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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85화 (85/96)
  • 85화.

    태블릿을 보다가 의자에 기대고. 다시 태블릿을 보다가 의자에 기대고.

    연을 밖에 두고 따분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억지로 시작한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착잡한 한숨을 쉬며 목덜미를 주무르던 설우가 휴대 전화의 진동이 울리기 무섭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빠, 나예요.

    “응, 잘 놀고 있는 거야? 전화 좀 자주 하지.”

    -지금 삼촌이랑 엄마랑 점심 먹으러 왔어요.

    “뭐 하러. 나중에 같이 가면 되는데.”

    -나 아직 친구 없잖아요. 삼촌이랑 엄마 아니면 만날 사람 없어요.

    그건 그렇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설우가 픽, 실소를 뱉으며 나른하게 풀리는 몸을 일으켰다.

    기다리던 목소리를 들으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몇 시까지 밖에 있으려고? 나 혼자 못 있겠어. 빨리 와.”

    -이든이랑 첸이랑 놀아요.

    “싫어, 성가셔. 뭐 먹으러 갔어?”

    -소고기요. 삼촌이 사주신대요. 오빠 근데 있잖아요….

    “왜. 무슨 일 있어?”

    -오빠 카드를 썼어요. 내 돈이 금방 사라지더라고요. 분명 많다고 생각했는데.

    “잘했어.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랬잖아. 뭐 샀는데?”

    귀여운 웅얼거림을 계속 듣고 싶은 설우가 말을 이어 붙였다.

    -젤리요, 백화점에 젤리 천국이 있었어요. 포도 젤리도 여러 개 있고 종류가 너무 많아서 뭘 담아야 할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많이 샀어요, 미안해요.

    “하하하! 겨우 젤리? 오빠 카드로 젤리 좀 샀다고 그렇게 풀이 죽었어?”

    -5만 원을 넘게 썼는걸요.

    “500만 원을 넘게 써도 괜찮은데요.”

    한도조차 없는 카드로 젤리 5만 원어치를 사고 미안하다니.

    킥킥거리던 설우가 지금쯤 연이 짓고 있을 앙증맞은 표정을 떠올렸다.

    -그 얘긴 집에 가서 해요. 젤리도 같이 먹고요. 저녁 먹기 전엔 들어갈게요.

    “저녁 먹기 전이면 6시? 아직 멀었잖아. 첫날부터 너무 오래 돌아다니면 못 써.”

    제가 해놓고도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보고 싶으니 도리가 있나. 떠오르면 내뱉고 봐야지.

    -알았어요, 4시 전에 갈게요.

    “응, 빨리 와. 보고 싶어.”

    -네! 점심 맛있게 먹어요, 오빠.

    “너도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와, 사랑해.”

    -네, 저도 사….

    -연아, 고기 다 익었어. 얼른 끊어! 걘 매일 보면서 뭐 그렇게 할 말이 많다니?

    -오빠가 지금 휴가라 저 없으면 심심해서 그래요.

    -오늘 혼자 오래 돌아다녔다며. 배고플 텐데 얼른 먹어야지. 끊어, 끊어.

    성질 급한 화진의 목소리가 전해지자 설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끊으라는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야.

    -삼촌이 고기로 산을 쌓아주셔서 이만 끊어야겠어요. 나도 사랑해요.

    “그래.”

    끊긴 전화에 미련이 남은 설우가 휴대 전화를 한참 노려보다 다시 의자에 앉았다.

    끼익, 소리를 내며 의자의 등받이가 기울어지자 공허한 시선이 높은 천장에 닿았다.

    연이 아니라 자신이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닐까.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앞으론 더 자주, 더 많이 혼자 돌아다닐 텐데 지금 같은 마음이면 감당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 주엔 한민준 대표와 약속도 잡혀 있었다.

    연이가 정말 모델이나 배우가 된다면 우울증이라도 걸릴 기세였다.

    나잇값 좀 하자, 차설우.

    연에 대한 갈망과 사랑이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난 후 끝없이 인내를 시험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무섭게 들어온 손이 연을 잡아당겼다.

    “오빠?”

    대답 없이 연을 번쩍 안아 든 설우가 성큼성큼 침실로 향했다.

    “네가 쇼핑한 물건들은 진작 집에 왔는데. 내 다람쥐는 5시가 넘어서야 도착을 했네?”

    약간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

    “엄마랑 삼촌이랑 커피도 마시고 하다 보니 좀 늦었어요. 기다렸어요?”

    “당연하지.”

    연은 기다란 복도를 지나는 동안 설우의 볼에 쪽쪽쪽, 사과를 전했다.

    이든과 첸을 찾을 시간도 주지 않은 설우는 침실로 들어와 연을 내려주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연에게 바짝 달라붙은 설우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나 잘 다녀왔어요. 쉽고, 재미있었어요! 조금 외로웠지만.”

    “다행이다, 앞으로 걱정 없겠어.”

    “네, 이제 정말, 제대로 살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고마워요, 전부 오빠 덕분이에요.”

    “억울하다.”

    “뭐가요?”

    “난 네 덕분에 제대로 살 수 없게 됐거든.”

    자조적인 미소를 지은 설우가 찬기가 남은 연의 두 볼을 감싸며 입술을 겹쳤다.

    동등하게 겹쳐졌던 입술은 이내 한쪽으로 먹혀들었다. 타액이 섞이는 음탕한 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설우는 집요하고 지독하게 연의 입속을 희롱했다. 미끄러운 점막을 거칠게 훑고 혀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쉴 틈 없이 밀려드는 그가 버거운 연이 숨을 헐떡이며 몸을 비틀었지만 소용없었다.

    내 입안이 마를 때까지 핥아먹을 생각이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아, 흐….”

    치맛자락이 올려지고 스타킹은 무릎까지 내려갔다. 허벅지 안으로 파고든 손도, 입안 곳곳을 누비는 혀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허공을 떠돌던 연의 팔이 설우의 목을 감싸 안았다. 긴장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그가 주는 쾌락에 길들여진 몸이 멋대로 비틀리며 젖어 들었다.

    아침에 손수 입혀준 하얀 카디건을 벗긴 설우가 원피스를 벗기려다 멈칫했다.

    “힘들면 그만할게.”

    더운 숨이 섞인 저음이 낑낑거리는 강아지 울음소리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가쁜 호흡을 정돈한 연이 말간 얼굴로 물었다.

    “만세 할까요?”

    “해.”

    만족스러운 답을 듣고 씩, 웃은 설우가 원피스를 단숨에 벗겨냈다.

    “체, 첸하고 이든은요?”

    “이든은 운동, 첸은 마트.”

    “사실 나도 오늘 많이 보고 싶었어요.”

    “난 죽는 줄 알았어. 내가 없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널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 정상이 아닌 건 아는데 그냥 정상이 아닌 채로 살기로 했어.”

    “그럼 안 되잖아요. 오빠도 제대로 살아야 해요.”

    아니, 난 글렀어. 너한테 미치고, 질투에 미쳐서 눈먼 장님으로 살래.

    “내 질투는 지금 불특정 다수인데, 특정한 소수로 만들지 않길 바래. 누군가의 인생을 박살 내고 싶지 않으니까.”

    “쉽게 말해 주세요.”

    “나 말고 다른 남자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물론 첸과 이든은 예외야.”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하얀 살결을 모두 드러낸 채 설우의 아래에 깔린 연이 잠시 쉬는 틈을 타 해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하던 거 마저 해야지?”

    “응, 해주세요.”

    아랫배를 타고 내려가는 겁 없는 손길에 설우가 달뜬 숨을 토해냈다.

    “뭐 하는 거야.”

    “오빠한테 자꾸 배우니까. 배운 건 써먹어야죠.”

    “새끼 오리가 처음 본 게 나라서 참 다행이야.”

    “네?”

    “사랑한다고.”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던 설우의 표정은 작은 손이 움직일 때마다 차츰 일그러져갔다.

    어서 자랐으면 싶다가도 지금보다 요망하고 능글맞아질 다람쥐를 생각하면 벌써 애간장이 녹는 듯했다.

    “오빠.”

    “응.”

    “난 영원히 오빠 거예요.”

    “응, 넌 내 거야.”

    짧게 읊조린 설우가 자세를 바로 세우고 연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갈증이 극에 달한 다급한 움직임이었다.

    ***

    “당장 계약하겠습니다!”

    “나는 연이에 대한 특별 대우를 계약 조건으로 넣을 거예요. 남들과 같은 취급은 안 됩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어쩔 수 없고요.”

    “불가능할 리가 있습니까? 원하는 조건 전부 들어드리겠습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 대우가 돌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죠.”

    젠장, 빌어먹을.

    연과 함께 한민준 대표를 만나러 나온 설우는 입안까지 차오르는 욕을 밀어 넣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연예계에서 탑으로 꼽는다는 소속사 대표가 왜 저렇게 가벼운 건지.

    뭐든 오케이, 를 외치는 주둥이를 톡톡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제가 잘 못할 수도 있어요.”

    “못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연기는 어려울 수 있어요. 타고난 게 아니라면 천천히 배워야 하고, 끝까지 못할 수도 있죠. 하지만 모델은 다릅니다. 연이 씨는 카메라 앞에 앉아만 있어도 그림 같을 거라고요.”

    병원에서 처음 연을 마주치고 했던 생각을 이제라도 전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연이 계약을 원할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민준은 주먹을 쥐고 환호성을 질러도 부족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민준이 상기된 얼굴로 어깨를 들썩일수록 설우는 딱딱하게 굳어져 동상이 될 지경이었다.

    “지금은 증상이 없지만, 완치는 아니에요. 한 대표도 저번에 봤었죠?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을 전부 염두에 둬야 합니다.”

    “계약 내용을 유동적으로 변경할 수 있도록 특별 조항을 넣겠습니다. 이 정도면 안심하실 수 있나요?”

    “…하, 돌겠네.”

    결국 본심이 튀어나온 설우가 고개를 떨궜다.

    “차 사장님이 어떤 부분을 걱정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정 불안하시면 연이 씨 편의를 위한 차 사장님의 월권도 이해하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수용하면서까지 계약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하하! 차 사장님도 참. 제가 아닌 누구라도 이렇게 할 겁니다. 연예계에서 가장 탐내는 건 예쁘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연이 씨처럼요. 아니까 불편하신 거잖아요.”

    연이 원하는 일이라 반대하지 못하는 설우의 속내를 이제야 깨달은 민준이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다. 계약은 이미 결정된 듯싶었다.

    “오빠가 싫다고 하면 안 할게요. 표정이 계속 안 좋아요.”

    “싫은 거 아니야. 오빠가 그, 음…. 계약이 까다로워서 그래.”

    줄곧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음을 깨달은 설우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다만, 차 사장님 아내라는 사실은 숨기고 시작했으면 합니다. 초반부터 괜한 구설에 오르면 연이 씨가 힘들 거예요. 숨길 수 있을까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는 사람 입을 최대한 막아 보도록 하죠.”

    “그럼 결혼한 건 비밀이에요?”

    “데뷔 후 1년 정도는 인터뷰를 잡지 않겠습니다. 묻지 않은 일엔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이든이 그러는데, 저는 키가 작아서 모델을 못 할 거래요.”

    “키 작은 모델도 아주 많습니다. 주얼리나 가방, 화장품 모델, CF 모델도 가능하고요. 패션쇼에 서지 않고 패션 화보만 찍어도 충분합니다.”

    “계약서 준비되는 대로 연락 주시죠.”

    “감사합니다, 사장님. 앞으로 잘 부탁해요, 연이 씨.”

    환하게 웃은 민준이 의자에서 일어나 설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억지로 미소 짓는 차 사장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진 않으니 다음 약속을 잡고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좋은 선택이었다.

    “우리 연이, 잘 부탁합니다. 연락 주시면 제가 직접 준 엔터로 가도록 하죠.”

    “굳이 그러실 필요는….”

    “제가 가겠습니다.”

    “아, 예. 전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가볍게 고개를 숙인 민준이 떠나고 아이스티를 홀짝이는 연의 머리에 설우의 손이 내려앉았다.

    “곧 직업이 생기겠네.”

    “정말 열심히 할 거예요.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하루를 48시간으로 쓰고 싶어요.”

    “하다가 힘들면 솔직하게 말해야 해. 알았지?”

    “그럼요! 절대 억지로 하지 않을게요.”

    찰랑이는 금발을 쓰다듬는 손길에 애틋함이 묻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으니 이제는 순응해야 했다.

    다른 방식으로 네가 가는 길을 닦아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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