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90화 (90/96)
  • 외전 4화.

    안수정은 마지막 촬영날까지 패악을 부렸다. 스튜디오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야, 3초. 그 가방 내가 들게. 네가 이거 해. 괜찮죠, 작가님?”

    “마음대로 해. 근데 수정 씨, 왜 연이 씨 보고 3초래?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아뇨, 기억력이 나빠서. 뭘 알려줘도 그 자리에서 잊어버린다니까요? 일부러 그러는 거 같아. 교통사고 후유증이라며, 다시 검사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

    스튜디오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어찌 됐든 남들과 다른 부분이 있고, 촬영 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촬영을 할 때마다 교통사고 후유증에 대한 양해를 구하곤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주요 스텝들은 도가 지나친 안수정의 언사에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굳이 나서서 시끄러운 상황을 만들지는 않았다.

    마지막이야, 마지막. 괜찮아, 연아.

    6개월마다 열심히 검사를 받고 있다고 소리를 빽 지르려던 연이 마음을 가다듬고 가방을 건넸다.

    그녀가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고 나서야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편하게 찍어본 테스트컷을 확인한 안수정이 연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내가 홀터넥 드레스 입을래. 야, 빨리 벗어. 너.”

    그 후로도 크고 작은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3초. 구두 나랑 바꿔.”

    “드롭 귀걸이 빼. 내가 할래.”

    꼬박꼬박 선배님을 붙여 대우해주던 연도 한계를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왜 얘가 매번 센터야? 내가 제일 먼저 섭외된 거 아니었어? 자꾸 이럴 거야?”

    “연 씨가 가장 앞에 있는 게 구도가 좋아. 수정 씨가 앞에 오면 굴욕당해, 얼굴 크다고.”

    지금 뒤에 있어서 이 정도라고.

    “뭐, 뭐예요?”

    사진작가의 촌철살인에 머리끝까지 열이 받은 안수정이 옆에 선 연의 어깨를 밀쳤다.

    “…아!”

    “연아!”

    매니저가 달려 들어와 연을 일으켰다.

    높은 구두를 신고 넘어진 탓에 삐끗한 발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코끝이 발개진 연이 허리를 숙여 구두를 툭툭, 벗어냈다.

    “연아?”

    “죄송해요, 언니.”

    그리고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여자의 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아악! 이거 미친 거 아니야?”

    “어머, 웬일이야. 연이 씨!”

    악에 받친 고성이 스튜디오를 울렸다. 이든에게 운동을 배우고 악력이 제법 좋아진 연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야, 3초!’

    비아냥 섞인 안수정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자 작은 주먹까지 내질렀다.

    뒷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끔찍한 낯짝을 뭉개주고 싶었다. 이 정도의 악의가 생긴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하지만 참을 수가 없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어요.”

    미안해요, 오빠. 내가 지렁이는 아니지만, 꿈틀은 해야겠어요.

    한계였다.

    “첸, 오빠한테 연락했어요?”

    “당연하지. 지금 들어오고 있어.”

    “죄송합니다, 제가 진작 말씀을 드렸어야 되는데.”

    “아니에요! 언니는 잘못 없어요. 내가 혼자 해결하겠다고 했어.”

    “혼자 해결한 게 쌈박질이야? 넌 형 오면 죽었어. 얼굴에 손톱자국 남았다고!”

    “…내가 더 많이 때렸어요. 내가 먼저 때린 거라 안수정이 고소하겠다고 난리를 쳤어요.”

    연이 시무룩하게 웅얼거렸다. 촬영장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안수정은 땅을 치며 울었고, 그녀의 스폰서라는 ‘샬롯’ 대표의 수행원이 들어와 촬영은 흐지부지되었다.

    날카로운 손톱에 긁힌 두 갈래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던 첸이 제가 더 따가운 양 인상을 썼다.

    “고소 같은 소리 하네, 죽을라고.”

    앉았다 일어났다 차오르는 화를 어쩌지 못하고 돌아다니던 이든은 죄 없는 쿠션을 주먹으로 치며 화풀이를 했다.

    설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펠리체로 들어왔다.

    “이리 와, 선우연.”

    “약 다 발랐어, 가도 돼.”

    유라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설우를 눈앞에서 보니 화나면 무섭다던 연의 말이 절로 이해가 갔다.

    먼저 침대 위에 걸터앉은 연이 서늘하게 굳은 얼굴로 옷을 벗는 설우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 천천히 말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냉기라곤 없는 다정한 목소리에 온몸이 뜨거워졌다.

    헐렁한 티셔츠만 남긴 설우가 천천히 다가왔다.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낸 연은 설우의 반 팔 티셔츠를 꾸깃꾸깃 접어 올려 제 머리를 집어넣었다.

    원래 즐기는 짓이기도 했고, 그녀의 입장에선 너무 창피한 일이라 얼굴을 맞대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연을 허벅지 위로 바짝 끌어올려 깊숙이 안은 설우가 침대 헤드에 기대 안락한 자세를 만들었다.

    “기억이 잘 안 났어요.”

    “응.”

    “난 젓가락질도 오래 걸렸는데. 책 읽는 것도 오래 걸리고 오빠가 도와주지 않으면 퍼즐도, 블록도 오래 걸려요. 모르는 건 다 오래 걸려.”

    “괜찮아, 오래 걸려도 결국 할 수 있잖아. 기억하는 것도 그래. 남들보다 여러 번 되짚어 봐야 해도 결국 외울 수 있잖아. 너 아직 어려, 천천히 배우면 돼. 왜 그런 걸로 마음 상해하고 그래.”

    후끈한 얼굴이 가슴팍에 닿으니 발끝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설우는 성의껏 답을 해주었다.

    “어려운 건 아직 잘 모르는데, 촬영할 때 쓰는 말은 더 어려웠어요. 옷이랑 가방, 구두 같은 건 종류도 많았고. 필요한 건 계속 외우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 됐어요. 사람이 많고, 긴장이 되니까 더 심했어요.”

    “그래.”

    “그래도 난 촬영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계속 챙겨주시는 스타일리스트 언니들도 있었고, 몰라서 물어보면 다들 잘 알려주시니까. 근데 이번 촬영은… 이번 촬영은 안 될 것 같아요.”

    “나 보고 똑바로 얘기해. 무슨 일이야?”

    설우가 연을 끌어내 마주 보았다. 탁하게 흐려진 금빛 눈동자가 요동쳤다. 말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수치스럽다.

    “내, 내가 모자라서 방해가 된대요. 기억을 잘못해서 금붕어 같다고, 3초라고 불렀어요. 더는 못 참을 것 같아서 내가 먼저 때렸어요.”

    “뭐…?”

    설우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었다고 한 거지?

    잠시 눈을 감은 설우는 제 귀가 먹은 것이길 바랐다.

    저런 말을 들었으면 안 된다. 아니, 저런 말을 들을 때까지 자신이 아무것도 몰랐으면 안 된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많은 곳에서 그러니까 너무너무 창피했어요. 오빠한테도 미안하고. 그래서 사실 많이 울었어요, 운 것도 미안해요.”

    어색한 미소를 띄운 연이 잔뜩 붉어진 눈꺼풀을 아래로 깔았다. 민망한 듯 설우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는 작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한껏 움츠러든 어깨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

    “안수정이라고 했나?”

    “네.”

    연을 다시 끌어안은 설우가 구불거리는 금발을 쓰다듬었다.

    분노 그 이상의 감정이 느껴지니 오히려 머릿속이 차게 식었다.

    “그 여자 혼자였어?”

    “오빠 나 오늘 위에서 자게 해주면 안 돼요?”

    “연아.”

    “네.”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야지.”

    “네, 혼자였어요.”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잘했어.”

    다정한 손길과 잘 어울리는 다정한 속삭임이었다. 종일 그리웠던 품속에 있으니 속상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

    안수정 님.

    차병원 특실 앞에선 설우가 눈가를 문질렀다.

    진작 알아볼걸. 갑자기 잠이 늘었을 때 물어볼걸.

    등신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오빠가 미안해.”

    아무것도 몰라서 너무 미안해.

    설우의 얼굴에 진하게 드리웠던 죄책감은 병실 문을 열기 무섭게 사라졌다.

    자신만큼 살벌한 표정으로 따라온 이든을 문밖에 세워둔 설우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하는 안수정에게 뚜벅뚜벅,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차설우 사장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안수정이에요.”

    “무슨 얘길 많이 들었습니까.”

    “얘? 아, 뭐 그냥… 기사에 나오는 이야기들이요. 결혼도 하셨다고 들었는데.”

    “했죠, 결혼.”

    주인의 허락도 없이 가죽 소파에 앉은 설우가 테이블로 긴 다리를 뻗었다.

    어떻게든 잘 보이기 위해 연거푸 눈을 깜빡이는 여자를 보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국민 첫사랑으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자는 이 상황에서도 순진한 척, 예쁜 척을 해대느라 바빴다.

    “안수정 씨.”

    “네, 차설우 사장님.”

    “애가 너무 착하니까 만만했죠.”

    “네?”

    “싫은 소리를 들어도 바보같이 웃으니까 우습게 여겼겠고. 네, 네. 고분고분 말을 잘 들으니까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았겠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설우가 자세를 바로 했다. 연의 작은 손에 맞아 상처가 생긴 얼굴이 퍽 우스웠다.

    “나쁘게 구는 법을 가르치든지 해야지, 빌어먹을. 개나 소나 달려들어 애를 못살게 구니 기분이 아주 엿 같아. 지금 내 기분이 정말… 더럽다고.”

    “아악!”

    소리 없이 숨을 고르던 설우가 수정의 머리채를 틀어쥔 건 순식간이었다.

    “머저리? 못 배워서 멍청해? 그것도 뚫린 입이라고 어지간히 막 지껄였던데.”

    연은 평생 들을 일이 없을 험악한 욕설들이 입안에서 짓이겨졌다.

    3초. 3초라고 불렀단다. 뭐든 3초면 잊어버린다고. 그저 남들보다 조금 느린 것뿐인데.

    일상을 살기 위해 남들보다 2배 더 노력하는 아이한테 어떻게 그딴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심장을 쥐어짜듯 오는 분노였다. 연의 서러운 눈물에 담긴 감정이 달랐던 것처럼 분노의 결이 달랐다.

    도무지 말로 표현이 되지 않았다. 모욕적인 말을 촬영 내내 들었을 연을 떠올리면 피가 거꾸로 솟았다가 서늘히 식기를 반복했다.

    미치기 직전이다.

    아, 그냥 죽여버릴까.

    넌 선보단 악에 가깝고 도덕적이지 않은데 못 할 것도 없잖아.

    우악스럽게 잡힌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목을 조르고 싶은 살의를 필사적으로 눌러낸 설우가 힘이 잔뜩 들어간 손을 마구 휘둘렀다.

    “악! 아악, 아파! 으흐흑….”

    “내 앞에서도 한 번 지껄여 봐. 내 눈앞에서 내 아내를 3초라고 불러보라고. 기꺼이 죽여줄 테니까.”

    “아, 아내라는 게 무슨, 흐윽!”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은 수정이 어깨를 발발 떨었다.

    분명 광고주 미팅이라고 했다. 이런 폭력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 빈 머리통 좀 잘 굴러 봐.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

    “내 아내라고, 선우연.”

    두피가 뜯겨나갈 것 같은 고통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 와중에도 경악스럽게 입이 벌어졌다.

    3초가 차설우 사장의 아내였다고? 지금 나한테 장난을 치는 건가?

    “왜, 알고 나니까 조금 후회가 돼?”

    “아악!”

    남자의 거친 손아귀에 다시 힘이 들어가자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쯤 되면 누가 들어올 만도 한데, 문가가 너무나 조용했다.

    “왜 그랬어?”

    “…그, 그게.”

    “대답해, 왜 그랬어.”

    누군가를 괴롭히는 게 재미있다고.

    저보다 인지도가 낮은 후배들에게 독설을 퍼부으면 스트레스가 풀려서 그랬다고.

    말 같지 않은 이유를 늘어놓을 수 없는 수정이 입을 닫고 뚝뚝 눈물을 흘렸다.

    “아아악! 아악!”

    자비 없이 흔들던 손을 털어낸 설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스폰해주는 샬롯 대표 유부남인 건 알지?”

    “…모, 몰랐어요! 아내분인 줄 몰랐어요, 알았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죄송해요. 죄, 죄송해요.”

    “펠리체 1동. 우리집이야.”

    “…?”

    “여기서부터 거기까지 무릎으로 기어 오면 용서해주지.”

    유려한 미소를 보자마자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처음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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