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국내 시청률 보증수표, 한류스타, 2년 연속 대상 수상.
최고의 타이틀을 달고 잘 닦여진 성공 가도를 달리던 여배우가 재기불능으로 매장당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스폰서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기사가 뜨자마자 촬영장으로 들이닥친 본처에게 머리채를 잡혔다.
후배들을 괴롭힌 갑질과 팬들의 선물을 쓰레기 취급하는 등 안수정의 가식적인 행실까지 낱낱이 공개되고 남자 배우들과 열애설까지 쏟아졌다.
기업 이미지 훼손으로 인해 물어야 하는 위약금만 수십억대였다.
‘원, 원하신다면 병원에서 다시 기어 올게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아쉽네요, 마음이 바뀌어서.’
사소한 유희 한 번에 밑도 끝도 없는 나락으로 쑤셔박힌 안수정은 끝내 연을 찾아와 무릎을 꿇었지만, 그녀의 남편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이었다.
[배우 안수정, 자택에서 쓰러진 채 발견. 생명에는 지장 없어…]
기사를 대강 읽고 태블릿을 끈 설우가 서재를 나섰다. 무표정한 얼굴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남아있었다.
무차별적인 보복으로 돌아온 결과물이 썩 마음에 들었다.
세상을 발아래 두고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진 게 많은 남자는 본인의 행동에 선악을 구분 짓지 않았다.
“연아, 그만 자자.”
“형! 꼬맹이 완전 타짜야. 우리 둘 다 파산이라고.”
“이거 봐요, 오빠. 내가 첸이랑 이든 돈을 다 가져왔어요. 불쌍해서 오백 원씩 돌려줬고요.”
화투를 치고 있던 연이 산처럼 쌓인 동전을 가리켰다. 뿌듯한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잘했어. 이든 보고 치우라고 하고, 얼른. 잘 시간이야.”
“네. 이든, 첸! 아무 꿈도 꾸지 말고 편히 자요.”
“응, 연이도.”
코가 열리는 돼지 저금통에 동전을 담은 연이 설우에게 폭 안겨 손을 흔들었다.
연에게 꿈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기에 펠리체의 밤엔 늘 꿈이 없길 바랐다.
“나 이제 오빠도 이길 수 있을 거 같아요.”
“날 잡고 한 번 해야겠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 아기 다람쥐 교육도 시킬 겸.”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요.”
“이든, 첸도 배운 지 얼마 안 된 거야. 셋 다 초보라고. 난 절대 못 이길 텐데?”
“일단 해보고 이야기해요!”
질 걸 뻔히 알면서도 승부욕을 내세워 보았다.
설우와의 전적에 승은 없었고 패는….
헤아리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이기고 말 거라고.
속을 훤히 드러내며 주먹을 꼭 쥐는 연이 그저 귀여웠다.
연을 안전 가드 위에 앉혀둔 설우가 달싹이는 입술을 머금었다.
“오늘 하루는.”
“좋았어요.”
“특이사항은.”
“이든이 볼을 꼬집었어요.”
…내쫓아버릴까.
“머리가 아프거나 잠이 오진 않았고.”
“네, 아주 멀쩡했습니다.”
“좋아, 하고 잘 거야.”
“네, 하고 잘… 네?”
“만세.”
허공에서 흔들던 발을 잡히고 잠시 당황했던 연이 익숙하게 팔을 들었다.
헐렁한 티셔츠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재빨리 달려든 설우는 조금 다급하게 하얀 살결을 탐했다.
“사랑해, 연아.”
오직 그녀만 들을 수 있는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안수정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들 무렵, CH와 현진의 며느리가 데뷔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신인 모델이란 찌라시가 증권가에 퍼져나갔다.
의도된 소문이었고, 머지않아 그 모델의 이름 석 자가 실린 기사들이 포털사이트를 차지했다.
재벌가 며느리, 혼혈, 금안, 나이 차이 등 많은 이들의 관심이 연에게 집중되었다.
촬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화보 하나를 찍을 때마다 실시간 검색어를 오르내릴 정도로 인지도가 높아졌다.
밝히기 전이나 후나, 설우는 여전히 불쾌하고 불안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지.”
“그래요? 그럼 난 복 받을 거예요.”
“네가 뭘 참는데.”
“이든이 놀리는 것도 참고, 첸이 맛없는 채소를 주는 것도 참고, 일하면서도 날 놓아주지 않는 오빠를 참죠!”
“결재 하나만 하면 끝이야.”
“난 왜 데리고 왔어요?”
모처럼 촬영이 없는 날이었다. 이든과 등산을 가려다 붙잡혀 집무실로 끌려온 연은 거꾸로 든 책을 탁탁 내려쳤다.
“쪼끄만게 어디서 성질을 부려.”
“일주일 만에 겨우 쉬는 거예요. 촬영, 인터뷰, 촬영, 인터뷰. 내가 얼마나 바쁜 줄 알아요? 근데 또 여기서 책을 보고 있잖아요. 나가 놀고 싶은데.”
나도 너랑 놀고 싶어.
연이 들고 있던 책과 마지막 결재판을 덮어 한쪽으로 치워둔 설우가 검은색 클리어파일을 꺼내 올렸다.
“이게 뭐예요?”
“모델 선우연의 사생팬으로써 만든 포트폴리오지.”
“한 대표님한테 구해달라고 한 거예요?”
“보다시피. 잡지 페이지를 찢은 것도 있고.”
투명한 비닐엔 연의 사진이 빠짐없이 끼워져 있었다. 미공개컷도 제법 많았다.
촬영 원본을 요구하며 한 대표를 닦달한 결과물이었다.
“역시 1호 팬은 다르네요.”
천천히 파일을 넘기던 연이 서준과 붙어 찍은 사진을 보고 화들짝 놀라 재빨리 손을 놀렸다.
하지만, 뒷장 역시 커플 화보였다.
설마 7장이 다 있는 건….
슬며시 다른 사진들을 들춰보던 연은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
“화보에 실린 7장, 한 대표한테 따로 받은 5장. 총 12장이야, 너랑 한서준.”
“이것까지 굳이 모아둘 필요가 있을까요.”
“바람피우는 아내 사진을 훔쳐보는 기분으로.”
“그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에요. 이건 일이잖아요.”
“알면서도 속이 뒤집혀, 그냥 본능이야.”
보고 또 보아도 내성 따윈 생기지 않았다. 배우 아내를 둔 남편은 현자인가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건 오빠라고요.”
“그럼 한 장에 세 번씩 해줘.”
뭘?
큰 눈을 깜빡이던 연이 서서히 벌어지는 입을 턱 막고 설우를 흘겨보았다.
1,000원에 세 번, 화투를 치다 빚을 지고 녹초가 되도록 시달린 기억이 떠올랐다.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시간이었다.
한 장에 세 번이니까 10장에 30번, 2장을 더하면 36번….
“…미안해요, 오빠. 정말 사랑하는데 36번은 못해요. 내가 죽을지도 몰라요.”
“흐응, 이 정도도 못 해줘? 조금 서운해지려고 하는데.”
매끈한 턱선을 매만진 설우가 마음이 상한 척 눈을 깔았다.
울먹일 듯이 입술을 삐죽거리던 연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 그럼 들어가서 2번만 해요. 나머지는 호텔에서도 하고 집에서도…. 어차피 하루 만에 못 하니까.”
“하루 만에 할 수 있어.”
“못해요, 오빠. 연속으로 계속해도 36번은 너무 많다고요.”
“뽀뽀하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5분이면 충분하잖아.”
“뽀뽀?”
“무슨 생각 했어?”
“1,000원에 세 번처럼 하자는 줄 알았죠! 일부러 장난친 거죠?”
“아닌데. 네가 음란한 다람쥐였을 뿐이지.”
…음란한 다람쥐라니.
망연자실한 연이 털썩 주저앉아 뜨끈한 두 볼을 감싸 쥐었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답을 내렸으니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
“예쁘게도 자네.”
쌔근쌔근, 낮잠을 자는 연을 바라보다 나온 설우가 이든을 불렀다.
“어디 가게?”
“제이.”
“아, 주안한테 보고 받는 날인가?”
설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이 2시간 후에 깨워. 너무 많이 재우면 안 되니까 투정 부려도 절대 들어주지 말고.”
“2시간 안에 못 와?”
“아마도. 웬만하면 깨우기 전에 일어나잖아.”
웬만하지 않던 날을 겪어 봤으니까 그렇지.
연에게 유독 약하기도 했고, 아주 가끔 하는 잠투정에 크게 데였던 이든이 이마를 긁적였다.
‘연아, 연아. 미안해. 30분만 더 자자, 미안.’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잠에서 깨자마자 서럽게 대성통곡을 하는 연을 달래다가 따라 울뻔했던 날이었다.
“알았어, 가.”
커다란 손이 허공을 저었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었다.
설우는 보름에 한 번씩 제이를 찾았다.
6개월이 넘도록 제이 지하실에 갇혀있던 장세희와 권상철에게 사람을 붙여 내보낸 후 꾸준히 보고를 받고 있었다.
“마실 거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아니, 됐어. 이것들은 어때.”
“수중에 있던 현금이 전부 떨어졌는지 모텔 밖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밖이라면?”
“터미널이나 역, 공원 벤치 같은 곳이요.”
테이블 가득 사진을 깔아둔 주안이 권상철과 장세희가 노숙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차례로 가리켰다.
살가죽만 남아 뼈대가 도드라진 얼굴에선 이전의 외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연이 그들을 다시 마주친 데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빚쟁이들한텐 꾸준히 위치 전송하고 있지?”
“예, 오늘도 마주쳐서 꽤 많이 맞았다고 하네요.”
등받이에 편히 기대앉은 설우가 바닥을 구르는 처참한 몰골을 느긋하게 구경했다.
권상철과 장세희를 24시간 감시하며 그들을 쫓는 대부업체 직원을 불러들였다.
매일 흠씬 두들겨 맞게 만들면서 빚쟁이에게 끌려가게 두진 않았다.
병 주고, 약주고. 서서히 말려 죽이기 위한 희망고문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잘 감시해. 죄도 지을 수 없게 만들어, 감옥도 저것들한텐 천국일 테니까.”
“알겠습니다.”
제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을 뿐, 영원히 그들의 숨통을 쥐고 있을 작정이었다.
설우가 펠리체로 돌아올 무렵, 정원에선 바비큐 파티가 시작되었다.
숯향기가 적절히 배여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통삼겹살을 영접한 연이 커다란 상추 위에 고기 세 점을 올렸다.
“연아, 너무 커. 천천히 먹어야지, 누가 안 뺏어 먹어.”
볼이 터지도록 쌈을 넣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우의 젓가락이 고기 하나를 거두어 갔다.
고기의 빈자리는 금세 밥으로 채워졌다.
잘 먹는 게 좋다가도 걱정이 되고, 걱정이 되다가도 기특했다.
“오빠, 나 내일은 이든이랑 등산 갈 거니까 회사에 데려가지 말아요.”
“알았어.”
“이든이 다리가 길어서 따라가기 조금 힘들긴 한데, 공기도 좋고 운동도 돼요! 오빠도 같이 가면 좋겠어요. 주말에 갈래요? 엄마랑 삼촌이랑도 한 번 가고, 아빠랑도 한 번 가기로 했거든요. 할 게 많아요.”
“그러니까. 나랑 있을 시간도 아까운데 만날 사람이 왜 그렇게 많아? 남보다 못한 남편 취급을 당하니 서러워 살 수가 없어.”
“엄마, 아빠가 왜 남이에요! 오빠랑 피가 섞였는데.”
“너 오기 전까진 정 없이 잘 살았어.”
이젠 너무 자주 만나서 탈이라고.
선홍빛으로 익은 새우를 까 앞접시에 꾸준히 놓아주며 불만을 토로하는 설우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춘 연이 배시시 웃어 주었다.
“영악하긴.”
어김없이 녹는점이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미소를 앞에 둔 설우는 일자로 굳어있던 입매를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