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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84화 (84/96)

84화.

연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연이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설우를 기다렸다.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을 흔들며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힐 무렵 하얀색 카디건을 든 설우가 빠르게 다가왔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망울이 그를 따라 분주히 움직였다.

“덥다고 벗지 말고. 알았지?”

“네, 그럴게요.”

카디건을 입히고 단추까지 꼼꼼히 여며준 설우가 한걸음 물러서자 연이 들고 있던 작은 크로스백을 둘러맸다.

“지하에 기사 아저씨 있을 거야. 가고 싶은 곳 말하고 나올 때 미리 전화해야 해. 오빠한테도 전화하는 거 잊지 말고.”

“걱정하지 말아요!”

“뭐 할 건지 말 안 해줄 거야?”

“혼자 하는 첫 외출이잖아요. 비밀스럽고 싶어요. 뒤따라올 가드 아저씨들한테도 절대 묻지 말아요. 위치 추적도 금지예요.”

“아, 어떻게 보내. 나 못하겠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던 설우가 끝내 울상을 지었다. 맞잡은 작은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연의 배웅을 받을 줄만 알았지, 제가 하게 되는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편한 홈웨어를 입은 자신이 화사한 외출복 차림인 연을 마주하고 있는 게 낯설었다. 휴가 전과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괜찮다니까요, 펜던트도 했다고요. 기사 아저씨 기다리겠어요, 그만 갈래요.”

“화장은 왜 한 건데.”

불만 섞인 설우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나름대로 치장하겠다고 파우더를 두드린 얼굴도 섀도우 때문에 반짝이는 눈도 립스틱을 발라 붉은색이 짙어진 입술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습 삼아 해봤어요! 매일 맨 얼굴로 다닐 수는 없잖아요. 숙여주세요, 뽀뽀해 주고 갈게요.”

“알았어.”

순순히 자세를 낮춰준 설우의 목을 끌어안고 쪽쪽, 입술을 부딪쳐 인사를 마친 연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전용 지하 주차장과 집. 단 두 개의 층만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는 지나치게 빠르게 도착해 문을 열었다.

“다녀올게요.”

총총, 뛰듯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연이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펠리체 정문 앞까지만 함께 가자고 해도 싫다, 지하 주차장까지만 가겠다고 해도 싫다, 한사코 거절해 놓고 저렇게 즐거워할 건 뭐람.

보내는 사람 마음 상하게.

“나도 없고, 이든도 첸도 없어. 사람들이랑 안 부딪히게 앞뒤 좌우 잘 살피고, 정말 조심해야 해. 혼자 넘어지면 큰일 나. 응?”

“알았어요. 오빠 나 진짜 가요! 다 놀고 전화할게요.”

“다 놀고? 중간중간 전화를…!”

탕.

가차 없이 닫힌 문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설우가 힘없이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첫 뽀뽀, 첫 키스, 첫사랑? 지금 이 순간엔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연의 첫 외출이 주는 충격과 공포, 걱정과 불안, 대견함과 뿌듯함 그리고 서운함은 ‘처음’이란 단어가 붙은 모든 경험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한꺼번에 휘몰아치는 감정을 겪어보지 않는 자는 감히 공감해서도 안 되는, 평생 그 밖에 모를 마음이었다.

연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시계를 보던 운전기사가 후다닥, 움직여 뒷좌석 문을 열었다.

“저 앞에 탈게요.”

“예? 뒷좌석이 편하실 텐데….”

“아뇨! 앞에 앉아야 밖에도 잘 보이고 좋아요.”

“예, 알겠습니다.”

조수석에 연을 태운 설우의 운전기사 김상원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채로 핸들을 잡았다.

한 번도 혼자 외출한 적이 없는 안주인을 맡게 되니 입이 바싹바싹 마를 지경이었다.

경미한 접촉사고는 물론, 차 안에서 작은 불편함이라도 생긴다면 고용인의 독설과 퇴사를 동시에 맛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

“저는 파라다이스 백화점에 가서 쇼핑하고, 현진호텔로 가서 삼촌을 만나야 해요. 그리고 다음엔 현진그룹 본사에서 엄마를 만날 거고요.”

“네, 수행은 뒤따라오는 가드가 하나요?”

“아뇨. 저 혼자 충분해요! 아침은 드셨어요? 저는 첸이 김치볶음밥을 해줬는데 엄청 맛있었어요.”

“먹었습니다. 아내가 잘 차려주는 편이에요.”

“요리를 잘하세요?”

“예, 지금은 잘합니다.”

“부럽다, 전 정말 못하거든요. 이러다 오빠 밥 한 번 못 해주겠어요. 생일상을 꼭 차려주고 싶은데. 저는 나쁜 아내인 것 같아요. 불쌍한 우리 오빠.”

첫 목적지인 파라다이스 백화점으로 향하는 동안 즐겁게 종알거리던 연이 금세 시무룩해져 눈꼬리를 내렸다.

요리엔 영 소질이 없었다. 첸을 돕겠다고 몇 번 주방에 얼쩡거려 봤지만, 방해만 될 뿐이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하다 보면 다 늘게 되어 있습니다.”

연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거짓말처럼 긴장이 풀린 운전기사가 저도 모르게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좋겠네요. 세상에, 내가 혼자 밖에 있다니.”

“그렇게 신기하세요?”

“당연하죠. 7년, 아니 이제 8년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아주 오랜만이거든요. 잘 돌아다닐 수 있겠죠?”

꽉 막힌 도로와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차창 밖으로 보이기 시작하자 펠리체를 나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외출할 때 즐겨 쓰던 모자가 없는 허전한 머리 위를 매만지는 손이 잘게 떨렸다.

설우의 걱정을 최대한 덜어 주기 위해 웃는 얼굴로 펠리체를 나섰지만, 팔딱팔딱 뛰어대는 심장이 가슴을 두드린다.

“별거 아닙니다, 사모님. 사장님이랑 같이 다니시던 것처럼 편하게 하시면 돼요.”

운전기사의 작은 위로에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려울 게 뭐 있겠어!

첫 외출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미리 동선을 정해 놨고 파라다이스 백화점에서 들려야 할 매장의 위치도 수십 번 곱씹었으니 계획은 흠잡을 데 없었다.

문제는 계획대로 착착 움직일 수 있느냐, 였다.

혼자라는 두려움과 혼자라는 설렘을 동시에 품은 연이 회전문을 통과해 백화점에 들어섰다.

제일 사람이 없는 평일 오전이었지만, 파라다이스 백화점은 하늘을 찌르는 매출의 이유를 증명하듯 꽤 혼잡했다.

설우를 잡고 있어야 할 손을 어디에다 둘지 고민하던 연은 얇은 가방끈을 꼭, 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1층에서는 엄마 향수를 사야 해. 3층에서 이든이랑 첸 옷을 고르고, 오빠 넥타이도 고르고 커프스 버튼을 주문하고… 아! 삼촌 넥타이도 3층에서 골라야지.”

멀찍이 선 가드들은 웅얼거리며 바쁘게 움직이는 연의 뒤를 소리 없이 쫓았다. 만약의 상황을 위한 보호였다.

화장품 매장에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연에게 설우가 걱정하는 만큼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아닌 척 힐끔거리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어서 오세요, 손님. 어떤 제품 보여드릴까요?”

인터넷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고 했던 향수 브랜드를 찾아 들어간 연이 각각 다른 색을 가지고, 다른 병에 담겨 존재감을 뽐내는 향수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선물을 하려고 하는데요. 일단 50대 중반이시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나가는 여성 오너라고 했어요. 자주 웃진 않으시는데 그래도 다정하세요. 우리 오빠, 아니 남편이랑 싸울 땐 조금 무섭고요. 화난 고양이 정도? 이런 분께는 어떤 향이 어울릴까요?”

“아.”

“아?”

연의 눈동자를 정확히 마주하고 한 번, 외국인인가 싶었는데 유창한 한국말에 두 번, 두서없는 이상한 설명에 세 번, 연달아 놀라 말문이 막힌 직원이 어버버 거렸다.

“시, 시어머님 선물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머님이 사업가시고, 화난 고양이 같은 분이시고요?”

“매일 그런 건 아니고요.”

“아, 네. 맨 왼쪽에 있는 이 상품 추천해 드릴게요. 저희 브랜드에서 세 번째로 잘나가는 상품이고요, 향이 매혹적이고 디자인이 깔끔해서 여성분들께 아주 인기가 많습니다. 머스크에 이어서 바이올렛, 재스민 향으로 이어지는데 시향 해보시겠어요?”

“네!”

지금까지 저를 돌봐준 이들을 위한 쇼핑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직원의 추천을 받은 향수도 마음에 들었고 남성복매장에서 이든과 첸에게 어울릴 얇은 니트도 망설임 없이 고를 수 있었다.

설우와 성진의 넥타이까지 고른 연에게 가드 하나가 다가왔다.

“사모님, 무거우시겠어요. 돌아다니기 불편하실 텐데 짐은 주시죠.”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거절할까 잠시 고민했던 연이 밝은 얼굴로 여러 개의 종이 가방을 넘겨주었다.

그다지 무겁진 않았지만, 몇 시간 동안 저만 따라다니는 가드의 성의를 무시하고 싶진 않았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향한 마지막 목적지는 넥타이핀과 커프스 버튼을 주문 제작해 준다는 고급 브랜드였다.

그동안 받아 모은 용돈을 모조리 탕진할 곳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출입구 양옆에 서 있던 직원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허리를 굽혔다. 브랜드 명성에 걸맞은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유명했다.

“안녕하세요. 커프스 버튼을 주문 제작할 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네, 물론입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말에 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커프스 버튼. 입에 붙지 않는 단어 까먹지 않으려고 외우고 또 외운 보람이 있었다.

“와, 예쁜 게 정말 많아요.”

돈이 많았다면 진열된 전부를 사고 싶을 정도로 다양한 모양을 가진 커프스 버튼들이 유리 케이스 안에서 반짝였다.

“네. 동그랗고, 네모난 버튼뿐만 아니라 비대칭으로 깎여진 제품, 사슬처럼 엮인 제품,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제품 등 아주 다양합니다. 어떤 식으로 제작해 드리면 될까요?”

“이거랑 같은 사각형 디자인에 영문 이름을 새겨주셨으면 해요. 넥타이핀도 같이요. 그리고 파란색 보석… 아, 사파이어요! 작은 사파이어를 넣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름은 여기요.”

진열된 제품 중 제가 생각했던 디자인과 가장 흡사한 버튼과 넥타이핀을 가리킨 연은 자신의 영문 이름을 내밀었다.

‘연’이란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선물을 받으면 설우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 궁금했다.

분명 아주 좋아하겠지.

“예, 알겠습니다. 2주 후에 연락을 드릴 테니 다시 방문에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계산은 나중에 하시겠습니까?”

“아뇨, 지금 할게요.”

백화점에서 마지막 일정이자 가장 중요한 일정을 끝낸 연은 상기된 얼굴로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손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게 돈이라더니.

그 많던 ‘0’이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폭풍 쇼핑을 하고 남은 돈이 1,200원이란 걸 확인한 연이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필요한 것만 샀는걸. 전혀 아깝지 않아.”

주먹을 불끈 쥔 연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저게 뭐야?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알록달록한 매장이 보이자 연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커다란 간판에 쓰여 있는 건 분명 젤리, 젤리, 젤리.

홀린 듯 매장 앞으로 다가간 연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펠리체 마트에선 한 번도 보지 못한 수십 가지의 젤리가 매장의 벽을 채우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하이젤리입니다. 혹시 처음 오셨어요?”

“네….”

“아, 여기 보시면 가장 작은 봉투부터 시작해서 가장 큰 600mL 용기까지 크기별로 가격이 달라요. 가격은 아래 적혀 있고요. 위생 장갑 끼시고, 용기 고르셔서 원하는 젤리 담으신 후에 계산하시면 됩니다.”

친절한 설명을 듣고 가격표를 확인한 연이 그 자리에 굳어진 채 울상을 지었다.

가장 작다는 봉투의 가격은 4,000원. 가진 돈은 1,200원. 제 카드로는 절대 살 수 없었다.

영업용 미소를 짓는 직원을 한 번 보고, 멀리 떨어져 서 있는 가드를 한 번 바라본 연이 입술을 삐죽이다 가방을 열어 새카만 카드 한 장을 꺼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사.’

‘괜찮아요! 나도 돈 많아요. 내 돈으로 다 할 수 있어요.’

‘그래도 받아. 사람은 비상금이 있어야 해.’

‘음, 알았어요.’

오빠 카드는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젤리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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