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80화 (80/96)

80화.

공항 면세점에 도착한 이든과 첸은 서로를 견제하며 손을 바삐 움직였다.

“그만하지?”

“형이야말로.”

“면세 한도 있다?”

“세금 내면 그만이지. 형도 면세 한도는 이미 지난 거 같은데?”

매장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는 두 남자의 손엔 연을 위한 선물로 가득했다. 위스키와 담배가 들어있어야 할 쇼핑백엔 여자 향수, 화장품, 가방 등이 전부였다.

미국에 20년을 넘게 살면서도 방문하지 않았던 디즈니 스토어는 물론, 온갖 기념품 상점을 휩쓸고도 성에 차지 않은 둘은 면세점까지 휘젓는 중이었다.

“연이 그런 색깔 안 발라.”

“바르라고 사는 거 아닌데? 그냥 가지라고 사는 거야. 우리가 지금 산 거 반도 못 쓸걸?”

“그건 맞지.”

붉은 계열의 립스틱을 잡은 이든이 첸의 타박을 받아넘기며 바구니에 넣었다.

“따로 찾으시는 제품 있으신가요?”

화장품 매장에 들어와 티격태격하는 첸과 이든에게 다가온 직원이 살갑게 물었다.

늦은 오후. 이미 많은 손님을 맞이해 지쳐있었지만, 훤칠한 외모를 자랑하는 두 남자에게 관심이 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명품이었고 물건을 골라 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외모를 떠나서도 매출을 올리기 좋은 고객이었다.

“립스틱을 몇 개 사려고 하는데요.”

“아, 여자친구분께 선물하시는 건가요?”

누군지 몰라도 부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리 집 꼬맹, 아니 여동생한테 주려고요. 애가 좀 작고, 귀여워요. 얼굴도 하얗고. 먹을 걸 좋아하는데, 특히 포도 젤리를 좋아해요.”

“예?”

“그런 애한텐 무슨 색이 어울리죠? 다 사고 싶긴 한데 그럼 다른 선물을 못 사니까.”

“그걸 설명이라고. 작고 귀여운 건 맞고요, 혼혈이라 머리카락이랑 눈동자가 금색이에요. 금색이랑 하얀색. 그럼 입술엔 무슨 색을 발라야 할까요?”

혼자 히죽거리며 연을 떠올리는 이든보다 나름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인 첸이 어서 답을 달라는 듯 직원을 바라보았다.

귀엽고 얼굴이 하얀 여동생이 있다고 자랑을 하는 건가.

립스틱을 살 때 전혀 필요하지 않은 정보들을 늘어놓는 남자 둘을 번갈아 보던 여직원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아, 금색이랑 하얀색요. 그럼 분홍색 계열이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맞아요, 분홍색! 기분이 좋으면 볼이 분홍색이에요. 복숭아처럼. 그때 볼을 꼬집으면 찰떡같아요. 보들보들하면서 쫀득한 거, 뭔 줄 아시죠?”

“아, 아뇨. 저는 잘 모르겠네요.”

“여동생이 없으신가 보다. 그렇지, 형?”

“그러게.”

이든이 눈썹을 쓱, 추켜올렸다.

귀여운 여동생이 없어 불쌍하다는 눈빛을 태어나 처음 받은 여직원은 황당할 뿐이었다.

여동생도 있고, 오빠도 있었다. 싸울 때 머리채를 잡는 여동생과 용돈을 달라고 졸라대는 백수 오빠.

여동생이 귀엽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는 오빠가 정말 존재하다니. 피를 나눈 관계가 아닐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 꼬맹이 사진 좀 보실래요?”

“하하, 아뇨. 괜찮습니다.”

“한 번 보세요. 이건 오빠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 정말 귀엽습니다.”

주책을 부리는 이든을 말리기는커녕 한술 더 뜬 첸이 호들갑스럽게 휴대 전화를 찾았다.

“저, 정말 괜찮습니다. 여기 앞에 있는 게 분홍색 계열이에요. 가장 잘나가는 제품 순서대로 있는 거니까 천천히 살펴보세요, 그럼 전 이만.”

누가 더 팔불출인지 뽐내는 남자들에게 제품 설명은 불필요했다.

연의 자랑을 듣다 못한 직원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고 열심히 립스틱을 고른 첸과 이든은 구매 한도를 끝까지 채우고 나서야 면세점을 나섰다.

***

파라다이스 본사 로비에서 쫓겨난 연주는 눈에 불을 켜고 설우가 나오길 기다렸다.

터진 입술과 헝클어진 머리, 이리저리 구겨진 옷이 그녀의 현재 처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남자친구인 성원에게 버려진 연주는 갈 곳을 잃었다.

빚을 해결해야 할 상철과 세희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사라졌고, 대부업자들은 연주에게 돈을 요구하며 거친 협박을 일삼았다.

사는 집의 월세를 내지 못했고, 세희의 건물은 경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설우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던 세희의 말이 떠오른 연주는 그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오빠 왜 1층으로 나왔어요? 차 안 타고 가요?”

“찾아온 사람은 만나주고 가야지.”

“미안해요, 오빠. 괜히 나 때문에 회사에까지.”

“괜찮아, 네 잘못 아니잖아.”

“권다미!”

구석진 곳에 앉아 있던 연주가 벌떡 일어나 설우와 연의 앞에 섰다.

권다미. 기억 속에서 잊혀 가던 이름이 또다시 들려오자 매끈하던 설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설우와 함께 있으니 무서운 것이 없는 연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제법 사나운 목소리에 설우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센 척하기는.

“우리 엄마! 우리 엄마 어디 있어!”

“너희 엄마를 왜 여기 와서 찾아.”

“당신이 데려갔지? 우리 엄마 어디 있냐고!”

연주가 악을 쓰자 회사 정문에 있던 가드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설우의 지시가 없으니 별다른 조처를 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여자를 제압할 자세를 잡고 있었다.

“내가 그쪽 엄마를 왜?”

“우, 우리 엄마한테 복수하려고! 엄마는 계속 무서워했어. 당신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아니, 난 그쪽 엄마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뻔뻔한 거짓말을 하는 설우의 입매가 비틀렸다. 제이 지하실에서 굴러다닐 상철과 세희가 떠올랐다.

‘연주, 우리 연주는….’

‘내 알 바가 아니지. 내가 용건이 있는 건 너희 둘이니까. 당신 딸이 밖에서 혼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 그건 그쪽 사정이고.’

빚을 진 장본인이 없어졌으니 그 빚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딸이 짊어져야 했다.

세희가 돈을 빌린 업체는 대부분 악덕이었고, 돈을 갚지 못하게 된 대가는 비상식적으로 치러질 것이 뻔했다.

연주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연이 말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병원 보안팀장이었던 권현태, 연의 주치의였던 박은주 교수 그리고 권상철, 장세희까지.

어쩌면 잔혹하게 느껴질 설우의 보복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어디 있어요, 제발 알려주세요! 빚쟁이들이 자꾸 찾아온다고요. 다미야, 도와줘. 나 그 사람들한테 끌려가면 정말 끝이야….”

소리를 질러대던 연주는 마음을 바꿔 매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렇게 무시했던 다미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빌 수 있었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 같네. 난 서연주 씨 엄마한테 관심 없어, 그 빚쟁이들한테 한 번 물어보지 그래. 돈을 갚지 못했으니 죽이진 않았을 거야.”

서늘한 목소리에 연주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남자는 분명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끝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리란 걸 깨달은 연주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안 돼. 다미야, 다미야. 우리 엄마 좀 찾아줘.”

“나도 어디 있는지 몰라.”

“나 좀 살려줘, 악!”

“더러운 손으로 어딜.”

무릎으로 기어 와 연의 치맛자락을 잡으려는 연주를 떠민 설우가 뒤에 서 있던 가드에게 손짓했다.

곧장 다가온 가드들은 연주를 멀찍이 끌어냈다.

“오빠, 그만 갈래요.”

“그래, 잠깐만.”

연의 잠시 떼어두고 연주에게 뚜벅뚜벅, 다가간 설우가 허리를 숙이고 속삭였다.

“그러니까, 주식 투자를 하려면 공부를 많이 했어야지. 네 엄마는 때가 되면 보내 줄 테니 잘 도망 다녀. 사채업 하는 놈들한테 잡혀가면 혀를 깨물고서라도 죽고 싶을걸.”

“아아, 아악! 엄마한테 데려다줘! 데려다 달라고!”

발악하는 연주에게 짓던 비정한 미소는 연을 향해 돌아섬과 동시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줌마가 빚을 졌어요?”

“응, 네 돈을 빼앗아 쓰고도 부족했나 봐.”

“연주한텐 뭐라고 한 거예요?”

“다시 찾아오면 너희 가족 다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그 인간들이 너한테 한 짓은 범죄야.”

법의 심판으로 부족한 엿 같은 범죄.

“오빠가 무섭게 말했으니까 다신 안 올 거예요.”

“그렇겠지. 안 추워?”

“응, 안 추워요.”

“배고프겠다, 얼른 가자.”

너의 눈을 가리고, 너의 귀를 막아서, 나의 이중적인 모습은 알지 못하게.

그저 다정한 연인으로, 착한 남편으로 남을 거야.

그러니 너는, 영원히 아무것도 모른 채 내 품에서 예쁘게 웃길.

***

이든과 첸이 돌아온 펠리체는 언제나 소란스러웠다.

때늦은 폭설로 넓은 정원에 두텁게 눈이 쌓인 오늘은 더더욱 그랬다.

“오빠! 이거 봐요, 눈이 내 발을 먹었어요. 세상에, 이렇게 많이 오다니.”

“딱 30분이야, 주머니에 핫팩 자주 만지고.”

설우의 잔소리를 흘려들은 연은 눈이 소복이 쌓인 잔디 정원 위에 첫 발자국을 새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발자국이 찍힐 때마다 뽀드득 소리를 내는 눈이 반가웠다.

어릴 땐 겨울 내내 눈 속에 파묻혀 놀았는데. 오랜만에 만난 하얀 세상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이든, 첸. 이거 하나씩 받아요.”

두 손 가득 눈을 집어 조물거리던 연이 동그랗게 뭉친 눈덩이를 내밀었다.

“뭐? 던지라고?”

“굴려서 눈사람 만들어 줘.”

제주도에 눈이 오면 눈사람의 몸통은 설우가, 눈사람의 머리는 준이 만들어주었다.

오른손을 칭칭 감은 붕대 때문에 눈을 굴릴 수 없는 설우가 제 역할을 넘기며 아쉬워했다.

“아아, 얼마나 크게.”

“많이. 오빠가 아직 손이 아프니까 이든이랑 첸이 해주세요.”

연이 두 팔을 양껏 벌리며 웃었다. 추운 날씨에 붉어진 볼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멀찍이 떨어져 눈덩이를 굴리던 이든이 연의 목도리를 여며주는 설우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눈덩이 하나를 더 만들었다.

“연이한테 던질 건 아니겠지?”

“살살 던질 거야, 반응 궁금하지 않아? 씩씩거리면서 뛰어올 거 같은데.”

“귀엽긴 하겠지만 설우가 널 죽일 거야.”

“욕은 내가 먹을 테니 형은 눈 호강이나 하시라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눈덩이를 제법 키운 이든이 살금살금 연의 뒤로 다가갔다.

멀리서 세게 던지면 아플 테니 가까이서 던져야지.

연을 마주 보고 있던 설우가 인기척을 느꼈을 땐 이미 이든의 손에서 눈덩이가 떠난 후였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연의 뒤통수에 명중한 눈덩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

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새끼가 또.

이든을 향한 욕설을 속으로 참아낸 설우가 연의 머리카락에 묻은 눈을 재빨리 털어주었다.

뒷덜미를 잡아다 눈에 처박고 싶지만, 이든은 벌써 멀리 도망친 후였다.

“괜찮아?”

“이든이죠?”

“응.”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범인을 찾아낸 연이 잠시 심호흡을 하고 이든을 향해 달려나갔다.

“하하하! 꼬맹이 달리기 느린 것 봐. 그렇게 뛰어서 언제 잡으려고?”

“눈사람 만들어달라니까 왜 눈을 나한테 던져요!”

연은 최선을 다해 쫓았지만, 긴 다리를 휘저으며 뛰어다니는 이든을 잡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잡혀 주면 뭐 해줄 거야?”

“잡히면 눈 속에 묻어줄 거예요. 빨리…. 으악!”

“연아!”

쌓인 눈을 헤치고 달리던 연이 결국 철퍼덕, 앞으로 고꾸라졌다. 안타깝게도 눈 속에 묻힌 건 그녀였다.

설우는 물론, 이든과 첸까지 후다닥 달려왔다.

“푸흐, 하하하! 연아, 괜찮아?”

“크, 크흡! 아, 웃겨!”

얼굴을 눈밭에 묻은 채 움직이지 않는 그녀를 뽑아 일으킨 설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든은 배를 잡고 뒹굴 기세였다.

모자와 목도리는 눈으로 범벅이 되었고 이미 얼어있던 볼과 함께 코끝까지 빨간 물이 들었다.

눈썹에 묻은 눈을 닦아낸 연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다 이든에게 눈을 마구잡이로 뿌려댔다.

작은 두 손에 잡힌 눈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울 필요가 있냐고.

버둥거리는 연을 보는 세 남자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미안, 미안! 푸흡…!”

“왜 자꾸 웃어요!”

“웃긴데 어떡해. 종이 인형이 날아가는 줄 알았네.”

“연아, 그만 뿌리고 이리 와. 추워.”

두 팔을 벌린 설우가 제가 입은 두꺼운 패딩 속으로 연을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니트 위로 얼굴을 비비며 물기를 닦아낸 연이 따뜻한 품에 안겨 짧은 휴식을 취했다.

원하는 만큼 장난을 친 이든은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눈덩이를 부풀리기 시작했고 빠르게 몸통을 완성한 첸은 커다란 눈덩이를 톡톡, 치며 모양을 다듬었다.

천진한 연 덕분에 동심으로 돌아간 첸과 이든은 눈사람에게 눈 코 입을 달아주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천천히 녹으렴.”

반들반들한 눈사람의 머리를 두드린 연이 뒤로 물러나 설우의 손을 잡았다.

이든과 첸도 옆으로 나란히 서서 눈사람을 구경했다.

“꼬맹이, 눈사람은 소원 같은 거 안 들어줘?”

“그럴걸요? 이든 소원 있어요? 뭔데요, 내가 들어줄게요!”

“우리 넷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와, 네가 그런 소원도 빌 줄 알아?”

첸이 오버스럽게 입을 벌렸다.

“이루어질 거예요. 나 이제 밤에 잘 자요, 오빠도 안 괴롭히고.”

연이 히죽 웃으며 상처들이 사라져 말끔해진 설우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넷이 같이 빌어볼까.”

“그래요! 넷이 같이 빌면 들어줄지도 몰라.”

“난 좀 강력하게 빌어볼게, 비속어를 섞어서.”

“그러지 말아요, 이든. 착하게 기도해요. 눈사람한테 소원 비는 건 처음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야.”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 연을 보고 웃던 세 남자도 차례로 눈을 감았다.

촛불 꽂힌 케이크든, 십자가든, 눈사람이든, 일단 빌고 보자고.

‘우리 연이가 지금처럼 건강하게 해주세요.’

세 남자는 연의 안녕을 기원했고,

‘오빠를 아프게 하지 않게, 첸과 이든을 걱정시키지 않게 해주세요.’

연은 세 남자가 저로 인해 다시 힘들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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