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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세상 참 좁다
초인종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두어 번 나더니 휴대폰이 울렸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이채, 너 설마 이제 일어난 거야?
“어, 그러니까 끊어…….”
전화를 끊고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다시 전화벨이 진동했다. 잠 좀 자자, 망할 백야. 핸드폰을 뒤집어 진동을 껐다. 문밖에서 흐릿하게 소리가 들렸다.
“야, 이채! 나 그냥 들어간다!”
아, 들어오든지. 귀를 막고 몸을 웅크리자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초록색 병들이 발에 채였는지 연신 깡,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로 다가온 백아현이 머리끝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확 걷어 냈다.
이불 위에 올려져 있던 휴대폰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친구야, 지금 오후 3시야. 아무리 주말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니야? 너 계속 이런 쓰레기 생활 패턴 유지하면 너희 어머니께 다 말씀드린다.”
“속 쓰려……. 나 물 좀…….”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내 할 말을 했다. 아현이가 냉장고에서 꺼내 건네준 생수를 까 벌컥벌컥 들이켰다. 으, 물에서 술맛 나.
그때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백야, 내 폰 좀.”
“넌 손이 없니?”
“상체 굽히면 게워 낼 거 같아…….”
울렁거리는 속에 급히 입을 틀어막으니 한숨을 푹푹 내쉰 아현이가 내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내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본 아현이가 잠시 멈칫하더니 회까닥 뒤집힌 눈으로 내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야, 이채! 너 주태윤이랑 사귀어? 미쳤어? 세상에 깔린 게 남잔데 왜 하필 골라도 그런 거랑 사귀어?”
“저기요, 흔들지 말아 주실―”
“이 언니는 반대다! 주태윤은 진짜 아니야! 반반한 낯짝에 넘어가지 마!”
“으웁!”
백야, 너 나한테 왜 이래.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하니 아현이가 후다닥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물을 다시 들이켜고 손등으로 입을 쓱 훔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뭔 개소리야? 술이 확 깨네.”
대체 뭘 봤길래 저런 개소리를? 다급히 아현이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아 드니 잠금화면에 뜬 메신저 알림창이 눈에 들어왔다.
[주태윤 - (이모티콘)]
엥, 주세글자 이름이 왜 내 신성한 휴대폰에 떠 있는 거지? 곧바로 비행기 모드를 켜고 채팅창에 들어갔다.
-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
친구 추가 / 차단하기
20XX년 4월 29일 금요일
[주태윤 - 잘 잤어요, 채현 씨?] 오후 7:30
[주태윤 - 제 번호 010-4XXX-7XXX이에요^^]
[주태윤 - 저 마음에 안 든다고 제 번호 SNS에 유출하시면 안 돼요ㅎ] 오후 7:31
[주태윤 - 설마 지금까지 자는 건 아니죠?] 오후 8:00
20XX년 4월 30일 토요일
[주태윤 - 채현 씨?]
[주태윤 - 제가 잘못했으니까 차단만 하지 말아 줘요ㅠㅠ] 오후 3:04
[주태윤 - (이모티콘)] 오후 3:05
맞다, 술 마시고 번호 줬지. 진짜 술이 웬수네.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과거의 나한테 쌍욕을 날렸다.
차단할까 고민하다가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친구 추가를 눌렀다. 비록 스토커에, 조빱에, 찰거머리지만 나중에 써먹을 때가 있겠지.
다시 와이파이를 켜고 답장을 보냈다.
[차단 안 했어요]
[지금 일어났고] 오후 3:07
[주태윤 - 하도 답장이 없어서 차단한 줄 알았어요☺] 오후 3:08
보내자마자 오는 즉답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 인간은 국내 2대 길드장이면서 폰만 붙들고 사나. 누가 스토커 아니랄까 봐.
[ㅇ] 오후 3:09
답장을 보내고 고개를 들자 팔짱 끼고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백아현이 보였다.
“진짜 아니라고. 내가 미쳤다고 스토커랑 사귀겠냐?”
“그런데 저 인간이 네 번호는 어떻게 알아? 설마 심부름센터……? 이 망할 새끼가 이제 하다 하다 뒷조사까지 해?”
당장이라도 주태윤을 죽이러 갈 것만 같은 아현이를 겨우 붙잡고 다급히 해명했다.
“내가! 내가 술 마시고 번호 줬어!”
“그러게 술 좀 작작 마시라고 했지! 스토커에게 번호를 넘기면 어떡해!”
등짝에 매서운 손길이 짝짝, 닿아 왔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 등을 문지르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왜 왔어? 같이 점심 먹자고?”
“오후 3시에 점심은 얼어 죽을. 엄마가 너랑 세인이에게 반찬 전해 주래서 왔다.”
아현이가 들고 온 쇼핑백에서 소고기 장조림과 양념게장이 정갈하게 들어 있는 반찬 통을 꺼냈다. X팸이 최대한의 사치인 자취생한테 일용할 양식을 주시다니, 아현이 어머님 최고.
“혹시 어머님께 사위가 여자여도 괜찮냐고 물어볼 생각 없니?”
“내가 싫어.”
쳇, 매정한 놈.
단칼에 잘라 내는 백아현을 향해 혀를 차며 냉장고에 반찬 통을 넣고 있자 한숨을 쉰 아현이가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소주병을 한곳에 정리하며 물었다.
“술은 왜 이렇게 마신 건데? 성적 때문은 아닐 거고.”
“왜 성적은 당연하게 제외하고 그래.”
“네 성적은 항상 그러잖아.”
“감사, 님 덕분에 2천 원 비싸졌네.”
발골을 하도 잘해서 내가 순살이 됐어. 어서 말하라는 무언의 압박에 못 이긴 척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아는 사람 이야기인데.”
‘내 이야기인데 모른 척하고 들어 줘’ 공식으로 운을 떼니 백아현의 입매가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아마 연애 상담을 생각하고 있겠지.
“그 사람이, 그러니까 A가 차원 이동해서 해츨링… 그러니까 새끼 드래곤이랑 마수를 주웠어.”
그런데 그거 아니야, 친구야.
차원 이동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아현이의 얼굴에서 기대감이 싹 사라졌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는 않겠다는 얼굴의 친구를 보며 꿋꿋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같이 살면서 정이 들었는데 A가 집으로, 그러니까 원래 차원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어. 어쩔 수 없이 둘을 두고 떠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거야.”
“아, 그렇구나.”
아현이가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나는 진지했다. 옆구리가 찢겨 나가도 눈 하나 깜박 안 하던 애가 내 앞에서 울었다고.
“그래서 A는 그 둘을 두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어. 어차피 마수랑 드래곤 고향은 그 차원이었으니까. 그럼 A는 둘을 버린 쓰레기인 걸까, 아니면 그건 정당한 선택이었을까?”
“…이채현.”
“엉?”
“아는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아는 소설 주인공 이야기라고 하지 그래? 또 무슨 소설에 과몰입한 거야?”
소설 같지? 그런데 내 이야기 맞아. 이 언니가 이세계에서 판타지 소설 하나 쓰고 왔다.
하지만 이미 아는 사람 이야기를 소설 내용이라고 땅땅 결론지은 아현이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궁예를 시작했다.
“댓글창에서 ‘A가 쓰레기다 vs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로 갈려서 싸우기라도 하던? 너 A 실드 치다가 쓰레기파에게 발렸지? 그래서 다시 반박 댓글 달려고 내 의견 물어보는 거지?”
“저기요, 먼저 대답 좀. A는 최선의 선택을 한 거지?”
“에휴, 저번에는 로판 후회남 재활용인가 뭔가로 댓글 싸움 붙어서 도와 달라고 징징거리더니 이젠 판소냐?”
그래, 내 죄가 깊다……. 하지만 그때 싸움 붙은 그 후회남 재활용파 독자님이 후회남을 재활용해야 하는 이유를 너무 논리적으로 설명하셔서 강경 쓰레기는 쓰레기통파인 내 논리가 달렸단 말이야.
결국 대답 듣는 걸 포기한 나는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꺼내고는 냉장고 문을 탁, 닫았다.
그때, 자취방의 초인종이 울렸다. 한숨을 쉬며 문을 벌컥 여니 잔뜩 흥분한 표정의 윤세인이 신발을 대충 벗어 던지고 방 안으로 후다닥 들어왔다.
“이채! 백야! 대박 사건!”
“뭔데?”
호들갑에 아현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래 놓고 별거 아닌 일이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센 말처럼 빅뉴스였다. 세인이가 휴대폰을 번쩍 들며 외쳤다.
“대규모 랭킹 변경 일어났어! 다들 랭킹 한 칸씩 밀렸다니까!”
그 말에 아현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정리하던 술병을 내팽개치고 휴대폰을 덥석 집어 든 백아현의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을 급히 두드렸다.
랭킹이랑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갓반인인 나는 오렌지주스 뚜껑을 따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엥, 어쩌다가?”
“뉴비가 랭킹 1위로 등극했거든. 오늘 관리국에서 검사 마치고 1층 로비에 스카우터들 쫙 깔렸는데 명함 한가득 받으면서 나가더라.”
“와, 판소 주인공 실사판이네.”
“얼굴도 잘생겼더라. 무슨 아이돌 연습생인 줄. 딱 덕후몰이 할 상이던데.”
그 정도면 설정 과다 아닌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제 귀찮은 일 많이 생기겠네. 원래 판소 주인공들은 사건에 매일 휘말리는 게 일상이잖아.
사진 없냐는 내 물음에 연예인도 아닌 일반인인데 무슨 사진이냐고 윤세인이 투덜거렸다. 내 손의 오렌지주스 병을 채 간 윤세인은 주스를 입에 털어 넣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나랑 같은 검사계던데 부러워 죽겠다. 누구는 S급으로 각성해서 억대 연봉 제안받고, 누구는 박봉 받으면서 온갖 잡일 다 하고.”
“공무원 때려치우고 이직해, 그럼.”
“그래도 역시 철밥통이 짱이지.”
그러면 대체 왜 부러워한 건데. 혀를 차며 아현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날카로운 목소리가 자취방을 울렸다.
“아이씨, 짜증 나. 애매하게 4위가 뭐야! 주태윤 전 랭킹이잖아! 안 그래도 헌터명도 비슷해서 짜증 나는데.”
뉴 랭킹 1위 때문에 한국 랭킹 3위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백아현이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내 침대 위로 던졌다. TOP 3에서 벗어난 것도 서러울 텐데 하필 아현이의 새로운 랭킹이 또 주태윤의 전 랭킹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한반도대장님의 랭킹도 내려갔겠구나. 며칠 전에 만났던 (전) 랭킹 1위를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서열1위포커스가 2위 자리에 있는 건 캡처해 줘야지. 완전 열림교회 닫힘 재질이잖아. 실실 웃으며 초록색 검색창에 ‘한국 헌터 랭킹’을 입력했다.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켜고 검색을 누르자 포털에 곧바로 랭킹 차트가 펼쳐졌다.
rank 1. 천우현 new!
rank 2. 서열1위포커스 ▼1
rank 3. 김도빈 ▼1
rank 4. 백야 ▼1
rank 5. 백호 ▼1
맨 위에 있는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에 입에 머금고 있던 오렌지주스를 주르륵 내뱉었다.
댁이 왜 여기서 나와……?
우현이라는 이름 자체는 흔하지만 흔치 않은 ‘천’이라는 성까지 같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다급하게 세인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센, 그 랭킹 1위라는 사람 혹시 곱슬머리야?”
“…약간?”
“키 크고 얼굴 곱상하고?”
“어, 맞아.”
“혹시 왼쪽 눈 밑에 눈물점 있어?”
“어느 쪽 눈인지는 모르겠는데 있긴 있었어.”
게다가 윤세인이 자기랑 같은 검사계라고 했었지. 새로운 랭킹 1위는 내가 아는 그 천우현이 확실하다.
대체 내가 떨어진 차원은 무슨 차원이기에 그곳에 떨어진 두 평범했던 일반인이 한 명은 초월자, 한 명은 단번에 랭킹 1위를 차지한 S급이 된 거지.
서른 번이나 회귀했다고 털어놓으며 처연하게 미소 짓던 용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현 씨, 내 생각보다 더 굴렀구나…….
“이채, 아는 사람이야?”
아는 사람이지. 비록 이 세계에서는 인연이 닿지 않았지만.
우리 둘 사이를 굳이 정의 내리자면 마왕과 용사. 타 차원에서 만난 유일한 고향 사람. 하지만 내가 지금 밟고 있는 한국 땅에서 두 분은 어디에서 만났냐는 물음이 들어온다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사이.
나는 여전히 당신을 기억하는데 당신은 나를 아직 기억할까? 나처럼 그곳에서의 일을 애써 잊으려 하다가 결국 다시 마주했을까.
내 표정이 감성으로 흐려지자 눈을 가느다랗게 뜬 윤세인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설마… 전 남친?”
“일단 남친이 있었는지 물어보는 게 먼저 아니냐? 그리고 그런 사이 아니고 잠깐 아는 사이였어.”
호기심 대마왕 윤세인이 더 궁금해하기 전에 인기글 맨 위에 뜬 소식을 큰 소리로 읽었다.
“야, 포커스가 청와대 청원 올렸다는데?”
엥, 뭐라고? 이제는 2위로 내려간 서열1위포커스가 청원을 올렸다고? 그런데 청원 익명 아니었던가? 청원 올린 사람이 포커스인지는 어떻게 알아?
세인이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그냥 읽은 글 제목은 내 호기심마저 자극했다.
후다닥 다가와 내 휴대폰 화면 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는 세인이와 아현이가 편히 보게끔 휴대폰 화면을 멀찍이 떨어뜨리고는 급히 게시글의 링크를 타고 들어갔다.
- 청원 진행 중 -
헌터명 1회 변경권 도입을 청원합니다.
참여 인원: [11,421]
카테고리: 인권/성평등 청원 시작 20XX-04-30 청원 마감 20XX-05-30
청원인: navxr-***
현재 대한민국은 관리국 소속을 제외하고는 헌터 등록 당시 작성한 헌터명을 바꿀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각성자 관리국 헌터 등록 창구에서 그 사실을 정확히 명시해 준다고 하지만 게이트 사태 초기에 각성했던 헌터들은 그 사실을 안내받지 못한 채 익명성 보장이라는 말만 듣고 서류를 작성하는 자리에서 곧바로 헌터명란에 기재할 본인의 헌터명을 지어야 했습니다.
등록을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과 담당 직원의 짜증 및 재촉에 낀 상태에서 제대로 된 헌터명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헌터 커뮤니티에서 조사한 통계를 보면 게이트 사태 초기에 등록한 헌터들의 헌터명은 본인이 하는 게임 혹은 인터넷 커뮤 닉네임이 55%로 제일 높고, 별명이 21%, 아무렇게나 지었다가 11%, 본명이 9%입니다. 미리 생각해 두고 원했던 헌터명으로 지은 이들은 겨우 4% 남짓이라는 뜻입니다.
그 때문에 초기 헌터들은 헌터명 하나 때문에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 대한민국의 전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서열1위포커스가 있죠.
게다가 2위로 내려갔음에도 서열‘1위’포커스라는 헌터명을 계속해서 사용해야 하는 그 헌터는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온라인 게임도 닉첸권을 무료 1회 제공하거나 유료로 판매하고 평생 쓸 이름 역시 법적 절차를 거쳐 바꿀 수 있는데, 헌터명에만 예외를 두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헌터명 1회 변경권 도입을 강력히 청구하는 바입니다.
청원 동의 11,421명
kakxx-***
동의합니다. 유니콘항문전도사 같은 헌터명은 좀 에바;; 신청할 때 좀 말려 주지;;;
navxr-***
동의합니다 서열1위포커스만 특별히 서열2위포커스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줍시다
twixxer-***
밑 분 한반도대장님이라뇨 이제는 한반도부대장님이죠
facebxxk-***
한반도대장님 여기서 뭐 하세요?
navxr-***
어라??? 왜 나는 익명인데도 작성자 헌터명이 보이는 거 같지????
…….
“누가 봐도 포커스네.”
“정말 글에 절절함이 묻어 나온다.”
“유니콘항문전도사는 뭔데.”
이제 대국민 콩라인이 되어 버린 한반도부대장 님에게 속으로 심심한 응원을 건넸다. 헌터명 꼭 서열2위포커스로 바꾸세요, 파이팅!
* * *
친구들이 떠나고 썰렁해진 자취방을 돌아보았다.
애쉬가 며칠 있었다고 그새 텅 빈 자취방이 유독 쌀쌀…하지는 않고 지저분했다. 하루 청소 안 했다고 집이 개판이구나.
침대에 널브러져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잠시간 시선을 주다가 곧 신경을 껐다. 애쉬겠지, 뭐. 이제 삐친 건 다 풀렸으려나?
“뭐야, 진짜 이렇게 쉽게 넘어오기가 가능하잖아?”
낯선 목소리에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고 다시 마법진 쪽을 보았다.
마법진 앞에는 애쉬가 아닌 낯선 흑발남이 서 있었다. 붉은 눈을 보자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저놈, 마족이다.
아는 놈인가 싶어 기억을 뒤져 봐도 내 부하 중 저런 얼굴은 없었다. 애초에 흑발도 세이블밖에 없었다.
내 자취방을 둘러보던 놈의 눈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흑발남이 입꼬리를 끌어당겨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보네, 1마계 마왕. 아예 인간이 되기로 마음먹었나 봐?”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단검을 쥐고 내게로 달려든 놈이 손잡이를 위로 움켜쥔 채 사정없이 휘둘렀다. 내 심장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검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고 놈의 상체를 힘껏 발로 차 내게서 떨어뜨렸다. 놈이 명치를 감싸며 바닥을 굴렀다.
다시 내게로 달려드는 놈의 발목을 그림자로 움켜잡아 패대기치자 단검이 날아왔다. 아무래도 저 녀석의 능력인 듯 끊임없이 날아오는 단검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
『스킬 ‘염력(SS)’이 발동됩니다.』
그러자 내 쪽으로 향하던 단검들이 모조리 방향을 틀어 놈의 발 앞에 빠른 속도로 날아가 꽂혔다. 엉금엉금 뒷걸음질하는 놈을 지켜보다가 놈이 다시 단검을 날리자 방향을 되돌려 녀석의 어깨에 꽂히게 했다.
바닥까지 깊숙이 관통해 녀석을 고정하고 있는 단검을 발로 꾹 눌렀다. 더욱 깊이 파고드는 단검에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렸다.
“우리가 언제 봤던가?”
고통에도 녀석이 매섭게 나를 노려보았다. 마음에 썩 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처음의 여유가 사라진 거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봤지. 그쪽은 절대 기억 못 하겠지만.”
“순순히 대답할 생각은 없나 보군.”
내가 이래서 마계로 가기가 싫어. 뭐, 여기도 아예 이성으로만 이루어진 사회는 아니지만 마계는 힘으로 찍어 누르지 않으면 당최 말을 들어 먹지를 않잖아.
한숨을 쉰 나는 놈의 어깨에 박혀 있는 단검을 소멸시켰다.
저를 제압하는 게 없어지자 바로 다시 덤벼들려는 놈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벽으로 끌고 갔다.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을 줘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내 한쪽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스킬 ‘방음(D)’을 실행합니다.』
“네 말에서 딱 세 군데만 정정해 주지. 첫째, 나는 1마계 마왕이 아니라 마계 전체의 마왕이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벽에 놈의 머리를 세게 박았다. 이마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와 벽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둘째, 나는 인간이 되기로 마음먹은 게 아니고 원래 인간이고.”
다시 머리를 처박았다. 놈이 비명을 지르며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 버둥거림이 꽤 성가셔서 발로 놈의 한쪽 발목을 세게 밟아 으스러뜨렸다.
“셋째, 너는 내게 반말 찍찍 할 위치가 아니다.”
마지막 말에는 더욱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벽이 울릴 정도로 머리를 처박은 뒤 미련 없이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놈이 이마를 잡고 뒹굴며 헐떡거렸다.
“배후가 누구지?”
녀석이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앙다물었다. 스멀스멀 일어난 마기가 놈의 몸을 무겁게 짓누르며 살을 썩혔다.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모습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다시 묻는다. 누가 너를 보냈지?”
숨을 몰아쉬던 놈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중간중간 흘리며 대답했다.
“배후? 배후가 큭, 어디 있어. 그쪽을 죽이고 싶어 하는 놈들이, 헉, 마계에 수두룩한데.”
“하아,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내 평화로운 일상을 그렇게 부숴 놓고 싶어서 안달일까. 500년 동안 굴렀으면 됐지, 이제는 편안하게 좀 살자.”
내 한탄에 질 낮은 웃음을 흘리며 놈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손가락질했다.
“당신에게 평화가 가당키나 해? 살육에 미쳐 오랜 기간 마계에 유지되어 오던 평화를 깨뜨린 인간 출신 마왕 주제에.”
결국 꼭 스킬을 쓰게 만드네. 한숨을 쉬며 놈과 눈을 마주치자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로 씩 웃은 놈이 무언가를 깨물었다.
혀 아래에 독약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단 몇 초 만에 싸늘하게 식은 놈의 시체를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세이블을 소환했다.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인간화 모습으로 나타난 세이블이 엉망이 된 방과 바닥에 꽂혀 있는 단검들, 피로 얼룩덜룩한 벽, 그리고 내 발밑에 있는 시체를 발견하고 당황한 기색을 띠었다. 시체를 가리키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세이블, 저거 처리하고 내게 반감 가진 나머지 마계들 잔당 싹 잡아 죽여라.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했기에 이것들이 내 집으로 기어들어 와?”
“폐하가 이 세계로 오시기 직전 전 7마계 마왕 휘하의 잔당들이 몸을 숨겼다고 보고를 올리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왜 이것들이 돌아다니고 있냐는 내 눈초리에 세이블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내버려 두라 하셔서 명대로 따랐습니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차분히 생각해 보니까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분명히 집 가니까 노상관이라는 마인드였겠지.
과거의 나, 대체 왜 그랬냐. 울 엄마가 내게 항상 하는 잔소리가 흐릿하게 귓가에 울렸다.
“제발 끝마무리까지 확실히 좀 해라! 일은 다 해 놓고 마무리를 안 하면 어떡해? 이러니까 집이 개판이지!”
청소와 설거지에만 국한되는 말이 아니었구나. 인생을 꿰뚫는 충고였구나. 엄마 말 잘 들을걸.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 * *
세이블을 다시 돌려보내고 리와인드로 방을 원 상태로 돌렸다. 아무런 흔적 없이 깨끗해진 방을 한 번 둘러보다가 마법진에 시선이 닿았다.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갑자기 소환당한 터라 어리둥절해하던 표정의 체이스터가 나를 발견하고는 해맑은 얼굴로 치대 왔다.
“폐하, 혹시 전에 먹은 과자 더 있어요? 완전 제 입맛에 딱이던데 자비를 베푸셔서 하나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네가 다 먹어서 없다. 먹고 싶으면 네가 세 번 헛걸음질하고 사 와라.”
오자마자 인사도 생략하고 마카롱 타령을 하는 녀석의 엉덩이를 가볍게 걷어차 주었다. 심해까지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이 맛에 멍멍이 키우나. 그래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계속할 기분은 아니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 마법진이 혹시…….”
“저 그냥 보낼 때 제발 역소환해 주세요, 폐하. 저 마법진으로 보내시지 말고요. 앞으로는 꼭 물어보고 먹을게요.”
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체이스터가 아X사이더 뺨치는 속도로 대답했다. 한 소리 할까 하다가 절박한 표정에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데?”
“모르셨어요……? 저는 폐하께서 알고 일부러 절 저 마법진으로 던지신 줄 알았는데.”
체이스터의 대답에 내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집까지 돌아가는 길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한탄하며 제 귀환길 여정을 늘어놓던 체이스터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체이스터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다시 마계로 역소환시켰다.
다시 고요해진 자취방 바닥에 앉아 방금 들은 대답을 곱씹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할 거다.
“애쉬 님 저택이요. 저 거기에서 제 영지까지 돌아가느라 진짜 고생 많이 했어요.”
내가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애쉬의 저택에 있는 마법진으로 내가 정복한 마계의 잔당들이 넘어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만약 애쉬가 내 옆에 있었다면 의심은 이렇게까지 깊지 않았겠지. 애쉬의 저택에 숨어 들어온 놈이 우연히 마법진을 발견하고 넘어왔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 모습이 우스워 자조했다. 마계에서의 삶의 대부분이 배신당한 기억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잠시간 평화를 누렸다고 이제 와서 배신감이 생긴다니.
애쉬를 소환하려고 스킬을 실행하다가 덜덜 떨리는 손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아직 나는 진실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나 보다. 아니면 내가 애쉬에게 내 생각보다 더 마음을 주었거나.
* * *
소환해서 털어 볼까, 말 한번 들어 볼까 고민하다가 벌써 나흘이 지나갔다.
친구들의 연락까지 안 받고 자취방에 틀어박힌 지 닷새째, 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퇴근하자마자 내 자취방에 들이닥쳤다.
“아, 진짜! A가 뭐? 드래곤 두고 갔다고? 대답해 줄 테니까 얼른 다시 말해!”
“야, 이채! 그 랭킹 1위 진짜 우리에게 말 안 하고 사귄 네 전 남친 아니야? 안 좋게 헤어졌는데 잘되는 꼴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던가……. 설마 그 새끼가 돈 안 갚고 튀었어? 바람피웠어? 네X트 판에 글 올려 줘?”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슬그머니 걷고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백야. 그리고 내가 전 남친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윤세인아. 그 사람 때문도 아니라고.”
“그러면 왜 이러는데?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내가 정말 의지하고 아꼈던 녀석이 나를 배신한 거 같아. 그런데 물어보기가 무서워. 만약 맞다고 긍정하면 내가 그 녀석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하니까.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해 봤자 너희들은 모르잖아. 내게 해답도 못 주잖아. 나만 뚝 다른 세계에 떨어져 버렸으니.
결국 내 입에서 힘없이 흘러나온 말은 조악한 변명이었다.
“…취업 생각하니까 우울해서. 이번 학년 끝나면 졸업인데 스펙도 없고 일자리도 없어. 요즘 취업난이라는데 나 어쩌냐.”
그리고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은 순간 정말로 더 우울해졌다.
그러고 보니 나 뭐로 벌어먹고 살지? 타 차원에서 일곱 마계를 통일한 대업을 세운 마왕도 헬조선에서는 한낱 예비 취준생일 뿐이었다.
마계 통일은 내가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온 이상 이력서에 한 줄 적을 수도 없는 쓸모없는 업적이었다. 게다가 반강제로 떠맡은 시스템 관리자 자리는 바지사장이나 다름없었고 월급도 안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전공도 취업 어려운 순수과학에 스펙 하나 쌓아 놓지 않았던 난 대학원 말고는 미래가 없었다. 학사 논문조차도 제대로 못 쓰는 나보고 석사 논문을 쓰라고?
정말 미친 척하고 A급이라 속이고 헌터 일이라도 뛰어들까.
갑자기 훅 다가온 현실 때문에 한층 더 우중충해진 분위기에 먼저 취업(그것도 전문직)에 성공한 두 친구가 급히 나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웠다.
“나가자, 이채!”
“맛있는 거 사 줄게. 원래 우울할수록 바깥 공기를 쐐야 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머리를 긁적이며 못 이기는 척 그동안 먹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사 먹지 못했던 메뉴를 말했다.
“명란 크림파스타.”
“그래, 먹으러 가자.”
“거기에 시금치 피자도.”
“그래, 그래. 우리 채현이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대충 씻고 후드티를 꾸물꾸물 입은 나는 한껏 꾸민 백아현의 옆에 슬그머니 윤세인을 밀어 넣고 하품을 쩍쩍하며 오랜만에 자취방 원룸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봄이 한창이건만 요 며칠 이상하게 날씨가 쌀쌀했다. 그래서 그런지 벚꽃은 핀 만큼이나 빠르게 졌다.
유일하게 자차 보유 중인 아현이의 차를 타고 연남동에 도착했다. 공영 주차장에 주차를 마치고 휴대폰 지도를 보며 미리 찾아 놓은 맛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던 도중,
“오빠, 내가 택시 잡고 있을게!”
카페의 문이 열리더니 한 여자가 해맑게 외치며 걸어 나왔다. 마침 이쪽으로 오는 빈 차 전광판이 켜진 택시를 발견한 여자의 걸음은 이제 숫제 뜀박질로 변했다.
“어어, 택시! 잠시만요!”
앞을 보지 않고 택시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내 쪽으로 점점 가까워져 오는 여자를 보며 슬쩍 몸을 피하려 했다. 그래, 내 후드티 모자를 잡아끄는 세인이의 손길만 아니었다면.
“이채, 앞!”
“악!”
덕분에 스텝이 꼬여 몸을 피할 타이밍이 어긋나 제대로 부딪혔다.
축축함과 물컹함이 느껴져 슬쩍 고개를 숙이니 프라푸치노의 휘핑크림과 음료가 고스란히 내 후드티에 묻어 있었다. 엉망이 되어 버린 후드티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테이크아웃 컵 윗부분은 어디에다가 버리고 온 걸까. 한숨을 푹 내쉬며 음료가 반 넘게 없어진 테이크아웃 컵을 쥐고 주저앉아 있는 잔뜩 당황한 표정의 여자를 살폈다.
스무 살이나 스물한 살쯤 됐을까. 아직 어려 보이는데 단지 실수에 뭐라 하기도 그렇고, 심지어 저쪽은 넘어지기까지 했으니.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자.
“괜찮으세요?”
덤덤한 내 물음에 울상인 채로 안절부절못하던 여자가 고개를 파득 들었다.
잠시간 여자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흠칫한 여자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바로 몸을 일으켜 카페 쪽으로 달려갔다.
설마 지금 세탁비 내주기 싫어서 튀는 건가……?
“쟤, 뭐야? 미친 거 아니야? 개념을 어디에 두고 다닌대?”
“그러게, 내가 사과만 제대로 했으면 세탁비는 안 받으려 했는데.”
날카롭게 쏟아 내는 아현이의 말을 심드렁하게 받아친 나는 삐딱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여자가 서 있는 카페 입구로 향했다.
여자는 신기하게도 남자 뒤에 숨은 게 아니라 남자를 필사적으로 카페 안으로 떠밀고 있었다. 혹시 저게 말로만 듣던 오징어 지킴이?
“오빠, 절대 나오지 마! 알겠지?”
“세연아, 무슨 일인데 그래? 오빠한테 말을 해 줘야지 알지.”
그 순간 내 귀에 스치는 부드러운 중저음에 걸음을 멈칫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감상에 젖는 어스름한 새벽에 한 번씩 생각나던, 내가 결코 잊지 못할 목소리.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그는 서울에서 거주한다고 했다. 그래서 다정하게 말을 붙여 오던 목소리가 떠오를 때마다 새벽 감성에 젖어 한 번씩 상상하고는 했다.
홍대에서, 신촌에서, 명동 혹은 강남에서, 서울의 번화가 중 한 군데에서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새에 섞여 우연히 만난 줄도 모르게 스쳐 지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그러다가 둘 중 하나가 상대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리고 급히 달려와서 숨을 헐떡거리며 붙잡는 거지. 멜로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처럼, 로맨스 영화의 하이라이트처럼.
하지만 아쉽게도 현실은 영화도, 드라마도 아니었다.
‘이렇게 프라푸치노 휘핑크림과 음료를 옷에 덕지덕지 묻히고 이런 불편한 상황에서 마주할지 누가 알았겠냐고.’
뜻밖의 상황에 내가 멈춰 서서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있자 뭐 하냐고 나를 툭툭, 치던 아현이가 대신 총대 메고 나섰다.
“저기요, 그쪽 일행은 사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그쪽이 나와서 직접 봐 보세요. 그쪽 일행이 지금 제 친구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니야, 오빠! 진짜 별거 아니야! 그냥 음료 엎질렀어. 내가 해결할 수 있어.”
“왜 제 친구 옷이라는 단어는 쏙 빼고 말하세요? 진짜 어이가 없네. 그리고 해결할 수 있다는 사람이 도망은 왜 갔는데요?”
아현이의 날 선 말에 저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던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앞으로 나온 그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정중한 사과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제 동생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세탁비를 드리고 싶은데 제가 당장 현금이 없어서… 혹시 제 연락처라도 받아 가시겠어요? 연락 주시면 계좌로 돈 보내 드리겠습니다.”
“저 말고 제 친구에게 주셔야죠.”
그 말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살짝 웨이브 진 반 곱슬머리와 왼쪽 눈 밑의 눈물점,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짙은 눈매, 아이돌 지망생이라 해도 믿을 만큼 곱상한 얼굴이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이 세계로 돌아온 이래로 가끔 근황이 궁금했고 아주 가끔 그리웠던 얼굴이.
“…채현 씨?”
천우현의 입에서 조심스럽게 나온 내 이름에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도 돌아온 지 2년 만에 만나다니, 세상 참 좁긴 좁구나.
“…저 사람 새로운 S급 아니야? 랭킹 1위?”
천우현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던 세인이가 옆에서 다급히 속삭였다.
‘전 남친 아니라며.’
입을 벙긋거리는 세인이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짜 전 남친 아니라니까.
“…오빠, 아는 사람이야? 언제부터……?”
여자, 아니 천우현의 여동생이 제 오빠의 팔을 꼭 잡고는 흔들며 물었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에 내가 더 당황했다. 내가 너희 오빠랑 아는 사이면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하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뒤늦게 엉망이 되어 버린 내 옷을 발견한 천우현이 급히 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잠깐만요, 닦을 만한 게…….”
천우현이 내게 물티슈를 통째로 내밀고는 죄송하다며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교회 스티커가 큼직하게 붙어 있는 물티슈를 내 손에서 가져간 세인이가 내 옷에 묻은 휘핑크림과 음료를 쓱쓱 닦아 주었다.
우리 둘만 있다면 몰라도 옆에 친구들과 여동생을 달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재회의 감동을 곱씹긴커녕 인사와 안부를 묻는 것조차 어려웠다.
“일단 제 번호 드리겠―”
“아니야, 오빠! 내가 드릴게. 오빠는 가만히 있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서운 속도로 달려와서 천우현을 향해 내민 핸드폰을 낚아채 간 천세연이 제 번호를 꾹꾹 입력하고는 다시 내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설마 자기 오빠 번호를 다른 사람에게 주기 싫어서 이러는 거야? 이게 말로만 듣던 브라콤인가.
원래 남매 사이는 윤세인과 그 오빠처럼 눈만 마주쳐도 욕 박는 사이 아니었어? 밤늦게 야식 먹을 때만 연합하는 사이 아니었냐고.
“이 번호로 연락하시면 돼요.”
핸드폰을 받아 번호를 확인했다. 심지어 이름도 이미 자기가 입력해 놨다.
[세탁비]
결코 자기 이름을 알려 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느껴지는 명칭이었다. 하지만 난 세탁비의 이름을 아주 자알 알고 있었다.
천우현이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나조차 그 여동생에게 내적 친밀감을 쌓을 정도로 자기 여동생 자랑을 얼마나 했는데.
자기도 힘들 텐데 그 흔한 투정 한 번 안 부리고 편식도 안 하고 착하고 공부도 잘하고 교우 관계도 원만하고 예의도 바르고 어쩌고저쩌고.
그런데 그런 느이 오빠를 한순간에 콩깍지 낀 거짓말쟁이로 만들면 쓰니, 세연아.
그리고 쓰윽, 다시 내 손에서 휴대폰이 빠져나갔다.
“오빠!”
제 동생의 다급함과 억울함이 가득 담긴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휴대폰 번호를 입력한 천우현이 내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세탁비는 세탁비고 이건 네 잘못인데 사과는 드려야지, 세연아.”
“…죄송합니다.”
엄한 목소리에 천세연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내게 사과했다. 동생바보 티를 팍팍 내서 여동생에겐 한없이 무른 오빠인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엄한 구석도 있구나.
‘연락해요.’
입 모양으로 동생 모르게 말을 전달한 천우현이 특유의 눈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 웃음에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천 남매와 헤어지고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물티슈로 끈적이는 부분을 다시 한번 닦았다. 빨간색 후드티는 이미 하얀 크림 자국과 갈색 음료 자국으로 얼룩이 져 엉망이었다.
세탁소에 맡기긴 귀찮으니까 그냥 적당한 때에 리와인드 걸어서 얼룩 자국 지워야겠다.
“얼른 문자 넣어 봐. 그런 애들은 꼭 나중에 자기 머릿속에서 사라지면 오리발 내밀거나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니까.”
아현이의 재촉에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집어 들자마자 이미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세탁비 - 계좌번호 주세요] 오후 1:30
[X협 3XX-1XXX-4XXX-8X 이채현] 오후 1:31
내 계좌번호를 보내고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세탁비 - 만 원 입금 완료했어요] 오후 1:34
[세탁비 - 입금 확인했으면 제 번호 지워 주세요]
[세탁비 - 문자 내역도요] 오후 1:35
[세탁비 - 아 맞다 우리 오빠 번호도 지워 주시고요] 오후 1:36
오, 빠르네. 나랑 엮이는 게 정말로 싫은가 본데?
그런데 얘, 나랑 언제 본 적 있던가. 나보다 두 살 어리던데 설마 같은 대학 다니나? 조별 과제라도 나랑 같이 한 거? 난 딱히 팀플 할 때 원망 살 짓은 한 적 없는데?
“별걱정을 다 하네. 누가 자기 핸드폰 번호 판대? 주태윤 번호도 아니고 일반인 번호 팔아서 뭐 해? 그리고 자기가 무슨 주말드라마 시누이야? 번호를 준 건 네 오빠예요. 내가 뜯어 간 게 아니라.”
천세연의 번호와 문자 내역을 삭제하며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애인인 줄 알았더니 여동생이었어? 태도만 보면 완전 의부증 걸린 애인이던데. 야, 센. 너랑 너희 오빠도 저래?”
남동생과 언니만 있는 아현이가 코웃음 치며 메뉴판을 훑느라 바쁜 세인이에게 물었다.
“우웩, 상상만 해도 토할 뻔. 엄마 아들이랑 어쩌다 시선 마주치는 것도 끔찍한데 어떻게 그러냐? 저 남매가 특이한 거지.”
주문서에 메뉴를 적어 내리며 세인이가 표정을 찡그렸다. 아현이가 내게로 시선을 쓱 돌렸지만 외동인 이쪽은 해 줄 말이 없었다.
명란 크림파스타와 시금치 피자, 게살 새우 필라프, 스테이크 샐러드, 베리에이드, 청포도에이드, 자몽에이드까지 야무지게 주문을 마친 윤세인은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떠나자마자 추궁을 시작했다.
“아니, 너 진짜 랭1위랑 어떻게 아는 사인데? 그래, 아까 보니까 전 남친은 아닌 것 같고……. 전 썸남?”
썸은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전 의지처……? 설명하기에는 길고 귀찮은 관계로 깔끔하게 한마디로 우리 둘 사이를 설명했다.
“여행 가서 만났어.”
여행지는 타 차원의 마계와 제국 경계의 숲이라고 있어. 사람 잡아먹는 마물이 득실거려서 관광지라고 하기에는 아주 많이 그렇지만.
그러고 보니 S급이 무슨 고라니야? 다른 곳에서는 멸종위기종일 정도로 희귀한데 왜 내 주위에만 득실거려.
친구도 S급, 친구 상사도 S급, 옆집 언니도 S급, 윗집도 S급, 스토커도 S급, 카페 옆자리 사람도 S급, 타 차원에서 만난 사람도 S급.
이쯤 되면 하하버스가 아니라 스급버스다.
식전 빵과 에이드 세 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자연스럽게 베리에이드를 잡아끌며 식전 빵으로 손을 뻗었다. 빵을 집어 입에 물기가 무섭게 휴대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오랜만이에요 우현 씨]
[돌아와서 잘 지냈어요?] 오후 1:31
내가 보내 놓았던 문자의 답장이 도착해 있었다.
[천우현 - 보고 싶었어요] 오후 1:40
뭐야, 이 남자 미쳤나 봐. 완전 훅 들어오네? 이거 혹시 그린 라이트?
[천우현 - 그그채현씨가생각하시는그런뜻이아니라채현씨도무사히돌아가셨나궁금하고다시돌아와서는어떻게지내시는지근황도궁금해서그런의미로] 오후 1:41
숨도 안 쉬고 보낸 듯한 문자에 푸른 불이 곧바로 꺼졌다. 사람을 막 들었다 놨다 하네.
[저도요] 오후 1:47
[천우현 - 예?] 오후 1:47
체감상 1초 만에 오는 즉답에 키득거리며 답장을 보냈다.
[보고 싶었다고요]
[우현 씨랑 똑같은 의미로] 오후 1:48
머쓱하게 머리를 긁는 이모티콘과 함께 식사 맛있게 하시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아, 귀여워. 히죽 웃고 있으니 우리 앞에서 썸 타지 말고 밥이나 먹으라고 윤세인이 내 입에 빵을 처넣었다.
빵이 참 달았다.
* * *
식사 후 홍대에서 새 옷을 사고 놀다가 저녁 식사 겸 음주를 위해 감자탕 집으로 향했다. 점심은 양식이었으니까 저녁은 당연히 얼큰한 탕이지.
中짜리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시키고 한참을 부어라 마셔라 하자 슬슬 술기운이 올라왔다. 어느새 소주병은 다섯 병으로 늘어나 있었다.
“너 요즘 수상한 거 알지? 비밀 만들지 마, 이채. 섭섭하잖아.”
아현이가 술기운이 올라 붉어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옆에서 세인이가 고개를 까딱였다.
아직 말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비밀이라 그래. 내가 말할 준비가 된다면 언젠간 꼭 너희들에게 말…….
- 속보입니다. 미국의 S급 헌터 사무엘 르웬 씨가 자신이 타 차원에서 귀환하였다고 밝혔습니다.
그때, 식당의 텔레비전에서 뉴스 속보가 들려왔다. 떠들썩하던 식당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 그가 타 차원에 갔다 왔다는 증거 물품으로 내놓은 세공된 보석은 지구에서 생성될 수가 없는 성분과 현 기술로는 불가능한 세공 기술로 이루어져 있다고 NASA가 공식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사무엘 르웬 헌터는 국제 사회에서 공식적인 첫 번째 귀환자로 등극했습니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나뿐만 아니라 식당에 있는 손님 대부분이 열심히 고기를 뜯던 손을 멈추고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화면이 전환되더니 아나운서 대신 금발 벽안 미국인의 인터뷰 장면이 나왔다.
[내가 돌아온 시점은 게이트 사태가 터지기 전이었고 그곳의 10년은 이곳의 1년이었다. 내가 있던 차원의 몬스터와 똑같은 몬스터를 게이트 안에서 보았다. 그래서 이 게이트 사태에는 내가 돌아온 책임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채, 괜찮아? 무슨 손을 그렇게 떨어?”
무슨 저런 양심적인 새끼가 다 있지? 떨리는 손을 꾹 내리누르며 이를 갈았다. 저놈의 주장이 뇌피셜이라면 이쪽은 관리자1이 게이트 사태에 가장 크게 기여한 원인이라고 공인한 오피셜이었다.
[나는 던전 관리 기구(Dungeon Management Organization) 설립을 계획 중이며 이 국제기구가 무사히 설립될 수 있도록 세계의 협조를 바란다.]
- 르웬 헌터의 공식 발표는 1년 반 전에 일어나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게이트 사태의 원인을 밝힐 수 있다는 기대를 안겨 주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뉴스는 다음 국제 소식으로 넘어갔지만 식당 안 사람들은 여전히 방금 뉴스에 대해 떠들었다.
“와, 아무리 세계가 뒤집어졌다지만 이제 저런 컨셉충 놈들 말도 진지하게 믿어 주네. 저런 놈 인터뷰를 국제 언론까지 태워 주고. 하여간 말세다, 말세.”
“귀환자 나왔으니까 이제 회귀자 나올 타이밍이네. 회귀자 왜 등장 안 하냐?”
“그럼 지금 저 사람 때문에 게이트 사태가 터진 거라고? 혹시 저 사람 말고 귀환자가 더 있나?”
“그런데 혹시 저 사람 죽으면 게이트 사라지나? 아, 그냥 궁금해서 해 본 소리야. 사이코패스 같다는 소리가 왜 나와.”
아, 갑자기 술이 막 당긴다. 요즘 들어 맨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는 일이 한꺼번에 닥쳐오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저 사람 때문에 게이트 생겼으면 당연히 책임을 져야… 야, 이채현! 갑자기 무슨 병나발을 불고 난리야!”
소주병째 들고 들이켜며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정확히 알겠다.
언젠간 말하긴 개뿔.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다, 이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