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연은 다행히 입덧과 거리가 멀었다. 남들은 속을 게워낼 시기에 꾸준히 영양분을 섭취했다. 시작부터 먹덧이었다.
속이 안 좋다고 먹지 않는 건 건강 주스와 채소뿐이었다.
“오빠, 아가가 오늘은 스테이크가 먹고 싶대요.”
“우리 다람쥐가 먹고 싶은 건 아니고?”
“내가 다람쥐면 얘는 뭐예요?”
“뭐긴, 그냥 아가지.”
“아가가 이름이 없어서 서운하겠어요. 미리 지을까요? 아니면 태명이라도! 도토리 어때요? 다람쥐가 황금 도토리를 물어오는 태몽을 꿨다면서요.”
설우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소파 팔걸이 쪽으로 다리를 길게 뻗어놓은 연은 아직 납작한 배를 문질렀다.
“도토리도 좋지만, 이름을 이미 지었어.”
“정말요?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잖아요.”
“한자만 성별에 맞추면 돼.”
“이든은 저번에 차이든이 어떠냐고 물어봤어요. 외국에선 가족끼리 같은 이름을 짓기도 한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아가 이름은 연우야, 차연우. 어때?”
“연우? 좋아요! 너무 예쁘다.”
차연우, 차연우.
입에 착 달라붙는 이름을 여러 번 웅얼거리던 연이 배를 톡 두드렸다.
“아가야, 네 이름은 연우야. 아빠가 지어주셨어. 오빠가 먼저 불러 봐요.”
“안녕, 연우야. 아빠야.”
상체를 숙인 설우가 배에 대고 속삭여주자 연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설우에게 핍박을 받아 몰래 숨어있던 첸과 이든이 후다닥 달려와 소파 아래에 앉았다.
“연우야, 난 이든 삼촌. 삼촌 목소리 기억하지?”
“연우야, 절대 이든을 먼저 부르면 안 돼. 한 글자가 쉽잖아. 첸이 먼저야, 첸.”
아기가 오고 나선 전보다 더욱 밝아진 펠리체에선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연이 스테이크 먹고 싶대.”
“아뇨, 오빠. 연이 말고 연우요. 아, 그럼 나가서 먹을까요? 엄마랑 아빠랑 삼촌한테도 이제 말해야죠.”
“정원에서 먹자, 음식은 사람 불러서 하면 돼.”
“그러자, 밖엔 우리가 준비할 테니까 쉬고 있어.”
“아, 왜. 난 연우랑 놀 거야.”
“아직 콩알만한 애랑 놀긴 뭘 놀아, 나가. 연이 잠깐 눈 감아 봐.”
눈꺼풀이 닫히자마자 설우가 발을 휘둘렀다.
끝까지 떨어지지 않으려는 이든의 뒷덜미를 잡은 첸이 커다란 덩치를 간신히 끌고 복도를 지났다.
“졸리진 않아? 배가 아프다거나 속이 안 좋으면 바로 이야기해. 방문할 수 있는 산부인과 의사도 준비해뒀어.”
“누워있으니까 나른하긴 해요.”
“자도 돼. 오빠가 알아서 깨워줄게.”
“촬영도 재미있었는데, 역시 오빠랑 쉬는 게 제일 좋긴 하네요. 마음이 편해.”
“연우 태어날 때까지 최대한 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할게.”
“이든이랑 있어도 돼요.”
“아니, 안 돼.”
첸이면 모를까. 산만한 이든은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연의 말수가 줄어들자 부드러운 수면 잠옷 안으로 손을 넣은 설우가 천천히 배를 문질러 주었다.
아가, 엄마는 작고 여리니까 배 속에 있는 동안 절대 아프게 하지 말아줘.
그럼 더 많이 예뻐해 줄게. 더 많이 사랑해줄게.
8개월 후에 우리, 웃으며 만나자.
그날 저녁, 펠리체 1동에선 가든파티가 이어졌다.
정원 가운데 놓인 원목 테이블을 채운 가족들은 화기애애한 식사를 이어갔다.
“임신? 정말?”
“네, 초음파 사진 보여 드릴까요? 저녁 먹고 들어가서 심장 소리도 들려 드릴게요.”
설우의 만류에도 사진을 꺼내온 연이 화진과 현준의 앞에 한 장씩 놓아주었다.
“어머, 웬일이야. 으이구, 우리 복덩이.”
“축하한다, 연아.”
끌어안고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을 누른 화진이 원피스에 가려진 엉덩이를 팡팡 가볍게 때려주었다.
금세 다가온 설우가 연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담요를 건넸다.
“초기엔 조심해야 해요.”
“누군 안 낳아봤니? 너무 오래돼서 잊은 모양인데 너 내가 낳았다?”
“아, 참. 그랬었죠.”
“저, 싸가지….”
연이 빼면 전부 적이지, 아주.
“아가가 듣습니다.”
된 발음이 시작되기 무섭게 연의 귀가 막혔다.
팔불출 같은 아들의 행동에 질릴 대로 질린 화진은 스테이크를 써는데 집중했다.
“오빠, 나 화장실 다녀올게요.”
“같이 가.”
연을 잠시도 혼자 둘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생긴 아기 때문에 다른 문제가 생길까봐 걱정이 되었다.
중기에 접어들기 전까진 심하다고 여길 정도로 과보호할 생각이었다.
“당신이 가서 형님한테 알려드려. 연이가 좋아하는 음식 챙겨 주실 거야.”
“음식은 시어머니가 좀 챙기지 그래.”
“음식만 못할 뿐이지 엄마 역할은 내가 알아서 다 할 거야. 당신은 뭐할 건데?”
“불편함 없이 출산할 수 있게 병원에 준비해 둬야지.”
“그건 당연한 거지. 쓸데없이 육아용품 사지 마, 내가 준비할 거니까.”
“당신이 왜. 그런 건 할아버지가 하는 거지.”
“무슨 소리야. 내가 당신보다 돈 많아. 더 많은 사람이 쓰는 거 아니야?”
예비 조부모의 유치한 말싸움을 구경하던 첸과 이든이 고개를 돌려 잔을 부딪쳤다.
그들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아기 침대부터 유모차, 카시트, 바운서 등 이미 하루에도 수십 개씩 배송되는 최고급 제품들이 아기방을 채우고 있었다.
***
만개했던 벚꽃이 지면서 분홍색 꽃비를 뿌리는 4월의 어느 날, 설우의 새카만 눈동자를 쏙 빼닮은 아들이 태어났다.
연은 12시간이 넘는 진통에 시달리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연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설우는 둘째는 낳지 말자며 미안하다고 수백 번 머리를 조아렸다.
차병원의 VIP병동 5층을 한 달간 전부 예약한 현준은 그곳에서 출산과 산후조리까지 마칠 수 있도록 전문 인력과 장비를 준비했다.
며느리에게 호화로운 생활을 선물한 현준이 어깨에 힘을 잔뜩 주자, 화진은 이에 질세라 출생신고를 막 마친 손자에게 주식을 증여했다.
조부모의 싸움이 과열될수록 연과 연우가 얻는 것은 많았다.
“연아!”
“고생했어, 우리 꼬맹이!”
첸과 이든은 연우를 보겠다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연우가 태어난 후, 딱 한 번 병원에 들른 이들은 불룩했던 배가 사라진 동생을 마구 껴안았다.
그들의 격한 상봉을 참지 못한 설우는 잠든 연우를 안고서도 열심히 발길질을 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베이비시터는 신생아가 사는 집이 지나치게 소란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삼촌이란 두 남자가 생활하는 구역이 제법 멀리 나누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일반인은 접근조차 할 수 없다는 펠리체의 어마어마한 부지가 감탄스러웠다.
“데려가세요.”
“네.”
연우를 시터에게 넘겨주자 첸과 이든이 그 뒤를 졸졸 따랐다.
일찍 시터를 들인 건 연의 수면 때문이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연을 깨우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갈등하는 연을 설득하기 위해 윤 교수까지 힘을 보탰다.
“엄마가 빠짐없이 알아보고 뽑은 사람이니까 걱정하지 마.”
“연우가 너무 섭섭해하진 않을까요?”
“어쩔 수 없어, 네가 자는 게 더 중요해. 첸이랑 이든도 있고, 나도 있잖아.”
“알았어요. 잘 자고 일어나서 놀아주면 되니까!”
“그렇지, 몸은 좀 어때.”
“병원이 호텔 같긴 했지만, 역시 집이 최고죠.”
“뭐 좀 먹을래? 간식 만들어 달라고 할까?”
“아니, 배 안 고파요.”
연을 침대 위에 앉혀둔 설우가 홈웨어를 꺼내와 손수 갈아입혀 주었다.
“연우 낳고 한 달 가까이 쉬어서 완전 건강해요, 나. 혼자 할 수 있어.”
“계속해주고 싶어.”
산고를 겪는 모습을 보고 지나치게 놀란 설우는 먹여주고, 씻겨주고, 옷을 갈아입혀 주며 정성스러운 수발을 이어갔다.
작은 아내가 부서져 버리진 않을까 피를 말린 시간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같이 목욕할까?”
“음, 조금 피곤한데….”
“가만히 계시면 알아서 씻겨 드릴게요.”
피식, 웃은 설우가 연을 가볍게 안아 욕실로 들어갔다.
적당한 온도로 물을 틀어두고 좀 전에 갈아입힌 옷을 다시 벗겨냈다.
하얀 살결에 손이 스칠 때마다 성욕이 들끓었지만, 연을 위해 조금 더 참고 싶었다.
욕조에 기대 연의 허리를 끌어안은 설우가 납작해진 배를 어루만졌다.
“아쉬워요?”
“응, 얼마나 귀여웠는데. 동그란 배를 붙잡고 아장아장. 동영상 엄청 많이 찍었어, 나중에 연우 크면 보여줄 거야.”
“오빠가 매일 동화책 읽어주는 영상도 같이요. 10달 내내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꼭 보여줘요.”
“물론.”
윗배와 아랫배를 넘나들며 움직이던 손이 어느새 가슴까지 올라와 있었다.
“만지기만 할게. 다른 짓 안 해.”
“…응, 좋아요.”
“돌아앉을래?”
“네.”
얼굴이 마주보기 무섭게 촉촉해진 입술이 마구 엉겨 붙었다. 물에 젖은 손이 서로의 맨살을 맘껏 탐했다.
찰박, 찰박 물이 새어 나갈 때마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신음이 욕실을 울렸다.
“한, 한 달 지나면 괜찮다고, 흐, 했는데 우리 그냥 하면 안 돼요?”
“안 돼.”
달아오른 몸을 외면한 답은 단호했다.
설우는 그렇게 딱 한 달을 더 버틴 후에야 한계까지 닿아있는 욕정을 쏟아낼 수 있었다.
***
“엄마야, 아빠야.”
“엄마!”
“나야, 첸이야.”
“첸!”
“와, 차연우 어젠 나라며.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야, 할머니야.”
“하라부지!”
오우.
당황한 이든이 뒤에 서 있을 화진을 돌아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연과 대화를 나누느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연우의 두 돌이 지나고 오붓한 가족여행을 계획한 설우와 연은 다소 요란한 배웅을 받고 있었다.
“차연우, 이제 아빠한테 와야지.”
설우가 팔을 벌리자 바로 이든의 손을 놓은 연우가 뒤뚱뒤뚱 달려갔다.
아이를 안아 높이 든 설우는 연우가 즐거워하는 장난을 치며 연을 기다렸다.
“조심히 다녀와. 사람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비행기 태워 보낼 테니까.”
“네, 알았어요. 바쁘실 텐데 들어가 보세요, 엄마.”
“잘 다녀와, 꼬맹이. 보고 싶을 거야, 연우도.”
고작 열흘 여행에 공항까지 총출동한 식구들이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손을 흔들었다.
“연아, 그만 들어가자.”
어느새 연우를 유모차에 태운 설우는 날이 갈수록 성가신 이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제야 라운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연우, 비행기 알아요?”
“알아, 비행기.”
“뭔데요?”
“날개!”
“와, 우리 연우 너무 똑똑하다.”
퍼스트 라운지에 도착한 연은 까르르 웃기 바쁜 연우에게 이유식을 떠먹였다.
엄마를 닮아 먹성이 좋은 아이는 금방 한 그릇을 비우고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동안 사라졌던 설우는 간단한 음식을 담은 접시와 오렌지 주스를 들고 나타났다.
“자, 우리 연이도 주스 한 입 마시고.”
“네.”
“연어 샐러드도 한 입. 와, 우리 다람쥐 너무 잘 먹는다.”
“장난치지 말아요.”
설우가 연을 흉내 내자 연우와 똑같은 웃음소리가 라운지를 울렸다.
덥석덥석 잘도 받아먹는 아내가 귀여워 참지 못하고 입을 맞췄다.
유모차에 앉은 연우가 좌우로 까딱이던 고개를 휙 돌렸다.
애정이 넘치는 부모를 종종 목격한 아이는 가끔 보지 않는 쪽을 택하곤 했다.
비행시간이 너무 긴 몰디브를 포기하고 괌을 택한 연은 비치 리조트 테라스에서 감탄을 거듭했다.
하얗게 반짝이는 모래를 덮은 에메랄드빛 바다로 유명한 투몬비치는 멍하니 바라보기엔 아까운 절경이었다.
순하고 잠이 많은 연우는 미리 요청해 놓은 아기 침대에서 쌔근쌔근 숨을 내쉬었다.
설우에겐 아주 꿀 같은 시간이었다.
“어때?”
“너무 예뻐요. 빨리 가까이서 보고 싶어.”
“연우 깨면 나가자.”
“그래야죠. 그래야 하는데, 옷은 왜 벗기는 거예요?”
“어차피 갈아입을 거고. 눈앞에 보이는 바다랑 네 벗은 몸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여기 테라스예요, 오빠!”
“알아, 아무도 못 보는 펜트하우스 테라스.”
코앞에 해변이 있는 리조트의 정면엔 일렁이는 바다뿐이었다.
거침없는 손길이 이어지고 금세 나체가 된 연이 설우에게 안겨 몸을 웅크렸다.
“정말 여기 서서 할 거예요?”
“글쎄, 썬베드에 누워서 해도 상관없어.”
후끈한 해풍과 함께 몸이 젖어 들었다. 연우가 깨지 않아 준 덕에 생각보다 더 긴 관계를 이어갔다.
설우의 목에 팔을 건 연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탁 트인 공간이 주는 묘한 흥분 때문인지, 여러 번 절정에 올랐다.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랑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서로를 원했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이렇게 영원히 나랑 연우 옆에 있어줘.”
“그럴게요.”
때마침 들리는 서러운 울음을 듣고 콧등을 마주 댄 부부는 파란 하늘만큼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