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81화 (81/96)
  • 81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설우는 심리상태가 불안정할수록 수면장애가 심해지는 것을 핑계로 연에게 또 한 명의 의사를 붙였다.

    그렇지 않아도 병원을 꺼리던 연은 과거 박은주 교수의 일로 정신과 의사를 유달리 불신했지만, 설우의 결정을 바꿀 수는 없었다.

    상담을 마치고 나온 연이 뾰로통한 얼굴로 설우의 손가락을 쥐었다.

    “나는 병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인가 봐요. 검사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상담이라니. 정말 별거 안 했어요, 쓸모없는 그림이나 그렸다고요!”

    오빠랑 붙어있는 시간을 상담 따위에 내버리다니.

    불만 가득한 중얼거림을 흘려듣던 설우가 가볍게 날리는 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안정적인 상태일 때 계속 유지해야지. 또 나빠지면 어쩔 거야.”

    “나빠지면 다시 묶여야죠. 오빠가 마음 아파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번엔 묶일 거예요. 옴짝달싹 못 하게 꽉! 저번에도 말했지만, 묶여서 자는 거 오빠 생각만큼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싫어.”

    “아프지도 않다니까요. 저번에 쓰던 건 좀 흐물거리니까 이번엔 딱딱한 걸로….”

    “선우연.”

    이 사나운 목소리는 그만두지 않으면 화를 내겠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제가 원하는 건 전부 들어주는 척, 항상 져주는 척하지만, 결국엔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없었다.

    착한 척하는 고집쟁이 같으니라고.

    “아, 알았어요, 그만할게요.”

    아래로 깔리는 중저음이 들려오자 금세 풀이 죽은 연이 눈치를 살피며 설우에게 조금 더 달라붙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꼭 버려질 거 같아서. 시간이 꽤 지났지만, 깊숙이 뿌리내린 불안은 고쳐지지 않았다.

    정신과 상담이 필요한 이유였다. 무조건적인 사랑만으로 고칠 수 없는 게 있으니까.

    잔뜩 쪼그라든 어깨를 감싸 안은 설우가 딱딱한 표정을 풀었다.

    연에게 더는 무서운 사람이 되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오랫동안 함께해 온 습관과 성격을 바꾸는 건 쉽지가 않았다.

    고압적인 분위기와 엄격한 통제 본능은 시간이 갈수록 더 자주 튀어나와 연을 겁먹게 했다.

    “미안, 너무 무섭게 불렀네.”

    “아, 아니에요! 겁먹은 거 아닌데.”

    “말이랑 행동이 안 맞아. 겁먹은 거 아닌데 왜 자꾸 달라붙어.”

    “그냥 붙어있고 싶어서 그런 거뿐이에요. 요즘 오빠가 너무 바빠서 나랑 같이 못 있어 주니까요.”

    평소엔 앙칼지게 뻗은 눈꼬리가 힘없이 처져 있었다.

    파라다이스가 CH에서 분리된 후 설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현진과 M&A가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CH라는 이름 아래 받았던 신뢰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초반에 흔들림 없는 모습, 아니 더욱 성장하는 모습으로 그 신뢰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자잘한 사업까지 직접 나서 관리했다.

    빼곡한 회의 일정으로 더는 연을 집무실에 데려가지 않았고, 잦은 야근은 물론 잦은 출장으로 펠리체를 비우기 일쑤였다.

    서운한 마음을 누른 채 꾹 참고 있었는데. 열흘 만에 간신히 얻어낸 시간을 시답지 않은 상담에 쓴 걸로도 모자라 혼날 뻔했다.

    함께 하지 못한 날을 헤아리다 괜스레 서러워진 연이 눈을 마구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내일부터 또 출장이네. 일주일 정도 걸릴 거야.”

    설우는 대수롭지 않게 소식을 전했지만, 연은 순간 눈물을 왈칵 쏟아낼 뻔했다.

    내가 예전처럼 아프지 않아서 그럴까.

    설우가 제게 무심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오빠의 사랑이 예전보다 작아졌나 보다. 그래도 어린애처럼 떼쓰지 말아야지.

    나한테 질릴지도 몰라.

    “이번엔 어디로 가는데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은 연이 버릇처럼 쥐는 손가락을 놓았다.

    “싱가포르. 선물 사올게.”

    이든이랑 첸이 사 온 선물도 아직 다 못 풀어봤는데. 그런 선물은 이제 필요 없는데.

    속마음과 다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주차장으로 나가니 함께 오지 않았던 이든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 이든?”

    “상담 잘 받았어?”

    “네, 뭐. 이든은 갑자기 왜 왔어요? 다 같이 점심 먹으려고요?”

    “아니, 급하게 회의가 잡혀서. 이든이랑 점심 먹고 펠리체로 들어가.”

    “오빠는 같이 안 먹고요?”

    “응, 미안. 골고루 먹이는 거 잊지 마, 이든. 얼른 가. 배고프겠다.”

    최근엔 사랑한다는 말보단 미안하다는 말이 잦았다. 그만큼 일에 파묻혀 사는 그였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던 연이 터덜터덜 조수석에 올랐다.

    인사도 없이 가는 뒷모습을 그저 귀엽게 바라보던 설우가 시간을 확인했다.

    “꼬맹이 삐진 거 같은데?”

    “네가 잘 달래줘, 급한 안건이라 어쩔 수 없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최대한 빨리 정리해야지.”

    연이랑 놀려면.

    여름이 오기 전에 끝내야 꽃구경도 좀 다닐 텐데.

    현진그룹과 M&A를 체결하고 갑작스러운 계열사 분리에서 야기된 혼란을 정리한 후에 6개월쯤 장기 휴가를 쓸 생각이었다.

    연을 첸과 이든에게 맡긴 채 미친 듯이 일만 하는 이유였다.

    “이든 빨리 가요, 나 배고파.”

    “아, 그래.”

    차창을 내린 연이 고개를 내밀고 이든을 불렀다. 설우가 손을 흔들어 인사했지만, 제 할 말을 마친 연은 곧장 창문을 올렸다.

    “가.”

    연의 붉어진 눈가를 보지 못한 설우는 픽, 웃으며 이든을 보내고 다른 차에 올랐다.

    감정에 무딘 편인 설우는 ‘사랑이 작아졌다’라는 생각까지 할 만큼 상한 연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자신이 없어도 첸, 이든과 신나게 논다고 여겼고, 무던히 잠도 잘 자고 저를 많이 찾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심했다.

    바쁜 부모님에게 투정을 부리는 아이가 되고 싶지 않아서, 어린 아내가 아닌 어른 아내가 되고 싶어서 참고 또 참고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든이 차에 올랐지만, 연은 한 곳만 응시한 채 조용히 앉아있었다.

    “뭐 먹을래?”

    “우…. 으, 우윽. 흐어엉. 이든, 끅…. 오빠, 으윽, 오빠랑 점심 먹고 싶었는데. 후으윽!”

    쌓이고 싸인 설움이 결국 터져버렸다.

    백미러로 설우의 차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연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두 무릎을 가지런히 모아 세운 연은 연거푸 눈물을 닦아내며 코를 훌쩍였다.

    “푸흡!”

    아, 우는 애 보고 웃으면 안 되는데.

    서럽게 우는 연을 보고 삐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잡은 이든이 창문을 끝까지 내리고 휴대 전화를 쥔 손을 멀찍이 내밀었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동영상이 찍히기 시작했지만, 연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쩐지 잘 참는다고 했지.

    설우가 보고 싶다고 종일 노래를 부르는 연은 퇴근 후 돌아온 설우 앞에선 입을 닫았다.

    피곤해 일찍 자겠다는 그에게 흔쾌히 인사를 하고, 이른 아침 사라지는 그를 아쉬워하면서도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제가 힘들어하는 걸 설우에게 말하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처음으로 들어주고 있던 이든은 울적해하는 연이 최근 식욕까지 줄자 슬슬 이야기를 전해야지 싶었다.

    물론, 귀여우면서도 불쌍한 오열 영상으로 전하게 될 줄은 몰랐다.

    “우으, 오, 오빠랑 언제 밥을 먹었는지 생각도 안 나는데, 흐엉.”

    “그렇게 서운했어? 차라리 말을 하지. 그럼 형이 먹어줬을 텐데.”

    “일하는 데 방해하기 싫어서, 후으으. 윽, 자꾸 그러면 오빠가 성가셔할까 봐요. 이제 예전처럼 아프지도 흐윽, 아, 않으니까.”

    “크흡, 푸흐. 내가 형한테 말해줄까?”

    “안 돼요! 절대 말하지 말아요. 울었다고도 하지 말아요! 이, 이든 오빠가 이제 날 조금만 사랑하는 거 같아요. 으어엉, 훌쩍.”

    “그럴지도 모르지. 사랑은 영원한 게 아니니까.”

    설우가 듣게 되면 욕을 퍼부을만한 대답이었다. 부러 연을 부추긴 이든이 점점 커지는 울음소리와 빨개진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띠링.

    시트 위에 쪼그려 앉아 무릎 사이로 고개를 숙인 모습을 마지막으로 촬영을 마친 이든은 업로드한 영상을 재빨리 설우에게 전송했다.

    영상을 확인하고 다급히 차를 돌릴 설우가 눈에 훤했다.

    -흐어어엉.

    “하하하! 진짜 미치겠다.”

    커다란 울음소리에 얼굴을 구겼던 설우가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사랑은 영원한 게 아니라며 연을 더 크게 울린 이든의 뒤통수를 세 대쯤 갈겨주리라 마음먹은 설우는 급하게 차선을 바꿔 유턴했다.

    가여운 내 다람쥐. 얼마나 서러웠으면.

    혼자 끙끙 앓았을 연을 생각하니 심장 부근이 따끔거렸다.

    예전처럼 솔직히 말하면 되는데. 저 때문에 급하게 어른이 되려고 하는 연이 안타까웠다.

    네가 뭘 해도 성가시거나 귀찮지 않다고. 돌아가 수십 번쯤 되짚어 주어야겠다.

    -예, 사장님.

    “2시에 잡힌 회의, 출장 이후로 미룹시다.”

    -네? 하지만 M&A 계약 조항에 관련된 회의라. 현진그룹 사업단도 이미 도착했고요. 미루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장님.

    “어려워도 미루세요. 현진엔 제가 연락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정 실장과 통화를 마친 설우가 좀 전에 나섰던 주차장 입구에 도착해 이어셋을 빼냈다.

    [오늘 회의 취소시켰습니다. 처리 부탁드려요.]

    화진에게 하는 짧은 통보였다. 이든에게 받은 동영상과 함께 보냈으니 먹히겠지.

    전송이 완료된 메시지를 확인하며 구석에 그대로 멈춰 있는 이든의 세단 뒤에 대충 차를 세운 설우가 허겁지겁 차에서 내렸다.

    벌컥!

    갑자기 차 문이 열리자 코를 팽, 하고 풀어내던 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빠? 왜 다시?”

    의아하게 설우를 살피던 연이 별안간 이든을 노려보았다.

    오빠한테 말했구나.

    장난기 가득한 이든의 눈동자가 입으로 하는 자백을 대신했다.

    그렇게 당하고도 또 이든을 믿은 제가 바보였다.

    “내가 널 조금만 사랑한다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대,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예요. 오빠 그게 아니라….”

    “동영상 찍어 보냈어.”

    “이든! 아으, 창피해.”

    이든이 가볍게 휴대 전화를 흔들었다. 그제야 두 번 울린 띠링 소리를 떠올린 연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귀여웠어. 효과 짱이지? 형 바로 달려온 것 봐.”

    “아침마다 회사 가지 말라고 붙잡아도 성가시지 않아. 나 좀 데려가라고 투정 부려도 귀찮지 않고. 밤늦게 놀아달라고 졸라도 피곤해하지 않을 거야.”

    “저, 정말요?”

    “당연하지. 난 네가 아무렇지 않길래 정말 괜찮은 줄 알았잖아.”

    “안 괜찮았어요. 오빠 없이 잠들고 일어나면 침대가 너무 넓어서 싫었어요. 센터도 재미없었고, 포도 젤리도 맛이 없었어.”

    “말을 해야 알지, 겁쟁이 다람쥐야. 지레 겁먹고 말도 못 하고. 내려, 밥 먹으러 가게.”

    물기 어린 눈동자를 살며시 쓰다듬은 설우가 연을 일으켰다.

    “나는!”

    “넌 알아서 먹어, 연이랑 둘이 있을 거야.”

    그래, 이렇게 버려질 줄 알았지.

    타앙. 가차 없이 닫히는 차 문을 허망하게 보던 이든이 고개를 저으며 시동을 걸었다.

    연을 태우고 운전석에 오른 설우가 안전벨트를 당겨 매주고 곧바로 주차장을 나왔다.

    “연아, 억지로 어른인 척할 필요 없어. 급하게 하지 말고 천천히 하나씩 하자.”

    15살 때 사고 이후 지금까지. 잃어버린 시간을 뛰어넘고 자랄 필요는 없었다.

    어리광이라고 해봐야 안아달라, 뽀뽀해달라, 가 전부면서. 뭐 하나 부탁할 때도 온갖 눈치는 다 보면서.

    대체 어떤 부분에서 날 귀찮게 했다고 여긴 건지.

    “그럴게요. 고마워요, 오빠. 오늘 점심은 꼭 오빠랑 먹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나 봐요. 울보는 아닌데.”

    “나한테 중요한 건 너밖에 없어, 연아. 회사도, 가족도, 친구도 아니고 딱 너 하나야.”

    “나는 왜 이렇게 겁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날 조금만 사랑한다고 오해해서 미안해요.”

    “그건 미안해해야 해. 내가 널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데.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도 표현이 안 될 정도로 사랑해.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사랑할 거야. 같은 크기로, 같은 깊이로.”

    “너무 예쁘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누가 매번 예쁜 말만 하니까. 나쁜 말만 하는 입에서 자꾸 예쁜 말이 나오네.”

    앞 유리를 뚫고 들어온 오후의 강렬한 햇살이 금안을 비추니 색이 흐려져 투명하게 빛났다.

    차를 갓길에 세우고 두 눈에 입술을 문지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삼킨 설우가 콘솔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작은 손을 잡았다.

    눈물을 쏙 빼낸 눈동자는 여전히 촉촉했다.

    일단 밥부터 먹이고. 다른 욕심은 그 후에 해결해야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