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정상이 아닌 놈일수록 과거는 짠내 나는 법 (3/33)

3. 정상이 아닌 놈일수록 과거는 짠내 나는 법

자취방 침대에 드러누워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 차원의 또 다른 관리자라는 시스템과의 대화는 나에게 일거리와 걱정거리만을 더 안겨 주었을 뿐이었다.

관리자 권한은 필요할 때 아니면 쓰지 않는다고 쳐도, 회귀자의 존재가 걸린다. 그 회귀자가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미래의 정보를 어떻게 사용할지 모르다 보니 불안해 죽겠다.

만약 그 정보에 내가 엮여 있다면 평화로운 일반인 삶은 그냥 물 건너가는 거다. 진짜 국정원 끌려갈지도 모른다. 아니, 국정원이면 다행이지, 글로벌하게 퍼지면 CIA나 FBI에 끌려가는 거 아니냐고.

회귀자 부럽네. 나도 회귀 좀 하고 싶다. 2년 전으로 회귀해서 술 마시러 나가지만 않으면,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택시에서만 제대로 내리면 세상은 지금 참 평화로울 텐데.

나도 초월자, 마왕 등의 거창한 타이틀을 달지 않아도 되었을 거고.

과거를 후회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스불재라 할 말이 없긴 하지만 if AU라는 게 있잖아.

이 모든 비극은 2년 전, 내가 환생 트럭을 피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 *

대학교 2학년의 여름방학,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고등학교 친구들과 모여 새벽까지 찐하게 술을 붓고 오는 길이었을 거다.

“어어? 아저씨, 여기서 내려 주세요!”

술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던 나는 옆 동네를 우리 동네로 착각해 택시를 일찍 멈춰 세우는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 동네와 옆 동네는 16차선 도로 하나를 두고 나뉘어 있었고, 16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는 참으로 길었다.

신호등의 불은 고장이라도 났는지 꺼져 있었다. 새벽녘이라 지나가는 차는 딱히 없어서 망설임 없이 횡단보도로 발을 내디뎠다. 서늘한 새벽 공기는 점점 정신이 돌아오게 도와주었다.

술에 전 몸을 이끌고 도로의 중반쯤 왔을까, 시끄러운 클랙슨 소리가 울려왔다. 옆을 돌아보니 라이트를 켠 채 내 쪽으로 돌진하는 큰 트럭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말로만 듣던 환생 트럭……?’

치이기만 하면 보던 소설 안으로 빙의시켜 주는 만능 트럭 아니던가.

당시 내가 보던 소설은 남주 빼고 인권 없는 19금 피폐 로판이었고, 나는 그곳의 여주는 무슨, 지나가는 엑스트라로도 빙의하고 싶지 않았다.

몸을 던져 환생 트럭을 피하는 건 하수, 굴려서 피하는 건 중수, 두 발로 멀쩡히 달려서 피하는 건 고수. 후다닥 뛰어 트럭을 피하기 무섭게 내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아스팔트 바닥이 내려앉았다.

차원 이동 싱크홀이었다.

아니, 방금 환생 트럭처럼 장난이 아니고 진짜 차원 이동 싱크홀. 진짜 싱크홀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지지 이렇게 슬라임에 파묻히는 것 같은 느낌은 안 날 거 아니야.

그렇게 나는 추락했다. 한참을 추락하던 내가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뜬 건 내 몸에 닿는 물컹하고 축축한 느낌 때문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내가 본 건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검붉은 눈동자였다. 웬 남정네와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식은땀을 흘리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끝내주는 퇴폐형 미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노려보던 남자가 고통 어린 신음을 흘렸다.

‘나 설마 피폐 로판 속으로 빙의한 거?’

매우 19금스러운 도입부에 급히 옆머리를 잡아당겨 머리 색부터 확인했다. 굵게 웨이브 진 검은색 단발머리. 내 머리와 똑같다. 그럼 옷은…….

“헉!”

옷을 내려다보자마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입고 있던 흰 티는 붉은 피로 흠뻑 물들어 있었다.

내 아래 깔린 미남은 두 가지 의미로 19금이었다. 고통 어린 신음이 야한 의미의 19금이라면 몸 상태는 고어의 19금이다.

배가 갈라져 내장이 쏟아져 나오기 일보 직전의 상처 부위를 발견하자 술기운이 싸악 가셨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일으키려 시도하자마자 멱살이 잡혔다.

아무래도 여기 19금 피폐 로판 속 세계가 맞는 거 같아. 빙의가 아니라 내 몸으로 차원 이동한 거긴 하지만.

“치료, 얼른 치료 좀 어떻게…….”

허둥지둥하는 나를 올려다보던 남자가 무어라 입을 열어 말을 건넸지만,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망할, 그나마 유일하게 인권 존재하는 남주에게 붙어서 싸바싸바 좀 해 볼까 했더니만 패시브로 언어 버프도 안 주다니.

왜인지 모르게 공기가 너무 무겁고 텁텁해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사막의 건조한 공기라도 들이마신 것처럼 목이 따가웠다.

“저기요, 댁이 하는 말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멱살이 잡힌 채로 숨만 가쁘게 몰아쉬고 있자, 미간을 팍 찌푸린 남자는 내 왼쪽 가슴에 손을 덥석 가져다 댔다.

“아, X발! 지금 어디에 손을 대? 당장 손 안 떼, 이 변태 새끼야?”

기겁하여 손을 뿌리치려고 버둥거렸지만, 악력이 장난 아니었다.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리며 남자가 손을 내려 내 심장 쪽에 손톱을 세웠다. 손톱이 내 옷을 찢고 살을 파고듦과 동시에,

“컥! 이, 이게 뭐ㅇ…….”

가슴이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워졌다. 눈앞에 빛이 번쩍였지만, 내 환상인지 실제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시야가 아른거리며 흐릿하게 번져 나갔다. 목구멍에서 뭔가 뜨뜻한 게 올라와 토해 내니 시뻘건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목을 붙잡고 헐떡이자 다시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고통이 나를 덮쳐 왔다.

“크라토스… 이가 인간이라.”

이제야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고통에 몸부림치느라 띄엄띄엄 들릴 뿐이었다. 몸 안 구석구석 모세혈관 끝까지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깨어났다.

심해 한가운데에서 깊숙이, 더욱 깊숙이 바다의 끝을 향해 끌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할 광활한 힘이 심장을 중심으로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있었다.

“…나한테 대체, 무슨―”

“인간의 육체로 크라토스의 힘을 받는데 당연히 멀쩡할 리가, 없지.”

아직도 내 가슴께에 얹어진 손의 손목을 꽉 쥐고 힘없이 중얼거리니 뚝뚝 끊기는 대답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미친 사이코 자식한테 잘못 걸린 게 틀림없다. 크라토스는 또 뭔데?

“네가 나보다 오래 살 수 있을, 지 궁금해지는군. 그걸 못 보고 가서 아쉬울, 따름이야.”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남자는 질 나쁜 비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죽으라고 이 지랄한 거냐? 고통으로 시야가 붉게 물들었지만, 이제는 고통보다 분노의 크기가 더 컸다.

핏발 선 눈으로 매섭게 남자를 노려보니 남자가 피를 토하며 큭큭거렸다.

“1마계의 모든 마족이 네 목숨을 노릴 거다. 잘 살아남아 보도록, 인간.”

그게 남자의 마지막 말이었다. 적안이 힘없이 감김과 동시에 내가 쥐고 있던 그의 팔이 툭 떨어졌다. 점점 싸늘하게 식어 가는 시체 옆에서 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보려고 발악하며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숲 위의 하늘을 덮을 정도의 거대한 크기의 블랙 드래곤이 육중한 몸체를 이끌고 내 바로 앞의 땅에 엄청난 진동을 일으키며 내려앉을 때까지 그 존재를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폐하?]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파고들었다. 한층 더 예민해진 감각은 그 떨림조차 용납하지 못했다. 손바닥으로 귀를 꽉 막고 몸을 웅크렸다. 블랙 드래곤이 거대한 머리를 남자의 시체 쪽으로 기울였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폐하! 이포스! 제발 눈 좀 떠 봐! 아아악!]

드래곤이 절규하자 귀를 파고드는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멀미할 때처럼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렸다.

제발 좀 닥쳤으면 좋겠네. 손에 단단히 힘을 주며 이를 갈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던 드래곤의 희번덕한 붉은 눈깔이 나를 향해 돌아갔다.

[네놈인가? 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히 마왕을 시해한 것이냐?]

“머리 울리니까 좀 닥쳐!”

아파서 눈에 뵈는 게 없어진 나는 드래곤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렀다. 저 드래곤이 빡쳐서 나를 밟아 죽이든 씹어 먹든, 이 고통에서만 해방해 준다면 오케이였다.

[감히, 지금 누구한테……!]

닥치라니까 더 난리네. 분노로 울부짖는 드래곤 때문에 내 짜증도 더 심해졌다. 저걸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슬금슬금 머리를 지배하자마자 그렇지 않아도 어두웠던 숲이 점점 더 시커멓게 변하기 시작했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공간으로 변한 숲은 정말 죽음의 숲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내 주변에서 퍼져 나간 시커먼 기운이 블랙 드래곤을 무서운 기세로 짓눌렀다. 고통스럽게 몸을 비트는 드래곤 때문에 숲의 땅이 울렸다. 발광하는 드래곤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점차 고통이 가시며 텁텁했던 공기가 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편안하게 숨을 고르자마자 땅을 울리는 진동이 사라졌다. 그리고 멱살을 잡아채는 손이 느껴졌다.

슬그머니 눈을 뜨자, 흑발 숏컷에 어두운 피부를 가진 여자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왼쪽 눈가의 피부는 화상 흉터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희번득한 적안 덕분에 저 여자가 방금 내 앞에서 발악하던 드래곤임을 알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시커먼 기운은 사라진 상태였다.

“어째서 네놈한테 크라토스의 힘이 느껴지는 거지?”

“저놈이 나한테 넘겼으니까.”

내 대답에 더욱 단단히 내 멱살을 틀어잡던 드래곤은 이제는 싸늘한 시체로 변한 남자를 보며 어째서 인간 따위한테 크라토스를 넘긴 거냐고 중얼거렸다. 계속 들려오는 단어에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나만 묻자. 크라토스가 대체 뭔데?”

“하, 크라토스도 모르는 인간한테 그걸 넘기다니. 이포스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

미친놈 생각을 내가 알겠냐. 혹시 내가 강탈한 거로 오해하는 게 아닌가 고민하자마자 드래곤이 크라토스의 설명을 시작했다.

“크라토스는 제1 마계 마왕의 상징이다. 전대에게서 물려받지 않는 이상은 강제로 뺏기조차 불가능한 계승 증표이자 오직 마왕에게만 허락되는 힘이지. 크라토스를 소유한 자는 1마계의 모든 마족들을 지배할 권리를 가지게 된다.”

들려오는 낯선 단어에 몸을 굳혔다. 고통이 그나마 누그러지자 머리가 맑게 개며 서서히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최근까지 보던 소설이자 강력한 책 빙의 후보였던 19금 피폐 로판, 『종달새의 날개를 꺾으면』에는 마계랑 마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머릿속을 필사적으로 뒤져 BL 장르까지 스펙트럼을 넓혀 가며 크라토스와 이포스, 1마계 등의 키워드를 찾았지만 그런 소설은 없었다.

“역대 마왕들의 고유 능력과 지식을 모조리 네 힘으로 흡수하는 거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가 쉬이 견딜 수 없는 거고.”

“그럼 그게 나한테 있다는 건…….”

“네가 이제부터 1마계의 마왕이라는 뜻이지.”

나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책 빙의가 아니고 진짜 차원 이동이었다. 그런데 이제 마왕직을 곁들인.

마왕이라니, 내가 마왕이라니……!

정신 줄을 놓은 내 얼굴에 드래곤이 한숨을 쉬며 쥐고 있던 멱살을 놓았다. 땅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으며 절망했다.

책 빙의 전 한창 로판 유행이었던 차원 이동에서도 여주는 신의 부름을 받아서 온 성녀 대우를 받거나 마왕 때려잡는 예언의 용사(보통 힐러 롤이 많았다)가 되어 이고깽을 찍었다.

여주가 마왕직을 강제로 떠맡은 소설은 없었단 말이다.

나한테 왜 이래? 아니, 이 대사도 남들은 소설 속 엑스트라에 빙의돼서 남주에게 치던데 왜 난 이 세계에게 치고 있는 거지?

머리를 쥐어뜯고 있자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던 드래곤이 나한테 한 손을 내밀었다.

“자기소개부터 하지. 나는 네 전대 마왕 이포스의 최측근인 세이블이다.”

“나는 이채현.”

가볍게 손을 맞잡으면서도 경계를 놓지는 않았다. 쟤가 나 죽이고 크라토스 빼 갈지 어떻게 알아. 여전히 나를 못 미더운 눈길로 보던 세이블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지금 1마계의 정세를 간단히 말해 주지. 일곱 개의 마계 중에서 제일 혼란스럽고 황권이 약한 곳이 지금의 1마계다. 이포스가 이곳에서 죽은 이유도 황권을 노리고 크라토스를 제 것으로 만들려는 세력의 짓이 유력해.”

하필 떨어져도 제일 뭐 같은 곳에 떨어지냐. 내 뽑기 운이 아무리 꽝이라지만 차원 이동 세계관 운까지 안 따라 줄 필요는 없잖아.

“그 세력의 우두머리가 현 서열 2위, 기르카스다.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네 목숨이 위험할 거라고 미리 경고하지.”

으, 무슨 서열 놀이 하냐. 내가 초딩 때 뗐던 인소도 아니고. 그럼 나는 마왕이니까 마계 서열 1위냐? 질색한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내 어깨를 양손으로 단단히 부여잡은 세이블이 냉정한 말투로 충고했다.

“충고 하나 해 주지. 마계에서는 힘과 서열이 판단의 전부다. 네가 어떤 세상을 살아왔건, 그 세상의 법과 규범은 마계에서 통하지 않아.”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잡힌 어깨가 욱신거렸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밟지 않으면 밟힌다. 힘으로 짓누르고, 이용 가치를 철저히 따지고, 네 편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죽여. 그렇게 해서 모든 마족의 위에 군림해. 그전까지는 난 너를 마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다.”

정말 진지하게 이 생각이 들었다. 그냥 세이블한테 크라토스 넘기고 인간 마을로 잠수 타면 안 될까? 나름 문명 세계에서 살다가 온 사람에게 마계의 생태는 너무나 가혹했다.

“혹시 마왕 할 생각 없어?”

“제 약함에 지레 겁먹었군. 약한 것은 살 가치가 없지. 이곳에서 약하다는 건 죽을 운명이나 다름없다는 소리야, 인간. 꼴을 봐서는 너도 곧 죽겠군.”

마치 버러지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세이블이 더러운 것이라도 만졌다는 듯 내 어깨에서 뗀 손을 털었다.

그 싸늘한 눈빛을 마주하며 이를 갈았다. 이상한 차원으로 넘어온 것도 짜증 나는데, 죽으라고 고사까지 지내는 상황이 너는 좋겠냐?

“웃기지 마.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운명이 어디 있어? 그딴 운명 따윈 X까라 그래. 바닥을 기어서라도 살아남아 네 잘난 그 믿음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 줄게.”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거다. 가족과 친구들과 와이파이가 있는 내 원래 차원으로.

그리 결심한 나는 내 세계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물품인 스마트폰을 꽉 쥐었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지그시 나를 내려다보던 세이블은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는 나를 지나쳐 전대 마왕의 시체 앞으로 걸어갔다.

전대 마왕의 시체를 흙으로 덮고 그 앞에서 잠시 묵념한 세이블이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숲을 벗어나지. 언제 놈들이 습격해 올지 모르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일단 이곳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이는 세이블뿐이었다.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받은 힘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앞장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세이블을 급하게 따라갔다.

“혹시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에 대해서 알고 있어?”

내 물음에 잠시간 고민하던 그가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마왕성 내의 서재에 있을지도. 그곳의 서재에서는 모든 정보를 찾을 수 있으니.”

목표가 생겼다. 마왕성 입성이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야 까짓것, 피의 숙청 한번 해 주지.

일단 세력을 모아야 한다는 그의 뜻에 따라, 세이블이 나를 끌고 도착한 곳은 전대 마왕 이포스의 또 다른 최측근이자 그의 친우인 실버 드래곤의 레어였다.

“그런데 왜 나를 도와주려는 거지?”

“이포스가 너를 선택했으니까. 그가 널 선택한 이유가 있겠지.”

그냥 죽기 전에 눈앞에 보인 아무나한테 넘겨준 게 아닐까. 물론 세이블이 파티 탈주할까 봐 속으로만 생각했다.

레어에 한 발을 내딛자마자 짙은 피 냄새가 풍겨 왔다. 전보다 훨씬 예민해진 후각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레느아!”

실버 드래곤이 레어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었다. 은빛 비늘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세이블이 급히 실버 드래곤한테로 달려갔다.

“드래곤 하트가 파괴됐네.”

역대 마왕들의 힘과 지식을 전승한다는 말이 헛말은 아닌 듯 상처 부위를 보자마자 드래곤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음에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세이블이 실버 드래곤의 시체를 붙잡고 절규를 토하는 동안 나는 레어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노을을 담은 붉은 눈을 깜박이고 있는 해츨링과 눈이 마주쳤다. 저 실버 드래곤의 새끼인가? 용케 죽지 않았군.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세이블을 불렀다.

“세이블, 여기 해츨링 하나 있는데?”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쓱 닦은 세이블이 해츨링을 힐긋 쳐다보고는 다시 실버 드래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레느아의 아들이다. 내 대자이기도 하고.”

“애쉬예요. 그런데 그쪽은 누구예요? 세이블은 성격이 더러워서 어머니랑 마왕님 말고는 친구 없는데.”

고개를 기웃하며 묻는 해츨링은 꽤 귀여웠다.

“새로운 마왕.”

내 대답에 해츨링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츨링을 빤히 보다가 세이블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한 걸음을 옮기자마자 다리를 꼭 잡아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저도 데려가요.”

울먹이는 해츨링의 말에 세이블이 차갑게 일갈했다.

“널 데리고 다니라고? 헛소리하지 마라. 방해만 될 뿐이니 조용히 레어에 처박혀 있어.”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해츨링을 힐긋 내려다보고 볼을 긁적이며 세이블에게 말을 건넸다.

“왜? 그냥 데려가지 그래?”

“짐 덩어리 하나가 더 생기는 거나 다름없어. 쟤가 성체가 되려면 아직도 100년이나 남았다고. 해츨링이 왜 보호받아야 할 존재인지 알 텐데? 그렇지 않아도 너라는 짐 덩어리가 있는데 또 여기서 짐을 얹자고?”

…짐 덩어리. 생전 처음 받아 보는 취급에 머리가 띵해졌다. 우리 엄마도 나한테 짐 덩어리라고 한 적이 없는데……!

“대자라며? 친우의 아들이고. 약해 빠진 해츨링 혼자 있으면 죽을 게 분명하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지? 당장 우리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걸 명심해.”

마족들 마인드는 대충 저런 모양이군. 진짜 이용 가치 한번 철저히 따지네. 피도 눈물도 없는 마족쉑. 인간 말종 쓰레기를 보는 듯한 내 표정에 세이블이 정색했다.

“그럼 네가 책임지든가. 난 상관하지 않을 테니.”

매정한 말에 한숨을 내쉬며 해츨링을 안아 들었다. 엄마가 죽은 레어에 애 버려두고 가기는 좀 그렇잖아.

“최대한 지켜 주긴 하겠지만 나도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상황이라 살아남는 건 셀프다. 알았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마왕님을 지켜 드릴게요.”

“말이라도 고맙다.”

해츨링이 내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아, 그런데 생각보다 좀 무거운 듯. 자기 발로 걸으라 하면 또 울겠지……?

레어를 빠져나오자마자 세이블이 레어를 무너뜨렸다. 이제는 드래곤의 무덤이 된 레어를 바라보다가 해츨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몸을 돌렸다.

그렇게 나는 마계에 떨어진 첫날,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내가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크라토스의 힘을 다루는 연습이었다. 크라토스의 힘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했고, 역대 마왕들의 고유 능력을 모조리 가지고 있는 터라 능력 파악만으로도 몇 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하도 능력이 많다 보니 내가 자주 쓰는 능력은 몇 개로 한정되어 있었다. 어둠과 염력, 전기, 신체 강화, 독, 불 같은 전투 특화형 능력과 타임 스톱, 공간 왜곡, 분석 같은 서포트 능력.

아무래도 내 꼴을 보니 세력을 모으는 것보다는 능력을 익히는 게 먼저일 것 같다는 강력한 세이블의 주장에, 그의 지도하에서 열심히 굴렀다.

“대체 뭘 하다 왔기에 체력이 이렇게 쓰레기지? 근육도 하나 없고. 이게 슬라임 몸인지,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인지 구별이 되지를 않는군.”

훈련 시작한 지 한 시간 만에 바닥에 뻗은 나를 내려다보며 세이블이 혀를 쯧쯧, 찼다. 맨날 침대에 누워서 웹소설이랑 너튜브 보고 운동이라곤 숨쉬기 운동이 전부였던 사람에게 뭘 바라?

숨을 헐떡이며 축 늘어진 나에게 애쉬가 물을 건넸다. 넘겨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누워 있던 바닥이 시원해진 것을 보니 애쉬가 제 고유 능력인 냉각을 사용한 모양이다.

“세이블은 왜 마왕님한테 반말해요? 호칭도 마왕님이나 폐하라고 제대로 안 부르고.”

“나는 이 녀석이 마왕성의 왕좌에 앉기 전까지 마왕으로 인정 안 해.”

“이거 하극상 아니에요, 폐하?”

내게 달라붙어 배시시 웃는 애쉬의 반짝거리는 은발을 헝클어뜨렸다. 이제 애쉬는 해츨링의 모습보다 인간화 모습을 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인간화 모습이 은발에 적안이라 꼭 토끼를 떠올리게 했다.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대답했다.

“내버려 둬. 내가 왕좌 앉는 순간 쟤는 나한테 숙청당할 거니까.”

“그전에 네가 죽을 확률이 더 높아 보이는데?”

“그럼 지금이라도 손절하든가. 안 말림.”

내 시큰둥한 맞받아침에 세이블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전대 마왕을 떠올리는 거겠지. 아직까지 세이블이 내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충성심보다는 전대 마왕에게서 비롯된 책임감에 더 가까웠다.

내가 전대한테 별로 좋은 감정은 없다는 게 문제지. 아직도 가끔 그 자식이 크라토스 넘겨 놓고 웃는 얼굴이 악몽에 나온다.

“저는 항상 폐하의 옆에 있을 거예요.”

세이블이 나간 자리를 가라앉은 눈으로 보고 있자, 곱게 눈을 휘어 웃은 애쉬가 나에게 속삭였다. 대모란 마족 인성이 저 모양이라 애쉬는 유독 나한테 의지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의 은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말없이 피식 웃었다. 모두 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나를 향한 맹목적인 애정이 싫지만은 않았다.

* * *

내가 기르카스를 죽이기까지의 200년간의 여정을 간단하게 압축해 보자면, 배신과 통수, 서열질의 나열이었다. 드라마 「왕X의 게임」도 이렇게까지 스펙터클하지는 않을 거고, 영화 「반X의 제왕」도 이렇게까지 스케일이 크지 않을 거다.

바닥부터 기어 올라온 최약체이자 최초의 인간 마왕. 이것이 내게 붙여진 타이틀이었다. 물론 그 타이틀은 독이 되었지 도움은 되지 않았다.

소식 듣고 나를 밟으려고 온 놈이 한 바가지였고, 크라토스를 노리는 놈이 한 바가지였다. 내 멱살을 잡고 크라토스를 내놓으라고 협박질한 놈까지 있었으니 말 다 했지, 뭐.

물론 그놈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 손에 모가지가 따였다.

“게임을 시작하지. 종목은 눈치 게임이 좋겠군. 내가 관심법으로 보아하니 네놈이 내 통수를 치고 기르카스 놈한테 붙을 준비를 했던데. 이 새끼 배신자다, 끌어내.”

“감히 인간 따위? 네놈 머릿속에 마구니가 가득 찼구나. 건방지다, 끌어내.”

“누구인가? 누가 기르카스 님 소리를 내었어? 이 새끼 첩자다, 끌어내.”

“세이블, 나 지금 너 보니까 심장이 엄청 두근거리는데 이거 부정맥이야? 아, 폭주 전초전이라고?”

끊임없이 배신각을 재는 부하 놈들과 그놈들의 머리 위에서 손절각을 재는 나의 목숨을 건 눈치 싸움, 내가 인간이라고 기어오르는 놈 밟아 주기, 쭉정이 고르듯 기르카스 새끼가 보낸 첩자 골라내기, 크라토스의 과도한 사용으로 폭주하기, 기타 등등.

소년 만화에서 보는 동료 간의 의리! 우정! 너 내 동료가 돼라! 이딴 시추는 존재하지 않았다. 차라리 「데X노트」의 통수 싸움에 더 가깝달까. 아무도 믿지 않고 주변의 모두를 끊임없이 의심하다 보니 어느새 의심병 말기에 인간, 아니 마족 불신증까지 왔더라.

“아, 집에 가고 싶다…….”

그럴수록 고장 난 핸드폰을 붙잡고 내 원래 차원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떠올렸다. 내게 무조건적인 신뢰와 애정을 주던 그리운 이들을.

[엄마 아빠, 보고 싶어] ✗❘↻

[다시는 밥투정 안 할게] ✗❘↻

[백야… 너 남친이랑 여행 간 거 너희 어머니한테 들킨 원인 나야……. 하필 딱 동네 마트에서 너희 어머니를 만나서……. 진짜 쏘리] ✗❘↻

[센, 공무원 시험 합격했냐?] ✗❘↻

[미안해. 방학 때 가족 여행도 가고 가족사진도 찍기로 했는데.] ✗❘↻

[잘 지내?] ✗❘↻

[여긴 벌써 50년이나 지났네. 거기는 시간이 안 갔으면 좋겠다.] ✗❘↻

[혹시 나 잊은 건 아니지?] ✗❘↻

[내가 돌아갈 때까지 살아만 있어 줘] ✗❘↻

[제발] ✗❘↻

핸드폰이 완전히 고장 나기 전에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냈지만 애초에 보내지지를 않으니 돌아오는 답장도 없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보낼 때마다 괜히 기대만 커져서 돌아오는 실망을 버틸 수가 없었기에.

200년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전혀 늙지 않은 신체를 보며 정말 내가 평범한 인간과는 거리가 멀어졌음을 실감했다. 만약 원래 차원으로 돌아가더라도 예전처럼 지낼 수 없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이미 나는 평범한 인간 이채현으로서 보낸 시간보다 마왕으로 보낸 시간이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긴데, 내가 다시 그 평화 속에 섞여서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갈 수 있을까.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한 가지 사실을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집에 가는 방법도 모른다. 일단 집 가는 방법부터 알아내고 고민하자.

그러려면 저 자식이 앞을 딱 막고 있는 마왕성부터 들어가야 했다.

200년 만에 마주하는 역적 놈의 면상은 빌어먹게도 반반했다. 반질반질 빛나는 면상을 보고 있으니, 절로 빡침이 올라왔다. 내가 죽어라 구르는 동안 저 새끼는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았길래 때깔이 저렇게 좋아?

“용케 여기까지 왔군. 그 근성만은 칭찬해 주지, 인간.”

느긋하게 나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트는 놈을 향해 살포시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주며 대꾸했다.

“엿이나 먹어, 역적 놈아.”

그 짧은 대화를 끝으로 1마계 내에서의 마지막 전쟁이 시작됐다.

내가 지금까지 멀쩡히 살아 있는 모습을 보면 눈치챌 수 있듯이, 일주일 동안 치러진 전쟁의 승자는 나였다. 허투루 서열 2위라는 이름을 가진 게 아닌 듯, 나 역시 거의 죽기 직전의 상처를 입고선 놈을 죽일 수 있었다.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손등으로 쓱 닦아 내고는 기르카스의 멱살을 잡아채 물었다.

“하찮은 인간 따위에게 죽는 기분이 어때?”

“네가 감히……!”

“감히라니. 감히 마왕 앞에서 건방지게.”

퍽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탕이 된 속 때문인지, 웃을 때마다 어쩔 도리없이 기침과 피가 쿨럭 튀어나왔다. 울컥 올라오는 피를 눌러 삼키고 여유가 사라진 검붉은 색 눈을 마주했다.

놈의 부상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마의 상처로 인해 앞머리는 피에 젖어 엉키고, 내 공격에 찢긴 그의 옆구리는 점점 짙은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부상은 엇비슷했지만,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잘 가, 패배자 역적 놈아.”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기르카스를 향해 환하게 웃어 주며 놈의 왼쪽 가슴에 손을 찔러 넣었다.

내가 기르카스의 심장을 터트림과 동시에, 제1 마계의 내전은 막을 내렸다.

내전이 끝나고 나한테 남은 건 거르고 걸러,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온전한 내 세력과 200년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힘 조절, 그리고 강력해진 황권이었다. 오히려 내게는 득이 된 상황이지.

부상을 치료하는 동안 세이블과 애쉬가 부하들을 이끌고 기르카스의 잔여 세력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역시 강자존, 약육강식의 세계답게 압도적으로 센 놈이 생기니 안정되는 속도가 빨랐다.

1마계가 확실히 안정되자마자 내 측근들을 이끌고 오직 마왕만이 열 수 있는, 내전으로 인해 몇백 년간 굳게 닫혀 있던 마왕성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마왕이 된 지 200년 만에 마왕성으로 입성했다.

“선대 마왕들의 미적 감각이 그닥 좋은 편은 아니었나 봐?”

“무슨 소리입니까, 폐하. 지금 봐도 세련되어 감탄이 나올 정도인데요.”

책사 안드라스가 나를 교양이라곤 모르는 촌놈 보는 눈으로 보며 외알 안경을 쓱 올리고는 반박했다.

진짜 마족 놈들 취향 이해 안 간다. 저 장대에 꽂힌 해골 두개골이랑 널브러진 갑옷들이랑 여기저기 꽂힌 대검들이 세련?

이제까지 덤벼 왔던 용사들의 흔적을 전리품처럼 전시해 놓은 긴 복도를 지나 중앙 홀로 들어가는 거대한 문을 열었다.

내가 한 발을 내딛자마자 홀의 촛불에 불이 확 피어올랐다. 샹들리에가 빛나며 어두웠던 중앙 홀이 환하게 밝아졌다.

중앙 홀의 끝에는 왕좌가 있었다.

모두를 내려다보는 지고한 자리. 마왕이 가진 권력의 상징.

어느 순간부터 발걸음을 옮기는 이는 나 하나였다. 나머지는 모두 멈춰 서 내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갔다. 계단 꼭대기에 있는 내 왕좌를 향해.

왕좌에 앉아 밑을 내려다보자 이제는 훌륭하게 성년으로 자란 애쉬를 시작으로 홀에 있는 모든 마족이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내게 예를 갖췄다.

그런 그들을 훑어보다가 여전히 서 있는 세이블과 시선이 마주했다. 잠시간 서서 나와 눈을 마주하던 세이블이 천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마왕성 입성을 경하드립니다, 폐하.”

세이블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호칭에 입꼬리가 절로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 말 한마디는 내가 세이블에게 가졌던 불편했던 감정들을 깔끔히 털어 버리는 데에 충분했다.

* * *

“뭘 자꾸 주워 오세요?”

불퉁한 물음에 피식 웃으며 내 다리에 제 머리를 비비는 마수를 들어 올렸다.

마왕성 앞의 숲으로 산책 나간 길에 어미를 잃고 싸늘하게 식은 그 품에서 낑낑거리고 있는 것을 거뒀다. 재규어와 고양이 그 어드메쯤을 닮은 마수는 온몸이 검었지만, 발과 꼬리 끝만은 하얀 턱시도 고양이었다.

“왜? 귀엽지 않나? 그리고 따지자면 너도 주워 온 거나 다름없는데 투정은.”

애쉬가 생각나서 주워 온 것도 있지만, 이걸 말하면 저 마수랑 자기가 어떻게 같냐고 투덜거릴 녀석을 잘 알기에 그냥 나만의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이름은 페리 어때?”

“페리요?”

“눈이 페리도트 색이잖아. 그래서 줄여서 페리.”

갸르릉거리며 내 손에 머리를 가져다 대는 마수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그런 내 품에서 마수를 휙 빼앗아 바닥에 내려놓은 애쉬가 내 품에 어리광 부리듯 안겼다.

성년이 지난 애쉬는 어느새 나보다 훨씬 덩치가 커져 있었다. 그 조그마한 해츨링이 이렇게 자라다니, 시간 참 빠르네.

“폐하, 저도 예뻐해 주세요. 저런 마물만 쓰다듬어 주시면 질투 나요.”

“성년 돼서까지 어리광이냐? 이제 내 품은 슬슬 졸업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은발을 쓰다듬어 줬다. 마왕성에서 유일하게 햇빛이 들어오는 공간인 서재는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장소였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원 이동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지만, 정말 모든 자료가 존재하는 곳이다 보니 내가 죽기 전까지 찾을 수 있을지 회의감이 몰려왔다.

“페리, 책은 먹는 거 아니다.”

어느새 책장으로 달려가 책 하나를 물고 뜯는 페리를 향해 가볍게 경고했다. 품에 안겨 있던 애쉬를 밀어내고는 페리가 열심히 씹고 있던 책을 들어 올렸다.

기왕 뽑힌 책 한번 읽어라도 보자는 마음으로 책 내용을 가볍게 훑었다. 책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길수록 책장을 넘기던 속도가 점차 늦어졌다.

마침내 원하는 내용을 발견한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내 다리에 머리를 비비고 있는 페리를 들어 올려 부드러운 털에 마구 볼을 비볐다.

“야, 너 대단하다. 내가 몇 년간 찾았던 책을 마왕성에 들어온 지 몇 시간 만에 찾다니.”

우리 페리 완전 복덩이네, 복덩이. 역시 고양이가 세상을 구한다!

펼쳐진 책의 페이지에는 마신 아이루스의 심장 조각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마왕성 옆에 지어진 마신의 대신전에 봉인되어 있는 아이루스의 심장 조각은 이 이야기가 전설이나 설화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여러 감정이 담긴 눈으로 말없이 책을 내려다보았다. 200년 만에 드디어 집에 가는 방법을 찾아냈다.

* * *

처음으로 마왕성에서 상석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장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앉아 서열순으로 자리에 앉는 것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마신 아이루스의 심장 조각 일곱 개를 모두 모으면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는군. 그게 어떤 소원이든.”

“그 심장 조각 때문에 마계 간 전쟁이 일어나 마계 전체가 멸망할 뻔한 이후로, 아이루스의 심장 조각은 각 마계에서 하나씩 맡아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휴전 약속의 증표나 다름없죠.”

차분한 세이블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드래곤볼을 모으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는 소리인가.

“그럼 방법은 하나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다가 엄숙하게 선포했다.

“전쟁이다.”

내 말에 흥분한 휘하 마족들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러 댔다. 역시 싸움과 전쟁에 미친 마족 종특 어디 안 가죠?

“결코 전쟁! 결코 전쟁!”

“마왕께서 전쟁을 원하신다!”

“마전이다, 우매한 마족들아!”

“우매한 마족들이라뇨. 우리도 마족입니다…….”

한 녀석이 소심한 반박을 시도했지만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고 무참히 씹혔다.

“제1 마계, 출격이다!”

날뛰는 놈들에게 참모 중 하나인 안드라스가 찬물을 끼얹었다.

“안 됩니다. 여섯 개의 마계를 모조리 적으로 돌리는 일입니다. 아이루스의 심장 조각을 하나 이상 보유하는 순간부터 평화 협정은 깨지는 겁니다. 저희의 자력으로 모든 마계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1마계는 오랜 내전으로 인해 일곱 개의 마계 중에서 최약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상태지. 하지만 지금의 1마계는 제대로 체제가 잡혀 있고 약한 놈들은 모조리 제거된 상태다. 우리를 만만하게 보고 경계를 풀고 있을 때 뒤통수를 쳐야지.”

안드라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반박했다. 창백하게 질린 안드라스가 다급히 말했다.

“아이루스의 심장 조각을 강탈하면 연합군이 결성될 수도 있습니다, 폐하.”

“아니, 연합군이 결성될 일은 없을 거다. 내가 원하는 건 강탈이 아닌 정복 전쟁이니.”

미친 스케일의 내 계획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모든 마족이 입을 떡 벌렸다. 시끌시끌하던 회의장이 순식간에 침묵으로 물들었다.

“왜? 쫄려?”

딱딱하게 굳은 녀석들을 돌아보며 턱을 괴고 빈정거렸다. 비꼬는 말에 영혼이 나가 있던 놈들이 하나둘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할 건 뭐 있냐?”

평화로운 시대가 길어지면 내 뒤통수를 칠 놈이 생길 것이 분명하니 전쟁으로 관심을 돌려 또 일어날 수 있는 내전을 막고, 드래곤볼, 아니 심장 조각 모아서 난 내 집으로 돌아가고. 이게 바로 일석이조.

“폐하가 가시는 길이 곧 제가 가는 길입니다.”

“저 역시 기꺼이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애쉬와 세이블을 시작으로 마족들이 하나둘 찬성표를 던지기 시작했다. 언제 침묵이 내려앉았냐는 듯 다시 회의장이 시장통으로 변했다. 그 난리 속에서 재정을 맡은 볼락이 손을 들고 조심스럽게 발언했다.

“폐하. 전쟁은 좋지만, 재정이 문제입니다.”

“무슨 걱정이냐? 숲 지나서 제국 하나 있잖아.”

내 말에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외알 안경을 쓱 올리며 반문했다.

“예? 설마…….”

“제국에 마수 몇 마리 풀어 넣어. 그럼 알아서 조공 바치겠지.”

내 인성은 이미 풍화되어 날아간 지 오래이므로 전혀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밑의 놈들이 더 경악했다. 아니, 마족은 니들이잖아. 왜 놀라고 난리야.

“그럼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도록 하지. 재정부는 예산 짜 오고, 참모진들은 전술 간단히 다섯 개 정도만 가져오도록.”

“…다섯 개면 간단히가 아닌데요. 좀 줄여 주시죠.”

“이상, 회의 끝. 반박은 받지 않는다.”

그렇게 회의를 마치고 숲 건너편 제국에 와이번과 마수 몇 마리 풀어 넣은 지 일주일 후,

“뭐냐, 이건?”

왕좌에 삐딱하게 앉아 있던 나는 내 앞에서 덜덜 떨고 있는 미인을 어이가 가출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마왕에게 제물로 미인을 바침. 이거 너무 클래식한 거 아니냐? 가끔은 기출 변형도 좀 하고 그래 봐라, 창의력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놈들아.

왕좌 옆에서 어느새 거대하게 자란 몸을 일으킨 페리가 침을 뚝뚝 흘리며 입맛을 다셨다. 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제지했다.

“페리, 기다려. 저거 먹는 거 아니야.”

저거 죽으면 돈 못 받는단 말이야. 내 말에 미인의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세이블의 차가운 눈초리에 눈물을 글썽이며 그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저, 저는 사가시우스 제국의, 흡, 3황녀, 브리지트―”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끊었다.

“네 이름 안 궁금하다. 그리고 필요 없으니까 다시 돌아가서 돈이나 내놓으라고 전하도록.”

내가 원하는 건 미인이 아니라 돈이다, 돈. MONEY. 바치려면 미남을 바치든가.

그런데 보면 볼수록 진짜 예쁘네. 금발에 벽안을 가진 정말 전형적인 공주님이다. 게다가 눈물 효과로 처연함이 두 배. 예쁜 애를 보다가 갑자기 든 궁금증에 황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는 물었다.

“너희 나라에 잘생긴 황자들은 없냐?”

세이블의 옆에 있던 애쉬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나를 올려다봤다. 아, 그냥 물어보는 거야, 인마.

“그, 저… 손위 황자들은 다 부황 폐하를 닮은 터라…….”

“느그 제국 황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

“그, 못생기셨… 아니, 잘생긴 편은 아니십니다……!”

피의 실드를 쳐 봤자 못생겼다고 한 거 다 들었다. 노골적으로 실망한 내 표정에 황녀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막내 황자가 그나마 부황 폐하를 닮지 않은 편이긴 합니다만… 이제 일곱 살이라…….”

“야, 됐다. 때려치워. 그냥 돈이랑 보석이나 내놔.”

이마를 짚고 손을 휙휙 저었다. 일곱 살이라니, 지금 장난하나. 내가 쇼타콤으로 보이냐? 하지만 황녀는 내 말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위대하신 마왕이시여, 제국에서 선별한 미남 100명을 보내 드릴까요? 타입별로 준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돈.”

“그게 싫으시다면 미녀 50명과 미남 50명…….”

“아니, 돈.”

“제국의 국보인 성검은 어떠신―”

“아니, 돈.”

광장 한가운데에서 중립국을 외치는 기세로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페리 먹이는 충분하니까 그냥 돈 내놓으라고, 돈.

보석 아니면 안 받는다는 내 말을 끝으로 황녀는 제국으로 돌려보내졌다. 그리고 정확히 하루 후에 금과 보석들이 마왕성 앞으로 배달왔다. 이것이 바로 창조경제.

군자금이 마련된 김에 즉시 일을 실행하기로 결심한 나는 책사들을 갈아서 나온 다섯 개의 전술을 천천히 살펴보다가 안드라스가 낸 전술 종이를 제외한 나머지를 구겨서 툭 던졌다.

“동맹을 쉬이 맺지 못하도록 제2 마계와 4마계, 6마계를 먼저 친다. 3, 5, 7마계는 그다음 순으로.”

그렇게 300년간 이어진 마계 대전의 서막이 올랐다. 페리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었다.

* * *

“문헌을 읽다 보면 참 재미있는 사료들이 많아. 다른 마계의 자료 역시 꽤 흥미로운 소재였지.”

황무지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2마계 마왕의 등을 발로 꾹 짓밟으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천 년 전, 2마계에 최악의 태풍이 불었던 건 아는지 모르겠네. 자칫하면 2마계 전체를 날릴 그 태풍을 막기 위해 그 당시의 마왕이 제 목숨을 내놓았지.”

리와인드(Rewind)로 구현해 놓은 천 년 전의 하늘은 휘말리는 구름으로 인해 시커멓게 변했다. 금방이라도 강풍이 땅을 덮치려는 듯 날 선 공기가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한 번씩 타임 스톱을 해제할 때마다 천둥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증오 섞인 적안과 마주하자 눈을 휘어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래서 말이지, 문득 궁금해지더라. 선대가 목숨 바쳐 지켜 낸 마계의 후대 마왕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미친 새끼.”

등을 짓밟은 발에 무게를 더욱 실었다. 엎드린 채로 고개만 돌려 나를 노려보는 2마계 마왕을 향해 허리를 숙여 속삭였다.

“선택해. 네 목숨과 아이루스의 심장을 내놓든가, 2마계 전체가 지워지든가.”

* * *

“뭐 해, 너네 마계 다 탄다? 그러게, 좋은 말로 했을 때 아이루스의 심장이 있는 위치를 말했으면 이 상황까지는 안 왔잖아?”

“감히 인간 주제에……!”

분노한 4마계 마왕이 내 복부에 제 검을 꽂아 넣었다. 와, 이번엔 좀 위험했다. 아슬아슬하게 급소를 피해 간 검에 그것이 박힌 채로 주저앉았다. 4마계 마왕이 검을 비틀어 빼자 울컥 피를 토했다.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어 올린 4마계 마왕의 옷자락에 타이밍 좋게 4마계를 태우던 불이 옮겨붙었다. 옷자락을 태우던 불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검을 손에서 놓친 그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땅에 뒹굴었다.

“이걸로, 쌤쌤이네?”

복부를 손으로 꾹 누르며 힘없이 키득거리자 화염에 휩싸인 그가 부들부들 떨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이루스의 심장은 마왕성, 지하창고의 벽에, 알려 줬으니 당장 이걸 ㄲ…….”

그 순간 얼음벽이 나와 4마계 마왕 사이를 가로막았다. 어느새 달려온 애쉬가 숨을 몰아쉬며 나를 부축했다. 급한 대로 대충 자힐을 걸고 투명한 얼음벽을 사이에 두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방금과 역전된 상황이 우스웠다. 마지막으로 진실 하나를 말해 주었다.

“비밀 하나 알려 줄까? 수르트의 화염은 모든 것을 태우기 전까지 꺼지지 않아.”

“뭐……? 그렇다면…….”

“맞아, 나도 못 꺼. 아이루스의 심장은 잘 받아 갈게, 마왕 친구!”

눈을 찡긋하고 몸을 돌리자 등 뒤에서 나를 향한 절규에 찬 저주가 쏟아졌다. 너무 많이 들어 이제는 익숙할 정도였다.

* * *

성벽 위에 걸터앉아 서로 죽고 죽이는 모습을 시큰둥한 눈으로 보다가 카오스를 거뒀다.

“사이가 좋지 않기로 유명한 5마계와 6마계가 손을 잡은 건 참 의외였지만, 덕분에 이렇게 도움이 되긴 되는군.”

빛 한 점 새 나가지 않던 하늘이 다시 맑아지자마자 망설임 없이 잡아 주고 있던 애쉬의 손을 놓았다. 아직도 무섭다고 내게 달라붙는 애쉬를 떼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혼란을 일으킨다는 게 이런 것일 줄은 몰랐습니다.”

“빛이 사라지면 상황 판단이 흐려지지. 게다가 평소에 사이 나쁜 것들이라서 더 쉽게 카오스에 휘말린 거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도 꿋꿋하게 내 옆에 서 있던 안드라스를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너도 손 좀 잡아 줄 걸 그랬나?”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폐하.”

안드라스가 질색했다. 인마, 네가 그러면 애쉬는 뭐가 되냐.

“5마계에는 지금 누가 갔지?”

“아마 세이블이 갔을걸요? 그러면 6마계 마왕 끌고 올까요, 폐하?”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서로 싸우다가 자멸한 마족들의 시체를 성 위에서 내려다보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제 고집 그만 부리고 심장 조각을 내놓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 * *

그렇게 심장 조각 네 개를 획득하자 최약체인 3마계와 최강인 7마계만이 남았다.

제3 마계는 1마계 다음으로 약체라고 소문난 마계이니만큼, 내가 직접 걸음 하지는 않고 부하들을 보냈다. 1마계를 너무 오래 비워 놓은 탓도 있었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마음도 존재했다.

하지만 약체여도 마계는 마계. 내가 끼어들지 않은 3마계와의 전쟁은 지금까지의 전쟁 중 가장 많은 전사자를 냈다.

“레라지드가 전사했습니다.”

“…그렇군. 레라지드에게 아들이 하나 있지 않았던가?”

전사 소식을 전해 듣고, 직속 부하 중 하나였던 레라지드의 아들 체이스터의 후견인이 되어 준 것은 내 욕심 때문에 사지로 내몬 부하를 향한 답지 않은 죄책감 때문일까.

아이를 척박한 북부의 공작성에 혼자 둘 수는 없기에 성년이 될 때까지 마왕성에 거주하는 것을 승인했다.

“그러다가 잡아 먹힌다, 체이스터.”

저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페리에게 손을 뻗는 체이스터를 식겁하여 휙 안아 들었다.

“저도 페리랑 놀고 싶어여.”

“안 돼. 다른 마수랑 놀아라.”

“싫어, 페리랑 놀고 싶어여.”

“왜 꼭 페리여야 하는지 이유를 말해 봐.”

“이유가 꼭 있어야 해여? 그냥 페리랑 놀고 싶단 말이에여.”

내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마왕성 바닥에 드러누워 울고불고 떼를 쓰는 체이스터를 보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눌렀다. 망할, 차라리 전쟁 나갈걸. 여기 있으니까 다른 의미로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오X영 박사님, 절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 주세요. 이 망할 마족 금쪽이가 왜 이러는 걸까요.

결국 페리를 고양이 크기로 만들어 주고 나서야 체이스터는 바닥 청소를 멈췄다. 너무 어리광을 받아 주는 게 아니냐고 묻는 애쉬를 빤히 보니 애쉬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폐하?”

“아니, 네가 얼마나 얌전했는지를 새삼 깨달아서.”

체이스터 녀석에 비하면 애쉬는 천사였다. 세이블은 자기 대자가 체이스터가 아닌 애쉬임에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그랜절 하면서 감사해야 한다.

왕좌에 늘어져 한숨을 푹푹 내쉬니 내 발치에 앉아 있던 애쉬가 내 무릎에 팔을 올리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당연하죠. 저는 폐하가 힘들어하시는 걸 용납하지 못하니까요.”

“그래, 그래. 착하다.”

피식 웃으며 어릴 적처럼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애쉬가 눈을 감고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 꼭 배부른 고양이 같았다.

물론 실체는 고양이가 아니라 거대 파충류지만.

* * *

“우와, 이게 뭐예여?”

“야, 너 누가 여기 들어오래?”

한창 전술 회의 중에 회의장에 난입한 망할 피후견인 꼬맹이는 빈 의자를 밟고 책상 위에 올려진 전술용 지도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꺄르륵 웃으며 지도에 올려진 장기 말을 팔로 쓸어 바닥으로 내던지는 체이스터를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거 내가 몇 시간 동안 정세 계산이랑 전술 다 생각해서 놓아둔 건데.

내 옆에 서 있던 안드라스가 질겁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아스타로드가 체이스터를 덥석 안아 들고는 회의장을 급하게 빠져나갔다.

“…안드라스.”

“네, 폐하.”

“육아가… 이렇게 힘든 거였나?”

내 넋 나간 중얼거림에 안드라스가 슬금슬금 옆으로 피했다. 마른세수를 한 번 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지도 위에 흐트러진 장기 말을 툭툭, 쳤다.

“장기 말을 깃발로 바꾸지. 쉽게 쓸려 나가지 않도록.”

내 말이 끝나자마자 벌컥 회의장의 문을 열고 다시 들어온 아스타로드가 내게 편지를 정중히 건넸다. 발신자는 현재 3마계에 총사령관으로 가 있는 세이블이었다.

아이루스의 심장을 확보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자마자 육아 스트레스가 싹 씻겨 나갔다. 회의장 바닥에 떨어진 장기 말을 보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3마계로 가야겠군. 참, 체이스터한테 자기가 어질러 놓은 건 스스로 치우라고 전하도록.”

* * *

이제 남은 건 제7 마계뿐이었다.

다른 마계들은 재기 불능 상태로 짓밟아 끼어들 수조차 없게 만들어 온전히 제1 마계와 제7 마계의 대립 구도를 세웠다. 그게 애초의 계획이기도 했다.

몇천 년 동안 7마계는 일곱 개의 마계 중 가장 강대한 힘을 지니고 모든 마계의 위에 군림했다. 그래서 그런지 다섯 개의 마계를 정복하는 데 걸린 시간이 200년이었다면, 7마계 하나를 정복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100년이었다.

“웬수 같은 7마계 마족 놈들.”

지도에 신경질적으로 깃발을 꽂아 넣으며 투덜거렸다.

1마계와 7마계의 싸움은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무서운 기세로 공격해 오는 1마계와 수를 모조리 읽고 철통 방어하는 7마계. 전력은 비슷했지만 계속 공격이 막히는 상황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대체 어떤 놈이 계속 우리 전술을 읽는 거지?”

“아마 7마계 마왕이 제일 유력합니다. 그는 미래를 읽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와, 사기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폐하의 힘도 사기입니다.”

전쟁이 길게 늘어질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모든 마계를 적으로 돌리고 멸망시킨 이쪽이었다.

자고로 성군이란 신하들을 갈아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왕이다. 내 고향의 위인, 세종대왕님의 충고를 따라 부하들을 갈아 넣었다.

“일단 가볍게 전술 100개만 짜지. 계속해서 전술을 바꾼다면 7마계 마왕 놈도 읽다가 때려치울 거 아니냐.”

“네? 열 개를 잘못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 잘 들은 것 맞다만. 숙식 제공은 마왕성에서 해 주지. 야근 수당도 쳐줄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해.”

“혹시 사표 써도 됩니까.”

“되겠냐?”

그 결과는 꽤 만족스러웠다. 역시 조상님들의 충고는 걸러서 쓸 만한 듯.

피로 붉게 물들어 원래의 푸릇함을 찾아볼 수 없는 풀밭을 지르밟으며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는 이에게로 다가갔다. 걸을 때마다 땅에 깔린 시체들이 내 신발 밑에 짓밟혔다.

큰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7마계 마왕을 아무런 표정 없이 내려다보다가 단검을 단단히 쥐고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래……. 네 놈이었군. 400년 전에 보았던 멸망의 원인이.”

힘없이 킬킬거리던 7마계 마왕이 불현듯 무시무시한 힘으로 내 멱살을 틀어쥐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와 놈의 얼굴이 바싹 맞닿았다. 핏발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그가 물었다.

“네 미래가 궁금하지 않나?”

한번 말해 보라고 고개를 까딱하자 놈이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이니 기꺼이 내 목숨을 대가로 네놈의 미래를 말해 주지. 네놈에게 달라붙은 저주는 결코 네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도록 끊임없이 너를 방해할 것이고, 네가 쌓은 카르마는 너를 지옥으로 끌고 들어갈 거다. 네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너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걸을 것이다.”

피를 토하면서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주와도 같은 예언이 끝나자마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언 고맙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난 사주랑 타로도 안 믿어.”

스무 살에 보러 갔던 타로에서는 그해에 연애운 있다고 해서 기대했건만 결국 그해는 솔로 엔딩으로 끝났고, 사주는 나보고 관복이 있다고 했지만 난 지금 관직이 아니라 왕 하고 있는데?

그 말을 끝으로 잡고 있던 단검을 그대로 7마계 마왕의 심장에 쑤셔 박았다. 서서히 그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꺼졌다.

망설임 없이 가슴을 갈라 심장에 박혀 있는 아이루스의 심장 조각을 꺼냈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집에 갈 수 있는 마지막 조각이었다.

“7마계 마왕들의 수명이 유독 짧은 이유가 있었군. 신의 심장 조각을 제 몸에 박아 놓았으니 몸이 버틸 수나 있겠어?”

심장 조각을 손에 꽉 쥐고선 죽은 자들의 땅이 되어 버린 7마계를 돌아보았다. 내가 만든 풍경임에도 아무런 감정조차 들지 않았다. 어느새 내 뒤에 서 있는 부하들에게 7마계에서의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이만 1마계로 귀환하지.”

그렇게 나는 100년 만에 마지막 심장 조각을 획득했다.

7마계 마왕 휘하의 부하 몇 놈들이 몸을 숨겼다는 보고를 받으며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버려 둬.”

어차피 난 이제 집으로 갈 거니까 노상관이다.

이제 내 앞에 남은 건 300년간의 정복 전쟁의 결과인 수많은 서류였다. 위대하신 정복 군주 어쩌고의 칭호를 들으며 500년간의 마왕직 생활의 마지막 책임감으로 일 처리를 했다.

“아, 머리 아파. 손 아파. 여기는 왜 컴퓨터도 없냐……. 엑셀이 간절하다, 진짜.”

마왕성 앞의 숲, 햇빛이 비치는 유일한 장소에서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투덜거렸다.

마왕도 땡땡이치고 싶을 때가 있지, 뭐. 햇빛을 받으며 태평하게 하품하고 있는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습관처럼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키고 뒤를 돌자 대검을 등 뒤에 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다급하게 나를 향해 달려오는 남자에게는 공격성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긴장시키고 있던 몸에서 힘을 뺐다.

“혹시, 방금 컴퓨터라고 한 게 맞으십니까?”

내 어깨를 부여잡은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간절하게까지 들리는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질문 하나를 던졌다.

“혹시 한국인?”

그 말에 눈물을 뚝뚝 떨군 남자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동과 그리움에 입을 틀어막았다.

타 차원에서 만난 유일한 동향 사람이었다.

* * *

남자의 이름은 천우현. 한국에서 차원 이동한 당시의 나이는 스물셋. 새벽 알바를 하고 오는 길에 나처럼 갑작스럽게 생긴 싱크홀에 떨어져 이 세계로 왔단다.

그리고,

“갑자기 신의 선택을 받은 자라면서 이 검을 뽑으라고 하더군요. 이걸로 마왕을 죽이라고.”

직업은 용사.

와, 이 차원 참 재미있다. 한국인 두 명 데려와서 한 명은 마왕 시키고 한 명은 용사 시키네, 망할 놈이. 코리안 「배X 로얄」 찍냐?

천우현이 눈을 내리까니 아이돌 지망생처럼 샤랄라하게 생긴 얼굴이 우수에 젖어 들어갔다. 왼쪽 눈 밑에 박힌 눈물점이 참 인상적이었다.

몇 분간 울적해 있던 그는 턱을 괴고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나를 보고 흠칫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까칠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둥글게 휘어지는 눈은 순해 보였다.

“채현 씨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아니, 그전에 어째서 마을도 아니고 마계와의 경계의 숲에…….”

마치 조난자를 보듯 걱정이 가득 담긴 눈을 마주하며 손가락으로 마왕성을 가리켰다.

“음……. 저기 저 성에서 일하고 있어요.”

“마왕성이요? 마왕성에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혹시 마족 놈들이 채현 씨를 노예나 하인으로 부린다거나…….”

마왕성을 보는 천우현의 눈이 희대의 악독 고용주를 보는 것마냥 날카로워졌다.

이건 분명히 그 클리셰렸다. 신분(혹은 직업)을 숨기다가 뒤늦게 알아 버린 상대가 배신감을 느끼고 멀어지려 하니 기어코 추격 집착 감금물 찍는 클리셰.

나는 500년 만에 만난 유일한 동향 사람과 집착 감금물을 찍을 생각이 없었기에 깔쌈하게 답했다.

“마왕이요.”

천우현은 내 대답에 눈을 깜빡이다가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혹시 마왕이 ‘마왕성 성벽 밑 왕초’의 줄임말입니까?”

“이 사람이, 지금 누굴 거지 대빵으로 만들어요?”

툴툴거리며 대꾸한 나는 얼굴을 휙 들이밀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내가 마왕 맞는데 나 죽일 거예요?”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젓는 천우현의 대답에 안도했다. 내 손으로 동향 사람 죽일 일은 없어서 다행이다. 천우현의 능력치로 봐서는 절대 날 못 죽인다.

“폐하! 어디 계십니까?”

때맞춰 나를 찾는 목소리에 한숨을 푹푹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다급하게 내 팔을 잡은 천우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또 만날 수 있죠?”

“당연하죠. 저 보고 싶으면 오후 3시쯤에 이곳으로 오세요. 그때가 제 업무 땡땡이 시간이거든요.”

오랜만에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종종 그 숲의 그 장소에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나눴다. 천우현은 내 유일한 숨통이자 같은 기억과 추억을 공유하는 유일한 이였다.

이 남자도 만만치 않게 굴렀다. 무려 서른 번이나 회귀했단다.

저 사가시우스 제국인가 싸가지 제국인가가 모시는 신인 천신은 일반인에게 달랑 성검 하나 들려 주고는 마왕 레이드를 맡긴 거다. 그것도 성공할 때까지 계속 시간을 돌려 가면서.

“가장 많이 갔던 게 마왕성의 성문 앞이었죠.”

그 말을 하며 천우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고 울부짖는 그의 앞에서 천신은 마왕을 죽이고 돌아오면 돌려보내 준다고 조건을 걸었다고 한다.

“우리 세연이…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남매 사이가 좋았나 봐요? 제 친구는 맨날 자기 오빠랑 싸웠는데, 신기하다.”

“그럴 수밖에요. 제가 스무 살 때 부모님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터라 여동생이랑 저, 둘만 남았거든요.”

당시 고3인 여동생을 홀로 두고 이세계로 떨어진 청년 가장의 사연을 들으니 부모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투정은 절로 마음 저 깊숙이 들어갔다.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천우현의 등을 토닥이며 꼭 해 주고 싶었던 말 한마디를 건넸다.

내가 기필코 데리고 돌아갈 테니까.

* * *

어느 정도 마계가 안정되자마자 나는 지금까지 모았던 여섯 개의 심장 조각을 가지고 1마계 소유의 아이루스의 심장 조각이 봉인되어 있는 마신전으로 향했다.

심장이 봉인된 기도실에 들어갈 수 있는 이는 나 혼자였다. 기도실에 들어가기 전, 나와 함께 마신전까지 온 세이블과 애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1마계를 잘 부탁한다.”

“…폐하, 어디 가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다급히 붙잡은 애쉬와 달리,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왔던 원동력을 아는 세이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준 나는 애쉬의 손을 떼어 내고 기도실의 문을 닫았다.

“우현 씨! 경비 물려 놓으라고 말해 놓긴 했는데 혹시 들키진 않았죠?”

기도실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요.”

눈을 접어 웃은 천우현이 화답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 사이에는 비장한 침묵이 감돌았다.

제단 위 허공에 떠 있는 심장 조각의 갈라진 면을 따라 조심스럽게 나머지 조각들을 붙였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네.”

그냥 전설일 뿐이었을까. 나는 헛된 희망을 붙잡고 있었던 걸까. 우현 씨에게도 괜한 희망을 심어 준 건 아닐까.

허탈한 표정으로 신전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아이루스의 심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제단 위로 빛줄기가 쏟아졌다. 꽉 막혀 있는 천장에는 빛이 들어올 조금의 공간조차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비춰 오는 빛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전신을 눌러 오는 미친 듯한 위압감에 숨을 헐떡였다. 크라토스를 받고 난 후 처음으로 느껴 보는 무력감과 공포감이 내 몸을 지배했다.

몸을 숙여 헐떡거리니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내 몸을 짓누르던 기운이 조금 가셨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한 남자가 제단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내 심장을 모두 모은 이번 대 1마계 마왕인가? 내 아이도 아니고, 이 차원의 인간도 아니군. 재미있어.”

봉인되었던 심장의 주인, 마신 아이루스의 강림이었다.

“그래. 원하는 걸 말해 봐라. 무엇이든지 들어줄 테니.”

“일단 저 사람도 어떻게 좀 해 봐요. 숨넘어가게 생겼는데요.”

목을 붙잡고 헐떡이는 천우현을 가리키며 말하자 못마땅하다는 눈빛을 여실히 드러낸 마신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의 숨소리가 조금씩 차분해졌다.

“그게 소원의 전부?”

“그럴 리가요.”

당연한 거 해 주고 퉁치려 하지 마쇼.

마신과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내가 500년간 정말로 원하던 소원을 말했다.

“저희 차원의, 저희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시간선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예전에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봤던 소원 정확히 안 빌어서 망한 사례들을 떠올리며 정확한 소원을 말했다.

어떤 여신은 자기 애인 영원히 살게 해 달라고 했다가 늙으니까 매미로 만들어 버렸던데, 그냥 원래 차원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가 막 500년 지나 있고 그러면 어떡해.

“현명하군.”

제단에서 몸을 일으킨 마신이 내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마음에 들어. 원래 차원으로 돌아가는 걸 포기할 마음은 없나? 막대한 부, 영생,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 그 모두를 너한테 안겨 주마.”

살짝 솔깃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아니, 좀 탐나는 선택지이긴 하잖아? 그렇지 않아도 전공이 취업 안 된다는 순수과학인데 헬조선에서 취준생 하느니 여기서 마왕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데 조건이 너무 좋아서 수상하다. 미심쩍다는 감정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마신이 말을 덧붙였다.

“신은 거짓을 말하지 못하지. 그리고 내 숙원을 이뤄 줄 이를 위해서라면 그게 무어가 어려울까.”

나른하게 속살거리는 말은 퍽 유혹적이었다. 잠시 흔들리는 나를 보던 마신이 입꼬리를 씩 끌어당겼다.

“그 대신 내가 그대한테 원하는 건 단 하나다.”

…뭐지? 무슨 대가를 요구할지 몰라 초조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고 마신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접어 웃은 마신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천계를 정복해. 나를 봉인해 놓은 망할 천신 놈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지.”

누가 마족들의 신 아니랄까 봐 종특 나오죠? 300년간 전쟁했는데 또 전쟁하라고? 염병이다, 진짜.

“아, 그냥 집 갈게요.”

내가 잠시 미쳤다. 가족이랑 친구들이 있는 내 원래 차원을 포기할 생각을 하다니. 진짜 누가 마족들의 신 아니랄까 봐 사람 홀리는 건 갑이다.

띠꺼운 얼굴로 고개를 젓자 마신이 대놓고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게 네 소원이라면 기꺼이 들어주지. 하지만 저건 안 돼.”

마신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 천우현이었다. 날벼락을 맞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는 천우현의 앞을 가로막고 따지듯 물었다.

“왜죠? 설마 마신이 두 사람 원래 차원으로 보내 줄 힘도 없어요?”

“빌어먹을 천신 놈의 흔적이 너무 짙게 묻었잖아.”

위압감이 다시 몸을 짓눌렀다. 내 옆을 스쳐 지나가 천우현을 향해 몸을 숙인 마신이 그의 턱을 붙잡고 속삭였다.

“내 앞에 나타나려면 적어도 이 흔적은 지우고 부탁을 했어야지.”

“아마 당신 다음으로 천신을 증오하는 자를 꼽으라면 바로 저일 겁니다.”

이를 악문 천우현이 말을 짓씹듯이 내뱉었다.

그럴 만하지. 축복이라고 걸어 준 게 마왕 죽일 때까지 반복되는 무한 회귀에, 죽여야 하는 마왕은 압도적으로 강한 동향 사람이었으니.

“그래도 안 돼. 천신의 축복을 달고 차원을 넘을 수 있을 것 같나?”

“신의 축복은 신만이 없앨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축복을 내린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오랜 봉인에서 깨어나서 처음 하는 게 천신 놈의 흔적을 지우는 거라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더러워지는군.”

마족들 성격이 왜 그 모양인지 알 것 같다. 창조주가 저러니까 피조물도 그러지, 쯧.

힘겹게 제단으로 걸어간 나는 그의 심장을 움켜쥐고는 입을 열었다.

“같이 안 보내 주면 심장 다시 박살 낼 겁니다. 다시 봉인되고 싶으면 그러시든가.”

흥미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보던 마신이 입꼬리를 올리며 나긋하게 물었다.

“재미있는 협박이군. 그대도 돌아갈 수 없다고 해도?”

“사람이 의리가 있지, 어떻게 미칠 걸 알면서 두고 가요?”

서른 번의 회귀, 그리고 또 얼마나 그 회귀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미래. 나는 어느새 정이 들어 버린 저 사람을 그 지옥에 두고 혼자 돌아가 잘 살 자신이 없었다.

묵직하게 찍어 누르는 기운에 몸을 떨면서도 심장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잠시간 나를 지그시 올려다보던 마신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정말로 마음에 들어! 봉인에서 깨어나자마자 본 것이 저런 재미있는 인간이라니! 타 차원의 인간인 것이 아까울 정도야!”

다시 고개를 돌려 천우현에게로 시선을 준 마신이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밑으로 내렸다.

“좋아, 네 소원을 들어주지. 저 인간에게 고마워해라, 천신의 사도.”

마신이 그의 가슴팍을 꾹 누르자 은청색 빛이 천우현의 심장 부근에서 터져 나왔다. 그 빛은 시커먼 어둠에 먹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발소리와 함께 기도실 문이 벌컥 열리고 절망 어린 표정으로 내게 손을 뻗는 애쉬와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기도실이 환한 빛으로 가득 찼다.

“선물을 하나 주지. 부디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웃음기 어린 마신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흐릿하게 맴돌았다. 눈부셔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니,

빠앙―!

“학생, 미쳤어? 새벽에 횡단보도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있으면 어떡해?”

500년 전, 차원 이동 싱크홀이 생겼던 바로 그 횡단보도였다.

후다닥 도보로 뛰어간 나는 검푸르게 변한 하늘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천우현 씨도 잘 돌아갔겠지? 그런데 그때도 하늘이 이렇게 밝았던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 손에 꽉 쥐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엄청난 수의 알림이 쌓여 있었다.

[부재중 전화 20건]

[엄마 - 안 들어오냐?] 오전 2:50

[엄마 - 언제까지 놀래?] 오전 2:55

[엄마 - 이채현, 전화 안 받을래?] 오전 3:01

[엄마 - 유나에게 연락했다. 2시 반에 헤어졌다면서 왜 지금까지 안 들어오냐.] 오전 3:30

[엄마 - 딸,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지?] 오전 3:59

[백야 - 야, 이채. 빨랑 집 들어가] 오전 4:02

[백야 - 너희 어머니 실종 신고하시기 일보 직전이야] 오전 4:03

[센 - 님, 설마 술 먹고 뻗어 있는 건 아니지?] 오전 4:08

실종 신고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500년이 몇 시간으로 압축된 게 참 기쁘긴 한데……. 음……. X 된 듯.

겨우겨우 기억에 의존해 집을 찾아갔지만 도어록 비밀번호는 머릿속에서 지워졌기에 초인종을 눌렀다.

“너, 이놈의 가시나! 이리 안 와? 누가 새벽까지 술 마시고 이제 기어 들어오래!”

그리고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부모님은 극대노한 얼굴로 50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딸을 반겼다.

갈갈이 찢기는 카드와 함께 내 감동은 1분 만에 증발했다.

다행히 방학이라 내가 다시 이 세상에 적응할 시간은 충분했다.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 하다 보니까 금방 다시 적응되더라. 갑자기 찾아온 평화가 낯설기는 했다.

아직까지 크라토스가 남아 있는 걸 알았을 때는 정말 아연해졌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서 크라토스를 소소하게 잘 써먹긴 했다. 혹시 몰라 반쯤 봉인해 놓긴 했지만.

그렇게 나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내 세상의 평범한 대학생 1로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온 해의 겨울방학, 게이트 사태가 터졌다. 평화로웠던 세상 끝. 그리고 회상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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