제 몬스터가 던전에서 튀어나오네

    saeyuen2: 헐

    uleee_: 뭐임? 배 까뒤집었는데?

    cnt_2745709: 저거 몬스터 맞아? 왤케 얌전해?

    lsees_17: 우리 집 고영이랑 별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저거 몬스터 맞아요. 저기 도로에 게이트 생겼고 저 몬스터는 거기에서 튀어나온 거. 헐? 저 몬스터 1급이라네?”

    2_w0n: 몬스터가 여자분한테 애교를 부리는데요

    ui_yun: 각성하신 거 아님?

    sena_x.x: 저 여자분 설마 테이머야?

    jm_478: 와, 법사계 신규 직업군 열렸네

    chu_chu: 속보! 한국에 세계 최초 테이머 탄생!

    ji18: 헌터 데뷔 한번 화려하게 하시네

    gg7256: 1급 몬스터 테이밍할 정도면 최소 A급 최대 S급 아니냐

    dbw_br: 부럽다 인생 폈네

    kms0718: 방금 각성한 거야, 아니면 미등록 헌터야?

    im_ray: 스킬 다루는 게 능숙한데 아무리 봐도 미등록 뽀록 났죠

    racecar: 뭘 그렇게 단정 지어? 재능충일 수도 있지

    - 찍지 마세요! 초상권 침해로 고소합니다! 아, 찍지 말라고!

    timb_oo: ㅋㅋㅋㅋㅋ목소리 ㄹㅇ 개빡친 듯?

    arijjang: 입고 있는 거 한국대 과잠인 거 같은데? 한대생임?

    skfieaf11: 한국대 다니는 제 친구가 저거 화학과 과잠이라네요~

    “찍지 말라네요. 이만 종료할게요.”

    - 라이브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

    * * *

    헌터명 서열1위포커스, (그 자신조차도 왜인지 모르지만) 관리자1의 편애를 받는 자 이하린은 며칠 전 제가 올렸던 청원 링크를 클릭했다.

    - 청원 진행 중 -

    헌터명 1회 변경권 도입을 청원합니다.

    …….

    청원 동의 15,784명

    navxr-***

    동의합니다 차라리 싹 실명제로 갑시다

    facebxxk-***

    그러게 왜 헌터명을 서열1위포커스로 지어 가지고ㅋㅋㅋㅋㅋ

    twixxer-***

    청원인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혹시 닉첸 가능해지면 헌터명 한반도부대장으로 바꾸실 거예요 아님 서열2위포커스로 바꾸실 거예요?

    “아, 왜 다들 동의를 안 해! 아버지신음은에비앙 같은 헌터명으로 계속 살고 싶냐고!”

    청원 동의 인원은 어제보다 겨우 스무 명밖에 더 늘지 않았다. 이런 평균 수치가 계속된다면 청원 검토 근처에도 못 간다.

    제가 가입한 카페를 비롯한 온갖 커뮤니티에 링크를 뿌리고 다녔음에도 도통 늘지를 않는 청원 수에 답답할 따름이었다.

    “내가 올린 게 그렇게 티 나나?”

    하나같이 제 헌터명을 언급하고 있는 청원 동의 댓글에 이하린은 머리를 긁적였다.

    보고 있으면 속만 터지는 청원 홈페이지를 나오려 습관적으로 포털 홈버튼을 터치한 그는 실검에 오른 낯익은 단어에 검색창으로 향하던 손을 멈칫했다.

    실시간 검색어

    [1] 테이머 new!

    [2] 제운대입구역 게이트 new!

    [3] 던전 브레이크 new!

    [4] 각성 new!

    “테이머……?”

    몇 주 전 마감 중 카페에 터진 게이트에서 만났던 그 컨셉충의 직업군이 아니던가. 그렇게 해서라도 세상의 관심을 받고 싶다는 그 심리가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세상은 넓고 이상한 사람은 많다 했으니, 뭐.

    ‘혹시 그 사람 아니야?’

    이하린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현 실검 1위, 테이머를 터치했다. ‘테이머라는 새 직업군 열리나’와 같은 뉴스와 동영상이 쫙 떴다.

    그중 가장 짧고 화질이 괜찮아 보이는 동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게이트 안에서 튀어나온 몬스터가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 웬 여자에게로 달려드는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고양이마냥 배를 까뒤집고 애교를 부리는 몬스터를 몹시 신기하다는 눈으로 보다가 머리를 비비적대는 몬스터의 애정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주인공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 아, 찍지 말라고!

    웨이브 진 단발과 여자치고는 큰 키,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

    ‘맞는 것 같은데.’

    그때 만났던 그 A급 컨셉충과 인상착의가 꽤 일치한다. 직업군도 일치하고.

    “기어코 꿈을 이루셨구나.”

    이하린은 감탄 어린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대단하다, 정말. 그 계획을 맨정신으로 실행하다니. 원하던 대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겠네.

    그런데 왜 촬영은 못 하게 하는 거지? 이것도 컨셉인가? 참 특이한 사람이네.

    그는 태연하게 생각하며 소설 연재 플랫폼에 들어가 그때 컨셉충을 만난 카페에서 마감 쳤던 회차를 터치했다. 혹여 발견하지 못한 오타가 있을까 꼼꼼히 제 글을 살핀 이하린은 글에 달린 댓글을 보며 실실 웃었다.

    마탑주남주아니면마탑에서번지점프: 아무리 봐도 남주는 울 탑주님밖에 없는데요ㅠㅠㅠ 울 이브가 아픈 거 알아차린 사람이 탑주님밖에 없잖아ㅠㅠ 감기 걸렸을 때 어머니가 항상 레몬차 타 줬다고 지나가듯 한 말까지 기억해서 레몬차 타 오고 이건 ㄹㅇ 남주의 덕목 아니냐고요 그러니까 어남마 제바류ㅠㅠㅠㅠ

    익숙한 닉네임이 눈에 들어왔다. 항상 마탑주를 부르짖지만 정성스러운 뚱댓을 남겨 주시는 독자님이었다. 심지어 그가 지나가듯 넣은 설정도 꼼꼼히 기억해 주었다.

    ‘독자님, 오늘 하루도 잘 보내시길.’

    이하린은 진심을 담아 마탑주남주아니면마탑에서번지점프 님의 안녕을 빌었다.

    * * *

    아무래도 X됐다. 굳이 심사숙고하지 않아도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그래, 난 X됐다.

    내 직업군으로 의심받는 ‘테이머’는 무려 실검 1위까지 올랐고 내 모습이 담긴 동영상은 대충 내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만 되어서 인터넷에 퍼져 나갔다. 아주 전 세계로 쭉쭉.

    YxxTube

    (동영상)

    「한국에서 최초의 테이머 탄생」

    ☝20만 ☟78

    [따따땃쥐] • 1일 전

    와, 몬스터가 펫이 됐누 이게 바로 테이머의 전력인가

    좋아요 2.7천 답글 17개

    [Eva] • 10시간 전

    Is it REAL? Not CG????

    좋아요 1.3천 답글 7개

    인기 게임도 신규 직업군이 나오면 변방 커뮤까지 떠들썩한데 현실의 헌터 직업군이면 어떻겠나.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나온 희귀 직업군이라면.

    하지만 거기서 문제가 있다면 난 테이머가 아니라는 거였다. 테이머란 직업군은 없었다. 당연하다. 내가 테이머가 아니니까.

    페리는 내 반려동물이자 내 마수였기 때문에 나한테 애교 부리고 복종하는 게 당연했다. 스킬 따위로 복종시킨 게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복종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이제 관리국에 끌려가서 등급 및 직업군 측정을 하면 내 등급은 EX급으로 뜨고, 내 직업은 마왕, 관리자2로 떠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NASA에서 신기한 연구 샘플이 생겼다며 대한민국에 나를 넘기라고 요구하고, 세계의 모든 연구 기관이 나를 조사하겠다고 싸우고, 광신도 집단인 레벨레이션이 내가 귀환자인 걸 알고 나를 죽여야 게이트 사태가 끝난다고 선동을…….

    머리를 세차게 저어 안 좋은 쪽으로 끝없이 뻗어 나가던 생각을 끊어 냈다.

    영상을 보고 있는 이 와중에도 휴대폰은 끊임없이 울려 댔다. 메시지가 점점 쌓여 갔다.

    대학 화학과 1X학번 단체 채팅방은 과잠이 분명 화학과 과잠이었다고 떠들썩했고, 중고등학교, 대학 친구들부터 학원 친구, 안면만 있는 동창까지 이거 너 맞냐고 동영상 링크 및 캡처와 함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엄마는 테이머가 실검에 뜨자마자 내게 전화를 걸었다. 아마 아주머니 네트워크인 계 모임 단체 채팅방에서 한 아주머니가 ‘이거 채현이 아니야?’ 하면서 동영상 링크를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 넌 무슨 각성을 그렇게 요란스레 하냐.

    “아, 내가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게 아니라고!”

    통화 중 엄마는 헌터 등록을 안 하면 안 되냐고 넌지시 물었다. 헌터가 고소득 직업이긴 했으나 그만큼 위험부담도 있는 건 사실이었다.

    초등학교 동창이자 게이트 사태 첫날 각성했던 현서도 A급 게이트에서 사망했다고 들었으니. 그 장례식까지 다녀온 엄마는 내가 각성했다 하니 더 불안했을 거다.

    “그러면 끌려가서 벌금 물고 강제로 능력 측정해야 해.”

    - 벌금이 얼만데? 엄마가 내줄게.

    “벌금 물어도 헌터 등록은 해야 한다니까? 그리고 벌금이 최대 5천만 원이야.”

    - 그냥 등록해라. 괜히 돈 번다고 위험한 데만 들어가지 말고.

    엄마는 벌금액을 듣자마자 빠르게 태세 전환했다. 아빠가 우리 딸은 소도 때려잡을 앤데 뭐가 걱정이냐고 껄껄거리다가 엄마에게 등짝을 맞는 것이 수화기 너머로 생생하게 생중계되었다.

    엄마, 아빠 딸은 소만 아니라 마수도 때려잡아, 아빠.

    그리고 백아현과 윤세인은 삼총사 단체 채팅방에서 취뽀 축하한다고 이모티콘으로 연신 폭죽을 터트려 댔다. 헌터도 나름 전문직이었으니 취뽀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단지 내가 그 직업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테스트의 첫 번째 관문에서부터 망할 것 같아서 문제지.

    [천우현 - 채현 씨, 괜찮으세요?] 오후 5:30

    천우현은 걱정이 잔뜩 묻어 나오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럴 만도 했다. 불과 며칠 전에 계속 정체를 숨기고 평화롭게 지낼 거라고 했던 사람이 전 세계에 각성 신고식 한번 거하게 치렀으니.

    그리고 대망의 주태윤은…….

    [주태윤 - ^^] 오후 6:00

    [주태윤 - 영상 내려가게 도와드릴까요, 채현 씨?] 오후 6:01

    “아악! 짜증 나! 눈웃음 X나 짜증 나! 뒈져라, 주세글자!”

    [왜요? 영상 내려 줄 테니까 그쪽 길드 들어오라고 하려고요?] 오후 6:03

    [주태윤 - 그럴 리가요^^ 순수한 선의입니다]

    [주태윤 - 오해하지 말아 주시죠] 오후 6:04

    그 시커먼 속내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일단 이 상황에 제일 도움이 되었다.

    내가 승낙한 지 두 시간도 채 안 되어 빠른 속도로 규제되는 너튜브 동영상과 바뀌는 실검을 보며 내가 대체 무슨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건가, 라는 고찰이 들었다.

    언론 통제 사회라니, 무섭다, 무서워. 나 같은 한낱 소시민은 심장이 다 떨린다. 하지만 새로고침을 하자마자 다시 바뀌는 실검에 내 표정이 짜게 식었다.

    실시간 검색어

    [1] 실검 조작 new!

    [2] 테이머 왜 new!

    [3] 테이머 동영상 new!

    [4] 던전 브레이크 ↓1

    그럼 그렇지. 다이내믹 코리아가 길드장 한 명의 손아귀에서 휘둘릴 리가 없지. 그래도 내 신상을 탈탈 털던 게시글들은 싹 신고 먹고 내려갔다.

    그 화질 구린 동영상에서도 한국대 화학과 과잠을 알아본 이들의 눈썰미에 박수를 보내고픈 심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페리가 기다리겠다. 더 시간이 늦기 전에 알림이 수북하게 쌓인 휴대폰을 내려놓고 스킬을 시전했다.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오전에 내게 달려들었던 거대한 마수 대신 자그마한 턱시도 고양이가 원룸 방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듯 두리번거리던 페리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우다다 달려와 내 품에 폴짝 뛰어들어 폭 안겼다.

    너 때문에 이 주인님이 얼마나 곤란한 상황에 처했는지 알까 모르겠다. 꼭 안다가 부쩍 가벼워진 무게에 당황했다. 털도 푸석해져 있었다.

    “아니요, 잘 못 지내요. 폐하가 사라진 후로 먹이도 거부하고 마왕성 옥좌 밑에 웅크려 있기만 하거든요.”

    갈비뼈가 육안으로 보이도록 비쩍 마른 모습을 보고 있자 애쉬의 비소 섞인 말이 떠올랐다. 그냥 잘 먹고 잘 살지. 내가 뭐라고. 딱히 좋은 주인도 아니었던 내가 뭐라고 굶기까지 했어.

    기분이 좋은지 품에 파고들며 골골송을 불러 대는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보고 싶었어, 페리.”

    얼마나 내가 보고 싶었으면 내 명령까지 어기고 게이트 밖으로 나와 내게 달려들었던 걸까. 등을 쓱쓱 쓰다듬던 나는 페리의 등에 묻어 있는 은색 머리카락 한 가닥을 보고 손을 멈칫했다.

    사건이 몰아치는 덕에 잊고 있었던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지금이라도 소환해서 이야기를 들어 볼까 고민하던 그때,

    “냐앍!”

    페리의 울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환영으로 덮어 놓았던 마법진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법진에서 빛이 난다는 건 저 마법진이 지금 마계와 연결되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이전에 저 마법진을 통해 침입한 마족 놈이 내게 달려들었던 터라 경계를 잔뜩 세우며 마법진이 있는 벽 쪽을 노려보았다.

    마찬가지로 꼬리를 잔뜩 세우고 있던 페리가 마법진 안에서 나오는 인영에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었다.

    사르르, 부드러운 은발이 내 발치에 흩어졌다. 내 다리를 필사적으로 붙든 애쉬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울음기가 물씬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제가 잘못했어요, 폐하…….”

    눈물이 방바닥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말 너였어, 애쉬? 네가 감히 내 적대 세력이랑 손을 잡았던 거야?

    “…뭐를. 뭘 잘못했는데.”

    형편없이 갈라지는 내 목소리에 애쉬가 고개를 파득 치켜들었다.

    “투정 부려서 죄송해요. 제 감정을 폐하의 탓으로 돌린 것도 죄송해요. 그러니까 제발…….”

    노을색 눈에 눈물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려 손을 뻗자 그 손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애쉬가 필사적으로 내 손을 움켜쥐었다.

    “…다시 절 버리지 마세요.”

    애쉬가 히끅거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 말에 맥이 탁 풀렸다.

    하지만 공은 공, 사는 사. 내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애쉬가 안쓰럽긴 했지만 마왕 시해 미수 사건에 간접적으로 얽혀 있는 한 심문은 피할 수 없었다.

    차가운 시선으로 애쉬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애쉬, 2주일 전 저 마법진을 타고 1마계 외의 마족 잔당이 넘어왔다.”

    “세이블에게 들었어요.”

    훌쩍이며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내 손을 꼭 쥔 채였다.

    “그리고 체이스터는 저 마법진이 네 저택과 연결되어 있다고 증언했지.”

    그 말에 애쉬의 눈이 커졌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서러움이 잔뜩 감돌았다.

    “변론을 하든, 변명을 하든 해 봐라. 이제까지 쌓아 온 정을 봐서 들어 주기는 할 테니까.”

    믿음보다 의심이 더 안전하다.

    내가 500년간 마계에서 구르며 뼈와 살에 새긴 마계의 명언이었다.

    하도 뒤통수 후려 맞고 배신을 밥 먹듯이 당한 덕에 최측근인 애쉬와 세이블마저도 온전히 믿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없이 일어난 애쉬가 상의를 벗었다. 탄탄하게 근육 잡힌 새하얀 몸 중앙에 유독 눈에 띄는 상처가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비껴간 그 상처는 누가 봐도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치명상이었다.

    “2주 전에 7마계의 잔당이 제가 취침하는 틈을 타 제 저택에 침입했습니다. 하인을 매수했더군요. 이 상처는 그때 입은 부상입니다.”

    애쉬의 어조는 어느새 정중한 공대로 바뀌어 있었다. 다시 상의를 입고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애쉬가 부복했다.

    “그래서 그만 한 놈을 제 실수로 놓치고 말았습니다. 폐하를 위험에 빠뜨린 죄는 죽음으로 갚겠으니 부디 폐하의 손으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자비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넘어오지 않은 것도…….”

    “일주일간은 부상을 치유하느라 차원을 넘어오지 못했고 그 후 일주일은 폐하께서 제 얼굴이 보기 싫으실까 봐 두려워서…….”

    말을 흐린 애쉬가 다시 눈물을 뚝뚝 떨궜다. 애쉬에게로 도도도 다가간 페리가 애쉬의 팔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더니 이만 용서해 주라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페리랑은 언제 그렇게 친해졌대? 전에는 앙숙이나 다름없더니만.”

    헛웃음 지으며 묻자 물기 어린 눈으로 웃은 애쉬가 힘없이 답했다.

    “같은 처지였으니까요. 버려진 것들끼리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는 것만큼 위로되는 일은 없었거든요.”

    끄응, 한껏 불쌍한 눈으로 내 죄책감을 건드리는 말을 내뱉는 애쉬를 내려다보며 침음을 삼켰다.

    네 부모도, 네 자식도 믿지 말라.

    유명한 마계의 명언이었지만 나는 마왕이기 전 인간이었기에 내가 이제까지 보아 왔던 애쉬에게 믿음을 한 번 가져 보기로 했다.

    물론 딱 한 번뿐이다. 두 번이면 당연히 나가리지.

    페리에게 했듯이 부드러운 은색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은 못 하겠다. 난 이곳의 사람이고 내 세계가 평화를 되찾으려면 마계와의 연결을 끊어야 하니까.”

    “그냥 이렇게 지내면 안 돼요? 어차피 폐하한테는 찰나잖아요. 왜 500년을 넘게 지내 온 세계를 외면하고 고작 20년밖에 있지 않았던 세계를 선택하는 건데요.”

    몰라서 묻니. 거기에는 인터넷도, 컴퓨터와 스마트폰도, 와이파이와 데이터도 없잖아. 내가 마왕성에서 서류 작업을 하면서 문명의 이기를 얼마나 그리워했는데.

    그리고 오늘의 불법 촬영 및 신상 털기 사태로 인류애가 살짝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마족 놈들이 숨 쉬듯 뒤통수 치는 꼴을 보고 사는 것보다는 나았다.

    “말했잖아.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내 세계라고.”

    『마왕 놈이 마계로 돌아가면 저와 이 세계에야 좋은 일이죠. ( ´ ▽ ` )ノ』

    물론 관리자1 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미안하다.”

    군주는 사죄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애쉬와 페리에게 사과를 건넸다. 내 과거의 행동과 미래의 행적을 통들은 사과를.

    “그렇게 말하셔도 전 폐하의 옆에 계속 있을 거예요. 내치지만 마세요.”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채로 애쉬가 필사적으로 내 손을 움켜쥐고는 중얼거렸다. 얼마나 씹어 댄 건지 입술이 피로 얼룩져 엉망이었다.

    총총 다가온 페리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내 다리에 딱 붙었다. 애쉬의 손에 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페리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혼날 건 혼나야지. 페리도트를 연상시키는 초록색 눈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입을 열었다.

    “페리, 누가 함부로 게이트 밖으로 나오래? 만약 거기에 S급 헌터라도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물론 네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겠지만 이렇게 말랐는데 부상이라도 당했으면 어쩌려고!”

    마계에서나 마왕의 마수로 누릴 거 다 누리고 내 실드 받으면서 살았지, 여기서 너는 그냥 레이드해야 할 1급 몬스터라고. 한낱 헬조선 예비 졸업생은 너 보호 못 해 줘.

    내 호통에 페리가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곁눈질로 애쉬를 보며 페리가 바둥거렸다. 애쉬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어쭈? 이것들이 시선을 딱딱 맞추네? 눈을 가늘게 뜨고 애쉬와 페리를 번갈아 보자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한 애쉬가 슬쩍 말을 꺼냈다.

    “참, 폐하. 안드라스가 대체 언제 부르실 예정이냐고 전해 달라는데요.”

    아, 맞다. 큼직한 사건이 한꺼번에 몰아쳐 온 덕분에 안드라스에게 시켰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게 눈물과 원망을 쏟으며 돌아갔던 애쉬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안드라스가 기억날 리가.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 상태 그대로 소환된 안드라스는 곧바로 바닥으로 철퍼덕 엎어졌다. 갑작스런 봉변에 놀란 표정으로 코와 이마를 문지르며 벌떡 일어난 안드라스는 나와 시선이 마주한 즉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음…….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군.”

    “예, 일곱 마계의 통일이란 대업을 이루고는 홀랑 자취를 감추신 누구 님 덕분에 아주 많이 피곤했죠.”

    이제 보니 눈가에 다크서클이 짙게 끼어 있었다. 뭐, 이 자식아. 내가 쩌리 1마계를 최강 1마계로 바꿔 줬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미간을 문지르며 한탄하듯 불만을 쏟아 내는 안드라스의 말을 짝! 손뼉 한 번 치는 거로 자른 나는 그의 텅 빈 손을 보며 물었다.

    “내가 말했던 사료는?”

    “제가 24시간 그 무거운 책들을 들고 있을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폐하.”

    직설적인 독설과 막말로 책사계의 미친개라 불리는 안드라스가 ‘님이 때맞춰 안 불러 놓고 왜 내 탓 하냐.’를 공손하게 풀어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 어디든지 계급이 깡패였다.

    손가락을 까딱해 역소환을 시키고는 10분 후에 재소환시켰다. 묵직한 책 더미를 내 원룸 방바닥에 내려놓은 안드라스가 익숙하게 책을 쓱쓱 분류했다.

    “이곳에 쌓인 책들은 8대 황제 이전의 기록이고, 이곳은 그 이후에 나온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건 크라토스의 가설을 세운 논문이고, 이건 전해 내려오는 크라토스의 신화를 묶은 기록이고…….”

    쟤는 아무래도 책사가 아니라 1마계 마왕성 서재 사서를 시켰어야 했어. 그랬으면 마신 아이루스의 심장 이야기를 50년은 빨리 접했을 텐데.

    방바닥에 쌓여 가는 두꺼운 책과 종이 더미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수업 듣고 과제 하면서 저것까지 읽어야 한다니. 잠시간 애쉬의 말대로 세상을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책을 제일 처음으로 읽어 주십시오, 폐하. 크라토스에 대해 제일 자세히 설명해 놓은 책이더군요.”

    마지막으로 붉은색 가죽 표지의 책을 내 책상에 탁 올려놓은 안드라스가 책 분류를 끝냈다. 책 사이에 책갈피가 비죽 나와 있었다.

    안드라스는 마계에서 세이블과 애쉬 다음으로 믿을 만한 부하였고, 나는 눈치 빠른 그에게 배신자의 색출을 자주 맡기곤 했다. 그때 배신자들 모르게 명단을 주고받은 방법이 바로 책 사이의 책갈피였다.

    그리고 그건 오직 안드라스와 나밖에 모르는 비밀이었다. 내 최측근인 세이블과 애쉬조차도 모르는.

    잠시 안드라스와 시선을 교환했다.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 안드라스가 이만 물러감을 청했다.

    ‘또 어떤 놈이 반란 기미라도 보인 건가?’

    에휴, 내가 이 꼴 보기 싫어서라도 얼른 크라토스를 다음 대 마왕에게 넘기고 마계와의 연결을 끊어야지.

    내일 학교 도서관에서 책 내용과 살생부를 천천히 정독하기 위해 백팩에 책을 집어넣고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페리가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올라 내 품에 파고들었다.

    “폐하, 저는요……?”

    애절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애쉬에 못 이긴 척 침대 옆자리를 팡팡, 쳤다. 배시시 웃은 애쉬가 내 옆에 누웠다. 모로 누워 휴대폰을 하던 도중 문자가 도착했다.

    [주태윤 - 일단 채현 씨 신상 정보가 담긴 글과 얼굴이 나온 동영상은 모조리 내렸습니다] 오후 8:31

    [주태윤 - 고마우시다면 나중에 밥 한 끼 먹죠]

    [주태윤 - 전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오후 8:32

    충분하긴 개뿔. 속 보인다. 분명 비싼 레스토랑 데려가서 자기가 돈 내놓고 다음에는 채현 씨가 사라는 둥, 자기는 커피 한 잔으로 충분하다는 둥 온갖 수작질을 하겠지.

    그런 로맨스 소설 남주 패턴 따위는 진작에 다 꿰고 있다고. 물론 주태윤은 로설 남주가 아니지만.

    허리를 끌어안은 손길에 손을 툭툭, 쳤다. 아랑곳하지 않고 내 어깨에 턱을 괸 애쉬가 물어 왔다.

    “누구예요?”

    “있어, 꼴 보기 싫은 인간.”

    “폐하께 거슬린다면… 죽일까요?”

    얘가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여기 마계 아니야, 인마. 죽이긴 뭘 죽여.

    * * *

    쌓여 오는 메시지에 급히 답장해 주고 메신저 상메와 인X타 소개글을 바꿨다.

    [그 동영상 쥔공 맞음. 질문 사절]

    휴, 이제 메시지 안 오겠지.

    그리고 나는 밤새 메시지와 태그에 시달렸다.

    ◎all.about.kr.issue

    (동영상)

    ♡⌕⇗

    0.w.0 님 외 여러 명이 좋아합니다.

    제운대입구역 버스정류장 앞 던전 브레이크

    새로운 직업군 #테이머 탄생!

    #헌터 #게이트 #던전 #던전브레이크 #법사계 #테이머 #한국 #한국이슈

    ga_0.0_e @lee_chae 이거 너 맞아?

    yun_x.x @lee_chae 헐 채혀나 이거 봤어? 이 사람 완전 너 닮았어ㅋㅋ

    king_an @yun_x.x 채현이 맞대! 인X타 소개글 ㄱㄱ

    adsf785 @lee_chae 울 채현이 완전 인기 스타 됐다ㅎ

    hansung23 @lee_chae 오 ㅊㅊ 각성턱 함 내라

    인X타에 동영상이 올라올 때마다 친분 있는 망할 놈들은 나를 소환해 ‘이거 너 맞아?’를 연발했다.

    나와 정말로 친한 친구들은 동영상 ♡조차 안 누르는 것과 꽤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1년 전 페X스북을 탈퇴한 게 신의 한 수였다. 페X스북까지 더해졌다면 아마 난 미쳐 버렸을 거야,

    그렇게 나는 평화롭던 일반인 생활이 끝난 역사적인 첫날, 날밤을 샜다.

    * * *

    내가 밤을 새건 말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떴고 난 강의를 들으러 등교를 해야 했다.

    안드라스가 꼭 읽으라고 신신당부했던, 살생부가 담긴 마계의 책이 든 백팩을 메고 캡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그 위로 후드티 모자까지 덧쓰고 도수 없는 안경에 마스크까지 착용하자 완벽하게 수상한 사람 룩이 탄생했다.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바로 대학 건물 화장실 변기 하나 부수고 순간 이동으로 등교해야지.

    학교 앞 인쇄소에서 결강 사유서를 프린트하려면 평소보다 이르게 출발해야 했다.

    “갔다 올게.”

    페리와 애쉬의 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쓱 쓰다듬은 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내 앞에 서 있는 인물 때문에 식겁하며 다시 문을 쾅, 닫았다. 문에 기대어 벌렁거리는 심장을 움켜잡았다.

    뭐야? 나 진짜 국정원 잡혀가는 거야?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진동이 등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죽상을 하며 조심스럽게 다시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이재의가 부쩍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미미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채현 씨.”

    “예에, 공사다망하신 각성자 관리국 과장님께서 아침부터 무슨 일로……?”

    공사다망하다는 말은 맹세코 비꼬려는 말이 아니었다.

    현재 관리국은 갑자기 도로에 나타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S급 게이트와 그 게이트에서 일어난 몬스터의 탈출, 일명 던전 브레이크 사건으로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다고 세인이에게 전해 들었다.

    그리고 주태윤을 도와 내 얼굴이 담긴 동영상과 신상 정보가 올라간 글을 내린 이 역시 이재의였다. 하필 게이트가 터진 곳이 버스정류장이 있는 도로이다 보니 CCTV와 자동차의 블랙박스에도 내 모습이 고스란히 찍혔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사람을 주태윤이 괴롭히게 만들었다는 양심의 가책+관리국 인사라서 미등록 상태에서 얼굴 보면 괜히 찔림의 복합적인 감정으로 인해 나는 이재의를 필사적으로 피해 다닐 예정이었다.

    이렇게 아침부터 우리 집 문 앞에 서 있을지는 몰랐지만.

    “별일은 아닙니다. 혹시 언제 시간이 비십니까?”

    “…시간은 왜요?”

    설마 나 강제로 끌고 가려고 그러는 건가? 나를 실종시키고 내 알리바이 만들려고? 내 눈에 경계심이 서리자 이재의가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원래 능력 측정 검사는 각성 일주일 내에 관리국 능력 측정실에 날짜를 예약하신 후 방문하셔야 이루어집니다.”

    시스템이 의외로 꽤 체계적이었다. 혹시 예약하려면 관리국 홈페이지 회원 가입해야 하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이재의가 선수 쳐 입을 열었다.

    “혹시 채현 씨가 금일 검사를 받고 싶으시다면 제 재량으로 당일 측정이 가능하십니다. 그 말 전달 드리러 방문했습니다. 10시, 1시, 3시, 5시 중 편한 시간 있으실까요?”

    누가 인생 꿀 빨려면 학연, 지연, 혈연이 전부라 했냐. 거기에 가(家)연도 추가해라. 윗집 인맥 만세.

    빠르게 머리를 굴려 오늘 강의가 끝나는 시간과 관리국과 대학까지의 거리를 계산했다.

    “오늘 오후 3시에 갈게요.”

    “예, 그러면 3시에 이채현 씨 능력 측정 검사 예약해 놓겠습니다. 능력 측정실은 관리국 3층입니다.”

    친절히 층까지 설명해 주는 이재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내려가 원룸 건물을 나왔다.

    페리가 튀어나왔던 제운대입구역 버스정류장 앞 도로는 현재 통제 중이었으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환승 루트를 택해야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부쩍 더워진 날씨에 꽁꽁 싸맨 나를 한 번씩 힐끔 하고 지나갔지만 다행히 세상에는 이상한 놈들이 많아 이 정도 차림은 이상한 범위에도 들지 않았다.

    학교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인쇄소에서 결강 사유서를 뽑아 학과 조교실로 향했다.

    “혹시 게이트에 휩쓸린 것도 결강 사유서 작성 가능할까요?”

    “네, 보상금 결정 통지서 가져오셨을까요?”

    보상금 결정 통지서? 게이트 휘말리면 보상금 줬어? 난 왜 몰랐지? 정부는 이런 게 있으면 홍보를 팍팍 때려야 할 거 아니야.

    내가 몇 번이나 휘말렸더라. 카페에서만 두 번, 편의점 골목에서 한 번. 지금까지 날린 보상금을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제가 게이트 안에 갇힌 게 아니라 몬스터가 그 게이트에서 튀어나왔거든요. 혹시 현장 사진으로 인증 안 될까요?”

    “현장 사진은 도용 문제도 있어서 기준이 애매한지라…….”

    젠장, 내가 정말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 했는데. 한숨을 푹 내쉬며 모자를 벗고 마스크를 쓱 내렸다.

    “제가 어제 정말 제대로 휘말렸거든요.”

    조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라리 나를 자의식 과잉 연예인병 걸린 웬 미친놈 보듯이 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 왜 내 얼굴이 전국으로 팔렸다는 것만 다시 확인하게 되냐고.

    하지만 덕분에 결강 사유서는 받아 냈다. 이로써 F 학점에서 한 걸음 멀어졌다.

    내 지도교수님이기도 한 착물화학 교수님은 흔한 꼰대 교수였기에 예의를 지적당하기 전에 마스크와 모자를 벗고 교수 연구실 문을 노크했다.

    “교수님, 결강 사유서 제출하러 왔습니다.”

    “오, 이채현이! 어제 왜 결석했나 했더니 큰일 치렀더구먼. 이제 취업 걱정은 없겠어?”

    껄껄 웃으신 교수님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자네가 세계 최초 그… 뭣이냐……. 게이머라며?”

    “…테이머요, 교수님.”

    제 인생 장르는 겜판이 아니라 현판입니다. 사실 테이머도 아니라고요. 미치겠네, 진짜.

    “기왕 세계 최초가 되었으니 억대 연봉 협상하고 대형 길드 들어가게. 그 적벽 말고 하나 더 있잖아.”

    결강 사유서를 건네받은 교수님이 덕담의 탈을 쓴 저주를 건넸다. 지금 저한테 주태윤 밑으로 들어가라는 소리입니까, 교수님?

    교수 연구실을 나와 다시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한 나는 일선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 중간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느껴졌다.

    “그러면 저 사람 D급에서 A급으로 오른 거야?”

    “와, 양심 봐. 나 같으면 자퇴하겠다. 학우들 지키지도 않고 도망갔으면서 등급 올랐다고 저렇게 뻔뻔하냐.”

    “내 룸메가 도서관 게이트 생존자인데 버리고 도망간 거 아니라는데? 그건 C급이 그랬고 저 사람은 계속 실드 유지했대.”

    다행히 그 수군거림은 나를 향한 게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옆자리 사람을 바라보니,

    “어?”

    학점의 은인이 있었다.

    도서관 던전 D급 헌터. 내가 관리자 권한으로 D급에서 A급으로 업그레이드해 준 그 헌터. 시험 보다가 뛰쳐나간 그 사람이 맞았다.

    그래도 그때보다 안색은 좋아 보이네. 그때는 진짜 삶의 의지를 잃은 표정이었는데.

    자리를 슬그머니 옮기려 했지만 교수님이 강의실로 들어오시는 바람에 그 시도는 아쉽게도 불발되었다.

    이 일선 강의 교수님은 다행히 출석을 안 부르시는 편이었다. 덕분에 나한테까지 시선이 쏠릴 일은 없었다.

    수업 PPT의 마지막 장이 넘어가고 조별 과제라는 부제가 붙은 페이지가 스크린에 떴다. 나를 비롯한 모두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이번 과제는 조별 과제입니다. 제가 임의로 조를 짰고요, 조별로 배정된 주제를 발표하면 됩니다. 발표 날짜는 이 순서로 가겠습니다. 수업 끝나기 10분 전에 시간 줄 테니 조별로 만남 한 번 가지시고요.”

    PPT에 뜬 내 학번과 주제, 발표 날짜를 매의 눈으로 훑었다. 주제는 무난한 대체에너지. 발표 순서는 세 번째.

    그리고 팀원은…….

    ‘아무리 봐도 망한 조별 과제다.’

    교수님이 주신 시간을 틈타 한곳에 모인 팀원들을 보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파릇파릇한 새내기 셋과 4학년인 나, 그리고 복학생인 D급, 아니 이제는 A급 헌터 유선한, 이렇게 다섯. 심지어 나랑 유선한은 타 과생.

    그래, 1학년 전공이니까 재수강하지 않는 한 1학년이 대부분이겠지. 분명 강의계획서에는 팀플이 있다는 소리가 없었는데.

    “그럼 저희 발표 주제는 ‘마석이 미래의 대체에너지가 될 수 있는가’, 어때요?”

    “그건 너무 최신 연구 주제라 관련 논문이 거의 없을 텐데. 안전하게 수소나 바이오매스로 가죠?”

    해맑게 의견을 내는 새내기의 말에 대꾸해 주며 볼을 긁적였다.

    대학 생활 4년. 경험이 이만큼 쌓이면 나도 모르게 미래를 내다보는 초능력이 생긴다.

    “에이, 논문 찾아보면 나오겠죠. 다른 교수님께서 요즘 뜨는 연구 주제라고 하셨는데.”

    이 학생은 국내 논문 학술지 사이트만 뒤지다가 논문이 없어서 자료조사를 못 했다고 선언하고 내가 해외 논문 사이트를 뒤져 논문을 해석하게 될 것이다.

    “마석 하나 주워 와서 저희가 실험해 보면 되지 않을까요? 아는 선배가 그러는데 예약하면 학교 실험실 빌릴 수 있대요!”

    실험에 쓰일 그 마석은 주워 오긴커녕 결국 헌터인 유선한이 게이트 노가다를 통해 얻어 오게 될 것이다.

    “PPT는 제가 할게요. 저 예쁜 템플릿 많아요.”

    아마 높은 확률로 내가 싹 전체적인 수정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럼 제가 발표 맡아도 될까요?”

    쏟아지는 질문은 저 발표자가 아닌 내가 답변하게 될 것이다.

    바야흐로 조별 과제 잔혹사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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