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91화 (91/96)
  • 외전 5화.

    “못 하겠으면 내 아내를 3초라고 부른 대가를 치르면 돼.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용건을 끝낸 설우가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안수정의 매니저가 이든의 팔에 매달려 쇼를 하는 중이었다.

    “놔 줘, 이든.”

    “차 사장님, 대체 이게…!”

    엉망진창으로 엉킨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안수정을 발견한 매니저가 눈을 부릅떴다.

    “이럴 시간 없어요.”

    “예?”

    “소속사 들어가서 위약금 넉넉히 준비하세요. 안수정 이름으로 서명한 계약서 전부 잘 들여다보시고.”

    “형, 한 대만 치고 와도 돼?”

    “참아.”

    그간 안수정이 연에게 퍼부었던 언어폭력에 대해 알게 된 이든은 눈이 돌았다.

    주안을 데려와 제이 지하실로 끌고 가겠다는 걸 말린 건 첸이었다. 폭력적인 과거를 살아온 덩치 큰 사냥개는 남녀의 구별을 두지 않고 날뛰곤 했다.

    “아니, 차설우 사장님. 알아듣게 설명을 해주셔야 저도 대표님께 말씀을 전하죠.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희 애가 무슨 잘못이라도….”

    “그쪽 배우랑 머리채 잡고 싸운 게 내 아냅니다.”

    “…예?”

    “사람이 아픈 걸 빌미로 삼아 비난하고 모욕하고. 이게 정상입니까? 자기 잘난 맛에 미쳐 살아도 정도가 있지. 당한 쪽이 내 아내가 아니라 그저 신인 모델이었다면 저 여자가 어떤 짓까지 했을지 궁금할 지경입니다.”

    든든한 뒷배로 가진 스폰서를 이용해, 자기 이름값을 이용해 상대적 약자를 매장하고도 남았겠지.

    “정,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선우연 씨, 아니 사모님을 직접 찾아뵙고 사과를….”

    “헛소리.”

    설우의 사나운 눈매가 단번에 일그러지자 말실수를 깨달은 매니저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저런 걸 한류스타라고. 준비 단단히 하세요. 나만큼 열받은 사람이 또 있거든.”

    “무슨…?”

    “가자, 이든. 아, 병실도 비우세요. 여기 CH 계열삽니다. 이사장한테 곧장 연락 넣을 거예요.”

    “사, 사장님, 잠시만! 어이쿠!”

    설우를 잡으려 쫓아오는 매니저를 손쉽게 뒤로 밀어낸 이든이 험악한 얼굴로 주먹을 들어 보였다.

    화들짝 놀라 주저앉은 남자는 울화통이 터지는 가슴을 두드렸다.

    언제든 사고를 칠 안하무인이었지만, 건드려도 하필 저런!

    깊은 한숨을 끝으로 휴대 전화를 들었다. 소속사 대표에게 이 끔찍한 상황을 전달해야 했다.

    ***

    연이 좋아하는 한우를 듬뿍 올려 굽던 성진이 집게를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진작 설우의 연락을 받고 한바탕 난리를 치고 온 화진도 하얀 얼굴에 찍힌 손톱자국을 보고 다시 열을 올렸다.

    턱 끝에 닿는 칼단발이 위아래로 열심히 흔들렸다.

    “어디서 그런 개념 없는 계집애를 데려다가 사진을 찍어? 이거 얼굴 어쩔 거야!”

    “괜찮아요, 엄마. 약도 발랐고 제가 더 많이 때렸어요.”

    “그거 차병원에 입원했다며? 내가 가서 다 엎어버리려다가 간신히 참았어.”

    소고기 한 점을 입에 넣은 연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만나면 으르렁거리기 바쁜 모자는 말투까지 닮아 있었다.

    특히, 엎어버리겠단 말을 참 좋아했다.

    “우리 회사에서도 광고 줬을 거 아냐.”

    연에게 고기를 건네주기 바쁜 성진이 인상을 썼다. 수십 개의 계열사를 가진 대기업에서 잘 나가는 한류스타를 모델로 쓰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일개 광고 모델을 선정하는 것까지 일일이 보고 받지 않는 오너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목록 뽑아 오라고 했어. 디스플레이나 전자에는 몇 개 있는 거 같더라고. 의류나 가구 쪽도.”

    “설우는 어쩔 거래?”

    “안수경인지, 안수정인지 하는 애가 샬롯 대표 세컨드래. 일단 그거부터 터뜨린다고. 그 후에 브랜드 이미지 손상으로 광고 계약 파기하고 위약금 받아내라는 거지.”

    “그걸로 끝? 연아, 이것도 먹어 봐.”

    “전화로는 거기까지 이야기했어.”

    화진의 앞접시에도 윤기가 흐르는 소고기 몇 점이 놓였지만, 입맛이 뚝 떨어진 그녀는 팔짱을 끼고 씩씩거리느라 바빴다.

    냉수로 속을 식히던 화진이 결국 휴대폰을 들어 성재를 찾았다. 설우에게 맡겨 두고 두 손 놓고 있자니 불같은 성질이 허락하지 않았다.

    -예, 회장님.

    “백화점에 샬롯 들어와 있지.”

    -예, 대부분 입점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 대표한테 연락해서 지점별로 샬롯 계약기간 알아 오라고 해. 그리고 배우 안수정 스폰해준다는 대표 와이프랑 자리 좀 만들어.”

    -알겠습니다.

    짧은 용건을 마치자 조금이나마 열기가 가라앉았다.

    “와이프는 왜?”

    “치정으로 개망신 한 번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부인도 알고 있겠지.”

    “알고만 있는 거랑 직접적으로 피해 보는 거랑 같겠니? 잠자코 구경이나 해.”

    창피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만들어줄 테니까.

    “엄마랑 삼촌도 좀 드세요. 내가 다 먹겠어요.”

    “너 먹이러 온 거니까 많이 먹어. 그런 되먹지 못한 계집애는 잊어버리고.”

    ‘연이가 조금 부족한 걸 가지고 트집 잡아 괴롭혔어요. 자세한 건 입에 담고 싶지도 않네요. 이든이랑 통화하세요.’

    딱한 내 새끼.

    자식이라곤 설우 하나뿐인 화진에게 연은 며느리라기보단 딸에 가까웠다.

    애교 많고 살가운 아이는 막내딸 노릇을 톡톡히 하며 특유의 사랑스러움을 뿜어냈다.

    부모의 관심을 성가셔하는 설우 대신 연과 함께하는 시간을 낙으로 삼은 지 오래였다.

    “이제 정말 괜찮아요. 나름 복수도 했고요.”

    “앞으로는 이 정도까지 참지도 마. 마음에 안 들면 일단 뺨부터 후려갈겨. 그다음은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 그럴게요.”

    연의 곁에 있는 이들은 이런 사고 한 번에 심장을 부여잡아야 했다. 그만큼 위험한 증상들을 겪어 봤기 때문이었다.

    연을 만나기 전까지 발을 동동 굴렀던 화진과 성진은 밝게 웃으며 평소 먹는 양을 비워내는 연을 보고 나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간신히 잡아둔 병이 재발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모두의 정성이 물거품이 될 뻔한 날이었다.

    “변명을 들어볼까요.”

    안수정의 병원에 이어 준 엔터로 찾아온 설우는 소파에 반듯하게 앉아 미소를 지었다.

    고의로 한 짓이 아님을 알기에 베푸는 자비였다.

    “욕심이 과했습니다. 신인 모델한테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잡은 스케줄이었어요. 역시 안수정이랑 붙여 두는 게 아닌데….”

    “한 대표의 약속을 믿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둔 겁니다. 연이가 아주 즐거워했으니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어요.”

    “안수정 성격이 개차반인 것도 진작 알고 계셨던 분이 너무 소홀하셨죠.”

    이렇게까지 쓰레기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연의 매니저에게 소식을 들은 민준은 당장 쫓아올 설우를 기다리며 피를 말렸다.

    데뷔 후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마음을 풀어두었다. 제 불찰이 컸다.

    스튜디오에 외부인이 없어 기사가 나가지 않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빈틈없이 케어하겠다고 했잖습니까. 연이에게 해가 될 수 있단 말을 듣고 방패가 될 수 있는 배경도 전부 숨기고 이든도 붙이지 않았습니다.”

    “예….”

    “배우 나부랭이랑 머리채를 잡고 싸워서 고운 얼굴이 긁혀 들어왔어요.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돌아오는 답이 가관이었죠. 내 아내가 온갖 모욕을 당하는 동안 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알고 드는 생각은 딱 하나뿐이었어요.”

    “…….”

    “아, 이런 개같은 경우를 봤나.”

    가지런히 맞잡은 손을 푼 설우가 눈가를 긁적였다. 펴질 줄 모르는 얼굴엔 짜증이 그득했다.

    “물론 나도 안일했습니다. 매번 이런 게 놓치고 나서야 깨달아요. 등신같이.”

    죄인이 된 민준은 몸이 달았다. 자조하는 그를 말리며 석고대죄라고 하고픈 마음이었다.

    “일단 안수정을 명예훼손으로….”

    “아뇨, 법은 필요 없습니다. 이번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 거예요. 한 대표는 지금부터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이가 내 아내라는 걸 알리면 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혹시 연이가 버거우면 지금이라도 계약을 취소하도록 하죠.”

    “아닙니다! 전혀 버겁지 않아요.”

    민준이 손사래를 쳤다. 모델과 뮤즈로서의 가능성도 충분했을뿐더러 이 세상 것이 아닌 선함을 가진 연과 인간적인 친분 역시 유지하고 싶었다.

    “그럼 믿고 가보겠습니다.”

    “예, 추후에 다른 스케줄 잡아서 연락 드리겠습니다.”

    설우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일어선 채로 배웅하던 민준이 막혔던 숨을 내뿜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3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진이 다 빠졌지만, 그가 오길 기다리던 때보다 속은 시원했다.

    ***

    “그냥 가실 거예요?”

    “응, 시간도 늦었고. 설우랑은 나중에 따로 통화하지, 뭐. 배불리 먹었으니 아무 생각 말고 쉬어.”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화진의 차에서 내린 연이 질 좋은 소고기로 가득 찬 배를 문지르며 대문을 밀었다.

    “오빠!”

    “고기는 맛있게 먹었어?”

    방문 알람을 듣고 정원을 서성이던 설우가 후다닥 달려오는 연을 가뿐히 안아 들었다.

    “네, 거기는 아무리 자주 가도 질리지 않아요. 너무 맛있어.”

    “살이 좀 찐 거 같기도 하고.”

    “정말요? 안 되는데. 날씬할수록 사진이 잘 나온다고 했어요. 피트니스 내려가서 운동해야겠다.”

    “장난이야. 너 아직 멀었어, 더 쪄야 해.”

    현관으로 들어서자 연을 손꼽아 기다리던 진돗개 두 마리가 튀어나왔다.

    “연이 왔어?”

    “다녀왔습니다.”

    반갑게 웃던 두 얼굴은 길쭉하게 붙은 드레싱밴드를 보고 금세 굳어졌다. 아직도 분노가 가시지 않았다.

    “약 발라야지. 내려와, 꼬맹이.”

    “내가 발라 줄 거야. 바로 재울 거니까 시끄럽게 하지 말고.”

    “알았어.”

    순순히 물러나는 이든을 지나 침실로 들어온 설우가 침대 위에 연을 내려두고 허리를 숙였다.

    말을 잘못 골라 또다시 마음을 다치게 할까 봐.

    화진에게 보내두고 내내 고민하던 설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연아, 모델 이제 그만할까?”

    “…나는 계속하고 싶어요.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이번 일로 연이가 너무 상처받은 건 아닌지 걱정돼.”

    3초, 당사자가 아님에도 잊히지 않았다.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답답했다.

    한 대 치겠다는 이든을 말리지 말았어야 했다.

    “조금. 하지만 금방 괜찮아졌어요! 첸이랑 이든도 그리고 오빠랑 엄마, 삼촌이 잘 위로해 줬잖아요. 맛있는 것도 먹었고. 나 지금 기분 좋아요.”

    “다행이네.”

    “오빠도 알겠지만, 난 단순해서 극복이 빨라요. 나쁜 말들도 금방 잊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할 수 있게 해주세요.”

    간절한 눈동자가 일렁였다. 처음 성취감을 느끼게 해준 일을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그만두게 되더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네가 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을게.”

    “고마워요.”

    “대신, 조만간 네가 내 아내라는 기사를 낼 거야. 다신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고. 연아, 오빠가 많이 미안해.”

    낯선 이로 채워진 공간에서 얼마나 서러웠을까.

    고개를 젓는 연을 꼭 끌어안은 설우가 붉어진 눈을 애써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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