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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은 꼭 시험 기간에 터지더라 (1) (4/33)
  • 4. 일은 꼭 시험 기간에 터지더라 (1)

    내가 진짜 「일리아스」 뺨치는 대서사시 한 편 쓰고 겨우 귀환했는데, 감히 내 평화를 망치려는 놈이 있다니. 이건 진짜 용서 못 한다. 기필코 잡아서 족친다.

    자취방 침대에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다시 소환 스킬을 실행했다.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소환 스킬을 실행하자마자 쩌저적, 갈라지는 벽에 기겁하며 바로 타임 스톱을 실행했다. 맞다, 얘 드래곤이었지. 2년간 안 봤다고 인간화 잘 안 하는 걸 까먹고 있었다.

    드래곤 본체로 소환된 세이블이 붉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보다가 상황 파악을 마치고 바로 인간으로 폴리모프했다.

    소환 스킬이 한 번에 안 나타나고 서서히 나타나서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갈라진 벽에 리와인드를 걸어 원 상태로 되돌렸다. 마계에서도 한 번씩밖에 안 써 본 스킬을 여기에서 막 쓰네.

    세이블에게 인사를 건네려고 입을 열자마자, 내 뒤에서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결 좋은 은색 머리카락이 내 목을 스쳤다.

    나를 끌어안은 이의 정체를 알아채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잔뜩 긴장시키고 있던 몸에 힘을 뺐다. 내 어깨에 이마를 댄 애쉬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

    미안하다, 나는 너 안 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면 분명 애쉬를 울릴 게 뻔하기에 속으로 삼켰다.

    내게 달라붙어 있는 애쉬의 목덜미를 세이블이 잡고 떼어 냈다. 곧바로 무릎을 꿇은 세이블이 인사를 올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치레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를 의도치 않은 최고 흑막으로 만든 놈은 반드시 잡아서 족칠 것이다. 반드시 족칠 것이다.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의견을 냈는지 말해.”

    내 으르렁거림에 애쉬가 입을 꾹 다물고는 시선을 피했다. 한숨을 내쉰 세이블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제가 했습니다.”

    “뭐?”

    기가 막혀 되물으니 세이블이 특유의 차분한 말투로 조목조목 설명을 시작했다.

    “폐하께서 크라토스를 누구한테도 넘기지 않는 이상, 마계의 지배자는 여전히 폐하십니다. 그래서 폐하가 이 차원을 정복하시기 위해 먼저 넘어갔다고 판단했습니다.”

    세이블의 설명을 들으며 입매를 비틀었다. 내가 멍청이로 보이냐? 말이 끝나자마자 팔을 뻗어 세이블의 어깨를 잡았다.

    “숨길 생각 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라, 세이블.”

    손아귀에 힘을 주니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도 세이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옆에서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를 봐 왔던 네가 그런 판단을 했다고? 내가 어째서 전쟁을 일으켰는지, 내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내부 분열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 세력들의 시선을 돌릴 방법은 이것뿐이라 판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본능적으로 세이블이 더 숨기고 있는 사실이 남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추궁할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세이블이 내게 해가 될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리라.

    이러나저러나 5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 최측근에서 가장 큰 전력이 되어 준 이이니.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건 이번뿐이다. 다음은 없어.”

    미련 없이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뗐다. 그러고는 박살 난 어깨에 간단히 힐을 걸어 주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거 같아 좀 그랬지만 힐 안 해 주는 것보다는 낫잖아?

    “어떻게 대규모로 넘어온 거지?”

    “아직 마신께서 차원을 연결한 힘이 끊기지 않았습니다.”

    레알 나 때문인 게 맞았네. 재활용 대충 버리고 쓰레기 길가에 한 번씩 버리는 소소한 민폐만 끼치고 산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내가 지구에 광역 민폐를 끼쳤구나.

    내 집 앞에서 푯말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과 내게 날아오는 날달걀 세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랭킹 1위가 닉네임 쪽팔려서 선택적 힘숨찐이라면, 이쪽은 생존형 힘숨찐이다.

    물론 날달걀 좀 맞았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얼굴 들고 다니겠냐고.

    “저 지랄맞은 게이트는 또 터졌대?”

    “어휴, 저놈의 지랄맞은 게이트들은 꼭 사람 많은 곳만 골라서 터져, 어떻게.”

    게이트를 볼 때마다 부모님이 혀를 차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미안. 엄마, 아빠 딸이 그 지랄맞은 게이트 사태 원인이었대.

    벽에 머리를 박고 싶은 충동을 겨우 이겨 내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게이트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는?”

    “폐하의 허가 없이 나갔다가 무슨 욕을 들을 줄 알고 나갑니까. 마수들이 폐하의 기운을 느끼고 게이트 앞까지 갔다는 보고가 두 번 있었긴 했습니다.”

    언젠지 알 것 같다. 한 번은 주태윤이랑 있었을 때고, 또 한 번은 학교 도서관에서 터졌을 때겠지. 머리가 지끈거려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지구에 와 있는 놈들한테 당장 철수하라고 전하도록.”

    내 명령에 허리를 숙인 세이블이 몸을 일으켰다가 멈칫했다.

    “…혹시 돌아가는 방법 아십니까?”

    『스킬 ‘소환(L)’을 해제합니다.』

    세이블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손발이 오글거리는 엄근진한 태도를 집어치우고 허공에 대고 급하게 외쳤다.

    “야, 관리자! 관리자 튀어나와!”

    내가 외치자마자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우와, 마왕 놈 말본새 좀 봐. (° ㅂ ° ╬)』

    저 망할 시스템 놈이 또 나한테 마왕 놈이라 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해결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차원 연결한 것만 끊으면 이쪽으로 못 넘어올 거 아니야.

    “차원 연결한 거 못 끊어?”

    『저희도 이야기해 봤죠. 그런데 그쪽에서 안 끊겠다는데 뭘, 어떡해요. ( ˃̣̣̥᷄⌓˂̣̣̥᷅ )』

    슬프게도 역시 이론과 현실은 달랐다. 실험하면서 자주 마주친 현실이긴 했지만 왜 하필 여기서까지 적용이 되냐……. 나는 삐딱한 말투로 시스템의 속을 살살 긁었다.

    “그러고도 니가 초월자냐? 왜 못 끊어? 강제로라도 끊어.”

    『아, 그쪽 일은 그쪽이 알아서 해결합시다. 그쪽 초월자는 내가 아니라 댁이잖아요. t(=n=)』

    “내가 여기서 뭘, 어떻게 해?”

    지금 지구로 넘어온 놈들 목을 싸그리 따기라도 할까? 내 빈정거림에 잠시 침묵한 시스템이 다시 창을 띄웠다.

    『특별히 이번 한 번만 연결해 줄 테니 둘이 잘 풀어 봐요. ₍₍ (ง ˙ω˙)ว ⁾⁾』

    그러고는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시스템창은 빠르게 사라졌다.

    “뭐? 누구랑, 뭐를 풀라는 거야? 야, 대답 안 해?”

    허공에 대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고개를 휙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깜짝이야. 애쉬, 너 안 갔어?”

    “폐하가 세이블만 보냈잖아요. 그나저나 폐하 그 말투 오랜만에 듣네요.”

    그야 마계에서 이 말투 쓰면 세이블이 위엄 안 산다고 엄청 쪼아 댔으니까. 어느새 훌쩍 커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애쉬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리깐 은빛 속눈썹이 처연했다.

    “너무해요. 오랜만에 보는 건데도 신경도 안 써 주고.”

    “내가 지금 그럴 정신ㅇ… 뭐야?”

    갑자기 자취방 한가운데에 모이는 빛에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심상치 않은 힘에 팔을 뻗어 애쉬를 뒤로 물리고는 곧바로 경계 태세를 갖췄다.

    빛이 사그라들고 보이는 얼굴에 한숨을 내뱉으며 경계를 풀었다.

    “이 초라하고 좁은 곳에 나를 부르다니. 불경하기 짝이 없군.”

    X발, 내 자취방에 불만 있냐. 별것이 다 불경이네. 진짜 불경한 게 뭔지 보여 줘?

    마신 아이루스의 멱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어쩐 일로 나를 불렀지?”

    “아니, 왜 차원 연결해 놓고 그걸 그대로 내버려 둬요?”

    이를 악문 물음에 별 이상한 것을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마신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대가 가고 나서 끊어 달라고는 안 했잖아?”

    참자, 이채현. 참을 인(忍) 자 세 번이면 살신을 면한다. 진짜 지금이라면 신살자가 되어 새로운 마신으로 등극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겨우 내리누르고는 점잖은 말투로 부탁했다.

    “차원 연결 좀 끊어 주시죠.”

    “그건 불가능해.”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대의 소원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소원이거든.”

    “심장 다 모은 사람만 들어준다며?”

    기가 막혀서 절로 반말이 튀어나왔다. 저런 신한테 존대를 붙여 주고 싶지 않아서 반말한 건 절대 아니다.

    “물론 그대의 기여가 크기는 하지만, 온전히 그대의 힘으로 모은 게 아니잖아? 그래서 예외적으로 그대의 소원을 두 개 들어준 것으로 타협을 본 거고.”

    “와, 돌겠네.”

    급격하게 땅기는 뒷목을 주물렀다. 나 왜 500년 동안 그 고생한 거지?

    허탈한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을 보던 나는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에 눈을 빛냈다.

    어, 그러고 보니 소원 빈 놈을 찾으면 누가 지구 멸망 프로젝트를 주도했는지 알아내서 족칠 수 있잖아? 확실한 건, 범인은 마계 안에 있어……!

    “그 소원은 누가 빌었는데요?”

    “내가 왜 말해 줘야 하지?”

    참을 인(忍) 두 개째요. 심장에 한자를 새기며 마음을 겨우 내리누르고 있던 내게 마신이 다시 말을 걸었다.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무슨 선물? 글로벌 날달걀 세례길? 대체 저 신이 내게 준 선물이 뭐가 있나, 열심히 기억을 뒤지고 있자 고개를 치켜든 마신 놈이 친히 선물의 정체를 공개했다.

    “이 몸의 대리자라는 지위는 아무에게나 내리는 것이 아니다. 고마워하도록.”

    아, 그거였냐. 그제야 내 상태창에서 봤던 아이루스의 대리자라는 칭호를 기억해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지각 빼고는 딱히 메리트 없던데. 신의 지각도 어떤 페널티 있을지 모르고.

    “나를 부르고 싶을 때 불러도 좋다. 단, 기회는 두 번뿐이야. 신중하게 활용해.”

    신중이고 나발이고 부를 일 없을 듯. 그냥 소환 찬스권 대신 소원 빈 놈이나 말해 주라고. 저절로 불경해진 내 표정에 피식 웃은 마신이 문득 생각난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참, 다시 돌아오는 게 그대한테도 좋을 거야. 그대가 쌓은 카르마는 이 차원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거든. 그러니 평화가 질리면 돌아오도록 해.”

    오만한 명령조로 말한 마신이 허리를 굽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대라면 언제든지 기꺼이 환영이니.”

    아, 네, 그러시겠죠. 천계랑 맞다이 뜨려면 제가 필요하시겠죠. 귀를 후비며 못 들은 척을 시전했다. 내가 댁 체스 말이냐?

    “그리고, 선물은 역시 공평해야겠지.”

    다시 허리를 편 마신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1초 만에 내 방 벽에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순식간에 내 자취방이 오컬트 덕후의 방으로 변신했다.

    이거 실화냐? 내일 아현이 오는데 저거 뭐라 설명해? 저 망할 마신은 왜 자꾸 나한테 엿을 주는 거지?

    “저, 저게 대체 뭐…….”

    “마계로 곧바로 통하는 통로지.”

    기가 막혀 마법진을 손가락질하며 더듬거리자 마신이 태연히 답했다.

    “그딴 걸 왜 내 집에 만들어? 당장 안 없ㅇ―”

    “이런, 아쉽지만 허락된 시간이 여기까지군. 다음번에는 마계에서 보길 바라지, 마계의 대군주.”

    내가 한껏 빡친 표정을 짓든 말든 면전에서 저주 같은 인사와 거지 같은 호칭을 한꺼번에 내뱉은 마신이 스르륵 자취를 감췄다.

    침대에 걸터앉아 직통 마법진이 생겼는데도 아직도 안 가고 있는 애쉬를 돌아봤다.

    “넌 안 가냐?”

    “당연하죠. 폐하가 계신 곳이 제가 있어야 할 곳이니까요.”

    전혀 아니라고 대꾸하려다가 멈칫했다. 체이스터의 말이 생각난 탓이었다.

    “애쉬 님이 저한테 폐하가 우리 버리고 이 차원으로 가 버리셨다고 했단 말이에요.”

    이러나저러나 난 애쉬한테 약했다. 아니, 약할 수밖에 없었다. 제일 약하고 힘들었을 시절, 우리는 서로의 유일한 버팀목이었고, 난 애써 아무렇지 않아 하는 너의 유일한 보호자였기에.

    “오늘 하루만이야.”

    침대 옆자리를 팡팡, 치며 말했다. 배시시 웃은 애쉬가 어리광 부리듯 안겨 왔다. 애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또 정들게 하지 말아 주라. 어차피 이별은 다시 예정되어 있으니까.

    * * *

    초인종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눈살을 찌푸리며 안고 있던 상어 인형에 얼굴을 파묻었다. 누가 개념 없이 아침부터 방문하냐.

    그런데 언제부터 내 상어 인형이 이렇게 단단했지? 그러고 보니 내 상어 인형은 세탁기 안에 있을 텐데?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려 앞을 보았다. 내 눈앞에 보이는 건 누군가의 가슴팍이었다.

    “…뭐야?”

    다급히 끌어안고 있던 손을 떼며 가슴팍을 밀쳤다. 급히 몸을 일으키니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던 팔이 다시 나를 침대로 끌어당겼다.

    누운 상태에서 고개를 돌리자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은발이 눈에 들어왔다. 나른하게 풀린 노을색 눈이 내 눈과 마주하자마자 곱게 휘어졌다.

    아, 깜짝이야. 애쉬였구나.

    “조금만 더 자요, 폐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이고는 품으로 파고드는 애쉬를 떼어 내며 반쯤 무의식에 감겨 중얼거렸다.

    “초인종 울리는데 더 자긴 뭘 더 자…….”

    말이 끝나자마자 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야, 이채! 아직도 자냐?

    망할, 백아현 벌써 왔어?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아직도 내 침대에 앉아 있는 애쉬를 힐긋 돌아보았다.

    얘를 어떡하지? 창문 밖으로 던질까? 어차피 떨어져도 안 죽을 텐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방을 휘둘러보는 내 눈에 들어온 건 벽에 큼지막하게 그려진 마법진이었다. 마계 직통 통로.

    그런데 분명 선물은 공평해야 한다고 그랬었지? 그럼 이 마법진은 대체 누구한테 주는 선물이지? 일단 분명히 나는 아니다. 이건 나한테 선물이 아니라 엿이다.

    생각에 빠진 채로 애쉬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어 마법진이 있는 벽 앞으로 데려갔다. 손을 대고 마력을 주입하니 진이 환하게 빛났다.

    “저 쫓아내시는 거예요, 폐하……?”

    나를 애절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애쉬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안쓰럽게 봐도 안 되는 건 안 돼. 그렇다고 너를 데리고 아현이랑 삼자대면을 할 수는 없잖아.

    “열두 시간 후에 세이블이랑 같이 넘어와.”

    그 말을 끝으로 애쉬를 마법진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와 동시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뚝 끊기더니 휴대폰 진동이 마구 울렸다.

    방금까지 자고 있었던 척, 목소리를 잔뜩 깔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야! 일어나 있었잖아! 빨리 문 안 열어? 목소리만 깐다고 자고 있던 사람인 줄 알아?

    이 거지 같은 연기 실력 같으니. 혀를 차며 마법진이 큼지막하게 박힌 벽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스킬 ‘환영(B)’을 발동합니다. 설정 시간: 열 시간』

    방 벽지와 똑같은 환영이 마법진 위를 덮었다.

    감쪽같이 사라진 마법진에 뿌듯해하며 문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인상을 잔뜩 찌푸린 백아현의 얼굴이 떡하니 보였다.

    “여, 왔냐?”

    “무슨 문을 왜 이리 늦게 열어? 그리고 자는 척은 왜 해? 너 침대에서 일어나기 귀찮아서 그랬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뜯어보는 아현이를 향해 머리를 긁적이며 무해하게 웃었다.

    들고 있던 봉지를 나한테 휙 던진 백아현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 초밥이다. 탁자에 초밥을 놓고 간장과 초절임 통을 열었다.

    “웬 남자 신발이 바닥에 있어?”

    아현이의 의문 어린 중얼거림에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 바닥에 구두가 정갈하게 벗어져 있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짜냈다.

    “아니, 여자 혼자 살면 위험하니까 남자 신발 하나 두라고 해서 하나 샀어.”

    “그래, 알겠으니까 일단 그 흔들리는 눈빛부터 어떻게 해 봐.”

    “내 눈빛이 뭐?”

    더 말을 섞으면 의심도 더 심해질 것 같아 급히 시선을 포장된 초밥으로 내렸다. 나무젓가락으로 초밥 하나를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기름진 연어의 맛이 입 안 가득 퍼져 나갔다.

    하루 만에 일어난, 도저히 맨정신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들에 복잡해진 머리가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자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행복한 표정으로 연어 초밥을 우물거리고 있자 아현이가 많이 먹으라고 초밥 상자를 내 앞으로 밀어 주었다.

    “너는 안 먹어?”

    “다이어트 중이야. 이채 너 많이 먹어.”

    “다이어트 그렇게 굶으면서 하다가 뼈 삭는다.”

    “그래, 이채. 초밥 칼로리가 얼마냐면…….”

    “안 궁금함여.”

    초밥을 꿀꺽 삼키고는 내심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 맞아. 한국대 게이트 때 초기에 있던 헌터들은 어떻게 됐어? 뉴스로만 봤는데. C급은 등급 상승시키고 D급은 강등시킨다며.”

    “그 C급 죽었어. 등급 측정도 다시 안 하고 공략하려 단신으로 던전 들어갔다가 괴수에게 물려 죽었대. 그리고 D급은 같이 있던 힐러가 사람 구명에 노력했다고 증언해 줘서 E급으로 강등은 안 시키기로 결론 났고.”

    역시 나대는 놈 데드 플래그는 국룰이었군. 납득하며 염교 초절임을 씹었다. 열심히 남은 초밥을 조지고 있자, 나를 심각한 표정으로 골똘히 바라보고 있던 아현이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야, 이채. 너 나한테 숨기고 있는 거 없지?”

    갑작스레 훅 들어오는 말에 눈을 깜박였다. 숨기고 있는 게 한둘이 아닌 터라 지레 찔린 탓이었다.

    사실 나 마왕임. 그것도 현직 마왕. 나이도 500살 넘음. 그리고 내가 게이트 사태 원인임.

    아무리 8년 지기 친구라도 이걸 털어놓을 수는 없잖아. 내가 들어도 망상증 있는지 걱정해서 진지하게 상담 권할 내용인데.

    눈치 빠른 백아현이 혹시라도 내 이상함을 감지한 게 아닌가 싶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예를 들면 남친이라던가, 남자 친구라던가, 애인이라던가.”

    “응, 안 생김.”

    그다음 말에 바로 긴장이 탁 풀렸지만.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장어 초밥을 집어 들었다.

    “혹시 주태윤은 아니지?”

    “돌았냐? 막말 쩌네. 백야, 내 취향 몰라?”

    인상을 팍 찌푸리며 즉답했다. 의심할 걸 의심해라.

    험악해진 내 표정에 아현이가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라고 오해하지 말라며 나를 달랬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도중, 아현이의 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여보세요. 네? 게이트가 사라졌다고요? S급이잖아요! 그게 말이 돼요? 포커스라도 왔다 갔대?”

    높은 목소리로 수화기 너머 상대에게 무어라 말하던 아현이가 벌떡 일어나 침대에 놓인 겉옷을 집어 들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문 쪽으로 가 현관에 놓인 구두에 발을 밀어 넣은 백아현이 나를 휙 돌아보며 사과했다.

    “이채, 미안.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갈게.”

    “그래, 나중에 시간 빌 때 편하게 와.”

    문이 쾅, 닫혔다. 초밥 하나를 더 집어 먹으며 눈을 깜박였다. S급 게이트면 내가 체이스터한테 없애라 했던 우리 동네 게이트 맞지……? 의도치 않게 친구에게 일거리를 선사해 준 꼴이 되어 버림.

    “에휴, 어떻게든 내가 세상 전처럼 돌려놔야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다짐처럼 중얼거렸다.

    어느새 하늘이 어둑어둑해지자, 벽에 걸어 놓은 환영이 사라지더니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세이블과 애쉬가 내 자취방으로 넘어왔다. 그러고 보니까 내 자취방도 던전 아니야?

    마계랑 연결된, 최종 보스로 마왕이 있는 난이도 헬 던전. 이곳 공략이 끝나면 세상이 안정화됩니다. 하지만 공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죠.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인사를 마친 세이블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철수하라고 명령은 전달했지만, 폐하의 직접적인 명령이 아니니 거부한다고 합니다.”

    “돌겠네, 진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너희들 본성을 잘 아는데 이 자식들은 왜 이럴 때만 충심 있는 척이냐. 마왕 부재중이니까 명령 X까라고 하극상이라도 까든가. 너네 400년 전에는 잘만 그랬잖아.

    “폐하께서 승인하신다면 현재 지구에 있는 마족들이 던전 밖으로 나와 집결할 수 있습니다.”

    “그건 좀.”

    잠시간 던전 밖으로 나와 집합해 있는 마족들과 그 앞에서 해체 명령을 내리는 내 모습을 떠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상상 속의 하늘에는 방송국 헬리콥터가 존재했고, 내 주위에는 수많은 방송국 카메라들이 존재했다.

    손을 휙휙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뭐, 철수 안 한다고 뻗대면 어쩔 수 없지. 그냥 내버려 둬. 더 이상 넘어오지나 말라고 해.”

    이제는 내 알 바 아님. 그래도 던전이 기술 발달에 도움은 됐잖아? 원래 그림자가 있으면 빛도 있는 법이지. 내가 세상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하자.

    이만 물러가라고 손짓하자 세이블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다시 진을 통해 마계로 사라졌다. 떠나는 세이블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참, 애쉬. 갈 때 네 구두 가져ㄱ… 왜 내 침대에 네가 누워 있냐?”

    “하루만 더 재워 주시면 안 돼요, 폐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인마. 뻔뻔한 얼굴로 내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 애쉬의 뒷덜미를 잡고 벽 앞으로 질질 끌고 갔다.

    어제는 하도 정신이 없어서 봐줬지만, 오늘은 어림없다.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전에 자주 해 주던 저녁 인사를 속삭였다.

    “잘 자라.”

    그 말을 끝으로 마법진 안으로 던져 넣었다. 이번에는 잊지 않고 신발도 같이 던져 넣어 주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내 옆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자는 애쉬를 보며 이마를 짚었다. 저 마법진 이쪽에서 막는 방법 없냐?

    * * *

    “망했네.”

    하하, 왜 일은 꼭 시험 기간에 터지고 난리냐. 어느새 하루 앞으로 다가온 중간고사에 정신 줄을 놓고 껄껄 웃었다. 책상에 덩그러니 펴진 전공책이 깨끗해서 더 심란했다.

    줄줄이 폭탄 터지듯 터진 일과 드러난 감당 못 할 진실을 안 지금, 책 속의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나 하나 때문에 세계가 이 지경이 됐다는데 내가 지금 유기반응론이랑 착물화학 외우고 있을 때냐고.

    그래도 내일 시험은 봐야 하니 꾸역꾸역 전공책을 잡고 있자 침대에 앉아 상어 인형을 끌어안고 있던 애쉬가 물었다.

    “폐하, 안 주무세요?”

    “어, 나 자려면 멀었으니까 먼저 자.”

    애쉬는 마법진에 몇 번을 던져 넣어도 다시 부메랑처럼 되돌아왔고, 결국 나는 녀석을 쫓아내는 걸 포기했다. 그 대신 친구들이 집에 찾아올 때는 마계로 넘어가는 거로 합의를 봤다. 그 후로는 계속 내 자취방에 붙어 있는 상태다.

    맨날 불편한 마계 옷만 입고 있는 게 짠해서 트레이닝복 몇 개 사서 던져 줬다. 역시 패완얼이라고, 잘 어울린다.

    만약 들키더라도 할 변명은 잘 생각해 놨다. 엄마의 사돈의 팔촌의 옆집 사람의 오촌 조카의 아는 사람이 (마계에서) 한국으로 잠시 여행 왔다고 하면 된다.

    애쉬를 위해 방 불을 꺼 주고 스탠드를 켰다. 아, 진짜 공부하기 싫다. 왜 미리 공부해 놓지 않은 거야, 과거의 나.

    일단 내일 볼 과목 전공책을 펼쳤다. 대학생에게 시험 전날 밤샘 공부는 패시브 스킬이지.

    물론 공부만 한다고 한 적은 없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의 공부길 앞에는 무수히 많은 유혹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저번 주에 고백 지르고 끝난 웹툰이라던가, 새 편수가 나왔다고 알림이 뜬 웹소설이라던가.

    머리로는 안 된다고 외치면서도 내 몸은 착실하게 핸드폰을 잡아 화면을 켜고 있었다.

    그래. 쉬는 시간으로 치고 이 작품 한 편만 보자. 꾸준히 챙겨 보는 중인 『그 꽃을 꺾지 마세요』는 남주 클리셰를 완전히 비튼 로판이다. 능력 있는 여주와 엮이는 세 명의 남주 후보들의 이야기를 담은 역하렘 소설.

    여주 능력에 관심 있다고 입 털면서 접근하다가 감기는 능글맞은 북부 대공, 여주 앞에서는 댕댕이인 척하면서 속 시커먼 황태자, 제일 젠틀하고 다정하고 배려심 넘치고 연상미 뿜뿜한 마탑주.

    내 남주 취향은 다정동정연상곱상미남이므로 남주는 마탑주로 밀고 있다. 어떻게 내 취향을 모두 모은 캐가 존재할 수가 있지?

    오늘 분은 드디어 어제 여주랑 키스했던 놈이 밝혀지는 화였다. 제발 북부 대공 말고 황태자도 말고 마탑주……!

    처음 스크롤을 내릴 때만 해도 기대와 흥분에 가득 차 있던 내 얼굴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짜게 식어 갔다.

    “아, 왜 황태자야……. 복흑남 내 취향 아니라고.”

    중얼거리며 전공책에 머리를 박았다. 떡밥은 마탑주랑 다 뿌려 놓고……! 썸은 북부 대공이랑 다 타 놓고……! 왜 첫 키스는 황태자냐?

    높은 자리가 얼마나 귀찮은지 알아? 그리고 원래 사람은 겉과 속이 똑같아야 하는 겨! 속 시커먼 놈은 나중에 꼭 일 터트린다고!

    분명히 자기 본색 일부러 드러내 놓고 ‘그래서, 이제 제가 무서워지셨웅앵.’ 시전한다니까? 개념녀 테스트야, 뭐야?

    사윗감 평가하는 장모님에 빙의해 씩씩거리며 댓글창으로 들어갔다. 댓글창에는 이미 황태자파 독자들의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참고로 『꽃꺾마』 남주 주식 지분은 황태자가 압도적이었다. 나의 마탑주 주식은 한 줌…….

    벌레 씹은 표정을 하며 댓글을 쓱쓱 넘기다가 아주 주옥같은 댓글들을 발견했다.

    역하렘은다같살엔딩아니면불법: 키스야 뭐, 잘빠진 남정네들하고 한 번씩 해 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음?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댄데 키스하면 결혼까지 해야 한다고 그럼?

    이브1처2첩엔딩기원: 원래 연애는 황태자 같은 놈이랑 하고 결혼은 마탑주 같은 놈이랑 하고 바람은 대공 같은 놈이랑 피우는 겁니다. 그러니까 1처2첩엔딩 가죠, 작가님

    명언이다. 으딜 21세기 창작물에서 한창때의 청춘남녀가 입술 한 번 부볐다고 결혼이야?

    마탑주남주아니면마탑에서번지점프: 님들, 다 필요 없어요. 다정남이 짱이에요. 울 이브한테는 (이브 피셜) 가끔 한 대 치고 싶은 능글남과 (이브 피셜) 한 번씩 찜찜한 구석을 보이는 복흑남보다는 숨기는 거 없고 이야기 잘 들어 주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나무 같은 남자가 필요하다고! 그러니까 어남마!!

    정성스럽게 댓글을 남기고 잠이라도 깰 겸 창문으로 향했다.

    짙은 어둠으로 물들었던 밤하늘에 점차 검푸른 색이 물감처럼 번져 가며 어두웠던 세상을 밝히기 시작했다.

    투명한 새벽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늘에 화학 구조가 둥둥 떠다녔다. 아세틸글루코사민 구조가 참 예쁘구나, 허허.

    그렇게 한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마른세수하며 상대의 목을 조르려 하던 그림자를 치웠다.

    하마터면 죽일 뻔했네. 평화로운 세상으로 돌아왔어도 500년간의 기억이 쉬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애쉬, 위험하니까 뒤에서 껴안지 말랬잖아. 무슨 일 있었어?”

    “폐하가, 폐하가 옆에 없으셔서, 또 악몽을 꾼 줄 알고…….”

    한숨을 내쉬며 애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간헐적으로 떨리던 몸이 내 손길에 점차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내 어깨에 턱을 댄 애쉬가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나도 점차 밝아지고 있는 새벽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세톤 화학 구조가 뭐였더라……?

    “…예쁘네요. 고요하고, 평화롭고. 우중충한 마계의 하늘과는 비교조차 안 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내려앉았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왔을 때 하늘만 몇 시간씩 보고 있던 때가 있었던 터라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폐하가 이 세계로 돌아오고 싶어 하셨는지 이해가 돼요.”

    목소리에 조금씩 물기가 어렸다.

    “이래서는 원망도 못 하잖아요. 정말 증오스러웠는데, 저한테서 당신을 빼앗아 간 폐하의 세상이, 얼마나…….”

    한쪽 어깨가 젖어 드는 걸 느끼면서도 가만히 하늘만 쳐다보았다. 나는 항상 위로에 서툴렀다. 내가 상처 입힌 이를 위로하는 건 더더욱.

    나는 이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 1마계를, 애쉬를 버렸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은 어떤데?”

    “폐하가 사랑하는 세상을, 제가 미워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애쉬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힘없이 중얼거리는 말이 애절했다.

    “저는 폐하 없이는 못 살아요.”

    「“나는 그대 없이는 살지 못해.”」

    왜 애쉬의 말에 내가 제일 못 미더워하는 소설 속 황태자의 대사가 겹쳐 들리는지 모를 일이다.

    * * *

    그렇게 아침 시간을 날려 먹었다. 내일은 전공 시험이니까 새벽에 딴짓 안 하고 꼭 풀로 공부해야지.

    연신 하품을 하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는 길에 카페에서 테이크아웃한 샷 두 번 추가 아메리카노를 빨며 시험 범위를 펼쳤다. 남은 30분 동안 공부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열심히 책을 펴 놓고 핸드폰을 하고 있는데 내 옆옆자리에 누군가가 가방을 턱 놓고 앉았다. 힐긋 보다가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에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어디서 봤더라……?

    “…아!”

    기억났다. 울 학교 도서관 던전 D급.

    나랑 같은 강의였어? 일선이라 관심 없었는데. 와, 세상 참 좁다.

    여기저기서 D급을 보고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D급이 쓰고 있던 모자를 더욱 푹 눌러썼다. 전에 던전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야위고 퀭한 모습에 혀를 찼다. 마음고생 심하게 한 모양이네, 쯧쯧.

    하긴. 사람이 죽는 걸 바로 앞에서 보고, 자기 공적 다 가로채이고 강등당할 뻔했는데 멀쩡하면 멘탈 이채현이지.

    스스로의 멘탈 경도를 자화자찬하고 있는 동안 조교가 시험지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자, 모두 책 집어넣으세요. 필기구도 필요한 거 제외하고는 가방에 넣으시고요. 핸드폰 울리면 부정행위입니다. 시험 시간은 50분이고요, 다 푼 분들은 제출하시고 바로 나가시면 됩니다.”

    시험지를 받고 훑자마자 눈앞에 상태창이 연이어 떴다.

    『직감이 발동됩니다.』

    『직감이 발동됩니다.』

    『직감이 발동됩니다.』

    『직감이 발동됩니다.』

    이런 사랑스러운 능력 같으니라고. O/X 문제에 최적화된 직감 능력으로 시험지 한 면을 금방 풀고 바로 빈칸 문제로 넘어갔다.

    빈칸에 쓱쓱 답을 채워 넣다가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멈칫했다. 그 관리자라는 놈이 분명 나한테 능력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고 했지. 마침 옆에 좋은 시험 대상도 있는데 한번 시험해 볼까?

    ‘시스템 간섭.’

    『시스템에 접근합니다.』

    『관리자 ‘이채현’ 님 확인되었습니다.』

    스카우터(전투력 측정기) 같은 투명창이 내 오른쪽 눈앞에 떠올랐다. 그 상태 그대로 강의실을 한 번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을 볼 때는 반응 없던 시스템창이 D급을 보자마자 바로 정보를 띄웠다.

    『유선한』

    * 계열 - 법사

    * 직업 - 실더

    * 등급 - D

    * 스킬 - C급(목록 보기), D급(목록 보기), E급(목록 보기), F급(목록 보기)

    * 스테이터스 - 체력 C, 힘 D, 민첩 D, 지력 B, 정신력 E, 마력 D

    와, 스탯 실화냐? 한 대 치면 날아가는 거 아니야?

    정보창을 보며 입을 벌리다가 혹여 부정행위로 오해받을까 봐 급하게 시험지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관리자 권한을 사용해서 개입을 하면…….

    『관리자 권한을 사용합니다.』

    『각성자 ‘유선한’의 능력에 개입합니다.』

    『수정 기능을 사용합니다.』

    『등급 변경: D → A』

    『승인이 완료되었습니다.』

    오오, 됐다. 수정 승인까지 완료하고 다시 정보창을 열어 보았다. D라는 알파벳 대신 A가 떡하니 박혀 있었다. 뿌듯함에 씩 웃었다. 왠지 착한 어린이에게 선물을 준 산타가 된 기분이다.

    『유선한』

    * 계열 - 법사

    * 직업 - 실더

    * 등급 - A

    * 스킬 - S급(목록 보기), AAA급(목록 보기), AA급(목록 보기) … F급(목록 보기)

    * 스테이터스 - 체력 B, 힘 C, 민첩 C, 지력 B, 정신력 D, 마력 A

    개인적으로 권선징악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착한 일을 하면 화가 아니라 복이 와야지. 이제 A급이니까 허리 펴고 살아라, 인마.

    그 C급한테 자랑까지 하면 화룡점정인데 걔는 왜 하필 죽어 버려서 내 완벽한 시나리오를 망쳐?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내 옆옆자리에서 열심히 문제를 풀던 D급, 아니 이제는 A급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시험지를 제출하고 후다닥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등급 변경을 알리는 상태창 알림이라도 떴나 보다.

    언뜻 보인 시험지는 거의 백지나 다름없었다.

    계속해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내리며 신나게 답안지를 작성했다.

    아싸, 성적 내 밑에 한 명 깔렸다. 개이득.

    * * *

    O/X 문제 비중을 크게 잡으신 자비로운 교수님의 은총으로 일선 시험을 그럭저럭 마치고 순간 이동으로 자취방에 돌아오니,

    “오셨어요, 폐하?”

    “…여기 내 집 맞냐?”

    돼지우리 뺨치던 자취방이 깔끔히 치워져 있었다. 순간 내가 좌표 잘못 찍은 줄. 배시시 웃은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해서 폐하 오시기 전까지 청소 좀 했어요.”

    망할, 그러고 보니 나 아침에 속옷 방바닥에 던져 놓고 갔잖아. 아니, 청소해 준 건 고맙긴 한데…….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내가 쟤를 내 허리춤까지 왔을 때부터 500년간 봐 왔는데 속옷쯤이야.

    고마움의 의미로 결 좋은 은발을 쓰다듬으니 애쉬가 고양이처럼 내 손에 머리를 비볐다. 그러고 보니,

    “머리 잘랐네?”

    “빨리도 알아차리시네요.”

    입을 비죽 내민 애쉬가 애교스럽게 툴툴거렸다. 긴 장발이 짧은 숏컷으로 바뀌어 있었다.

    장발도 예뻤는데 숏컷도 나름 괜찮다. 역시 헤어스타일의 완성은 얼굴인가 보다. 잘 어울린다는 내 짧은 칭찬에 애쉬가 볼을 발갛게 붉혔다.

    가방에 전공책과 노트, 핸드폰 충전기를 챙기고는 가방을 메고 신발을 구겨 신으며 애쉬에게 말했다.

    “애쉬, 집 잘 지키고 있어. 누가 초인종 눌러도 절대 열어 주지 말고.”

    “어디 가세요?”

    “어, 나 내일 오후 3시에나 올 거야.”

    애쉬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게 단번에 달려온 애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팔을 꼭 잡아 왔다.

    “지금 저 두고 외박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보지 마. 조강지처 버리고 바람피우러 가는 거 같잖아. 공부랑 경쟁하지 마, 인마. 그렇게 필사적으로 이기려고 노력 안 해도 네가 압승이니까.

    “외박……? 카페에 앉아서 전공책을 보며 밤새우는 것도 외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음산한 중얼거림에 애쉬가 곧바로 태세 전환을 시도했다.

    “잘 다녀오세요, 폐하.”

    애교 섞인 배웅을 받으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취방을 벗어났다. 공부하기 싫다.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외치던 N백 년 전의 나는 어디로 사라진 거지?

    시험 기간인 터라 학교 앞 24시간 카페는 자리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다니, 역시 내가 장학금을 못 받는 이유가 다 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남은 자리에 가방을 풀었다. 에X팟을 끼고 전공책을 펼쳤다. 매직아이를 한 것도 아닌데 글씨가 흐리다.

    까만 건 글씨고 하얀 건 종이이니라. 내가 사회에 나가서 배위원자 결합 이론을 써먹을 날이 오긴 할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한숨을 내쉬며 전공책에 머리를 박았다. 서늘한 책의 온도가 머리를 좀 식혀 주는 것 같았다. 귀도 아파서 에X팟을 빼니 옆자리에서 타닥거리는 타자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마감 X발.”

    미친 듯이 노트북을 두드리던 옆자리 여자분이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저기도 마감 지옥에 빠졌구나. 리포트 과제 있을 때마다 빠지는 지옥이라 저 기분 잘 알고 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켜는데 눈앞에 상태창이 깜빡였다.

    『위험 예지가 발동됩니다.』

    던전 X발.

    급하게 가방 안에 전공책을 쓸어 담고 카페 입구를 향해 달렸다. 카페 문을 막 열고 들어오던 사람이 나와 부딪혀 카페 밖으로 튕겨 나갔다.

    “저기요, 앞 좀 잘!”

    비틀거리던 몸을 바로 하고 날카롭게 쏘아붙이던 남자의 말이 뚝 끊겼다. 멍하니 내 어깨 너머를 보는 시선에 쓰윽 고개를 돌리니 방금까지 있던 3층 카페 대신 커다란 게이트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와, 타이밍 대박…….”

    카페를 삼킨 게이트를 올려다보던 남자가 감탄을 내뱉었다. 그래, 넌 내 덕분에 게이트 안 휘말리고 무사한 줄이나 알아라.

    게이트가 터져 버렸으니 어쩔 수 없네. 집에 가서 숙면이나 취해 볼까. 흥흥, 웃으며 에X팟 케이스를 딱 열었는데.

    없다. 없어.

    텅 빈 에X팟 케이스를 든 손이 덜덜 떨렸다.

    삼각김밥으로 끼니 때우면서 그렇게 용돈 아껴서 겨우 산 마이큐티러블리 에X팟이 어디 간 거지……?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테이블에 에X팟을 올려놓았던 것이 떠올랐다.

    이 멍청아, 전공책을 챙기지 말고 에X팟을 챙겼어야지.

    게이트는 생명체만 집어삼킨다. 그러니 내 에X팟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이 게이트를 닫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시간은 새벽 2시. 헌터들이 와서 게이트 닫는 게 빠를까, 내가 게이트 닫고 에X팟을 구출해 내는 게 빠를까.

    고민은 짧았다. 곧바로 몸을 돌려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A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이 익숙한 조명, 온도, 습도. 마계 던전이 틀림없다.

    스킬로 불을 밝혀 보니 게이트에 휩쓸린 던전 안의 사람들은 기절한 건지 축 늘어져 있었다. 게이트가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왜 나가질 못하니……!

    덕분에 던전을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는 비각성자를 수상하게 보는 눈길도 없군. 비장한 걸음으로 던전 안쪽으로 향했다.

    어떤 간 큰 마족 놈인지는 몰라도 내 명령을 개무시한 걸로도 모자라 내 에X팟까지 잃어버리게 하다니. 너는 바로 모가지다.

    “넘어온 걸 땅을 기며 후회하게 만들…….”

    “뭔 마감 중에 던전이 터지고 난리…….”

    응? 사람?

    베네치아 상점에 걸려 있을 만한 새 부리 가면, 그러니까 메디코 델라 페스테로 얼굴을 가린 이가 쓰윽 고개를 돌렸다.

    잠시간의 침묵이 우리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헬륨 가스를 마신 것처럼 음성 변조된 목소리가 가면 안에서 흘러나왔다.

    “분명 수면 마법 걸었는데…….”

    목소리에 당혹 어린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하지만 나도 만만치 않게 당황한 상태였다. 저 가면은 한 헌터가 뒤집어쓰고 다닌 덕분에 그 사람의 상징으로 엄청 유명해졌으니.

    ‘서얼마 랭킹 1위를 이런 데에서 만나겠어?’

    애써 행복 회로를 돌려 보았다.

    저 새 부리 가면은 랭킹 1위, 서열1위포커스의 상징이나 다름없었지만 저 가면을 쓰고 랭킹 1위를 사칭하는 사칭범 및 저 가면 짝퉁을 쓰고 헌터명도 포카리로 짓는 등의 손민수 역시 넘쳐 났다.

    ‘시스템 간섭.’

    『시스템에 접근합니다.』

    『관리자 ‘이채현’ 님 확인되었습니다.』

    어디 보자, 읽어 보자, 신상을 털어 보자. 스카우터 때려 박은 눈동자 스륵스륵.

    『이하린』

    * 계열 - 법사

    * 직업 - 메이지

    * 등급 - S

    * 칭호 - 관리자1의 편애를 받는 자

    * 스킬 - SSS급(목록 보기), SS급(목록 보기), S급(목록 보기) … F급(목록 보기)

    * 스테이터스- 체력 A, 힘 B, 민첩 C, 지력 A, 정신력 S, 마력 S

    한국에 법사 계열 S급은 주태윤, 이재의, 김도빈, 그리고 포커스 이렇게 총 네 명.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이름은 주태윤도 이재의도 김도빈도 아닌 이하린. 그러면 정말로…….

    “당신이 서열1위포커스?”

    “예아…가 아니고! 포커스라고 부르지 마아악!”

    반사적으로 대답하더니 곧바로 발광한다. 민서 언니가 말해 준 포커스의 예전 모습과 똑같은 반응이었다.

    마계의 대군주라고 부르지 말라고 발광하던 내 모습이 겹쳐져 호칭을 바꿔 주었다.

    “아, 죄송합니다, 한반도 대장님.”

    가면 너머로도 정색이 느껴졌다.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그럼 캡틴 코리아? 볼드모트? 뭐로 불러 드릴까요?”

    “우리나라에는 ‘저기요’와 ‘그쪽’이라는 아주 좋은 호칭이 있죠?”

    저기요, 그걸 ‘좋은 호칭’이라고 하는 건 그쪽밖에 없죠? 그런데 저 옷, 옆자리 여자분 옷이랑 너무 비슷……. 모른 척하자, 모른 척.

    아무래도 나는 카페 옆자리 선정을 항상 잘 못 하는 것 같다. 저번에는 주태윤. 이번에는 포커스.

    내 카페 자리 운에 관한 고찰을 하고 있자 포커스가 말을 걸어왔다.

    “그쪽도 헌터죠? A급 게이트 안에서 이렇게 멀쩡한 거 보니까 최소 B급 정도는 하겠네요.”

    망할, 포커스한테 정신 팔려서 던전 공기 거부증 연기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금 와서 일반인이라고 한들 씨알도 안 먹힐 게 분명하다.

    어차피 랭킹 1위는 오늘 보고 안 볼 사람이니 공갈을 치기로 했다. 이 카페에 다시는 오지 않으리. 다른 24시간 카페 뚫어야지.

    “아하하, 법사계 A급입니다.”

    “오, A급이시구나. 직업은요?”

    내 눈치를 보며 숨어 있는 마수에게 손짓했다. 덩치가 소만 한데 머리만 바위 뒤에 박고 있으면 안 보일 줄 알았냐?

    납작 엎드려 덜덜 떨던 마수는 내가 기어이 마기를 조금 푼 후에야 낑낑거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마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테이머요.”

    그래, 그 많고 많은 직업군 중에 설마 테이머 하나 없겠어?

    “와, 테이머면 이제까지 안 나온 희귀 직업 아니에요? 직업군에 테이머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

    그 말에 마수를 쓰다듬던 손이 삐끗했다. 응, 없었다. 난 조때따.

    왜 나는 하필 그 많고 많은 직업군 중에 아직 안 나온 테이머로 공갈을 쳤을까. 가면 너머의 눈으로 지그시 나를 보고 있던 포커스가 물었다.

    “혹시 미등록 각성자? 아니, 신고는 안 할 테니까 그렇게 뛰어내리고 싶다는 표정은 하지 마시고.”

    “신고하면 저 죽이는 거예요. 저는 가난한 대학생이라서 벌금 내려면 장기 팔아야 해요.”

    A급 이상 미등록 각성자가 걸렸을 때의 벌금은 5천이다. 5천 원? NO. 5천만 원. 시커메진 내 안색을 발견한 포커스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신고 안 한다니까요! 뭔 사람이 이렇게 극단적이야? 그리고 A급이면 5천은 금방 벌어요! 장기를 왜 팔아!”

    “…진짜죠?”

    이제는 숫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포커스를 보며 안심했다. 좋아, 진정성이 느껴져.

    “그런데 능력 능숙하게 다루는 거 보니까 각성한 지 좀 된 것 같은데 왜 등록을 안 했어요?”

    뭔가 억울했다. 저는 능력을 쓴 적이 없는데요. 저는 비각성자라고요.

    사실 저는 직업이 테이머가 아니라 마왕이고 저 때문에 게이트가 터지는 겁니다. 망할 제 부하 놈들이 어디서 쓸데없는 말을 듣고 이 차원을 정복한답시고 계속 넘어와서요.

    이거 밝혀지면 글로벌 날달걀 맞을 거 같아서 그냥 입 다물고 있어여.

    …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현판 컨셉충 가면을 뒤집어썼다.

    두 손을 꼭 깍지 껴 맞잡고 고개 45도 각도로 허공을 보며 황홀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제가 사실 로망이 있어요. 테이밍한 몬스터를 게이트 밖으로 불러내서 제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 최초의 테이머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겠다는 그런 로망이.”

    “아, 그런 거 좋아하시는구나…….”

    포커스가 떨떠름한 말투로 내 말에 대꾸해 주며 슬그머니 내게서 티 나지 않게 두어 발짝 멀어졌다.

    좋아, 인생 연기였다. 덕분에 아무래도 제대로 컨셉충으로 찍힌 것 같지만.

    “그러면 이제 슬슬 보스 몬스터를 잡으러 가 봅시다. 얼른 게이트 닫아야죠.”

    포커스가 건넨 제안에 사레가 걸려 쿨럭거렸다.

    “…A급 게이트를 둘이 클리어한다고요?”

    이러지 마, 포커스. 난 당연히 댁이 둘이서는 불가능하다면서 포기하고 나갈 줄 알았단 말이야. 내 떨리는 물음에 뒷머리를 긁적이던 포커스가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예전에 해 봤더니 가능하더라고요.”

    그래서 당신이 게이트 밖으로 나가면 바로 족치려고 여기 던전 책임자 불렀단 말이야. 댁이 무슨 사X타마야? 원펀치로 A급 던전 정도는 깨부수냐고.

    내 실책이다. 랭킹 1위 S급의 수준이 이렇게 높을 줄은 몰랐다. 이게 다 조빱 주태윤만 보다가 S급 수준을 주태윤 정도로 생각해서 그래. 빌어먹을 주세글자.

    게이트를 닫는 방법은 던전 안쪽의 핵을 박살 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내 부하들을 족쳐서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게이트마다 책임자가 있고, 책임자는 게이트를 닫을 수 있단다.

    ‘그래서 책임자를 부른 건데…….’

    제에발 내 앞에 나타나거나 아는 척하거나 인사 올리지 마라. 최소한의 눈치는 탑재한 놈이었으면. 마신님아, 대리자 기도 정도는 들어줄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내 간절한 기도는 올린 지 10초 만에 깨졌다. 마신 놈이 그렇지, 뭐.

    내 앞으로 달려온 눈새의 인간화, 아니 마족화나 다름없는 베리드가 각 잡고 서더니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 저기, 이건 그러니까…….”

    눈을 부라리며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입 다물어. 나한테 말 걸지 마. 포커스가 이쪽에 관심 가지게 하지 마. 이쪽 사람들이 마계어 못 알아먹어서 망정이지.

    잠시간 내 눈치를 살피던 베리드가 슬그머니 무릎을 꿇더니 넙죽 엎드렸다.

    저, 저 눈치 없는 새끼. 저놈이 나를 날달걀 세례길로 이끌기 위한 음모를 꾸민 것이 분명하다. 짐이 선언하건대 베리드 저 자식은 이제부터 역적이다.

    갑작스러운 석고대죄에 포커스가 당황한 기색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내 숨겨진 취향을 드러내 주는 환상 던전인가?”

    환장하겠네. 무릎 꿇지 말라고! 그리고 포커스, 댁도 TMI 남발하지 말라고! 댁 비밀스러운 취향 안 궁금해!

    다시 포커스가 고개를 돌린 틈을 타 미친 듯이 손짓했다. 얼른 꺼져.

    몸을 일으켜 빠르게 어둠 속으로 숨는 베리드를 끝까지 노려보았다. 너는 이따 보자.

    던전 책임자인 베리드가 게이트를 닫기 시작하는 모양인지 던전에 파동이 일었다.

    ‘아직 게이트 닫지 마라.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보스룸에 있는 마수나 다시 마계로 돌려보내.’

    내 명령에 일렁이며 요동치던 던전의 공기가 다시 진정되었다. 보스룸에 도착하자 그곳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던전의 핵이 반짝 빛났다.

    “…보스룸이 왜 비어 있는 거지?”

    포커스는 의문을 내뱉고는 뉴비를 보는 고인물의 미소를 지으며 경험치를 쌓으라고 내게 핵을 박살 낼 기회를 양보했다.

    『게이트 클리어!』

    『다음번에는 헌터에게 기회를 양보하세요, 양심 없는 관리자님!』

    핵을 박살 내자 경험치 대신 내 속을 긁는 문구가 나왔다.

    핵을 박살 내 게이트를 클리어했으니 이제 남은 건 사람들을 게이트 밖으로 옮기는 것뿐이었다.

    같이 포커스의 수면 마법에 곤히 뻗은 사람들을 게이트 밖으로 나르면서 조심스럽게 제일 궁금했던 걸 물었다.

    “헌터명만 부르면 발광하실 거면서 왜 헌터명을 그렇게 지으셨어요?”

    “아하하, 랭킹 1위라니까 서열 1위밖에 생각이 안 나서요. 나는 당연히 닉네임 변경권 주는 줄 알았지…….”

    이게 다 어릴 적 읽은 인소의 폐해라고 포커스가 중얼거렸다. 아니, 나도 왕년에 인소 좀 읽었지만 랭킹 1위를 했다고 헌터명을 반휘혈이나 서열1위포커스로 짓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던데.

    마지막 사람까지 카페 밖으로 옮기고 몸을 이리저리 풀며 노트북이 든 가방을 집어 드는 포커스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게이트에 그쪽 있었다고 해도 돼요?”

    잠시간 고민하던 포커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생존 신고나 하죠, 뭐.”

    그러고는 곧바로 순간 이동으로 자취를 감췄다. 헌터명이랑 이상 취향만 빼면 꽤 괜찮은 사람이네.

    게이트가 일그러지며 점점 크기를 줄여 가더니 게이트에 먹혔던 카페가 멀쩡히 모습을 드러냈다.

    포커스가 떠나기 전 수면 마법을 거뒀는지 사람들이 비몽사몽 한 얼굴로 하나둘 카페 앞 길거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벽의 한산한 도로에 승용차들이 달려오더니 연신 카페 앞에 멈췄다.

    게이트 신고받고 출동한 헌터들인가 본데? 출동 시간 빠르네. 그냥 게이트 들어가지 말고 카페 바깥에서 게이트 클리어까지 기다릴걸. 하지만 후회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기에 혀를 차며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스킬 ‘탐색(AA)’을 발동합니다.』

    찾았다, 내 한 달 밥값 에X팟! 몸을 굽혀 카페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내 에X팟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자 잘생겼지만 짜증을 유발하는 면상이 눈앞에 보였다.

    “오랜만에 보네요. 나 안 반가워요?”

    “당연히 안 반갑죠. 그리고 참고로 랭킹 1위가 게이트 닫아 주고 갔어요. 새벽 3시에 헛걸음하셨네요, 수고.”

    “괜찮아요. 채현 씨가 있으니까 헛걸음은 아니네.”

    이게 어디서 끼를 부려? 그래 봤자 님은 스토커. 코웃음 치며 고개를 휙 돌리자 주태윤이 다시 말을 걸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집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채현 씨?”

    “하암, 그럼 택시비 아끼고 땡큐죠.”

    새벽에 택시비 할증 붙어서 걱정했는데 네가 쓸모가 있긴 하구나, 주태윤아.

    하품하며 땅에 떨어진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자 가볍게 뺏어 든 주태윤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손 안 잡아도 순간 이동할 수 있는 거 다 안다. 삐딱한 내 표정을 본 그가 싱긋 웃고는 순간 이동을 실행했다.

    눈 깜빡하니 자취방 빌라 앞이었다. 하늘은 아직 어두웠고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주태윤의 품에 있던 묵직한 가방을 건네받다가 문득 생각난 사실에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나 의심 안 하네요. 당신답지 않게.”

    “흠, 저다운 거라……. 채현 씨가 생각하는 저다운 게 뭔지 궁금해지네요.”

    “주태윤다운 게 따로 있나. 왜 또 게이트에 휘말린 건지, 왜 휘말려 놓고 이렇게 멀쩡한 건지, 정말 각성자가 아닌지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사람 진저리 나게 하는 게 당신다운 거지, 뭐.”

    내 빈정거림에 주태윤이 눈을 접어 웃었다. 얼굴만 봤을 때는 사람 참 설레게 만드는 미소였다. 첫 만남이 개판만 아니었어도 저 얼굴만 보고 주태윤 팬이 되었을 수도.

    여우상과 고양이상에 환장하는 나한테 있어서 여우상인 주태윤은 나름 스트라이크 존이었다.

    “채현 씨가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유혹적으로 속삭이는 말이 의외라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드디어 저 인간한테 개념이란 게 탑재된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내 의심 어린 표정을 본 주태윤이 사르르 웃었다.

    “이제 채현 씨가 싫다는 일은 안 하려고 합니다. 시간도 늦었는데 어서 들어가시죠.”

    “안 믿어요, 스토커 놈아.”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자취방 빌라로 들어갔다. 힐끔 유리문 너머로 비치는 주태윤을 돌아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데 저 인간은 불안하게 왜 저래……?

    * * *

    “폐하, 오셨어요?”

    집 나간 지 아홉 시간 만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잔뜩 지친 얼굴로 들어오는 나를 애쉬가 반갑게 맞이했다.

    말없이 가방을 바닥에 던지고 방에 침묵 스킬을 친 다음, 현관에 방범용으로 둔 야구방망이를 집어 들었다.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폐하를 뵙습니, 억!”

    “넌 좀 맞자.”

    그리고 소환당한 베리드를 빠따로 한 어절당 한 대씩 후려쳤다.

    “너는! 눈치가! 약에! 써 먹을래도! 없냐! 너 마족 맞아? 눈치가 무슨 마수보다 없어?”

    “악! 악! 폐하, 잠시만 제 말 좀!”

    오랜만에 휘두르니 손맛이 참 좋았다. 분노를 담은 빠따질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 대 칠 때마다 나오는 비명이 참으로 경쾌했다.

    “그리고 내가 분명 넘어오는 놈 모가지랬지. 너 지금 나한테 반항하냐?”

    “아니, 그게 말입니다! 저도 협박받아서, 허업!”

    “협박받아서 뭐, 말 제대로 안 해? 협박한 새끼가 마왕이냐, 내가 마왕이냐? 이 자식이 나 몰래 반역을 도모하고 있었구먼? 역모 꾸미냐? 역적 되고 싶어?”

    생각해 보니까 이 자식 때문에 공부도 못 했다. 실실 쪼개는 주태윤 면상도 봤다. 괘씸죄가 추가되어 방망이를 휘두르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한참을 신명 나게 때리고 있는데 뒤에서 부드러운 손길이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내 손을 잡아 왔다.

    “폐하, 피곤하시잖아요. 베리드는 제가 처벌할 테니 씻고 주무세요.”

    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는 애쉬를 지그시 보다가 그의 이마를 가볍게 툭툭, 쳤다.

    “애쉬, 투정도 적당히 부려야지 예쁜 법이다. 알지?”

    마계 500년 짬밥이 어디 가겠나. 속이 빤히 보이는 수작을 내버려 두는 건 아직까지는 귀여운 수준이라서, 그게 전부였다.

    내 말에 애쉬가 눈을 접어 웃었다. 그 미소는 평소의 애교 섞인 웃음과 달리 왜인지 모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폐하는 절 신경 쓰질 않잖아요. 항상 저는 폐하에게 뒷전인데, 투정이라도 부려야 폐하가 저를 잊지 않죠.”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저는 폐하의 애완동물 꼴이 나고 싶진 않거든요.”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언제 너 애완동물 취급했는데. 그리고 요즘 애완동물이라 하면 큰일 나. 반려동물로 워딩 고쳐.”

    나를 구제 불능 쓰레기로 만드는 애쉬의 말에 황당하다는 감정을 담아 따지니 애쉬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것 봐요.”

    아니, 내가 진짜 뭘 했다고……? 그리고 네가 내 시험 대신 봐 주냐? 그 와중에 조심스럽게 손을 든 베리드가 물었다.

    “폐하, 그럼 저 다시 마계로 가도 됩니까?”

    “가라, 가. 그런데 열받으니까 한 대만 더 맞고 가라.”

    남은 힘을 실어 막타를 날리고는 빠따를 휙 바닥에 내던졌다. 악! 소리를 내며 야구방망이와 함께 바닥에 뒹구는 베리드 놈 앞에 짝다리를 짚고 서서 전언을 날렸다.

    “아, 맞다. 건물에 게이트 여는 놈들 다 모가지라고 전해라. 특히 식당이나 카페!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 거 몰라?”

    “오지 말라는 소리는 안 하시네요?”

    “넘어와도 모가지.”

    짜식이,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 * *

    베리드를 다시 마계로 돌려보내고 전공책을 펼치자마자 핸드폰에 『그 꽃을 꺾지 마세요』 업데이트 알림이 떴다.

    한 화만 보고 공부할까? 오늘 마탑주 오빠 나오는데 안 보면 공부하면서도 계속 생각나자너.

    「“요새 사교계에 재미있는 소문이 돌더군요. 나 이벨린 엘리스터가 마탑주의 편애를 받는 이라나? 마탑주의 비호 아래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계집이라던데…….”

    “그들 앞에서 내가 당신에게 무릎이라도 꿇으면 그 소문이 사라질까요, 나의 이브?”

    다정한 푸른색 눈동자가 온전히 이벨린만을 담았다. 부채로 입가를 가린 이벨린이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웃었다.

    “어머, 펠릭스. 별 볼 일 없는 소문 하나 사그라들게 하려고 당신의 자존심을, 가치를 깎아내리려고요?”

    이벨린은 펠릭스가 내민 손 위에 살포시 자신의 손을 올렸다. 입술이 부드럽게 손등에 닿아 온다. 우아하게 손등 위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든 펠릭스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이 계속해서 고고하게 빛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미쳤다, 미쳤어. 무릎 꿇는뎋. 원래 확실했지만 오늘로써 더욱 어남마임이 확실해졌다. 이런 다정 헌신남을 서브남으로 두는 건 사형감이라고.

    찢어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다시 연재분을 읽다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단어에 관리자를 소환했다.

    “아, 맞다. 야, 관리자!”

    『다시 만날 일 없다면서요, 마왕 놈아. (ò_óˇ)ᕤ』

    『부르는 건 자기가 더 많이 부르네. (´-ι_-`)』

    부르자마자 튀어나오는 상태창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봤다.

    “뭐, 이 자식아. 그리고 솔직히 님도 심심하잖아?”

    『뭐라는 거예요. 나 짱 바쁘거든여? (˵¯͒⌢͗¯͒˵)』

    『그런데 왜 불렀어요? (•́ι_•̀*)』

    “내가 정말 신기한 걸 봤는데, 랭킹 1위 칭호가 무려 관리자1의 편애를 받는 자더라? 님, 포커스 좋아해?”

    내 말에 상태창이 흥분한 듯 다다다닥 글자를 띄웠다.

    『만났어요? (;◔ิд◔ิ)』

    『우와, 님이 마왕인 거 들키진 않았져? (•'╻'• )』

    “어엉, 비록 컨셉충 미등록 각성자로 오해받고 포커스의 숨겨진 취향 TMI를 알게 되긴 했지만 들키진 않았지.”

    『입이 근질근질하네여ㅎㅎ』

    『미등록 각성자가 아니라 모든 일의 원흉인데. (๑˃̶͈̀o˂̶͈́๑)』

    “말을 참 예쁘게도 하는군, 이계의 관리자. 폐하한테 건방지게 굴지 마라.”

    애쉬가 차가운 목소리로 상태창의 말을 잘랐다. 잠시간 침묵한 상태창이 빠르게 글자를 띄웠다.

    『아니죠. 이 세계에 네가 발을 디딘 순간부터 이계는 내가 아니라 너죠, 멍청한 드래곤아.』

    『그리고 누가 버릇없게 반말이져? (ꐦ ° ᷄ ° ° ᷅)』

    『마왕 놈이랑 나는 동급이라 이쪽이 말 놓는 건 상관없지만, 너랑 나 사이에는 엄청난 격의 차이가 있어요,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드래곤 놈아.』

    관리자 너 이 자식, 제법 성깔 있구나.

    애쉬가 매섭게 상태창을 노려보았다. 다시 입을 열려는 애쉬를 뒤로 물렸다. 둘이 싸우면 귀찮아지는 건 이쪽임.

    둘이 한판 붙기 전에 서둘러 관리자를 부른 본론을 꺼냈다.

    “편애하는 이유라도 딱히 있어? 혹시 그쪽이 회귀자?”

    『회귀자라면 당신을 보자마자 도망가거나 달려들거나 둘 중 하나겠져.』

    『세상을 뒤집어 놓으셨으니. ( •̀.̫•́)✧』

    “내가 언제. 내가 한 일은 귀환한 것밖에 없어.”

    『역시, 당신이 아니라서 다행이에여. (*ˊૢᵕˋૢ*)』

    “우리 알아먹을 수 있게 말 좀 해 볼까?”

    내 말에 관리자가 급히 말을 돌렸다. 이 자식, 뭐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참, 왜 편애하냐고 물었죠? 그건 옛날, 세계가 엉망이 되기 전으로 흘러간답니다. 그 당시의 저는 할 일이 없어서 서브컬쳐까지 손을 뻗었죠. ( •́ .̫ •̀ )』

    『그때가 참 평화로웠는데ㅠㅠ』

    『그러다가 차원이 연결되고 저 개념 없는 마족 놈들이 이 세계를 침범했죠.』

    『차원의 관리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당신이 가진 크라토스의 힘을 따와 이 세계의 인간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뿐. (˃̶᷄‧̫ ˂̶᷅๑ )』

    “결론만 말해라. 나 공부 좀 하게.”

    내일 전공 시험이라고. 그런데 공부 1장밖에 안 했다고.

    『현재 돌아가는 시스템이 바로 이하린의 소설에서 따온 거예요.』

    『머리 쓰는 데 수고를 덜어 준 대가로 강력한 마력이면 차고 넘치죠.』

    『충분히 설명됐죠?』

    “오, 뭐야? 나 한번 읽어 볼래.”

    『제목이 아마 『랭킹 1위의 세계 구원 시나리오』였던가?』

    제목이 익숙한데? 어라, 그거…….

    “『꽃꺾마』 작가님 전작이잖아!”

    왠지 상태창 익숙하다 싶었다. 그럼 지금 마감 X발 이상 취향 서열1위포커스가 『꽃꺾마』 작가님이라는 거야?

    무릎 꿇은 베리드를 보고 숨겨진 취향이라고 말하던 포커스, 아니 작가님이 떠올랐다. 그리고 울 탑주 오빠의 무릎 꿇는다는 대사에 환장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도 이상 취향인 거였구나. 문득 현타가 밀려왔다.

    “너 혹시 그 작가님 소설 『그 꽃을 꺾지 마세요』도 볼 생각 없냐? 줄여서 『꽃꺾마』거든? 한번 봐봐. 여주가 조오온나 멋있고 아마도 마탑주가 남주일 거야.”

    덕질 동지를 만난 것에 기뻐 열심히 영업을 시도했다. 상태창에 말줄임표를 띄운 관리자가 상태창 하나를 띄우고는 그대로 쓱 사라졌다.

    『시간 없어요. 니 부하들 땜시 바빠 죽을 것 같아여. 망할 마왕 놈아. ꉂ`o ')』

    쳇, 영업 실팬가.

    그나저나 세상에 얼마나 많은 현판이 있는데 딱 그 소설에서 모티브를 따오냐? 진짜 인생은 운발이다. 그 D급 헌터가 나랑 같은 일선 들어서 A급으로 오른 것처럼.

    * * *

    다음 날, 전공 시험지를 받자마자 나는 애쉬와 베리드를 소환해 두 놈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텅 빈 시험지에 적힌 문제는 단 열 문제뿐이었다.

    그래, 그 열 개가 다 서술형이라서 문제지.

    그중 제일 비극이 뭐냐면, 내가 어제 카페에서 머리 빠개지도록 외운 내용에서 나온 문제는 단 한 문제라는 거다. 백지 시험지를 낼 깜냥은 없어 문제 내용이라도 좀 있어 보이게 끄적였다.

    역대 마왕들의 지식을 담은 크라토스가 있으면 뭐 하냐. 거기에 착물화학 이론은 없는데. 진짜 쓸모없다.

    새하얀 시험지 위로 학과 고라니가 뛰노는 환영이 보였다. 슈밤, 학고라니.

    백지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오자 뒤에서 유일한 대학 친구, 이수아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이채현, 완전 오랜만! 잘 지냈어? 시험은 잘 봤고?”

    “아니, 시험 망했어……. 나 한 문제 풀고 교수님에게 장문 편지 쓰고 나왔다. F각이지?”

    “신호식 교수님 또 강의 때 정철 언급하시는 거 아니야?”

    수아가 키득거리며 내 등을 두드렸다.

    저 말이 무슨 말이냐면, 1학년 1학기 때, 시험지에 교수님께 드리는 편지를 쓰면 성적이 오를 가능성이 0.01% 정도 있다는 선배들의 말을 듣고 절절한 장문 편지를 썼다가 교수님이 내 이름을 기억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채현 학생?”

    “네?”

    “자네 편지가 아주 명문이던데. 정철 선생 환생인 줄 알았어. 자네는 화학이 아니라 과거 시험을 봤어야 하는 인재야.”

    덕분에 내 별명은 지난 몇 년간 ‘화학과 정철’이었다. 그리고 신호식 교수님은 명문을 받은 대가로 나한테 D+를 줬다.

    두 학점 다 재수강이지만 그래도 D가 F보단 나았다. F가 나오면 분노한 엄마의 손에 이끌려 강제 자퇴다.

    “혀늬, 그럼 우리 시험도 끝났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나 먹으러 갈까?”

    “당빠 환영이지. 나 지금 시험 땜시 일주일간 금주했잖아.”

    “헐, 네가 일주일이나? 얼른 가자. 혈중알코올농도를 다시 되돌려야지. 홍대? 아님 신촌?”

    “신촌으로 갑시다. 홍대에 도믿맨 너무 많아.”

    그렇게 대학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영혼의 술친과 어깨동무를 하고 신나게 신촌으로 향했다.

    카페에서 시간 좀 때우다가 술집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가 오랜만에 영접하는 내 사랑 알코올을 밤새 들이부은 나는 새벽 6시에 알딸딸한 정신으로 자취방 앞에 도착했다. 입구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절로 문이 열렸다.

    “어? 이재의 씨다. 우리 되게 오랜만에 보네여.”

    “이채현 씨? 한동안 안 보이셔서 이사 가신 줄 알았더니.”

    “아, 시험기간이라서 집에서 잘 안 나왔어요.”

    원룸 건물 입구에서 마주친 이재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이재의가 잠시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능숙하게 표정을 숨기고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다.

    “혹시 지금까지 술 드시다가 들어오시는…….”

    “어라, 티 많이 나요? 중간고사 끝나서 한 잔 했어요.”

    “한 잔은 아닌 것 같네요.”

    이재의의 대꾸가 웃겨서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도 잘한다고 깔깔 웃는 내 모습에 헛웃음을 지은 이재의가 원룸 입구 문을 열어 주었다.

    “취하신 거 같은데 어서 들어가세요.”

    “이재의, 너 아직도 안 갔ㄴ, 채현 씨?”

    익숙한 목소리에 실없이 흘리던 웃음이 뚝 멈췄다. 방금까지 잔뜩 꼬였던 발음이 절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안녕히 가세요, 이재의 씨. 그리고 주태윤 씨.”

    “우리 어제도 봤는데 이러기예요?”

    어제는 좀 진지하니 상식 박힌 놈 같아서 봐 줄 만하더니 또 능글 모드로 돌아간 주태윤에 노골적으로 인상을 팍 찌푸렸다.

    누누이 말하지만 능글남은 내 취향 아니다. 내 취향은 연상곱상동정다정남이라고.

    “네, 이러기예요. 우리가 언제부터 친했다고.”

    하품을 한 번 하고 걸음을 옮기려는 내 앞에 핸드폰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나 원래 이런 말 엄청 싫어하긴 하는데……. 번호 좀 줄래요?”

    “아, 매너 없는 데다가 촌스럽기까지 하네. 번호 따는 것보다 자기 번호 주는 게 요즘 트렌드인 거 몰라요?”

    “명함 줘도 연락이 통 안 오니 이렇게라도 해야지 채현 씨 번호를 받을 수 있지 않겠어요?”

    “언제 명함 줬었대?”

    기억이 안 나서 눈을 깜빡거리다가 그냥 번호나 주고 떨어뜨리자는 생각으로 핸드폰을 받아 들고 번호를 입력했다.

    사실 아현이 번호 주려고 했는데 이미 저장돼 있더라. 아쉽네, 우리 중에서 제일 입 험한 울 백야 욕설이라도 들으라고 하고 싶었는데.

    다시 핸드폰을 돌려받은 주태윤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하루 정도는 푹 자요. 이틀 연속 밤새우면 건강 버려요.”

    “3일을 밤새워도 멀쩡한데요.”

    “아직은 채현 씨가 젊어서 그렇죠.”

    뭐래. 내가 너보다 500살은 더 먹었다, 주태윤아.

    『던전 브레이크의 원인이 되어 버렸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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