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5. 일은 꼭 시험 기간에 터지더라 (2) (5/33)

목차

5. 일은 꼭 시험 기간에 터지더라 (2)

6. 세상 참 좁다

7. 세상에 나쁜 고양이는 없다

8. 이것이 K-헌터국이다

9. 나를 싫어하는 그대에게

10. 헌터 연수원 (1)

5. 일은 꼭 시험 기간에 터지더라 (2)

출근해야 하는 불쌍한 직장인 둘을 보내고 시험 끝난 대딩은 술에 전 몸을 이끌고 비틀비틀 자취방으로 향했다.

“나 왔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더니 나를 반긴 건 휑한 바람뿐이었다. 침대로 향하자 볼록한 이불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얌마, 너는 네 폐하가 왔는데 일어나 보지도 않고!”

이불을 확 젖히자 내 상어 인형을 꼭 껴안은 애쉬가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부드러운 은발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어릴 적에 투정을 부릴 것이지 왜 다 커서 그래.”

물론 알고 있다. 지금이야 여유가 생겨서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거지, 그때의 나에겐 그 조그마한 투정도 큰 부담이었을 것임을.

내 한 몸 건사하고 정신 줄 잡는 것마저 힘들었는데, 그때의 끔찍한 기억마저 추억으로 미화되는 걸 보면 역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인가 싶다.

쓰다듬던 머리에서 손을 떼자 어느새 잠에서 깼는지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애쉬가 배시시 웃었다.

“전에도 말했잖아요. 저는 폐하가 힘들어하시는 걸 용납 못 한다니까요. 지금은 폐하가 제 투정을 받아 줄 여유가 생기셨잖아요?”

미안한데 나는 재수강이 더 힘들어. 네가 두 번 더 투정 부렸다가는 대학교 5학년 경험하게 생겼다고.

* * *

저녁 6시에 맞춰 놓은 알람 소리가 시끄럽게 방 안을 울렸다. 애쉬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비비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소환을 실행했다.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먼저 나타난 건 안드라스였다. 의자에 앉은 자세로 책을 든 안드라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균형을 잃고 장렬하게 나자빠졌다.

항상 냉철하고 진지한 책사였던 그가 이렇게 망가지는 모습은 처음이라 꾹 참았던 웃음이 결국 터져 나왔다.

“개그 하냐?”

“폐하……?”

안드라스가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한 번, 애쉬를 한 번, 그리고 내 자취방을 한 번 바라보고는 곧바로 몸을 숙였다. 물론 그 앞에서 내가 배를 잡고 바닥에 뒹굴고 있던 터라 마왕의 위엄은 안 살았다.

“폐하를 뵙습니다.”

“엌, 그래. 엉덩이 안 아프냐?”

끅끅거리면서 묻자 안드라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만 웃으십시오!”

“웃긴 걸 어떡해? 근데 너 지금 나한테 명령했냐?”

내 삐딱한 말에 안드라스가 입을 헙, 다물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질문했다.

“그나저나 이 좁은 공간은 뭡니까? 설마 창고입니까? 그냥 마왕성으로 돌아오시죠, 폐하.”

“넌 여기가 창고로 보이냐? 마신 놈도 그렇고 왜 남의 스윗 하우스에 계속 시비지?”

“마신 놈이라뇨! 그러다 신벌 내려옵니다, 폐하!”

마계든 아니든, 저놈의 잔소리는 여전하군. 질린 표정으로 귀를 후비며 말했다.

“괜찮아. 나 마신이랑 친해. 기도로 합의 봤어. 그리고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라, 체이스터.”

안드라스의 뒤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체이스터와 내 눈이 딱 마주쳤다. 그 즉시 마법진 쪽으로 달려간 그가 다급한 손길로 마법진을 두드렸다. 마법진에 점점 빛이 차오르자 체이스터의 눈에도 희망이 차올랐다.

원래 희망은 꺼지라고 있는 거 아니겠어?

녀석의 몸이 마법진을 넘어가기 직전, 내 스킬에 죽 끌려왔다. 녀석의 뒷덜미를 고양이 잡듯이 움켜잡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내가 분명히 전언하라고 했을 텐데 왜 계속 망할 놈들이 바퀴벌레처럼 기어 나오는 걸까? 제대로 전언했냐?”

내 스산한 웃음에 체이스터가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하려고 했는데…….”

“했는데?”

“그게, 전언 때문에 회의장 모이니까 다 최상위 서열이어서.”

“서열이어서?”

“말 꺼내기가 무서웠…….”

“무서웠어? 나는 안 무섭고?”

심장이 (공포로) 두근거리는 화법, 일명 끝말 따라 하기로 말을 받아쳐 주니 체이스터가 덜덜 떨며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필사적인 외침에 귀가 따가웠다.

“폐하, 저 죽이실 거예요? 저 폐하의 귀엽고 깜찍한 피후견인 체이스터잖아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반박해 주었다.

“언제 적 이야기야? 그거 네가 성년 돼서 끝났다, 망할 꼬맹아. 그리고 귀엽고 깜찍은 개뿔. 네가 어릴 때 친 사고들은 기억하냐?”

“그거야말로 언제 적 이야기예요?”

입을 비죽이며 투덜거리는 체이스터의 머리를 힘을 실은 주먹으로 꾹꾹, 눌러 주었다. 나는 그때부터 네가 성년 되길 기다렸어, 이 금쪽이 자식아. 지금처럼 네 머리 맘껏 쥐어박고 싶어서.

“그런데 왜 부르셨습니까?”

안드라스의 물음에 체이스터를 갈구는 것을 멈추고 그를 부른 본론을 꺼냈다. 체이스터는 갈구려고 부른 거고, 얘는 시킬 거 있어서 부른 거고.

“마왕성 서재에서 크라토스에 관련된 책들 싹 가져와.”

“양이 꽤 많을 텐데요. 한 번에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면 나눠서?”

“나눠서 가져와. 어차피 전쟁 중도 아닌데 할 일 없잖아?”

“제 영지에 할 일 쌓였습니다. 전쟁 사후 처리도 아직 안 끝났고요.”

내 알 바냐? 어깨를 한 번 으쓱해 주고는 내 방 벽 한 면을 차지한 마법진을 가리켰다.

“여기 통해서 넘어오도록.”

“죄송한데, 이 마법진이 마계의 어느 장소와 연결되어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알겠냐. 아, 애쉬는 알겠네. 애쉬, 어디랑 연결되어 있어?”

잠시간 애쉬를 쳐다보는 안드라스의 눈에 경계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전에는 사이 괜찮더니 왜 저래? 애쉬가 비죽 웃으며 물었다.

“안드라스 네 영지랑 좀 멀 텐데, 괜찮겠어?”

“그냥 일주일마다 불러 주십시오, 폐하. 책 준비해 놓고 있을 테니.”

한숨을 내쉰 안드라스가 애쉬를 한 번 노려보고는 내게 말했다.

“그래, 일주일 후에 부르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나는 이내 안드라스의 소환을 해제했다.

『스킬 ‘소환(L)’을 해제합니다.』

그러다 한발 늦게 내가 소환한 놈이 두 놈임을 깨달았다. 한 놈은 어디 갔나 싶어 급히 자취방을 돌아보자, 방 한구석에서 입을 우물거리며 무언가를 먹는 체이스터를 발견했다.

마치 키우던 고양이가 아무것도 안 줬는데 뭔가를 쩝쩝대고 있는 듯한 불안감에 성큼성큼 녀석에게 다가갔다.

“너 뭐 먹… 야! 내 마카롱!”

휴업을 밥 먹듯이 하는 덕에 삼고초려 끝 겨우 사 온 유명 마카롱 전문점의 마카롱 포장지가 바닥을 굴렀다. 손도 빨라서 사 놓았던 여섯 개 중에 벌써 네 개나 처먹은 상황.

“이거 맛있네여. 더 먹어도 돼요?”

녀석의 해맑은 얼굴 위로 예전 전술 지도를 휘저어 놓고 재밌다고 깔깔대던 어릴 적의 얼굴이 겹쳐졌다.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3마계 직접 치러 안 간 내 죄지.”

레라지드 이 자식아, 저런 사고뭉치 아들내미 남겨 두고 맘 편히 눈이 감기디…….

잠시간 저 녀석에게 세 번의 헛걸음질을 해서라도 저 마카롱을 다시 사 오라고 할까, 고민하다가 조회 수 900만에 가까워지는 「던전 갑툭튀 존잘남」 너튜브 영상을 떠올리고 마음을 접었다.

저놈은 이미 이 세계에서 틱X커 스타 뺨치는 유명인이었다.

“진짜 웬수 새끼가 따로 없구나……. 그래, 너 다 먹어라, 다 먹어.”

그리 한탄한 나는 남은 마카롱 두 개를 꼭 쥐고 있는 체이스터 녀석의 목덜미를 들어 올려 마법진 안으로 힘껏 던져 넣었다.

한숨을 쉬며 체이스터가 남기고 간 쓰레기를 줍다가 옆에서 웃고 있는 애쉬를 돌아보며 물었다.

“안드라스랑 싸웠어? 둘이 분위기 왜 그래?”

내 물음에 어색한 미소를 지은 애쉬가 급히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진짜 둘이 싸웠나?

“그런데 갑자기 크라토스는 왜요……?”

“넘길 방법 찾아야지. 언제까지 마왕 자리 비워 놓을 수는 없잖아. 난 여기 계속 있을 건데. 역시 차기 마왕으로는 세이블이 제일 낫겠지? 서열 2위이기도 하고 전대 마왕하고도 연 있고 하니까.”

내 대답에 애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넘기면요, 그다음은요?”

“차원 연결한 통로 닫아야지. 내가 마왕이 아니게 되면 이제 너희들이 이쪽으로 넘어올 이유가 없잖아?”

당연한 질문을 하네.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애쉬의 눈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왜 저러나 싶어 당황하다가 분위기 좀 환기할 겸 체이스터 덕에 생각난 내 전 반려동물, 페리의 근황을 물었다.

“페리는 잘 지내?”

“아니요, 잘 못 지내요. 폐하가 사라진 후로 먹이도 거부하고 마왕성 옥좌 밑에 웅크려 있기만 하거든요.”

의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애쉬가 비소하며 빈정거렸다.

“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폐하의 애완동물 꼴이 나고 싶진 않다고. 그렇게 예뻐하고 아껴 놓고는 지금까지 기억조차 못 하지 않았나요? 아니,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건가요?”

뭐라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나는 무슨 대답을 원했던 걸까. 내가 없어도 잘 지낸다고? 페리 역시 나를 잊고 새 주인을 만나 잘 산다고? 그 대답이 내가 페리를 잊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었을까?

내 황망한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애쉬가 말을 이어 나갔다.

“주웠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셔야죠. 당신이 없으면 살 수도 없게 만들어 놓고서는 왜 그렇게 냉정하게 버리고 갔어요?”

노을색 눈에 점점 눈물이 맺혀 갔다. 눈물로 일렁이는 눈이 원망스러운 감정을 한가득 담고 나를 마주했다. 아직 멀었다는 듯 막혔던 둑이 터지듯 원망을 쏟아 내는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왔다.

“난 당신이 없는 삶 따위는 상상하기조차 싫었는데 어째서 당신이 그린 삶에는 내가 없었던 거죠? 그럴 거면 처음부터 손 내밀지 말지. 이 세계로 돌아와서 한 번이라도 나를 기억했던 적은 있어요?”

결국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거친 손길로 눈물을 훔친 애쉬가 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꾹꾹 감정을 눌러 담은 말이 그의 입에서 힘없이 흘러나왔다.

“어리광을 받아 주지나 말지 왜 괜히 기대하게 만들었어요? 폐하가 없는 2년이 내게 얼마나 지옥이었는지 알아요? 당신의 다정이, 내 사랑이 어떤 식으로 서서히 나를 죽여 갔는지 당신은 알고 있냐고요.”

“거기에 내 책임은 없지. 네 감정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의무라도 있나?”

부러 차갑게 대답했다. 괜한 기대를 심어 주는 게 더 잔인한 것임을 알기에. 때로는 다정도 지독한 독이 될 수 있다.

“폐하는, 정말 끝까지 잔인하시네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한 채 처연하게 웃은 애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빛으로 나를 보던 그가 입술을 꾹 깨물고는 빛나는 마법진 안으로 사라졌다.

마법진의 빛이 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다가 침대에 털썩 드러누운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진짜 나보고 어쩌라고……. 안 그래도 머리 터질 거 같은데.”

평화로웠던 지난 2년이 미친 듯이 그리웠다. 아니, 아무것도 몰랐던 몇 달 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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