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현대 판타지 장르가 현실이 되어 버린 것에 관하여
2. 네가 왜 여기서 나와?
3. 정상이 아닌 놈일수록 과거는 짠내 나는 법
4. 일은 꼭 시험 기간에 터지더라 (1)
1. 현대 판타지 장르가 현실이 되어 버린 것에 관하여
원래 인생이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랬다.
예를 들자면, 환생 트럭 피했더니 차원 이동 싱크홀에 떨어진 것.
차원 이동한 세계에서 구르고 굴러서 원래 세계로 귀환했더니 귀환한 지 몇 달 만에 세계가 현판소 재질이 되어 버린 것.
그리고 제출 기간이 오늘까지라 밤새 작성한 리포트를 들고 학교에 도착했더니,
“물러나세요! 여기 진입 금지입니다!”
“지원 부탁드립니다! 한국대 자연과학대학 건물입니다.”
대학 건물에 게이트가 터진 것.
익숙한 자연대 건물 대신 그 자리에 덩그러니 있는 거대한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자니 방금 인쇄해 온 뜨끈뜨끈한 리포트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거 실화냐. 나 왜 밤샌 거지.
기왕 터질 거면 하루 전에 터지든가. 왜 기왕 써 온 리포트 제출도 못 하게 마감일에 터지고 난리냐고.
퀭한 눈 밑을 문지르며 게이트 앞에 서 있는 내 앞으로 공무원들과 헌터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했다. 참 타이밍 좋게도 이제야 재난 문자가 도착했다.
긴급재난문자
[서울특별시청] 03월 28일 09:46
한국대학교 자연과학대학 건물에 게이트 발생. 일반인 진입 금지 요망.
가까운 대피소 찾기: http://safezone.kr/XSO7
옆에 있던 같은 과 친구 역시 멍하니 게이트를 보고 있다가 나에게 물었다.
“오늘 휴강이겠지……?”
“아마도……?”
100% 휴강이다. 건물이 증발했잖아.
던전화된 건물 안에서 강의를 하려 할 열정적인 교수님이 과연 계실까.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던전 안에서 강의가 가능할 리가.
교수님, 게이트에서 무사히 탈출하셨다면 리포트 제출이라도 받아 주세요. 밤샘 작업이 억울해서라도 반드시 마감일을 오늘까지로 만들어야겠다.
“채현아, 저기 착물화학 교수님 아니야……?”
“…그런 듯?”
하지만 그런 내 굳은 다짐은 들것에 실려 나오는 교수님의 반질반질한 탈모 머리를 발견하고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다고 병원으로 실려 가시는 교수님 손에 리포트를 쥐여 드릴 수는 없잖아.
게이트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내게 각성자 관리국 사원증을 단 헌터 한 명이 말을 걸었다.
“혹시 어느 길드 소속입니까?”
“헌터 아니고 일반인인데요?”
바람에 헝클어진 단발을 손가락으로 쓱쓱 빗으며 대꾸하니 내가 들고 있던 리포트와 입고 있는 과잠을 뒤늦게 발견한 헌터가 인상을 찌푸리며 방해되니까 물러나라고 사람 면전에서 손을 휘저어 댔다.
때마침 던전 공략을 위해 길드 소속의 헌터들까지 우르르 몰려와서 한숨을 푹푹 쉬며 몸을 돌렸다.
그래, 게이트 뺑이 많이 쳐라. 갓반인인 나는 집에서 휴강을 즐기며 낮잠이나 자련다.
공대 건물로 들어간 나는 곧장 화장실로 향한 후,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첫 번째 칸에 들어갔다. 만약 사람 있는 상태에서 시전하면 아마 공대 1층 여자 화장실에 들어간 사람이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퍼질지도 모른다.
『순간 이동(S) - 저장된 좌표』
- 자취방
- 본가
- 자연대 건물…….
상태창이 뜨자마자 망설임 없이 자취방 좌표를 선택했다. 그러자 주변 공간이 일렁거리면서 서서히 시야가 전환되었다.
시공간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고, 나는 내 자취방인 원룸 현관에 서 있었다. 갓반인이 왜 스킬 쓰고 상태창 보면서 사냐고?
나는 그냥 널널한 막학기를 위해 18학점을 고수한 덕에 과제 지옥에서 허우적대는 평범한 대학교 4학년…이라기엔 어폐가 있군.
굳이 말하자면 왕년에 하도 험하게 구른 탓에 평화로운 세계를 누리고 싶어 은둔하는 재야의 고수다.
요즘 말로는 힘숨찐이라고 하던가?
그런데 일반인은 맞다. 등록을 안 해서 헌터는 아니거든.
[속보] 한국대 자연과학대 건물, 갑작스레 출현한 A급 게이트에 휘말려……. 현재 민간인 구출 작업 진행 중
자취방 침대에 누워서 익숙하게 인터넷을 들어가 보니 뉴스란은 한국대에 생긴 게이트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세상에, A급 게이트라니. 적어도 3주간은 자연대 건물에 못 들어가겠군.
게이트가 생기기 시작한 지 1년 반도 채 되지 않았건만, 이제는 게이트와 던전이라는 존재가 꽤 익숙해져 버렸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던전 브레이크가 터진 적은 없다.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디스토피아가 되지 않았다.
스마트폰 화면을 끄자 시끌벅적한 바깥세상과 단절된, 평화롭기 그지없는 내 자취방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이 왜 갑자기 현대 판타지 장르가 되었냐고 묻는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사실 나도 모름.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1년 4개월 전인 스물한 살, 내가 귀환한 해의 겨울방학에 시작되었다.
* * *
『각성을 축하드립니다★!』
『터치하여 당신의 등급과 각성 계열을 확인하십시오.』
어느 날, 선택받은 사람들의 눈앞에 한날한시에 뜬 상태창. 그들이 상태창을 터치하는 순간 세상이 180° 바뀌었다.
* * *
재앙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전국이 하루아침에 한국 곳곳에 자리 잡은 게이트로 인해 난리가 났다.
뉴스는 게이트 위치를 보도하고, 전문가들을 모시고 게이트의 정체에 대한 토론을 나누었으며, 모든 SNS에는 게이트 사진들과 그 정체에 대한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다.
게이트가 터진 건 우리나라뿐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가 갑자기 발생한 게이트로 떠들썩했다.
그리고, 인터넷상에서 이상한 힘이 생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공통적인 발언은 상태창이란 것이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났고, 그것을 터치하자마자 게이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태창이 나타난 시각은 놀랍게도 모두 동일했다.
여러 웹소설 플랫폼의 현대 판타지 소설들은 ‘성지 순례 왔습니다.’ 댓글로 도배되었고, 커뮤에는 회귀자 없냐고 얼른 나와서 미래 좀 털어 보라고 회귀자를 찾는 글들이 마구 올라왔다.
멸망론과 현판소의 현실 재림론으로 떠들썩한 인터넷 세상과는 달리 지방의 집구석 내 방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침대에 누워서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뉴스와 SNS를 휙휙 넘기며 갑자기 현대 판타지 장르가 되어 버린 현실에 몇 번씩 ‘이거 실화냐?’를 중얼거렸다.
아니, 판타지 장르 겨우 벗어났더니 갑분 현판? 내 인생 왜 이러지. 역시 마가 낀 게 틀림없어.
몇 달밖에 누리지 못한 평화로운 삶에 작별 인사하며 뭔가 설득력 있는 외계인 지구 침공론을 관심 있게 보고 있는데 메시지가 마구 오기 시작했다.
제일 위에 있는 삼총사 단체 채팅방에 들어가니 뒤집힌 세상에 난리가 나 있을 줄 알았던 채팅방은 예상외로 심각한 분위기였다. 세 명 중에 두 명에게 상태창이 뿅, 하고 나타났단다.
그러니까 지금 나만 빼고 다 상태창을 봤다는 소리지?
게다가 한 놈은 S급이요, 다른 한 놈은 A급이란다.
갑자기 인생 장르가 현판에서도 최전선으로 바뀌어 버린 친구들을 향해 혀를 차 준 나는 빠른 속도로 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상태창 안 보였다 ㄱㅇㄷ] 오후 6:02
암, 암. 이런 시국에서는 갓반인이 최고지. 괜히 각성해서 1열대에서 노동력 갈려 나가는 것보다는.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군. 혀를 차며 핸드폰 화면을 끄고 침대에 다시 드러눕자마자 내 앞에 상태창이 나타났다.
‘아니, 상태창 안 보였다고 자랑한 지 1분도 안 됐는데 이게 무슨 일?’
짜증도 잠시, 내 상태창이 친구들이 본 상태창과 다르다는 걸 깨닫고는 당황했다.
각성 축하 어쩌고로 시작되었다던 친구들의 상태창과는 달리 내 상태창은 처음부터 스탯창 모드였다. 인터넷을 뒤져 봐도 나처럼 스탯창부터 튀어나온 경우는 전혀 없었다.
『이채현』
* 특성 - 귀환자
* 계열 - ■■■
* 직업 - ■■, ■■■
* 등급 - EX
* 칭호 - ■■■ ■■■, ■■■■■ ■■■
* 스킬 - L급(잠김), SSS급(목록 보기), SS급(목록 보기), S급(목록 보기), AAA급(목록 보기) … F급(목록 보기)
* 스테이터스 - 체력 S(봉인: B), 힘 S(봉인: C), 민첩 S(봉인: B), 지력 S(봉인: A), 정신력 S(봉인: A), 마력 EX(봉인: S)』
게다가 내 상태창은 잔뜩 깨져 있었다. 네모가 가득한 상태창을 노려보며 네모 안에 들어갈 단어를 추리하다가 때려치웠다.
“나도 설마 ‘나 혼자만 XXX’ 시리즈 주인공 된 거야?”
나 혼자만 EX급 헌터, 나 혼자만 상태창이 이상, 나 혼자만 스킬이 잠김, 나 혼자만 스탯이 봉인.
온갖 ‘나 혼자만 시리즈’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L급부터 F급까지 끝이 없이 늘어져 있는 스킬들을 휙휙 내려 보다가 손을 멈칫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L급 스킬 옆에 뭔가 불길한 단어가 적혀 있던 것 같은데.
천천히 다시 올려 보니 선명하게 보이는 ‘잠김’이라는 글자에 반사적으로 잠금 해제를 외치자마자 다른 상태창이 눈앞에 떴다.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잠금이 풀립니다. 현재 충족 조건(0/3)』
“남의 스킬을 왜 잠가? 아니, L급 스킬이 여기서는 쓸 일이 거의 없는 능력이긴 한데… 조건은 또 뭔데? 알려 주지도 않고 충족시키라고 하냐?”
상태창을 향해 베개를 던졌지만, 나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 베개는 상태창을 쓱 통과해 방바닥에 툭 떨어졌다.
소란스러움에 벌컥 내 방문을 연 엄마가 허공을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는 나를 보고 물었다.
“뭔 소리를 지르고 난리냐? 너도 상태창인가 뭐시긴가 떴어?”
“엥? 엄마가 상태창을 어떻게 알아?”
“동네 모임 채팅방에서 그걸로 난리다, 지금. 현서 엄마가 현서도 상태창인가 뭔가 떴다더라.”
대단하다, 아주머니 네트워크. 게이트 생기고 인터넷 뜬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건만 정보 공유를 이미 마쳤다.
『직감이 발동됩니다.』
“난 안 떴어.”
직감이 무조건 상태창이 뜬 것을 숨기라고 하고 있었기에 직감을 따랐다. 이거 따라서 손해 본 일은 없었음.
엄마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더니 납득한 듯 몸을 돌렸다.
안 들켰나 보군. 다행.
* * *
이 기억은 전 세계인들의 인생 장르가 바뀐 첫날의 기억이다. 하필 우리 시대가 1세대가 될 건 뭐람.
내 예상대로 정부는 상태창이 떠 힘을 얻은 사람들을 ‘각성자’라고 명명하고 게이트 조사를 맡겼다.
처음 게이트 조사에 자원한 각성자들은 소수였다. 그중에서도 대부분이 죽어서 돌아왔다.
첫 번째 탐사에서 얻은 건 게이트 안에 던전과 몬스터들이 있고, 더 안쪽에 강력한 힘을 가진 무언가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각성자 커뮤니티를 만들고 자기들끼리 파티를 짜서 던전에 들어가 끊임없이 게이트와 던전의 비밀을 밝혀냈다. 과연 의지의 한국인들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게 파티를 시작으로 헌터 협회가 만들어지고 길드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길드가 세워지니 던전 공략은 더욱 수월해졌다.
헌터(각성자들을 이제는 헌터라고 부른다)들이 지금껏 밝혀낸 사실은,
1. 던전 가장 깊숙한 곳에 보스 몬스터가 있고, 게이트 안에 있는 몬스터들은 밖으로 나올 수 없다.
2. 던전에서 나오는 부산물들은 꽤 희귀한 광물, 가죽으로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3. 게이트의 등급은 S부터 F까지 존재한다. 난이도는 S급이 가장 높고 F급이 가장 낮다.
4. 몬스터의 등급은 1급부터 10급까지 존재한다. 숫자가 낮을수록 높은 등급의 몬스터이다.
5. 헌터의 각성 계열은 법사, 무기, 힐러, 제작계. 직업군은 이 네 계열에서 세분화한다.
이 정도? 사람들의 적응이 빠른 건 바뀐 세상이 그렇게 유행 타던 현판소 설정이랑 별다를 바 없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대략 1년 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지났지만, 어쨌든 세상은 어찌어찌 잘 굴러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변한 거 하나 꼽으라면 웹소설 트렌드?
한때 미친 듯이 인기를 끌던 현대 판타지 장르 소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 반영 장르가 되어 버림으로써 인기가 팍 식었다.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그냥 다큐 소설이 되어 버림.
요즘은 다시 정통 판타지가 뜨고 있던데, 나도 학과 공부 때려치우고 판타지 소설이나 써 볼까? 내 경험담 쓰면 그게 바로 소설인데. 물론 주야장천 고구마밭이라 독자들이 계속된 고구마에 지쳐 중도 하차할 확률이 높지만.
‘과제 하기 싫으니까 별생각이 다 드네.’
2천 자쯤 작성한 리포트를 저장하고 노트북을 닫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싸강도 다섯 개나 밀렸어.
4학년이라 교양 이수 학점도 끝난 덕에 전공이랑 자연대 일선으로만 강의를 채워 넣어서 모든 강의가 싸강행이 되어 버렸다.
이게 다 게이트 때문이다. 등록금 살살 녹는다.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서 뒹굴거리고 있으니 내가 얼마나 의지박약 인간인지 알 수 있었다.
아침 11시에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컵라면 먹고, 다시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 좀 하다가 저녁 먹고 노트북으로 싸강 틀어 놓고 게임하고.
다음 날에는 꼭 공부해야지, 다짐해 놓고 또 반복하고.
그러다 보니 나한테 남은 건 제출 기한이 이틀도 남지 않은 리포트 폭탄과 아직 듣지 못한 수많은 강의뿐.
굳은 의지를 다지며 노트북을 열었지만,
‘그 의지 한 5분 갔나?’
어느새 자연스럽게 너튜브에 들어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작심오분 대다나다.
결국, 집에서는 도저히 공부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집 앞 카페라도 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동네 카페까지 순간 이동으로 가기도 좀 그렇기에 오랜만에 걷기로 했다. 맨날 가까운 거리도 순간 이동으로 가니까 운동 부족이 되어 버리잖아.
밖으로 나오자 이곳저곳에 파티원 모집 전단지와 길드원 모집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길드는 길드원 수가 30명 이상이 되어야지만 정부에서 정식 길드로 인정해 준다. 그래서 신생 길드는 이렇게라도 사람 모으는 수밖에 없다.
대부분은 다 대형 길드로 가려 하거든. 솔직히 나 같아도 대형 길드 간다.
와, 여기 길드는 나중에 밸런스 조정 어쩌려고 ‘아무 직업군이나 다 환영’ 이런 문구를 써 놨지? 당장 정식 길드 승인받으려고 머릿수만 채우려는 꼼수구먼.
이런 길드는 망하기 딱 좋다. 믿거다, 믿거. 전단지부터 X같은 보노보노잖아. 혹시 길드 이름도 보노보노 아님?
질린 눈으로 전단지를 훑어보고 있자 옆에서 전단지를 열심히 붙이던 남자가 환한 얼굴로 나한테 말을 걸었다.
“저희 길드에 관심 있으시구나! 저희 …노 길드는 무려 법사계 B급 헌터가 길드장으로 있는…….”
“예? 보노보노 길드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던 터라 흐릿하게 들린 길드 이름에 화들짝 놀랐다. 진짜 보노보노 길드였다고?
그러나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오답임을 눈치챘다.
“저기, 보노보노가 아니고 레게노인데요…….”
“아, 죄송. 전단지만 보고 보노보노 길드인 줄.”
쪽팔림에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재빠르게 몸을 돌리자 남자가 급히 따라붙었다. 아무래도 길드 ‘이달의 영업왕’을 노리시는 모양이다.
“그래서, 혹시 저희 레게노 길드에 관심 있으세요?”
“아니요.”
난 일반인이라 길드 못 들어간다. 내 단호한 대답에 눈썹이 축 늘어진 남자가 울상을 지으며 보노보노가 박제된 퍼런 전단지를 흔들었다.
“그……. 역시 전단지를 바꾸는 게 낫겠죠……?”
문제가 전단지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바꿔, 무조건 바꿔. 보노보노 길드로 인식되기 싫으면.
* * *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네, 4,100원입니다.”
천 원이 넘는 아메리카노는 먹지 않는다는 주의지만 자취방 앞 카페는 개인 카페였기에 어쩔 수 없이 제일 싼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커피값이 비싸긴 해도 사람 거의 없어서 좋다.
열심히 아메리카노를 빨며 키보드를 한창 두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너무 오랜만의 카페인 섭취 때문이라 치기에는 온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주변 공기가 나를 사방에서 날카롭게 찔러 오는 느낌. 전에도 느낀 적이 있던 기분이었다.
마수도, 마족도 없는 세계에서 내게 위험 예지가 발동할 만큼 위협적인 존재는,
『위험 예지가 발동됩니다.』
게이트뿐이겠지. 오늘따라 밖에 나오기가 싫더라니, 이런 귀찮은 이벤트가 있을 줄이야.
내가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공간이 미친 듯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 난리판에 침착한 사람은 나와 내 옆자리의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는 남자뿐이었다. 나야 그렇다 쳐도, 저 사람은 뭔데 저렇게 여유로워? 혹시 헌턴가?
게이트가 마치 흡수하는 것처럼 카페를 빨아들임과 동시에 나는 순간 이동 능력을 발동시키려고 했다. 내 힘과 충돌하는 또 다른 힘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능력 발동해서 집에 갔을 거다.
『스킬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1인』
『스킬 ‘순간 이동(S)’이 스킬 ‘대규모 순간 이동(SS)’과 부딪힙니다.』
『스킬 ‘대규모 순간 이동(SS)’을 무효화합니다.』
눈앞에 뜬 상태창에 급히 내 힘을 회수했다. 미친, 1인 순간 이동을 무효화해야지 왜 대규모 순간 이동을 무효화해?
『스킬 ‘순간 이동(S)’이 무효화되었습니다.』
『스킬 ‘대규모 순간 이동(SS)’의 범위 내에서 벗어납니다.』
내 옆자리 남자가 나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여유가 넘치더니 역시 헌터였군.
아, 순간 이동 발동시키기 전에 분석 한번 써 볼걸. 괜히 선빵 쳤네. 저 사람, 이제 나 미등록 각성자로 의심하는 거 아니야?
그때 남자가 흐릿해지더니 그대로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지금 순간 이동으로 탈출하면 각성자로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다. 아마 사람 한 명이 튕겨서 게이트에 휘말렸다고 보고했겠지. 한숨을 푹 내쉬고 몸에 힘을 뺐다.
이윽고 아주 좁은 고무관 사이를 통과하는 느낌이 들더니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 *
『C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현재 충족 조건(1/3)』
‘대체 뭘 했는데 조건이 충족된 거지?’
감도 안 잡힌다. 눈앞에 뜬 상태창을 진지한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발치에 널브러져 내 피 같은 4,1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줄줄 흘리고 있는 컵을 툭툭, 치며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게이트 안은 나도 처음이다. 던전 깊숙한 곳에서 으르릉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걸 보니 저 안쪽에 몬스터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사람들 구한답시고 대규모 순간 이동 안 써서 다행이다. 대규모로 썼으면 내가 힘을 회수했어도 그 사람 순간 이동 능력이 튕겨 나갔을 거다.
지금이야 그냥 당신 컨트롤이 미숙해서 내가 튕긴 게 아니냐고, 나는 그저 피해자라고 우길 수 있지만, 만약 저 상황이었으면 핑계고 뭐고 미등록 각성자 의심받아서 센터 끌려가고 벌금 폭탄 맞는다.
다행히 품에 꼭 껴안고 있던 노트북은 무사했다. 문제는 내 손에 꼭 쥐고 있어야 할 스마트폰이 실종되었다는 거다. 내가 노트북 보호하느라 스마트폰을 버렸나 보다, 젠장.
발로 열심히 잔해를 차고 다니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기스 하나 없이 멀쩡한 내 핸드폰을 찾았다. 던전 광물로 만든 최신형 스마트폰의 액정은 돈값을 했다. 하지만 화면을 켜 보니 데이터나 통화 신호는 잡히지 않았다.
문제는 길도 안 보인다는 것.
핸드폰 플래시는 던전 안을 비추기엔 너무나 미약하다. 헌터인 친구 말로는 아티팩트 정도는 있어야지 던전 안에서 길이 보인다는데.
“에휴, 리포트나 쓰자.”
뭐, 방금 그 헌터가 알아서 구하러 오겠지. 괜히 돌아다니다가 길 잃어버릴라.
던전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인터넷 끊긴 지금이 집중하기 딱 좋은 찬스군.
어떤 몬스터가 뒤에서 덤벼 봤자 어차피 이 이채현 님한테는 1초 컷 순삭이죠. 내가 기습하는 마족들이랑 마수들 썰고 다닌 경력이 몇 년인데.
그렇게 게이트에 휘말린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지.”
위험 예지를 믿고 맘 놓고 신들린 듯 타자를 치고 있는데 발소리와 함께 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와 중얼거림이 들렸다.
휙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아까의 그 모자남이 발광(發光) 아티팩트를 들고 내 뒤에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복부에 구멍이 뚫린 몬스터가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있었다.
모자남이 모자를 벗자 얼굴이 드러났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에 한 3초간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정체를 기억해 냈다.
헐, 주태윤이다. 국내 2대 대형 길드 중 하나인 러스터 길드 길드장.
국내에 단 일곱뿐인 S급 랭커에 이명인 백호보다는 본명이 더 알려진 법사계 헌터. 아마 한국 랭킹 4위였던가? 훈남 랭커로 인터넷에 사진 많이 떠돌아서 친구들 제외하고는 랭커 관심 없는 나도 주태윤은 안다.
큰일 났다. S급이면 컨트롤 미숙으로 우기지도 못하잖아. 삐질,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내 쪽을 향해 걸어온 주태윤이 눈을 접어 웃었다.
“갑자기 능력이 튕겨서 놀랐네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꼭 더 큰 힘에 부딪힌 것처럼.”
“착각입니다.”
“그래요? 그런데 이건 착각이 아닌 것 같은데.”
내 단호한 대답에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가 픽 웃었다.
“일반인 중에서는 던전 공기를 멀쩡히 버티고 있는 사람을 못 봤거든요. 그런데 지금 그쪽은 너무 멀쩡하네, 신기하게.”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머릿속에 뒤늦게 글 하나가 떠올랐다.
20XX-03-14 13:08 조회: 245,678
[Best] 너네 던전 공기 마셔 봤냐?
작성자: 고추바사삭
맥X날드에서 상X이 치킨버거 먹고 있는데 갑자기 게이트 터져서 나 포함해서 매장에 있던 손님 열 명이랑 직원분들 던전에 갇힌 적 있었거든. 그런데 왜 게이트 터지면 부상자가 그렇게 나오는지 알겠더라. 몬스터 피해서 도망가고 싶은데 숨이 안 쉬어짐.
공기가 던전 밖보다 중력 열 배는 더 작용하는 느낌이더라. 사람을 짓누른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공기가 뭔가 다른 차원의 공기 같았어.
진짜 헌터들 존경스럽더라. 어떻게 그런 공기 마시면서 레이드 뛰냐?
댓글(696)
익몀: 글쓴이 나랑 똑같은 경험 했네. 나도 던전 갇힌 적 있었는데 진짜 부상은 둘째 치고 공기 때문에 죽을 맛이더라.
└목이긴기린그림: 대체 무슨 느낌이길래? 궁금하네
└익몀: 잠만보 열 마리랑 햄버거 게임하는데 내가 제일 밑에 깔린 느낌.
└집게리아: 어케 살아 있냐 잠만보 한 마리가 460kg인데
└오래오: 댓쓴이 잠만보설
소다수: 헌터는 그럼 던전 공기에 영향 안 받는 거?
└최종학력피자스쿨: 받긴 받는데 일반인만큼은 아니라는데
└과제하러과: 그건 님 뇌피셜 아님? 헌터들 레이드 영상 보면 표정 편―안하던데
└최종학력피자스쿨: 우리 형이 헌터임
└진토닉: 폐급?
└최종학력피자스쿨: 그러는 니는 각성했냐? F급도 못 되는 게 폐급 ㅇㅈㄹ하네
└파밀밭의 호수꾼: 갑자기 혼자 풀발 하네 ㅉㅉ
└피카쥬: 사실 형이 아니라 최종학력피자스쿨이 폐급이랍니다
└최종학력피자스쿨: 네다찐
└피카쥬: 네다프
고라니자: 그래서 뭐가 팩트임? 영향받는다고? 안 받는다고?
└삼성전자주: D급 이상부터는 멀쩡.
└고숨도치: 역시 갓D급, 어디서 폐급이랑 비비냐
└스타틀니: tlqkf 갓D급은 얼어 죽을 갓D급ㅋㅋㅋ D급이나 F급이나 도토리 키재기제
…….
하필 일반인 코스프레를 위한 이 중요한 사실이 왜 이제야 떠오르는 걸까. 저 인간 얼굴 봤을 때부터 생각났으면 얼마나 좋아.
다급한 손길로 한 손으로 목을 감싸고는 허리를 숙여 켁켁거리기 시작했다.
“헉,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네. 아이고, 사람 살려. 공기가 너무 무겁다.”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버려지다니이!’라는, 희대에 길이길이 남을 명연기를 선사한 황모 연예인급의 내 뻣뻣한 연기를 보던 주태윤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나에게 충고를 건넸다.
“혹시 진로 아직 안 정하셨다면 연기 쪽은 포기하세요.”
누가 S급 아니랄까 봐 돌려 까기도 S급이네?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웅크리고 있던 허리를 폈다.
그렇게 확인 사살 안 해 줘도 나도 내 연기 실력 안 좋은 거 알고 있다. 유치원 학예회 연극 때부터 나에게 주어진 배역은 대사 없는 나무나 행인 1, 이런 역할뿐이었거든. 유구한 발연기의 역사다.
그나저나 잠만보 열 마리에 깔린 것 같다던 던전 공기는 나한테 꽤 익숙했다. 마치 물속에 들어가 편안하게 힘을 빼고 몸을 맡기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그리움까지도 느껴지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자 주태윤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가 나를 향했다.
“역시 각성자 맞죠? 그거 말고는 지금 이 상황이 설명이 안 되는데.”
“아니요, 비각성자인데요.”
상태창은 뜨지만, 각성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이긴 하다. 각성자의 조건은 자기 각성 계열과 직업군을 상태창으로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스탯창이 뜬 나는 각성자가 아니다. 완벽한 이단논법이군.
“저기요,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시죠. 던전 안에서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은 헌터들뿐이고, F급 헌터도 당신처럼 그렇게 편안한 상태로 못 있어요.”
“오, 제가 던전 맞춤형 체질이나 보네요. 잘됐다.”
심드렁한 얼굴로 짝짝, 박수를 치고 있으니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뭐, 왜. 진짜 미등록 각성자면 각성자 센터에 찔러서 벌금이라도 물리게? S급이 쪼잔하게, 쯧.
던전 안에 갇혀 두려움에 벌벌 떨다가 구세주 만난 일반인 연기를 하기에는 아쉽게도 이미 글러 먹은 듯하다. 그냥 간 큰 마이 웨이 컨셉으로 가자.
그렇게 결심한 나는 주섬주섬 노트북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태윤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우리 안 나가요? 저 리포트 제출 오늘까지라 빨리 나가서 과제 해야 하는데.”
그러니 어서 나를 게이트로 안내해라, 주태윤아.
어서 나가자는 내 눈짓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실감이 잘 안 나시는 모양인데, 당신 방금 리포트 쓰다가 죽을 뻔했어요. 내가 조금만 늦게 왔어도 당신 그 과제 제출 평생 못 했다고.”
주태윤의 나지막한 타박에 머리를 긁적이며 그의 발치에 늘어진 몬스터 시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위험 예지도 안 뜬 저 뽀짝한 몬스터한테 내가 죽을 뻔했다고? 무슨 사람이 햄스터 앞발에 맞고 죽는다는 소리를 하고 있어?
내 멀뚱한 표정을 보고 한숨을 내쉰 그는 나를 향해 손짓했다.
아티팩트의 빛에 의지해 말없이 한참을 던전 안을 걸으니 꾸물꾸물한 검은색 포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게이트였다.
던전을 벗어나기 위해서 게이트를 향해 쪼르르 달려가는 내 어깨를 턱 붙잡은 주태윤이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며 입을 열었다.
“당신 혹시―”
그가 입을 엶과 동시에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우리가 밟고 있던 땅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크르렁거리는 소리가 던전 안에 울려 퍼지자 딱딱하게 굳은 주태윤이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몬스터가 이곳까지 나온 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에도 위험 예지가 뜨지 않는 걸 보니 이 던전의 몬스터들은 어지간히 약한 모양이다. 저기 오고 있는 몬스터가 나를 공격해 봤자 타격조차 없다는 소리다. 그 대신 내 평화가 위협받겠지.
“몬스터 한 번만 보고 가면 안 되나.”
“미쳤습니까? 아, 하긴…….”
내 혼잣말에 나를 휙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리다가 혼자 납득하는 주태윤을 보고 왼쪽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저래? 태세 전환 쩌네.
“당신이랑 같이 있으니 참 새로운 경험들을 많이 하네요. 능력이 튕기지를 않나, 몬스터가 던전 초입까지 나오지를 않나.”
“살면서 그런 경험 한 번씩 해 보는 거죠, 뭐. 어떻게 세상이 맨날 똑같이 돌아가겠어요?”
왠지 뼈가 있는 말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허허, 웃으며 말을 받아치고는 게이트에 한 발을 내디뎠다. 헛웃음을 내뱉은 주태윤을 끝으로 시야가 일렁이더니 전환되었다.
시야가 깨끗이 걷히고 나와 주태윤은 나란히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우리 앞에는 주태윤 떴다니까 방송국에서 취재하러 온 카메라와 기자 무리들, 러스터 길드 길드원들, 그리고 정장을 입은 관리국 요원들이 우글우글 무리 지어 있었다.
이런 관심은 사양인데. 이래서 유명인이 옆에 있으면 피곤하다니까.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내가 인상을 찡그리고 있자, 주태윤이 손에 쥐고 있던 모자를 내 머리에 푹 씌워 주었다.
관리국 요원들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미는 취재진 무리를 막았다. 그리고 그중 한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 이재의다.
‘오늘 무슨 날인가? 유명 인사들 많이도 보네.’
각성자 관리국 요원 중 유일한 S급이자 국내 랭킹 6위인 이재의는 주태윤 덕분에 유명해졌다. 정확히는 둘의 서사 때문에 유명해진 거지만. 인터넷에서 하도 많이 봐서 나도 외우고 있을 정도다.
주태윤이랑 이재의는 같은 공무원 학원 출신이다. 맨날 맨 앞자리, 그것도 서로의 바로 옆자리에서 행정고시 준비를 하던 중 게이트가 터지고 두 사람 다 법사계 S급으로 각성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인력 부족에 허덕이던 정부는 두 사람 모두에게 관리국 입사 제안을 했고, 시험을 치지 않아도 헌터 특채로 공무원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단번에 오케이한 이재의와는 다르게 주태윤은 ‘펔킹 김영란법!’ 한마디를 외치며 그 자리를 탈주했다.
웃긴 건 이재의는 고시 공부 시작한 지 1년 차였고, 주태윤은 두 번 떨어진 3년 차라는 거다.
아무튼 그렇게 진로가 갈라진 둘은 여전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고, 주태윤은 끊임없이 이재의에게 자기 길드로 오라고 플러팅을 던지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언제는 연봉 협상한다고 돈 꽃다발도 안겨 줬다는 카더라 썰도 있던데. 물론 이재의는 김영란법 때문에 그 돈다발 못 받았다더라.
맨날 썰이나 인터넷으로만 봤던 유명인을 눈앞에서 본 터라 신기해서 빤히 쳐다보고 있자 헛기침을 한 이재의가 정중한 말투로 물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네, 멀쩡해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한숨 놓인 표정이 된 이재의가 다시 말을 건넸다.
“혹시 던전에 갇혔던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시거나 불안감을 느끼신다면 갇힌 기억을 지워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너무 투머치한 친절에 급히 손을 내저었다. 혹시 모르니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기면 연락하라며 명함을 내민 이재의가 주태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분 말고 던전에 갇혔던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애초에 이분 빼고 튕긴 사람이 없다니까.”
“공적인 자리에서는 존댓말 해 주시죠, 주태윤 씨.”
칼같이 선을 긋는 이재의 앞에서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반말을 고수했다. 진짜 마이 웨이 심하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상황이 좀 심각해, 재의야. 몬스터가 던전 초입까지 나왔거든. 게이트 밖까지 나올 가능성도 있어.”
주태윤의 말에 러스터 길드원들과 관리국 요원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게이트 바로 앞쪽의 땅이 미세하게 울렸다. 현장을 둘러싸고 있던 분위기가 금세 날카로워졌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인마! 나오자마자 말을 했어야지!”
잔뜩 빡친 표정의 이재의가 주태윤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멱살 쥐려다가 카메라 의식해서 급히 진로 바꾼 거 다 봤다. 정말로 친한 사이는 맞는가 보다.
이재의의 손에 흔들리는 주태윤은 태평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그야, 안 물어봤잖아?”
그의 대답에 이를 갈며 주먹을 꽉 쥐던 이재의의 고개가 갑작스럽게 들린 ‘쿵!’ 소리에 뒤로 휙 돌아갔다. 아니, 모두의 고개가 동시에 게이트 쪽을 향해서 돌아갔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마구 들이밀던 기자들 역시 딱딱하게 굳은 채로 정지했다.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머리를 내민 것은.
* * *
“5급 몬스터입니다!”
“빨리 실드 스킬 쳐!”
“위험하니까 물러나세요! 뒤로 물러나세요!”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일촉즉발의 상황에도 특종감을 잡은 이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몬스터의 모습을 카메라에 더 잘 담기 위해 오히려 앞으로 우르르 몰리는 모습이 흡사 좀비 사태에서 싱싱한 인간을 발견한 좀비 무리를 보는 것 같았다.
물론 고생하는 건 관리국 요원들이었다.
“저기 보이시죠?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나왔습니다! 여러분, 최초입니다, 최초!”
휴대폰으로 촬영을 하는지, 생방송을 하는지 맨 앞줄에서 관리국 요원을 밀치며 휴대폰을 들이대고는 신나게 떠들어 대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저 몬스터가 완전히 게이트 밖으로 나오면 게이트 밖에서 최초로 몬스터에게 씹어 먹히는 것도 댁이 될 텐데…….
목을 쭉 빼던 몬스터가 견고한 실드에 머리를 쿵, 부딪쳤다. 혹시 괴수가 실드를 박살 내고 나올 일을 대비하여 헌터들이 게이트 앞을 막아섰다.
또다시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리더니 몬스터 한 마리가 더 게이트 밖으로 머리를 비집고 나왔다. 쟤는 생긴 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가…….”
“이번 몬스터는 2급입니다!”
“와, C급 게이트에서 2급 몬스터가 나오는 일도 다 보네.”
주태윤의 흥얼거림에 얼굴이 굳은 이재의가 나를 보호하듯 내 앞을 막아섰다. 아, 보호고 뭐고 집에 가고 싶다. 하필이면 기자들이 막고 있어서 저길 뚫고 나갈 수도 없다.
분명히 저쪽으로 가면 사상 최초로 몬스터가 뚫고 나온 게이트에 휘말렸던 구조자 인터뷰한답시고 카메라랑 마이크 들이밀 게 뻔하다. 귀찮은 건 딱 질색임.
지치지도 않는지 관리국 요원 바리케이드를 뚫고 게이트 앞으로 오려는 인파를 보니 절로 저기를 뚫고 가겠다는 각오가 사그라들었다.
‘저 사람들은 지금 몬스터가 뛰쳐나올 수도 있는데 무섭지도 않나.’
한숨을 쉬며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슬그머니 이재의의 뒤로 온 주태윤이 내 옆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눈을 샐쭉 접어 웃었다.
“무슨 생각 해요?”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요.”
내 솔직한 대답에도 그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꽤 위기 상황인데도 태연하시네요. 꼭 걱정 없는 사람처럼.”
“원래 사람이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면 감정이 오히려 가라앉는다잖아요.”
“그렇다기에는 게이트가 갑자기 생겼을 때부터 참 침착하시던데. 그쪽이 제 옆자리에 앉아 있었던 터라 눈에 참 잘 들어오더라고요.”
“제가 원래 좀 타고나길 포커페이스여서요.”
태연하게 날카로운 말을 받아넘기며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무슨 의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주태윤이 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건 확실하다.
왜 하필 나는 오늘 카페에 갔을까. 왜 하필 앉아도 주태윤 옆자리에 앉았을까. 왜 순간 이동을 쓰려고 했을까. 안타깝게도 내 스킬 중에서 시간에 관련된 스킬은 타임 스톱밖에 없다. 왜 나 회귀 능력 없냐.
한참을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고개를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던 몬스터 두 마리는 의외로 순순히 다시 게이트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다시 잠잠해진 게이트에도 모두가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여기서 태평한 건 나랑 주태윤뿐이었다.
“과장님,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까요?”
지금 들어가면 망할 것 같은데. 게이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몬스터의 기운에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여기서 아는 척해 봤자 더 의심받기만 할 것 같으니까 누가 좀 말려 봐.
“아니요, 혹시 모르니 조금 더 기다렸다가 진입하도록 하죠. 저는 게이트에 휘말리셨던 민간인 분 데려다주고 올 테니 계속 지키고 있도록 하십시오.”
듣던 중 반가운 이재의의 말에 환한 표정으로 휴대폰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주태윤의 참견에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내가 데려다주고 올게. 재의 네가 남아 있는 게 더 도움 되지 않겠어?”
와, 싫다. 나는 이 사람 불편하다고.
저 인간에게 나를 떠밀지 말아 달라는 내 간절한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이재의는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 인간 같으니라고.
“그래. 부탁할게.”
주태윤에게 나를 맡긴 이재의가 게이트로 다시 몸을 돌리자 그가 내게 말을 붙였다.
“집이 어딥니까?”
“제가 그쪽 뭘 믿고 집 주소를 알려 줘요?”
내 쏘아붙이는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주태윤이 싱긋 웃었다.
“그럼 기자들이랑 조금 떨어진 곳까지 모셔다 드리죠. 이 정도는 괜찮습니까?”
“그럼 저야 땡큐죠.”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력이 몸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순간 이동으로 인파와 떨어진 주택가까지 눈 깜빡할 사이에 도착했다.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주인에게 건네자 모자를 받아 든 주태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군요.”
“아, 예.”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한 나는 곧 사라지는 주태윤을 보고 나서야 자취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또 보긴 개뿔이.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 * *
“잘 데려다주고 왔어?”
“그분이 하도 경계가 심하셔서 저기 앞쪽까지만?”
이재의의 물음에 주태윤이 손가락으로 인파 너머를 가리켰다. 무슨 길고양이인 줄 알았다며 키득거리던 그는 들고 있던 모자를 인벤토리에 가볍게 던져 넣고 재의의 옆에 섰다.
“2급 몬스터가 나왔다면 게이트가 최소 A급이라는 소린데. C급이라고 뜬 건 확실해?”
“나오지 말고 한 번 몬스터 쪽으로 밀쳐 볼 걸 그랬나…….”
제 물음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중얼거리는 태윤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친 이재의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확실하냐고, 인마. 이거 상부에 보고해야 하니까 똑바로 대답해.”
“어, 어. 확실해. 게이트는 확실히 C급이었고 던전에서 잡은 몬스터는 7급이었어. A급 게이트에서 3급 이하는 안 나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설렁설렁 대꾸하며 태윤은 던전 안에서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하나도 보이질 않던 여자를 회상했다.
시종일관 태평하던 그 태도와 로봇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뻣뻣한 연기력. 역시 1년 전에 자취를 감춘 ‘그 사람’이 틀림없다.
게이트 사태가 터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같은 S급으로 ‘그 사람’과 같이 던전을 공략했던 태윤은 제대로 된 대화 한마디 못 나눠 본 그를 떠올리며 픽 웃었다.
만약 여자가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퍽 탐나는 인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비각성자라고 주장하지만, 세상 어떤 민간인이 던전 공기를 그렇게 편안하게 들이마시고 있다는 말인가. S급인 그도 가끔 목이 따끔할 정도인데.
“어떡하지, 재의야? 나 정말로 가지고 싶은 게 생겼어.”
친구의 입꼬리에 걸린 의뭉스러운 미소를 본 이재의가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다.
“혹시 네가 모를까 봐 108번째 충고해 주는 건데 스토킹은 엄연히 범죄다.”
“나를 뭐로 보는 거야? 그냥 스카우트라고, 스카우트.”
툴툴거리는 태윤을 웬수 보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이재의가 그의 등을 퍽, 쳤다.
“스카우트도 좀 적당히 하라고. 넌 너무 과하잖아.”
“그래서 내 길드가 이렇게 클 수 있던 거 아니겠어?”
동네 사진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은 주태윤이 씩 웃었다.
* * *
일주일 후, 다시 배부른 돼지 생활을 반복하다가 결국 게이트가 사라진 동네 카페를 다시 찾은 나는 내 앞에서 눈을 접어 웃고 있는 인간의 얼굴을 보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빡침에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일주일 만이죠, 우리?”
드라마 남주처럼 내 앞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아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는 주태윤의 얼굴에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커피를 부어 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니까 괜찮지 않을까.
아니야, 그러면 세탁비 물어줘야 해. 저 인간에게 돈을 써야 한다고. 참자, 이채현.
떠오르는 통장 잔액에 충동을 억누르며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려 리포트를 작성했다. 무시하다 보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병먹금이 답이다.
“재의도 그렇고 아메리카노 마시는 사람들 보면 참 신기하다니까요. 난 아메리카노 써서 못 먹겠던데.”
“음.”
“한국대? 나도 여기 나왔는데. 내 후배네요?”
“오.”
“과제가 많나 봐요. 저번에 던전 안에서 봤을 때도 리포트 쓰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카페 쿠폰 받았는데 그쪽이 가질래요? 전 필요 없는 터라.”
“예.”
음오아예 돌려막기로 주태윤의 모든 질문을 먹금한 지 30분째, 주태윤은 여유롭게 블루베리 스무디를 마시며 흥미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S급은 끈질김도 S급인가 보다. 결국 리포트를 작성하던 손을 멈추고 노트북을 탁 덮었다.
“저한테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세요?”
내 물음에 마시던 스무디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그가 익숙하게 눈웃음쳤다.
진짜 얼굴이라도 잘생겨서 봐주는 거다. 얼굴 아니었으면 어림없다. 그 얼굴로 낳아 주신 부모님께 감사해라.
“물론 있으니까 찾아왔겠죠?”
말 참 예쁘게도 한다. 쓸데없는 말 하면 얼굴에 부어 버리기 위해 아메리카노가 담긴 컵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까짓것, 세탁비 내주고 로또나 사서 생활비 충당하지, 뭐.
내 경계심 가득한 눈빛에 볼을 긁적인 주태윤이 가볍게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저는 주태윤입니다.”
“아, 예. 이채현임다.”
건성으로 자기소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통성명이 중요한 게 아닐 텐데. 팔짱을 끼고 어디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저희 길드에 들어오시라는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저 비각성자라니까요.”
이제는 거의 조건반사가 되어 버린 비각성자 멘트를 치며 주태윤과 똑바로 눈을 마주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뭐, 헌터명이 그 모양이라 이해는 합니다. 길드가 본격적으로 세워지고 자리 잡기 전에도 당신은 당신 헌터명만 들으면 난리를 치셨으니까요. 저도 그 당시에 당신이랑 같이 파티를 뛴 적도 있던 터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말을 잠시 멈추고 턱을 괸 그가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정체를 숨기고 싶은 건 이해한다지만, 숨기려면 조금 더 제대로 숨겼어야죠.”
한국말인데도 이해되지 않는 말에 멀뚱히 눈을 깜빡이며 차근차근 주태윤의 말을 해석했다.
그러니까 내가 주태윤이랑 파티를 뛰면서 내 헌터명만 들으면 난리를 쳤다고? 그리고 지금 내가 정체를 숨기고 있고?
아니, 내가 정체를 숨기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비각성자인데 헌터명은 뭐고 또 그쪽이랑 어떻게 파티를 뛰어? 님이 파티 뛸 때 나는 집에서 두 발 뻗고 자고 있었을 텐데.
저 인간은 대체 나를 누구랑 착각하고 있는 건가.
그런 나의 의문을 풀어 주려는 듯 타이밍 좋게 주태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나요, 서열1위포커스 님?”
풉!
목이 타서 컵째로 들이마시던 아메리카노를 웃음이 터진 덕에 그대로 내뿜었다.
‘미친, 진짜 저 이름은 들을 때마다 터진다. 서열1위포커스랰.’
대한민국 현 랭킹 1위 겸 월드 랭킹 1위, 서열1위포커스.
미국 시민들이 미국 랭킹 1위에게 캡틴 아메리카라는 애칭을 붙여 주자 전투 민족 K-국민들은 우리도 질 수 없다고 K-패치된 애칭을 선물했다.
그래서 우리 자랑스러운 한국 랭킹 1위는 헌터명은 ‘서열1위포커스’요, 애칭은 ‘한반도 대장’이다. 기타 별명으로는 반휘혈, 일진짱, 세서0위 등이 있다.
나이 미상, 본명 미상. 현재 소재 불명.
게이트가 막 터졌던 첫해에 랭킹 1위의 상징이 된 made in 이태리제 새 부리 가면 쓰고 던전 공략만 하고 쓱 사라진 터라 아무도 그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다.
초기에 같이 파티 뛰면서 목소리라도 들었던 헌터들의 증언으로 성별이 여자라는 것과 각성 계열이 법사계라는 것만 밝혀졌을 뿐. 그런데 닉네임 딱 보면 여자인 거 알겠더라. 그것도 한때 인소 좀 봤던 여자분.
처음에 친구들과 랭킹 1위 헌터명을 봤을 때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랭킹 1위답게 유일한 부헌터명을 가진 자다. 하도 자기 헌터명과 애칭에 난리 발광해서 지어 준 이름이란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라고 해서 볼드모트라고.
내가 봐도 왜 정체 숨기고 힘숨찐 놀이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더라. 누가 나를 서열1위포커스나 한반도 대장이라고 부르면 쪽팔려서 그 자리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듯. 저 세 개 중에서 볼드모트가 제일 나은 게 말이 되냐고.
아무튼 주태윤이 왜 갑자기 나를 찾아왔나 했더니, 튕긴 힘과 내 태평한 태도를 보고 나를 랭킹 1위로 착각했나 보다. 어쩐지 던전 안에서도 갑자기 태세 전환하더니만.
댁, 번지수 완전히 잘못 찾았어. 이럴 시간에 던전 공략 하나 더해서 돈이라도 벌 것이지.
쿨럭거리며 입가에 흐른 아메리카노를 휴지로 쓱 훔쳤다. 주태윤이 건네준 물티슈로 옷에 묻은 커피 자국을 대충 문지르며 대답했다.
“님은 절대 도박하면 안 될 듯요. 충고 하나 드리는데 경마장 쪽이랑 토토 이런 데는 쳐다보지도 마세요. 어떻게 헛다리를 짚어도 이렇게 짚지?”
“그렇게 부정하셔도 당신이 랭킹 1위란 건 변하지 않습니다, 서열1위포커스 씨.”
“아니, 랭킹 1위고 나발이고 나 비각성자라니까? 그리고 나 포커스 아니라고.”
“그럼 볼드모트라고 불러 드릴까요? 연봉은 부르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볼드모트 씨.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도 연봉 협상 가능합니다.”
“저기요, 주태윤 씨. 제 말 듣고 있긴 한 거예요? 내 이름은 포커스도, 볼드모트도 아니라 이채현이라니까? 그리고 나 랭커 아니라고요. 혹시 댁 스킬 중에 사람 말 씹어 먹는 스킬도 있어요?”
서로 일방적으로 하고 싶은 말만 해 대는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계속하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4시라니, 망했네. 이 리포트 오늘 저녁 7시까지 제출인데.
조급한 손길로 노트북을 툭툭 두드리며 주태윤을 노려보았다. 댁이 무슨 로판 노빠꾸 직진 남주인 줄 알아? 착각하지 마. 댁은 그냥 남의 학점 말아먹으려고 작정한 민폐 엑스트라캐 1이니까.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야 할지 고민하며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던 나는 잡히는 네모난 종이에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겉옷 주머니에 넣어 놓고선 까먹고 꺼내지 않았던 명함을 말없이 꺼내 전화번호를 꾹꾹 터치했다. 신호가 세 번쯤 가고, 드디어 이 인간을 내 앞에서 퇴치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재의 씨. 저 일주일 전에 카페에 생긴 게이트에 휘말려서 명함 받았었던 사람인데, 혹시 기억하세요?”
내 입에서 나오는 이름을 듣고 주태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점점 창백하게 질려 가는 얼굴이 볼만했다. 주태윤을 향해서 헹, 웃어 주고 전화 통화를 이어 나갔다.
- 네, 물론입니다. 혹시 그 후로 무슨 증후나 PTSD 증상 같은 게 나타나셨습니까?
“아니요. 그건 아닌데, 곧 생길 것 같아서요.”
- 네?
“다름이 아니라 이재의 씨 친구분이 계속 멀쩡한 일반인을 각성자로 몰아가네요. 계속 제 말도 안 듣고 저한테 계약을 강요하시는데, 학업에도 방해되고 꽤 스트레스받거든요. 그러고 보니 지금도 과제 작성 방해하는 중이네요.”
“잠깐! 이채현 씨, 제 말 좀―”
다급한 주태윤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잠시 멈칫한 이재의가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 …주태윤?
“네네, 랭킹 4위 S급 랭커이자 러스터 길드장인 그 주태윤 맞습니다. S급이 일반인에게 이래도 되는 거예요?”
- 죄송한데 잠시만 태윤이 좀 바꿔 주시겠어요?
공손한 어조지만 숨길 수 없는 스산함이 담긴 말에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주태윤에게 내 폰을 내밀었다.
“친구분이 바꿔 달라는데요.”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내 핸드폰을 받은 주태윤은 핸드폰을 귀에 대자마자 흠칫하며 귓가에서 멀찍이 떼어 냈다.
대충 들리는 말을 조합해 보니 이런 식으로 인재 영입하는 거 한두 번이 아닌 듯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온갖 욕설의 향연에 히죽거리며 이재의를 응원했다.
짧은 시간 새하얗게 불타 버린 주태윤이 힘없는 손길로 나한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언제 목청을 높였냐는 듯 차분하게 내려앉은 이재의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 죄송합니다. 주태윤 씨한테는 제가 경고했으니 혹시 또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이 번호로 다시 연락 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이재의의 정중한 사과에 속으로 혀를 찼다. 불쌍, 어쩌다가 친구 잘못 만나서 이 고생인지.
통화 종료 버튼을 터치하자, 카페 창 너머를 힐긋 본 주태윤이 실례했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일으켜 카페를 빠져나갔다. 들어 보니까 계속 그러면 러스터 길드 세무조사로 한번 턴다고 협박을 한 모양이다.
그래, 뭔가 뺀질뺀질한 게 세금 떼먹을 것같이 생겼더라.
패배해서 물러나는 주태윤의 뒷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보며 마침내 찾아온 평화를 잠시 만끽하던 나는 다시 노트북을 열고 리포트 작성을 시작했다.
세 시간 만에 끝낼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정신적 손해배상 명목으로 리포트나 써 주고 가라 할걸.
* * *
- 야, 이채! 너희 동네에 몬스터가 밖으로 나온 걸로 특종 탄 게이트 터졌었다며. 왜 말 안 했어!
“어차피 나는 다친 데도 없는데, 뭐.”
- 뉴스에 나온 게이트 터진 데가 우리 동네고 나는 무사하다고 연락 한 번 해 주는 게 그렇게 힘드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고막에 다이렉트로 꽂혀 왔다. 다급히 휴대폰 볼륨을 줄이며 대꾸했다.
“죄송죄송, 벗뜨 귀찮.”
- 또 2년 전처럼 연락도 뭐도 안 받고 술 퍼마시고 새벽에 몇 시간 동안 잠수 타려고?
“아, 그 일이 여기서 왜 나와. 그때는 진짜 사정이 있었다니까.”
그리고 나는 몇 시간이 아니라 500년이었거든.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툴툴거리며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게이트에 휘말렸던 것까지 알면 아주 폭풍 잔소리가 몰아치겠네.
- 이채, 제에발 단체 채팅방엔 이런 걸 말해 주라고. 뷔페 털고 싶다고 이모티콘 열 개씩 보내면서 찡찡대지 말고!
“힝.”
표정 변화 없이 힝, 소리를 내자 한 대 치고 싶다는 스산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헌터가 민간인 치면 철컹철컹 or 벌금 폭탄.”
- 그래서 안 치고 참고 있잖아. 참, 나 내일 세인이랑 너희 동네 간다.
“어어, 그럼 이만 장 봐야 해서 끊는다. 청소 안 해 놔도 상관없지?”
- 좀 치우고 살아라, 이 나무늘보야!
8년 지기 친구 백아현의 차진 욕설을 들으면서 통화를 끊었다. 맥주 여섯 캔을 바구니에 던져 넣고 안줏거리로 과자와 육포를 골랐다. 출출한데 삼각김밥도 하나 살까?
“술 좋아하시나 보네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면상이 보였다. 동네 편의점에서 마주한 주태윤의 반반한 낯짝을 보자마자 이를 갈며 몸을 돌렸다. 또냐?
저 인간을 우리 동네에서 마주친 지 벌써 네 번째다, 네 번째. 이 정도면 스토킹으로 신고해도 될 것 같다.
대답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계산대에 다가가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 문을 열고 나왔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던전 안에서 기절시켜 놓은 후 기억 지우고 튀었어야 했다. 갑자기 게이트에 휘말려서 당황한 나머지 그런 훌륭한 아이디어를 즉각 떠올리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나와 관련된 기억을 지우면 빈자리가 너무 많아져서 무리다. 기억이란 게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보니 아주 조금의 비틀림만 있어도 다시 떠오르기 마련이다.
괜히 더 의심받을 짓은 사양임. 지금도 충분히 피곤하다.
찌푸린 미간을 꾹꾹 누르고 있자 따라 나온 주태윤이 가증스럽게도 잔뜩 걱정 어린 표정을 하고선 물어 왔다.
“어디 아프십니까?”
어, 그쪽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인터넷에 주태윤이 애꿎은 민간인을 스카우트 명목으로 괴롭힌다고 올린 글도 주태윤 팬들에게 망상증 있냐고 싸불당하고 신고 먹었다. 그 아픈 기억이 떠오르자 절로 눈빛이 사나워졌다.
“언제까지 따라다닐 건데요? 이거 스토킹인 거 알아요?”
“글쎄요, 채현 씨가 랭킹 1위라는 걸 인정하실 때까지?”
영원히 따라다닌다는 소리냐. 평생 스토킹 선언을 들은 내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내 정색에 잠시 흠칫한 주태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짝, 손뼉을 쳤다.
“역시 이 기백, 이 살기, 압도적인 기운. 랭킹 1위한테 느꼈던 기운 그대로네요.”
뭔 놈의 기운 타령이야. 무슨 조명, 온도, 습도도 아니고. 짜게 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번지수 잘못 찾으셨다니까. 랭킹 1위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요, 진짜.”
“혹시 얼굴 밝히는 게 꺼려지신다면 모자랑 마스크 쓰고 던전 공략하셔도 됩니다. 채현 씨 정보는 저희 길드 측에서 책임지고 숨겨 드리겠습니다.”
“아, 돌겠네. 내가 벽이랑 대화하나. 님, 행정고시 언어논리 때문에 떨어졌죠?”
“면접에서 떨어졌지 2차까진 붙었습니다. 그래서, 랭킹 1위 맞죠?”
아니라고, X발. 계속해서 돌고 도는 대화에 열불이 뻗쳐 집어 던질 거라도 찾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편의점 앞에 놓여 있는 빈 소주병을 발견했다.
저 인간이 나를 계속 빡치게 만든다면 소주병이 더 단단한지, S급의 대가리가 더 단단한지 실험해 볼 용의가 충분하다.
내 눈길이 향한 곳에 시선을 준 주태윤이 소주병을 발견했는지 한 발짝 물러서며 볼을 긁적였다. 그런 그를 보며 진지한 얼굴로 제안 같은 협박을 건넸다.
“내가 이 이상 댁 얼굴 보면 진짜 댁 대가리에 소주병 내리칠 것 같으니까 내일 1시에 저 카페에서 이야기하죠.”
“긍정적인 답변 기대하죠. 내일 봅시다, 이채현 씨.”
눈웃음 지은 주태윤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주태윤이 사라지자마자 싹 굳어 있던 안면 근육을 허물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걸려들었군. 긍정적인 답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다시는 나한테 달라붙지 못하도록 해 주지.
자취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입고 있던 과잠을 바닥에 툭 던져 놓고는 편의점 봉투를 그 옆에 내려놓았다. 대충 세팅을 마치고 주태윤의 면상을 씹듯이 과자를 씹으며 맥주 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주 끈질기기가 현재 마계에 있을 누구누구를 떠올리게 만든다.
랭커 아니라 했을 때 한 번에 알아들으면 얼마나 좋아? 순간 이동도 쓸 수 있고, 염력도 쓸 수 있고, 타임 스톱도 쓸 수 있고, 어둠도 쓸 수 있고, 아무튼 셀 수 없을 정도의 스킬을 보유하고는 있지만 각성자는 아니라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각성자 필수 관문을 거치지 않았다.
투덜거리며 다시 캔 안의 액체를 목구멍에 들이붓다가 배터리 5% 경고등이 뜬 핸드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스킬 ‘전격(S)’을 실행합니다.』
스파크가 살짝 일더니 핸드폰 배터리가 5%에서 100%로 바뀌었다. S급 스킬을 핸드폰 배터리 충전하는데 사용하는 이 이채현 님 클래스.
“컨트롤 너무 완벽한 듯. 10점 만점에 10점 드립니다.”
입가에 흘린 맥주를 손등으로 쓱 훔치며 자화자찬했다.
물론 헌터가 되면 좋은 점도 많다. 돈도 많이 벌고, 명예도 따라오고, 인맥도 넓어지고. 물론 그게 다 목숨값이긴 하지만.
그리고 나는 게이트 너머에 나를 죽일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오직 집으로, 이 차원으로 돌아오기 위해 몇십 번의 폭주를 겪고, 몇백 번의 전투를 겪었으니까.
그리하여 누구도 나를 뛰어넘을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원래 현대 판타지보다 판타지 주인공 능력치가 더 높은 법이지.’
무언가를 살상하는 행위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졌을 때, 내가 누군가의 목숨을 거뒀다는 것이 아무렇지 않아질 때쯤, 나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몬스터이든 뭐든 내 능력으로 목숨을 앗아 가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세월은 그저 오랜 시간 동안 꾸었던 꿈이라고 남겨 두고 싶었기에.
이제는 좀 평화로운 세상을 누리며 쉬고 싶었다.
그대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팔로 눈가를 가리고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묻어 두었던 과거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피곤했다.
* * *
“와, 꿈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 성이 내 눈앞에 있을 리가 없지.
익숙한 성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과거 좀 떠올리자마자 꿈에서까지 나오냐, 망할 마왕성.
온통 시커먼 색으로 뒤덮인 고풍스러운 성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마왕성 주변을 날고 있는 까마귀 놈들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저것들 진짜 날 잡아서 다 잡아 버려야 하는데.
까마귀 떼를 야리며 마왕성 앞쪽에 자리하고 있는 숲으로 향했다. 이 숲은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영화 「해리 X터」에 나오는 금지된 숲 뺨치게 어두컴컴하고 음침하기 짝이 없다.
복잡하고 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숲이었지만 몇 번이고 걸음 했던 장소인 터라 익숙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빛이 들어오지 않는 숲속 중 유일하게 태양이 비치는 곳에서 빛을 등지고 서 있는 한 인영이 보였다.
햇빛을 받은 옅은 색의 머리가 찬란하게 반짝였다. 그 모습은 답지 않게 성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오랜만이네.’
전해지지 않을 인사를 마음속으로 건네며 다른 길로 향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내 발밑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그 소리에 온몸으로 햇빛을 받으며 서 있던 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선명한 붉은색 눈동자가 온전히 나를 향했다. 노을을 담은 눈동자가 곱게 휘어지며 온 세상의 기쁨과 환희를 담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귀찮아졌다는 예감에 미간을 팍 찌푸렸다.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다가온 이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자 금방이라도 손 뻗으면 닿을 거리만을 남겨 두고 그가 멈추어 섰다. 색채 고운 적안에 그리움이 한가득 일렁거렸다.
내 꿈인데 왜 너는 나를 그런 눈으로 봐? 그저 내 꿈일 뿐인데, 정말로 네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잖아.
빤히 마주 보고 있으니 질척하고 새카만 감정이 마주 보던 적안에 잠시간 스쳐 지나갔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깜빡이니 눈을 곱게 휘어 웃는다. 가려진 눈동자에선 더 이상 감정을 읽어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곧고 단정한 하얀 손이 나를 향해 천천히 뻗어졌다. 주저와 기대로 몇 번을 멈칫하던 그 손이 나에게 닿기 직전, 공간에 금이 가더니 가장자리부터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곧 볼 수 있을 거예요, 나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를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라냐. 내가 거길 왜 가? 그 고생해서 컴백홈 했는데 미쳤다고 다시 돌아가겠냐?
* * *
초인종 소리에 잠에서 깬 나는 잔뜩 헝클어진 단발을 손으로 쓱쓱 빗어 내렸다. 벌써 아침이냐. 무슨 꿈을 꾼 것 같았는데. 기억은 나지 않지만, 왠지 기분이 엄청 더러워지는 꿈.
떠올리려고 해도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꿈에 포기하고 하품을 쩍쩍 하며 문을 열었다.
“와, 이제까지 잤냐. 하여간 나무늘보 새끼.”
“또 술 먹다가 퍼질러 잤구먼. 이채, 좀 치우고 살아. 이게 돼지우리야, 사람 집이야?”
역시 세수도 하지 않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잔소리를 쏟아붓는 윤세인과 백아현을 보며 질린 표정을 지어 주며 들어오라고 몸을 비켜 주었다.
“뭔 놈의 날 비유하는 동물이 그렇게 많아? 돼지든, 나무늘보든 하나만 해라.”
투덜거리며 널브러진 과자 봉지를 발로 쓱 밀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친구들은 다시 잔소리를 시작했다.
동네에 몬스터가 머리를 내미는 게이트가 터졌으면 문자라도 넣어라. 네가 만약 그 게이트에 휘말렸다면 우리가 어떤 심정일 줄 알고 그렇게 태평하냐. 친구네 동네 소식을 내가 뉴스로 접해서야 되겠냐. 어쩌구저쩌구.
서울로 올라오며 울 엄마 잔소리 겨우 벗어났더니 더한 잔소리꾼들이 떡하니 있다.
중학생 때부터 절친이었던 삼총사 중 두 명이 각성을 한 덕에 한 명만 남겨지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둘은 혹시나 내가 소외감을 느낄까 봐 유일한 민간인인 나를 유난스레 챙겼다. 음, 조금 덜 챙겨도 될 것 같은데.
“좀 바로바로 치우면 어디가 덧나?”
쓰레기를 방 한쪽으로 모으며 끊임없이 잔소리하는 긴 갈색 생머리에 도도한 인상의 미인은 백아현. 한국의 유일한 S급 힐러다. 한국 랭킹 3위에 월드 랭킹은 12위. 대학 중퇴하고 헌터 협회에서 일하는 중이다. 자기 말로는 자기가 협회에서 No. 2란다.
“이채, 너 대체 뭐 먹고 사냐?”
짧은 커트 머리를 긁적이며 냉장고부터 뒤지는 허스키상 여장부는 윤세인. 검사계 A급 헌터로 공시 준비하다가 때려치우고 각성자 관리국으로 들어갔다. 한국 랭킹은 15위고 월드 랭킹은 까먹음.
“설거지 귀찮아서 거르는데.”
그리고 나, 이채현. 나이는 일단은 스물세 살이라 치자. 이 중 유일한 일반인이자 대학 건물이 게이트에 휘말린 덕에 반 휴학 상태가 되어 버려 기쁜 대학생.
냉장고를 뒤적이던 세인이가 포기했는지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어제 내가 안주로 먹던 과자를 주워 먹기 시작했다. 뭔가 불쌍해 보이는 그 모습에 배달 앱을 켜며 물었다.
“센, 그런데 이재의가 네 상사라고 안 했냐? 우리 동네 게이트 터졌을 때 이재의 왔던데 왜 넌 안 온 거?”
“그때 월차 썼어.”
동네 게이트라는 말을 들으니 또 울컥했는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현이가 다시 잔소리를 쏟아 냈다. 거의 넋 나간 표정으로 한 귀로 듣고 흘리기 스킬을 시전하다가 시계를 힐긋 보았다.
12시 45분이다. 헐, 주태윤이랑 약속 시간 1시였지?
“잔소리 실컷 들었더니 갑자기 커피 당기네. 아아메 먹고 싶다. 아아메.”
“배달시켜. 요즘 배달 앱으로 카페도 배달되는데 귀찮게 왜 나가?”
“최소 배달 금액 맞추기 힘들잖아. 바로 앞인데도 배달비도 붙고.”
“무슨 상관? 그냥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맞다, 백아현은 배달 팁 3천 원에 벌벌 떠는 소시민인 나와 다르게 고소득 직업인 헌터였다. 그것도 부르는 게 값인 S급 힐러. 윤세인은… 공무원 월급이 다 그렇지, 뭐.
내 눈앞에서 카드를 살랑살랑 흔드는 아현이를 홀린 듯이 보며 고개를 끄덕이기 직전에 정신을 차렸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충분해. 그러니까 카페 가자.”
“그래, 다음부터는 카페에서 와플은 안 시켜도 되겠다. 괜찮지, 이채?”
“울 백야, 선 넘네?”
와플 걸고넘어지는 건 도리가 아니지.
내 말에도 둘은 내 자취방 바닥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씨, 큰일이다. 윤세인은 몰라도 백아현은 꼭 데리고 가야 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백아현이랑 윤세인한테 자취방 말고 카페로 오라고 할걸.
“바깥 공기 좀 쐬고 싶어. 카페 좀 가자.”
“너 혼자 갔다 와라. 움직이기 귀찮다.”
“내가 사실 세 명 이상으로 무리 지어서 카페를 가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림.”
“헛소리 쩌네.”
귀를 후비적거리던 백아현이 내 말에 비웃음을 내뱉었다. 역시 통하지 않는군. 결국,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양심 따위는 애초에 존재한 적 없었음.
“내가 만약 혼자 카페를 갔는데 갑자기 그 카페에 S급 게이트가 터져서 아무것도 못 하는 일반인인 내가 휘말린다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아, 간다, 가. 진짜 별소리를 다 하네.”
결국 항복한 아현이와 세인이가 느릿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우리 셋은 S급 스토커 하나가 기다리고 있을 카페로 향했다.
딸랑―
카페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문 맞은편 자리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주태윤이 종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여기예요, 채현 씨.”
나를 발견한 그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삐딱한 미소를 얼굴에 걸치고는 아현이랑 세인이를 잡아끌고 주태윤이 앉아 있는 자리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서글서글한 미소가 내 옆의 친구들을 보자마자 천천히 굳었다.
“백야 씨랑 재의 부하 직원분……?”
그리고 그건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주태윤이잖아? 이채, 너 저 인간이랑 아는 사이야?”
“이채, 내가 상사 친구 놈을 주말에도 봐야 해……?”
설마 저 인간 소개해 주려고 우리 끌고 온 거냐고, 대체 무슨 사이냐고 내 어깨를 붙잡고 짤짤 터는 친구들을 향해 머쓱하게 웃었다.
얘들아, 내가 인간 상대는 너무 오랜만이라 조절이 안 될 것 같거든? 그러니까 누가 나 대신 저 인간 대가리 좀 후려쳐 줘.
“딱히 별 사이는 아니고 그냥 스토커와 피해자의 사이? 참고로 일주일 넘게 시달리는 중이야.”
내 간결한 대답에 당장이라도 주태윤의 멱살을 잡으려고 하는 아현이를 필사적으로 말렸다. 언제 꺼냈는지 스태프가 손에 들려 있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저 스태프를 휘두르며 사람 대가리 깨기 딱 좋겠다고 깔깔거리던 백아현의 모습을 난 아직 잊지 않았다.
아현아, 여기서 소란은 안 돼. 나는 「힐러 vs 딜러_avi」 영상에 얼굴 팔려서 돌아다니고 싶지 않다고. 그냥 카페 나가는 길에 조용히 주태윤 대가리만 후려쳐 주면 안 될까? 다행히 세인이는 상사 친구라 사리는 중이어서 말릴 필요가 없었다.
저 빌어먹을 스토커 놈에게 저주 5중 중첩을 걸어 주겠다고 날뛰는 아현이를 겨우 말려서 자리에 앉혔다. 누구도 저 인간 옆에 앉고 싶지 않아 하던 터라 2인용 소파 형식의 의자에 세 명이 끼어 앉았다.
지옥의 침묵이 우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내려앉았다. 팔짱을 끼고 주태윤을 노려보고 있는 아현이와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는 주태윤의 사이에서 스파크가 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오른쪽에 앉은 윤세인을 힐긋 돌아보니 내 표정과 마찬가지로 심드렁했다. 아현이랑 주태윤이랑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다리를 꼰 아현이가 턱을 치켜들며 까칠하게 물었다.
“그래서 러스터 길드장 씨는 왜 내 친구한테 달라붙으셨을까?”
“인재를 얻기 위해서라면 삼고초려 정도는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예전에 내게 거하게 욕설 얻어먹은 거로는 모자랐나 봐요? 질척거리는 남자는 딱 질색인데.”
있었구나. 아마 나한테 지금 하는 것처럼 스카우트하려다가 실패하지 않았을까. 백아현 입에서 주태윤의 이름 석 자가 게이트 사태 이후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걸 보아하니 어지간히 미움받았나 보다.
픽 웃은 주태윤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무슨 착각을 하신 건지는 잘 알겠네요. 그런데 미안하지만, 오늘은 백야 씨한테 용건 있는 게 아니라 옆의 친구분에게 용건이 있는 터라.”
아현이와 세인이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미간을 찌푸린 아현이가 잔뜩 경계하며 물었다.
“채현이는 왜요?”
“물론 러스터 길드로의 스카우트죠. 생각은 좀 해 보셨나요, 채현 씨?”
삼고초려의 노력이 가상해서 나도 삼초고려하고 대답해 주었다.
“열 번 넘게 말한 것 같긴 한데 다시 말해 드릴게요. 거절이요.”
우리의 대화를 들으며 나랑 주태윤을 당혹스러운 눈으로 번갈아 보던 세인이가 의문을 제기했다.
“엥, 무슨 스카우트? 요즘 러스터 길드는 비각성자도 스카우트하나? 그것도 길드장이 직접 달라붙어서?”
“비각성자요? 그쪽들, 혹시 진짜 친구 맞습니까?”
주태윤의 비웃음에 우리 셋의 표정이 동시에 싸하게 굳었다.
“뚫린 입이라고 막 뱉네? 댁이 채현이랑 안 지 얼마나 됐다고. 우리는 8년 지기거든요? 아직 한 달도 안 된 스토커가 뭐라는 거야?”
눈을 매섭게 치뜬 아현이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이건 좀 선 넘은 거 같은데요, 과장님 친구분. 과장님에게 주태윤 씨가 민간인 스토킹 중이라고 전해도 돼요?”
시큰둥한 얼굴을 한 세인이가 거들었다.
“왜 남의 친구를 막 없애고 그래요. 그쪽이 친구 없다고 저에게 이러시면 안 되죠.”
마지막으로 내가 마침표를 찍었다. 세 여자의 무시무시한 눈초리에 빳빳이 서 있던 주태윤의 고개가 점점 허물어졌다.
결국 S급, EX급, A급의 살벌한 눈빛을 버티지 못한 그는 고개 숙여 우리 셋에게 사과를 건넸다.
“기분 상하셨으면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채현 씨가 랭킹 1위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까 한 소리였습니다.”
“이채현이 우리를 속일 만큼 완벽한 연기를 할 리가 없거든요? 얘가 랭킹 1위면 우리가 댁보다 먼저 알아챘죠. 우리한테만큼은 절대 못 숨겨요. 우리가 서열1위포커스 헌터명 보여 줬을 때 그렇게 진심 가득한 얼굴로 웃었을 리가 없다고.”
진짜 뼈 때리네. 분명 아현이는 나를 도와주고 있는 건데 왜 주태윤보다 내가 더 타격을 입고 있는 것 같냐.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얼굴로 웃고 있자, 세인이가 나를 돌아보며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이채, 각성자 상태창 뜰 때 문장에 있는 특수 기호 뭐게?”
『직감이 발동됩니다.』
“어……. 검은색 별?”
갑자기 또 지옥의 침묵이 찾아왔다. 셋의 시선이 한꺼번에 나를 향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이걸 맞혀……?”
“그냥 별도 아니고 검은색 별……? 이채현, 너 진짜 미등록 각성자야?”
망할 직감. 선택의 기로에서 어김없이 발동되는 직감이 또 열일 하셨다. 이걸 맞히면 어떡하냐…….
나를 길치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 준 고맙기 그지없던 능력이 지금은 나한테 빅엿을 먹이고 있었다.
“찍은 건데.”
“뭐야, 연기 아니네?”
진심을 가득 담아 내뱉은 내 말에, 표정과 자연스러운 말투를 보고 모두가 납득했다. 심지어 그 주태윤마저도. 저 인간은 나 안 지 얼마나 됐다고 고개 끄덕이고 있냐, 기분 더럽게.
백아현과 윤세인이 양쪽에서 내 어깨에 팔을 척 걸쳤다.
“거봐요. 우리 채현이는 보호받아야 할 가련한 일반인이라니까?”
“…딱히 가련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호랑이가 풀 뜯어 먹는다는 소리를 들은 것같이 변한 주태윤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둘은 말을 이어 나갔다.
“한 번만 더 이채, 아니 채현이한테 접근하면 과장님께 다이렉트로 신고 넣겠습니다.”
“아니, 어떻게 전투계 S급이 양심도 없이 일반인을 스토킹해요? 우리 채현이 무서워서 잠도 못 잤다잖아!”
내가 언제.
“그럴 리가요. 저분이 던전 안에서도 얼마나 태연하셨는데.”
헛웃음과 함께 내뱉은 그의 중얼거림에 아현이와 세인이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던전 안?”
“너 게이트 휘말렸어? 너희 동네에 터진 그 게이트?”
둘의 스산한 눈빛을 피하며 주태윤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걸 왜 말해, 인마. 눈치 존재하냐?
“이채현, 해명해.”
“아하하, 그게 말이야……. 어, 안 다쳤으니까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자 백아현이 나를 잡고 마구 흔들어 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는 그런 것도 말을 안 하냐! 죽었을 때도 너 죽은 후에 연락할래?”
“죽은 후에 어떻게 연락하냐. 무슨 착X아리도 아니, 악! 그만 좀 흔들어, 인마!”
친구가 아니라 웬수라며 짤짤 터는 두 명에게 영혼이 나간 표정으로 잡혀 있는 나를 본 주태윤이 피식 웃으며 난리통 사이 자기 명함을 내 핸드폰 밑에 슬쩍 밀어 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핵폭탄 터트려 놓고 혼자 어디 가냐, 망할 놈아.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마음이 바뀌신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채현 씨.”
꾸벅 인사한 그가 유유히 카페를 빠져나갔다. 친구들에게 어깨를 잡혀 흔들리는 와중에도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주태윤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저 망할 놈이 마지막까지 엿을 먹이고 가네. 꼭 맨발로 레고 밟고 맨날 방문에 발가락 찧는 삶 살아라.
* * *
세상은 많은 것이 변했고, 또한 그보다 더 많은 것이 그대로이다.
각성자보다는 비각성자의 수가 월등히 많고, 그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게이트만 주의하면 된다. 헌터들에게나 현실이 현대 판타지 장르지, 일반인들에게 현실은 그저 게이트와 던전만 추가된 일상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예전에 쏟아져 나오던 현대 판타지 소설에 비하면 지금의 현실은 순한 맛이나 다름없다. 세계가 멸망 직전에 있지도 않고, 던전 브레이크가 터져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오지도 않는다.
그래서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느냐면, 오랜만에 예전에 쓰인 현대 판타지 소설 한번 읽었다. 정통 판타지는 죄다 용사물이어서 도저히 읽지를 못하겠더라.
다른 독자들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 댓글은 온통 ‘현실 매운맛 버전’, ‘이게 현실이 아니라서 다행’, ‘이 글이 끝까지 성지 순례가 아니길 빈다’ 등등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핸드폰을 터치해 보고 있던 소설 화면을 내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엄마?”
- 어, 왜.
“나 오늘 집 갈게.”
- 학교는? 오늘 평일인데 너 학교 안 가냐.
“게이트 터져서 싸강이라 학교 안 가. 한 일주일간 집에 머물러 있어도 될 것 같아.”
- 그래라. 와서 또 퍼질러 자고 있지 말고 오렌지 사 놨으니까 그거라도 까먹고 있어.
“엉.”
참 쿨하기 그지없는 엄마와의 통화를 마치고 간단히 짐을 챙겼다. 어차피 부모님 맞벌이라서 평일 오전에는 집이 비어 있을 확률이 100%다.
학부모 면담도 아닌 친구들 면담이라는 강수를 뒀는데도 주태윤이 또 쫓아다닐까 봐 일주일만 본가에 있기로 했다.
하도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진, 눈 감고도 줄줄 외울 수 있는 집 좌표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눈을 가볍게 감았다가 떴다. 허공에 수많은 숫자와 영어의 향연이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공간에서 공간을 넘나드는 순간 이동은 고도의 집중력과 정확한 좌표 계산이 필요하다. 원하는 위치만 생각하면 순간 이동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좌표를 모르고 하는 순간 이동이라,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오차가 생긴다면 강이나 바다 한가운데나, 고속도로 한복판에 떨어질 수도 있거든.
‘결론은 머리가 빠르게 잘 돌아가는 놈이나 할 수 있는 스킬이란 소리지.’
전에 있던 차원에서는 정확한 좌표 계산조차 여의치 않아 전투할 때나 간간이 썼던, 딱히 쓸모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능력이었지만, 핸드폰으로 지도만 터치해도 좌표 계산 다 해 주는 현대로 오니 아주 최고의 능력이 따로 없다.
상태창 생기고는 좌표 저장도 할 수 있다. 상태창 만세. 전에는 이런 거 상상도 못 했는데. 전 차원에서 상태창 있었으면 드래곤볼 100년은 빨리 모았겠네.
『순간 이동(S) - 저장된 좌표』
- 자취방
- 본가
- 자연대 건물…….
『스킬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1인』
좌표를 선택하자마자 공간이 일렁이더니 시야가 휙휙 전환되었다.
순식간에 나는 본가 현관에 서 있었다. 엄마한테는 11시 버스 타고 왔다고 해야지.
* * *
20XX-04-14 22:17 조회: 8,678
[잡담] 스토커 주태윤 글 기억해?
주태윤이 민간인인 자기 스카우트 명목으로 스토킹한다고 올라온 글 있었잖아. 그런데 그거 진짜인가 봐.
동네 카페에 있었는데 갑자기 주태윤이 내 뒤 테이블에 앉아서 놀랐단 말이야? 그런데 몇 분 뒤에 여자 세 분 들어와서 주태윤 앞에 앉고 대화하는데, 막 민간인이랑 스토킹이란 단어가 몇 번씩 들리고 스카우트 어쩌고 하다가 주태윤이 끝까지 연락하라고 말하고는 나가더라고.
대화 내용 자세히는 기억 안 나는데 딱 주태윤이 스카우트 거절하는 비각성자 계속 쫓아다니는? 그런 내용이었어. 그 쓰니 여기서 네 망상 싸지르지 말라고 싸불당했는데 불쌍…….
댓글(58)
- 써방 좀 해 ㅅㅂ
└써방 의무 아니니까 완장질 좀 하지 마, 윾입아;;
- 증거 가져오라고 욕 처먹으니까 이제는 카페 썰로 바꿔서 가져왔냐?
└나 그 글쓴이 아닌데
└어쩌라고. 증거나 가져와, 정병아
└너랑 다르게 갓생 사는 태윤이가 그렇게 질투 나던?ㅋㅋㅋㅋㅋㅋ
- 증거좀증거좀증거좀증거좀증거좀증거좀
- 너같이 뇌피셜로 싸재끼는 애들 때문에 유독 울 태윤이한테 악질적인 카더라가 판치지ㅉㅉ
└ㅇㅈㅇㅈ 뇌피셜 멈춰~
└ㄹㅇㅋㅋ 증거 없으면 안 믿음ㅋㅋㅋ 억울하면 증거 가져오라니까?
- 주태윤 팬들 왜 이럼? 러스터 길드 스카우트 X나 악질적인 걸로 유명한데 눈막귀막 오지네
└그니까, 하이 랭커들 주태윤이라 하면 진짜 학을 떼잖아ㅋㅋㅋ
└백야가 유일한 S급 힐러라 진짜 협회 들어가기 전까지 끈질기게 당했지
└사실상 주태윤이 협회 가라고 등 떠밀어 준 거ㅋㅋ
- 스토커 주태윤 원글 링크 있어?
└싸불당하다가 신고 먹고 삭제됐을걸
…….
* * *
“채현아, 마트 가서 마늘 좀 사 와라.”
“아, 귀찮은데. 집에 마늘 없어?”
“없으니까 너한테 사 오라고 시키지. 얼른 갔다 와. 집 앞인데 뭐가 귀찮아.”
엄마의 심부름을 가장한 명령에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몸을 겨우 일으켜 현관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등록금, 자취방 월세, 용돈 모두 부모님께 조달받는 불효녀는 입 다물고 명령에 따를 수밖에.
세계관최고먼치킨능력자면 뭐 해. 집에서만큼은 완벽한 슈퍼 을인데.
조용히 투덜거린 나는 현관 서랍 문고리에 걸려 있는 장바구니를 낚아채 마트로 향했다.
“5,000원입니다.”
심부름 목록인 마늘과 내가 먹을 과자 몇 개를 사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가 오자마자 갑자기 터진 게이트가 있는 놀이터 쪽을 거쳐서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비명 같은 부름이 들려왔다.
“재민아!”
뭔 일인가 싶어 힐긋 돌아보자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게이트 앞에서 덜덜 떨고 있는 폼이 왠지 보통 일은 아닐 것 같아 한숨을 푹푹 내쉬며 그쪽으로 향했다.
아, 같은 동네 사람인데 그냥 지나치기도 좀 그렇잖아.
“저기요, 제발 도와주세요!”
“무슨 일 있어요?”
내 물음에 내 소매를 붙잡은 여자가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저희 애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어요. 제발 저희 애 좀 데리고 나와 주세요.”
여자의 옆에 있는 유모차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아기를 보니 왜 차마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하긴, 아기랑 같이 게이트 들어가기도 그렇고 아기만 게이트 앞에 두고 들어가기도 그렇지.
듣기로는 던전 공략은 끝났다던데. 완벽히 공략 끝낸 던전이라 위험 요소는 딱히 없겠지만, 그래도 던전은 미지의 공간이기도 하고 헌터나 관리국 요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저 여성분이 쓰러지실까 봐 걱정된다. 그냥 얼른 들어가서 데리고 나오자.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여간, 꼬맹이들 호기심은.
그나저나, 그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들어가다니, 그 꼬맹이도 예사롭지 않기…는 개뿔. 왜 이렇게 허접해?
수도권 게이트의 철통같은 3중 보안을 보다가 지방 게이트의 보안을 보니 정말 할많하않이었다.
CCTV, 헌터증, 지문 입력의 3종 보안을 뚫어야지만 들어갈 수 있는 수도권 게이트와는 다르게 우리 동네 놀이터의 게이트는 그저 출입 금지 노란 테이프가 끝이었다.
이렇게 관리를 하니까 애들이 막 들어가지, 쯧. 수도권에 비해서는 확연히 터지는 비율이 적은 터라 관리도 허술한 모양이다. 여윽시 서울 공화국.
“데리고 나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이 앞에서 기다리세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허리를 연신 숙이는 여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테이프를 가볍게 넘어 게이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서늘한 던전 공기가 몸을 감쌌다.
나는 던전 공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터라 지금 던전 공기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포근하다거나 낯익다는 느낌이 없는 걸 봐서는 그냥 보통 공기인 듯싶다.
공략 후 광물과 마석 채집을 위해서인지 던전 벽의 발광 아티팩트들을 회수하지 않은 덕에 다행히 던전 안은 밝았다.
“자, 그러면 이 아티팩트를 한번 벽에서 떼어 내 보겠습니다!”
남자아이의 힘찬 목소리를 들으니 그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던전이 공략되면 공기도 원래대로 돌아오는 모양이군. 던전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급하게 달려갔다. 멀리도 갔네.
돌벽에 붙어 있는 500만 원짜리 아티팩트를 향해 손을 뻗는 꼬마의 팔을 잡아챘다. 한 10~12세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야야, 꼬맹이, 스톱. 요즘 애들은 겁도 없네.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고 함부로 만져?”
“아, 뭔데! 지금 영상 촬영 중이란 말이에요! 누나 때문에 다시 찍어야 하잖아요!”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흔들면서 나한테 신경질을 부리는 꼬마를 띠꺼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얘 한 대 쥐어박아도 되나?
“찍어서 뭐 하게?”
“너튜브에 올릴 건데요. 던전 영상 조회 수 장난 아니거든요.”
당당한 말에 이마를 짚었다. 관종 너튜버는 나이 불문 어디에나 있구나. 영상 매체 대중화의 폐해다.
“너 헌터냐?”
“아니요? 누나 바보예요? 상식적으로 제 나이에 어떻게 각성을 해요.”
내 물음에 꼬마가 나를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당당함에 한숨을 내쉬며 재차 이마를 짚었다.
“일반인이 게이트 몰래 들어가면 과태료 내는 건 아냐? 네 영상 수익보다 네 부모님이 낼 과태료가 더 많겠다. 네가 아티팩트 망가뜨리면 변상하는 사람도 네 부모님이야. 하여간, 요즘 애들 참 속없어.”
“아, 누나가 뭔데 훈계질이에요? X나 꼰대네.”
네가 세상을 덜 살아서 진짜 꼰대를 안 겪어 봤구나. 그러니까 상당히 진취적이고 유한 마인드를 가진 나한테 꼰대라고 당당히 내뱉지.
라때는 말이야, 제국에 몬스터 풀어놓는 마왕에게 공주님을 냉큼 제물로 바칠 만큼 대가리 굳은 인간들이 수두룩했어. 아니, 제국이니까 황녀님인가?
“잼민아…….”
“재민이거든요?”
눈을 한껏 치켜뜨고 나를 올려다보는 바가지 머리 잼민이를 보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진짜 말 더럽게 안 듣게 생겼네.
“그래, 잼민아. 아무튼, 내가 뭔데 훈계질이냐고? 느이 부모님 등골 수호자다, 인마.”
벌써 등골브레이커의 싹이 보이는 잼민이의 뒤통수를 차마 후려치진 못하고 대신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뒷머리 후려쳤다간 신고한다고 지랄할라. 요즘 애들 무서워, 아주.
“너희 어머니 지금 던전 밖에서 걱정하고 계시니까 빨리 나가자.”
“베, 싫은데. 내가 왜. 꼰대질 멈춰!”
내가 팔을 놓자마자 망할 꼬맹이는 한쪽 팔을 내 쪽으로 쭉 뻗고는 혀를 비죽 내밀더니 잽싸게 던전 안쪽을 향해 뛰어갔다. 아오, 내가 이래서 애들이 싫어.
“야, 거기 안 서? 얘가 던전 무서운 줄 모르네!”
나한테나 안전하지 너한테도 안전한 줄 아냐, 겁대가리 없는 잼민아?
꼬맹이를 쫓아 뛰던 내 눈앞에 갑작스레 상태창이 튀어 올랐다.
『위험 예지가 발동됩니다.』
그리고, 공기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한 번 겪어 봤던 공기가 던전 안에 확 퍼져 나갔다.
『A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망했다.’
공략을 마친 던전이 부활하다니. 이제는 게이트 들어간 적 없다고 배짱도 못 부리잖아.
이 사태를 만든 망할 꼬마 놈을 찾아 급히 던전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니 등을 돌리고 주저앉은 꼬맹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목을 움켜쥐고 헐떡거리던 꼬마가 멍하게 위를 올려다보다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손을 뻗었다.
“살, 살려 주…….”
그 앞에는 어둠을 아무렇게나 뭉쳐 놓은 듯 시커멓고 거대한 몬스터가 촉수를 흔들며 우뚝 서 있었다. 날카로운 침이 박힌 수십 개의 촉수들은 모두 꼬마를 향해 있었다.
생각이고 뭐고 할 겨를도 없이 바로 몬스터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여기서 저 잼민이 죽으면 나도 게이트 들어간 거 들킬라.
『스킬 ‘벼락(SSS)’을 실행합니다.』
화려한 이펙트 끝판왕 스킬인 벼락이 몬스터를 향해 내리꽂혔다. 하지만 형체 없는 몬스터라 그런지 물리적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어둠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뭉친 몬스터가 재차 꼬마를 노리고 촉수를 뻗었다.
『스킬 ‘블랙홀(S)’을 실행합니다.』
물리적 공격이 안 통하면 역시 청소기지. 몬스터의 뒤에 떡하니 생긴 블랙홀이 강력한 중력으로 몬스터를 빨아들였다. 혹시 꼬맹이도 빨려들까 봐 꼭 잡고 있는데 미세하게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몬스터 한 마리 더 오나 보다. 얼른 나가자.”
“일으켜, 킁, 주세요.”
아오, 이걸 그냥 버리고 갈 수도 없고. 한숨을 쉰 나는 앞에 있던 몬스터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하고는 이를 갈며 꼬마를 일으켰다.
민감한 이가 아니면 알아채기 힘들 정도의 작은 진동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차 커져서 왔던 길의 중간쯤 왔을 때는 벽까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던전 깊숙한 곳에서 몬스터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렸다.
“엄마, 흐읍, 엄마…….”
그 소리를 듣고 벌벌 떨던 꼬마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제야 엄마를 찾아 댔다. 그러게 엄마 말 진작 잘 좀 듣지 그랬냐, 잼민아. 공기의 기운이 더 짙어짐에 따라 꼬마의 헐떡임도 심해졌다.
내가 이건 꼭 건의한다. 나가자마자 지방도 게이트 관리 제대로 하라고 민원 넣을 거다.
내 직감이 지금의 흔들림 상태가 멈추기 전에 반드시 게이트를 나가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이 흔들림이 끝나는 순간 무언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결심한 나는 이를 악물고는 부축하고 있던 꼬마를 번쩍 안아 들었다.
“꽉 잡아라.”
『스킬 ‘순간 이동(S)’을 발동합니다. 규모: 2인』
좌표를 계산해 순식간에 게이트 앞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안고 있던 꼬맹이를 내려놓았다. 꼬맹이는 이제 좀 숨통이 트인 듯 숨을 토해 내더니 중얼거렸다.
“와, 법사계는 주태윤이 제일 멋있는지 알았는데 누나가 주태윤보다 더 멋있어요.”
“아하하, 당연한 소리를.”
걔는 S급, 나는 EX급. 비교가 안 되지.
웃으며 꼬맹이의 이마에 손가락을 툭 가져다 댔다.
『스킬 ‘메모리얼(SSS)’을 실행합니다.』
『기억 수정을 완료했습니다.』
몬스터가 나타나자마자 내가 쟤를 들쳐 안고 달려서 게이트 앞까지 왔다고 기억 좀 수정했다.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게 꼬마들 주둥아리 아니던가.
원래는 기억 삭제하고 기절시키려고 했는데 기분이다. 짜식, 입 털 줄 좀 아네.
멍해진 꼬마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잼민아,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하냐?”
“아, 재민이라니까요! 몬스터 나오자마자 누나가 저 안고 달려왔잖아요.”
빽, 소리 지르다가 내가 제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목소리가 점점 소심해졌다.
기억이 완벽하게 수정된 걸 확인하고는 꼬마의 손을 잡고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
게이트 앞에 망연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던 꼬마의 엄마가 우리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제 엄마를 보자마자 내 손을 털어 내고 뛰어간 꼬마는 눈물을 터트리며 엄마의 품에 안겼다.
“재민아! 왜 그래? 괜찮아?”
“엄마, 몬스터가……! 던전에서 몬스터가 나타났어, 어허헝!”
“그러게 엄마가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아이를 혼낸 아이 엄마는 내게 몇 번이나 허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학생분 아니었으면 안에서 무슨 큰일이 일어났을지……. 정말 감사합니다. 사례는 어떻게 해 드려야…….”
유모차 옆에 놓아 놨던 장바구니를 챙겨 들고서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사례는 괜찮으니까 그냥 오늘 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사례보다 쏟아질 과태료가 더 무섭다. 게이트에 운 없게 휘말린 게 아닌 이상, 일반인이 게이트 들어가면 과태료 300만 원임. 심지어 공략이 끝난 던전이 부활한 경우는 벌금 때릴지도 몰라서 더더욱 무섭다.
오늘 일로 좋은 교훈을 얻었네. 귀찮아 보이는 일은 그냥 지나가자. 괜히 선행 한 번 하려다가 이게 무슨 꼴.
몬스터 한 번 만났다고 정신 차린 잼민이의 예의 바른 인사를 뒤로하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울 엄마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너는 마늘을 텃밭에서 직접 캐 오니? 집 앞 마트 다녀오는 데 왜 30분이 넘게 걸려? 과자는 또 왜 사 왔고?”
아오, 게이트 들어갔다 왔다고 말할 수도 없고. 내가 다시는 귀찮은 일에 끼어드나 봐라. 그나저나 저 던전 부활했다고 어떻게 알리지.
* * *
우리 동네에 부활한 던전은 인터넷으로 민원을 넣으니까 곧바로 해결되었다. 인터넷이 있는 정보화 사회 넘나 편한 것.
그래, 이런 문명화 사회를 두고 어떻게 그런 후지고 야만적인 세계에서 살겠어. 유혹을 뿌리치고 돌아오길 잘했다.
“A급? 이거 우리 능력으로 공략 못 할 거 같은데?”
“전에는 D급 게이트 아니었습니까? 왜 더 업그레이드가 됐지?”
게이트 앞을 지나가면서 들리는 대화에 조금 찔리긴 했지만, 암튼 내 잘못 아님. 들어간 잼민이 잘못임.
그 덕에 편안한 마음으로 가족들이랑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자마자 내가 마주한 건 게이트 핫플이 되어 있는 우리 자취방 동네였다.
뭐냐, 이건. 일주일 새에 동네에 세 개나 더 생겨 있는 게이트를 보고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아싸, 자취방 월세 내려가겠다.
창문을 내려다보며 히죽 웃고 있자 옆집 문이 열리더니 옆집 언니가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왔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고 밖에 있는 시간보다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은데 또 백수는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이다.
“우리 자취방 월세 안 깎인단다.”
담배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라이터로 불을 켰다 껐다 하던 민서 언니가 픽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아, 깜짝이야. 언니, 제 마음 읽어요? 그리고 비흡연자 배려 좀요.”
“그래서 불 안 붙이고 있잖아, 짜샤. 헌터 아니고서야 동네에 생긴 게이트 보고 쪼개고 있는 이유가 월세밖에 더 있겠냐? 아, 맞다. 너한테 줄 거 있었지.”
갑자기 생각난 듯 나한테 잠깐만 기다리라며 자신의 자취방으로 들어갔던 언니가 접시에 담긴 떡을 들고 나왔다. 꽁꽁 언 시루떡은 랩으로 칭칭 감긴 채였다.
“우리 윗집에 사람 하나 이사 왔더라. 일 나갔다가 들어오니까 문 앞에 쪽지랑 떡 있던데. 혹시 네 떡 상할까 봐 우리 집 냉동실에 넣어 놨다. 떡 맛있더라.”
“남자예요? 아님 여자?”
“몰라. 나도 얼굴 못 봤어. 글씨는 예쁘던데, 여잔가?”
“그렇게 치면 언니는 남자게요. 내가 오죽하면 언니 쪽지를 해석이 아니라 해독을 했겠어.”
떡 접시를 건네받으며 투덜거리자 민서 언니가 다시 떡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니, 애초에 내 떡 아님?
떡 접시를 소중히 들고 남자면 눈 호강이나 하게 잘생겼으면 좋겠다며 킬킬거리고 있는데, 위층에서 누군가가 내려와 계단 층계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오, 우리가 원하던 잘생긴 남자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다.
“안녕하세요. 아래층 분들이시죠? 이번에 이사 온 이재의입니다. 두 분 다 구면이시네요.”
계단에서 내려온 이재의가 우리를 보고서는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게, 구면이네. 나도 예의상의 미소를 걸고 인사를 건넸다.
“이채현입니다.”
그리고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는 민서 언니를 힐긋 돌아보니, 언니의 표정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언니보다 이재의가 한발 빨리 입을 열었다.
“그리고 윰서 씨? 경위서랑 시말서 작성이 지금 일주일을 밀렸습니다만.”
“그쪽, 설마 경위서랑 시말서 작성 독촉하려고 내 윗집으로 이사 온 거야?”
“그럴 리가요. 마침 만난 김에 혹시 잊어버리셨을까 봐 상기해 준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왜 내가 써야 하냐고. 그 자식들이 머릿수 믿고 먼저 시비를 텄는데. 아이고, 솔플은 서러워서 살겠냐. 길드도 못 들어간 찌끄레기 취급하는 거 아니야, 지금? 그리고 헌터 협회도 터치 안 하는 걸 왜 국가에서 난리야?”
“그분들은 A급이고 윰서 씨는 S급이시니까요. 등급 차이가 나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원래 헌터 관리는 협회가 아닌 관리국 주관입니다.”
이재의랑 민서 언니의 대화를 들으며 입을 떡 벌렸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윰서? S급?
“랭킹 7위 윰서? 언니, 백수가 아니라 헌터였어요?”
“얘 앞에서 말하면 어떡하냐! 기껏 숨기고 있었는데 눈치도 없네! 그리고 내가 계속 백수 아니라 했지.”
와아, 힘숨찐이 내 옆집에 있었다니.
국내 랭킹 7위 윰서. 랭킹 1위랑 마찬가지로 베일에 싸여 있지만 가끔씩 던전에서 솔플 뛰는 거 볼 수 있다는 그 랭킹 7위가 내 이웃이었다니.
그러고 보니까 유민서 빠르게 발음하면 윰서네. 소오름.
“언니도 참 대단하다. 게이트 터진 지가 언젠데 옆집 사람한테까지 그걸 숨기고 있었다니. 그런데 이재의 씨는 언니 어떻게 알아요?”
“숨겨 봤자 랭커들끼리는 다 알음알음 알고 있어. 1위만 빼고. 걔는 나도 얼굴 한 번도 못 봤어.”
왜 랭커인 거 숨겼냐고 물어보니 언니가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며 대답했다.
“야, 이재의랑 주태윤 봐라. 얼굴 반반하게 생겨서 인터넷에 본명이랑 집 주소랑 과거사까지 탈탈 털려서 돌아다니고, 주태윤은 뭔 홈마들까지 붙어서 사진 찍히고, 팬 붙고. 그렇게 귀찮은 삶은 딱 질색이다, 나는.”
“그 둘은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 거고요. 언니는 무슨 걱정?”
심드렁한 팩폭에 언니가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S급이 사람 쳤다고, 아파 죽겠다고 엄살을 부리며 이재의를 돌아봤다.
“이거 시말서 감 아니에요?”
“일반인을 함부로 때리시면 어떡합니까?”
이재의의 잔소리에 안 들린다고 중얼거리며 귀를 막은 민서 언니가 잽싸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쾅, 하고 닫힌 문을 어이 상실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옆에서 한숨을 쉬며 서 있는 이재의한테 말을 걸었다.
“민서 언니한테 뭐 시키시면 일단 일주일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해요.”
“이제는 익숙합니다. 그래서 기간도 넉넉히 3주로 잡았고요.”
해탈한 듯 말하는 이재의를 향해 짠한 눈길을 보내 주었다.
역시 극한 직업 각성자 관리국 요원. 헌터 관리도 해야 하지, 던전 관리도 해야 하지, 할 일은 많은데 봉급은 짜지.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주태윤 같은 인간이랑 친구가 되어 가지고…….
속으로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떡 잘 먹을게요.”
“아직 안 드셨어요?”
“네. 제가 일주일간 고향에 내려갔다 와서요. 오늘 서울 올라왔거든요.”
“그러면 댁에 계실 때 직접 전달해 드릴 걸 그랬네요. 미처 생각을 못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민서 언니가 대신 보관해 줘서 멀쩡해요.”
댁 친구가 하도 껌딱지처럼 달라붙어서 내려갔다는 말은 예의상 생략했다. 손을 내저으며 괜찮음을 어필하자 다행이라며 그가 빙긋 웃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이재의가 나한테 인사를 건넸다.
“잘 들어가세요.”
“네, 그쪽도요.”
이재의와 헤어진 나는 내 자취방 문을 열고 들어와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라노벨 같은 상황은 뭐냐고. 내 친구와 이웃들이 모두 S급인 건에 관하여. 이거냐?
내 주위 잘 찾아보면 랭킹 1위도 있는 거 아니야?
* * *
“저놈의 게이트들은 왜 사라지자마자 또 나타나? 집값 떨어지게시리.”
“그러게요. 저한테 물어보셔 봤자 저도 잘…….”
따끈따끈한 신상 게이트를 보며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집주인 아주머니께 편의점에서 1+1 행사 상품이어서 샀던 음료수 하나를 공손히 내밀고는 볼을 긁적였다.
아주머니가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다가 들려오는 굉음에 인상을 찌푸리고 욕설을 내뱉었다.
“염병할, 또 터졌네. 아주 동네를 다 덮어라, 덮어.”
“그래도 다행인 게 전에 생겼던 게이트는 사라졌잖아요?”
“그럼 뭐 해. 또 생기는데.”
원룸 건물과 가까운 편의점에 또 게이트가 생겨 있었다. 젠장, 당분간 삼각김밥이랑 도시락 어디서 사 먹냐. 죽은 눈으로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자 한숨을 푹푹 쉰 아주머니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201호 학생은 방 옮길 생각 없지?”
“당연하죠. 아직 계약 기간도 안 끝났는데요. 혹시 누구 방 뺀대요?”
“101호랑 302호 총각이 동네 무서워서 못 살겠다고 방 빼 주라네. 하여간, 사내놈들이 더 겁이 많아.”
혀를 차며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맞장구쳤다. 민서 언니한테 전해 주면 만세 부르겠네.
지금 생각해 보면 302호 남자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하다. 랭킹 7위의 윗집에서 층간소음을 일으켜 놓고 꼬우면 그쪽이 귀마개 끼고 생활하라는 말을 면전에 대고 하다니.
관리국 요원들이랑 헌터들이 몰려오는 듯 동네에 차가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끄러워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라며 나를 떠미는 아주머니께 꾸벅 인사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익숙한 얼굴들이 나를 반겼다.
“아주 니네들 집이지?”
마치 제집인 마냥 편안하게 침대에 드러누워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윤세인과 백아현을 향해 들고 있던 편의점 봉지를 던졌다. 날아오는 봉지를 익숙하게 잡아챈 윤세인이 자연스럽게 과자를 꺼내 포장을 뜯었다.
“내가 언제 먹으라고 했냐?”
“먹으라고 던져 준 거 아니야?”
“그래. 걍 다 처먹어라.”
해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침대에 털썩 걸터앉아 왜 왔냐고 물으니 그냥 오고 싶어서 왔단다. 그 말을 하는 백아현의 표정은 묘하게 우울해 보였다.
“이번에 10위 또 바뀐 거 알아?”
1년 반 동안 벌써 다섯 번이나 바뀐 랭킹 10위의 자리는 헌터들뿐만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도 꽤 뜨거운 감자였다. 전부 S급으로 이루어진 1~7위는 처음과 변동 없이 견고하고 8, 9위는 가끔 바뀌었지만, 유독 10위만은 자주 교체되곤 했다.
“지난번 10위는 관종력이랑 허세 엄청났지 않았나? 이번 10위는 어때?”
내 물음에 아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차라리 지난번 10위가 나아 보일 정도라는 말에 대체 어떤 놈이기에 저런 반응인가 궁금해졌다.
내 핸드폰을 가져간 아현이가 너튜브에 무언가를 검색하더니 직접 보라고 내밀었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전 랭킹 10위를 도발하는 현 랭킹 10위 초신성」
- 행님들, 인사 한번 오지게 박겠습니다! 전 랭킹 10위 어그로탱커를 몰아내고 새로운 랭킹 10위로 등극한 BJ 민입니다. 제가 각성한 첫날에도 방송으로 말한 적 있지만, 이렇게 될 거 다 예상했습니다. 어그로탱커 까 보면 허세만 쩔지 X나 X밥이잖슴까? 그래서 고딩한테도 랭킹 발렸죠? 솔까 킹정이죠?
귀가 썩는 것 같은 느낌에 바로 방송을 껐다. 고향에서 만났던 그 초딩이 커서 각성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초신성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곧 터지게 생겼구먼.
“그런데 너는 왜 이렇게 죽상이야?”
“협회 들어온대…….”
그 말 한마디로 설명 끝이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잘 부탁한다는 인사가 먼저 아니야? 초면부터 자기 채널 보여 주면서 구독과 좋아요 좀 눌러 달라는 말이 할 말이니?”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는 아현이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를 건넸다.
“주태윤이 스카우트 성공하길 빌자.”
“그 망할 인간, 눈치는 좋아서 폭탄은 절대 안 가져가.”
주태윤 정말 도움 안 된다. 친구가 우울해하든 말든 자기 일 아니라고 태연하게 과자를 씹어 먹던 세인이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게이트 또 터졌어? 방금 또 소리 들리던데.”
“어, 편의점에 하나 생겼더라. 너 지금 내려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닥에 널브러진 겉옷 주머니에 있던 호출기가 삑삑거리며 울렸다. 어두운 얼굴로 호출기를 꺼내 든 윤세인은 침울한 손짓으로 호출기의 버튼을 꾹 눌렀다.
“아오, 방금 퇴근했는데! 근무 시간도 안 지켜 주는 망할 직장! 대체 왜 관리국 건물에는 게이트가 안 터지는 거냐고!”
그러더니 침대에 머리를 박으며 직장인의 비애 섞인 외침을 내뱉었다.
아하하, 아직 학생인 내가 최종 승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