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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83화 (83/96)
  • 83화.

    예정보다 일찍 출장지에서 돌아온 설우는 곧장 펠리체 센터로 달려가 연을 꺼내왔다.

    꽃꽂이 수업 도중에 들이닥친 설우가 반가워 벌떡 일어난 연은 빽빽한 수업 일정을 뒤로한 채 그를 따라나섰다.

    집으로 돌아온 지 몇 시간쯤 지났을까.

    후끈한 열기가 들어찬 침실에 널브러진 연은 손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오빤 점점 젊어지는 게 분명해. 나보다 더 격하게 움직였는데 왜 저렇게 멀쩡한 거지.

    무거운 눈꺼풀을 비벼 뜬 연은 멍하니 설우의 옆모습을 관찰했다.

    흐물거리는 저를 씻기고, 말리고, 입히고, 이불 속에 파묻어 놓은 그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로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힘들거나 지친 기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도 할 일이 남은 거예요? 출장을 6일이나 다녀왔는데? 파라다이스는 너무 악덕이에요. 적어도 이틀은 쉬게 해줘야죠.”

    “그 악덕 회사의 사장이 난데.”

    “원래 사장님은 덜 바빠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마지막이야.”

    “뭐가요?”

    “지금 보고 있는 자료 검토만 끝나면 휴가 시작이거든.”

    “휴가요?”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 누워있던 연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같이 밥 먹을 시간조차 없던 그가 휴가라니. 포도 젤리만큼이나 달콤한 소식이었다.

    “이리 올라와.”

    “네!”

    어느새 드러난 하얀 살결을 보고 끄응, 앓는 소리를 낸 설우가 태블릿을 내려놓자 반색한 연이 쭉 뻗은 설우의 허벅지 위에 가로로 앉아 다리를 뻗었다.

    “끈이 다 내려갔잖아.”

    어깨끈이 팔꿈치까지 내려간 얇은 슬립은 가슴의 반을 드러낼 정도로 헐거웠다.

    이미 한바탕 사랑을 쏟아낸 터라 ‘참을 인’ 자를 거듭 떠올리며 어깨끈을 올려준 설우가 아쉬운 대로 짧게 입을 맞췄다.

    “누워있으면 꼭 내려가더라고요. 그건 그렇고 정말 휴가예요?”

    “응, 6개월 장기 휴가.”

    “6, 6개월이요?”

    “반년 동안 종일 잔소리 들을 준비는 됐지?”

    “그럼요! 잔소리 많이 해도 돼요. 세상에 6개월이라니. 너무 좋다.”

    설우의 가슴팍에 마음껏 얼굴을 치댄 연이 눈꼬리를 잔뜩 휜 채로 생글거렸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죠. 저번에 나 우는 거 봤잖아요. 오빠랑 정말 같이 있고 싶었어요.”

    이러니 내가 널 못 놓지.

    살이 오른 볼을 연신 쓰다듬던 설우가 제 팔목을 맞잡아 품속에 연을 가두었다.

    “6개월 동안은 나랑 신나게 노는 거야. 그리고 그 후에 하고 싶은 거 생각해 봐.”

    “하고 싶은 거요?”

    출장 내내 단단히 마음을 먹었건만. 연을 둘러 안은 팔엔 계속해서 힘이 실렸다.

    갑갑해진 연이 바르작거릴수록 핏대가 불거진 팔은 그녀를 옭아맸다.

    내어놓겠다는 다짐과 정반대로 튀어나오는 행동이 우스웠다.

    “못다한 공부를 해도 좋고, 꽃집을 차려줄 수도 있어. 아기자기한 카페도 괜찮을 거 같고.”

    “갑자기 왜요?”

    “내 다람쥐가 건강해졌잖아. 이제 나랑 이든, 첸 없이도 밖에 돌아다녀야 해.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것을 해봐야지. 갇혀있는 동안 못 했던 것들.”

    “다, 다른 사람들처럼요?”

    “응. 네가 부러워하던 길거리에 사람들처럼. 이제 너도 그렇게 살 수 있어.”

    “내가 잘할 수 있을까요?”

    불안한 손길이 설우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젓가락질조차 버거워했던 제가 세상에 나갈 수 있을까 두려웠다.

    “무서우면 그냥 지금처럼 살아도 돼. 오빠가 다 알아서….”

    미친, 뭐라는 거야.

    “네?”

    “아니, 아니야. 잘할 수 있어, 연아. 우리가 많이 도와줄 거고.”

    “흐음, 사실 오빠랑 지내면서 해보고 싶다고 느꼈던 게 몇 가지 있었어요.”

    “뭔데?”

    설우의 진지한 물음에 발갛게 물든 볼이 움찔거렸다.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던 걸 말하려고 하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달싹거리는 입술을 문질러주며 답을 재촉한 설우가 다정한 손길로 연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말해 봐. 네가 하고 싶다는 건 다 해줄 수 있어.”

    “해보고 싶은 게 뭐였냐면요.”

    처음 장래 희망을 발표하는 초등학생처럼 한껏 상기된 연이 한 가지, 한 가지, 하고 싶었던 일들을 꺼내 놓았다.

    연의 말에 한껏 귀를 기울였던 설우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굳어지다 못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출장에 다녀오기 전과 같이 홈바 테이블에 앉은 설우를 또다시 발견하게 된 첸은 헛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무시하려다 이든을 불러왔다.

    “꼬맹이는?”

    “재웠어.”

    “나 이 대사 며칠 전에 들었던 거 같은데.”

    바닥을 드러낸 위스키병 역시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거라면 캔맥주 대신 새 위스키 뚜껑을 열고 있다는 것 정도?

    “무슨 일 있어?”

    “연이가 많이 좋아져서 이제 혼자 돌아다니게 해야 하잖아. 하고 싶은 것도 찾아야 하고.”

    “그렇지. 아직 불안하긴 하지만,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위험한 증상은 대부분 사라졌으니까.”

    이든의 옆자리에 앉아 온더록스 잔을 건네받은 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의 홀로서기는 첸과 이든에게도 아쉬운 일이었지만 연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공부를 하거나, 꽃집을 하거나, 카페를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거든.”

    “괜찮네! 꼬맹이 꽃꽂이 좋아해, 실력도 좋고. 플로리스트 선우연. 너무 잘 어울리는데?”

    “공부랑 같이하면 되겠다. 대학은 안 가더라도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학위까진 받아야지.”

    “해보고 싶은 게 있다더라고.”

    “정말? 잘 됐다. 그럼 연이가 하고 싶은 걸 시켜야지.”

    “맞아. 꼬맹이가 해달라는 건 뭐든 다 해줘야 해.”

    첸과 이든이 비슷한 말로 답하며 눈을 반짝였다.

    온실 속 화초로 고이고이 돌봐온 여동생이 하고 싶은 게 있다니. 관심이 가는 게 당연했다.

    연이가 하고 싶은 건 뭐든 시켜야 한다.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을 착잡하게 보던 설우가 연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처음 오빠를 만났던 가게 있잖아요. 엄청 고급스러웠던. 거기 사장님을 해보고 싶었어요!’

    ‘거기 술집인데.’

    ‘네, 알아요. 엄청 비싸고 넓고 좋은 술집.’

    ‘…….’

    “제이 사장을 하고 싶다네.”

    “뭐,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입을 쩍, 벌린 이든이 안주로 꺼낸 연의 스트링 치즈를 테이블로 떨어뜨렸다. 도르르 굴러간 치즈는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안 된다고 했지? 무조건 안 된다고 해! 우리 꼬맹이한텐 너무 위험하다고.”

    “안 된다고 했지.”

    “잘했어. 하고많은 것 중에 왜 제이를 골라.”

    “제이로 도망쳐 왔을 때 너무 좋아 보였나 봐. 생전 처음 본 공간이었을 테니까.”

    “어쨌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쪼끄만 게 어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든이 치즈를 주워 입에 넣었다. 짭짤한 안주는 술맛을 돋우기 좋았다.

    “그다음에 하고 싶었던 건 모델이래.”

    “모델?”

    “연이랑 현진 호텔에서 같이 쇼핑했잖아. 그때 걸어 나오는 모델들이 멋있어 보였다나?”

    “꼬맹이는 작아서 안 될걸.”

    “쇼에 서는 거 아니면 작아도 할 수 있긴 하지.”

    “그리고 마지막은, 한서준.”

    “한서준? 한서준이면, 설마 배우?”

    스트링 치즈는 다시 바닥을 굴렀다. 이제 막 술을 넘기던 첸은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응.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대단하대. 자기도 TV 속에서 이제 막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면 너무 신기할 거 같다고.”

    “진짜 종잡을 수가 없다. 기껏해야 만화책방 사장님 정도나 하고 싶어 할 줄 알았더니.”

    “큰일 났네, 차설우.”

    “한민준 대표가 연이한테 명함 준 적 있다며.”

    “아, 병원에서. 그건 내가 받았지. 꼬맹이가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할 필요도 없었고. 설마 그걸 기억해?”

    “응. 그땐 연락 달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는데 이제 알겠단다.”

    “근데 연이는 밖에 조금만 돌아다녀도 그런 명함 수두룩하게 받을걸.”

    “그건 인정. 괜히 길거리에서 사기꾼한테 당하는 것보단 신원 보장된 한 대표가 낫지.”

    스트레이트 잔에 담긴 독한 위스키를 입속으로 털어 넣은 설우가 홈바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하, 젠장. 하고 싶은 게 왜 다 저 모양이냐고.”

    “아, 나 이 장면도 본 거 같은데.”

    좌절하는 설우를 보며 첸이 이죽거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방지축을 품은 후로 정신을 못 차리는 친구를 구경하는 게 은근히 재미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냥 재미로 배워 보고 싶은 거겠지. 꽃꽂이, 골프, 도예 등등 잘하건 못하건 꼬맹인 뭐든 배우는 걸 좋아해.”

    “그래, 이것저것 해봐야 적성에 맞는 걸 찾지. 연이한텐 뭐라고 했어?”

    “절대 안 된다고.”

    “그랬더니 연이가 뭐라는데. 알겠대?”

    “뭐든 다 해준다는 소리는 왜 하냐고 투덜거리지. 어쨌든 다른 걸 더 생각해 보겠대.”

    동시에 팔짱을 낀 첸과 이든이 쯧쯧, 혀를 찼다. 반대하는 이유가 눈에 훤했다.

    “제이는 나도 반대지만 한 대표한테 연락은 한 번 해보지 그래? 연이가 처음 하고 싶다고 말한 거잖아.”

    “그래. 형이 못하겠으면 내가 할게.”

    “아냐, 내가 해.”

    인상을 잔뜩 구긴 설우가 연거푸 술잔을 비워냈다.

    속이 쓰렸다. 한 대표에게 연락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을 거라고. 이미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려댔다.

    “형, 나 이상해.”

    두 번째 스트링 치즈의 껍질을 벗기던 이든이 눈을 번뜩이며 첸의 팔목을 잡았다.

    “뭐가.”

    “꼬맹이가 왠지 잘할 거 같아. 일단 외모가 최강이야, 아무도 못 이기잖아? 근데 쟨 대놓고 자길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면 낯도 안 가려. 종알종알 잘도 떠들지.”

    “맞아. 거기다 지나치게 잘 웃고, 잘 울어. 표정은 또 좀 많아? 수십 가지는 훌쩍 넘을 거야. 감수성이 풍부하면 연기도 잘한다던데.”

    “올해로 25살이니까 나이가 많은 편도 아니고, 심지어 동안이지. 그리고 너무 사랑스럽잖아. 다른 사람 눈에도 분명 그렇게 보이겠지?”

    “입 좀 다물어.”

    첸과 이든을 번갈아 노려보다 일어난 설우가 급격히 피로가 몰려드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침실로 향했다.

    꼭꼭 숨겨둔 다람쥐를 풀어 놓을 생각에 벌써 예민의 끝을 달리는 그였다.

    조용히 침실로 들어간 설우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의 고사리 같은 손을 쥐었다.

    첸과 이든에게 말한 대로 한민준 대표에게 연락을 넣어봐야지, 하다가도 금세 거부감이 밀려들었다.

    그쪽에서 덜컥, 계약이라도 하자고 하면 어쩌지.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도 있는데. 높게 솟은 건물을 사달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많은 것 중에 비즈니스 바의 사장이 웬 말이며, 모델에 배우라니.

    씁쓸한 위스키 향이 맴도는 입에서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너 진짜 미워.”

    이유 없이 찡긋거리는 연의 콧잔등을 꾹, 누른 설우가 붉은 자국이 완전히 사라진 팔목에 입술을 대었다.

    타들어 가는 남편의 속은 모른 채 쌕쌕, 잘도 자는 연을 한참 지켜보던 설우는 단 한 번도 제 바람을 들어준 적 없는 빌어먹을 신에게 마지막 기도를 시작했다.

    도저히 사진을 찍을 수 없을 만큼, 카메라 앞에서 한 걸음 떼지도 못할 만큼 재능이 없기를.

    내 행복과 불행을 모두 쥔 천사가 제발, 이름 모를 다른 사람의 천사가 되지 않기를.

    ***

    6개월의 휴가가 시작된 설우는 잠시도 연과 떨어지지 않았다.

    첸, 이든과 함께 두 달간의 전국 일주를 마친 설우와 연은 곧장 제주도로 향했고, 리조트 안에서 꼼짝 않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4월의 초입, 활짝 열린 테라스 창을 통해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이 포근했다.

    푹신한 이불과 설우의 너른 품에 완전히 파묻힌 연이 먼저 잠에서 깨어 꼼지락거렸다.

    세차게 저를 짓누르는 가슴을 퍽퍽 두드리자 설우가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지었다.

    “…왜 때려.”

    “숨 막히잖아요. 빨리 비켜요.”

    “싫어, 더 안고 있을래.”

    “꽁꽁 묶여 있는 기분이라고요.”

    “꽁꽁 묶어두고 싶은걸.”

    뻐근한 상체를 일으킨 설우가 작은 얼굴을 감싸 쥐고 마구잡이로 입을 맞췄다.

    “으아아…! 아침마다 이럴 거예요?”

    “예전에는 해달라고 조르더니. 벌써 사랑이 식은 거야?”

    “오빠가 날 끼고 사는 걸 생각하면 그런 말 못 할 거예요.”

    “사랑해.”

    짧은 고백이 지나고 다시 뽀뽀 세례가 쏟아지자 연이 결국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설우를 다치게 하지 않는 아침, 꿈을 꾸지 않은 아침.

    온전한 정신으로 눈을 뜨고 있는 아침.

    그리고 그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으며 깨어나는 아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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