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네가 왜 여기서 나와? (2/33)
  • 2.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최종 승리자는 개뿔. 시험 없는 놈들이 최종 승리자지.

    싸강이라고 정신 놓고 흥청망청 놀다 보니까 중간고사 시험 기간이 어느새 다음 주였다. 어제도 집에서 공부한다고 책 편 지 5분 만에 핸드폰을 켜고 습관적으로 인터넷을 들여다본 덕에 실질적인 공부 시간은 고작 10분이나 됐을까.

    이대로 가다가는 학점이 C는 고사하고 D가 나올 것 같은 예감에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학교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등굣길은 순간 이동을 쓰지 못하는 게 한탄스러울 뿐이다. 전에 자취방에서 자연대 화장실로 순간 이동을 했다가 화장실 안에 사람이 있던 터라 식겁하고 기억을 지워야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로는 절대 등교할 때는 순간 이동 안 한다.

    ‘뭔 놈의 학교가 고장 난 화장실도 없어?’

    너무 꼼꼼해서 탈인 대학교 일 처리를 불평하며 자취방 문을 열고 나오자 막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이재의가 보였다. 정장을 멀끔하게 차려입은 이재의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침에 뵙는 건 처음이네요. 어디 가세요?”

    “아, 시험 기간이라서 학교 도서관 가요.”

    몇 번 얼굴 마주하자 이재의와 나는 데면데면한 이웃에서 대화 정도는 하는 이웃 사이로 발전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말을 새기며 경계한 게 무색하게도 이재의는 주태윤 친구치고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공부 열심히 하시네요.”

    이재의의 말에 양심이 찔려 멋쩍은 미소만을 지었다. 공부 하도 안 해서 최후의 수단으로 가는 건데.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원룸촌 입구까지 온 우리는 인사를 끝으로 각자의 길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학교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학생증을 찍고 들어가 제일 사람 없고 조용한 4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방을 얹고 책을 꺼내니까 옆자리 사람이 내 눈치를 힐긋 보더니 자리를 침범하여 쌓여 있던 전공책을 제 쪽으로 쓱 당겼다. 전공책 딱 보니까 물리학과네.

    한 30분쯤 공부했나, 아침에 너무 일찍 기상한 덕에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7시 기상은 나한테 무리였어.

    『저주 ‘수면(A)’을 실행합니다. 설정 시간: 30분』

    전공책을 베고 누워 가볍게 30분만 자고 시작하자는 의미로 셀프 수면 저주를 걸었다. 설정한 시간 동안은 게이트가 터져도 일어날 수 없는, 어느 의미로는 무시무시한 저주다. 하지만 깊은 숙면을 취하기에는 딱 좋아서 가끔씩 이렇게 셀프로 걸기도 한다.

    딱 30분만 자고 다시 공부하자. 일어나면 진짜 집중해서 공부해야지.

    * * *

    『저주 ‘수면(A)’을 해제합니다.』

    “…기요. 혹시 살아 계세요? 숨 쉬고 계시는 거 맞죠?”

    수면 저주가 풀리자마자 내 귀에 들리는 건 울먹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나를 조심스럽게 흔드는 손길에 겨우 눈을 떠 위를 올려다보니 플래시 불빛이 보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여자가 숨을 헐떡이며 나를 흔들고 있었다. 보니까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다.

    그제야 내가 책상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니라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급히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돌아보았다.

    …미친? 도서관 어디 갔어?

    도서관 대신 어두컴컴한 공간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이게 몰래카메라가 아닌 이상 100%의 확률로 던전 안이다.

    아니, 내가 잠든 지 30분 만에 이게 무슨 일? 우리 동네에 이어서 이제 학교까지 게이트 핫플레이스냐?

    내가 가는 곳이 게이트 핫플이 되는 건지, 게이트 핫플에 내가 가는 건지.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왼쪽 눈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뒤이어 주르륵 왼쪽 눈가를 타고 흐르는 피에 욱신거리는 상처를 손으로 꾹 눌러 지혈했다. 게이트에 휘말리며 이마가 찢어진 모양이다.

    “괜찮으세요……?”

    아니, 나보다는 그쪽을 더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던전 공기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도 걱정 어린 물음을 던지고 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필 옆에 사람이 있어서 순간 이동도 못 하게 생겼네.

    사라진 전공책을 더듬거리며 찾다가 손에 잡히는 물컹하고 축축한 무언가에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거뒀다. 플래시 불빛에 비친 손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그러니까 내 피가 아니라 남의 피.

    바지에 쓱쓱 손을 닦고는 핸드폰 손전등 모드를 켜 주변을 비추자 어둠에 먹혀 미약해진 빛이 흐릿하게나마 주위를 비췄다.

    머리나 팔다리 등 신체 부위가 한둘씩 사라진 시체, 내장이 헤집어진 시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뜯긴 시체. 주변은 온통 시체 밭이었다.

    생존자는 옆자리 물리학과와 나, 둘뿐이다. 물리학과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넋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다.

    “…몬스터들이, 흡, 일어나 보니까 바로 옆에서 막 쩝쩝거리는 소리랑 우드득 뼈 씹어 먹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요?”

    그런데 왜 우리 둘은 안 먹혔지? 내가 걸었던 셀프 수면 저주 때문에 나 완전 무방비 상태였을 텐데.

    “네, 실수로 제가 핸드폰 켜서 불빛이, 흑, 보였는데, 그냥 이쪽 빤히 보더니 캬악거리다가, 흐읍, 갔어요.”

    몬스터가 먹이도 가리는구나. 우리가 그렇게 맛없어 보였나? 새로 알아낸 상식을 머릿속에 새기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안 보일 수준으로 어두운 걸 보니 여긴 아마 던전 꽤 깊은 곳인 듯하네요. 던전 안쪽으로 갈수록 어두워진다고 했으니.”

    앞쪽을 내다보며 중얼거리자 한결 표정이 밝아진 그가 물었다.

    “혹시 헌터세요?”

    “아니요. 제 친구한테 들은 정보예요. 제 친구가 헌터라서.”

    잠시간 희망에 찼던 눈이 빠르게 식는 걸 보며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게이트 쪽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구조도 더 빨리 될 테니까. 계속 던전 안쪽에 있는 건 위험하기도 하고. 물론 내가 아니라 옆의 물리학과 분한테.

    『직감이 발동됩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어김없이 발동되는 직감은 내가 등지고 있는 쪽이 게이트 방향임을 알려 주었다. 물리학과를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여기에 있기는 너무 위험하니까 게이트 쪽으로 가야 해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못 일어나겠어요……. 구조대 올 때까지 여기서, 흑, 기다리면 안 돼요?”

    “구조대 오기 전에 저희가 죽을 수도 있어요. 몬스터가 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아 나를 올려다보는 물리학과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내가 위험한 게 아니라 당신이 위험하다니까.

    어쩔 수 없이 그를 부축하기 위해 몸을 숙인 순간, 키에엑―!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소리는 꽤 가까웠다.

    이어서 쩝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끔씩 우드득, 혹은 오도독거리는 소리로 봐서는 뼈째 씹어 먹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흐읍.”

    다급히 핸드폰 플래시를 끈 물리학과가 입을 틀어막았다. 보이지가 않으니 더럽게 답답하네. 한숨을 푹 쉬며 스킬을 시전했다.

    『스킬 ‘라이트(C)’를 실행합니다.』

    허공에서 빛이 터져 나와 던전을 환하게 밝혔다. 갑자기 밝아진 주변에 물리학과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헌터 왔나 봐요. 우리 살았어요! 저기요, 여기예요, 여기!”

    응, 아니야. 그거 나야. 너무 희망찬 목소리와 표정에 괜히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뒤쪽에서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물리학과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거 지금 무슨 일이에요? 지금 분명히 불 켜졌는데…….”

    “앞이나 옆쪽 보지 말고 발아래만 보세요. 눈 감으면 더 좋고.”

    가장 큰 이유로는 우리의 앞에 있는 거대한 몬스터의 존재고, 부차적인 이유로는 어두운 곳에서 봤을 때와는 비교조차 하지 못할 만큼 잔혹한 주변 상황이었다. 처참한 상태의 시체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야 시체가 익숙하다지만, 저 사람은 이걸 보면 며칠간은 악몽과 트라우마에 시달릴 게 분명하다.

    몹시 굶주려 보이는 몬스터는 우리를 보며 침을 뚝뚝 흘려 댔다. 정확히는 우리가 아니라 물리학과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생긴 게 정말 익숙한 몬스터였다. 전에 있던 차원에서 한 번쯤은 본 듯한 저 외형. 마수나 몬스터나 외형 비슷비슷한 건 국룰인가?

    땅을 울리며 성큼 다가온 몬스터가 물리학과 앞으로 머리를 쓱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신기하게 물리학과만을 노리고 입을 쩍 벌렸다.

    침이 머리 위로 뚝 떨어지자 실눈을 뜬 물리학과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몬스터의 입 안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급한 대로 후드티 모자를 잡아당겨 그를 뒤로 끌어당겼다.

    코앞에서 아슬아슬하게 텁 닫힌 주둥이를 보던 물리학과는 다시 벌어지는 주둥이와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며 숨넘어갈 듯이 오열했다.

    “살려 주세요! 난 아직 죽기 싫다고! 어허헝, 도서관 괜히 왔어……!”

    댁은 나랑 같이 있어서 생존 플래그 꼽으셨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줄 수도 없고, 이거 참.

    일단 물리학과를 끌고 무작정 달렸다. 다행히 몸이 무거운 몬스터는 속도가 느렸다. 하지만 문제는 내 옆에 있는 물리학과지.

    던전 공기와 두려움으로 제대로 뜀박질조차 하지 못한 물리학과는 설상가상으로 다리까지 풀려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제발 저 버리고 가지 마세요, 흑.”

    “알았으니까 일어나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흡,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

    옴짝달싹도 못 하는 사이 몬스터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스킬을 쓰고 기억을 지울까 잠시 고민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던전 벽을 더듬어 벽에 붙은 탁한 푸른색 광물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 힘껏 던졌다.

    “물어 와!”

    광물이 포물선을 그리며 저 멀리 날아갔다. 휙 고개를 돌린 몬스터가 날아가는 광물을 눈으로 좇더니 곧 광물을 쫓아갔다.

    휴, 마수랑 외양만 비슷한 게 아니라 습성까지 비슷해서 다행이다. 녀석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그쪽으로 강화한 광물 하나를 더 던져 몬스터의 대가리를 박살 내면서 안도했다.

    다시 몸을 돌린 나는 주저앉아 있던 물리학과를 부축했다.

    “몬스터 다시 쫓아오기 전에 얼른 가요.”

    물론 내가 몬스터 죽인 건 비밀이다. 나는 각성자로 오해받고 싶지 않거든. 하지만 이미 나의 비상함을 느낀 듯 물리학과가 조심스레 물어 왔다.

    “…진짜 헌터 아니에요?”

    “아니라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아참, 잊을 뻔했다. 불 끄고 가야지.

    라이트 스킬을 거두고 말없이 게이트 쪽을 향해 걷고 있으니, 게이트로 다가갈수록 점차 어둠이 걷히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흐릿하게만 들려오던 웅성거리는 소리도 점점 커졌다.

    “살았다…….”

    안도했는지 부축하고 있던 물리학과의 몸에서 긴장이 쭉 풀렸다. 게이트 바로 앞쪽에 생존자들이 몰려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세 명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그 셋의 눈이 커졌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남자들은 우리를 붙잡고 질문 세례를 쏟아 냈다.

    “혹시 던전 안쪽에서 오셨어요? 그쪽에 두 분 말고 생존자는 따로 없고요?”

    “생존자 얼마나 더 있습니까? 던전 안쪽에 혹시 헌터 있었습니까?”

    “저희도 몰라요. 저희 둘도 몬스터 피해서 겨우 도망 온 거예요.”

    내 단호한 대답과 내가 부축하고 있는 물리학과 분의 지친 표정에 그들은 더 이상 질문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우리를 놓아주었다. 한 남자가 우리를 부축해서 게이트 앞쪽으로 안내하는 동안, 남은 두 남자는 서로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했어! 사람 있었잖아, 새끼야! 네가 그러고도 헌터냐?”

    “X발, 그렇게 사람 구하고 싶으면 너 혼자 가든가. 혼자서 갈 배짱도 없는 D급 주제에 지금 누구에게 지랄이야?”

    “아. 저 자식들, 또 시작이네.”

    우리를 부축해 준 남자가 이마를 짚으며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지긋지긋해하는 말투를 봐서는 저 개싸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하다.

    “지는 C급 주제에. 공격 스킬 하나 가지고 유세 떠냐?”

    “지금 말 다 했냐, X발놈아?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던전 들어가라니까? X발, 공격 스킬 하나 없는 서포터 X밥 새끼가 입만 살아서. 니는 던전을 주둥이로 공략하냐?”

    대화를 들어 보니 C, D급 헌터인 것 같은데. 지금 자기들끼리 던전 안쪽으로 들어가기에는 능력치도 달리고 무서우니까 아예 던전 안쪽의 구조는 포기한 모양이다.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자마자 급히 내 쪽으로 달려온 힐러가 찢어진 이마를 보고 기겁하며 힐을 시전했다.

    언제 상처가 났냐는 듯 완전히 아문 이마를 문질렀다. 상처의 흔적은 이마와 소매 부분에 말라붙은 핏자국뿐이었다.

    “지금 20분째 저런 상황 반복이에요. 저 D급 헌터도 말만 저러지 절대 안 들어갈걸요. A급 게이트라 C, D급 헌터 능력으론 솔직히 감당 불가긴 하지만요.”

    내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싸움을 지켜보고 있자 치료를 마친 힐러가 한숨을 쉬고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쟤네 능력은 혹시 아가리 파이트나?

    X발무새인 듯 계속 같은 욕만 반복하는 말싸움에 곧 질린 나는 게이트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험 기간이라 도서관에 사람이 꽤 많았을 터인데도 게이트 앞까지 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예상하건대 전체 인원의 한 1/4 정도?

    비각성자들이 어둠과 던전 공기를 헤치고 이곳까지 오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터였다. 하지만 저 헌터들은 안쪽에 있을 민간인들 구조하러 갈 생각도 안 하는 것 같고.

    계속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에 슬슬 짜증이 날 때쯤,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에 건 남자가 아직도 멱살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 그 둘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자자, 그만들 싸우고. 일반인분들 불안해하시는 거 안 보여?”

    “F급은 좀 빠져! 헌터증 나왔다고 자기도 헌터인 줄 아네. 폐급 주제에.”

    내팽개치듯 상대의 멱살을 놓은 C급 헌터가 인상을 구기며 몸을 휙 돌렸다. 그러고는 말리던 F급 헌터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힘껏 밀쳤다. 떠밀린 F급 헌터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킬킬거리고 있는 C급 헌터를 D급 헌터가 질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미친 새ㄲ…….”

    D급 헌터가 중얼거리며 F급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그 중얼거림은 끝을 맺지 못했다. 어느새 소리 없이 나타난 거대한 몬스터가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F급 헌터의 머리를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방금 보았던 몬스터의 성장체인 듯, 외양은 비슷했지만, 덩치는 훨씬 거대했다. 죽음 직전의 끔찍한 단말마의 비명이 울리고는, 그 뒤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으적으적 그의 시체를 씹어 먹던 몬스터의 이빨 사이로, 잘린 F급 헌터의 팔 한쪽이 툭 떨어졌다.

    던전 안이 순식간에 침묵으로 물들었다.

    바스락대는 소리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우드득거리는 소리와 쩝쩝대는 소리만이 고요한 던전을 가득 채웠다.

    멍하니 몬스터를 올려다보고 있던 헌터들의 머리 위로 몬스터의 턱에서 흘러내린 피가 빗방울처럼 한 방울씩 뚝뚝 떨어졌다. 그 피에 기겁한 그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들이 어느 정도 몬스터와 거리를 벌리자마자 식사를 마친 몬스터는 만족스럽지 못한 듯 입맛을 다시며 다시 입을 쩍 벌렸다.

    “뭐 하냐? 빨리 실드 안 쳐?”

    C급의 윽박에 D급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불투명한 막이 사람들과 몬스터 사이를 가로막았다. 실드가 쳐지자마자 풍선이 터지듯 생존자 무리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벽에 기대어 난리가 난 생존자 무리를 구경했다.

    미친 듯이 게이트에 몸을 던져 대는 사람들.

    터지지 않는 핸드폰을 붙잡고 끊임없이 통화를 시도하거나 문자를 보내는 사람들.

    이미 포기한 듯 나처럼 벽에 기대어 죽은 눈을 하고 있는 사람들.

    죽기 싫다며 울고불고 발악하는 사람들.

    어림잡아 300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 제각각의 행동과 소음으로 금세 던전이 시끌시끌해졌다. 귀가 따가울 정도의 소음에 슬쩍 인상을 찌푸리자마자,

    쾅―!

    충돌음이 던전에 울려 퍼졌다. 언제 떠들썩했냐는 듯 던전 안이 다시 고요해졌다.

    몬스터의 머리와 실드가 부딪혀 다시 한번 충돌음이 울렸다. 불투명한 막 너머로 보이는 몬스터의 몸체 위에는 붉은 불꽃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실드에 가해진 충격에 식은땀을 흘리며 실드를 강화시킨 D급 헌터가 옆에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던 C급의 멱살을 쥐어 잡고 악에 받친 소리를 질러 댔다.

    “너 미쳤냐? 지금 여기 있는 사람 다 죽이려고 작정했어? X발, 네 등급으로 어떻게 2급 몬스터를 죽이냐고! 지금 너 때문에 다 개죽음당하게 생겼잖아!”

    “뭐라도 해 보려고 한 게 왜 내 잘못이냐? 네가 잘 막던가!”

    키에에엑! 울부짖은 몬스터가 열이 받은 듯 이번에는 머리가 아닌 몸통을 들이박았다. 제 몸에 붙은 불에 발악하며 실드를 들이받는 몬스터 때문에 서서히 실드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D급의 실드로 몬스터를 막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저 실드가 깨졌을 때다. 저 사람의 몸이 그 충격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균열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가 되자 죽은 눈으로 늘어져 있던 사람들마저 벌떡 일어났다. 모두가 게이트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죽음의 공포는 무겁게 그들을 짓누르는 던전의 공기마저 이겼다.

    “아악! 밟지 마! 밟지 말라고!”

    “밀지 좀 마세요!”

    “X발, 왜 안 열리는 건데!”

    서로를 밀치고 짓밟으면서 게이트 가까이로 가려는 사람들의 눈에는 일종의 광기마저 엿보였다.

    살고 싶다는 간절한 외침과 사람들 밑에 깔린 이의 처절한 비명, 부모님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 밀지 말라며 윽박지르는 소리와 어떻게든 앞으로 가려는 이들의 치열한 몸싸움.

    벽에 기대어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몬스터에게 죽는 이들보다 저곳에서 사망한 이들이 더 많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와 같이 던전 안을 빠져나왔던 물리학과가 내 옆에 주저앉아 있던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웠다. 비틀거리며 게이트 쪽으로 향하려는 이의 팔을 다급하게 잡아챘다. 내 손에 손톱을 세우며 그가 발악했다.

    “이거 놔요! 난 죽고 싶지 않다고!”

    “지금 저쪽으로 가면 깔려 죽어요! 게이트도 안 열리는데 저쪽으로 가 봤자 무슨 소용이에요!”

    내 말에 창백한 얼굴로 힐끔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는 게이트 앞을 돌아본 물리학과는 겨우 진정하고는 게이트로 향하려는 생각을 단념했다. 다시 내 옆에 주르륵 주저앉은 그가 힘없이 나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그쪽은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요……? 우리 지금 죽기 직전인데도 안 무서워요?”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물리학과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 왔다. 문득 그 질문 위로 내가 처음 게이트에 휘말렸을 때의 주태윤의 말이 환청처럼 덧씌워졌다.

    “지금 꽤 위기 상황인데도 태연하시네요. 꼭 걱정 없는 사람처럼.”

    살아 있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게이트 앞쪽 무리와 내 옆에서 떨고 있는 이에게 차례로 시선을 주었다.

    ‘아, 저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반응이구나.’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걱정될 리가 없잖아. 저 몬스터와 나의 관계는 지금 던전 안에 있는 이들과 몬스터 사이의 관계와도 같은데.

    완벽한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 위험 예지마저 뜨지 않는 저 몬스터가 나에게 해를 입힐 확률은 개미가 사람을 밟아 죽일 확률과도 같았다.

    그리고, 약하면 죽는 게 당연하잖아? 바로 앞에서 사람의 죽음을 보았음에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약육강식에 입각한 그런 죽음에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이리라.

    나한테는 저 몬스터가 인간을 먹이 삼는 것이 여우가 토끼나 닭을 잡아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침내, 실드가 깨졌다. 실드가 산산조각으로 박살 남과 동시에 D급 헌터가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게이트 앞에 있던 이들은 이제 광기 어린 눈으로 게이트에 몸과 머리를 박아 댔다. 마치 그렇게라도 하면 게이트 밖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믿는 듯이.

    옆에서 덜덜 떨고 있던 C급은 쓰러진 D급을 슬쩍 내려다보고는 뒤돌아 게이트 쪽으로 뛰어갔다. 몸에 불이 붙은 몬스터가 몸을 뒤틀며 D급을 향해 소리 없이 한 걸음씩 다가왔다. 여기서 죽는다면 죽을 운명이지, 뭐 어쩌겠어?

    턱을 괸 채 심드렁한 눈으로 D급을 향해 입을 쩍 벌리는 몬스터를 바라보다가 움찔했다.

    “약한 것은 살 가치가 없지. 이곳에서 약하다는 건 죽을 운명이나 다름없다는 소리야, 인간. 꼴을 봐서는 너도 곧 죽겠군.”

    나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듯, 애써 묻어 두고 외면하고 있던 오랜 기억이 갑작스레 환청처럼 귓가를 스쳤다. 그다음으로는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운명이 어디 있냐고, 운명 따위 X까라고 으르렁거리며 그 말을 한 이를 노려보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게, X발. 약하다고 죽을 운명이 어디 있냐.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웃음소리에 옆에 있던 물리학과 분이 내가 죽음 직전의 공포에 실성했다고 생각했는지 위로하듯 손을 꼭 잡아 왔다.

    이번 한 번만이다. 다음은 없어. 이를 악물고는 속으로 다짐했다.

    D급 헌터의 몸에 몬스터의 날카로운 이빨이 박히기 직전, 자조적으로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손가락을 작게 까딱했다.

    『스킬 ‘로기의 화염(AAA)’을 실행합니다.』

    『스킬 ‘레의 불꽃(C)’을 무효화합니다.』

    내 손짓과 동시에 몬스터의 몸에 붙은 불길이 순식간에 거대하게 몸집을 불려 몬스터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저 따끔하고 거슬릴 뿐이었던 방금의 화염과는 달리 제 가죽과 살을 태우는 강력한 화염에 몬스터가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빨리 이쪽으로 와요!”

    눈을 질끈 감고 있던 D급이 그 목소리에 슬쩍 눈을 떠 몬스터를 올려다보더니 필사적으로 기어서 몬스터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그를 향해 다급하게 뛰어온 힐러가 힐을 시전했다.

    다시 불투명한 막이 몬스터와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힐러가 입가에 번진 피를 닦는 D급을 닦달했다.

    “몸 상태가 제대로 회복도 안 됐는데 벌써 능력을 쓰면 어떡합니까?”

    “몬스터가 날뛴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죽어요.”

    그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몬스터가 실드에 몸을 한 번 부딪혀 왔다. 전과 다르게 실드를 박살 내려는 의지가 아닌 고통스러운 터라 몸을 가누지 못해 일어나는 충돌이었다.

    하지만 그 약간의 충격에도 D급 헌터는 기침을 내뱉으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헌터인 주제에 제일 먼저 튀었던 C급 헌터가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생존자 무리에서 빠져나와 잔뜩 으스대는 표정으로 D급 헌터를 내려다보았다.

    “내 등급으로 어떻게 2급 몬스터를 죽이냐고 했었지? 저거 보이냐?”

    지랄 마라. 내가 한 거다.

    표정을 한껏 구긴 나는 자기 주제도 모르는 C급을 띠꺼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저 인간 스킬로 착각하라고 같은 화염 계열로 공격하긴 했지만, 어쩜 저렇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뻔뻔하게 자기가 한 거라고 생각하지.

    혀를 차다가 관대하게 봐주기로 했다. 저런 놈들이 능력 얻었다고 나대다가 데드 플래그 꼽는 건 국룰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채로 비틀거리던 몬스터가 다시 한번 실드와 충돌했다.

    ‘음, 이번 충돌은 좀 위험한데.’

    “…금, 금 갔어요…….”

    옆에 앉아 있던 물리학과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실드에는 잔뜩 금이 가 있었다.

    실드가 깨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실드가 박살 남과 동시에 D급 헌터가 완전히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으아악! 살려 줘! 살려 주세요!”

    “사람 살려! X발, 헌터들은 왜 안 오는 건데!”

    다시 생존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게이트를 두드려 댔다. 실드를 박살 낸 몬스터가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쳐들어 울부짖었다.

    그것이 마지막 울음이었던 듯, 이윽고 몬스터의 거대한 몸뚱이가 기울어지더니 던전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쓰러져 경련했다.

    우연인지, 착각인지 몬스터와 눈이 마주친 찰나, 타이밍 좋게 게이트가 열렸다.

    게이트 가장 앞쪽에서 인파에 눌려 헐떡이며 몸을 기대고 있던 사람이 쓱 게이트 너머로 넘어가자 게이트 바로 앞쪽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당연한 수순으로 앞다투어 던전을 벗어나려 달려들었다.

    “한 분씩 나오세요! 한 분씩!”

    “진입하겠습니다! 조금만 비켜 주세요! 부상자 먼저 모실게요!”

    인파를 겨우 비집고 게이트로 들어온 안전 요원들과 헌터들의 지시는 죽음 직전의 공포를 맛보았던 사람들의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비켜!”

    “아, 밀지 마! 밀지 말라고, X발 새끼들아!”

    “여기 사람 깔렸어요!”

    “사람 깔렸다니까, 이 개자식들아! 니들이 인간이야?”

    덕분에 헌터들은 게이트 안으로 진입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고, 게이트에서는 실시간으로 부상자들이 생겨났다.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가 사람들에게 밟히는 남자를 보며 저런 부상도 던전 내 부상으로 보험 처리가 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게이트를 막고 있던 생존자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가자 구급 대원들이 급히 부상자들을 실어 날랐다. 정신을 잃은 D급 헌터 역시 구급 대원에 의해 부축받아 구급차에 실렸다. 힐러는 나가지도 못하고 구급 대원들과 함께 부상자 치료에 열중하고 있었다.

    점점 생존자보다 헌터의 비중이 늘어나는 던전에 슬슬 나가 볼까 싶어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자마자 누군가가 다급한 손길로 나를 끌어안았다.

    “이채현!”

    잔뜩 떨려 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말없이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나를 꽉 끌어안고 있는 백아현을 겨우 떼어 낸 윤세인이 내 양 볼을 잡고 휙휙 나를 살폈다. 둘 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너, 이마에 피…….”

    “힐 받았어.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빽, 소리 지른 아현이가 힐을 퍼부어 댔다. 몸은 치유되고 있지만 백아현이 자꾸만 내 머리를 스태프로 두들기는 바람에 정수리가 얼얼해졌다.

    “악! 악! 지금 님이 부상을 입히고 있는뎁쇼?”

    “걱정하지 말라고? 지금 이마가 그렇게 피범벅 돼서 할 소리야?”

    병원이라도 가라고 성화인 친구들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친 곳도 없는데 굳이? 지금 내가 원하는 건 내 안락한 자취방 침대에 누워서 자는 것뿐이다.

    멀쩡하니 걱정하지 말고 던전 공략이나 하고 오라고 친구들의 등을 떠밀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계속 뒤를 돌아보는 친구들을 향해 안심하라는 의미로 손을 크게 흔들어 주고는 등을 돌렸다.

    “하하, 위기 상황에 가끔씩 더 높은 등급으로 각성하는 헌터도 나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바로 그 케이스인 듯합니다. 던전 공략 끝나자마자 등급 검사부터 다시 받아 볼 예정입니다.”

    던전 밖으로 나가는 도중 자기가 이 몬스터를 잡았다고 떠들어 대는 C급 헌터를 힐긋 돌아보고 픽 비웃었다. 그래, 아무리 네가 입 털어 봤자 네 등급이 A로 바뀔 일은 절대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입 털어서 아무쪼록 미등록 각성자 있다고 의심 가는 일 없게 해라.

    밖으로 나오자마자 밝은 빛이 쏟아져 인상을 찌푸렸다. 게이트 앞은 난리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기자들, 헌터들, 공무원들, 구급 대원, 안전 요원 등등으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던전 안에 있던 부상자들이 구조받아 나오고 있었다.

    주머니에 넣어 놓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켜니 수많은 문자와 전화가 와 있었다. 엄마, 아빠, 윤세인, 백아현, 고등학교 친구들, 기타 등등.

    그러고 보니 내가 오늘 학교 도서관 간다고 삼총사 단체 채팅방에다가 말해 놨었구나. 그래서 애들 표정이 그렇게 창백했던 거고.

    부모님에게 무사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문자를 전송하고는 다른 이들에게도 무사하다고 답장을 보내 주었다.

    카메라에 얼굴 안 찍히게 후드를 뒤집어쓰고 잽싸게 걸음을 옮기려고 시도하자마자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 왔다. 아, 피곤한데 누구냐.

    귀찮음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따라 나온 아현이가 내 뒤에 있었다.

    “자취방까지 차 타고 가. 이세혁 헌터한테 부탁해 놨어. 아, 저기 있다.”

    “나야 땡큐지.”

    “집 들어가면 연락하고.”

    나를 협회 소속 헌터에게로 떠민 아현이는 다시 몸을 돌려 게이트로 향했다. 협회 구경 갔을 때 한 번 봤던 터라 안면이 있는 이세혁 씨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게이트와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주차되어 있는 차를 타, 무심결에 창문을 보자 익숙한 도서관 대신 거대한 규모의 게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와, 진짜 크네.”

    “저 게이트가 아마 전국에 터진 것들 중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큰 게이트일걸요? 게이트가 거의 한 시간가량을 출입을 허가하지 않아서 밖이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감탄사를 중얼거리자 이세혁 씨가 설명해 주며 차를 출발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막히는 학교 앞 도로가 줄줄이 올라오는 차들로 인해서 더욱 복잡해지고 있었다.

    푹신한 차 시트에 몸을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긴장이 풀리고 몸이 편안해지자 잠이 쏟아졌다. 연신 하품을 해 대자 작게 웃은 이세혁 씨가 말을 건넸다.

    “도착하면 깨워 드릴 테니 눈 좀 붙이세요. 많이 피곤하실 텐데.”

    “아, 운전하시는데 저만 자면 실례일까 봐.”

    “저는 괜찮으니 편히 주무세요.”

    진짜 피곤하네. 하긴, 오늘 일어난 일이 많긴 하다. 게이트 휘말리고 몬스터도 퇴치하고 더 큰 몬스터도 퇴치하고 시체도 보고. 양을 세듯 하나하나 곱씹어 보다가 스르륵 잠들었다.

    원룸 건물 앞에 도착하자 나를 깨워 준 이세혁 씨한테 감사 인사를 하고 바로 자취방으로 올라갔다.

    먼지와 핏자국으로 엉망이 된 몸을 씻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진짜 더럽게 스펙터클한 하루였다.

    이런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 제발 또 게이트에 휘말리는 일은 안 일어났으면.

    * * *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던전 안에 울렸다.

    모두가 떠나고 던전이 텅 빈 새벽, 몬스터가 쓰러져 있던 자리로 다가온 한 남자는 허리를 숙여 던전 바닥에 손을 짚었다. 바닥에서 빛이 잠시간 번뜩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사그라들었다.

    천천히 허리를 다시 세운 남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찾았네.”

    환희가 가득 담긴 그 한마디에 두 발로 서 던전 벽에 기대어 있던 재규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확실해요?”

    “물론. 내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잖아?”

    “그러기에는 벌써 허탕만 세 번째거든요.”

    투덜거리다가 제 척추께에 느껴지는 서늘함에 재규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새 날카로운 얼음 결정이 그의 등 뒤를 꾹 누르고 있었다.

    싸늘한 눈으로 재규어를 힐긋 보고는 제 손바닥을 부드러운 손길로 매만지던 남자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찾았으니 당분간은 멈추도록 할까. 미움받기는 싫거든.”

    “미움받지 않는 건 이미 불가능해 보이는데요.”

    이죽거리는 대답에 살기 어린 시선이 재규어를 향했다. 발밑과 주변 공기가 날이 선 모양새로 얼어붙었다.

    꼼짝도 못 하는 사이에 목이 거칠게 잡혔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귀에 서늘한 경고가 와 박혔다.

    “내가 너를 봐주는 건 오직 네 변변치 않은 능력 때문이라는 걸 기억해. 그러니 머릿속에 새겨 두고 적당히 기어오르도록.”

    배려 없이 움켜쥔 목을 던지듯 놓자마자 눈치를 살피다가 후다닥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는 이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는 게이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게이트를 가벼운 손길로 두어 번 두드린 남자는 던전 게이트 너머의 세상에 있을 이를 떠올리고는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꿈을 연결한다면 이번에는 분명 욕설이 날아올 터였다. 피곤한 기색을 보일 때 귀찮게 굴면 종종 그랬으니.

    ‘아쉽지만 오늘은 때가 아닌 것 같네.’

    몇 주 전 꿈에서 보았던, 제 기억 속의 마지막 모습과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을 회상하며 그가 살풋 웃었다.

    어서 보고 싶다. 빨리 눈치채 줬으면 좋겠는데.

    노을을 닮은 붉은색 눈이 진득한 감정을 한가득 담은 채로 곱게 휘어졌다.

    * * *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현재 충족 조건(2/3)』

    대체 조건을 충족하는 기준이 뭔데? 잠들기 직전 눈앞에 뜬 상태창을 진지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건 뭐 감도 안 잡히네. 내가 뭐 했다고 갑자기 조건 충족이야?

    * * *

    마구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부스스하게 헝클어진 머리를 거친 손길로 정리하며 문을 열었다. 이제까지 잤냐고 대단하다며 박수 치며 들어오는 민서 언니에 슬쩍 시계를 봤다.

    1시네. 흠, 이 정도면 일찍 일어난 편 같은데.

    언니가 자연스레 바닥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동안, 나는 욕실에 들어가 대충 세수를 하고 나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수건으로 쓱쓱 닦고 있자, 언니가 배달 어플을 켠 화면을 흔들었다.

    “점심 먹었냐? 안 먹었으면 치킨이나 먹자.”

    “욜, 언니가 쏘는 거예요?”

    “어어, 그때 시말서 대신 써 준 보답.”

    이재의의 닦달에도 2주간 시말서와 경위서를 쓰지 않고 버티고 있던 민서 언니는 얼굴 마주할 때마다 시말서 이야기를 꺼내는 이재의에게 결국 항복했다.

    하지만 언니는 경위서는 어찌어찌 썼지만 시말서는 도저히 못 쓰겠다며 나한테 도움을 요청했고, 집에만 있던 터라 시간이 널널했던 나는 기꺼이 대리 작성을 해 주었다.

    시말서 두 장에 치킨 한 마리라니, 남는 장사군.

    치킨을 시키고는 배달 올 때까지 핸드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봤다. 하루 만에 어제 게이트 관련해서 수많은 뉴스가 올라와 있었다.

    그중 가장 최신 뉴스를 터치했다.

    [단독] 한 시간 동안 열리지 않은 게이트… 원인 알아낼 수 없어

    (영상)

    어제 오전 8시 30분경, 한국대학교 도서관에 발생한 대규모 A급 게이트. 세계 최초로 일어난 게이트 현상에 전 세계가 이번 게이트를 주목했습니다. 바로 게이트가 한 시간 동안 출입을 허가하지 않은 겁니다. 그 때문에 구조 골든타임을 놓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또한 던전 초입까지 나온 몬스터로 인해 생존자들의 불안감이 안전사고로 이어져…….

    댓글(2,487)

    닉네임: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대체: 몬스터 저번 ##동에도 던전 초입까지 나왔다지 않았나요?

    └뭐라고: 이제는 게이트 앞쪽에 있어도 죽는 거임? ㅎㄷㄷ

    └하냐: 사람들한테 밟혀 죽거나 몬스터에게 죽거나 택 1

    닉넴: 도서관 간 사람들 진짜 운 없네. 어떻게 휘말려도 A급 게이트에 휘말리냐

    └이렇게: 시험 기간이라 사람도 많았다는데 열심히 공부하려던 학생들이……. 에효

    쓰는: 요즘 한국대에 왤케 게이트 많이 터짐?

    └게: 그러고 보니까 자연대에도 게이트 터졌었네

    └제일: 헐, 거기도 A급 게이트 아닌가?

    └어렵: 이게 다 풍수지리상으로 한국대 터가 좋지 않아서 생긴 일입니다

    (더보기)

    “세상에, 어제 게이트 앞에서 두 명이나 안전사고로 사망했어? 사람 죽겠다 싶었는데 진짜 죽었구나.”

    내 중얼거림에 역시 핸드폰을 보고 있던 언니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아, 맞다. 너 한국대 다녔지. 너도 어제 던전 갇혔냐?”

    “네. 그래서 하도 피곤해서 지금까지 잔 건데요.”

    내 대답에 나를 빤히 본 언니가 주저하더니 물었다.

    “너 괜찮냐?”

    “엄청 괜찮은데요? 왜요?”

    “아니, 헌터 한 명이 몬스터한테 잡아 먹혔다며. 그것도 생존자들 바로 앞에서. 사람 죽는 거 눈앞에서 봤을 텐데 괜찮냐고.”

    진지한 물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괜찮다고 대답하기에는 사이코같이 보일 거 같고, 안 괜찮다고 대답하면 뭔가 진지하게 심리 상담을 권할 것 같은데.

    그냥 몬스터가 배고파서 먹이를 먹었다고 생각하는 터라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럴 수는 없잖아.

    고민하던 도중 타이밍 좋게도 도착한 치킨을 받아 바닥에 내려놓고 치킨 상자를 열었다. 내 자취방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자연스럽게 꺼내 온 언니가 한 캔을 내밀었다.

    “한 캔 마신다. 괜찮지?”

    “이미 꺼내 와 놓고 무슨 허락을 받아요.”

    내 중얼거림에 피식 웃은 언니가 캔을 까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닭 다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래서, 괜찮냐?”

    “뭐, 살았다는 안도감이 더 커서 딱히. 너무 갑작스럽게 게이트에 휘말렸던 터라 현실감이 없던 이유도 있고요.”

    사실은 전에 있던 차원에서 봤던 몬스터랑 좀 많이 비슷하게 생겨서 현실감이 없던 거지만. 시선을 피하며 닭 다리 하나를 집어 들자 민서 언니가 픽 웃었다.

    “그럼 다행이고. 네 멘탈이 강해서 마음이 좀 놓인다. 나는 안 그랬었거든.”

    그 자조적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옆집에 살면서 그 호탕하던 언니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모조리 봐 왔었기 때문이다.

    언니는 무너지면서도 절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이트 사태 때 각성했던 헌터들 많이 사망한 건 알지?”

    “네. 아마 그때 각성했던 A급 50%가 죽었다고 했나?”

    “맞아. 지금 남아 있는 초대 헌터들은 첫 게이트 사태 때 게이트 안에 들어가지 않았던 놈들이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그때 겨우 살아 돌아온 놈들이야. 나는 그중에서 후자고.”

    예상치 못했던 말에 고개를 들어 씁쓸하게 웃고 있는 언니를 바라보았다. 게이트가 터지기 전 민서 언니와 나는 지금처럼 친한 옆집 이웃이 아닌 그저 안면만 있는 이웃이었다.

    그리고 게이트 사태가 터졌을 때는 방학이라 나는 본가에 내려가 있던 터라 언니가 그 탐사대에 지원했던 사실을 몰랐다. 하긴, 그때 나는 언니가 헌터인 것도 몰랐구나.

    “다른 사람들처럼 나중에 게이트나 던전 실체가 조금이라도 드러나면 그때 들어갈 걸 난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들어갔을까, 후회가 막심하다.”

    “그때는 왜 지원했는데요?”

    “갑자기 힘이 생겼는데 도취가 안 되겠냐? 그것도 S급이라는데.”

    글쎄, 나는 그냥 도취고 뭐고 힘 같은 거 전혀 필요 없으니 집에 가고 싶던데.

    물론 나랑 민서 언니는 상황이 다르긴 했다. 나는 모르는 곳에 뚝 떨어진 상황이었고, 민서 언니는 이곳이 원래 사는 세상이었으니.

    “첫 역사를 쓰는 특별한 나에 취해서 지원했지. 나 같은 사람들도 꽤 있었고. 첫날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니까. 팀을 짜서 던전에 들어갔거든? 계속 깊숙이 들어갈수록 깜깜하고 공기도 더 무거워지는데 나타나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래서 안심하는 순간―”

    클라이맥스에서 말을 끊고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켠 언니가 씁쓸하게 웃었다.

    “바로 앞에서 같이 들어간 사람이 죽었어. 고작 몇십 분 전에 나랑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던 사람이 몬스터한테 씹어 먹혀서 능력 한 번 제대로 발현 못 하고 죽더라니까?”

    “…….”

    “멍청하게 서 있다가 정신 차리라고 나를 잡아당긴 사람이 몬스터한테 물려서 피가 내 얼굴에 튀니까 그제야 정신이 들더라. 나는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는지 몰랐다?”

    민서 언니가 맥주 캔을 바닥에 내려놓고서는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그 사람들은 가끔 악몽에 나와. 그래, 날 원망하겠지. 혼자 살아남았다고.”

    언니의 말을 들으며 내 첫 살인을 떠올렸다. 글쎄, 그놈의 표정이 어땠더라? 죽어 가며 나한테 무슨 말을 했었지?

    “그다음에도 같이 파티 맺어서 들어간 팀이 나만 빼고 모조리 죽었어. 내가 더 신경 썼으면, 몬스터가 오는 걸 조금만 더 빨리 알아챘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아마 그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 있었겠지?”

    씁쓸하게 웃은 언니가 다시 맥주 캔을 집어 들더니 가볍게 흔들었다. 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향한 채였다.

    “그래서 그 후로 계속 솔플 중이야. 누군가가 내 앞에서 또 죽는 꼴을 보고 싶지가 않거든.”

    중얼거린 언니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내 표정을 보고는 머쓱하게 웃었다.

    “미안, 너무 어두운 이야기만 해 버렸다. 너 위로해 준다고 한 이야기인데 어느 순간부터 내 한탄이 되어 버렸네.”

    작게 킬킬댄 언니가 치킨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부쩍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질문의 방향을 틀었다.

    “혹시 언니 말고 현재 랭커들 중에 초기에 던전 들어갔던 사람 더 있어요?”

    “포커스랑 현 헌터 협회장이랑 와룡이랑 주태윤. 걔들하고도 한 번 같은 팀 한 적 있었는데, 걔네는 떡잎부터 다르더라. 분명 다 같은 초짜인데도 능력 다루는 게 엄청 익숙해서 인생 2회 차인 줄. 누가 와룡한테 혹시 회귀자냐고 물어봤다가 이렇게 간단한 것도 못 하냐고 개무시당했잖어.”

    넷 다 익숙한 이름들이다. 헌터계에서 한자리씩 차지하는 거물들. 뭔가 연예인 과거 썰 듣는 기분이군.

    “포커스면 랭킹 1위일 거고 와룡이면 적벽 길드장 맞죠? 랭킹 1위랑 주태윤은 몰라도 협회장이랑 적벽 길드장 그 둘은 딱 봐도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같이 생겼더만, 진짜 새싹부터 달랐네요.”

    “넷 다 재수 없어. 주태윤 그 새끼는 스카우트한답시고 사람 엄청 쪼아 댔고, 협회장 그 인간은 X나 흑막 같고, 포커스는 이상한 가면 쓰고 와서는 이름만 부르면 지랄 염병을 하고, 와룡 그놈은 하필 나랑 같은 검사계라서 비교 엄청 당했지.”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역시 무거운 분위기는 내 취향 아니다.

    혹시 보도된 뉴스가 있는지 살펴보다가 내가 이용해 먹은 인성 폐급 C급을 영웅화한 기사를 발견했다. 같이 있던 D급 헌터는 헌터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등급 강등 및 벌금형인데, C급은 등급 승격까지도 고려하고 있단다.

    “올려치기 쩌네? 얘 진짜 누구보다 빠르게 손절하고 튄 놈인데. 이놈을 처벌해야지, 왜 그래도 마지막까지 사람들 지키려고 한 놈을 처벌해?”

    기가 막혀 씩씩거리니 감성에 잠겨 맥주를 홀짝이던 민서 언니가 휙 고개를 돌리고는 물었다. 아마 언니도 C급 헌터가 사람들을 지켰다고 알고 있었나 보다.

    “엥? C급이 아니라 D급이 사람들 지켰다고?”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C급이 실드 깨지자마자 D급 버리고 튀었다니까요?”

    내 말에 이런 새끼들 때문에 팀플레이가 극혐이라며 언니가 팔팔 뛰었다. 나도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치킨을 다 먹고, 뒷정리까지 마치자 몸을 일으켜 이만 간다고 인사하는 언니에게 아까부터 해 주고 싶던 말을 건넸다.

    “언니 잘못 아니에요. 그러니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언니가 살아 있으면 된 거죠, 뭐.”

    잠시간 멈칫한 민서 언니가 말이라도 고맙다고 씩 웃으며 마저 등을 돌렸다. 그 뒷모습에서는 평소와도 같은 털털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드러누워 중얼거렸다.

    “…저러니까 내가 이상한 것 같잖아.”

    그래, 수많은 목숨을 사지로 몰아가 놓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아가는 내가.

    * * *

    동네에 우후죽순 터지던 게이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 고요는 모든 것이 끝난 것같이 보이기도 했고, 무슨 일이 벌어질 전조인 듯, 태풍의 눈 같기도 했다.

    물론 집주인 아주머니는 집값 떨어질 일 없다고 기뻐했고, 민서 언니는 굳이 멀리 안 나가도 동네 던전 공략하기 개이득이었는데 다시 귀찮아졌다며 슬퍼했다.

    “게이트에 또 휘말리셨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세요?”

    편의점 앞에서 만난 이재의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볼을 긁적였다. 누가 들으면 맨날 게이트 휘말린 줄 알겠네. 실제로 휘말린 건 이번까지 해서 딱 두 번인데.

    “네. 괜찮아요. 이재의 씨는 괜찮으세요? 안색이 엄청 안 좋아 보이시는데.”

    눈 밑이 퀭한 이재의를 보자 절로 안쓰러운 감정이 들었다. 세상에, 사람이 저렇게 될 때까지 굴리냐. 윤세인도 완전 좀비가 되어 가던데. 저래서 공무원은 할 게 못 돼, 쯧쯧.

    혀를 차며 말없이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을 쥐여 주었다. 700원이니까 김영란법 선물 5만 원 커트라인에는 안 걸릴 거다. 한사코 사양하던 이재의는 결국 감사하다고 말하고는 캔을 받아 들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저보다 더 힘들게 현장 뛰고 있는 후배들이 많은데 제가 힘들다고 말할 수는 없죠.”

    보면 볼수록 진짜 갓성이다. 친구만 잘 사귀었으면 정말 완벽했을 텐데.

    “참, 태윤이가 채현 씨한테 괜찮냐고 전해 달라더군요.”

    “주태윤 씨가요? 아, 네.”

    이재의의 옥에 티 같은 친구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언급된 그 친구에 잠시 흠칫했다. 아니, 혹시 독심술 능력도 있어? 주태윤의 이름을 듣자마자 자동반사적으로 아니꼬워진 내 표정에 이재의가 푸스스 웃었다.

    “태윤이가 안 그래도 후회 많이 하더라고요. 채현 씨한테 첫인상이 안 좋게 찍혀 버렸다고.”

    아니, 첫인상은 괜찮았다. 그다음 스토킹 행적들과 남의 말은 들어 처먹지도 않고 사람을 각성자로 몰아가는 몰상식한 태도 때문에 인상이 마이너스로 깎인 것뿐이지.

    그래도 나는 상식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차마 친구 앞에서 대놓고 욕은 못 하고 하하, 웃기만 했다. 주태윤이 내 반 정도의 상식만 갖췄어도 꽤 호감형이었을 건데.

    “그래도 그 녀석 너무 나쁘게 보지는 말아 주세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는 이재의가 먼저 몸을 돌렸다. 아무리 웬수 같아도 친구는 친구다, 이건가. 하긴, 나 같아도 누가 우리 삼총사 중 한 명 까면 표정 관리 안 될 듯.

    이재의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편의점 봉지를 가볍게 흔들며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른 집 가서 도시락 먹어야지.

    사람이 없는지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고는 순간 이동 스킬을 쓰기 위해 마력을 발동하자마자,

    『위험 예지가 발동됩니다.』

    ……?

    순식간에 생긴 게이트에 빨려 들어가며 눈만 깜빡였다.

    게이트 핫플에 내가 가는 게 아니라 내가 가는 곳이 게이트 핫플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S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어두운 던전 안, 유일하게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시스템창에 뜬 알파벳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이거 실화냐?

    “백야, 백야. 만약 일반인이 S급 게이트에 들어가면 어떻게 돼?”

    “S급 게이트에 휘말리면 그냥 죽는다고 봐야지. 그냥 숨 멈추고 몬스터에게 안 들키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더 있냐.”

    시니컬하기 그지없던 백아현의 답변이 머릿속을 둥둥 맴돌았다. 타이밍을 맞춰 안쪽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까지 울렸다. 기척이 가까이서 느껴졌다.

    이상하게 이놈의 위험 예지는 게이트가 터지기 직전에만 발동되고 막상 게이트 안으로 들어오면 몬스터가 나와도 뜨지를 않았다.

    사람도 없겠다, 게이트 때문에 불발되었던 순간 이동 스킬을 발동시키려다가 갑자기 든 충동에 멈칫했다.

    처음 게이트에 휘말렸을 때는 주태윤이 있었고, 이전에 학교 도서관에 터진 게이트에 휘말렸을 때는 물리학과가 있어서 마음 놓고 던전 구경을 못 했지.

    …한 번만 보고 올까?

    슬그머니 마력을 거두고 쓰윽 몸을 돌렸다. 마, 내가 EX급인데 S급 게이트는 껌이지, 껌.

    『스킬 ‘라이트(C)’를 실행합니다.』

    환한 빛이 던전 안을 밝혔다.

    ‘헌터 발견하면 바로 바닥에 쓰러져서 숨 헐떡이는 거 잊지 말기.’

    제2의 주태윤 사태가 일어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마음속으로 주의 사항을 새기며 던전 안쪽으로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몬스터 구경부터 해 보자.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서 본 정보에 따르면 S급 게이트에서는 1급 몬스터만 나온다고 했었지.

    내 전투력 측정기가 되어 줄 몬스터에게로 다가가자 몸을 휙 돌린 몬스터가 빠른 속도로 던전 안쪽으로 도망갔다.

    ‘어라, 이거 아무래도 플래그 같은데?’

    몬스터를 쫓아 던전 안쪽으로 달려가다가 드는 생각에 걸음을 서서히 늦췄다. 요리 보고 저리 봐도 그거잖아.

    몬스터가 파 놓은 함정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가 몬스터 무리를 만나서 ‘하, 어쩔 수 없이 내 힘을 개방할 차례인가?’ 대사 한 번 쳐 주고, 몬스터 사냥하던 도중 뒤에서 들려오는 ‘이렇게 강한 자는 보지 못했는데. 당신, 정체가 뭐야?’ 소리에 머리를 긁적이며 ‘이런, 들켰나…….’ 중얼거리면서 뒤도는,

    일명 힘숨찐이 힘 들키는 클리셰.

    ㅇㅇ. 잘 알겠음, 너희들 수준. 시시해서 죽고웅앵. 웹소설 독자 경력 NN년 차 나한테는 그런 뻔한 수법 따위 통하지 않는다.

    하긴, 새끼손가락으로도 죽일 수 있을 만한 몬스터에게 무슨 전투력 측정이야. 집이나 가자. 갑자기 팍 식어 버린 탐험 의욕에 하품하며 뒤를 돌았다.

    몇 발자국 걷기가 무섭게 힘없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불러왔다.

    “…채현 씨.”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에 걸음이 멈칫했다. 아니,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 아니면 목소리를 흉내 내는 몬스터이거나. 그 사람이 왜 막 생긴 던전 안에 있겠어.

    하지만 몸은 내 의지를 배신하고 에우리디케를 돌아보는 오르페우스처럼 기어코 뒤를 돌고야 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앞에 펼쳐진 광경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옆에 널브러져 있는 성검과, 처참하게 찢겨 피가 쏟아지는 옆구리, 그리고…….

    “우현 씨……?”

    고통과 눈물로 얼룩진, 잊을 수 없는 얼굴.

    차원 이동했던 세계에서 유일하게 같은 기억을 공유했던 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미친 세계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동지였던.

    뭐야, 설마 신이 사기 친 거야? 분명 같이 보내 준다고 했으면서 내 뒤통수 친 거임?

    “신은 거짓을 말하지 못하지. 그리고 내 숙원을 이뤄 줄 이를 위해서라면 그게 무어가 어려울까.”

    신은 내게 분명히 그랬는데 말이야. 그러므로 확률은 반반이다. 저기에 쓰러져 있는 천우현이 진짜일 확률과 나를 낚기 위한 함정일 확률.

    『스킬 ‘탐색(AA)’을 발동합니다.』

    방출된 마력이 천우현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내 근처를 쓰윽 훑고는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천우현이 있는 곳에 짙게 묻어 있는 다른 마력의 흔적에 손을 털어 마력을 흩어 냈다.

    저건 가짜다. 꽤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

    와, S급 게이트 무섭다. 사람 기억을 막 함부로 읽어서 환영도 만들어 내다니. 다음엔 우리 엄마도 나오겠어. 진짜 부모님 나와서 유교걸 본능 발동하기 전에 대피하자.

    “…저 버리고 가지 마요, 채현 씨.”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애원하는 가짜 천우현을 내려다보며 뒷머리를 헤집었다. 에이씨, 더럽게 찝찝하네.

    『스킬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1인』

    나는 결국 가짜 천우현을 파괴하지 못하고 조용히 몸을 돌렸다. 죄송, 우현 씨. 환영이지만 버리고 가는 게 미안하니까 만약 우리가 만나면 커피라도 사 드릴게요.

    * * *

    “이런, 이번에도 아쉽게도 실패네요. 그 여자는 다시 돌아올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 어떡하나?”

    두 발로 선 재규어가 분홍 젤리가 박힌 앞발로 입을 가리고 히죽였다. 마법진이 설치된 곳을 보던 남자의 노을색 눈이 가늘게 좁혀지다가 둥글게 휘었다.

    이번에야말로 분노를 터트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건만, 예상에서 한참을 벗어난 반응에 재규어는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였다.

    ‘드디어 완전히 돌아 버린 건가?’

    이제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리기까지 하는 남자에게서 두어 발짝 슬금슬금 떨어지자 재규어를 휙 돌아본 남자가 하도 웃어 눈에 맺힌 눈물을 쓱 닦으며 흥얼거렸다.

    “아쉽지는 않아. 만약 정말로 이 함정이 먹혔으면 기분이 참 끔찍할 뻔했거든.”

    손짓으로 마법진을 찢어발기는 남자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적안에 살기가 비침과 동시에 지독한 마기가 재규어를 자비 없이 짓눌렀다. 바닥에서 불쑥 솟아올라 제 귀를 관통하고 지나간 날카로운 얼음 기둥에 목을 움켜쥔 재규어가 고통 어린 소리로 울부짖었다.

    재규어의 턱을 무서운 악력으로 틀어쥔 남자가 나직하게 경고를 속삭였다.

    “한 번만 더 그 여자라고 칭하면 입을 찢어 주지. 네가 감히 그딴 식으로 지칭할 상대가 아니다.”

    “그 여, 아니 그 인간이 내 동료들을 얼마나 죽였는데……!”

    “내 알 바 아니지. 그리고 그 인간이라고 칭하지도 마라, 건방지게.”

    저를 짓누르는 힘에 꼬리를 만 재규어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자가 저를 거칠게 내팽개치자마자 네발로 던전 안쪽을 향해 다급히 달려갔다.

    남자 혼자만 던전 안에 덩그러니 남았다. 채현이 있던 곳을 돌아본 그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간의 일방적인 만남에조차도 메마른 목에 다디단 물 한 방울을 마신 듯 미친 듯이 갈증이 일어 왔다.

    * * *

    “아니, 이거 적을 시간에 신고를 하시지…….”

    “게이트 터졌다고 신고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게이트 생겼다는 신고만 들어왔지 게이트 등급은 따로 말 나온 거 없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괜한 찝찝함에 눈 뜨고 하루를 지새우고 편의점에서 커피라도 사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온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은 좁은 골목에 줄줄이 들어오는 자동차와 헌터 무리였다.

    어제 생긴 S급 게이트 공략하러 왔나 보네. S급 게이트가 대단하긴 한가 보다. 이렇게 많은 인력도 동원되고.

    관리국 사원증을 목에 건 관리국 요원들부터 협회 유니폼을 입은 협회 소속 헌터들에, 딱 봐도 ‘나 고등급 헌터요.’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이들까지, 동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이가 없네. 공책에다가 S급 게이트라고 써 놓으면 헌터들이 보냐고.”

    “적어도 동네 사람들이 보고 혹여 호기심에라도 들어갈 일은 없겠죠. 그래서 덕분에 인명 피해는 안 났잖아요?”

    톡 쏘아붙이는 어조의 익숙한 목소리에 손을 흔들며 친구의 애칭을 외쳤다.

    “백야!”

    “이채! 왜 여기… 맞다, 여기 너희 동네였지?”

    반가운 발걸음으로 아현이의 옆으로 다가가자마자 보이는 물체 하나에 표정 관리가 안 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어제 왼손으로 경고문을 크게 끄적여 놓고는 게이트 앞에 떨궈 놓은 노트가 아현이의 손에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 S급 게이트! 들어가면 즉시 사망! ※]

    삐뚤삐뚤한 붉은 글씨가 유독 선명해 보였다. 왼손으로 썼으니까 나인지 모르겠지……?

    “이채, 너 이거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아?”

    당연히 알지. 내가 어제 사람 없을 때 슬쩍 놔두고 순간 이동으로 튀었으니까.

    신고를 안 한 이유는 간단하다. 게이트 신고할 때 홈페이지에 네X버, X글, 카X오톡 중 하나로 로그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익명이었으면 신고했지. 그런데 내가 미쳤다고 내 개인정보 까고 민간인이 S급 게이트에 휘말렸다가 무사히 빠져나왔다고 밝히겠냐? 누가 봐도 수상쩍은 미등록 각성자잖아.

    여기서 입을 열면 내 거지 같은 연기력이 열연할 게 뻔했기에 아현이의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른 명탐정 백아현의 눈이 무언가를 간파한 듯 가늘어졌다.

    “야, 너 뭐 알고 있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야 헌터 친구분.”

    당황한 내게 아현이의 옆에 있는 누군가가 불쑥 인사를 건네왔다. 살, 살았다……!

    구세주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옅은 우디 향이 코끝에 스쳤다. 두어 번의 쌍방 만남을 제외하고는 주로 TV나 인터넷으로나 보던 얼굴에 인사에 답할 생각도 못 한 채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혹시 이거 엄청 심각한 상황인가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협회장이 직접 나설 정도면 보통 상황이 아니란 소린데. 고개를 돌리니 여기저기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익숙하게 바리케이드 치는 걸 지휘하는 이재의와 막 도착한 차에서 내리는 주태윤, 그리고 모자 깊숙이 눌러 쓰고 골목 담벼락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민서 언니까지.

    S급 일곱 명 중 다섯 명이 이 동네에 모여 있었다. 혹시 오늘 S급 정모 날인가?

    “물론 심각한 상황이죠. 게이트 사태 이후 거의 1년 반 만에 생긴 S급 게이트인데. 게다가 정선 S급 게이트처럼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생긴 것도 아니고 서울 거주지 한복판에 생겼잖습니까.”

    국내 랭킹 2위이자 헌터 협회장 김도빈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서른 초반이라고 들었는데 아무리 봐도 스물일곱인 주태윤이랑 동년배로 보인다. 물론 주태윤이 나이 들어 보인다는 게 아니라 김도빈이 동안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김도빈이 언급한 정선 S급 게이트는 생긴 지 1년 반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클리어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게이트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얼른 집 들어가. 저 게이트 없어질 때까지 당분간 이 길로 지나다니지 말고. 혹시 동네에서 헌터들이 시비 트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

    다행히 김도빈이 끼어든 덕분에 내가 주의 사항을 써 놓은 노트는 그렇게 잊혔다. 언제나처럼 내게 잔소리를 줄줄 늘어놓은 아현이는 더 복잡해지기 전에 어서 집으로 들어가라고 나를 떠밀었다.

    “포커스야 당연히 연락 안 될 거고, 와룡은요?”

    “곧 온다더군요. 방금 막 비행기 탔다고 연락 왔습니다.”

    “비행기요? 그 인간 해외에 있었대요?”

    “해외는 아니고 전라남도. A급 게이트 공략 중이었다더군요.”

    비즈니스 대화를 나누는 아현이와 김도빈의 옆에서 슬금슬금 멀어진 나는 바리케이드 인력에 동원된 윤세인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집으로 들어가는 척 골목으로 향했다.

    『스킬 ‘투명화(AA)’를 실행합니다.』

    흐릿하게 변한 몸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내 눈에만 흐릿하게라도 보이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아예 보이지 않을 거다.

    친구들과 옆집 언니가 무려 EX급 각성자마저 정교하게 속여 넘기려 했던 위험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다니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그래서 따라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따단.’

    시켜 줘, 친구들 명예 소방관.

    사람들에게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시 골목 밖으로 나오자 마스크를 내려쓰고 교복을 입은 남학생 한 명이 셀카봉을 쥐고 휴대폰 화면을 향해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이렇게 첫 게이트 공략을 S급 게이트로 뚫게 되었습니다. 어그로탱커? 쫄아서 안 온 듯? 아, 솔직히 님들도 S급 게이트 보고 싶었잖아? 엌, 딱 대. 내가 X발, 선봉 간다.”

    킬킬거리던 남학생이 가운뎃손가락을 휴대폰에 들이밀었다.

    “왜 안 돼? 아오씨, 내가 국랭 10윈데 선봉도 못 서겠냐고. 후방 빠지는 건 X밥 쫄보 새끼들이나 하는 짓이죠?”

    랭킹 10위? 걔잖아, 아현이가 말했던 싹수 노란 폭탄. 저 멀리서도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떠드는 말에 몇몇 헌터들(아마 후방을 맡았을 확률이 높은)의 표정이 불쾌감을 담고 찌푸려졌다.

    “에휴, 하여간 요즘 애들은…….”

    500년 묵은 꼰대의 본능이 절로 살아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멈칫한 관종 고딩이 눈을 부라리며 휙 뒤를 돌아보았다.

    “X발, 어떤 새끼야?”

    젊은 놈이라 그런지 귀도 좋네. 아무도 없는 걸 발견한 고딩의 눈이 커졌다.

    “님들? 혹시 내 뒤로 지나간 놈 본 사람? 아무도 없었다고? 말이 돼? 방금 그 소리 들은 사람 없어?”

    “민! 방송 끄고 빨리 안 올래?”

    “민이 아니고 BJ 민이라니까요! 그리고 방송 왜 끄라고 해요? 저한테도 방송할 자유가 있거든요?”

    소리를 빽, 지르고 게이트 앞으로 다가가는 관종 BJ 민의 뒤를 쫓았다. 저렇게 방송에 정신 팔린 놈 옆에 붙어 있어야지 들키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러면 게이트에 처음 들어가시는 분들을 위해서 간단하게 주의 사항을―”

    “자, 게이트 1빠 입성합니다. 10만 원 잘 받아 가겠슴다. 던전 안은 인터넷이 안 터지는 관계로 오늘 저녁에 영상 올리겠습니다. 재미있게 보셨으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림다.”

    이재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에 대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멘트를 친 BJ 민이 게이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백아현이 이마를 짚었다.

    “저 녀석이 진짜! 첫날부터 이렇게 사고를 치면 어떡하자는 거야?”

    “하하, 협회에 재미있는 친구가 들어왔네요.”

    주태윤의 능청스러운 말에 아현이가 찢어 죽이고 싶다는 눈으로 주태윤을 노려보았다. 듣기로는 아무도 저 폭탄을 안 넘겨받아서 울며 겨자 먹기로 협회가 데려갔다던데.

    “그럼 협회 소속 헌터가 먼저 들어갔으니 제가 선두에 서죠. 백야 헌터, 후방을 잘 부탁드립니다.”

    말없이 웃고만 있던 김도빈 협회장이 성큼성큼 게이트 쪽으로 다가왔다.

    김도빈이랑 같이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선수 쳐 게이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S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이야, 분위기 스산하네. 여기가 바로 S급 게이트 안입니다. 내가 최초 공갠가?”

    아티팩트를 켰는지 밝은 빛이 던전 안을 밝히고 있었다. 그 뒤로 환한 빛 하나가 더 합쳐졌다. 게이트로 들어온 김도빈이었다.

    곧바로 BJ 민 쪽으로 다가온 김도빈은 휴대폰으로 손을 뻗어 망설임 없이 동영상 촬영 종료 버튼을 터치하고는 BJ 민과 마주 보았다.

    “김민재 학생, 다음부터 단독행동은 금지입니다. 게이트 안에서는 행동 하나하나에 목숨이 걸려 있다는 걸 부디 명심했으면 좋겠군요.”

    왜 민서 언니가 저 인간을 흑막 같다고 평가했는지 알 것 같군. 웃음기라곤 하나 없는 눈으로 웃으며 BJ 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김도빈은 정말로 흑막이나 다름없었다.

    “예, 예. 그러면 다시 동영상 찍어도 되죠?”

    하지만 상대는 무서울 게 없는 십팔 살의 관종 고등학생. 애써 올리고 있던 김도빈의 입꼬리가 그 말에 꿈틀했다.

    무어라 더 말을 하려던 김도빈의 시도는 곧이어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헌터들에 의해 무산되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BJ 관종 민이 다시 동영상 촬영을 재개했다.

    “잠깐 끊겼네요. 죄송, 꼰대가 촬영 강종시켜서.”

    정말로 저 꼴을 보니 고향에서 만난 그 초딩의 미래가 보인다. 한숨 소리와 함께 김도빈의 라이트 스킬이 앞길을 환하게 밝혔다.

    저 후방에 같이 있는 백아현과 윤세인을 확인하고 굳게 다짐했다. 위험한 상황에만 개입하자. 물론 들키지 않을 수준으로만.

    “그럼 출발하죠.”

    김도빈의 짧은 말에 S급 던전 공략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인원이 긴장하며 움직이는 게 무색하게도 던전 안은 벌레 하나 없이 고요했다.

    “흠, 이쯤 되면 몬스터 몇 마리는 나와야 하지 않나?”

    흥미롭다는 웃음을 머금은 주태윤이 혼잣말처럼 흥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에 화답하듯 공간이 일렁이더니 금발 머리의 한 남자가 나타났다. 몬스터가 아니고…….

    “외국인?”

    “웬 외국인? 저 사람 뭐야?”

    헌터 무리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여기저기서 잘생겼다는 감탄 어린 속삭임이 들려왔지만 나는 차마 감탄할 수가 없었다. 저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단 하나의 문장만이 내 머릿속을 떠다녔기 때문이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익숙한 얼굴에 잠시간 숨을 멈췄다. 이 세계에서 결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던 이였다.

    “너 뭐냐? 남의 나라 게이트에 왜 함부로 들어오고 지랄이야?”

    헌터 하나의 날카로운 물음에 짙은 적안으로 헌터들을 느긋하게 훑은 남자가 입을 열어 무어라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김도빈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뭐라는 거지? 영어도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은 그냥 확인 사살이나 다름없었다. 저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내가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신이시여, 저한테 왜 이런 시련을…….

    “아, 다 모르겠고 이 새끼가 지금 쥐새끼처럼 남의 나라 게이트 숨어들어 왔단 소리죠? 구독자님들, 던전 스틸범 참교육 한번 가겠습니다.”

    침을 탁 뱉은 BJ 민이 건들거리며 금발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동시에 남자의 주변으로 짙은 마기가 모여들었다.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내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남자의 뒤에 있는 몬스터들은 총 열 마리. 만약 이 던전에 몬스터만 있었다면 이 인원으로 충분히 승산이 있었겠지만, 저놈이 있는 이상 불가능하다.

    나는 이곳에서 저놈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모두 내보내야 해.’

    단체 순간 이동은 우리 눈치 없는 윤세인이 봐도 수상할 것 같고… 결국 방법은 이것뿐인가.

    『스킬 ‘지진(SSS)’을 실행합니다.』

    땅이 마구 흔들리더니 굉음과 함께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헌터들만을 격리해 놓고 진동하며 뒤집히는 땅을 보는 금발남의 얼굴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후퇴합니다! 후방 분들부터 게이트 밖으로 나가십시오!”

    아무리 봐도 인생 2회 차 같은 김도빈은 동요 없이 BJ 민의 뒷덜미를 잡아끌며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다. 이상함을 눈치챈 듯 표정을 굳힌 금발남이 무언가를 찾으려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쪽 보지 마라.’

    어차피 못 본다는 걸 알면서도 잠시간 스친 시선에 괜히 식겁했다. 탈출할 타이밍을 재다가 마지막으로 김도빈이 빠져나가자마자 순간 이동을 실행해 집으로 돌아왔다.

    “…이거 실화냐?”

    그러고는 침대에 쭈그려 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와, 아무래도 나 X된 것 같아.

    * * *

    너튜브에서 요즘 핫한 「던전 갑툭튀 존잘남」을 망연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조회 수 장난 아니네. 800만 실화냐.

    이게 뭐냐고? BJ 민의 스트리밍 영상에서 그놈이 나온 부분만 편집한 동영상.

    광고하는 동안 댓글창으로 화면을 내렸다. 가장 위에 있는 고정 댓글의 닉네임은 참으로 익숙했다. 거의 공개 처형급이다.

    [BJ 민] • 2일 전

    이거 보지 말고 원본 영상을 보라고 씨X롬들아. 1분 나온 놈이 그렇게 좋냐?

    좋아요 7.4천 답글 110개

    댓글 달 시간에 영상을 내려. 아, 어차피 캡처짤도 다 퍼졌구나…….

    몰래 회수한 노트에서 주의문이 적힌 종이를 북 찢어 내 그 페이지를 찢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건 꽃잎 뜯으면서 해야 하는데 꽃이 없으니까 꽃 대신 종이다. 어차피 종이나 꽃이나 본질은 식물임.

    “간다. 안 간다. 간다. 안 간다. 간다……. 젠장, 가기 싫다.”

    갈기갈기 찢긴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내던지고 방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내 인생 진짜 왜 이래? 좀 편안한 삶 좀 살게 내버려 두면 어디가 덧나냐?

    『스킬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1인』

    투명화 스킬을 걸어 놓고 한숨을 푹푹 내쉬며 순간 이동을 발동했다.

    골목 벽 앞에 바로 보이는 게이트. 등 뒤에는 헌터증과 지문을 찍어야지만 들어올 수 있는 스피드 게이트가 있다. 나 좌표 계산 좀 잘한 듯?

    거리낌 없이 게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까지 온 이상 망설임은 필요 없었다.

    『S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던전에는 몬스터들의 기척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부재중이면 친히 오게 만들어야지.

    『스킬 ‘벼락(SSS)’을 실행합니다.』

    굉음과 함께 번뜩이는 낙뢰가 던전에 내리쳤다. 순식간에 던전 벽과 바닥이 새카맣게 그을렸다. 두 번 정도 그 짓을 반복하자 바닥에 마법진이 번뜩이더니 마기가 확 퍼져 나갔다.

    마법진 위로 뭉친 마기와 빛이 얽혀 점점 형체를 갖추어 갔다. 짙은 금발을 끝으로 2년간 안 봐서 속 편했던 면상이 완전히 드러났다. 귀찮음과 분노에 잠긴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감히 미천한 인간 주제에 내 휴식을 방해하다니.”

    저게 회까닥 돌았나, 아니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사람이 왔는데도 보는 시늉도 하지 않고 등을 돌린 채로 손가락을 튕기려 하는 남자를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느릿하게 물었다.

    “무슨 인간?”

    내 목소리를 듣고선 놈이 멈칫했다. 삐꺽거리는 고개를 겨우 돌린 놈과 눈이 마주쳤다.

    “…폐, 폐하?”

    기겁하며 눈을 크게 뜬 체이스터가 말을 더듬으며 나를 불렀다. 어정쩡하게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을 훑어보다가 삐딱하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한마디 했다.

    “머리가 높다?”

    “예?”

    여전히 머가리 꽃밭인 전 피후견인 녀석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2년 동안 이 꼴 안 봐서 살 것 같더니만. 레라지드 그 마족은 철없는 아들놈만 두고 왜 일찍 죽어서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냐.

    녀석이 어릴 적의 기억을 살려 다시 친절하게 맞춤형 학습을 시도했다.

    “내가 누구지?”

    “……? 당연히 마왕님이죠.”

    “그럼 마족이 마왕을 만나면 제일 먼저 뭘 해야 할까.”

    “인사를……. 아, 맞다! 북부의 체이스터가 폐하를 뵙습니다!”

    체이스터가 바로 내 앞에 넙죽 엎드렸다. 쩌렁쩌렁한 인사 소리가 던전 안을 울렸다. 저놈의 머리가 완전히 백지는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래, 오랜만에 만나서 나도 참 반갑다.”

    인자한 성군의 미소를 지은 나는 아직도 넙죽 엎드려 있는 체이스터를 향해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녀석이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인자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대가리부터 박고 시작하자. 뒷짐 지고 1초 내로 뻗친다, 실시.”

    “넷슴다!”

    우렁차게 답한 체이스터가 곧바로 대가리를 박았다. 목소리 하나는 커서 좋네. 머리를 박고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하고 있는 체이스터 녀석의 앞에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아 턱을 괴었다.

    “내가 사라진 뒤로 있었던 일, 하나도 빼놓지 말고 싹 말해 보도록.”

    내 명령에 체이스터가 내가 사라진 직후의 혼란했던 마계 상황을 시작으로 장황한 말을 늘어놓았다.

    체이스터의 말을 종합해 봤을 때, 마계와 내 세계의 시간은 똑같이 흘렀다. 여기도 내가 귀환한 지 2년, 저기도 내가 떠난 지 2년.

    그리고,

    “그래서 지금 이 세계를 정복하라는 내 명령을 듣고 차원을 넘어왔다?”

    “넵! 그렇습니다!”

    어떤 새끼가 내 명령을 조작했다. 나는 그런 명령을 내린 기억이 없는데? 애초에 나는 영영 떠날 사람이었다고.

    “재미있네. 누가?”

    “네? 잘 못 들었습니다?”

    그 말에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들어 녀석의 머리를 툭툭, 쳤다. 부드러운 금발이 내 손가락을 살짝 스쳤다.

    “어떤 새끼 주둥이에서 나왔는지 출처를 말하라고, 출처를.”

    “원탁회의에서 나왔습니다!”

    원탁회의라. 마계에서의 회의는 총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왕이 회의장으로 있는, 철저히 서열순으로 발언권이 주어지는 상석 회의. 또 하나는 서열 상관없이 모두가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원탁회의.

    서열이 굉장히 중요시되는 마계에서 원탁회의는 전시(戰時)나 위급 상황이 아니면 거의 열리지 않는다.

    싸움질과 서열질이 디폴트 성격인 마족들이 서열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원탁회의를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회의가 제대로 굴러가리란 보장도 없고.

    “발언자가 누구지?”

    “그게…….”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는 체이스터의 정수리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니야, 아무리 이 녀석이 덜렁거린다고 해도 내가 그렇게 버릇을 잡아 놨는데 설마 회의를…….

    “제가 그날 늦잠을 자는 바람에 회의에 지각해서 뒷부분밖에 못 들었습니다.”

    『스킬 ‘염력(SS)’이 발동됩니다.』

    “그래, 잠 좋지. 마족이 잠은 자야지. 수면에 도움 되라고 뇌에 신선한 피 좀 공급해 주마. 부하들 수면 상태도 걱정해 주는 나 같은 마왕이 어디 있냐?”

    “악! 폐하, 죄송합니다! 제발 내려 주세요! 다음부터는 절대 지각 안 할게요!”

    “그 말 한 번만 더 하면 백 번째다, 백 번째.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겨우 버릇 잡아 놓으니까 나 없어지자마자 또 지각이냐?”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체이스터 녀석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 계속되는 360° 회전에 비명을 지르며 난리 발광을 하는 녀석을 한심하게 올려다보다가 다시 거꾸로 고정해 줬다.

    거꾸로 뒤집힌 시선을 마주하고는 앞머리가 아래로 쏠려 드러난 체이스터의 이마를 툭툭, 치며 혀를 찼다.

    “하여간 여기나 저기나 대가리 덜 여문 것들이 문제야.”

    “폐하, 2년 만에 제 나이도 잊으셨어여? 저 성년 된 지 50년이나 지났는데요?”

    입을 댓 발 내밀고는 투덜거리는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내가 너를 새끼 마족 때부터 봐 왔어, 인마.

    “250살 가지고 무슨 나이 부심이냐? 키나 더 크게 집에 가서 발 닦고 자라.”

    뒤통수를 감싸 쥐고 끙끙거리는 체이스터를 다시 땅에 내려 주었다. 머리부터 땅에 처박힌 녀석이 울상을 지으며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녀석을 내려다보며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차원으로 넘어오는 놈들은 그 자리에서 즉결 심판이다. 모가지 따이고 싶은 새끼들은 알아서 기어 오라 해.”

    “네? 잠시만요, 설마…….”

    불안감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거기에 못을 땅땅, 박아 주었다.

    “전언이다. 가서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그대로 전해.”

    죽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체이스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폐하. 1마계에 저보다 서열 높으신 분들이 참 많은데요…….”

    “왕명인데 뭔 상관이지?”

    내 매정한 말에 주저앉은 체이스터가 내 바짓자락을 잡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제가 상관있다고요! 저 좀 살려 주세요! 제가 전언하면 완전 하극상 꼴 된다니까요?”

    “알 바냐? 그러게 누가 동영상이나 찍히고 있으랬어?”

    심드렁한 말에 코알라마냥 내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체이스터가 빽, 소리 질렀다.

    “저는 그저 처음으로 맡은 고등급 던전의 관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뿐이라고요! 그런데 인간 놈들이 막 쳐들어오지를 않나, 갑자기 2년 동안 자취를 감추셨던 폐하 힘이 느껴지질 않나!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눈썹을 팔자로 구부리며 억울함을 한껏 어필하는 녀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대체 이 녀석에게 인간들 앞에 모습 드러내면 안 된다는 기본적인 상식도 안 알려 주고 던전 관리를 맡긴 놈은 누구야? 알아내기만 하면 바로 헬파이어에 뜨끈하게 지져 줄 테다.

    내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입을 비죽거린 체이스터가 꿍얼거렸다.

    “씨이, 처음으로 자원해서 맡은 고등급 던전이었는데…….”

    “자원해서까지 온 이유가 대체 뭐냐?”

    “애쉬 님이 저한테 폐하가 우리 버리고 이 차원으로 가 버리셨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마왕픽 차원은 얼마나 멋있을지 구경하려고 지원했죠. 밖으로 못 나갈지는 몰랐지만.”

    “애쉬 님? 압존법은 어디에다가 팔아먹었냐?”

    지구가 관광지인 줄 아느냐고 한마디 더 하려다가 유독 걸리는 말에 멈칫했다.

    “…애쉬가 그랬다고?”

    “네, 그런데 저는 그 말 안 믿었슴다! 일곱 마계의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자마자 대군주 자리 걷어차고 떠나면 진짜 미친놈이죠. 그렇죠, 폐하?”

    그래, 나 미친놈이다. 체이스터의 정수리를 꾸욱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애쉬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나는 찰나를 살아갈 내 세계를 위해서 몇십 배의 시간을 살아온 저쪽 세계를 버렸다.

    마왕의 시선에서 봤을 때 참으로 티끌 같은 시간을 보낸 인연을 위해 긴 세월 동안 생사를 같이 넘나들었던 인연들을 잘라 냈다.

    내 입장에서는 원래의 곳으로 돌아간 것뿐이었지만, 녀석들의 입장에서는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따라올 줄은 생각도 못 했지.

    ‘너희들이 무슨 메리 씨 괴담에 나오는 메리 인형이냐?’

    버려도 버려도 다시 찾아오는 특별 배송 서비스, X바.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누르며 다리를 흔들어 아직까지 내 다리에 달라붙어 있는 체이스터를 털어 냈다.

    “그나저나 이 게이트, 아니 던전은 누가 열었어?”

    “모름다? 그냥 지원받길래 지원했는데요?”

    해맑게 대답하는 녀석을 보니 말문이 막혔다. 대체 아는 게 뭐니…….

    “일단 내가 떠나면 바로 이 던전은 없애도록.”

    “예? 꼭 없애야 해요? 아까운데…….”

    “네 목숨은 안 아깝고?”

    내 협박 같은 물음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체이스터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어 댔다. 순간 이동을 발동시키기 직전,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참, 전언하는 거 잊지 마라. 마족 놈들 계속 넘어오면 너부터 모가지다, 체이스터.”

    “폐하, 전언은 최대한 해 보도록 노력할 테니까 모가지라는 말만 취소해 주시면 안 됨까아아아아!”

    『스킬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1인』

    길게 메아리쳐 울리는 체이스터의 필사적인 외침을 마지막으로 시공간이 일렁이고, 나는 다시 전직인 줄 알았던 현직 마왕 이채현에서 평범한 자취생 이채현으로 돌아왔다.

    매우 골치 아픈 상황에 자취방 침대에 드러누워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나한테 아직도 남아 있는 크라토스에 마왕직 때려치우지 못한 것은 예상은 했었지만, 미친 마족 놈들이 내 명령 주작해서까지 내가 사는 차원에 쳐들어올지는 몰랐다.

    정말로 은퇴가 시급하다. 은퇴도 내 마음대로 못 하는 더러운 세상 같으니.

    『스킬 ‘소환(L)’ 실행에 실패하였습니다. 사유: 잠김』

    상태창을 허탈한 눈으로 보다가 L급 스킬이 모조리 잠겨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세 개의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잠금 해제가 가능했던.

    첫 번째 조건은 동네 카페에 생긴 게이트에 휘말리자 충족되었다. 두 번째 조건은 학교 도서관에 터졌던 게이트에서 나온 밤에 충족되었다.

    『직감이 발동됩니다.』

    첫 번째 조건은 내가 게이트에 휘말려 던전의 존재를 마주하는 것. 두 번째 조건은 던전 안에서 능력을 사용하는 것. 상태창이 뜬 시간 차가 조금 있던 것으로 봐서는 그것을 누군가가 알아채는 것까지 포함일 터였다.

    망할 시스템이 나를 이끄는 방향을 이제야 눈치챘다.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렇게까지 눈치채 달라고 발악을 하고 있었는데 왜 그동안 몰랐지?

    본능적으로 마지막 조건을 깨달았다. L급 스킬이 잠길 수밖에 없던 근본적인 원인.

    마왕의 권능으로도 완벽하게 봉인할 수 없는, 제1 마계의 지배자인 마왕의 증표이자 역대 마왕들의 힘과 지식의 결정체. 내 모든 힘의 근원이자 불행의 원인.

    평화로운 세계에 돌아온 기념으로 봉인해 놓았던 크라토스의 봉인을 내 손으로 해제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심장 쪽에 손을 대고 크라토스의 봉인을 풀었다. 꽁꽁 묶여 있던 팔다리가 자유로워지는 듯한 느낌이 듦과 동시에 상태창이 눈앞에 떴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현재 충족 조건(3/3)』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습니다. 잠금이 해제됩니다.』

    빌어먹을 시스템의 손에서 놀아나는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다.

    “상태창.”

    나직한 말과 동시에 게이트가 터진 첫날 보았던 상태창이 다시 내 눈앞에 떴다.

    『이채현』

    * 특성 - 귀환자

    * 계열 - 초월자

    * 직업 - 마왕, 관리자

    * 등급 - EX

    * 칭호 - 마계의 대군주, 아이루스의 대리자

    * 스킬 - L급(목록 보기), SSS급(목록 보기), SS급(목록 보기), S급(목록 보기), AAA급(목록 보기) … F급(목록 보기)

    * 스테이터스 - 체력 S, 힘 S, 민첩 S, 지력 S, 정신력 S, 마력 EX

    ※ 시동어: 시스템 간섭

    그때 당시엔 네모와 잠금 표시로 도배되어 있던 것과는 다르게 온전한 상태창을 마주했다. 그때 가려졌던 칭호를 보자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포커스를 보고 웃을 게 아니었어……! 마계의 대군주라니, 중2병 칭호의 끝판왕이잖아!

    닿기도 싫어 진저리 치며 손톱으로 칭호를 터치하자 상태창이 따로 튀어나와 쫙 펼쳐졌다.

    [마계의 대군주]

    1~7마계를 통일한 유일무이한 마왕

    - 모든 스킬 버프 15%

    - 마기 친화력 10% 증가

    [아이루스의 대리자]

    마신 아이루스의 대리자

    - 스킬 ‘신의 지각(L)’을 통해 마신 아이루스의 영역적인 한에서 신적인 능력 발휘 가능

    - 마신 소환 가능(0/3)

    아, 에바. 누가 나한테 꿈이라고 해 줬으면 좋겠다.

    인생 장르가 현대 판타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퓨전 판타지다. 그리고 나는 인류의 적대자들 대가리임. 살면서 이렇게 울고 싶었던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괜히 봉인 풀었다. 어차피 L급 스킬들은 잠금 풀려 봤자 쓸 일도 없는데. 잘못 쓰면 진짜 세상 망한다.

    어둠과 혼란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세상에 조금의 빛도 통하지 않게 만들어 세상을 공포와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카오스.

    공룡 멸종의 원인 메테오.

    일대의 모든 것을 태우기 전까지는 꺼지지 않는 수르트의 화염.

    과거의 시간을 구현화할 수 있는 리와인드.

    신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는 신의 지각.

    남의 기억을 읽어 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메모리테이크.

    태풍, 허리케인까지 구현할 수 있는 날씨 조종.

    그리고 기타 등등.

    마왕이었을 시절조차도 딱 한 번씩밖에 써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추억에 젖어 L급 스킬들을 보고 있다가 전에 없던 항목을 하나 발견했다.

    시동어……?

    “시스템 간섭.”

    시동어를 말하자마자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차원 이동에 대한 정말 좋지 않은 기억이 있던 터라 허공에 차원의 구멍이 뚫리자 반사적으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도 모르게 차원의 구멍을 막아 버릴 것 같아 차라리 눈을 꾹 감는 쪽을 택했다.

    조심스럽게 다시 눈을 뜨자 푸르디푸른 공간 속에 도착해 있었다. 휙휙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 반투명한 상태창이 내 앞에 떴다.

    『환영합니다, 관리자님.』

    “저기요, 왜 일반인한테 관리자를 맡겨?”

    『그야, 저 혼자 이 세계를 관리하는 것은 벅차니까요. 같은 초월자끼리 왜 이러실까? へ( ̄∇ ̄へ)』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다시 뜬 상태창에 미간을 팍 찌푸렸다. 매크로인 줄 알았는데 그냥 대화를 하고 있네.

    “얘, 말투 갑자기 왜 이래?”

    시스템창을 툭툭, 치며 중얼거리자 글자가 빠르게 새로 나타났다.

    『제 말투가 뭐 어때서요? 초면부터 반말하는 마왕 놈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은데요? (ー ε ー)』

    마왕 놈? 이게 진짜 뒈지려고. 미간을 팍 찌푸리며 마기를 방출했다. 파랗던 공간이 내가 서 있던 곳을 시작으로 시커멓게 물들었다. 꿈틀거리는 마기를 따라 차원의 벽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무너져 내리려 하는 시공간에 시스템창이 빠르게 태세 전환을 시도했다.

    『마왕님을 잘못 말했네여ㅎ;; ᕙ(•̀‸•́‶)ᕗ』

    그래, 오타일 줄 알았다. 마왕 놈이라니, 그 빌어먹을 기르카스 놈도 날 그렇게 부른 적이 없는데 말이야.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힘을 회수했다. 검게 물들었던 공간이 다시 파랗게 변했다. 계속 서 있기 귀찮아서 시스템이 차원을 보수하는 동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나저나 내가 왜 관리자 역을 맡아야 하는데? 귀찮게.”

    말을 툭 내뱉자마자 내 눈높이에 맞춰 시스템창이 나타났다.

    『당신은 이 세계에 책임이 있잖아요? ㅇㅅㅇ』

    창에 뜬 글자를 읽자마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당황으로 말끝이 흐려졌다.

    “뭐? 그게 무슨 소리…….”

    『당신이 이 차원으로 오기 위해 연결했던 마신 아이루스의 힘이 아직 끊기지 않은 것을 알고 있나요? (͒˃⌂˂ ͒)』

    아이루스의 힘. 내가 원래 세계에 돌아오기 위해서 아득바득 모았던 아이루스의 심장. 설마 그 힘이 차원의 연결고리가 되어 버린 건가?

    “그래서 그게 내 탓이라고?”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나직한 물음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유도 모른 채로 낯설기 그지없는 차원에 넘어가 강제로 마왕직을 떠맡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넘겨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게 잘못이라.

    탓하려면 차원 관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 애꿎은 사람을 휘말리게 한 원인 탓을 해야지.

    『뭐, 그게 전부가 아니긴 하지만 당신의 책임에는 그 이유가 가장 크죠. 당신 부하들이 우르르 쳐들어온 덕분에 차원의 구멍을 타고 다른 놈들까지 침범했거든요. (*´-`*)』

    내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스템창은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이 이 차원을 침범한 마족들의 지배자인 이상, 당신의 목줄을 잡아 둘 게 필요했습니다. 당신이 이 세계에 묶여 있는 이상 당신 휘하의 마족들이 함부로 날뛰지는 못할 테니까요. ٩( ᐛ )و』

    “그게 관리자 역할이고? 왜지? 관리자 역을 주는 것보다는 제약을 거는 게 더 확실히 나를 묶어 둘 수 있을 텐데.”

    내 의문 어린 중얼거림에 기다렸다는 듯 시스템창의 글자가 떠올랐다. 무슨 지식인 답변인 줄.

    『같은 초월자끼리는 제약을 걸지 못합니다. (°᷄n°᷅)』

    “님, 신 아니야? 내가 마신보다 아래인데 왜 제약을 못 걸어?”

    『초월자와 신은 다른 개념입니다. 그것도 모르세요? 같은 초월자라는 게 쪽팔리는군요. (ノ´∀`*)』

    글자에서 풋― 하는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건 내 착각인가. 뭔가 기분이 더러워져 시스템창에 벼락 한 번 꽂아 주니 말투가 바로 공손해졌다.

    『우리는 신의 대리자일 뿐입니다. 신을 죽이지 않는 이상은 결코 신의 경지를 넘볼 수 없는.』

    잠시 마주했던 마신의 미친 위압감을 떠올리며 다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존재한테 어떻게 덤벼? 마신 앞의 나는 바다 앞의 개미나 다름없었다. 죽이기는커녕 내가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나저나 신을 죽이면 신이 될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소리인가?

    턱을 괴고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 시스템창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지금 세계는 위험 수준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차원과의 전쟁이에요. 그래서 세계를 지킬 수 있을 만한 젊은 층들을 우선으로 능력을 지급했습니다. (๑•́ ₃ •̀๑)』

    “그러면 지금 이 세계에 나타나는 게이트랑 그 안의 몬스터들이 전부 내 부하는 아니라는 소리지?”

    『일단은 그렇죠. 당신 책임이 크긴 하지만. 」( ̄▽ ̄」)』

    “가스라이팅 그만해, 망할 자식아. 애초에 내가 다른 세계 안 가게 차원 관리를 잘하지 그랬어.”

    『하하, 할 말이 없네요.ヾ(´▽`;)ゝ 그래서 사죄의 의미로 당신에게만 특별히 관리자 자리도 드렸잖아요?』

    아니, 관리자 자리 필요 없으니까 나랑 천우현 씨 회귀나 시켜 줘. 그러면 세상 자동으로 안정될 테니까. 앉아서 불퉁한 표정으로 상태창을 보고 있자 상태창이 경쾌하게 글자를 띄웠다.

    『당신이 이 차원 출신인 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도 차원을 찢으면서까지 귀환한 고향이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잖아요? ( ´∀`)』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세계를 멸망시키고 싶으면 어쩌려고?”

    내 심술궂은 물음에 글자를 싹 지움으로써 잠시 침묵한 시스템창은 방금까지와는 달리 느릿하게 글자를 띄웠다.

    『사실 이 세계는 한 번 멸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에게 다시 한번 관리자를 맡긴 건 이번에는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뭐 회귀자라도 있어?”

    농담하듯 던진 물음에 시스템은 다시 침묵했다.

    …진짜 있는 거냐, 회귀자. 갑자기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회귀자가 혹시 내 정체를 알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 알고 있다고 해도 나한테 호의적인지. 내 정체를 까발릴 위험은 없는지.

    내가 이 망할 게이트 사태의 원인이라는 게 밝혀지면 날달걀 맞을 확률이 99.99%다. 아니, 날달걀이면 다행이지, 죽창의 민족 코리아답게 죽창 날아올지도. 놀랍게도 마왕도 죽창 맞으면 죽습니다.

    『관리자로서의 당신의 권한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어어, 왜 갑자기 말을 돌려? 회귀자 진짜 있냐니까?”

    재빠르게 말을 돌리는 시스템창을 보니 불안감이 더욱 짙어졌다. 진짜 나한테 페널티 있는 거 아니야?

    『당신은 각성자들의 능력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등급을 올리는 것도, 내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단, 한 사람당 한 번의 기회만이 주어지며, 하루 한 명 한정입니다. 또한 제가 당신의 능력을 잠갔던 것처럼 각성자들의 능력을 잠그는 것 역시 가능합니다.』

    “너는 뭐 하는데?”

    『저는 각성자와 비각성자를 분류합니다. 자격 있는 이들을 선택하여 알맞은 능력을 주고 각성시키는 게 제 역할입니다.』

    엥? 나한테 너무 과도한 권한을 주는 거 아닌가? 시스템창이 말한 내 권한을 곱씹다가 결국 하루 한 명 한정이니 딱히 과도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1년 내내 능력 개입해 봤자 365명이네.

    “이만하면 필요한 대화는 다 한 것 같은데? 이제 작별 시간이네. 내가 차원 박살 내기 전에 그만 내보내 주지 그래?”

    『성격도 급하시긴ㅎ. 알겠어요. 혹시 저와 다시 만나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시동어를 말해 주세요. (๑❛ڡ❛๑)☆』

    “응, 그럴 일 없을 듯.”

    『너무하네요. 이 차원에는 단둘밖에 없는 초월자인데. ŏ̥̥̥̥םŏ̥̥̥̥』

    징징거리는 이모티콘을 마지막으로 차원의 벽에 금이 가더니 쩍, 갈라졌다. 서서히 내 자취방이 보이기 시작했다. 완전히 차원을 벗어나기 전, 갑자기 생각나는 장면에 시스템창을 향해 다급히 물었다.

    “잠깐만! 우현 씨, 아니 혹시 차원 이동했던 천우현이란 사람도 돌아왔어?”

    『천우현이요? 잠깐만요……. 네, 용사를 말하는 거면 돌아왔네요. ( •⌄• ू )✧』

    휴, 다행이다. S급 게이트에서 본 건 역시 환영이 맞았구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고 있자 관리자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럼 잘 가요, 마왕 놈아. ヽ(^o^)丿』

    저 망할 자식이,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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