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88화 (88/96)
  • 외전 2화.

    검진 후에 진행될 화보 촬영 일정에 대하여 자세히 전해 들은 연은 외부 미팅이 있다는 한 대표와 함께 정문을 나섰다.

    “긴장돼요?”

    “네. 설레기도 하고 긴장도 돼요. 괜히 피해 줄까 봐 걱정도 되고요. 여럿이 촬영한 건 처음이라.”

    “서준이랑도 했잖아요. 아, 사실 염려되는 게 한 가지 있어요.”

    “네?”

    “안수정이요. 모델로 시작해서 지금 한류스타 자리에 앉은 여배운데 모델 후배, 배우 후배 가리지 않고 기 죽이기로 유명해요. 제일 높은 자리에 있으면 겸손해야 하는데 성질이 개차반이거든요. 촬영 스태프까지 다 이겨 먹는 애라….”

    국내 최상위 브랜드의 룩북 촬영이었다.

    한류스타 여배우와 유명 아이돌 그리고 신예 모델이 함께하는 촬영 섭외를 받은 민준은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다른 신인 모델이라면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칠 정도로 좋은 기회였지만, 하필 한류스타가 인성 쓰레기로 유명한 안수정으로 확정되는 바람에 고민이 깊어졌다.

    차 사장의 안락한 품에서 사는 연이 안수정 같은 타입의 여자를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만일 안수정이 연을 괴롭힌다면, 그리고 그게 차설우 사장의 귀에 들어간다면.

    이 바닥이 발칵 뒤집힐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설마 유혈 사태까지 나진 않겠지.

    민준이 최악을 가정하며 오소소 돋은 소름을 쓸어내렸다.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걱정이 무색할 만큼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를 바라본 민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연의 촬영 스케줄에 맞춰 나갈 수 있는 해외 출장을 떠올렸다.

    차 사장이 난동을 부릴 상황이 생기면 곧바로 도망쳐야지.

    마음 한편으론 상대를 잘못 고른 안수정이 된통 당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

    “…한서준.”

    맞물린 어금니가 으득, 갈릴 만큼 턱끝에 힘이 들어찼다.

    어떤 촬영을 하게 되는지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연은 컨셉으로 커플룩 촬영을 했다고 들었는데, 얇은 허리에 한서준의 팔이 감겨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치밀었다.

    잡지에 들어간 7장의 사진은 전부 신체적인 접촉이 있었다.

    7장의 A컷을 뽑아내는데 얼마나 많은 B컷이 찍히는지 연에게 들어 알고 있는 설우는 최근 들어 담배가 절실했다.

    그만두면 안 되냐는 말을 이미 수백 번 참아낸 그는 반쯤 구겨진 잡지를 버리지도 못하고 한쪽으로 치워 두었다.

    설우는 불안했다.

    애초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픈 연을 데려와 함께 지냈고 결혼까지 밀어붙였다.

    선택권이 없던 아이가 어쩔 수 없이 저를 사랑하게 된 건 아닐까, 그녀의 세상이 커지면 다른 남자가 마음에 들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쉼 없이 뻗어나갔다.

    매일 사랑한다 말하고 귀찮을 정도로 치대고 있었지만, 점점 성장해가는 연은 예전 같지 않았다.

    “하아….”

    이딴 사진을 볼 때마다 5년씩 늙고 있는 기분이었다.

    천진한 내 다람쥐는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수심이 깊어진 설우가 서류 더미 위로 잠시 엎드렸다.

    이번 촬영은 제발 남자가 없기를, 한서준은 더더욱 아니기를 바랐다.

    “오빠!”

    “?”

    벌컥, 문이 열리고 난데없이 나타난 금발을 멍하니 보던 설우가 눈을 비볐다.

    연이 온다는 어떤 연락도 받지 못해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익숙하게 정 실장을 보내고 문을 닫은 연이 후다닥 달려와 설우의 앞에 섰다.

    “언제 퇴원했어? 연락도 안 하고.”

    “퇴원하고 첸이 데려다줬어요. 다음 촬영까지 3일 정도 쉴 수 있다는 좋은 소식 전하려고요. 오빠도 쉴 수 있으면 리조트나 호텔 가서….”

    “응, 가자.”

    말을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업무에 필요한 태블릿과 휴대폰만 챙긴 설우가 하얀 손을 잡아 흔들었다.

    함께 있을 시간이 절실하던 차였다.

    “현진호텔로 갈까요? 가서 삼촌도 보고.”

    “뭐든.”

    “오빠 옷은 입고 가야죠!”

    마음이 급한 설우 대신 옷걸이에 걸린 슈트 재킷을 가리켰다.

    괜찮아, 나중에 이든한테 챙기라고 하면 돼.

    연을 품에 넣은 설우에게 재킷은 뒷전이었다.

    “어디 나가십니까?”

    사장실 데스크에서 업무를 보던 정 실장이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요일에 출근할 테니까 일정 조정 좀 부탁해요.”

    “…예?”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야.

    스케줄러에 빡빡하게 적힌 회의 일정이 눈앞을 스쳤다.

    “안 돼요? 오빠 바빠요?”

    똘망똘망 뜨여있는 눈동자를 마주한 정 실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시선을 거절하는 건 사실 불가능했다.

    “목, 요일… 까지는 괜찮을 거 같습니다. 있는 힘껏 미뤄보겠습니다.”

    “역시, 정 실장님 최고예요.”

    곧게 올라서는 엄지를 보자마자 아빠 미소가 튀어나왔다.

    이때만큼은 사장의 매서운 눈매도 두렵지 않았다.

    ***

    항상 비어있는 스위트룸으로 들어온 설우는 문이 닫히자마자 말캉한 입술을 삼켰다.

    평소보다 거친 손길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오빠, 잠, 으!”

    “다음 촬영은 누구랑 해.”

    “읏…!”

    “설마 또 한서준은 아니지?”

    질문을 해놓고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예쁘게 흐트러지는 금발을 한쪽으로 잡은 설우가 귓바퀴를 핥았다.

    귓불까지 쭉 빨아들인 후에 다시 걸음을 옮겼다.

    현관에서 마스터룸까지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는 동안 연이 차려입은 화려한 패턴의 원피스와 이너가 전부 사라졌다.

    바르작대는 다람쥐를 푹신한 시트에 파묻은 설우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연은 그제야 답할 수 있었다.

    “아뇨, 배우 안수정이랑 유명 아이돌이라고 했어요. 서준 씨랑 화보 찍은 거 봤어요?”

    “정답게 다른 남자 이름 부르지 말고. 얼마나 시달리고 싶어서 이래?”

    “사랑해요.”

    앙큼한 여우 같으니라고.

    제가 어떤 말에 약하고 어떤 행동에 환장하는지 잘 알고 있는 연이 작게 속삭였다.

    성급하게 와이셔츠 단추를 풀던 손이 아래로 늘어졌다.

    하얀 살결을 훤히 드러내고 앉은 연이 반쯤 풀어진 설우의 셔츠를 손수 벗겨 주었다.

    “한서준 씨는 이제 드라마 촬영 들어가서 한동안 화보는 안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혹시 한서준이 나보다 잘생겼어?”

    질투심을 참지 못한 설우가 유치한 질문을 뱉었다.

    “내 눈에는 오빠가 최고예요!”

    한껏 오버스럽게 꾸며낸 말투였지만 마음에 들었다.

    어른스럽지 못한 감정들을 밀어낸 설우가 파르르 떨리는 커다란 눈동자를 다정하게 문질렀다.

    남들처럼, 아니 그보다 더 온전한 일상을 살아가려 아등바등 노력하는 연이 기특했다.

    그저 응석받이로 남았으면 좋았을 텐데.

    “연아, 다른 문제는 없지?”

    “그럼요. 검진 결과도 정상이었잖아요.”

    “조금이라도 문제 생기면 절대 숨기지 말고.”

    “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말캉한 입술을 머금은 설우는 백설기 같은 살덩이를 마음껏 희롱했다.

    곧게 뻗은 쇄골 아래 자국을 새겨 넣고 하얀색과 분홍색 그리고 다시 하얀색과 금색을 부지런히 입속에 물었다.

    질척한 타액이 뭉개질 때마다 밭은 신음이 마스터룸 벽을 때렸다.

    노출이 있는 의상을 종종 입어야 하는 연을 위해 많이 참아주고 있었지만, 충분히 가려지는 부분에선 자비가 없었다.

    가늘게 홈이 패인 등줄기를 따라 촘촘하게 낙인이 찍혔다.

    움찔거리는 연의 허리를 지그시 눌러준 설우가 더운 숨을 뱉으며 바짝 달라붙었다.

    “사랑해, 연아.”

    아프지 마, 연아.

    열락에 취한 설우가 끝없이 중얼거렸다.

    연이 건강해졌다고 해도 항상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아직 여리고 작게 느껴지는 아기 다람쥐일 뿐이었다.

    나조차도 너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겁을 먹는데.

    뒷말이 많은 세계에서 상처받는 일이 생길까 늘 마음이 불안했다.

    마스터룸 곳곳을 돌아다니며 설우의 끈질긴 요구를 들어준 대가로 스테이크 세 접시를 허락받은 연이 신나게 고기를 썰었다.

    “천천히, 하나씩.”

    이건 뭐 꼬치도 아니고.

    포크에 꽂힌 수많은 조각을 한입에 넣으려는 손을 막았다. 몸집에 맞지 않는 과식과 폭식은 여전했다.

    “스테이크는 역시 현진호텔이 맛있어요.”

    “분발할게.”

    “CH가 맛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다행이네. 셰프를 바꿔야 하나 고민했는데.”

    한 사람의 생업을 가지고 치는 살벌한 장난에 연의 갸름한 턱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진심은 아니죠?”

    “내 다람쥐가 원한다면 진심이 될 수 있지.”

    “절대, 원하지 않아요.”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줄 수 있어. 촬영 스태프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전부 갈아치워 줄 테니까.”

    “1년 동안은 밝히지 않기로 한 대표님이랑 약속했다면서요.”

    “너한테 피해가 갈 거라고 자꾸 세뇌를 시키니까 그렇지. 넘어가 주는 게 아니었는데.”

    달변가인 민준에게 설득되던 순간을 떠올린 설우가 반쯤 채워져 있던 와인을 말끔히 털어 넣었다.

    1년 동안 연에 대한 어떤 권리를 빼앗긴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너를 위한 일이라니까.

    ‘신인 때부터 그런 걸로 이슈가 되면 어중이떠중이들은 물론 파파라치까지 계속 달라붙을 겁니다. 이든이나 가드가 붙어도 물샐틈없이 막을 수가 없어요. 기자들도 독하고 호기심 많은 팬은 더 지독합니다. 혼혈의 신인 모델이 재벌가 며느리라면 얼마나 구미가 당기겠습니까.’

    ‘딱 1년입니다. 물론 한 대표가 문제없이 케어했을 때를 가정해서요.’

    백금발에 금안을 가진 혼혈 신인 모델, 선우연.

    최소한의 정보만을 공개하고 활동을 시작한데 더불어 결혼식 참석으로 그녀의 존재를 아는 상류층 인사들의 입도 틀어막아 두었다.

    때문에 연이 기혼인지, 가진 배경이 어떻게 되는지 아는 이들이 전무했다.

    “다 먹었으면 욕조에 얌전히 들어가 있어. 정 실장이랑 통화 좀 하고 갈게.”

    “네!”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휴대폰을 귓가에 댄 설우가 갑자기 그녀를 쫓았다.

    “응? 왜요?”

    -예, 사장님.

    “사랑해. 됐어, 들어가.”

    함께 하는 시간이 줄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말하는 습관이 생겼다.

    가볍게 입을 맞춰주자 배시시 웃은 연이 욕실 안으로 쏙 사라졌다.

    “정 실장?”

    -…예.

    매일 의도치 않게 오너의 사랑 고백을 듣게 되는 부하직원만 곤욕스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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