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숨결이 선명해지자 반쯤 눈을 뜬 설우가 곤히 잠든 연의 등을 토닥였다.
짙은 남색의 커플 파자마를 입은 둘은 꼭 한 몸처럼 보였다.
누군가의 위에 엎어져 자는 것도, 누군가의 아래에 짓눌려 자는 것도 불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불편함과 별개로 연의 목과 허리에 쥐약인 자세였다.
처음 버릇을 들일 때 말렸어야 했는데.
제게 달라붙어 있는 것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어린 아내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띠링, 띠링. 휴대 전화 알람이 침실을 울리자 작은 몸이 꿈틀거렸다.
뻐근한 팔다리를 바르작거리던 연은 눈도 뜨지 않은 채 입술부터 오물거렸다.
설우의 살결과 함께 파자마 목깃이 입술을 스쳤다.
곧은 목덜미를 쪽쪽, 빨아대던 연은 두 번째 알람이 울리고 나서야 눈을 떴다.
일주일에 두 번, 그의 위에서 자는 날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아침 유희였다.
설우의 어깨를 짚어 상체를 세운 연은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이었다. 몽롱한 그녀의 눈가를 가볍게 문질러준 설우가 입술을 내밀었다.
“뽀뽀.”
“뽀뽀.”
작은 웅얼거림과 함께 모닝 뽀뽀가 이어졌다.
설우의 입술에서 시작해 이마와 콧등, 볼, 눈동자까지 빠짐없이 입을 맞추면서 졸음을 밀어낸 연이 배시시 웃었다.
“잘 잤어?”
“네, 오빠는요?”
“나도. 이번 주는 이제 올라와서 못 자. 두 번 다 잤어.”
“응, 알아요.”
연의 엉덩이를 받치고 매트리스 밖으로 두 다리를 내린 설우는 어렵지 않게 그녀를 안고 일어섰다.
일자로 뻗어 등을 덮었던 긴 생머리엔 어느새 구불거리는 물결이 생겨났다.
생기 넘치는 금빛 웨이브가 그의 어깨로 넘실거렸다.
“아침 먹고 씻을까, 씻고 먹을까.”
“먹고 씻을래요. 채소 주스 안 먹으면 안 되겠죠?”
“당연하지. 꾸준히 먹어야 피도 맑아지고, 기억력도 좋아진다니까. 연이는 보통 사람이랑 조금 다르니까 계속 노력해야 해. 그래야 면역력도 좋아져. 오빠가 매번 말하지만, 감기약도 아무거나 못 먹기 때문에 잔병치레는 절대….”
“그만요, 잔소리를 듣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에요.”
기다렸다는 듯 잔소리를 쏟아내는 입술을 검지로 막은 연이 설우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연을 사회 속으로 내어놓고 걱정과 잔소리가 부쩍 늘어난 설우는 결국 입을 닫고 침실을 나섰다.
“야, 버릇 나쁜 꼬맹이. 언제까지 안겨 다닐 거야.”
“오빠가 자꾸 안아주는걸요.”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온 이든이 찹쌀떡 같은 볼을 죽, 잡아당겼다.
“하지 마.”
뒤지기 싫으면.
변함없는 매서운 시선에 재빨리 손을 뗀 이든이 먼저 식탁에 자리 잡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이든. 첸도요.”
“연이도 좋은 아침. 얼른 앉아, 오므라이스 해줄게.”
“네!”
“꼬맹이, 오늘 스케줄은 어떻게 돼?”
“9시에 촬영 있어요. 그리고 오후엔 회사 가서 대표님 만나기로 했고요.”
연은 예상했던 대로, 아니 예상보다 더욱 카메라에 잘 적응했다. 천직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아이돌이나 배우처럼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데뷔 6개월 만에 패션업계에서 주목받은 신예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유명 브랜드의 매장에도 그녀의 사진이 하나둘 걸리기 시작했고, 간간이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연은 설우만큼 바쁜 하루를 보냈고, 모델 일을 하는 것을 아주 즐거워했다.
“오늘 일정 끝나면 입원해야 해. 한 대표한텐 내가 연락해뒀어.”
“벌써 6개월이 지났다니. 시간이 너무 빨리 가네요.”
“3일이면 끝날 거야.”
“1년에 한 번씩은 안 되겠죠? 난 아직 25살인데 6개월에 한 번씩 검진을 받으면 죽을 때까지 100번 넘게 병원에 가야 하잖아요.”
“죽을 때까지 딱 100번만 가면 된다고 생각해. 아픈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이 가니까. 얼른 주스 마셔야지?”
“네.”
검진 소식을 듣고 찌푸린 연의 미간을 꾹 누른 설우가 초록색 액체가 가득 채워진 머그잔을 밀어주었다.
첸이 가져다준 오므라이스 위에 케첩을 마음껏 두른 연은 두 눈을 꼭 감고 채소 주스를 꿀꺽꿀꺽 삼켜냈다.
으, 아무리 먹어도 끔찍한 맛이야.
씁쓸함을 밀어내기 위해 연이 오므라이스를 마구 퍼먹기 시작하자 설우가 킥킥거리며 그녀의 긴 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너무 맛있어요, 첸. 도시락에 싸주세요. 점심으로 먹을래요.”
금세 양 볼이 빵빵해진 연이 엄지를 추켜세웠다.
“아, 귀여워 죽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오버스럽게 왼쪽 가슴을 쥐는 첸에게 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가 아니기는.
“그 정돈데.”
케첩에 볶음밥을 싹싹 비벼 우걱우걱 퍼먹는 연을 바라보던 설우가 씰룩거리는 볼에 제 볼을 비볐다.
“우으, 오빠 나 밥 먹는 중이잖아요.”
“사랑해.”
“저 형은 왜 매번 밥상머리 앞에서 사랑을 해.”
“밥상머리 앞에서만? 출근하다 뛰어 들어와서 사랑해, 회의하다 뛰쳐나가서 휴대폰 붙잡고 사랑해. 저번엔 꾸벅꾸벅 조는 애를 기어이 품에 끼고 일을 하더라니까. 미친놈이 따로 없어.”
손가락 하나만 까딱여도 사랑스러워 죽겠는데 어떡하라고.
진작에 나간 퓨즈는 되돌릴 수 없었다. 연이 일을 시작하고 더욱 유난스러워진 사랑은 숨길 수 없이 튀어나왔다.
사랑에 눈먼 남자가 어디까지 우스워질 수 있는지 몸소 체험하는 것도 싫지 않았다.
아내 앞에선 전혀 다른 얼굴이 되는 설우는 주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몇몇 직원들은 사주가 이중인격일 거라 확신했다.
보통 녹는점과 어는점은 같다던데. 그는 한없이 녹기만 하는 중이었다.
첸과 이든이 쯧쯧, 혀를 차도 아랑곳하지 않고 뽀뽀까지 하고 나서야 연을 놓아준 설우가 제 몫의 오므라이스를 덜어주었다.
“맞아요. 자꾸 서재에서 나 안고 있으려고 해요. 일하면서 불편하지도 않아요?”
“전혀. 오늘 오빠가 데려다줄까?”
“아뇨. 매니저 언니 오기로 했어요. 아, 배불러. 잘 먹었습니다.”
담백한 거절이 돌아오자 시무룩해진 설우가 연을 따라 일어났다.
“안고 가.”
“걸어갈래요… 우앗!”
“아니, 못 걸어가.”
도망치듯 침실로 향하는 연을 번쩍 안아 든 설우가 짓궂게 웃었다.
연은 촬영 때문에 바빴고, 설우 역시 사업 확장 때문에 일이 많았다. 함께하는 아침이 반으로 줄어드니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알콩달콩 장난을 치며 방으로 들어가는 둘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짓던 이든이 부르르 진동하는 휴대폰을 집었다.
“어, 나야.”
-먼저 연락도 안 하니? 죽을죄를 지었다고 빌어야 하는 거 아냐?
“미안.”
-2시에 파라다이스 호텔 앞에서 봐.
“오늘? 오늘은 좀 곤란한데.”
-무조건 나와. 나와서 결판을 내자고.
“그래, 알았어.”
이든은 무심한 얼굴로 휴대 전화를 툭, 내려두었다.
“싸웠어?”
“연이 넘어진 날 윤경이 생일이었거든. 촛불 켜놓고 뛰쳐나왔다.”
“와, 심했다.”
“연이 밥 챙겨주느라 애인 밥 한번을 안 챙긴 사람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대차게 차였잖아. 보아하니 너도 오늘 차이겠어.”
“안 차여도 그만할 거야. 연이를 이길 정도로 마음 가는 여자가 나타나는 거 아니면 한동안 연애는 못 하겠어.”
“마찬가지야.”
첸이 빈 그릇을 치우며 피식거렸다.
사랑이 넘치는 부부를 보다 보니 문득 외로워진 첸과 이든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애를 시작했다.
하지만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야 하는 여동생을 가진 남자들이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뺨 한 대는 맞을 거 같은데.”
식사를 마친 이든이 미리 제 뺨을 문질렀다.
방긋방긋 웃는 여자친구를 생일 케이크와 함께 호텔 룸에 버려두고 나왔으니 뺨 한 대로 끝내면 양반이었다.
한 달 전에 헤어진 첸이 이별을 앞둔 이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너보단 내가 낫네. 난 맞을 짓은 안 했거든.”
위로라기보단 가벼운 놀림이었다.
***
촤악!
독특한 문양이 돋보이는 유리컵이 눈앞으로 다가온 순간, 제법 많은 양의 물줄기가 이든의 얼굴을 때렸다.
속된 말로 물싸대기였다.
이든은 태연하게 냅킨을 들어 젖은 머리를 닦았다.
대낮에 호텔 라운지에서 모욕을 당하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이든을 노려보던 여자가 실소했다.
“…하!”
“다 했어?”
“이럴 거면 연애를 왜 해? 그냥 여동생이나 끼고 살아!”
“난 시작할 때 충분히 설명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뻔뻔한 대답이었다. 짧은 연애 기간 내내 고작 ‘여동생’에게 치여 뒷전으로 밀려났던 여자는 모멸감에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여동생이 하나 있어요.’
‘아, 정말요? 저도 있는데!’
‘우리 집 보물 1호죠. 아직 손길이 많이 필요한 아이라 내가 누굴 만날 여유가 없는데.’
굵직한 선으로 남성미를 풍기는 이든을 스치듯 본 후 지인에게 다리를 놓아 달라고 조르고 졸라 성사된 자리였다.
대뜸 여동생 이야기부터 꺼내는 게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늦둥이 여동생이 있나 보네, 정도.
아래로 동생이 줄줄이 딸려 있대도 상관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그만큼 마음에 들었고, 제 손아귀에 사로잡을 자신도 있었다.
“그래, 내가 매달려서 만난 거지. 그래도 사과는 해야 하는 거….”
간신히 울분을 가라앉힌 여자가 차분히 말을 이어가려 할 때 물방울이 튄 휴대 전화가 지잉, 지잉, 울리기 시작했다.
만나는 동안 신물 나게 겪은 상황이 마지막 순간까지 반복되자 여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 형.”
-어디야?
“잠깐 누구 좀 만나러.”
-연이 입원 3시야. 지금 준 엔터 가서 픽업할 수 있어? 회의 끝나자마자 병원으로 갈게.
“어, 내가 갈게."
물줄기가 흘러 젖은 어깨를 대충 털어낸 이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끝까지 예의 없는 남자를 올려다보는 여자의 눈이 벌겋게 물들었다.
“또? 진짜 대단하다. 대신 죽어달라면 입 닫고 죽을 거니?”
“너무 극단적인 가정이다, 윤경아.”
이든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좋아하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리자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6개월 동안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한 날이 손에 꼽았다.
이든을 놓치고 싶지 않아 참고 이해했지만, 동생이 넘어졌다는 전화 한 통에 생일인 애인을 버려두고 뛰쳐나간 남자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냉수 샤워를 시킨 이유기도 했다.
“가지 마, 이든. 당신 이렇게 가면 우리 정말 끝이야.”
“그래, 여기까지만 하자. 미안해.”
이든의 옷깃을 쥐었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그의 여동생이 끔찍하게 미워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