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달아오른 눈, 붉어진 코. 울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뜬 연을 룸미러로 힐끔거리던 매니저가 펠리체 입구를 지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연아. 내가 대표님한테 말씀드릴까? 안수정 그거 정상 아니야! 지금 룩북 촬영하는 브랜드 대표가 안수정 스폰서라 더 날뛰는 거 같기도 하고. 자기보다 어리고 예쁜데 사진까지 네가 더 잘 나오니까 배알이 꼴려서 그래.”
“언니한테도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한 대표가 미리 경고한 대로 안수정의 성격은 개차반이었다. 아니, 개차반이란 말도 아까웠다.
팬덤이 두터운 유명 아이돌 하늘에겐 선배 노릇을 하는 정도에서 끝을 냈지만, 연에겐 달랐다.
아직 이름이 덜 알려진 신인이라서라기보단 가만히 서 있어도 반짝이는 타고난 색과 저보다 잘난 외모가 부러운 탓이었다.
안수정은 연의 매니저인 유라한테까지 인격 모독과 독설을 일삼았다.
“뭐가 너 때문이야! 너는 진짜 애가 너무 착해서 탈이야. 솔직히 나였으면 버티지도 않고 바로 일렀어!”
“네?”
“네 남편 말이야. 안수정 자르는 건 물론이고 브랜드 자체를 망하게 하고도 남을 사람이 남편인데 왜 입 꾹 닫고 버텨, 버티길.”
“…오빠 화나면 무서워요. 엄청 마음 아파할 거고 난 모델을 못할지도 몰라요.”
“그럼 어떡하려고. 대표님한테도 말씀드리지 마?”
“네. 촬영 다음 주면 끝날 테니까 참아 볼게요.”
이건 내 일이니까.
꿋꿋이 버텨내야 너도 자랄 수 있는 거야.
“들어가, 연아. 내일 데리러 올게.”
“네.”
이겨내자 여러 번 다짐은 했지만, 쉽지 않았다.
다정하게 보듬어주는 이든과 첸, 설우의 안온한 품이 떠올라 속이 상했다.
“연아!”
터덜터덜 마당을 지나온 연은 현관 앞까지 마중을 나온 첸과 이든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눈이 시큰거리고 억지로 끌어올린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얼굴이 일그러져 의심을 살까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진창을 뒹구는 기분을 들키진 않은 모양이다.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는 연을 따라 들어온 첸이 살갑게 물었다.
“배고파? 간식해줄까?”
“아뇨. 아이스크림 먹으려고요.”
“앉아 있어, 꺼내 줄게.”
“같이 먹자, 꼬맹이!”
“방에 가서 먹을래요. 침대에 누워서 먹고 싶어요.”
고개를 저은 연이 아이스크림 통을 집어 들었다.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꾸역꾸역 눌러 참은 그녀가 침실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 막냉이가 일을 하니까 같이 놀 시간이 줄었어.”
“많이 바쁜가? 요 며칠 유독 피곤해 보이네.”
침실로 들어가는 연의 뒷모습을 보던 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촬영을 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집에 돌아와 몇 시간씩 떠드느라 바쁜 동생이 입을 닫은 지 3일쯤 된 거 같았다.
“저번에 무슨 룩북? 촬영한다고 했잖아. 그거 시작하고 일정이 빡빡하긴 했어. 오늘도 아침 일찍 나갔는데 이제야 왔잖아. 카메라 앞에서 10시간 넘게 서 있느라 힘들었겠지.”
“설우 알면 사서 고생한다고 난리 치겠네.”
“안 그래도 조만간 한 대표 찾아갈 것 같아. 그 지랄 같은 성격에 6개월이면 많이 참았어.”
설우는 생각보다 많은 연의 스케줄에 대해 -그녀가 없을 때만-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가 웅얼거리듯 내뱉는 험악한 욕설을 듣는 건 첸과 이든이었다.
하지만 참았다.
한 대표를 찾아가려다 참고, 스튜디오에 찾아가려다 참고.
연이 워낙 즐거워했고, 밖에 나가 혼자 일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좋아하니 그로서도 쉽사리 방해할 수 없었다.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겠다고 했으니 큰 인내가 필요했다.
홀로 침실에 들어선 연은 아이스크림 통을 품에 안고 제 방까지 이어진 통로로 들어갔다.
이젠 거의 사용하지 않는 온통 분홍색인 방의 분홍색 침대에 걸터앉은 연은 멍하니 앉아 눈을 깜빡이다 아이스크림을 퍼먹기 시작했다.
한 입, 두 입. 단맛이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아이스크림을 의미 없이 떠먹던 연이 결국 툭, 툭 눈물을 쏟았다.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텼던 것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쩌면 설우에게 유리 조각을 들이밀었을 때보다 더한 절망이었다.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 즐거웠던 기억은 모두 사라졌다.
제게 가장 안정감을 주는 펠리체로 돌아왔는데.
여전히 스튜디오 중앙에서 모욕을 당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수치심이, 작은 벌레가 되어 몸을 타고 오르는 것만 같았다.
***
커프스 버튼이 유리 협탁을 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설우가 풀어둔 커프스 버튼을 집어 든 연이 허공에 떠 있는 다리를 흔들었다.
“룩북은 의상도 있고 주얼리도 있고 신발, 가방도 다 따로 있어요. 오전엔 주얼리 화보를 찍었어요. 목걸이, 귀걸이, 반지를 몇 개나 바꿔 끼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촬영은 얼굴만 크, 크… 말하지 마요, 내가 기억할 거예요.”
“그래.”
설우는 드레스 셔츠를 벗으며 느긋하게 연을 기다려주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마다 빵빵하게 바람을 불어넣는 볼을 제 입속에 넣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아, 클로즈업!”
“잘했어, 곧 똑똑한 다람쥐도 되겠네.”
“그건 아직 멀었어요. 안 그래도 모르는 게 많은데 같은 말을 10번씩 들어도 까먹어서 큰일이에요. 오후엔 홍보 영상 촬영을 했는데 어려운 단어 하나를 계속 틀렸어요. 얼마나 바보 같았을까요.”
“괜찮아.”
편안한 홈웨어로 갈아입은 설우가 다가와 연을 달랬다.
쓸데없는 말이 많아지는 이유는 뻔했다.
“정면에서 클로즈업한 것도 많아서 눈동자가 엄청 밝게 나왔어요. 오빤 안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래도 보여줘, 화 안 낼게.”
“네, 오늘 점심은 돈가스였어요. 튀김이 바삭바삭해서 아주 맛있었고요. 샐러드도 전부 먹었어요. 눈치 보여서 두 개밖에 못 먹었지만.”
“주말에 오빠가 사줄게. 먹고 싶은 만큼 먹어.”
“까먹고 촬영장에 젤리를 안 가져갔어요. 촬영이 조금 길어서 필요했거든요.”
연의 허리를 잡아 아일랜드 서랍장 위에서 내려준 설우가 씰룩이는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누가 혼냈어?”
짹짹거리던 입이 닫히고, 눈꼬리가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신나서 늘어놓는 종알거림과 중구난방으로 뻗어가는 두서없는 말의 차이는 분명했다.
말없이 주섬주섬 설우의 티셔츠를 잡아 올린 연이 그 속으로 쏙, 머리를 숨겼다.
“혼난 건 아니고요. 그냥 조금 놀림당했는데 자세한 건 비밀이에요. 오빠가 화낼 거예요.”
“우리 착한 다람쥐를 대체 누가 놀리는 거지.”
“거긴 다들 똑똑하니까요. 내가 못 알아듣는 어려운 말이 너무 많아요. 난 공부를 해도 잘 안되는데…. 큰일이에요.”
“스트레스받고 힘들면 그만해야 해. 무슨 뜻인지 알지?”
“응, 알아요. 또 아프면 안 되니까. 근데 재미있는 날이 더 많아요. 슬픈 날은 아주 가끔.”
“그럼 다행이고.”
면티를 늘어뜨리고 숨어있는 연을 꼭 끌어안아 토닥인 설우가 곧은 눈썹을 들썩였다.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을 해주었지만, 매섭게 찢어진 눈매에 짜증이 묻어났다.
홀로서기를 원하는 연을 위해 손을 떼고 있었던 게 독이 되었음이 분명했다.
“연아.”
“…….”
“연아, 그만 일어나자.”
“흐응, 졸린데….”
설우의 두꺼운 팔뚝을 잡은 연이 오랜만에 잠투정을 부렸다.
“저녁 먹을 시간이야. 오늘 점심도 안 먹고 잠만 잤잖아. 오빠가 많이 봐줬다고 생각하는데?”
“…미안, 더 잘래요.”
“너 요즘 스트레스받지. 이러다가 잡아놓은 패턴 무너지면 어쩌려고.”
“이번 촬영이 좀 빡빡해서. 괜찮아요. 근데 일어나진 못하겠어.”
“선우연?”
눈으로 보지 않아도 설우가 얼마나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은 무거운 눈꺼풀을 올리지 못했다.
“이런 식이면, 한 대표 찾아가서 다 엎어버릴 거야. 내가 너무 유하게 굴었지? 오냐, 오냐. 네 일정 전부 이해해 주니까 한 대표가 감을 잃은 거 같은데 제대로….”
밟아 둬야겠어. 대기업의 횡포 정도는 보여주는 게 좋을 거 같지.
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며 눈을 가늘게 뜬 설우가 아랫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참아주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사회에 빠르게 적응하는 연이 대견해서, 생전 처음 가진 직업을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내가 없는 곳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있었던 일을 늘어놓는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끝없이 이어지는 촬영 일정을 봐준 건 전부 연을 위해서였지만, 규칙적인 일상이 무너지고 끝내 수면 시간까지 늘어버리니 이가 갈렸다.
이해심 많은 남편 코스프레를 집어치울 때가 된 것 같았다.
애초에 어울리지도 않았지.
“…그러지 말아요, 오빠. 그만 잘게요.”
“첸이 맛있는 거 해준대.”
연에겐 그저 온화한 미소를 지어준 설우가 팔을 뻗어 일으켜 주었다.
화기애애한 식사 시간이 지나고 연이 지하 피트니스에 내려간 틈을 다 모여앉은 셋이 맥주캔을 집었다.
“첸, 연이 이번 촬영 좀 알아봐. 자세한 일정이랑 돌아가는 상황도.”
“그래, 안 그래도 이야기하려고 했어.”
“저녁 먹을 땐 멀쩡하긴 했는데, 요즘 꼬맹이가 힘이 없는 거 같지?”
첸과 이든이 한마디씩 거들자 불쾌함이 배가 되었다.
“애가 영 이상해. 잠도 조금 는 거 같고. 좋아하니 지켜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아무 일도 없길 바랐다. 그저 연의 컨디션 난조이길.
만일 걱정하는 종류의 어떤 문제가 생겼다면 천지가 개벽할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
시작은 아주 사소한 무언가였다.
예술혼이 넘치는 사진작가의 작은 욕심.
그 욕심으로 고고한 자존심에 상처가 난 안수정은 작정하고 연을 괴롭혔고 촬영이 지속될수록 악랄해져 갔다.
그렇지 않아도 난장판인 인성이 좋은 상대를 만나 증폭된 것이었다.
안수정에게 연은 별 볼일 없는 신인이었고, 멋대로 굴어도 되는 어린 후배였으며 툭툭 걷어차기 좋은 조그마한 돌멩이와 다름없었다.
톱스타가 된 이후로 쭉 이어온 취미생활의 후폭풍이 어떤 식으로 돌아올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야, 3초.”
“네, 선배님.”
“저기 앵클 스트랩 좀 가져와 봐.”
국내 유명 브랜드인 ‘샬롯’의 룩북 촬영을 하는 배우 안수정과 연, 하늘은 같은 대기실을 사용했다.
후배들을 쥐잡듯이 잡는 안수정의 못된 버릇이었다.
안수정은 연에게 완전히 꽂혀있었다.
행동하는 것도 특이하고, 싫은 소리를 듣고도 언제까지 방긋방긋 웃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돌도 씹어먹을 어린 나이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건망증도 재미있었다.
그 어벙한 모습이 금붕어 같아 3초라고 불렀다.
“여기….”
“그건 티 스트랩이라니까. 도대체 몇 번을 알려줘야 하니?”
“죄송합니다.”
“나 별명 끝내주게 잘 지었지 않아? 진짜 금붕어 같아, 너.”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까지 있는 공간에서 매번 망신을 줬다.
연은 꿋꿋이 눈물을 삼키고 모욕을 견뎠다.
앞으로 3일. 끝까지 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