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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86화 (완결) (86/96)
  • 86화(完).

    차성태 회장의 구속과 파라다이스의 독립으로 연이은 주가 폭락을 맞은 CH그룹은 많은 계열사를 처분하고 재계 순위권 밖으로 순식간에 밀려났다.

    부자는 망해도 3대가 먹고산다는 말은 사실이었지만, 과거의 명성과 권력은 한 줌의 재처럼 사라졌다.

    덕분에 현진은 라이벌조차 없는 독보적인 탑이 되었고 현진그룹의 수장인 박화진 회장은 갈수록 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바쁜 와중에도 일주일에 두, 세 번은 기어이 시간을 냈다. 아들 내외, 아니 살가운 며느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저희 왔어요.”

    “왔니?”

    “안녕하셨어요?”

    “3일 전에 봤잖아. 당연히 안녕해야지.”

    성진이 장난스럽게 설우와 연을 맞이했다. 지나치게 잦은 가족 모임을 꺼리는 설우와 다르게 연은 밝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연이가 이 집 고기를 너무 잘 먹으니까 나도 모르게 또 여길 예약했지 뭐야.”

    “외삼촌이랑 엄마가 너무 고기만 먹여서 큰일이에요. 식단 관리해야 하는데.”

    “리조트에서 풀밖에 안 먹인다며! 채소 주스로 모자라? 연이가 토끼니?”

    “저라고 먹이고 싶은 줄 아세요? 건강에 좋고, 뇌에 좋다니까 어쩔 수 없이 먹이는 거죠.”

    “먹고 싶은 걸 먹어야 스트레스를 안 받지. 연이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되는 거 몰라?”

    “또 시작이네, 또. 지겹지도 않아? 연아 다음부턴 삼촌이랑 둘이 먹자. 사나운 모자(母子)는 버리고.”

    “그럴까요?”

    미리 나와 있던 등심을 불판에 올린 성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매번 실랑이를 벌이는 둘에게 익숙해진 연은 태연하게 맞장구를 치며 샐러드를 집어 먹었다.

    “안 돼.”

    “미쳤니?”

    “그러니까. 그만하고 고기나 먹자고.”

    가녀린 팔뚝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화진이 제 앞에 놓인 육회 접시를 넘겨 주었다.

    “연이부터 줘. 어째 살이 더 빠진 거 같아?”

    오빠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괴롭혀서요, 라는 대답이 입안을 굴러다녔다.

    연과 설우는 차민준 대표를 만난 후로 줄곧 파라다이스 리조트에서 머물며 남은 휴가를 즐기는 중이었다.

    20대보다 월등히 좋은 체력을 가진 남편 덕분에 먹어도 먹어도 살이 빠지는 기이한 경험을 지속하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엄마랑 삼촌도 얼른 드세요, 오빠도요.”

    “그렇게 맛있어? 왜 이렇게 예쁘게 웃어.”

    맛있게 구워진 고기가 입에서 사르르 녹아 없어지자 연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물거리는 입가를 살짝 건드린 설우가 연을 끌어안고 볼을 비볐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수록 무뎌져야 하는데. 오히려 사랑스러움을 견딜 수 없었다.

    보는 즉시 물고, 빨고, 끌어안아야 할 정도로 안달이 난다. 휴가 후 일상에 적응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아직도 사랑이 넘치는구나. 아주 보기 좋아.”

    “저렇게 가만히 두지를 않으니 애가 살이 빠지지.”

    “많이 먹어. 채소도 꼭 같이 먹어야 해.”

    “샐러드도 다 먹었어요.”

    “잘했어.”

    습관처럼 칭찬이 돌아오자 연이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연에게 설우의 칭찬은 밥을 먹으면 반찬을 먹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커다란 접시 3개가 순식간에 비워졌다. 4인분씩 3접시, 그중 반 이상은 연의 몫이었다.

    “얘 먹는 걸 보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먹방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

    “그러니까. 어쩜 이렇게 잘 먹는지.”

    몸집에 맞지 않는 양이 늘 불안한 설우와 다르게 맞은 편에 앉은 화진과 성진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이 모델하기로 했어요.”

    “뭐? 모델?”

    연이 먹는 것을 지켜보다 놀란 남매가 똑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준 엔터 한민준 대표 만났어요. 연이가 하고 싶다고 해서요.”

    “그래, 연이는 끼가 있어 잘할 거야. 축하해, 연아.”

    “감사합니다, 삼촌.”

    후루룩, 냉면을 빨아들인 연이 부푼 볼 그대로 인사를 전했다.

    “괜찮겠어? 그 바닥이 워낙…. 아니다, 누가 감히 건드리겠어.”

    “저랑 결혼한 건 비밀로요. 시작부터 엮여서 언급되면 나쁜 말 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건 또 그렇네. 어쨌든 열심히 해 봐. 실력 좋으면 엄마 회사 광고도 줄게.”

    “파라다이스 광고부터 줄 겁니다.”

    “그깟 계열사 하나보단 우리 그룹이 났지. 안 그러니, 연아?”

    “연이는 파라다이스를 더 좋아해요.”

    “저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만 하세요, 창피해요.”

    시원한 냉면 육수까지 싹 비워낸 연이 김칫국물을 잔뜩 들이켜는 모자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아직 사진 한 장도 안 찍어본 초짜에게 대기업 광고를 선택하라 야단이니. 민망한 게 당연했다.

    “둘 다 그저 연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너는 뭐 달라?”

    “하하하, 워낙 예쁘니까.”

    성진이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조카며느리에게 고기 구워 먹이는 낙이 생길 줄은 몰랐다.

    “연이 좀 그만 불러내세요. 1분 1초가 아까운 신혼인데.”

    “24시간 내내 붙어 있으면서 2시간도 양보를 못 하니? 하여튼 누굴 닮아 욕심이 저렇게 많은지.”

    “누굴 담긴요, 엄마 닮았겠죠. 아버지는 욕심이 너무 없어서 탈이니까.”

    받아칠 수 없는 팩트가 돌아오니 화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맞는 말만 골라 하는 아들이 얄미웠지만, 사이좋게 앉은 둘을 보면 금세 미소가 지어졌다.

    겉도 속도 하얗기만한 연은 화진이 필요로 했던 정다운 가족이 되어주었으며 일에 파묻힌 일상에 유일한 유희를 선물했다.

    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고 연을 허락한 건 살면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로 꼽을 만큼 탁월한 선택이었다.

    ***

    “첸! 이든!”

    “연아!”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는 양 부둥켜안는 이들을 보며 혀를 찬 설우가 이든을 떼어내며 눈짓했다.

    리조트에 더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을 뒤로 한 채 펠리체로 돌아온 건 오늘이 5월 4일, 연의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설우가 연을 데리고 오는 사이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이든이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자, 연아. 여기서부터 안대 쓰고 들어가.”

    “안대까지 써야 해요?”

    “그럼, 생일엔 이런 걸 해야지. 고깔모자도 미리 쓰고.”

    “너무 떨려요, 하나도 안 보여.”

    리조트에서 설우가 끓여준 미역국과 아침을 먹고 이미 구름 위에 떠 있는 연은 기분 좋은 두근거림과 함께 첸과 이든의 손을 잡았다.

    느긋하게 뒤를 따르는 설우의 입가에도 한껏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녀의 생일을 축하해 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아주 오랜 시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다 왔어, 꼬맹이. 노래 끝나면 안대 벗는 거야.”

    “알았어요.”

    “시작!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연이. 생일 축하합니다. 와아!”

    이든의 생일에 했던 것처럼 크게 노래를 부른 이들이 손뼉을 치자 연은 천천히 안대를 벗었다.

    “이, 이게 다 뭐예요?”

    벌써 목소리가 떨렸다. 시큰해진 콧등을 문지르며 거실을 둘러본 연이 울먹였다.

    “일단 촛불부터.”

    “우리 넷 다 지금처럼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세요. 후!”

    케이크를 들고 있던 설우가 다가와 짧게 입을 맞췄다.

    “생일 축하해, 내 다람쥐. 아플 때마다 잘 견뎌줘서 정말 고마워.”

    “생일 축하해, 꼬맹이.”

    “생일 축하해, 연아.”

    “다들 정말 고마워요. 이걸 언제 다 한 거예요? 진짜…. 최고의 생일이에요.”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꾹 눌러 참던 연이 결국 고개를 숙였다.

    천장을 가득 채운 풍선과 벽에 걸린 알파벳 카드, 다양한 종류의 꽃바구니, 바닥에 빼곡히 깔린 선물상자까지.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화려한 생일파티였다.

    “이리 와.”

    “펠리체가 나한텐 아직도 꿈같아요. 정말 너무 행복해.”

    설우의 품에 꼭 안긴 연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뽀얀 얼굴에 홍조가 올라 얼룩이 생겼다.

    “앞으론 더 행복할 거야. 기대해도 좋아.”

    연을 떨어뜨린 설우가 붉어진 눈가에 입술을 대었다. 구경꾼들이 탄식하자 화악, 달아올라 쭈뼛거리던 연이 한걸음 물러섰다.

    “이, 이건 언제 다 정리해요? 선물은 또 다 언제 열어봐요?”

    “선물은 네가 내킬 때 하나씩.”

    “공평하게 33개씩 했어. 그러니까 99개야.”

    “아니, 100개야. 이건 내가 따로 주는 선물.”

    “시계?”

    네모난 상자를 연 설우가 손목시계를 꺼내 연에게 채워주었다. 실버와 로즈골드가 섞인 담백한 디자인은 연의 하얀 손목에 아주 잘 어울렸다.

    “와, 33개씩 하기로 해놓고 진짜 치사하다.”

    “내 말이.”

    “남편이랑 오빠랑 같으면 안 되지.”

    “고마워요, 매일 하고 다닐게요!”

    “이제야 똑바로 흐르는 네 시간을 가치 있게 쓰길 바라는 마음으로 주는 거야. 물론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은 날 위해 쓰는 시간이고.”

    “응, 그럴게요.”

    진심 어린 말을 듣고 환한 미소를 지은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에 시작된 온기가 온몸으로 퍼졌다.

    “꼬맹이! 울지 말고 다이닝룸으로 가. 맛있는 거 엄청 많으니까. 다른 선물은 나중에 풀어보고 벽에 있는 것들은 12시 지나서 재탕할 거야, 설우 형도 축하해 줘야지.”

    “난 됐고, 일단 먹자.”

    함께 들어간 다이닝룸엔 첸이 준비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울먹이던 연은 금세 눈을 반짝이며 수저를 들었다. 무엇 하나 빠짐없이 완벽한 생일이었다.

    실컷 먹고, 웃고 떠드는 동안 자정이 지났다. 손사래를 치는 설우를 끌어다 촛불까지 끈 후에야 길었던 생일파티가 마무리되었다.

    생일 선물은 둘이 있을 때 주겠다고 고집을 피운 연은 설우와 함께 침실로 돌아왔다.

    먼저 후다닥 씻고 나와 드레스룸 옷장 깊숙이 숨겨둔 벨벳 상자를 꺼낸 연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넥타이핀과 커프스 버튼.

    슈트를 자주 입는 그에게 아주 실용적이면서도 의미 있는 선물이었다.

    “뭐야, 왜 그러고 앉아있어?”

    “선물 주려고요.”

    머리도 반밖에 말리지 않은 연은 샤워가운 차림으로 설우를 기다렸다.

    같은 가운을 입은 설우가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내며 다가왔다.

    “뭔데? 궁금해.”

    “넥타이핀하고 커프스 버튼이에요. 직접 제작한 거고 여기 내 이름도 새겨뒀어요.”

    “와, 언제 이런 걸 준비했어? 고마워, 연아. 휴가 끝나면 하고 다닐게.”

    “넥타이랑 넥타이핀 선물은 나는 당신을 소유하고 싶다는 의미래요. 그래서 오빠 이름 말고 내 이름을 넣었어요. 내가 오빠를 가지고 싶다는 뜻이에요.”

    “이미 가졌잖아.”

    “더 오래, 더 많이 가질래요.”

    잔망스러운 다람쥐 같으니라고.

    온몸을 후끈거리게 만들 말을 툭 내뱉은 연이 허리에 매고 있던 끈을 풀러 샤워가운을 툭, 벗어 던졌다.

    “원하는 만큼 가져.”

    의도치 않게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을 갈구하는 시선이 잘 빚어진 나체를 샅샅이 훑었다.

    머지않아 설우가 기를 쓰고 쥐고 있는 이성의 끈 역시 툭, 끊어져 나갔다.

    “언제 자려고.”

    “조금만 더요.”

    몸서리치게 황홀했던 관계가 끝나고 설우의 가슴팍에 누운 연이 열기가 가시지 않은 목덜미를 쪽쪽 빨아들였다.

    잠자코 사탕이 되어준 설우는 곧은 등허리를 매만지며 눈을 감았다.

    “연아.”

    “네.”

    “오빠는 네가 다시 아파도 괜찮아.”

    “다시 안 아플 거예요!”

    “만에 하나 다시 아파도 최선을 다해 돌봐줄 거야. 그러니까 혹시 그런 일이 생겨도 너무 슬퍼하지 마.”

    “오빠가 더 슬퍼할 거면서.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말아요. 오빠, 내가 줬던 파란 장미 기억나요?”

    슬슬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느릿하게 밀어 올린 연이 웅얼거렸다.

    “기억나.”

    “파란 장미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래요, 그리고 기적 같은 사랑이래요. 꽃꽂이 선생님은 다른 색 장미를 추천해 주셨는데 전 오빠한테 파란 장미를 주고 싶었어요.”

    “왜?”

    “오빠가 내 기적 같은 사람이잖아요, 기적 같은 사랑이고. 사랑해요. 이제 잘래….”

    “잘 자.”

    다정한 인사에 미소를 머금은 연이 눈을 감았다. 쌕쌕, 일정하게 내쉬는 숨결이 느껴진 후에도 설우는 한동안 연의 등을 토닥였다.

    “사랑해.”

    나는 영원히 너를 위해, 너만 위해 기도할 거야.

    빌어먹을 신한테 영혼을 팔아서라도 네가 잠든 시간을 지켜줄 거야.

    “사랑해, 연아.”

    그러니 내 착한 다람쥐가 더는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네가 어제보다 오늘 더 편히 잠들기를.

    오늘보다 내일 더 행복하기를.

    당신이 잠든 사이에,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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