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커다란 캐리어에 옷을 담는 설우를 가만히 지켜보던 연이 슬그머니 움직여 너른 등에 기대었다.
목에 팔을 건 연이 달라붙어 안기자 분주히 움직이던 설우의 손이 멈췄다.
“캐리어에 넣어서 데려갈까?”
“아뇨, 구겨지고 싶지 않아요.”
“푸흐, 미안. 같이 갈래?”
“지금까지 잘 참았잖아요, 괜찮아요.”
“꾸역꾸역 참다가 터졌지.”
제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쪽쪽 빨아대는 연을 정면으로 당겨온 설우가 가볍게 키스했다.
녹지 않는 사탕 취급은 좋으면서도 곤란했다.
“외국은 아직 위험해요. 비행기는 불편할 거고, 난 분명 시차 적응이 힘들 거예요. 낯선 곳에 가면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온 규칙적인 생활은 망가질 거고, 그럼 난 또 아플지 몰라요.”
오빠랑 떨어지는 건 죽을 만큼 싫지만 어쩔 수 없다고.
설우가 출장을 갈 때마다 연은 ‘내가 외국에 갈 수 없는 이유’를 꾸준히 찾아내 허해진 마음을 달래곤 했다.
“싱가포르랑 시차는 겨우 1시간이지만 네 말이 맞아. 혼자 위로할 핑계를 제법 잘 찾았네.”
“멀리 가서 내가 아프면 오빠가 힘들 테고, 힘든 오빠는 일을 못 할 테고, 나는 남편 일을 방해하는 못된 아내가 되고 말 거예요.”
설우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연은 저와 같은 장미 향이 풍기는 너른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면 들리는 불규칙한 심장 소리가 좋았다.
“최대한 빨리 올게, 너랑 떨어져 있는 거 나도 정말 싫어. 영상통화를 해도 만질 수가 없으니 이건 뭐. 너무 보고 싶어서 일부러 전화를 안 한 적도 있다고.”
“보고 싶으면 전화를 해야죠.”
“전화했는데 네가, 오빠! 언제 와요? 라고 물으면 지금 당장 가겠다는 말이 막 튀어나오려고 하거든. 일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어져.”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아주아주 오래 살아야겠어요.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견디지 못하고 말라죽을 게 분명해요.”
“알면 아프지 마, 난 문제없어. 그건 그렇고 손은 좀 밖으로 꺼내지?”
말라죽는 얘길 하는 와중에 몸을 이렇게 더듬는 이유가 뭘까.
설우의 허리를 감았던 하얀 손은 니트 속을 열심히 헤엄쳐 다니는 중이었다.
탄탄한 복근을 지분대던 손가락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튀어나온 갈비뼈를 오르내렸다.
살 아래로 곧장 만져지는 정돈된 뼈가 주는 새로운 감각에 푹 빠진 연은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손에서 느껴지는 촉감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빤 뼈도 잘생긴 거 같아요. 잘난 남편을 두는 건 힘든 일이네요. 얼굴이 잘생겨서 뽀뽀하고 싶고, 몸이 잘생겨서 만지고 싶고. 뼈가 잘생긴 건 어쩌지. 볼을 비비면 느낌이 좋을 거 같기도 해요. 해봐도 돼요?”
“잠깐 떨어져 봐.”
제 몸을 주무르는 연을 살짝 밀어낸 설우가 두 손으로 니트를 잡아 훌렁, 벗어던졌다.
하고 싶다면 또 하게 해 줘야지.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 몸을 감상하던 연이 그의 맨살에 달라붙어 볼을 문질렀다.
동그란 눈망울에 현혹돼 일단 옷을 벗어주긴 했다만.
입고 있던 니트보다 보드라운 살결이 복부를 간지럽히니 절로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장기 휴가를 쓰면 여기저기 돌아다닐 생각이었는데.
한 달 정도는 제주도 리조트에 처박혀 뒹굴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오빤 딱딱하고 커요.”
“넌 말랑하고 작으니 천생연분이지.”
“오빠도 따라 하려고요?”
짐을 싸는 것을 포기한 손이 톡톡, 얇은 잠옷의 단추를 풀었다.
미끄러운 실크는 연이 벌떡 일어나자 어깨너머로 손쉽게 내려갔다.
“왜?”
뜬금없이 일어서는 연을 따라 설우의 고개가 들렸다.
“내 배랑 놀기 편하라고요. 나는 숙이면 가능한데 오빠는 커서 안 되잖아요.”
“네 배랑은 조금 있다가 놀게.”
“우앗!”
연의 엉덩이 아래를 받쳐 번쩍 들어 올린 설우가 아일랜드 서랍장 위에 그녀를 올려두고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설우의 가슴팍이 한 뼘 가까워질 때마다 연의 몸이 서서히 뒤로 기울었다.
“여기선 안 했지?”
“여기 앉아서 오빠의 벗은 몸을 수없이 봤지만, 하진 않았어요.”
“조심해. 머리 부딪히지 않게.”
서랍장의 끝자락에 대롱대롱 걸려있는 무릎을 벌리며 가는 다리 사이로 들어간 설우는 서늘한 통유리에 등을 맞대느라 찌푸려진 연의 눈가에 혀를 눌렀다.
“이 서랍장은 이런 용도로 만든 게 아닐 거예요, 차가워.”
“당연하지. 그래도 다이닝룸보단 낫지 않아?”
“오빠가 밥 먹다가 달려들 줄은 몰랐어요.”
“네가 밥 먹으면서 날 만졌잖아. 세 번씩이나 경고했다고.”
못된 손버릇을 두고 누굴 탓하는 거야.
시도 때도 없이 입과 손을 대는 버릇을 고칠 수 없으니 세 번의 경고 후 잡아먹는 것을 택한 그였다.
어디가 좋을까.
하얀 살결을 훑으며 골똘히 생각하던 설우가 쇄골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여린 살을 선택했다.
“아흐, 아파요!”
느긋하게 살살, 오물거리던 입술이 말랑하게 감겨드는 살을 깊이 머금고 빨아들였다.
“참아. 진하게 새겨놓고 갈 거야.”
출장에서 돌아올 때까지 없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설우의 입술은 집요했다.
남은 옷가지들이 드레스룸 바닥으로 떨어지고 시작된 긴 관계가 이어지는 동안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가도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와 진한 색을 입혔다.
끼익, 끼익. 서랍장이 내는 불쾌한 소리가 달뜬 신음에 묻혀 사라졌다.
연의 살결에 붉은 자국이 덧씌워질 때마다 설우의 눈동자에 서린 수십 가지 감정도 한층 짙게 스며들었다.
“으, 오빠. 오빠아….”
끝을 모르고 격해지는 몸짓이 버거운 연이 시트를 움켜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몇 번이나 자세를 바꿨는지 알 수 없었다.
드레스룸에서 침실로 나온 기억조차 희미했다.
설마 일주일 치를 몰아서 하는 걸까.
축축이 젖은 몸이 흐물거렸다. 멍해질 정도의 쾌락에 지친 연이 아릿한 고통을 호소하며 울먹였다.
“…흐으.”
어쩔 줄 모르고 흔들리던 금빛 눈동자가 사라지자 머릿속을 녹일 듯 차오르던 열기가 잦아들었다.
“아파? 미안, 미안해.”
깊게 팬 미간을 발견한 설우가 우뚝, 멈춰서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아, 아니에요! 나 괜찮아요.”
관계를 하면서 연이 몸부림치거나 눈을 감은 적은 많은 적은 많았지만,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저를 위해 억지로 견디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자괴감이 스멀스멀, 발끝을 타고 올랐다.
최근 관계에서도 연이가 저런 표정이었나? 색욕에 눈이 멀어 내가 눈치채지 못했던 건가?
“아냐, 피곤하겠다. 먼저 씻어.”
“정말 괜찮은데. 오빠 아직 부족….”
“얼른.”
연을 욕실로 밀어 넣는 설우는 후두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연의 건강이 나아진 후에 지나치게 몰아붙인 감이 없진 않았지만, 정말 더러운 변태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정신 좀 차리자, 차설우.
괜스레 목덜미를 주무른 설우가 고개를 떨궜다.
연을 만나고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
처음 하는 사랑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위스키를 한 병을 순식간에 비운 설우가 바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착잡한 숨을 뱉었다.
“연이는?”
“재웠어.”
“왜 혼자 마셔, 이든이라도 부르지.”
필요한 서류를 찾으러 서재로 향하던 첸이 혼자 앉은 설우의 맞은편으로 다가왔다.
“아니, 혼자 먹어도 돼.”
“어울리지도 않는 청승을 떨고 있어. 연이가 뭐 잘못했어? 혼내고 나온 거야?”
“보통 이럴 땐 싸웠냐고 묻지 않나.”
자조 섞인 답을 들은 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야 너희 둘은 싸움이라는 단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조금 특별한 연인이니까.
“연이가 너랑 어떻게 싸워.”
“어려워.”
“뭐가.”
“전부.”
“원래 쉽다가도 어렵고, 어렵다가도 쉬운 게 사랑이래.”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기세로 잡아당기던 설우가 바닥을 드러낸 위스키병을 치우고 캔맥주를 들이켰다.
숙취에 꽤 시달릴 조합이었다.
“오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생명체를 엄마라고 생각한다잖아. 눈앞에 고양이가 있으면 고양이가 엄만 줄 안대.”
“연이가 오리는 아니지.”
“도망쳐 나와 처음 만난 게 나라서 나를 사랑하는 건가?”
“이렇든 저렇든 널 사랑하는 건 맞잖아.”
“첸.”
“왜, 미친놈아.”
“난 진짜 저 작은 걸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동감.”
“제멋대로 구는 듯하다가도 온갖 눈치는 다 보고. 웃음은 또 왜 저렇게 헤프고 눈물은 왜 저렇게 많은지. 나이는 왜 나보다 10살이나 어리대? 그리고 살은 왜 안 쪄. 왜 저렇게 작냐고!”
“취했냐?”
“왜 가만히 있어도 사랑스러워서 사람을 못 견디게 만드냐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젠장. 혼자 애걸복걸 환장하겠다, 아주.”
쿵, 쿵. 바 테이블에 이마를 찧는 설우를 어이없게 보던 첸이 맥주캔을 집었다.
“하루 이틀이야? 연이 오고 나서 쭉 그랬어, 너. 이제 와서 왜 이래.”
“그냥 오늘따라 내가 더 등신 같아서.”
진짜 미친놈인가.
“뭐가 문제야?”
“쟨 내 몸을 좋아하고 내 얼굴도 좋아해. 너도 좋아하고, 이든도 좋아하지. 종종 나보다 너희를 더 반겨. 그리고 한서준을 못 끊어. 그 망할 드라마! 하아, 내 집무실보다 센터를 좋아하는 날도 있어. 이건 진짜 자존심 상하는데.”
“뭔데.”
“나보다 포도 젤리를 더 찾을 때도 있다고. 나밖에 모르는 척하면서 나만큼 좋아하는 게 많아.”
너 맞구나? 미친놈.
첸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랑에 눈이 멀면 저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게 되는 걸까.
“포도 젤리에 질투하냐?”
“아니. 내 세상은 전부 연인데. 연이 세상엔 나 말고도 다른 게 많은 거 같아서 억울하다는 뜻이었어. 문제는 앞으로 연이가 자라면서 더 많아질 거란 거야. 난 분명 뒷전으로 밀리겠지.”
“나 여기서 뭐라고 해? 늙은 네가 참아? 연이는 못 해본 게 많으니까 네가 참아? 유치한 소리 하지 말고 발 닦고 잠이나 자?”
“그리고 연이는 있지. 밥 먹다가도 날 만져. 자기 전에도 만지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만져. 내가 찰흙이야? 내가 장난감이냐고.”
“못 만지게 해, 그럼.”
“못해, 난 못해. 그 예쁜 눈을 보고 화도 못내, 이젠. 나 진짜 어떡하지. 이거 병인가?”
“어, 맞는 거 같다. 병.”
‘ㅅ’ 발음이 들어가는 한 글자를 참아낸 첸은 남은 맥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이든이 있었으면 배를 잡고 웃었을 설우의 주정이었다.
술기운이 올라 비틀거린 설우가 더운 숨을 뱉으며 연의 머리맡에 앉았다.
“연아, 자?”
“….”
“너한텐 나밖에 없는 걸 아는데. 그걸 아는데도 난, 아직도 네 사랑이 부족해.”
세상 물정은 쥐뿔도 모르는 어린 아내가 주는 불안감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푹신한 베개에 파묻혀 흩어진 금발과 작고 하얀 얼굴, 앙증맞게 솟은 코와 생기 넘치는 붉은 입술.
나만 알고 싶은 아름다운 눈동자까지.
연은 매번 제게 잘생겼다 말하지만, 지나가던 사람들이 넋을 놓고 돌아보는 건 정작 그녀였다.
원할 때 이혼해 주겠단 약속은 무슨 생각으로 한 거지. 진짜 이혼 해달라면 어쩌려고.
앙증맞은 다람쥐의 삶에 남자는 나 하나였는데.
나만큼 잘생기고, 몸 좋고, 찰흙이나 장난감으로 삼을 수 있는. 살결이 달콤한 사탕 같은 자식이 나타나면 어쩌지.
“으음, 오빠아….”
“깼어?”
“술 마셨어요?”
“응, 다시 씻고 올게.”
짙은 위스키 향을 털어 내려 일어서는 설우의 손가락을 잡은 연이 졸린 눈을 깜빡였다.
“아까 정말 싫은 거 아니었어요.”
힘들긴 했지만.
“알아.”
“빨리 씻고 와요, 오늘은 오빠 위에서 자야겠어요. 같은 시간에 눕는 게 얼마 만인지.”
“그래.”
윤 교수의 말처럼 잠복기에 접어든 것일지라도 연의 병증이 사라진 건 아주 기뻤다.
정말, 진심으로.
하지만….
욕실로 들어선 설우가 거울 앞에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싫어, 싫다고.”
꿈속에 갇혔던 그리고 펠리체에 갇혔던 연이 마침내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었다.
두서없는 술주정의 이유였다.
저만 졸졸 따라다니는 새끼 오리를 밖으로 내보낼 자신이 없었다.
비틀린 욕심인 걸 알지만 나만 알고, 나만 보고, 내 품 안에만 두고 싶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산산이 부서질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