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93화 (93/96)

외전 7화.

여전히 안전가드가 설치되어 있는 침대 위에서 깊은 한숨이 쏟아졌다.

최소 6개월, 길어야 1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연의 모델 생활은 2년이 넘도록 이어졌다.

이젠 흥미와 재미 따위가 아니었다. 연에게 소중한 업이었다.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후부터는 당연히 촬영 스케줄이 많아졌고 귀가는 늦어졌다.

훌쩍 성장한 아기 다람쥐는 안절부절, 정신이 없는 호랑이를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기에 이르렀다.

“다녀왔습니다.”

서류를 넘기던 설우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자정을 한참 넘은 시간, 살랑이는 프릴 원피스를 입고 돌아온 연은 촬영을 위해 했던 메이크업도 지우지 않은 상태였다.

“많이 늦으면 데리러 가겠다고 했는데.”

“정확히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오빠도 피곤하잖아요. 그래도 끝나자마자 바로 왔어요.”

천진한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흑색의 아이라이너가 진하게 묻은 눈가엔 낯선 점까지 찍혀있었다. 레드립을 칠한 입꼬리가 곡선을 그리자 설우의 미간이 단번에 구겨졌다.

퇴폐적인 화장이 덧씌워진 금빛엔 적나라한 색기가 일렁였다.

저러고 사진을 찍은 거야? 환장하겠네.

“누구 속 썩으라고 그 꼴로 돌아다녀. 오빠 애태우면 재미있어?”

“좀 진하죠? 스타일리스트 언니가 눈물점도 찍어줬어요. 씻고 오면 더 늦을 것 같았어요. 화났어요?”

“응.”

어느새 지퍼를 내렸는지 헐렁해진 원피스가 발목까지 떨어졌다.

순식간에 슬립 차림이 된 연이 쭉 뻗은 설우의 다리 위로 올라앉았다.

촬영을 위해 여러 번 덧칠했던 레드립이 핏대 선 목덜미에 선명히 찍혔다.

하얀 티셔츠 위에 멋대로 입술 자국을 만들고 까르르 웃던 연은 허락이 필요 없는 유희를 즐겼다.

“내가 네 장난감인 건 알겠는데. 화낼 땐 진지하게 좀… 아!”

어김없이 옷 속을 파고드는 작은 머리통을 막지 못했다. 상체에서 가장 예민하고 좁은 부위를 잘근거린 연이 쪽쪽, 타액을 바르기 시작했다.

“아, 으읏….”

무의식 속에서도 설우의 입술과 목덜미를 젤리처럼 물고 빨던 습관은 고치지 못했다.

좀 더 은밀하고 반응이 거친 곳을 찾아 설우를 못살게 굴곤 했다.

저도 모르게 턱을 젖힌 설우가 가는 허리를 끌어당겼다.

“오빠 몸에 립스틱을 닦을게요. 괜찮죠? 이제 벗어 봐요.”

열이 오른 티셔츠 속에서 빠져나온 연이 옷자락을 흔들자 양팔을 엇갈려 내린 설우가 거추장스러운 면티를 머리 위로 끄집어냈다.

점점 말을 듣지 않는 어린 아내를 혼내려다가도 지금처럼 맥없이 무너지길 반복했다.

립스틱이 뭉개진 가슴팍을 내려다본 설우는 실소를 참지 못했다.

이미 전부 묻혔으면서, 괜찮냐고?

“오빠가 빨개졌어요!”

“네가 빨갛게 만들었잖아.”

“그래도 아직 반만 빨개요.”

트레이닝바지와 탄력 있는 얇은 천이 겹쳐진 허리춤을 잡아당긴 연이 다음 단계를 위해 고개를 숙였다.

스케줄을 줄이라는 요구로 시작해 한 대표를 찾아가겠다는 협박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했던 잔소리는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연아, 그만, 하윽…!”

참아내지 못한 신음만이 연신 터져 나왔다.

발끝부터 몰려온 쾌감이 머릿속을 하얗게 물들이자 관자놀이 위로 핏대가 불거졌다.

잠깐 고개를 들어 천진하게 웃은 연이 입맛을 다셨다.

아기 다람쥐고 어른 다람쥐고.

물고 빠는 것을 이상하게 좋아하는 아내는 가끔은 정말, 감당이 안 된다.

고상하게 앉아 서류를 넘기던 남자는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입가를 틀어막은 설우가 뒤틀리고 들썩이는 제 허리를 보다못해 눈을 감았다.

늦어지는 귀가 시간을 바로 잡긴 개뿔.

야한 다람쥐의 긴 유희가 마무리될 때까지 움직이는 젤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말캉한 입술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눈앞이 점멸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엔,

“오빠 저 다음 촬영 제주도에서 하게 됐어요.”

“…뭐?”

“의류 브랜드 화본데, 한서준 씨랑 같이 찍게 될 거 같아요. 3박 4일.”

“…뭐?”

숨을 헐떡일 만큼 차올랐던 열기가 단번에 얼어붙을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

연이 떠났다. 무려 비행기를 타야 하는 제주도로.

분명 배웅을 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걸 보니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촬영팀에게 장소를 협찬해주고 파라다이스 리조트 한 채를 숙소로 제공한 능력 있는 남편이 되었지만, 집무실에 도착한 설우는 서류 한 장을 넘기지 못했다.

뒤늦은 패닉이었다.

회의고 미팅이고 죄다 집어치우고 쫓아가고 싶은 마음이 매우 컸지만, 중요한 일정이 꽤 있었기에 일단 이든을 보내두었다.

앞으로 사흘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말간 금안이 꾸준히 아른거렸다.

“지금 이걸 기획안이라고 가져온 겁니까? 오타에 비문까지, 발로 썼다고 해도 믿겠습니다.”

“부산은 매출이 왜 이따윕니까. 4분기 내내 적자인 게 말이 됩니까? 돈 쓰라고 만들어 놓은 파라다이스에서 돈을 아끼고 간답니까?”

“고객 감사 이벤트, 사은품 행사. 매년 똑같은 자료 가져다 쓰면 퇴근이 빨라지기라도 합니까? 머리 굴릴 생각 없어요? 내일까지 다시 구성해 오세요.”

다시, 다시, 다시!

사납게 눈을 치켜뜬 설우에게 입으로 회초리를 맞은 직원들은 한껏 쪼그라든 어깨로 집무실을 나섰다. 예외는 없었다.

-사장님.

“들어와.”

정 실장은 아주 오랜만에 지랄병이 돋은 상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소음을 일으키지 않고 문을 여닫았다.

차설우 주의보가 파라다이스 본사에 쫙 퍼졌으리라 여긴 정 실장은 별다른 주의를 주지 않고 강 상무를 들였다.

하지만 외근을 핑계 삼아 농땡이를 부린 강 상무는 주책맞은 주둥이를 간수하지 못했다.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

축하? 지금 나한테?

말없이 서류를 훑던 설우가 눈썹을 들썩였다. 마지막 결재란을 채워야 하는 만년필이 손을 떠났다.

신경질적인 눈매가 강 상무를 향했다.

“저기, 상무님. 무슨 축하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뭘 축하합니까.”

“사모님 기사 봤습니다. 어휴, 저는 그쪽 계통으론 워낙 까막눈이라 사모님이 모델이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랬군요.”

“예, 예. 와이프가 그러는데 이번에 아주 유명한 브랜드에서 화, 뭐더라, 아무튼 잡지 촬영을 하신다고! 배우 한서준이랑 같이….”

“강 상무.”

엿 됐다. 정 실장은 근 10년 만에 처음 상스러운 말을 떠올렸다.

죽고 못 사는 아내를 제주도로 보낸 상사는 그렇지 않아도 무차별적인 독설을 내뿜는 중이었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강 상무의 입을 대신 틀어막아 주고 싶었다.

“예, 사장님.”

“여기가 사적인 자립니까? 회식 자리 와서 떠드는 거예요? 보고도 2시간이나 늦었네요, 오늘 몇 시에 출근했습니까.”

“그, 그게 제가 오늘 외근이 있어서 백화점 실사를 좀….”

“사우나 가서 몸 지질 시간에 매출 현황 보고서나 똑바로 올립시다, 공사 구분 잊지 마시고.”

설우 역시 사적인 감정을 공에 섞었지만, 부하직원들을 향한 신랄한 비판에 틀린 말은 섞여 있지 않았다.

연과 결혼 후 답지 않게 유해졌을 뿐, 사실 그의 본모습이었다.

“아, 아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귀신이라도 본 듯 화들짝 놀란 강 상무가 말을 더듬었다.

정 실장은 이대로 강 상무를 끌고 나가는 게 좋을지 깊이 고민했다.

“더운 날씨도 아닌데 머리끝은 축축하고, 얼굴은 지나치게 뽀얗고. 무엇보다 아주 상쾌해 보입니다.”

나랑은 다르게.

“머리를 덜 말리고 나와서….”

“하하하, 강 상무님? 나중에 다시 오시죠.”

결국. 정 실장이 나서자 결재판을 툭 집어 던진 설우가 의자에 기대 몸을 돌렸다.

입으로 뱉지 않았을 뿐, 빨리 꺼지라는 뜻이었다.

“일행분 도착하셨습니다.”

나란히 앉은 첸과 설우가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

진작부터 정해져 있던 가족 식사엔 연 대신 첸이 자리를 채웠다.

화진과 현준이 같이 들어서는 장면은 여전히 익숙지 않았다.

모두 함께를 좋아하는 연의 요청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모임이었다.

날을 다시 잡을까 고민도 했지만, 연이 만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하지 못한 말들을 나눌 필요가 있었다.

“당신 아버지 보석으로 나올 거란 소식 들었어. 재벌 총수 잡아넣은 게 쉬운 일이 아니야?”

“전관예우 받을 변호사들만 골라 썼으니까. 이미 끊어진 연이야, 괜한 신경 쓰지 마.”

“연이한테 또 해코지 할까 봐 그렇지.”

“그럴 일 없어. 기력도 많이 쇠하셨고.”

음식이 상을 채운 후에도 정다운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활짝 웃으며 애교를 부리는 연이 없으면 딱 이 정도인 사이였다.

“연이한테 가봐야 하는 거 아니니? 너 없이 혼자 자본 적이 없는 앤데. 이든이 챙기는 것도 한계가 있지.”

“중요한 업무는 대충 마무리를 지어서, 내일 오후 비행기로 갈 거예요.”

“그래, 안 좋은 일도 있었는데 더 신경 써야지.”

“안 좋은 일?”

소식을 듣지 못했던 현준이 슬쩍 설우를 보았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샐러드를 씹어 넘기던 설우가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감히 누구한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현준이 끝내 숟가락을 내던졌다. 매사에 무심했던 전 남편의 격한 반응에 놀란 화진이 헛웃음을 쳤다.

‘아빠, 연이 왔어요.’

엄마, 아빠. 활기찬 목소리로 부르는 호칭엔 어색함이 없었다.

진작에 며느리 바보가 된 현준은 설우 다음으로 연에게 많은 선물을 사다 안겼다.

수감중인 차 회장을 마주칠 일이 없으니 가끔 본가에 들린 연은 현준은 물론 큰집 식구들의 사랑까지 독차지했다.

돌아다니는 곳곳에 저를 닮은 금빛을 뿌리고 다니는 아이였다.

연과 시간을 보낼 때마다 욕심에 눈이 멀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벌인 부친이 떠올랐다.

손자며느리의 재롱을 보는 맛에 풍족한 노년을 보냈을 텐데.

굴러 들어온 복을 본인이 걷어 차버린 것이었다.

“그런 것들은 씨를 말려야지.”

“나랑 설우가 알아서 처리했어.”

현준의 표정은 끝내 펴지지 않았다. 그 역시 따로 보복해둘 생각이었다.

“첸이랑 이든은 애인 안 만드니? 언제까지 연이만 보고 살 거야.”

“설우가 바쁘기도 하고. 셋이 돌아가면서 케어하는 게 편해요. 애인이 있으면 꼬이는 게 많더라고요. 둘 다 최근에 만났었으니까 한동안은 뭐, 생각 없어요.”

“그래, 아직 젊으니까.”

“마음이 안 생겨서 걱정이긴 해요.”

“하긴, 또 아이라도 생겨 봐. 조카 보는 맛에 나가고 싶기나 하겠어?”

‘아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여럿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본인이 말하고도 기대가 되는지, 반짝반짝한 화진의 시선이 맞은편에 닿았다.

“때가 되면 생기겠죠.”

긍정적인 답을 들은 화진이 반색했다.

갖지 않을 생각이라면 단칼에 잘랐을 아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손주를 간절히 바라는 예비 조부모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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